[!INFO] 책 정보
- 저자: 저자/유시민
- 번역: 번역/유시민_지음
- 출판사: 출판사/돌베개
- 발행일: 2021-01-18
- origin_title: -
- 나의 평점: 9
- 완독일: 2023-11-28 00:00:00
나의 한국현대사

1. Befor Qustion
2. Synopsis (개요)
2.1 주제
2.2 기획 및 지필 의도
2.3 주요 등장 인물
2.4 전체 줄거리
3. After My Idea
3.1 Insight
- 우리나라가 현재의 민주주의 모습을 가지기 까지 흘렸던 피와 수많은 사람의 피눈물이 있었다
- 짧은 시간에 경제 성장을 이룬 우리나라의 한계일것이다
- 노동자와 인권, 정치적 성숙, 지역주의, 남북간의 이념 논쟁,수구세력의 권력 등 은 아직도 진행형이다
- 얼마나 더 많은 피와 눈물이 있어야 할까.
- 갈길이 아직도 멀다 . 아 대한민국이여!!
지금읜 40 50대가 해야할 일은 무엇인가 우리의 미래를 이해 우리는 시스템을 만들어 놔야 한다. 위대한 지도자는 없다. 시스템을 만들어야 한다. 이전 세대가 살아온 시스템에서 업그레이드를 해야한다 저항하는 수구세력을 어떻게 넘을지가 고민이다
3.2 After Qus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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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y) 이 책의 제목을 이렇게 지은 이유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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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w) 어떻게 설명하고 있는가? 어떻게 하라고 하는가? 어떻게 해야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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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ere) 어느 곳에서 쓴 책인가? 어느 것을 위해 쓴건인가? 어디로 가야하는가? 어디에서 읽어야 하나? 그곳은 어떤 곳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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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en) 이책은 언제 쓰여졌는가? 시대적 배경은 무엇인가? 언제를 기준으로 쓰였는가? 언제 할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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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o) 저자는 누구인가? 주인공은 누구이고 어떤 사람들이 나오나? 누구를 위해 저자는 말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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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y) 이책을 통한 질문을 만들기
- 질문 1.
- 질문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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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at) 이 책에서 말하는 주제라는 무엇?
- 알게된 것은 무엇인가?
- 해야할건 먼가?
- 다른 책과 다른 점은 먼가?
- 이 책의 특징은 먼가?
3.3 Top 3 Highlight
190 우리의 민주화 역사는 자유에 대한 욕망과 꿈, 정의를 향한 열정과 헌신, 존엄을 지키기 위한 분투와 희생으로 엮은 여정이었다 그러나 우리는 그 길을 다 걷지 않았고 민주주의는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
4. Key Word 책에서 뽑은 키워드 정리
4.1 실패한 4.19 혁명
민족사적 정통성도 없고, 경제적 효율성도 없으며, 민주적 정당성마저 없는 정부가 들어선 나라는 정통성 있는 국가일 수 없다. 결국 국민들이 저항권을 행사하기로 결심했다. 역사적 대의명분과 경제적 효율성은 당장 어쩌지 못한다 할지라도 최소한 민주적 정당성이라도 가진 정부를 원했기 때문이다. 그것이 4·19혁명이었다.
이미 12년을 집권했던 이승만 대통령은 나이 80이 넘어서 또다시 대통령 선거에 나섰다. 선거일은 1960년 3월 15일이었다. 그런데 가장 강력한 경쟁자였던 민주당 조병옥 후보가 선거 직전 지병으로 별세하고 말았다. 현직 대통령이 단독 후보가 되었기 때문에 대통령 선거는 하나마나였다. 문제는 자유당 이기붕 후보와 민주당 장면 후보가 맞붙은 부통령 선거였다. 4년 전 부통령 선거에서 이기붕 후보는 장면 후보에게 졌다
혁명의 첫 징후가 나타난 곳은 대구였다. 1960년 2월 28일 일요일에 수성천변에서 민주당 장면 부통령 후보 연설회가 열렸다. 그런데 대구의 국공립고등학교에 등교령이 내렸다. 영화 관람이나 토끼 사냥을 명분으로 삼았지만 일요일 등교령의 목적은 학생들이 장면 후보 연설회에 가지 못하게 하는 것이었다. 경북고, 대구고, 경북대사대부고, 경북여고, 대구여고, 대구공고, 대구농고, 대구상고 등 시내 거의 모든 고등학교 학생들이 교사들의 만류를 뿌리치고 밖으로 뛰쳐나왔다. 그들은 독재와 부정선거를 규탄하는 함성을 내지르면서 대구 중심가를 달렸다. 이것이 대구 시민들이 자랑하는 ‘2·28학생의거’다.
