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FO] 책 정보
- 저자: 저자/실비아_나사르
- 번역: 번역/김정아
- 출판사: 출판사/반비
- 발행일: 2013-07-30
- origin_title: Grand pursuit- the story of economic genius/Nasar, Sylvia
- 나의 평점: 10
- 완독일: 2024-07-26 00:00:00
사람을 위한 경제학

1. Befor Qustion
2. Synopsis (개요)
2.1 저자 - 실비아 네이사(Sylvia Nasar)
1947년 독일 바바리아에서 태어나 안티오크 대학에서 문학을 전공했다. 뉴욕 대학원에서 경제학 석사학위를 받은 뒤, 4년 동안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인 바실리 레온티에프의 경제분석 연구소에서 활동했다. 1983년부터 《포춘》의 칼럼니스트, 《유에스 뉴스 앤드 월드 리포트》의 칼럼니스트, 《뉴욕 타임스》 기자로 일했고, 컬럼비아 대학의 저널리즘 대학원 교수로 재직 중이다. 세계적인 베스트셀러 『뷰티풀 마인드』로 전미비평가협회 전기 부문 대상을 수상했다.

2.2 주제
현대 경제학은 어떻게 탄생했는가?
『사람을 위한 경제학』은 인간이 자신의 경제적 운명의 주인이 될 수 있다는 아이디어가 진화하는 과정을 추적한다. 저자에 따르면 이 아이디어는 빅토리아 시대 디킨스의 런던에서 처음으로 잉태되었고, 1차대전 직전의 황금기에 태어났으며 두 차례의 세계대전과 전체주의 정권의 부상과 대공황에 도전받았고, 2차대전 이후 두번째 황금기에 되살아나 현대 세계 경제를 만들어냈다.
이 책에서 저자는 마르크스와 엥겔스, 앨프리드 마셜, 웹 부부, 어빙 피셔와 케인스, 슘페터, 하이에크, 그리고 아마트리아 센에 이르기까지 각자의 기질과 경험 그리고 비범한 천재성으로 인해 새로운 질문을 하고, 새로운 답안을 제시한 사람들을 통해 자신만만했던 19세기의 경제 사상, 두 번의 세계대전과 1930년대 대공황의 시기 등을 다룬다. 이들은 모두 케인스가 인류의 가장 근본적인 정치적 문제라고 부른 것, 곧 경제적 효율, 사회 정의, 그리고 개인의 자유를 조화시키는 과제를 해결하는 데 기여했다.
이 책에서 저자는 자신이 다루는 시대와 자기 주인공들이 느꼈을 감정들을 생생하게 전달하기 위해 문학 작품들을 끌어왔다. 19세기 초 런던의 양극화가 불러일으킬 만한 혐오감을 설명하기 위해 디킨스의 《크리스마스 캐럴》을, 비어트리스 포터 웹의 집착을 설명하기 위해 헨리 제임스의 《어느 여인의 초상》을 동원했다.
2.3 기획 및 지필 의도
2.4 주요 등장 인물
2.5 전체 줄거리
3. After My Idea
3.1 Insight
그들은 그들이 처한 상황에서 모두를 위한, 빈부의 격차를 줄이고, 굶주리는 사람이 없는 정책을 만들고자 노력했다 그런 노력들이 역사를 타고 흐르면서 단단해지고 현대에 이르게 된다 우리는 그것들을 점점더 학문으로 다루게되어 경제학의 고도화에 이르게 되었다
지금의 2024년 포스트 코로나 이후 미국의 5%금리의 정점, 미국의 연준과 재무부의 조치들 대한민국의 한국은행 금리 정책, 정부의 정책들, 일본, 유럽등 그들의 정책들…은 이런 경재학을 해석하고 분석하고 , 현재에 맞는 정책을 마련하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로빈슨 처럼, 지금 돌아보만 어처구니 없는 선택 - 사회주의를 찬양하는 - 하게 되었지만, 그리고 그 선택이 지금은 실패로 알게 되지만, 당시는 그것또한 대안이었을 것이다. 자본주의가 완전하지 않잔은가…
빌헬름 2세로부터 히틀러,스탈린,마오쩌둥 에 이르는 미친 통치자들은 여러 차례 경제적 진리를 무시하고자 했고, 심지어 억압하고자 했다 (695)
우리가 우리의 경제적 환경을 통제해야 하는가, 통제하지 말아야 하는가를 놓고 논쟁할 사람은 이제 없다. 어떻게 통제해야 하는가를 놓고 논쟁할 뿐이다. 696p
2차대전이 종료된 후 20세기 유럽은 어떠했을까 이념 전쟁의 소용돌이로 들어가는 유럽의 상황
이책을 통해 19세기, 20세기의 모습도 볼수 있어서 유익했다.
3.2 After Qus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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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y) 이 책의 제목을 이렇게 지은 이유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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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w) 어떻게 설명하고 있는가? 어떻게 하라고 하는가? 어떻게 해야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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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ere) 어느 곳에서 쓴 책인가? 어느 것을 위해 쓴건인가? 어디로 가야하는가? 어디에서 읽어야 하나? 그곳은 어떤 곳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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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en) 이책은 언제 쓰여졌는가? 시대적 배경은 무엇인가? 언제를 기준으로 쓰였는가? 언제 할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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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o) 저자는 누구인가? 주인공은 누구이고 어떤 사람들이 나오나? 누구를 위해 저자는 말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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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y) 이책을 통한 질문을 만들기
- 질문 1.
- 질문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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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at) 이 책에서 말하는 주제라는 무엇?
- 알게된 것은 무엇인가?
- 해야할건 먼가?
- 다른 책과 다른 점은 먼가?
- 이 책의 특징은 먼가?
3.3 Top 3 Highlight
4. Key Word 책에서 뽑은 키워드 정리
4.1 키워드 1
키워드-제목 1
6.책 밑줄 정리 (책 밑줄 전체,page)
서문: 인류의 9할
제인 오스틴은 18세기 말부터 19세기 초에 살았던 영국 작가입니다. 1775~1817년. 『오만과 편견』은 1796년 쓰였고, 1813년에 공식 발표가 되었어요.
토머스 멜서스는 오스틴과 같은 시대를 살았어요. 1766~1834년.
찰스 디킨스는 1812년에 태어나 1870년까지 살았고요.
오스틴이 죽고 나서 다음 해(1818년) 5월 5일에 1장의 주인공 카를 마르크스가 태어났습니다. (1830년 9월 15일에 영국 리버풀과 맨체스터 사이에 여객용 증기 기관차 노선이 개통된 사실도 언급합니다.)
당신이 지금 들고 있는 이 책은 경제사상의 역사라기보다 경계학이 사람들의 삶을 바꿀 도구라는 생각을 이야기로 푼 것이다. 이 생각은 1 차대전 이전의 황금기에 탄생하여, 파국으로 치달았던 시기에 두 차례 세계대전과 여러 전체주의 정부와 대공황에 의해 도전받았으며, 2차 대전 이후 두번째 황금기에 부활했다.
앨프리드 마셜은 현대 경제학을 오르가난organan(“도구라는 뜻의 고대 그리스에) “이라고 불렀다. 그에게 경계 학은 진리 자체가 아니라 진리를 찾게 해주는 “분석엔진” 곧 끝없는 개선과 조정과 쇄신을 요하는 영원히 완성되지 않을 도구였다. 마셜에 게 배운 존 메이너드 케인스John Maynard Keynes는 경제학을 “정신장치 apparatus of the mind"라고 불렀다 그에게 경제학은 현대를 분석하고 현 대의 가능성을 최대한 활용하는 데 없어서는 안 될 과학적 학문 중 하나였다.
케인스가 “인간 의 정치적 문제"라고 부른 것, 곧 “경제적 효율, 사회적 정의, 개인적 자유라는 세 가지를 어떻게 결합할 것인가.”
라는 문제를 해결할 학문적 도구를 모색하는 사상가였다.
