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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 고흐 - 클래식 클라우드

☝️가족 모두가 우울한 정신질환으로 고생했고, 동생 태오와의 형제애로 , 어미니에 대한 사랑의 그리움으로 살아간 고흐.

[!INFO] 책 정보

  • 저자: 저자/유경희
  • 번역:
  • 출판사: 출판사/arte(아르테)
  • 발행일: 2022-11-10
  • origin_title: -
  • 나의 평점: 9
  • 완독일: 2024-12-26 00:00:00

[빈센트 반 고흐](빈센트 반 고흐)

반 고흐 - 클래식 클라우드

1. Befor Qustion

2. Synopsis (개요)

2.1 저자 - {이름}

2.2 주제

2.3 기획 및 지필 의도

2.4 주요 등장 인물

2.5 전체 줄거리

3. After My Idea

3.1 Insight

3.2 After Qustion

  • (why) 이 책의 제목을 이렇게 지은 이유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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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 Top 3 Highlight

4. Key Word 책에서 뽑은 키워드 정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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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 생애

#1853년 3월 30일, 네덜란드 남부 브라반트 지방의 쥔데르트에서 6남매 중 장남으로 빈센트 반 고흐가 태어났다. 아버지 테오도뤼스 반 고흐는 개신교 목사이고, 어머니 아나 코넬리아 카르벤튀스는 덴하흐에 있는 제본업자의 딸로서 빈센트에게 그림을 가르치고 독서에 힘쓰도록 했다.

#1857년 쥔데르트마을학교에 들어가 1864년까지 다녔다.

1864 고향 집을 떠나다   빈센트가 열한 살이 되었을 때, 그의 부모는 아들을 쥔데르트에서 약 25킬로미터 떨어진 제벤베르헨에 있는 프로빌리사립기숙학교에 집어넣었다. 부모는 늘상 뚱하고 예민하고 반항적인 아들을 비로소 올바른 길로 인도했다고 믿었을 것이다. 빈센트는 낯선 곳에 자기를 데려다 놓고 멀리 사라지는, 부모가 탄 노란 마차를 보면서 버려진 것 같은 느낌에 휩싸였다. 이것은 이별의 전형적인 이미지로 평생 그를 따라다녔다. 훗날 빈센트는 동생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때의 일을 “나는 프로빌리학교 앞 계단에 서 있었다. 양쪽에 여윈 나무들이 늘어선, 비에 젖은 길 저편에 작고 노란 마차가 목초지 사이로 달려가는 것을 보았다”라고 회상했다.  

구필화랑에서 일할 때의 반 고흐.   1866 틸뷔르흐에 있는 중등학교인 빌럼2세기숙학교에 들어가 2년간 다녔다.

1869 큰아버지 센트가 덴하흐에서 운영하는 구필화랑에서 일하기 시작했다.

1873 6월, 빈센트가 구필화랑 런던 지점에서 일하기 시작했다. 이곳에서 1874년 10월까지 일했다.

1875 5월, 구필화랑 파리 본사로 전근되었지만 동료와 고객 들에게 인기가 없었다. 빈센트는 화랑 일 대신 성경 연구에 강박적으로 매달리는 한편, 카미유 코로와 17세기 네덜란드 화가들에게 열광했다.

1876 4월, 구필화랑이 부소와 발라동으로 운영권이 넘어가면서 빈센트도 일을 그만두고 영국의 램스게이트로 갔다. 그곳의 작은 사립학교에서 부교사로 일하면서 숙식을 해결했다. 몇 달 뒤 빈센트는 교육자이자 목사인 토머스 슬래드 존스가 아일워스에서 운영하는 기숙학교에서 근무했다.

1877 도르드레흐트에 있는 한 서점에 일자리를 구했다. 5월, 신학 공부를 하기 위해 암스테르담으로 갔다. 그러나 1년 만에 공부를 중단하고 부모님이 있는 에턴으로 돌아갔다.

1878 6월, 평신도 설교자가 되기 위해 브뤼셀로 갔다. 8월, 브뤼셀 근처에 있는 라컨의 복음주의 학교에서 수습 과정을 밟기 시작했다. 그러나 평신도 설교자의 일이 자신과 맞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12월, 가난한 이들이 많이 살고 있는 광산 지대인 보리나주로 갔다.

 

고향 준데르트에 있는 반 고흐 형제상.     1879 곤궁한 이들을 위해 헌신하다   빈센트는 ‘검은 마을’ 보리나주에서 평신도 설교자로 일하면서 광부들과 함께 땅속으로 내려가거나 다치고 병든 이들을 돌보는 등 곤궁한 이들을 위해 자신을 버렸다. 심지어 마치 광야의 예수처럼 빵과 쌀죽을 제외하고는 모든 음식을 거부하는가 하면, 추운 겨울에도 외투 대신 광부들이 있는 질긴 삼베옷을 입었으며, 잘 때도 침대의 안락함을 택하는 대신 딱딱한 판자 위에 누웠고, 수중에 들어오는 얼마 안 되는 돈은 모두 남에게 기부했다. 그러나 그의 광적인 헌신을 기괴하게 여긴 마을 사람들은 브뤼셀의 복음주의위원회에 조사를 부탁했고, 결국 빈센트는 설교 능력을 갖추지 못했다는 이유로 6개월 만에 해고되었다. 이후 걸어서 브뤼셀까지 가서 아버지의 지인을 만난 뒤 보리나주 근처에 있는 퀴에메로 가서 1880년까지 무보수로 같은 일을 했다.

1880 7월, 구필화랑 파리 본점에서 일하고 있던 테오가 빈센트에게 월급의 일부를 보내 주기 시작했다. 이는 빈센트가 사망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10월, 브뤼셀에 있는 아카데미에서 인체 드로잉과 원근법을 배웠다.

1881 4월, 에턴으로 돌아가 예술가로서의 미래를 모색했다. 여름, 남편을 잃고 에턴을 찾아온 사촌 코르넬리아 보스스트릭커를 보고는 사랑에 빠져 청혼했지만 거절당했다. 11월, 덴하흐에 있는 안톤 마우베의 작업실에서 그림을 배웠다.

1882 시엔이라는 사창가 여성을 알게 되어 1년 넘게 함께 살았다.

1883 시엔과 헤어진 뒤 네덜란드 북쪽에 있는 드렌터로 갔다. 토탄 지대의 황량한 풍경이 그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12월, 드렌터에서의 고립감을 이기지 못하고 부모님이 이사한 곳인 뉘넌으로 갔다. 이곳에서 머문 2년 동안 빈센트는 약 200점의 그림을 그렸다.