3·15선거는 단순한 부정선거가 아니라 완전한 조작선거였다. 금품으로 유권자를 매수하는 것은 기본이었다. 정치깡패를 동원해 야당 선거운동을 방해했으며 3인조, 5인조로 함께 투표하면서 누구를 찍는지 서로 확인하게 했다. 야당 투표 참관인을 내쫓고 공개투표를 하게 했다. 이기붕에게 기표한 투표용지를 무더기로 집어넣었다. 이 모든 과정에 내무부 공무원과 경찰이 개입했다. 부정선거를 너무 열심히 한 탓에 이기붕 득표율이 100퍼센트에 육박했고 이기붕의 득표수가 유권자 수보다 많은 곳도 허다했다. 내무부장관 최인규는 긴급지시를 내려 이기붕의 득표율을 79퍼센트로 ‘조정’했다.
민주당은 3·15선거를 국민주권을 강도질한 부정선거로 규정하고 원천무효를 선언했다. 곳곳에서 부정선거를 규탄하는 시위가 벌어졌다. 경상남도 마산 시위가 특히 격렬했다. 그런데 이날 시위에 나갔던 고등학생 김주열 군이 행방불명되었다. 27일이 지난 4월 11일, 그는 마산 중앙부두 앞바다에 시신으로 떠올랐다. 로켓 모양의 최루탄이 눈에서 뒷머리를 관통한 채 그대로 있었다. 격분한 시민들은 격렬한 시위를 벌였고 경찰서 무기고에서 수류탄을 탈취해 경찰서장실 앞에 터뜨리는 사건까지 일어났다. 부정선거와 인권유린을 규탄하는 시위가 전국으로 확산되자 정부는 이 시위를 ‘공산당 조직이 조종한 폭동’이라고 비난했다
4·19혁명의 불길을 피워 올린 것은 고등학생들이었다. 대학생들은 수많은 중고등학생이 체포되고 맞고 다치고 죽은 다음에야 집단으로 투쟁에 참여했다. 대표적인 사례가 고려대학교 학생시위였다. 4월 18일 오후 고려대학교 학생 3,000여 명이 지금은 서울시의회로 쓰는 당시의 국회의사당 앞에서 연좌시위를 벌였다. 평화로운 집회였다. 그런데 대한반공청년단 깡패들이 대오를 지어 학교로 돌아가는 학생들을 종로 4가 천일백화점 근처에서 습격했다. 그들은 각종 흉기를 마구 휘둘러 유혈이 낭자한 참극을 벌였다. 이날의 투쟁을 기억하기 위해 고려대학교 학생들은 지금도 해마다 4월 18일에 수유리 일대를 뛰는 마라톤 행사를 한다.
계엄사령관 송요찬 장군이 군의 선제발포를 공개적으로 금지했다. 이승만 정권을 지켜줄 의사가 없다는 뜻을 밝힌 셈이었다
4월 25일에는 대학교수들이 거리로 나왔다. 매카나기 주한 미국대사가 이승만 대통령을 찾아가 하야를 권고했다. 법무부장관 권승렬, 외무부장관 허정도 하야를 요청했다.
4월 26일 오후, 마침내 대통령 담화가 나왔다. 이승만 대통령은 “국민이 원한다면 대통령직을 사임하겠다”고 하면서 “38선 이북에서 우리를 침입코자 공산군이 호시탐탐하게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명심하라”고 덧붙였다.
이승만 대통령의 양자였던 육군 소위 이강석은 4월 28일 새벽 아버지 이기붕, 어머니 박마리아, 남동생 이강욱을 권총으로 살해하고 자살한 것으로 발표되었다. 주한 미국대사의 도움을 받아 비밀리에 하와이로 간 이승만은 조용히 여생을 보내다가 1965년 7월 세상을 떠났다.