케인스의 첫 전기작가 로이 해러드Roy Harrod가 설명한 것처럼, 케인 스라는 변화무쌍한 인물은 자기가 사랑하고 존경하는 화가들, 작가들, 무용가들, 작곡가들이 “문명의 관리자"라는 역할을 한다고 보았다. 그 가 바란 경제사상가의 역할은 문명의 관리자보다는 낮은 역할, 그러나 문명의 관리자에 못지않게 필요한 역할, 곧 “문명의 가능성의 관리자’ 라는 역할이었다.
인류의 9할이 구래의 운명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는 생각이 빅토 리아 시대 런던에서 힘을 발휘하기 시작했던 것은 상당 부분 바로 그런 관리자들 덕이었다. 이 생각은 마치 물결처럼 밖으로 전파되었으며, 결국 지구상의 많은 사회들을 바꾸어놓았다. 이 생각은 여전히 널리 전파되고 있다.
변화의 핵심은, 변화가 우발이나 우연의 소산이 아니라 인간의 의도와 의지와 지식의 결과라는 것이었다. 13
1막: 희망
프롤로그: 다정 씨 vs. 스크루지
[토머스 로버트 맬서스](토머스 로버트 맬서스) -> [찰스 로버트 다윈](찰스 로버트 다윈) 이 영향 받음
[토머스 칼라일](토머스 칼라일)
[존 스튜어트 밀](존 스튜어트 밀)
[찰스 존 허펌 디킨스](찰스 존 허펌 디킨스)
찰스 다킨스 생각
디킨스는 경제학이라는 과학이 없으면 세계가 굴러갈 수 없다고 보았다. 그는 ‘미래 크리스마스의 유령’이 스크루지를 개심시켰듯 정치경 제학자들을 개심시킬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정치경제학자들이 가 난을 자연현상처럼 다루지 않기를 바랐고, 사람의 의지나 의도를 전혀 중요하지 않게 여기지 않기를 바랐고, 계급이 다르면 이해관계가 상 반된다는 가정을 버리길 바랐다. 특히 그는 정치경제학자들이 “상호적인 설명이든 인내든 배려든, 뭔가….정확하게 수치로 표현될 수 없는 것"을 하기를 바랐다
그는 유명 주간지 <하우스홀드 워즈 hoselbold words>를 창간하면서, 창간사에서 경제학자들에게 경제학을 인간화할 것을 촉구했다. “약간의 인간적 살갖과 살집을 덧붙이고 약간의 인간적 혈색을 가미하고 약간의 인간적 온기를 불어넣지 않는다면 정치경제학 은 앙상한 뼈대에 불과하다.” 28
1장: 새로운 기적의 시대: 엥겔스와 마르크스
[프리드리히 엥겔스](프리드리히 엥겔스) [카를 마르크스](카를 마르크스)
엥겔스는 21개월 동안 영국에서 경영자 수업을 받으면서 경제학이라는 것을 발견했다. 독일 지식인들이 종교에 사로잡혀 있었던 반면에, 영국인들은 모든 정치적, 문화적 사안을 경제적 문제로 바꾸는 추세였다. 35
마르크스도 잉겔스처럼 부르주아 아버지에 반항하는 탕자였고 실제로 방탕한 면모도 있었다. 또한 그도 앵젤스처럼 속물의 시대에 갇힌 느낌으로 살아가는 지식인이었다. 그는 독일의 학문과 문화의 우월 성에 대한 영겔스의 자부심을 공유했고, 모든 프랑스적인 것에 경탄했 고, 영국의 부와 권력에 격분했다. 그러나 마르크스는 여러모로 엥겔스 와 반대였다. 마르크스는 고압적이고 충동적이고 진지하고 학식 있는 인물이었으며, 엥겔스의 말주변, 적응력, 원만한 대인관계 같은 것들과 는 거리가 멀었다. 나이차는 크지 않았지만,(마르크스 쪽이 두 살 반 많았다.) 마르크스는 어린 딸이 있는 유부남이었을 뿐 아니라 학위에 어울리는 대우를 요구하는 칠학박사였다. 거의 나폴레옹 같은, 키가 작고 다부진 체격에. 짙고 검은 털이 뺨과 팔과 코와 귀에 무성했다. (라인신문)에서 마르크스의 보좌역이었던 인물이 회고한 바에 따르면, 그의 “‘눈은 지적 이고 적의 어린 불꽃으로 타올랐고” 그가 대화의 포문을 열 때 즐겨 사 용했던 말은 “내가 당신을 쳐부숴주겠다.“라는 말이었다. 마르크스의 가장 통찰력이 있는 전기작가 중 하나인 이사야 벌린isaiah Berlin이 기록 한 바에 따르면, 그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자기에 대한 신뢰 그리 고 자기의 능력에 대한 신뢰"였다
38 카를 마르크스
우리들 각자는 무슨 일이 일어나야 하는지에 대해 정확한 생각을 갖고 있지 않음을 자인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알고 보면 바로 이 결함이 새로운 운동의 유리한 점이다. 그도 그걸 것이 우리는 도구마를 통해 세계의 행보를 예측하는 것이 아니라 기존의 세계를 비판함으로써 새로운 새계를 발견하고자 한다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처음 정식으로 만난 것은 #1844년 8월 레장스 카페(유럽의 체스 중심지로 유명했던 파리의 카페) 38 마르크스는 엥겔스와 마찬가지로 현대사회를 개혁하기란 불가능하다는 확신과 독일을 신과 전통적 권위로부터 해방시킬 필요가 있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엥겔스는 마르크스에게 프롤레타리아 개념을 소개했다.
산업혁명은 인간이 자연과, 자연의 가혹한 요구에 복종하는 존재라는 인간 실존의 가장 기본적인 전제에 대한 도전이었다. 프로메테우스가 신들에게 불을 훔쳤다면, 산업혁명은 인간이 환경을 통제하도록 부추겼다.
한때 너무 돈에 쪼들렸던 마르크스는 철도사무원에 지원해보기도 했고, (‘악필’이고 영어가 통하지 않는다는 이유에서 불합격했다.) 잠시 미국으로 이주하는 것을 고려해보기도 했다. 다행히도 마르크스는 모래알을 진주로 만드는 굴 같은 사람이었다. 마르크스는 돈 걱정이 시작됨과 함께 경제학에 대한 장문의 논문을 재개했고 그의 공책들은 다시 채워지기 시작했다.그러면서 계속 자기가 “역사라는 똥무더기 위에 앉아 책들을 먹어치워야 하는, 그리고 먹어치운 것을 다른 모양으로 게워내야 하는 기계"가 된 느낌이라고 투덜거렸다. 그러면서 이 걸작의 제목을 정했다. 그것은 『자본』이었다
마르크스가 가장 친한 친구이자 후원자인 엥겔스에게 ‘경치 제학 비판’이라는 걸작이 “거의 완성"되었다고 장담한 지 거의 15년이 지나고 있었다. 그동안 계속 마르크스는 엥겔스에게 이제 곧 “현대사회의 운동법칙을 폭로"할 것이고, 영국 “정치 경제학"의 심장에 비수를 꽂을 것이라고 말하고 있었다. 15년 간 맨체스터에서 뼈 빠지게 일해 마르크스를 뒷바라지한 엥겔스는 초조함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YG https://www.gmeum.com/meet/1093?talkId=63553 프랜시스 윈의 『마르크스 평전』(푸른숲), - 프랜시스 윈의 평전은 가장 평이하고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마크르스 평전입니다. 이사야 벌린의 『칼 마르크스: 그의 생애와 시대』(미다스북스), - 유명한 자유주의 정치철학자 이사야 벌린이 1939년에 펴낸 평전은 나온 지 80년이 지난 지금까지 여전히 관점과 내용 면에서 권위 있는 평전으로 꼽히는 책입니다. 개러스 스테드먼 존스의 『카를 마르크스: 위대함과 환상 사이』(아르테). 난이도는 윈-벌린-존스 순입니다.