1884 이웃에 있는 마르호트 베헤만과 친해졌다. 빈센트와 마르호트는 결혼 계획까지 세웠지만 마르호트 가족의 반대로 성사되지 않았다.

1885 3월, 아버지가 뇌졸중으로 사망했다. 동생 아나와 다툰 뒤 작업실을 가톨릭 교회 관리인인 요하네스 스하프라트의 집에 방을 얻어 옮겼다. 4~5월, 대표작 <감자 먹는 사람들>을 그렸다. 11월, 안트베르펜로 가서 이듬해 2월까지 머물렀다. 이때 페테르 파울 루벤스의 그림에서 깊은 인상을 받은 빈센트는 기존의 암적색과 코발트 톤에서 벗어나 보다 강렬하고 밝게 빛나는 색채를 쓰는 쪽으로 전환했다. 왕립미술아카데미에서 수업을 들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그만두었다.

1886 파리에 도착하다   구필화랑 파리 본사에서 일할 때 이후 약 11년 만에 파리에 다시 온 빈센트는 테오와 함께 지냈다. 곧이어 코르몽의 화실을 드나들면서 에밀 베르나르를 비롯한 예술가 친구들과 교유했다. 비록 3~4개월 만에 화실 출입을 그만두기는 했지만 파리에서 본격적으로 접한 인상주의의 영향으로 빈센트도 기존에 즐겨 쓰던 짙고 어두운 색조 대신 밝고 강렬하고 생기 있는 색조로 표현하기 시작했다. 겨울 무렵에는 브르타뉴의 퐁타벤에서 돌아온 고갱과 사귀기 시작했다. 파리에서 2년간 지내는 동안 빈센트는 27점의 자화상을 비롯하여 센강 변, 몽마르트르 언덕, 클리시대로의 카페와 식당, 단골 화방 주인인 탕기 영감 등 약 200점을 그렸다.   1887 봄, 베르나르와 센강 가에서 그림을 그렸다. 클리시가에 있는 탱부랭카페를 단골로 드나들었다. 이곳에서 베르나르, 고갱, 로트레크와 함께 전시회를 열기도 했다.

    1888 남프랑스에서 예술가 부락을 꿈꾸다   2월, 빈센트는 번화한 파리를 뒤로 하고 밝은 빛과 따뜻한 색채가 있는 남프랑스의 아를행 기차에 올랐다. 그는 한 번도 가 보지 않은 그곳에서 예술가 부락을 만들고 싶어 했다. 봄이 되면서 빈센트는 꽃이 만개한 살구나무, 자두나무, 배나무, 사과나무, 복숭아나무, 아몬드나무 등과 장미꽃, 제비꽃, 붓꽃 등을 쉼 없이 그렸다. 밝고 화창한 색채로 뒤덮인 아를의 봄은 그가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것이었다. 5월에는 라마르틴광장에 있는 노란 집에 세를 들고는 〈해바라기〉 연작을 그려 방을 꾸미는 등 인테리어에 많은 공을 들였다. 그러나 그의 초대에 응해 준 동료 화가는 없었다. 오직 고갱만이 가능성을 비추어 주었을 뿐. 고갱은 아를행을 계속 미루다가 빈센트의 거듭된 요청에 10월에 되어서야 도착했다. 그러나 둘은 생각, 기질, 좋아하는 화가, 작업 스타일 등 모든 면에서 너무나 달랐고, 결국 함께 산 지 2개월 만에 빈센트가 자신의 귀를 자른 사건이 일어나면서 둘의 관계는 파국에 이르고 말았다.

이후 빈센트는 간질, 알코올중독, 조현병 진단을 받았다.  

아를.   1889 5월, 아를에서 30킬로미터 떨어진 생레미드프로방스에 있는 생폴드모솔요양원에 들어갔다. 이곳에서 약 1년간 살면서 요양원의 정원, 붓꽃, 라일락 수풀, 알피유산, 채석장, 아몬드꽃 등 150여 점의 그림과 비슷한 양의 스케치를 남겼다.

    1890 오베르쉬르우아즈에서 잠들다   생레미드프로방스에서는 자신의 병이 더 이상 좋아질 수 없다고 판단한 빈센트는 5월에 테오 부부가 살고 있는 파리를 경유하여 숲이 많은 시골 마을인 오베르쉬르우아즈로 갔다. 파리에 들렀을 때, 테오의 아내와 자신의 이름과 같은 조카를 처음 만났다. 오베르쉬르우아즈에 온 빈센트는 라부여관에서 지냈다. 테오에게 쓴 편지에서 그는 오베르쉬르우아즈가 매우 아름답고 그림 같다고 했다. 그는 주변의 들판을 산책하면서 몇 점의 거대한 풍경화를 남겼다. 7월 27일, 저물녘에 들판으로 산책을 나갔다가 가슴에 총을 쏜 뒤 이틀 뒤 테오가 지켜보는 가운데 숨을 거두었다.

5.책 밑줄 정리 (책 밑줄 전체,page)

37년에 걸친 반 고흐의 짧은 인생은 크게 네덜란드, 영국, 벨기에에서 보낸 전기와, 프랑스의 파리, 아를, 생레미드프로방스, 오베르쉬르우아즈에서 보낸 후기로 나눌 수 있다.

그는 그림 파는 일로 세상에 첫발을 내디딘 이래, 한때는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과 함께하기 위해 종교인이 되고자 했지만 실패했다. 대신 그는 예술을 통한 구도의 길로 눈을 돌렸고, 파리에 입성하면서 본격적으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파리에서는 인상주의 사조를 접하면서 그의 그림도 밝고 화사한 색조로 바뀌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는 보다 밝은 빛과 따뜻한 색채가 있는 곳에서 예술 공동체를 만들고 싶어 했다. 아를 시절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그가 꿈꾼 예술의 유토피아는 [폴 고갱](폴 고갱)과의 갈등 끝에 귀를 자르는 사건이 일어나면서 모두 무너지고 말았다. 이후 정신 질환으로 극심한 고통을 겪은 그는 #1890년 7월, 오베르쉬르우아즈의 들판으로 산책을 나갔다가 가슴에 총을 쏘았다.

아버지처럼 목사가 되려고도 했고, 벨기에 탄광촌의 전도사로도 일했다. 목사의 길을 포기한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 그는 ‘목사를 등에 업은 화가’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그림을 그리면서도 영적이고 도덕적이며 숭고한 선교사로서 자기 일을 계속할 수 있었다고 고백했으니 말이다.