의의
민중이 궐기해 권력을 교체한 민주주의 정치혁명이었지만 권력주체를 만들지 못했기 때문에 , 자유가 주어진 것 말고는 바뀐게 별로 없었다
4.2 성공한 쿠테타 5.16
#1961년 5월 16일 새벽, 제2군사령부 부사령관 박정희 소장 3,500명 무장병력을 이끌고 한강을 건너 서울에 들어와 정부청사,언론기간 점령
미국 대사관과 미8군은 쿠데타 정보를 사전에 입수하고 있었으며, 윤보선 대통령과 장면 총리는 여러 차례 정보보고를 받았다. 하지만 그들은 미군이 있으니 쿠데타를 할 수 없을 것이라면서 아무런 조처를 취하지 않았으며, 쿠데타가 일어난 후에는 마치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행동했다. 장면 총리는 내각과 함께 사퇴해버렸고 윤보선 대통령은 병력을 동원해 쿠데타군을 진압하자는 맥그루더 미8군사령관의 강력한 제안을 거절했다. 남북분단과 이념적·군사적 대결상태가 계속되고 있는 상황에서 국군이 유혈내전을 벌이는 사태를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그는 군사혁명위원회가 하야를 만류하자 아무 실권도 없는 대통령직에 그대로 머물면서 쿠데타를 사실상 묵인했다.
5·16은 단순히 제2공화국을 무너뜨린 것이 아니라 4·19가 만든 모든 것을 파괴해버렸다. 그러나 4·19혁명 그 자체까지 죽여 없애지는 못했다. 적어도 말로는 4·19혁명을 인정했다
5·16의 주체는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10만에서 60만으로 대폭 늘어난 군대를 힘의 원천으로 삼고 있었다. 가난한 농업국가 대한민국에는 기술적 효율성과 합법적 폭력을 보유한 군대조직의 압도적인 힘에 맞설 만한 사회집단이 없었다. 박정희 장군은 이 조직의 힘으로 권력을 찬탈하고 국가 운영에 필요한 정치세력을 규합했다.
박정희
- 일본 사관학교 졸업, 만주군(일본이 만든 중국 만주땅 나라)에서 근무, 해방후 광복군으로 복무하다 귀국
- 한국군(조선경비사관학교 단기 과정 마친후 -육군사관학교) 소령으로 근무
- 1948년 11월 여수순천반란사건(여순사건-반미 조직?) 남로당 가입(둘째 형 권유) 이력으로 감옥에 감
- 남로당 인맥 모두 자백하고, 백선엽 장군과 미국 고문 하우스만이 이승만에게 면죄 요청하여 풀려남
- 한국 전쟁이 터지고, 육군 소령으로 복귀
- 1950년 12월 대구에서 김호남과 이혼하고 육영수와 결혼
- 전쟁 후 1957년 소장 진급, 제7사단장, 육군 제6관구사령관, 부산 군수기지사령부 사령관으로 재직, 제2군사령부 부사령관 근무
- 장면 정부는 그의 좌익 전력 때문에 그를 등용하지 않음
- 5.16 쿠테타 이전 3번이나 더 시도함
김대중
- 강원도 인제군 민의원 보궐선거에서 당선, 2틀 후 5.16터짐
전두환
- 서울대 문리대 학군단 교관, 대위
- 5.17일 박정희 소장을 찾아가 독대함
- 육사생도를 대리고 쿠테타 지지시위를 벌이게 하고
- 하나회라는 육사 출신 장교 사조직을 만들어 대한민국 국군 수뇌부를 장악하고 군사반란과 대학살을 통해 권좌에 오른다
- 인맥이 뛰어난듯하다
- 박정희가 그의 인맥을 보고 그를 등용한듯함 -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이 그를 비서관으로 발탁함