마르크스가 1844년에 경제학을 시작하면서 목표했던 일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사는 것이 끔찍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일이 아니었다. (…) 마르크스가 원한 일은 결코 자본주의를 도덕적 근거로 (다시 말해, 기독교적 근거로) 비난하는 일이 아니었다.(…) 마르크스는 자본주의자들을 개심시킬 생각도 전혀 없었다.(…) 그가 쓸 걸작의 주안점은 사유재산 및 자유경쟁 체제는 작동될 수 없으며, 따라서 “혁명은 불가피하다.“라는 것을 “수학적으로” 증명하는 것이었다. 그가 원한 일은 “현대사회의 작동법칙을 폭로"하는 것이었다. 69
제인 오스틴의 생전에는 인류의 9할은 극심한 가난과 평생의 노역을 벗어날 수 없었다. 한 세대 후, 찰스 디킨스는 “우리는 우월한 사회적 조건을 향해서 곧바로 나아가고 있다.“라고 생각했다. 1장
#산업혁명 은 인간이 자연과, 자연의 가혹한 요구에 복종하는 존재라는 인간 실존의 가장 기본적인 전제에 대한 도전이었다 프로메테우스가 신들에게 불을 훔쳤다면, 산업혁명은 인간이 환경을 통제하도록 부추겼다 51
<공산당 선언>이 나온것은 아일랜드 감자기근 둘째 해였으며, 저자들은 국부와 국력이 증대되면서 국민의 상황은 악화된다는 엥겔스의 주장을 반목했다.
🤔 당시는 계급 사회였고, 산업하는 빈부격차를 증가시켰으며, 저소득자들의 삶은 개선 되지 않고, 위생,병원균에 대한 개념도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산업혁명은 부르주아 계급에게 부를 집중 시키고, 도시화로 인한 인구 과밀로 서민의 삶은 더 참혹해 졌다. 이런 사회적인 문제를 진단하고, 개선책을 내놓은 것이, 엥겔스와 마르크스이다. 지금 21세기에는 그들의 사상이 아주 위험해졌음을 알지만, 당시 19세기는 그것이 대안이 될 수 있었다.
(마르크스) 그가 쓸 걸적의 주안점은 사유재산 및 자유경쟁 체제는 작동될 수 없으며, 따라서 ‘혁명은 불가피하다’ 라는 것을 ‘수학적으로’ 증면하는 것이었다 그가 원한 일은 ‘현대사회의 작동법직을 폭로’ 하는 것이었다. …스미스와 맬서스와 리카도와 밀의 학설이 거짓 종교라는 것을 폭로할 수 있을 것이었다. 그는 이 걸작에 ‘정치경제학 비판’이라는 부제를 붙이기로 했다 70
마르크스에게 경제학 이론의 밑그림을 제공한 사람은 저널리스트 엥겔스였다.
마르크스가 헨리 메이휴처럼 책상을 박차고 나와서 주변을 둘러보았거나 자기와 똑같은 문제와 씨름하고 있던 존 스튜어트 밀 같은 명석한 동시대인들과 교류했더라면, 세계가 자기와 엥겔스가 예견했던 방식과는 다른 방식으로 작동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을지도 모른다. 중간층은 사라지기는 커녕 늘어나고 있었다. 73
마르크스는 책상을 박차고 나온 적도 없었고, 영어를 제대로 배우려고 한 적도 없었다. 그의 세계는 그와 생각이 비슷한 소수 망명자들로 한정되었다. 영국 노동계급 지도자들과의 접촉은 피상적이었다. 그는 자기 말에 반박할 수 있는, 자기와 대등한 수준의 사람들에게 자기의 생각을 드러내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 불과 12마일 거리에서 철학자 존 스튜어트 밀, 생물학자 찰스 다윈, 사회학자 허버트 스펜서, 작가 조지 엘리엇 등등의 천재들이 살고 있었지만(그리고 거기서 토론하고 있었지만) 그는 그들과 만난 적도 없었고 학술적 서신을 주고받은 적도 없었다. 그는 공장주의 가장 친한 친구이자 기계화의 참상을 가장 열정적으로 묘사했던 저자 중 한 명이었는데, 놀랍게도 영국의 공장에 가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7576쪽) #소통 #겸손 #협동 #공동체 #교류 #고집 #편견 #자만
마르크스 가족은 가게 위층 방 두 칸짜리 집의 세입자였다가 런던타운하우스에 사는 납세자가 되었다. 마르크스는 자신의 이론에 불편함을 느끼지 않았을까. 자본주의가 작동할 수 없는 체제라는 것을 증명하는 일을 시작하고 20년 만에, 마르크스는 보헤미안에서 부르주아로 진화해 있었다. 78
2장: 프롤레타리아는 존재할 수밖에 없을까?: 앨프리드 마셜
[앨프리드 마셜](앨프리드 마셜)
회사란 137 다킨스,마르크스 - 노동자를 통제 내지 착취하기 위해 존재하는 곳 밀 - 사주를 배불리기 위해 존재하는 곳 마셜 - 생존하기 위해 진화해야 하는 존재. 회사가 경쟁력이 있는 이윤을 내려면 노동자,경영자,공급자,지주,세금 등을 지불한 후에도 남는 것이 있을 만큼 충분한 수익을 창출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경영자들은…더 높은 생산성을 성취할 방법을 끊임없이 찾아내야 했다.
마셜에 따르면, (빈곤)해법은 생산성 증대였다. “생산성 중대의 한 방법은 교육을 통해서 (최대한 광의의) 비숙련, 비효율 노동자가 존재하지 않게 만드는 것이다. 비숙련노동자의 수가 충분하게 감소하면, 비숙련노동을 하는 사람들이 괜찮은 임금을 받게 될 것이다.(이것은 가난에 대한 나의 모든 논의의 핵심이다.) 총생산이 늘지 않는다면 비숙련노동의 임금인상분은 자본과 고급노동으로부터 각출돼야 하겠 지만 노동효율 제고를 통해서 비숙련노동의 감소가 이루어진다면, 생산이 중가할 것이고 나눠먹을 빵도 늘어날 것이다.” 144
마셜의 『경제학 원리』가 마침내 1880년에 나왔을 때, 이 책은 경제학이라는 흔들리는 학문에 새 생명을 불어넣었다. 이 책을 통해서 마셜은 경제학의 지도지이자 정부가 조언을 청하는 권위자로 우뚝 섰다. 『경제학 원리』는 ‘사회주의’를 거부하고 사유재산 및 경쟁체제를 환영하고, 인간과 인간환경의 개선 가능성을 낙관하는 마셜의 태도를 구현했다. 이 책이 그려 보이는 경제학은 도그마가 아니라 “정신장치"였다. ….사유재산 및 경쟁체제 하의 기업은 똑같은 자원으로 (아니면 더 작은 자원으로) 더 많은 제품을 만들어야 한다는 지속적 압력에 노출되어 있고, 사회의 시각에서 볼 때 회사의 기능은 생산성을 제고함으로써 생활수준을 제고하는 것이라는 교훈이었다. ….미국의 생산력 증대가 상상을 초월한 속도라는 명백한 사실은 기업이 (최소한 전체적으로는) 이 사람을 착취해서 저 사람을 배 불리는 일이나 금년이 작년 같고 내년이 금년 같은 공정을 반복하는 일에 그쳐서는 안 된다는 것을 의미했다. 마셜이 공장 견학 중에 특히 인상 깊게 느낀 것은 경영자가 끊임없이 작은 개선 거리들을 찾는다는 것과 노동자 역시 끊임없이 더 나은 기회를 찾고 유용한 기술을 익힌다는 것이었다. …..회사가 경쟁에 직면해 생존하기 위해서는 끝없는 적응만으로는 부족했다. 회사가 가장 생산적인 노동자를 확보하는 경쟁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도 생산성 증대를 통해서 창출된 이윤을 점진적으로 노동자와 공유해야 했다. 밀 등 정치경제학의 아버지들이 부정했던 것이 바로 이 점이다. …증거는 마셜이 옳았음을 확인해주었다. 국내총생산에서 임금이 차지하는 비중은 증가추세였고 임금수준과 노동층 소비수준 역시 증가추세였다 145
빈곤의 원인은 빈곤 이다 - 212
3장: 포터 양의 일과 사랑: 웨브 부부와 복지국가