아를의 거리 <별이 빛나는 밤>, <해바라기>, <까마귀가 나는 밀밭>, <꽃핀 아몬드나무> 등 오늘날의 반 고흐를 있게 한 대표 걸작들은 그가 예술에 대한 열정을 가장 폭발적으로 분출한 생의 마지막 3년에 탄생한 것이다. 그 마지막 여정의 시작점이 남프랑스의 아를이었다.

500 존 피터 러셀이 그린 <빈센트 반 고흐> 반 고흐는 늘 부랑자 같은 모습이었다. 주근깨가 가득한 얼굴, 비뚤어진 입, 무섭도록 반짝이는 가느다란 눈, 선명하게 붉은 머리카락, 나이에 비해 늙어 보이는 모습 등 누구도 그를 매력적인 외모의 소유자라고 여긴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래서인지 그는 사진 찍히는 것을 극도로 싫어했다. 대신 파리 시절에 알게 된 존 피터 러셀이 그린 이 초상화만큼은 좋아해서 테오에게도 잘 관수해야 한다고 당부했다. 러셀은 반 고흐의 옆모습을 살짝 아래로 내려다보면서 사람들의 시선을 피하는 듯한 모습으로 그렸는데, 반 고흐가 이 초상화를 좋아했다는 것은 그 스스로 타인에게 그렇게 보이기를 원했다는 말도 된다. 캔버스에 유채, 45.6×60.1센티미터, 1886, 반고흐미술관, 암스테르담.

고갱과 동료 화가들도 빈센트 안에 사랑스러운 면모와 참을 수 없는 면모가 동시에 존재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절친인 에밀 베르나르 에 따르면 빈센트는 끊임없이 자기 생각을 설명하고 발전시키면서 열정적으로 토론하는 경향을 보였다. 그러나 토론은 지루하고 장황할 때가 많았다. 이견을 참지 못했고, 이로 인해 성질을 부리고 예민해졌다.

빈센트의 인성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그가 연민과 동정심이 많은 사람이었다는 사실이다. 타인에 대한 감정이입이 지나쳐 일을 그르칠 때가 많았다는 것이다. …빈센트의 인정은 대부분 가난하고 소외되고 어려운 사람들에게만 해당한다. 일종의 억강부약抑强扶弱으로, 다시 말해 강한 자를 누르고 약한 자를 도와주는 스타일이다.

급하게 그린 그림이 잇달아 나오는 것은 이미 오래전에 복잡한 계산을 많이 해 둔 덕분이다. 누군가 내 그림이 성의 없이 빨리 그려졌다고 말하거든 당신이 그림을 성의 없이 급하게 본 거라고 말해 주어라. — 빈센트 반 고흐,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편지』 중

반 고흐의 어머니 반 고흐의 예술적 재능과 지칠 줄 모르는 생산성에는 왕실 제본사의 딸이자 아마추어 삽화가였던 어머니 아나 카르벤튀스의 영향이 컸다. 어린 빈센트는 어머니에게서 미술을 비롯하여 책 읽기와 음악 등을 배웠다. 또한 어머니는 늘 아이들에게 한시도 쉬지 않고 손을 놀려야 한다는 것도 강조했다. 캔버스에 유채, 32.5×40.5센티미터, 1888, 노턴사이먼미술관, 패서디나.

더구나 장남을 잃은 어머니는 차남이 태어난 뒤에도 그 슬픔을 지우지 못했다. 그녀는 매일같이 사택 바로 옆에 있던 죽은 아들의 무덤을 찾았다. 자신이 어머니의 관심 대상이 아니라는 애달픈 심정의 단초가 이때 빈센트의 마음에 싹텄을 것이다. 어머니의 따스한 애정을 받고 싶었던 마음에 석연하지 않은 슬픔과 울적함을 남긴 것이다. 그런 어머니는 마치 장남의 죽음이 빈센트의 탓인 듯 그에게 가혹하게 대했다. 먼저 죽은 형의 이름을 빈센트에게 그대로 붙임으로써 평생을 형에 대한 애도와 죄의식 속에서 살게 한 것이다.

반 고흐의 아버지 테오도뤼스 반 고흐는 네덜란드 개신교 교회 목사였다. 교회 묘지에는 반 고흐보다 먼저 태어나 죽은 형의 묘비가 있다. 그로부터 정확히 1년 뒤 반 고흐가 태어났다. 아버지는 신의 권위와 자신의 권위를 동일시하는 권위적이고 독선적인 면모를 가진 한편으로, 아이들에게 상냥하고 부드럽게 다가가는 면모를 모두 가지고 있었다. 반 고흐는 아버지의 그런 두 얼굴을 그대로 물려받았다.

신의 은총이 아들에게는 전혀 미치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과부가 된 사촌 누이에게 청혼하고, 창녀와 결혼하겠다고 선포하고, 학교를 중퇴하거나 퇴학당하고, 목사의 길도 실패하고, 돈도 못 벌고 제멋대로 물의만 일으키는 아들을 아버지로서는 비난하고 심판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 까닭에 아버지는 빈센트를 자기가 짊어져야 할 십자가로 치부했다. 빈센트 역시 점점 더 아버지를 최악의 적으로 간주했다. 특히 자신을 정신병원에 입원시키려 했던 아버지를 평생 크게 원망했다. 결국 1885년 아버지가 사망하기 직전에 부자의 연을 끊었다.

탄광에서 일반인 전도사일 하다

점점 더 많은 시간을 아픈 사람들과 보내면서 어떤 희생도 치를 각오가 되어 있는 사람처럼 보였다. 이처럼 빈센트는 쥐꼬리만 한 월급 대부분을 그들에게 썼고, 누더기를 걸친 채 온전히 새로운 기독교적 공동체를 부르짖었다. 그러나 탄광주들은 광부의 처지를 알려고도 하지 않았다. 광부들에게도 비참한 현실을 개혁하고자 하는 의지조차 없었다. 이런 상황 속에서 부르주아에 대한 빈센트의 반감은 강해져만 갔고, 가난한 광부들과 완전히 일체화되고자 했다

화상 일을 그만둔 반 고흐는 가난한 이들을 돕는 일을 하고 싶어 네덜란드와 벨기에의 국경 지대에 있는 탄광 지대인 보리나주로 떠났다. 매우 위험하고 열악하기로 악명 높았던 이곳에서 그는 평신도 전도사로서 광부들과 동고동락하며 그들을 위해 초인적으로 헌신했다. 그러나 교단 측에서는 설교 능력이 수준 이하라는 이유로 그를 해임하고 말았다.

1886년, 서른세 살의 반 고흐는 파리행 기차에 올랐다. 스무 살 무렵 구필화랑 본점에서 일할 때도 살았던 도시다. 그는 테오와 함께 파리 외곽 몽마르트르에 있는 아파트를 구해 2년간 살았다.