6.책 밑줄 정리 (책 밑줄 전체,page)
토지와 생산수단을 국유화하고 강력한 중앙집권을 실시하는 사회주의는 전체주의로 흐를 위험을 처음부터 내포하고 있었다. 게다가 실제 사회주의 혁명은 개인주의와 민주주의 문화 전통이 거의 없었던 나라에서 먼저 일어났다. #소련 사회주의는 스탈린 개인숭배와 결합했고 #중국 사회주의는 마오쩌둥 개인숭배로 흘렀으며 #북한 은 ‘위대한 수령’ 김일성 개인숭배로 나아갔다. 김일성 주석은 항일투쟁 경력, 공산당 당원 자격, 소련 점령군의 후견, 대중적 명성, 연대조직의 지지, 육체적 활력 등 여러 면에서 우세했기 때문에 권력을 장악할 수 있었다.* 그는 한국전쟁 이후 남로당 출신 박헌영을 비롯한 경쟁자들을 모조리 숙청했다. 교조주의를 청산한다면서 또 다른 교조인 주체사상을 내세웠다. 주체사상은 마르크스주의와는 관계가 없는 극단적 관념론이다. 3대째 생물학적 유전자를 따라 권력을 대물림하는 나라가 사회주의를 표방한다는 사실을 무덤 속의 마르크스가 안다면 크게 화를 낼 것이다
나는 대한민국현대사를 만든 힘이 #욕망 慾望, desire 이었다고 생각한다. 욕망이라는 단어가 주는 부정적인 느낌 때문인지 사람들은 욕구慾求라는 말을 선호한다. ‘대한민국의 기적’을 만든 힘은 국민이 개별적·집단적으로 분출한 욕망이었다. 세상을 변화시키는 것은 사람의 행동이며, 행동을 일으키는 것은 욕망이다.
대한민국에는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가 거침없이 질주할 수 있는 사회정치적 환경이 조성되었으며 국민들은 개별적·집단적으로 욕망을 실현하는 방법을 신속하게 터득했다.
우리는 경제적·사회적·정치적 폐허에서 출발했다. 40여 년간 제국주의 수탈에 시달린 끝에 민족과 국토가 분단되었으며 정부 수립 직후 전쟁이 터졌다. 전쟁의 포연이 휩쓸고 지나간 대한민국에는 도덕적·정치적 권위와 경제적 힘을 가진 지배층이 존재하지 않았다. 중세 지배층이었던 조선의 왕실과 사대부, 양반계급은 망국亡國과 함께 무너졌으며, 3·1독립투쟁의 힘을 받아 중국 상하이에 임시정부를 세운 독립투사들은 조선왕조 복원이 아니라 새로운 민주공화국 수립을 선포했다.* 조선의 지배층은 일제의 억압에 굴복하거나 협력함으로써 도덕적 권위를 상실해버렸다. 혁명이 아니라 망국이 봉건체제를 해체한 것이다. 수많은 민족지사가 중국과 러시아로 건너가 조국 광복을 위해 목숨을 걸고 싸웠지만 안타깝게도 40여 년의 간난신고-갖은 고초를 겪어 몹시 힘들고 괴로움- 를 이겨내지 못했다. 일제강점기에 재산을 모은 기업인들이 있었지만 해방공간의 사회정치적 혼란과 한국전쟁을 견뎌내지 못했다. 일제하에서도 봉건적 특권을 유지했던 지주계급은 토지개혁으로 해체되고 말았다. 한국전쟁 이후 대한민국은 권위와 힘을 가진 지배층이 존재하지 않는 ‘그라운드 제로’ 사회였다.
만약 우리가 신탁통치를 받아들여 좌우가 동거하는 통일정부를 만들었다면 한반도 전체가 공산화되었을까? 단정할 수 없지만 가능성을 배제할 수도 없다. 잠재적인 위험은 있었다고 보는 게 맞을 것이다.
공산화의 위험을 감수하면서 통일국가로 가는 길과 북한을 공산주의자들에게 넘겨주고 남한에 민주주의 국가를 세우는 길이 있었다. 어떤 경우에도 분단을 거부한 민족주의자는 전자를 선택했지만 철저한 반공주의자들은 차라리 후자가 낫다고 판단했다.