[비어트리스 웹, 시드니 웹 부부](비어트리스 웹, 시드니 웹 부부)
비어트리스 웨브
3장의 주인공은 비어트리스-시드니 웨브 부부입니다. 아마, 이 책에 실린 수많은 경제학자 가운데 (조앤 로빈슨과 함께) 한국의 독자에게는 제일 생소한 등장인물일 겁니다. 하지만! 1. 비어트리스-시드니 웨브 부부는 흔히 독일 비스마르크가 시작했고 영국의 윌리엄 베버리지가 창안한 것으로 알려진 현대 복지 국가 아이디어를 내놓고, 구체적인 정책으로 구현했던 이들입니다. (복지 국가의 할머니-할아버지?) 2. 저자도 강조하지만, 현대적인 의미의 싱크 탱크 역할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실제로 그것이 가능함을 보였던 이들이고요. (이때 이들에게 가장 영향을 받았던 정치인이 보수당의 제2차 세계 대전 영웅이었던 ‘올드 처칠’이 아니라 자유당의 개혁 정치인이었던 ‘영 처칠’입니다.) 3. 상당한 부와 정치적 영향력으로 오늘날도 명문 대학으로 꼽히는 영국 런던의 런던정경대학(LSE)의 창립자도 이들 부부랍니다. 3장은 이들 부부의 이야기를 남편 시드니 웨브가 아니라 그를 사실상 조종했던(?) 비어트리스 웨브의 시선으로 정리하고 있습니다. https://www.gmeum.com/meet/1093?talkId=63877
비어트리스 포터 (결혼전) 아버지 - 리처드 포터 어머니 - 로런시나 포터 보모 - 마사 잭슨
그녀는 여성적 매력을 인정받고 싶어했던 것에 못지않게 지성적 업적을 인정받고 싶어했다 그녀는 “진정한 목표와 직업"을 원했 고, 그 소망은 해가 갈수록 더 절실해졌다. 그녀는 자기에게 “특별한 사명"이 주어졌다고 믿었고, 자기가 “큰일을 해내는 인생"을 살아야 할 사람임을 의심치 않았다. <미들마치>의 도로시어와 마찬가지로, 비어 트리스 역시 모종의 원칙(“자기 삶을 이성적인 동시에 열정적인 행동으로 가득 채워 줄 무언가”)을 원했다 154
🤔 평범한 삶 - 상류층의 일반적인 무개념에 가까운 여자들의 삶 - 아닌, 무언가 의미있는 삶을 살고 싶어하는 그녀, 격하게 공감된다. 하지만 한편으론,그녀환경과 너무나 많은것이 부족한 내 모습에 핑계를 삶는다.
쓰지 않고서는 못 배길 것 같을 때가 있다. 그럴 때면 나의 비뚤어진 생각들을 누군가에게 쏟아내야 한다. 그 누군가가 나 자신이라고 해도. 158 나는 우리 안에 갇힌 동물 같은 심정이다. 내 지위에 수반되는 사치와 안락과 체면이라는 우리. 161
[1848년 유럽의 혁명](1848년 유럽의 혁명)
[허버트 스펜서](허버트 스펜서) 와 포터가의 교류활발, 비어트리스 와 친함
[앨프리드 마셜](앨프리드 마셜) 과 옥스퍼드에서 만나고, 그녀의 <여공의 일기>를 흥미롭게 읽었다고, 앞으로 계획에 대한 조언도 해준다
시드니 웨브
- 조지 버나드 쇼 와 가장 친한 친구
- 연극 평을 엄청나게 많이 쓰고
- 페이비언들의 홍보
- 런던 주식중개인 이력
- 경제학 공부 , 자유기업 체제 추진
[윈스턴 처칠](윈스턴 처칠) 웨브 부부읜 모임 - 싱크탱크의 시초가 된다 - 에 참석을 항상 원하는 사람이었다
정부 안정망, 곧 현대 복지국가라는 개념의 발명자가 있다면 그것은 비어트리스 웨브이다. 그녀는 1943년 세상을 떠나기 얼마 전에 과거를 돌아보면서 “우리는 미래 세대의 공급책이 될 수 있는 것은 정부뿐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요컨대 우리는 국가의 새로운 형태를 인식한 것이다. 이러한 국간ㄴ ‘살림국가house-keeping state’ 라고 말할 수 있으며, ‘경찰국가’와는 구별된다” 라고 흡족해했다. 211
정부 안전망 개념의 맹아가 싹튼 곳은 비어트리스와 시드니의 노동 조합 연구사 <산업민주주의> 였다.
규제가 없다면, 직종에 따라서 국민 전체에게 해가 되는 고용조건들이 나타나는 경향이 있다.“라고 밝히면서, 마르크스와 밀이 가정했던 것과 달리, 정부가 임금 및 노동조건의 최저선을 강제하는 것은 생산력이 순조롭게 증대됨으로써 실질임금과 생활수준이 높아지는 것과 본질적으 로 배치되지는 않는다고 주장했다.17 그들이 보았을 때, 규제는 사업에 일정한 비용을 부담케 하지만, 산업재해를 감소시키고 노동자들의 식 생활과 집중력을 향상시키므로 결국은 이익이었다. 민간기업에 대한 정부의 규제력을 크게 확대한다는 그들의 생각이 임금인상과 노동조건 개선을 위해 싸울 자유를 일차적 목표로 삼는 노동조합 지도자들의 생각을 휠씬 뛰어넘는다는 것은 그들 자신도 인정한 바였다. 212
웨브 부부의 1908년 <소수파 보고서> 에 요람에서 무덤까지 라는 체제의 목표 “남녀 불문, 계급 불문하고 모든 사람에게 열려 있는 …국민 최저치의 문명생활을 확보하는 것이었다. 우리가 말하는 국민 최저치란, 어릴 때는 충분한 영양과 교육, 건강할 때는 생활임금, 아플 때는 치료, 장애가 있거나 고령일 때는 생계보장이었다” 214
4장: 부의 과학: 어빙 피셔와 통화정책
비어트리스 부부는 미국을 여행한다
예일 경제학과 신참교수 [어빙 피셔](어빙 피셔)를 만난다 228 [앨프리드 마셜](앨프리드 마셜) 과 프랑스 수리경제학자 레옹 발라 는 그를 천재라고 했다
아버지 피셔는 어빙이 목사가 되길 원했지만 “하고 싶은 일이 너무 많다! 하고 싶은것을 이룰 만한 시간이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항상 든다. 많이 읽고 싶다. 많이 쓰고 싶다. 돈을 벌고 싶다” 피셔가 선택한 것은 부의 과학 이었다 - 그는 궁핍하게 어린 시절을 보내고 있었다 -
예일 대의 윌리엄 그레이엄 섬너 교수의 강의를 모두 듣는다 섬머는 “사상사를 통틀어 가장 철저하게 진보적인 보수주의자였다” 라는 평을 받는 인물. 235
(피셔) 경제 전체의 수학적 모델…그가 이를 물리학 모델로 … 모델을 가지고 누군가는 어떤 요소들이 상호작용하여 가격이 결정되는가를 가시화시킬 수 있었다. 이 메커니즘을 이용해 누군가는 서로 동떨어져 있는 요소 간의 복잡한 상호연동들을 조사할 수 있었다. 피셔의 유압장치는 (1960년에 만들어져서 거대 메인프레임 컴퓨터로 처리되었던, 그리고 노트북 컴퓨터를 쓰닌 지금 대학생들이 한 나라의 GDP를 계산하기 위해 사용하는) 수천 가지 방정식을 포함하는 시뮬레에션 모델들 및 예측 모델들의 선구자 였다. 239
피셔의 박사 논문 <가치 및 가격 이론에서의 수학적 탐구>
- 경제학자 폴 새뮤얼슨 은 “지금까지 나온 최고의 경제학 박사논문” 이라 칭찬
- [앨프리드 마셜](앨프리드 마셜) 비록 영국경제학회 회원들.. 천재적 성과물로 환영
- 프랜시스 이시드로에지워스 “우리는 피셔 박사가 경제학이라는 순수이론의 토대를 강화한 사람이 얻어 마땅한 정도의 영원한 명성을 얻을 것이라는 예측쯤을 할 수 있다”
논문에서 피셔는 #화폐 “화폐는 가치의 척도로 사용됨으로써 모든 것의 경제적 가치를 인식하는 데 영향을 주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화폐에 대한 연구는 거의 없었다. 화폐를 둘러싼 신비는 많은 오해와 오판의 뿌리다” 252
#이자 란 여윳돈이 있는 사람이 남에게 자신의 자본을 사용하게 할때 매기는 값, 즉 실질 용역이자 유가 용역이다. #자본 가치는 예금자와 투자자가 향후 이자지급 흐름을 어떻게 예상하는가에 달려있다.