500 작가 빈센트 반 고흐 연도 1885년 매체 캔버스에 오일 크기 114 x 82 cm , 44.9 × 32.3 in 위치 암스테르담 소장처 반 고흐 미술관 감자 먹는 사람들 The Potato Eaters 네덜란드어: De Aardappeleters

폴 세잔은 빈센트가 그린 <감자를 먹는 사람들>을 보고 미치광이 그림이라고 혹평했다. 그렇게 자극받은 빈센트의 그림은 서서히 변하기 시작했다. 즉 색채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그는 색채 속에서 삶을 찾고자 했으며, 진정한 그림이란 색채에서 솟아나는 것이라고 믿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끊임없는 노력 끝에 빈센트는 1887년 말에야 비로소 채색을 완전하게 이해하게 되었다.

500 주제: Flowers Forests Spring Flowers 날짜: 1887 1874년, 클로드 모네를 필두로 한 젊은 예술가들이 파리에서 첫 번째 인상주의 전시를 개최한 이래 인상주의는 당대 미술계의 뜨거운 화두로 떠올랐다. 반 고흐 역시 파리에서 인상주의 미술을 접하게 되었는데, 이는 그의 기법에 큰 변화를 가져오는 계기가 되었다. 무엇보다도 이전의 어둡고 짙은 색조가 밝고 화사한 색조로 변하기 시작했다.

사람을 너무나 좋아했던 그는 누구보다도 자신이 아닌 타인을 그리면서 사람과 접촉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나 아무도 그에게 말을 걸어 주지도, 관심을 보여 주지도 않았다. 어쩔 수 없이 그는 자화상을 많이 그리게 되었다.

빈센트는 파리 시절과, 정신병원 입원과 퇴원을 반복하던 말기에 자화상을 가장 많이 그렸다. 화가들은 고단하고 암울한 시기에 가장 많은 자화상을 그린다.

줄리앙 프랑수아 탕기 Julien Francois Tanguy 만나고… 탕기화방에 걸렸던 것으로는 빈센트를 비롯해 조르주 쇠라, 고갱, 세잔의 작품들이 있었다. 네 명 모두 20세기 미술의 선구자임을 감안할 때 탕기의 심미안도 대단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500 반 고흐는 탕기 영감의 초상을 세 점 남겼는데, 마지막에 그린 이 그림이 가장 대표적이다. 부처처럼 묘사된 인물, 우키요에가 잔뜩 걸려 있는 배경, 대담하고 강렬한 선과 색채, 화가 특유의 짧은 붓 터치 등이 어우러져 초상화의 새 지평을 열었다. 캔버스에 유채, 75×92센티미터, 1887, 로댕미술관, 파리.

탕기화방이 있던 몽마르트르 클로젤가 파리 시절 반 고흐는 쥘리앵 탕기가 운영하는 화방을 자주 드나들며 미술 재료를 샀다. 파리코뮌에 참여했고 사회주의를 지향한 탕기는 가난한 화가들의 작품을 전시해서 팔아 주는가 하면, 재료비 대신 그림을 받거나 외상으로 내어 주기도 했다. 당시 파리의 화가들은 이런 그를 ‘탕기 영감’이라 부르며 아버지처럼 따랐다.

유지니에 대한 강렬했던 첫사랑의 결렬은 빈센트에게 가장 큰 슬픔의 근원이 되었다. 그 사건은 타인의 고통에 민감하게 만들었다. 이후 빈센트의 정신에도 큰 변화가 일어났다. 그는 독서에 집중하고 종교에 열광적으로 도취했는데, 이는 그로 하여금 예술적 탐구의 방향으로 나아가게 한 최초의 시발점이 되었다.

반 고흐의 두 번째 사랑인 케이 보스 젊은 나이에 남편을 잃고 아들과 남게 된 사촌 케이 보스의 모습은 미슐레가 이상적인 여인상으로 제시한 ‘검은 옷을 입은 중년의 여성’ 그 자체로 반 고흐에게 다가왔다. 그는 자신이 케이 보스의 동반자라고 굳게 믿고 그녀에게 열광적으로 빠져들었지만 단호하게 거절당하고 말았다. 유지니와의 일 이후 그는 다시 한 번 참담한 마음으로 방황했다.

500 Vincent Willem van Gogh (1853-1890). Links: Dochter Maria geknield bijeen wieg met haar broertje Willem, maart 1883. (Coll. Van Gogh Museum, Amsterdam) en rechts: Sien met Maria op schoot, maart 1883. (Coll. Van Gogh Museum, Amsterdam) https://www.scheveningentoenennu.nl/strandschilders/18001900AL/gogh/denhaag20-29/gogh27/index.html < 무릎 위에 아이를 안고 있는 시엔 > 사회의 밑바닥에서 살아가는 비천한 여성에게 누구보다 깊은 동정심을 느낀 반 고흐는 덴하흐에서 알게 된 창녀 시엔과 그녀의 아이들도 진심으로 사랑했고, 그들과 따뜻한 가정을 꾸리려 했다. 그러나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안 그는 결국 시엔과 아이들에게서 떠났다. 그 선택이 쉽지만은 않았는지 이후 그는 마음이 “고통으로 시들어 간다”라고 표현했다

반 고흐는 시엔과 헤어진 뒤 북부의 춥고 어둡고 황량한 땅을 방황하다가 그 사이 부모님이 새로 이사해서 살고 있던 뉘넌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부모님과 무능해 보이는 서른 살 된 아들의 관계는 날마다 긴장의 연속이었다. 부모님은 목사관 뒤편에 있는 부속 건물을 비우고 아들이 화실로 쓸 수 있게 해 주었다.

 500  Poplars near Nuenen 반 고흐는 1883년 말부터 1885년 11월까지 2년간 뉘넌에서 머물며 약 280점의 소묘, 수채화와 비슷한 수의 유화를 그렸다. 야외에 나가 그리는 것을 좋아했던 그는 목사관 인근을 오랫동안 산책하며 평화로운 전원 속에서 그림의 주제를 찾았다. 캔버스에 유채, 98×78센티미터, 1885, 보이만스반뵈닝언미술관, 로테르담.

마르호트와의 사랑도 막을 내리게 되었다. 이 일은 이례적으로 빈센트가 상대로부터 사랑을 더 받았던 유일한 연애 사건이었다

500 < 탱부랭카페에 앉아 있는 아고스티나 세가토리 > Agostina Segatori in Le Tambourin 파리 시절, 탱부랭카페의 주인인 세가토리는 종종 반 고흐의 그림 모델이 되어 주었다. 이탈리아에서 태어나 파리로 건너온 그녀는 모델 일과 매춘의 경계에서 산전수전 겪은 여인으로 늙어 가고 있었다. 그런 그녀에 대해 반 고흐는 시엔에게 그랬듯이 깊은 연정을 느꼈다. 그녀 역시 반 고흐를 가엾게 여기고 그의 작품을 카페에 걸게 해 주는 등 둘은 비밀스러운 관계를 맺었다. 그러나 반 고흐의 도를 넘는 구애에 둘의 관계는 결국 틀어지고 말았다.