국가는 국민이 선택하고 인정해야 진정한 국가이다 이승만처럼 본인의 입으로만 떠들고, 행동은 사익을 위한 행동들로 인해 국민들은 그를 인정할 수 가 없다
이승만 대통령이 대한민국을 정통성 있는 국가로 만들었다면 이런 주장도 그나마 어느 정도 설득력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민주공화국의 대통령으로서 마땅히 해야 할 일을 제대로 하지 않았으며 절대 하지 말았어야 할 일은 너무 많이 했다. 국가의 정통성은 외부에서 오는 것이 아니다. ‘유엔이 인정한 한반도의 유일 합법정부’라는 주장은 정치적 수사修辭에 지나지 않았으며 남북 모두 유엔 회원국이 된 후에는 그런 의미조차 잃었다. 국가의 정통성은 특정한 이념에서 생기는 것도 아니다. 아무리 빛나는 이념을 내세운다고 해도 사회 구성원 다수가 인정하고 수용하지 않으면 소용이 없다. 국가의 정통성은 내부에서 형성된다. 내세우는 이념이 무엇이든 국민이, 민중이, 인민이, 또는 대중이 그 나라의 국민임을 기꺼이 받아들일 때, 국가의 결정에 자발적으로 참여하고 복종할 때, 외부의 침략과 내부의 무질서에 대항해 공동체를 지키려고 헌신하려는 태도를 보일 때, 그 국가는 정통성 있는 국가가 되며 자연스럽게 국제사회의 인정을 받는다.
대한민국 제헌국회는 1948년 9월 반민족행위처벌법(반민법)을 제정하고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와 특별경찰, 특별검찰, 특별재판소를 설치했다. 일제 군대, 경찰, 행정기관의 고위직을 지냈거나, 지위가 높지 않아도 독립운동을 탄압하는 데 악명이 높았거나, 관직은 없었지만 유명 지식인으로서 일본 왕과 조선총독부를 찬양하면서 징용·징병과 근로정신대 등에 지원하라고 선동했거나, 일제의 침략전쟁 군비조달에 큰돈을 기부한 기업인들이 용의자였다. 반민특위는 동기가 어떠했든 상관없이 객관적으로 드러난 지위와 활동내용을 기준으로 조사대상자를 선정했다.
반민특위는 일단 682명을 조사해 559명을 특별검찰에 송치했다. 특별검찰이 그중 일부를 기소하자 특별재판소가 재판을 열었다. 그런데 이승만 대통령이 국회가 헌법의 삼권분립 정신을 해친다면서 반민특위활동을 방해하기 시작했다. 그 절정은 1949년 1월 반민특위가 노덕술을 체포한 사건이었다.
이승만 대통령은 노덕술을 즉각 석방하고 반민특위 관계자를 처벌하라고 지시했다. 그에게 노덕술은 수많은 독립운동가를 체포해 악랄하게 고문했던 일제 특고형사가 아니라 투철한 반공정신으로 공산당을 때려잡는 대한민국의 경찰관이었다. 노덕술이 국회보다 더 중요했다.
이때 살아남은 노덕술은 후일 민주화운동을 탄압하고 죄 없는 사람들을 고문해 반국가 인사 또는 간첩으로 조작하는 고문수사의 노하우를 대한민국 경찰과 정보기관에 전수했다. 1985년 민주화운동청년연합 김근태 의장을 참혹하게 고문한 이근안과 1987년 서울대생 박종철 씨를 죽인 치안본부 대공분실의 형사들은 모두 노덕술의 후예였다고 보면 될 것이다
이승만 대통령은 자신이 직접 특경대 습격을 지시했다고 한 데 이어, 반민특위활동이 민심을 해치고 있어서 특경대를 해산하겠다는 담화문을 냈다. 경찰이 특별조사위원과 특별검찰관의 집을 수색하고 사무국과 재판부의 서류를 탈취했다. 겁을 먹고 굴복하는 국회의원이 늘어났다.
결국 국회는 공소시효를 단축하는 반민법 개정안을 의결했다. 일을 할 수 없게 된 김상덕 반민특위 조사위원장과 특별조사위원 전원, 일부 특별검찰관과 특별재판관들이 사표를 냈다. 국회는 친일파 비호세력을 주축으로 새로운 특위를 구성했다. 반민특위는 이렇게 막을 내렸고, 국회는 1951년 반민법을 폐지했다. 처벌받은 사람은 단 하나도 없었다.