자전거,여름에 수영 , 스쿼시 등 운동을 즐겼다.
31살에 결핵에 걸렸다. 당시의 결핵은 역사가에 따르면 19세기 에이즈였다
피셔의 개인 철학 “우리가 한 사람의 삶이라고 부르는 것은 의식의 흐름, 곧 그사람이 자기 머릿속에 떠오르게 하는 이미지의 연속입니다. …우리의 의식의 흐름을 정향하고 선택함으로써 우리의 인격을 우리가 원하는 모습으로 형성하는 것은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입니다.” 256 #선택 #생각 #철학 #인생 #주도적 #삶 #사유
[시어도어 루즈벨트](시어도어 루즈벨트) 는 1908년 피셔를 전국자연사원보존위원회에 임명한다
피셔는 정부규제와 자발적 개혁운동 - NGO 같은 활동 - 은 이미 자연환경을 보존하고 공중보건을 증진하는데 크게 기여했다고 …258 🤔 케인즈와 같이 자유방임보다 적절한 규제, 정부의 관리가 필요하다는 철학을 가진것 같다.
피셔는
- 의무교육이 반드시 필요하다 - 알아야 한다
- 공동주택 화재법규이든 도박이나 알코올 등 약물에 대한 금지조치이든 개인 행동의 규제조치는 더 필요하다는 입장이었다 260
무지한 부모가 자신의 교육관을 자녀에게 강요하는 것을 당연시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한때 아동노동 문제는 개인의 문제로만 여겨졌지만, 실은 사회 전체에 영향을 미치는 중요한 문제입니다
#교육 #자녀 #육아 #부모
🤔 피셔, 목사와 신실한 어머니등 가정환경의 영향으로 건전해 보이는 철학을 가진것 같다.
기독교 문화에서 자란그는, 결핵을 앓은동안 인도철학과 명상법을 받아들였다 261 🤔 자신의 마음을 다스리기 위해서, 기독교,인도 철학, 명상등 우리는 한가지 도구가 필요하고, 한가지만 고수할 필요도 없다.
60년 사이에 많은 일이 일어났다 #경제 #복지 #통화 #정책 #정부 #기업 #가난 첫째, 찰스 다킨스, 헨리 메이휴, [카를 마르크스](카를 마르크스)는 옛날 엣적부터 인류에게 가난의 운명을 강요했던 물적 조건들이 점점 유동성을 이어가는 세계률 그려 보였다. 1848년, 카를 마르크스는 경쟁이 기업들을 똑같은 자원을 가지고 점점 많은 것을 생산해야 하는 상황으로 몰아넣었음을 보여주었지만, 생산의 증가를 임금인상과 생활수준 향상으로 전환시키는 방법은 전혀 존재하지 않는 다고 주장했다. [앨프리드 마셜](앨프리드 마셜) 은 업주들이 경쟁이라는 기발한 메커니즘으로 인해 시간이 가면서 생산성을 지속적이고 점진적으로 향상시킬 수 있게 된 동시에, 그렇게 얻어진 이득을 역시 시간이 가면서 임금인상이나 가격 인하의 형태로 공유해야 하게 되었다는 것을 알아냈다. 비어트리스 웨브 [비어트리스 웹, 시드니 웹 부부](비어트리스 웹, 시드니 웹 부부) 는 사회조사관이라는 자신의 직업과 아울러 복지 국가라는 것을 발명했다. 사회학자 [존 스튜어트 밀](존 스튜어트 밀) 은 복지국가가 결국 세수를 전부 받아들일 것이라고 주장했고, 마르크스는 복지국가라는 것은 그저 오 류추리라고 보았다 반면에 웨브는 극빈이 예방 가능함을 보여주었고, 아울러 교육, 위생, 식량, 의료 등 현물 지원이 사적부문 생산력과 임금 을 증가시키는 정도는 과세가 이를 감소시키는 정도보다 크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다시 말해, 빈곤에게 교육과 식량과 보건을 제공하는 일 은 경제성장의 장애물이 아니라 경제성장의 견인차였다 [어빙 피셔](어빙 피셔) 는 화폐가 실물경제에 얼마나 강력한 영향을 미치는가를 처음으로 깨달은 인물이자 정부가 통화 운용을 개선함으로써 경제적 안정을 증진할 수 있음을 처음으로 주장한 인물이었다 피셔는 인플레 이션과 디플레이션이라는 일견 상반된 병페에서 하나의 공통된 원인을 짚어냄으로써, 정부가 인플레이션에 의한 호황과 디플레이션에 의한 불황을 완화하고 나아가 차단하는 데 이용할 수 있는 도구, 곧 통화공급 통제라는 도구를 찾아냈다. 264
5장: 창조적 파괴: 슘페터와 경제적 진화
[요제프 알로이스 슘페터](요제프 알로이스 슘페터)
슘페터는 [앨프리드 마셜](앨프리드 마셜)을 적어도 한번이상 찾아 갔고, 마셜은 그를 위해 아침까지 차려주었다 다윈이 전통적인 생물학을 진화생물학으로 대체한것처럼, 슘페터는 경제학도 생물학처럼 진화생물학의 특징이 있음을 증명한다 - 경제발전 이론 -
리카디-시버 와 연애, - 영국 귀족
이집트 통치자 이스마일 파샤 총독은 온나라를 거대 국유 면화 플랜테이션으로 바꿀 수 있는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 미국 남북전쟁으로 면화 부족 - 총독은 영국과 인도 간 무역이 증가하는 추세를 이용할 방법도 찾았다. 그것이 #수에즈운하 건설이었다. 280
어떠한 과정이 생산력을 두세 세대 만에 여러 배씩 높일 수 있느냐, 왜 어떤 나라에서는 빠르고 어떤 나라에서는 느린가? 틀에 박힌 답은 한 나라의 발전은 그 나라의 자원에 좌우된다는 것이었겠지만, 슘페터의 답은 반대였다 중요한 것은 무엇을 가지고 있느냐가 아니라 그것으로 무엇을 하느냐였다. 자본주의의 특징은 “끊임없는 혁신”, 곧 “창조적 파괴의 영원한 돌풍” 이었다 294
슘페터는 #혁신 이란 발명 그 자체가 아니라 새로운 아이디어들의 유익한 적용이었으며, 혁신에는 새로운 제품, 새로운 생산공정, 새로운 공급원, 새로운 시장, 새로운 조직형태 등 여러 가지 유형의 변화가 포함될 수 있었다. 294
파괴적이고 불연속적인 획기적 비약을 강조했다 “우편 마차를 아무리 이어붙인들, 거기서 철도가 생겨나지는 않는다. …경제적 발전의 핵심은 기존의 노동 및 토지의 용도를 바꾸는 것이다.” 294
슘페터의 #기업가 는 오래된 사고 및 행동 패턴을 파괴 하고, 기존의 자원을 새로운 방식으로 재배치하기를 꺼려하지 않는다는 특징을 가진다 #혁신 이란 장애,타성,저항을 극복하는 것을 의미했다. 예외적 능력,예외적 인물이 필요했다.