어머니의 사랑을 갈구하다

500 < 에턴 정원에 대한 추억 > Memory of the Garden at Etten 여성들에 대한 반 고흐의 사랑은 기본적으로 어머니에게서 기인한 바가 컸다. 어머니에 대한 애착이 강했던 그는 늘 모성 결핍에 시달렸고, 그래서 어머니 같은 여성을 보면 무섭게 빠져들었다. 그러나 현실에서 그의 어머니는 아들의 삶과 예술 세계를 끝내 이해하지 못했다. 이 그림은 반 고흐가 아를 시절 어머니를 추억하며 그린 것이다. 왼쪽 인물은 여동생 빌레미나를, 오른쪽 인물은 어머니를 모델로 한 것이다. 캔버스에 유채, 92.5×73.5센티미터, 1888, 스테이트헤르미티지박물관, 상트페테르부르크.

#걷기 800 〈사이프러스와 푸른 밀밭〉(프랑스어: Champ de blé vert avec cyprès, 영어: Green Wheat Field with Cypress) < 사이프러스나무가 있는 초록의 밀밭 > 평생 세상과 잘 어울리지 못한 반 고흐는 어려움에 처할 때마다 들판과 숲과 황야를 쏘다니며 그 속에서 위안을 얻었다. 자연은 그의 삶과 예술 세계를 떠받쳐 주는 버팀목이었다. 이 작품은 반 고흐가 생레미의 생폴드모졸요양원에서 머물 때 그린 것이다. 캔버스에 유채, 92.5×73센티미터, 1889, 국립프라하미술관, 프라하.

<한 켤레의 구두> 반 고흐는 산책을 자주 하고 자연을 사랑하는 것이야말로 예술을 진정으로 이해할 수 있는 참된 길이라고 생각했다. 인생을 목적지 없는 산책 혹은 여행에 비유하기도 했다. 그의 낡은 구두 그림들을 보면 가난한 방랑자가 짊어진 삶의 고단함이 고스란히 느껴진다. 캔버스에 유채, 41.5×37.5센티미터, 1887, 개인 소장. <반 고흐>, 유경희 - 밀리의 서재

< 프랑스 소설과 장미가 있는 정물 > 탁자 위의 책들은 에밀 졸라, 기 드 모파상, 공쿠르 형제 등 당대 자연주의 문학을 대표하는 작가들의 작품이다. 반 고흐는 당대의 삶을 담은 소설은 성서 이상의 역할을 한다고 보았다. 캔버스에 유채, 93×73센티미터, 1887, 개인. <반 고흐>, 유경희 - 밀리의 서재

500 < 낮잠 > The Siesta (in French, La méridienne or La sieste) 잘 감동할 줄 알았던 반 고흐에게는 좋아하는 화가들이 많았다. 그는 특히 밀레에 깊이 매료되었는데, 이 작품은 그의 생레미 시절에 밀레의 소묘 작품인 <한낮>을 유화로 모사한 것이다. 말년의 반 고흐는 발작에서 벗어날 때면 이렇듯 자신의 예술 행보가 시작된 밀레로 돌아갔다.

빈센트는 일찌감치 일본 목판화인 우키요에의 매력에 푹 빠져 있었다. 그는 일본 그림을 보고 몸살을 앓았다. 당대 유럽에서는 ‘일본주의’ 혹은 ‘일본 취향’을 일컫는 자포니슴이 예술가와 지식인 사이에서 대유행이었다. 화가들 중에서는 인상파 화가들이 더 각별한 관심을 보였다.

자포니즘#자포니즘이란

500 < 귀에 붕대를 두른 자화상 > Self-Portrait with Bandaged Ear 아를 시절, 빈센트가 자신의 귀를 자르고 난 뒤 처음으로 그린 자화상을 보면 배경에 사토 토라키요의 우키요에인 <게이샤가 있는 풍경>이 걸려 있다. 일본에 대한 반 고흐의 관심이 얼마나 컸는지 짐작하게 한다.

빈센트가 우키요에에 이끌린 것은 그 독특한 매력 때문이기도 하지만, 고향이 네덜란드라는 사실과 관련된다. 네덜란드는 일본이 쇄국정책을 유지할 때도 유럽 국가 중 유일하게 일본과 교역한 나라다. 빈센트는 어렸을 때부터 일본에서 온 도자기, 공예품, 우끼요에 등을 접할 수 있었다. 그가 런던에 살 때부터 관심을 가지고 지켜보던 우키요에에 대한 관심은 1886년에 파리로 간 뒤 본격적으로 깊어지기 시작했다. 파리에 온 뒤 일본 판화와 더욱 친해질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는 그가 엄청난 독서광이었기 때문이다. 일본 판화에 대한 관심은 그것을 적극적으로 소개한 공쿠르 형제로 인해 더욱 깊어졌다. 빈센트는 “일본적인 것은 영원하다”라는 공쿠르 형제의 선언이 환상적이고 독특한 전대미문의 무엇을 보여 준다고 생각했다.

파리에 오기 전 빈센트는 <감자를 먹는 사람들> 같은 암울한 작품을 그렸지만, 우키요에의 영향으로 그의 그림은 차츰 밝아지고 화사해지고 대담해지기 시작했다. 원색의 색채, 대담한 형태와 같은 표현법은 우키요에를 벤치마킹한 덕분이었다.

700 안도 히로시게의 원작 (왼쪽), 고흐의 묘사(오른쪽) < 비가 쏟아지는 다리 > 런던만국박람회와 파리만국박람회를 계기로 일본 미술과 문화가 서양에 본격적으로 소개되면서 유럽의 예술가들이 많은 관심을 보였다. 반 고흐 역시 우키요에의 독특한 구도와 색채와 질감에 매료되어 직접 모사하기까지 했다. 이 작품은 반 고흐가 우타가와 히로시게의 작품을 모사한 것이다.


500 < 우편배달부 조제프 룰랭의 초상 >

평범한 사람들의 얼굴에 관심이 많았던 반 고흐는 특히 아를 시절에 마흔여섯 점 정도의 초상화를 그렸는데, 그중에서도 조제프 룰랭과 그의 가족을 단골로 그렸다. 반 고흐와 룰랭의 인연은 비록 짧았지만 순수하고 호탕한 데가 있던 룰랭은 화가에게 따뜻한 이웃이 되어 주었다.