박정희 시대 한국 경제는 영국, 프랑스, 미국 등 자본주의 선진국과 제국주의 일본, 히틀러의 독일, 스탈린의 소련을 절반씩 닮은 체제였다. 다시 말해서 사유재산을 인정하는 자본주의 기본질서에 중앙통제식 계획경제를 결합한 혼합형 경제체제였던 것이다. 오늘날 중국의 경제체제도 그와 비슷하다. 중국공산당의 경제관료들이 한국 경제의 발전과정을 면밀히 연구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사회주의든 자본주의든 개발독재는 똑같은 개발독재다. 중국 정부의 최고위인사들이 박근혜 대통령에게 보인 인간적 호감은 그런 맥락에서 이해하는 게 맞을 것이다.
#민주주의 는 최선의 인물이 권력을 장악해 최대의 선을 실현하도록 하는 제도가 아니다. 최악의 인물이 권력을 잡아도 악을 마음껏 저지르지 못하게 하는 제도다. 민주주의는 현실에 존재하는 구체적인 악을 최소화함으로써 사회를 지속적으로 개량해나가는 데 필수불가결한 전제조건이다.
민중의 저항권 행사
- 3.1 운동 - 민족해방
- 4.19 혁명 - 민주주의 정치혁명
- 1987년 6월 민주항쟁
관련 책 한국민주화운동사 1 - 제1공화국부터 제3공화국까지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연구소 (엮은이)돌베개2008-12-09
252 민주적 제도가 있다고해서 민주주의가 이뤄지지는 않는다 그에 맞는 생각을 하고 그에 맞는 행동을 해야 성숙한 민주사회를 만들수 있다
254 직선제 대통령 선거 노태우 36.6% 김영삼 28.0%,김대중 27.1%,김종필 8% 의 야권 분열로 정권교체 실패
424 우리에게 남겨진 미래 과재
- 수명 연장과 저출산의 인구구조 변화
- 산업,주택, 금융,노동시장, 국민건강보험,국민연금 사회보험
- 에너지 가격 상승
- 위대한 지도자 는 답이 아니다
#1945년 12월 28일 모스크바에 모인 미국, 소련, 영국의 외무부장관들은 조선이 정통성 있는 정부를 수립할 때까지 중국을 포함해 네 나라가 신탁통치를 하자고 합의했다. 이번에도 우리 민족의 뜻은 고려대상이 아니었다
#1948년 5월 10일 한반도의 북위 38도 이남지역에서는 유엔 감독 아래 국회의원 총선이 실시되었다. 이승만은 제헌의회 의장이 되었다. 제헌의회는 대한민국 헌법을 채택했고 #1948년 7월 20일 이승만을 대통령으로 선출했으며 #1948년 8월 15일 이승만 대통령은 대한민국 정부 수립을 선포했다
#1948년 8월 25일 북조선에서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선거를 실시했다. 유권자 대부분이 투표했고 단독후보에 대한 찬성률도 거의 100퍼센트였다. 최고인민회의는 인민공화국 헌법을 채택했으며 #1948년 9월 9일 김일성을 수상으로 하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를 수립했다.
#1949년 6월 26일 안두희 경교장에서, 삼팔선을 베고 죽을지언정 민족의 분단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한 김구 선생을 암살했다. 이승만 정권의 소행임을 암시하는 정황이 많았지만 안두희는 입을 다문 채 죽었고 배후는 끝내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았다
#1960년 4월 19일 혁명 - 이승만 대통령 내려옴 #1961년 5월 16일 쿠테타 - 박정희 쿠테타로 독재자 등륵
#1964년 6월 3일 6.3항쟁 대한민국에서 일본과의 국교 정상화에 반대하여 일어난 반일 항쟁.