새로운 계획을 실행하는 것과 인습적 계획에 따라서 행동하는 것의 차이는 길을 내는 것과 길을 따라 걷는 것의 차이나 마찬가지 296
기업가는 1) 돈에 대한 사랑이 아니라 왕조 건설에의 욕망 2) 지배하고 투쟁하고 남들에게 존경받겠다는 욕망 3) 창조하는 기쁨, 성취하는 기쁨, 그저 자신의 에너지와 독창성을 발휘하는 기쁨 이었다
마르크스는 부르주아를 기생충으로 일축했지만, 슘패터는 기업가야말로 어떤 정부나 자선단체보다 가난을 없애는 데 크게 기여했다. 296 #가난
성공한 경제의 특징은, 위기와 불황이 없다는 것이 아니라, 위기와 불황에서 잃은 것을 투자 호황기에 메우고도 남는다는 것이다. 297
2막: 두려움
프롤로그: 세계 전쟁
6장: 인류 최후의 나날: 빈의 슘페터
- 1차대전 종전후 오스트리아 빈은 빈사 상태에 빠졌다. 식량도, 연료도 없다.
1차대전은 19세기 경제기적의 토대를 엉망으로 만들었고, 승전국의 정부들과 패전국들의 정부들을 모두 파산시켰다. 1차대전이 휩쓸고 지나간 자리에 기근과 초인플레이션이 기승을 부렸고 우랄 산맥에서 라인 강까지 혁명의 불길이 번졌다 수족이 잘리고 빈털털이이고 굶주리는 오스트리아라는 나라의 재무장관으로서, 슘페터는 오스트리아가 공산 러시아나 호전적 독일에 투항하지 않고서도 경제적 회복이 가능하리라는 것을 오스트리아 국민들에게 납득시키고자 했다. 335
슘페터가 오스트리아공화국이 파산을 면할 수 있다고 주장한 근거는 프랑스가 독일이 지배하지 않는 중유럽 시장 공동체를 구축하는 일을 보다 중시하라리는 기대였다 350
[생 제르맹 조약](생 제르맹 조약) 으로 오스트리아는 국토를 빼앗기고, 전쟁 배상금에, 화폐는 폭락한다. 슘페터는 공직에서 욕먹으머 은퇴한다. 그의 정책은 후에 추진된다. 그는 은행장이 되어 돈을 번다 356
7장: 죽어가는 유럽: 베르사유의 케인스
[존 메이너드 케인스](존 메이너드 케인스) #1919년 1월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이스탄불까지 기근과 역병이 창궐했다. 유럽 피해상황 조사차 파견된 영국인들과 미국인들이 보았을 때, 유럽 전체가 빈사상태였다. 357
- 연합국 배상위원회 독일에게 400억 달라 배상금 설정 -> 케인스는 독일이 가능한건 150억 달라라고 -> 더 부과하면 독일은 거부할 위험이 커진다고 경고한다
- 케인스의 보고서는 엄청난 분노를 초래했다. 370 언론인들, 정치가들, 그리고 대중은 독일이 내야 할 배상금 액수에 꽂혀 있던 반면, 케인스는 배상금을 어떤 방법으로 받을 것인가에 주목했다. 371
케인스는 <평화조약의 경제적 귀결> 이라는 글을 쓴다 “유럽대륙에서 땅이 꺼지고 있는데, 아무도 깨닫지 못한다. 이것은 사치냐 ‘노동 갈등’ 이냐 따위의 문제에 그치지 않는다. 이것은 죽고 사는 문제, 굶어죽고 살아남는 문제, 빈사하는 문명의 무서운 경련의 문제다” 389
8장: 기쁨 없는 거리: 빈의 슘페터와 하이에크
호황과 불황의 교체는 경제발전이 자본주의 시대에 취하는 형태다. -요제프 습페터1
흔히 #1920년대 하면 대공황, 파시즘의 발흥, 볼셰비즘의 승리라는 이후의 사태를 예고한 시기, 나아가 그러한 사태의 원인이 된 시기라고 생각된다. 서유럽이 볼 때, 1920년대는 퇴폐, 망상, 가짜 번영, 거짓 믿음 이 팽배한 시기였다. 그러나 요제프 습페터, 프리드리히 하이에크, 존 메이너드 케인스, 어빙 피셔, 이 네 사람이 보았을 때 1920년대는 지난 19세기 그 어느 시기에 못지않게 창의적이고 흥미진진하고 진정 진보적 인시기였다. 397
슘페터의 어머니가 죽고, 아내도 죽고, 아이도 죽는다.
[프리드리히 폰 하이에크](프리드리히 폰 하이에크)
9장: 낙관의 시대: 1920년대의 케인스와 피셔
[어빙 피셔](어빙 피셔)
[비어트리스 웹, 시드니 웹 부부](비어트리스 웹, 시드니 웹 부부) 친분을 만든다
케인스는 로이드 조지의 경제 자문역을 맞는다 - 싱크탱크\
피서 - 인간의 개선 가능성에 대한, 그리고 과학과 자유기업 체제의 무한한 진보 가능성에 대한 피셔의 믿음은 20년대 호황과 나란히 커져갔다 450
10장: 시동 불량: 대공황의 케인스와 피셔
케인스와 피셔는 불황을 극복하기 위해 정부가 개입해서 금리를 낮추고, 전쟁 배상금을 낮추고, 공공사업을 추진하는등 정부가 개입해야 함을 강하게 주장한다 477
1929년 에서 1933년 사이에 경제가 대규모로 붕괴하는 것에 대해 만족스러운 설명을 내놓지 못했다. 위기의 원인을 설득력 있게 설명해주는 이론이 없으니, 강하고 일관된 조치를 밀어붙일 자신감을 가진 정부도 있을 수 없었다. 그러니 케인스와 피셔 둘 다 자기가 세웠던 가정들을 점검하고 자기가 간과 내지 오해했던 요인들을 찾아내야 하는 처지였다 481
정부가 좋지 않는 시기 내지 불경기에는 지출확대 또는 적자운영을 해야한다
- 비어트리스 웨브, 윈스턴 처칠, 허버트 후버…도 이런 케인스의 이론에 대해 받아들였었다 개인적으로는 현명한 행동이 집단적으로 이루어지면 자멸에 이를 수 있다 노동공급 과잉이나 노동수요 부족의 문제는 언제나 임금인하나 금리인하로 해결 될 수 있다. 494
케인스는 496 정부가 직접 지출을 늘리는것, 민간 부분이 지출할 능력이 없거나 지출할 의지가 없다면 정부가 지출해야 했다. 케인스가 볼때, 중앙은행이 대출의 최후의 보루가 되었듯이, 정부는 지출의 최후의 보루가 될 준비가 되어야 했다. 🤔 …금리가 0프로 인데도 불황이라면,,,정부가 …기업이 돈을 투자하고, 소비자가 돈을 쓸수 있게… 불씨?를 돈을, 살포해야한다.
그러나 피셔는 케인스와 달리 이런 개별요소들(이자,생산,물가,호황,불황,부채)을 하나의 통일된 모델(금리,물가,생산이 어떻게 결정되는가를, 그리하여 실업이 어떻게 결정되는가를 보여주는 모델) 로 결합하지 못햇다. 497
나치 독일과 파시스트 이탈리아가 대규모 적자지출을 시행하고 외채지급을 거절하고 자국의 화폐가치 하락을 허용함으로써 완전 고용을 성취하는 것을 보며 케인스는 씁씁한 아이러니를 느꼇다. 일본 제국도 비슷한 성과를 거뒀다.