빈센트는 룰랭과 그의 가족을 1888년 7월부터 룰랭이 마르세유로 전근을 가기 전인 이듬해 4월까지 그렸다. 비록 짧은 만남이지만 그들은 빈센트에게 행복한 가정의 모습이 어떤 것인지 보여 주었다. 귀를 자른 사건으로 병원에 입원한 빈센트를 정성껏 보살펴 준 이들도 룰랭의 가족이었다.

500 < 룰랭 부인의 초상 > La Berceuse (Augustine Roulin), December, 1888, 반 고흐는 룰랭보다도 그의 아내를 더 많이 그렸다. 그중 아이를 낳은 지 얼마 안 된 그녀가 요람을 흔드는 모습을 담은 초상을 여섯 점이나 남겼을 만큼 그녀의 모성적 이미지에 깊이 감응했다 https://en.wikipedia.org/wiki/The_Roulin_Family

사실 두 사람의 동거는 우정의 연대에서 출발한 것이 아니었다. 이상적인 연대를 기획한 빈센트와는 달리 경제적 문제 같은 실리적 속셈을 가지고 있었던 고갱은 두 달도 되지 않아 아를을 떠나고 싶어 했다. 고갱은 테오에게 자신과 빈센트가 기질이 너무 달라 마찰 없이 사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미술 공부를 본격적으로 한 적이 없는 빈센트와 #고갱. 두 화가에게 배움은 도처에 깔려 있었다. 그들은 서로에게서 많은 것을 배웠다. 특히 빈센트가 고갱에게서 많은 것을 배웠다. 하지만 두 사람 사이에는 라이벌 의식도 있었다. 생각과 기질도 완전히 달랐다. 거만하고 매사에 자신감이 넘치던 고갱과 인간적이고 외로움에 찌든 빈센트는 2개월간 동거하면서 여러모로 많은 갈등을 빚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가 겨울이 되어 날씨가 추워지면서 좁은 실내에서만 머물게 되자 관계는 파국에 이르고 말았다.

빈센트는 아무것도 상상하지 않았으며, 오로지 자연을 보고 느낀 대로 그렸다. 반면 고갱은 먼저 사물을 보고 그것을 작업실에 와서 상상하면서 그리는 상징적인 수법을 중요시했다.

귀를 자르다

500 The Painter of Sunflowers Paul Gauguin 파울 고갱 #1888년 반 고흐와 고갱이 결별하게 된 직접적 계기가 된 그림이다. 고갱은 반 고흐와의 우정을 기념하기 위해 이 그림을 그렸다고 했지만, 반 고흐는 몽롱하고 흐릿하고 따분해 보이는 자신의 모습에 크게 분노했다

500 The Night Cafe – (Vincent Van Gogh) < 아를의 밤의 카페 > 반 고흐와 고갱이 자주 들르던 드라가르카페를 그린 것으로, 에밀 졸라의 『목로주점』에 나오는 풍경을 연상시킨다. 고독감이 느껴지는 분위기와 왜곡된 공간감이 술에 취한 자의 시선과 마음을 나타내는 것 같다. <반 고흐>, 유경희 - 밀리의 서재

500 < 론강 위의 별이 빛나는 밤 > Starry Night Over the Rhône 반 고흐는 삶에 어둠이 짙게 드리워지던 말년으로 갈수록 밤하늘의 별을 많이 그렸다. 그는 “별이 반짝이는 밤하늘은 늘 나를 꿈꾸게 한다”라고 했다. 아를 시절에 그린 이 그림은 생레미 시절에 그린 <별이 빛나는 밤>과 함께 그의 ‘별밤’ 그림을 대표한다. 코발트블루의 하늘을 배경으로 총총하게 빛나는 노란색 별들이 먼 곳에 대한 그리움과 동경, 처연한 슬픔의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듯하다.

반 고흐가 귀를 자른 뒤 입원한 아를의 병원 1888년, 크리스마스를 코앞에 두고 반 고흐는 고갱과 말다툼 끝에 자신의 왼쪽 귀 일부를 잘라 버린 뒤 아를시립병원에 입원했다. 이때 그린 병원 풍경을 보면 삭막하고 고립된 심경이 느껴진다. 다행스럽게도 예술을 좋아한 젊은 의사 레이의 배려로 그는 2주 만에 퇴원하여 노란 집으로 돌아왔다. 이때부터 우편배달부 룰랭이 그를 보살펴 주었다.

Sunflowers (Van Gogh series) #1888년


빈센트는 1889년 5월 8일에 정신병원에 자발적으로 입원하여 이듬해 5월 16일까지 꼬박 1년 동안 지내면서 그림을 위한 치열한 내면적 투쟁을 감행했다.

생레미의 생폴드모졸요양원 1889년 5월, 반 고흐는 상태가 점점 좋아지고 있었음에도 마음속 무엇인가가 무너져 내린 듯 생레미의 생폴드모졸요양원에 스스로 들어갔다. 그것은 자신의 평화뿐만 아니라 타인의 평화를 위한 자발적 감금이었다. 그는 이곳에서 이듬해 5월까지 지냈다. 그 1년은 그의 인생에서 육체적, 정신적으로 가장 치열하게 사투한 시간이라 할 수 있다.

The Starry Night < 별이 빛나는 밤 > #1889년 반 고흐는 일종의 뇌전증(간질)에 시달렸다. 환각, 발작, 의식불명, 극심한 우울을 동반하는 이 병을 앓았다는 것은 그의 그림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짙은 파란색을 배경으로 화면을 가득 채운 미로 같은 둥근 원, 소용돌이치는 구름, 굽이치는 곡선, 노란 달무리와 별무리, 역동적 터치 등이 그의 심리 상태를 드라마틱하게 보여 준다.

< 자화상 > #1889년 생레미 시절에 그린 자화상으로, 혼란의 극치 속에서도 그림을 통해 스스로를 구원하려는 의지가 엿보인다.

테오 역시 자신을 죽음으로 이끈 매독과는 별도로 우울증으로 고생했다. 남동생 코르는 짧고 불행한 결혼 생활 뒤 보어전쟁에 참가했고, 열병을 앓다가 아프리카에서 서른두 살에 총을 쏘아 자살했다. 빈센트와 유일하게 친했던 여동생 빌레미나는 40여 년간 정신병원에 수용되었는데, 말과 음식을 거부했고 몇 차례 자살 시도를 하다가 그곳에서 사망했다. 어머니는 아무도 꺾을 수 없는 신앙과 신념으로 모든 충격과 고통을 흡수하면서 여든여덟 살까지 살았다.