#1964년 8월 14일 6.3항쟁 주도자들잡아 북한지령 국가반락 협의 씌운 사건 1차 인민혁명당 사건 증거안나옴
#1964년 ~ #1966년 배트남 군대 파견 미군 협력 강화
#1972년 7월 4일 남북공동성명 - 자주.평화.민족대단결 3대원칙 김일성,박정희 협의
#1972년 10월 17일 유신큐테타 남북대화통을 위한 냉전시대 헌법 뜯어고친다는 명목, 모든 정치활동 금지, 국회 활동 금지,군 동원 언론,정부,민간 ,,주요시설에 투입. 비상계엄령
#1979년 10월 부산마산 학생과 시민의 시위 궐기 ‘부마항쟁’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암살 -서울 궁정동 안전가옥 만찬당에서 김재규 중앙정보부장, 차지철 경호실장
#1979년 12월 6일 최규하 국무총리 -10대 대통령으로취임
#1979년 12월 12일 전두환, 노태우 군사 반란
- 12·12 군사 반란(한국 한자: 12·12 軍事反亂) 또는 12·12 숙군 쿠데타는 1979년 12월 12일, 전두환과 노태우 등을 중심으로 한 하나회 세력이 최규하 대통령의 승인 없이 계엄사령관인 정승화 대한민국 육군 참모총장, 정병주 특수전사령부 사령관, 장태완 수도경비사령부 사령관, 김진기 육군 헌병감 등을 체포한 사건이다
- 보안사령관 전두환은 12·12 군사 반란으로 대한민국을 장악하고 정치적인 실세로 등장했다. 이후 1980년 5월 전두환을 중심으로 하는 신군부는 5·17 쿠데타를 일으켰다. 5·17 쿠데타에 반항한 5·18 광주 민주화 운동에 대해 총을 들고 일어난 폭동으로 생각하여 계엄군를 보내서 학살과 진압으로 강경 대응했다. 전두환은 8월 22일에 육군 대장으로 예편했고 1980년 9월 1일 대한민국 제11대 대통령이 되었다
#1980년 5월 17일
- 5·17 쿠데타는 1980년 5월 17일 전두환, 노태우를 비롯한 하나회(신군부) 인사가 정권 장악을 위해 주도한 비상 계엄 확대 조치에 의해 발생한 사건이다.
- 신군부는 시국을 수습한다는 명목 아래 1980년 5월 17일 24시부터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하면서 정당 및 정치활동 금지·국회 폐쇄·국보위 설치 등의 조치를 내리고, 영장없이 학생·정치인·재야인사 2699명을 구금했다.
- 5·17 비상계엄 전국확대 조치로 실권을 장악한 하나회는 비상계엄 기간 제5공화국 정권을 창출하는 과정에서 인권유린·헌정파괴 행위를 자행했다.
- 5·17 내란 사건으로도 불리며 이 쿠데타에 대한 항의로 일어난 5·18 광주 민주화 운동에 대한 폭동적 시위진압을 이 사건과 묶어서 1997년 12.12, 5.18 사건 재판 당시에는 5·18 내란 사건으로 불리기도 했다.
- 서울의 봄이라고 불리는 기간은 10·26 사건부터 이 사건이 발생한 시간까지를 가리킨다.
#1987년 1월 14일 박종철 고문치사사건 남영동 치안본부, 물고문으로 사망 , 중앙일보 보도, 동아일보 상세 보도 (현재랑 다른 동아일보)
#1987년 6월 항쟁
-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 1987년 1월 14일,
- 전두환 정권의 호헌 조치 : 1987년 4월 13일
- 이한열 최루탄 피격 사망 사건 : 1987년 6월 9일
- 6월 10일 : 6·10국민대회 개최
- 6월 26일 : 전두환의 6·29 선언
- 6월 항쟁의 결과는 다음과 같습니다.
- 대통령직선제 개헌 : 1987년 10월 29일, 국민투표를 통해 대통령직선제가 확정되었습니다.
- 민주화 진전 : 6월 항쟁은 대한민국의 민주주의 발전에 크게 기여했습니다. 이후 대한민국은 민주화의 길로 나아가게 됩니다.
- 국민의 정치 참여 확대 : 6월 항쟁은 국민의 정치 참여를 확대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후 대한민국 국민은 다양한 방법으로 정치에 참여하게 됩니다.
- [1987년 6월 항쟁](1987년 6월 항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