1930년대 초반에는, 독일과 오스트리아는 물론이고 다른 어떤 곳에 서도, 쇄도하는 글로벌 위기를 만족스럽게 설명할 수 있는 이론을 가진 경제학자는 아무도 없었다. 이처럼 이론이 부재하는 상황에서, 영국 경 제학자들은 순식간에 양대 진영으로 나뉘었다. 한쪽은 케인스와 ‘케임 브리지 광장’이 이끄는 간섭주의 집단(피에로 스라파Piero Sralia, 조앤 로빈슨, 리 처드 칸 등 케인스를 신봉하는 공산주의자들이 포합되었다.)이었고, 한쪽은 서른 살 의 라이어넬 로빈스가 이끄는 런던정경대학의 젊은 ‘자유주의’ 집단이 었다. 로빈스는 광부의 아들로 태어난 몇몇 이름 있는 영국 경제학자 중 하나로서, 빈에서 루트비히 폰 미제스와 그의 동아리와 함께 상당한 시간을 보낸 바 있었다. 로빈스는 미제스가 사회주의의 실현 가능성에 대한 논쟁 중에 펼쳤던 주장에 설득력이 있다고 보았을 뿐 아니라, 영 국 경제와 미국 경제에서 정부 개입 추세가 일견 거침없이 계속되는 것 에 대한 미제스의 경악에 공감했다
11장: 실험: 1930년대의 웨브와 로빈슨
12장: 경제학자들의 2차대전: 케인스와 프리드먼\
[밀턴 프리드먼](밀턴 프리드먼)
- 시카고 학파, 전시 원천징수 세금 도입 핵심추진 인물
13장: 망명: 전쟁 중의 슘페터와 하이에크
역사가 이루어지는 동안, 역사는 우리에게 역사가 아닙니다. 역사는 우리를 미지의 땅으로 데리고 갑니다. …우리가 역사를 두 번살 수 있다면 문제는 달라지겠지만 말입니다. ..역사란 되풀이되는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역사의 흐름 중 피치 못할 흐름은 없기에, 과거로부터 우리는 똑같은 흐름의 반복을 피해갈 방법을 어느 정도 배울 수가 있는 것입니다.
#역사 하이에크<예속의 길>
3막: 자신감
프롤로그: 사라진 우려
14장: 과거와 미래: 브레튼우즈에 간 케인스
15장: 예속에서 벗어나는 길: 하이에크와 독일의 기적
16장: 주인 되는 도구: 워싱턴에 간 새뮤얼슨
[폴 앤서니 새뮤얼슨](폴 앤서니 새뮤얼슨) 폴 앤서니 새뮤얼슨은 2차대전 후의 미국에서 가장 유력한 케인스주의자였다 그의 세계관을 형성한 것은 곡창지대의 경제 붕괴, 플로리다의 부동산 거품, 그리고 대공황이었다. 그는 수학과 케인스 이론과 자신의 수많은 독창적 사상을 가지고 경제학을 현대화시켰다. 존 케네디를 비롯한 전후세대 미국인들은 그의 교과서와 <뉴스위크> 칼럼을 통해서 그의 새로운 경제학을 흡수했다. 그는 1963년 케네디 감세의 막후로 간주된다
- 존 F 케내디 는 그의 제자였다
17장: 거대한 환상: 모스크바와 베이징의 로빈슨
[조앤 로빈슨](조앤 로빈슨)
모스크바 도착 일주일 후 , 로빈슨 은 스탈린이 독재자가 아니라 배려하는 아버지(다만 엄격하고 다소 거리감이 느껴지는 아버지) 라고 판단했다. 644
스탈린은 …자본주의는 결국 파멸… 미국과 영국은 전쟁하고..망할것이라고 장담한다. 스탈린이 세속적 묵시록을 신봉한 정도는 한 세기 전의 마르크스와 엥겔스에 못지않아 보이기도 한다 647
로빈슨이 정채적 ‘개종’ 한것을 1936년으로 본다 [스페인 내전](스페인 내전) - 당시의 영국 대공항은 끝물이었다
로빈슨.. 그녀는 기질적으로 권위주의적이었고, 민주주의의 특징인 정치적 타협을 경멸했다 651
로빈슨이 1940년대와 1950년대에 스탈린을 지지했던 것은 [비어트리스 웹, 시드니 웹 부부](비어트리스 웹, 시드니 웹 부부) 가 1930년대에 스탈린에 열광했던 것보다 더 당혹스러운 일이었다(로빈슨의 지지는 웨브의 지지보다 더 무조건적이었다) 653
밀턴 프리드먼은 로빈슨 같은 탁월한 경제학자가 “러시아와 중국의 정책의 모든 면을 합리화하고 칭찬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것"을 당혹스러워했다. 656
케인스의 죽음에서 비롯된 리더십 공백을 메운 것은 그녀였다 656
로빈슨은 1953년 처음으로 중국을 방문하면서 “공산주의가 자본주의 너머의 단계가 아니라 자본주의를 대체하는 체제라는 최종적 증거"를 얻었다 663
18장: 운명과의 약속: 콜카타와 케임브리지의 센
[아마르티아 센](아마르티아 센) “이와 같은 저항들이 없었다면 훨씬 많은 사람들이 죽어갔을 것입니다. 이런 발언대만 있었어도 벵갈 기근을 막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여러분이 자진해서 하는 발언들은 행동하는 민주주의입니다” 673
에필로그: 미래를 상상함
3. 연관 문서
18회 자유로워야 행복하다 . 1960년대 후반, 로빈슨은 인도 델리에서 마오쩌둥을 찬양하는 연설 % 하고 있다. 옛 제자 아마티아 센의 공손한 반론은 묵살된다. 2002 년, 옛 스승에 못지않은 스타 경제학자 센은 찬바람이 부는 홈바닥 에 모여 있는 사람들을 찾아간다. 깡마른 열네 살 소녀가 설거지 일 감을 잃은 후 먹지 못했다는 말을 하고 있다. 센은 인도 민중의 고통 을 학문적 과제로 삼은 경제학자이다. . 1942년 독립투쟁. 센의 많은 ‘삼촌들’이 투옥된다. 300만 인명을 앗 아간 1943년 병갈 기근. 센은 왜 자기 가족들은 무사하고 하층 카스 트만 굶어죽는가를 생각한다. • 대학생 센은 마셜의 경제학 원리 등의 고전과 새뮤얼슨의 경제분 석의 기초J 등의 신작을 읽는다. 수업을 빼먹고 스탈린주의자들과 마 르크스를 논하기도 한다. 암 진단을 받고, 위험한 방사능 치료를 받 는다. • 케임브리지 유학에서 돌아와 인도 개발경제학자 대열에 합류한다. 방사능 치료의 후유중이 나타나고, 영국에 건너가 대대적인 재건수 술을 받는다. 에바 콜로르니와 재혼한다. • 1970년대 이후, 연구방향을 바꾼다. 경제학자들의 조롱과 무시 속에 정치적 권리와 경제적 복리의 관계를 규명하는 일에 매진한다. 경제 학과 윤리학의 접목을 시도하는 그를 지금 사람들은 -경제학의 양 심"이라고 부른다.
17 경제학의 코미사르 . 1950년 4월, 로빈슨은 모스크바 경제회담에 영국 대표로 참석한다. 그녀가 본 소비에트는 평화와 풍요와 메카다. • 두어 달 전, 스탈린은 소련공산당중앙위원회 연설에서 전쟁과 파국 을 예언한다. 연설문 내용은 회담 이후에야 발표된다 • 1936년 스페인 내전. 소련은 공화당 편에서 파시스트들과 싸우는데 영국과 미국은 구경만 하고 있다. 로빈슨을 포함해서 많은 영국 지식 인이 소련에 호의적 태도를 갖게 된다. 1945년, 선거에 압승한 노동 당과 대부분의 좌파들은 소련과 점점 불화한다. 로빈슨과 영국 공산 당은 노동당 정부를 비판하고 소련을 지지한다. • 49세의 로빈슨. 피카소가 그린 거트루드 스타인과 같은 존재감이 그 녀에게 있다. 그녀에게 제국주의 이론은 대문자T로 시작되는 진리다. • 1951년. 로빈슨은 로자 룩셈부르크의 자본축적.에 격렬하게 공감 한다. 5년 후, 같은 제목의 책을 펴낸다. • 공산당의 행사용 지식인 로빈슨은 중국에서 벌어지는 “현대사 최악 의 기근"을 깨닫지 못한다. 그녀는 민주주의에 대해 냉소한다.