오베르쉬르우아즈의 도비니로 1890년 5월, 반 고흐는 드디어 생레미를 떠나 파리에서 가까운, 작고 평화로운 마을인 오베르쉬르우아즈로 옮겨 갔다. 이곳은 샤를 프랑수아 도비니를 비롯하여 카미유 피사로, 오노레 도미에, 카미유 코로, 폴 세잔 등 예술가들이 특히 사랑한 마을이었다. 반 고흐는 자신이 존경한 도비니가 이곳에서 절친인 도미에와 함께 살았다는 사실에서 깊은 감명을 받았다. 그것은 바로 그 자신이 아를에서 꿈꾸었지만 무산된 이상적 공동체의 전형이었다

폴 가셰의 집 오베르쉬르우아즈에 온 반 고흐는 카미유 피사로의 소개로 정신과 의사이자 예술 애호가인 폴 가셰와 왕래했다. 예술가들과의 친분이 두터웠던 가셰는 누구보다도 그들의 고통을 잘 알고 있었으며, 반 고흐의 탁월한 재능도 단박에 알아보고 그의 작업에 깊은 관심을 보였다. 그래서 자주 라부여관을 방문하거나, 반 고흐를 자신의 집으로 초대했다.

500 Portrait of Dr. Gachet 1890년 < 의사 가셰의 초상 > 반 고흐는 가셰의 초상을 두 점 그렸다. 그는 아내와 사별한 뒤 우울증에 시달리고 있던 가셰를 보면서 자기와 비슷하게 아픈 사람이라고 느꼈다. 그래서인지 초상화 속 가셰의 표정도 슬프고 무기력해 보인다. 가셰는 반 고흐가 그린 자신의 초상을 좋아하여 같은 그림을 또 그려 달라고 했다. 아래는 2번째 그린그림

500 < 정원에 있는 마르그리트 가셰 > Marguerite Gachet in the Garden 가셰는 아내와 사별한 뒤 딸 마르그리트와 아들 폴과 같이 살고 있었다. 가셰와 가깝게 지내게 된 반 고흐는 그의 자녀들과도 친구가 되었다. 특히 마르그리트는 잠시 동안이나마 그에게 기댈 언덕이 되어 주었다.

오베르쉬르우아즈행 기차 안에서의 테오 심리는 공포 그 자체였다. 사태의 심각성을 예견한 테오는 도착하자마자 급히 빈센트의 방으로 올라갔다. 담배를 피우는 형을 보자 만감이 교차해 왈칵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테오를 본 빈센트의 첫마디는 “또 실패했다. 이번에는 꼭 죽고 싶었는데······”였다. 그러고는 오히려 한탄하며 울부짖은 테오를 위로했다. “울지 마, 모두를 위해서 한 짓이야.”

7월 29일 자정 무렵, 빈센트는 동생 품에 안겨 힘겹게 마지막 말을 내뱉었다. “이렇게 죽고 싶구나.” 그는 30분쯤 더 그렇게 누워 있었다. 새벽 1시 30분쯤 두 눈을 크게 뜬 채 그의 광적인 가슴이 멈추었다. 자기가 스스로 총을 쏘았다고만 이야기하고 총기의 출처나 사건 장소를 전혀 밝히지 않은 채 세상을 떠났다. 테오와 라부가 빈센트의 사망계를 시청에 제출했다.

반 고흐의 마지막 방 1890년 7월 29일 새벽, 서른일곱 살의 반 고흐는 라부여관의 다락방에서 마지막 숨을 내쉬고는 평생 불화한 이승의 삶과 작별했다. 다음 날, 그가 지상에서 마지막으로 머물렀던 이 다락방이 있는 라부여관 로비에서 장례식이자 첫 개인전이 열렸다. 오베르쉬르우아즈에서 그린 그의 그림들이 벽에 빽빽하게 걸렸다. 이곳은 문상객들이 들고 온 노란 꽃으로 인해 금세 찬란한 노란빛으로 물들었다.

라부여관 로비 중앙에 관을 안치하고 그 앞에 팔레트와 붓, 이젤과 접는 의자를 놓았다. 벽에는 오베르쉬르우아즈에서 그린 그림을 빈자리 없이 빽빽이 걸었다. 네덜란드 풍습대로 꽃과 화초를 이용해서 관 주변을 장식했다. 가셰가 해바라기 꽃다발을 들고 왔고, 다른 문상객들도 노란꽃을 가지고 와 방 안은 금세 찬란한 노란빛으로 물들었다. #노란색 은 빈센트가 목숨을 걸고 구하려고 한 색채이자 항상 꿈꾸어 온 빛의 상징이기도 했으니 묘한 분위기가 연출되었을 것이다. 7월 30일 오후 2시 30분, 이렇게 빈센트의 첫 개인전이자 마지막 전시회가 열렸다.

《뇌운 아래의 밀밭》, 1890년 <구름 낀 하늘 아래의 밀밭>

《까마귀가 나는 밀밭》, 1890 반 고흐가 죽기 몇 주 전에 그린 것으로, <까마귀가 나는 밀밭> 등과 함께 오베르쉬르우아즈의 들판에서 그린 거대한 풍경화 중 하나다. 그는 시골 생활을 하면서 자신이 얼마나 건강해졌는지를 보여 주기 위해 이 그림들을 어서 파리로 가져가고 싶어 했지만 스스로 생을 마감함으로써 그러지 못했다.

반 고흐의 묘지 1890년 7월 30일, 반 고흐는 오베르쉬르우아즈의 밀밭 가장자리에 있는 작은 공동묘지에 묻혔다. 드넓게 펼쳐진 하늘과 밀밭이 내려다보이는, 해가 잘 드는 언덕에 위치한 그곳은 반 고흐에게도 익숙한 장소였을 것이다. 이제 그는 전 세계인들로부터 사랑받는 화가가 되었지만, 그런 영광이 무색하게도 그가 묻힌 자리는 아주 소박하고 쓸쓸하다. 마치 그의 생이 그러했듯이.


죽음의 트리거, 최후의 순교인가?   빈센트는 자신의 총상에 대해 어떤 정확한 메시지도 전하지 않은 채 사망했다. 1890년 7월 27일, 라부여관에서 점심 식사를 한 뒤 저녁나절에 총상을 입고 돌아올 때까지 대여섯 시간 사이에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당시 경찰은 간단히 조사를 마쳤다. 그날 일어난 사건에 증인으로 나선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의 이젤, 캔버스, 화구통은 사라져 버렸다. 총도 발견되지 않았다. 총은 누구의 것인가? 어떻게 습득하게 된 것일까? 왜 자신을 쏘려 했을까? 그리고 자살하려면 머리를 쏘아야 하는데 왜 가슴을 겨냥했을까?

아를 시절, 반 고흐가 테오에게 보낸 편지 반 고흐는 평생 그의 후견인이자 분신과도 같았던 동생 테오에게 668통의 편지를 썼다. 주변 지인들에게 보낸 편지까지 포함하면 그는 실로 엄청난 편지광이었다고 할 수 있다. 편지에는 구상하고 있는 작품의 스케치, 경제적 도움에 대한 호소, 삶과 예술에 대한 고뇌가 담겨 있다. 그것은 실로 한 예술가의 ‘영혼의 자서전’이라 해도 무방할 것이다. 테오는 형의 편지를 정말 재미있어했고, 형이 죽은 뒤에는 그것을 책으로 엮으려 했다. 그 작업은 훗날 테오의 아내 요하나에 의해 실현되었다.


요하나 (테오 아내)는 영구 묘지를 구입하여 빈센트의 유해를 이장했고, 23년 뒤인 1914년에는 테오의 유해도 옮겨 형의 곁에 묻었다. 마침내 빈센트는 그토록 꿈꾸던 동생과의 재결합을 오베르쉬르우아즈의 하늘 아래에서 이루었다


반 고흐의 작품을 최초로 호평한 알베르 오리에 반 고흐가 생폴드모졸요양원에서 정신병과 사투하고 있을 때, 파리에서는 스물세 살의 젊은 비평가인 알베르 오리에가 반 고흐 작품의 진가를 알아보고 새로운 천재를 발견했다며 찬사를 보냈다. 오리에의 기사는 미술계에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고, 사람들 사이에 반 고흐의 이름이 회자되도록 했다.


< 아를의 붉은 포도밭 > The Red Vineyards near Arles, 프랑스어: La Vigne rouge, 네덜란드어: De rode wijngaard

반 고흐가 아를 시절에 몽마주르수도원이 있는 언덕에 올라 그린 것으로, 살아생전에 유일하게 팔린 작품이다.


어머니 대신 테오가 어머니의 역할을 대신해 주었지만, 그렇다고 빈센트의 내면에 자리한 모성 결핍이 근원적으로 해소될 수는 없었다. 모든 욕망의 근원에는 결핍이 있고, 빈센트 역시 시간이 지날수록 어머니의 사랑을 갈구했다. 죽기 1년 전 생레미의 요양원에서 피폐해질 대로 피폐해진 가운데 그가 그린 그림 중 하나는 피에타였다. 그러한 열망으로 그린 수많은 그림이 어머니를 대신하는 유일한 품이었을 것이다.

6.읽으면서 떠오른 생각들

  • 형이 죽고 딱 1년뒤 테어난 고흐
  • 목사인 아버지, 그림을 그리던 어머니
  • 오늘날 ADHD가까운 산만함 소유
  • 아버지와 관계 틀어지고 끊어짐
  • 큰아버지도 화상이었고, 테오 동생도 화상일을 했다
  • 큰아버지 도움으로 구필화랑의 덴하흐 지점에 취직해서 그림을 파는 화상 일을 시작한다
    • 이때 유며화가를 만나고, 미술을 보는 안목을 키웠을 것
    • 바르비종파 화가의 그림을 팔았고, 바르비종파 대부 밀레에게 많은 영향 받게 된다
  • 그림 파는 일을 그만 두고 23살에 목사되기 위해 영국 -> 암스테르담으로 간다
  • 학교 입학 실패, 평신도 전도사로 25세에 벨기에 국격 탄광 지대 보리나주로 떠난다
  • 27세에 본격적으로 그림을 시작한다
    • 37살 죽을때 까지 그림을 1000여편 그리게 된다
  • 테오가 일하는 파리로 가서 몽마르트 언덕에서 테오와 2년을 같이 한다
  • 테오가 “고흐의 후원자, 물감가게 탕기아저씨” 줄리앙 프랑수아 탕기 Julien Francois Tanguy 를 소개
    • 인상주의를 후원하단 탕기
    • 인상주의 세잔을 적극 지지하고 화가들을 도와줌
  • 일본그림에 빠져있던 고흐
  • 남프랑스 아를로 간다
  • 어머이는 아들을 버린다. 아들이 죽고 유명해졌어도 그것을 무시했단다. 보냈던 그럼도 보관 안한듯 한점도 없다한다.
  • 호기심이 많았던 고흐
    • 걷기,독서,관찰,소묘,수집
  • 벤센트를 만든 것은 8할이 독서
  • 일본 자포니즘에 빠져있었다
  • 남프랑스 아를에서 고갱과 같이 동가 2개월 미만
  • 압생트 라는 술에 중독된듯하다고 한다
  • 고갱과 불화후 귀를 자른다
    • 고갱이 고흐가 해바라기 그리는 모습을 그렸고, 고흐에게 모욕적이었다
  • 마을사람들이 정신병원에 강제 보냈고
  • 퇴원후 스스로 살레 목사에게 부탁, 생레미 지역 정신병원에 1년간 입원한다
  • 고흐는 노란색을 좋아헀다.
    • 아를에서 노란집
    • 노란 해바라기
  • 동생 태오, 코르, 여동생 빌레미나 ..모두 정신질병으로 고생하다 사망
    • 어머니는 굳건한 신앙으로 장수
    • 큰아버지 2명도…
    • 어머지 쪽도 간질병과 정신병
  • 1890년 완치 판정 받고 생레미를 떠나 파리 리옹 , 동생 테오 보고, 조카도 만난다
  • 이후 사흘만에 오베르쉬르우아즈로 떠난다
  • 오베르쉬르우아즈에서 부자짓 형제중 동생이 고흐를 괴롭혔다
    • 그 형은 고흐에게 잘해주었다
  • 고흐는 권총으로 갈비뼈?를 자해 했고
    • 테오가 내려왔다
    • “울지 마, 모두를 위해서 한 짓이야”
    • 가족, 형제의 우울,정싱병,간질로 고생하는 형제간의 대화가 서글프게 들린다
  • 그날 일어난 사건에 증인으로 나선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의 이젤, 캔버스, 화구통은 사라져 버렸다. 총도 발견되지 않았다. 총은 누구의 것인가? 어떻게 습득하게 된 것일까? 왜 자신을 쏘려 했을까? 그리고 자살하려면 머리를 쏘아야 하는데 왜 가슴을 겨냥했을까?
  • 고흐가 죽고, 테오의 아내가 고흐 편지를 출판한다. 668통 편지.

7. 연관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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