16 대통령의 남자는 괴로워 . 1944년, 투스벨트 행정부의 새뮤얼슨은 암울한 전후를 예측한다. 자 기의 주장이 체제전복과 무관하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정부 브리 핑에서는 회계사가 쓰는 녹색 챙모자를 쓴다. . 1915년생 새뮤얼슨은 미드웨스트 투기 붐과 플로리다 랜드러시 중 에 성장한다. 시카고에서 수학하고 하버드에서 박사논문 경제분석 의 기초를 발표한다. 슘페터는 이 논문을 읽고 잠을 설칠 만큼 흥 분한다. . 전후경기가 호황을 맞으면서, 새뮤얼슨의 예측이 어긋난다. 이후로 는 경제예측에 더 신중해진다. • 제대군인들이 대학으로 몰려오고, 경제학 교과서 수요가 커진다 1948년에 초판이 나온 경제학: 개론적 분석J은 어마어마한 베스트 셀러가 된다. 경제학이 분석하는 현대경제는 불완전고용의 경제다. 모든 것이 역행하는 경제, 고전 경제학과 피셔의 통화주의가 더 이상 통하지 않는 경제다. . 새뮤얼슨은 케네디의 경제자문으로 케인스주의 정책을 지지한다. 프리드먼은 카터의 경제자문으로 통화주의를 부활시킨다. 새뮤얼슨 과 프리드먼 둘 다 백악관보다는 대학이 어울린다
시즌 1: 고전적 정치경제학을 넘어서
1회 자본주의는 필히 무너진다 • 1844년 11월. 스물셋의 엥겔스가 마르크스에게 또 글을 독촉하고 있 다. 혁명의 필연성을 증명할 글. ‘자본이 될 글. . 2년 전. 엥겔스는 맨체스터에서 경영자 수업을 받고 있다. 업계에선 매력적인 젊은 사업가로 통하지만, 자유시간에는 까막눈 여공과 사 귀며 급진 신문들에 보낼 기사를 쓴다. • 1844년 8월. 마르크스와 잉겔스가 꼬박 열흘 동안 함께 술을 마신 다. 서로의 생각이 얼마나 비숫한지 학인한다. • 1845년, 겔스의 1844년 영국 노동계급의 조건.이 호평 속에 출간 된다. 사회전복이 유일한 해결책이라는 주장이 반론을 불러일으킨 다. 잉겔스는 마르크스가 곧 그 주장을 증명해주리라 믿는다. • 1849년, 기자 메이휴가 런던 시가지를 급어보고 있다. 세계 최대 자 본주의. 현기증을 일으키는 빈부격차. 블레이크의 예루살렘. • 1847년,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런던 어느 술집 2층으로 올라가고 있 다. 공산주의자동맹이라는 단체의 아지트. 열흘간의 회의 끝에 마르 크스와 잉겔스의 선언문이 채택된다. • 잉겔스가 공산당 선언이라는 제목을 제안한다. 자본주의의 창세 기와 묵시록. • 혁명의 1848년. 공산당 선언 1000부가 인쇄된다.999부가 압수된다. • 1849년, 마르크스의 새 망명지 런던. 기자 메이휴의 폭로기사가 커 다란 반향을 불러일으킨다. 기존의 정치경제학으로 현실을 정당화 하기가 점점 어려워진다. ㆍ 앞서 1848년. 존 스튜어트 밀의 스테디셀러 정치경제학 이론이 나 온다. 새로운 개혁의 요구를 이론화하지는 못한 책. ㆍ1851년, 런던 만국박람회가 열린다. 마르크스에게는 부르주아 계급 의 요란한 혁명 훼방 책동일 뿐이다. ㆍ 마르크스의 과제는 여전히 자본주의의 필연적 붕괴를 증명하는 것 이다. 그는 이 과제에 ‘정치경제학 비판’이라는 부제를 붙인다.
1862년, 런던에서 또 만국박람의가 인린다. 병계자료들은 산쉬이 반 전할수록 노동자의 삶은 얼악해진다는 마르크스의 대전제와 검거 어긋난다. • 같은 해, 마르크스는 철도사무원에 지원했다 떨어지고 미국으로 이 민 갈까 생각한다. 자본이라는 제목을 정한다. • 1866년, 공황이 마르크스를 아드레날린 주사처럼 각성시킨다. 1867 년, 자본이 출간된다.
2회 문제는 생산성이다 • 1866년, 공황이 한 세대의 엘리트를 급진화시킨다. 그들은 가공할 빈 부격차를 목격하고 죄의식과 사명감으로 불타오른다 • 1867년 6월, 24세의 수학자 마설이 맨체스터 슬럼가를 산책한다. 가 난이라는 원죄를 발견하고 경제학으로 ‘개종’한다. • 디킨스의 위대한 유산에서 주인공 답은 극적인 신분상숭에 성공 한다. 마설의 신분상숭은 됩에 못지않다 * 학창시절 마설은 옷차림이 향한 결식 장학생이었다. 케임브리지 연 구원 마설은 현실과 만나게 해주는 학문을 찾는다. • 1867년 10월, 마설은 매일 새벽 5시에 일어나서 철학과 심리학과 생 물학을 읽는다. 정치경제학도 읽기 시작한다. ㆍ 한때 스미스, 서스, 리카도 등 고전적 정치경제학자들은 커족의 특 건에 맞서는 진보적 개혁주의자들이었다. 하지만 새로운 사회적 요 구들 앞에서 그들의 자유방임주의는 타당성은 물론 현실성도 없다 • 1873년, 마셜은 여학생들에게 경제학을 가르치고 있다. 저임금 문제가 생산성 중대로 해결되리라는 열정적인 강의. • 마설의 부인이 되는 메리 페일리는 똑똑하고 당찬 스물한 살의 여학 생. 마설에게 여성해방은 곤 억압받는 자들의 해방이다. . 1874년, 마셜은 파업노동자 모임에 참석한다. 노조 지지 연설에서 노 동시장이 오작동할 수 있음을 지적한다. • 1875년, 미국 여행길에 오른다. 그가 본 미국은 (영국과는 달리) 자기의 운명이 자기의 의지와 노력에 달려 있는 나라다. 만약에 이민을 간다 면 미국으로 가겠다고 말하기도 한다. • 1877년, 브리스를 유니버시티 칼리지 학장이 된다. 부부는 함께 강 의하고 함께 잔디테니스를 치고 함께 산업경제학.을 준비한다 • 1879년, 산업경제학.이 출간된다. 사업가와 노동자에 대한 존경심, 강박적일 만큼 섬세한 현장조사, 현실이 개선되리라는 믿음이 담 겨 있다. • 1881년, 마설은 밀의 정치경제학 원리J률 (나아가 마르크스의 “자본윤) 뛰어넘을 저서를 꿈꾼다. ‘경제학 원리_를 구상하기 시작한다. ㆍ 장기 공황의 시기. 체제 전복적인 해법들이 유행한다. 마설도 공론 장의 이전투구에 휘말린다. • 1890년, 경제학 원리.가 출간된다. 마설은 현대 경제학의 아버지로 우뚝 선다.
3회 가난은 나라 책임이다 • 1883년, 스물다섯 살의 포터 양이 남편감윤 찾고 있다. 총리문 꿈꾸 는 정치가 체임벌린이 물망에 오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