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FO] 책 정보
- 저자: 저자/권보드래
- 번역:
- 출판사: 출판사/돌베개
- 발행일: 2019-03-01
- origin_title: -
- 나의 평점: 10
- 완독일: 2025-02-21 00:00:00
3월 1일의 밤

1. Befor Qustion
그믐 벽돌책 모임 https://www.gmeum.com/meet/2287?talkId=176839
2. Synopsis (개요)
2.1 저자 - 권보드래
서울대학교 국어국문학과 및 동 대학원을 졸업했다. 현재 고려대? 국어국문학과에 재직 중이다. 1900년대부터 1970년대까지 한국 근현대 문화의 형성을 추적함으로써 ‘지금, 여기’에 대한 이해를 넓히는 데 주력해왔다. 그동안 쓴 책으로 『한국 근대소설의 기원』, 『연애의 시대』, 『1910년대, 풍문의 시대를 읽다』, 『신소설, 언어와 정치』가 있고, 함께 쓴 책으로『1960년대를 묻다』,『아프레걸 사상계를 읽다』, 『미국과 아시아』 등이 있다. 오래 소망했던 ‘3·1 운동의 문화사’를 일단락했으니 앞으로는 좀 더 홀가분하게 공부할 생각이다. 지구문학의 광막한 지평에서 한국문학을 만나고 싶다.
2.2 주제
2.3 기획 및 지필 의도
2.4 주요 등장 인물
2.5 전체 줄거리
3.1 운동 100주년이 되는 2019년 3월 1일에 나왔던 책인데, 저자의 노고나 책의 가치에 비해서 주목을 받지 못했어요. 그런데, 저는 아주 좋게 읽었고 몇 차례 권하기도 했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잊었습니다. 이번에 알라딘 서점에서 21세기의 첫 25년의 책을 선정하는 추천 도서 목록에서 다시 이 책의 이름을 발견하고 나서(저도 아는 지인 경제학자 김두얼 선생님이 추천하셨어요!) 아, 더 늦기 전에 벽돌 책 함께 읽기에서 같이 읽자고 권해야겠다고 생각했답니다. 지금, 새삼 3.1 운동? 이런 생각을 하시는 분이라면 사실 3.1 운동에 대해서 아무 것도 모르고 있었다고 감히 말씀을 드립니다. 이 책은 실제로 1919년 3월 1일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그때 만세를 불렀던 사람들은 무슨 생각을 하면서 또 어떤 욕망과 비전을 가지고 만세를 불렀는지, 3.1 운동이 일어나기까지 1910년대 한반도에서는 또 전 세계에서는 무슨 일이 있었는지, 1789년 프랑스 혁명 이후에 계속해서 고양된 유토피아를 향한 열망과 전 세계적 열정은 3.1 운동과 어떻게 맞닿아 있는지, 그런 열망과 열정은 과연 세계를 좋게 만들 토양이었는지 아니면 그 역으로 작용할 수밖에 없는 것이었는지, 3월 1일에 만세를 불렀던 사람들이 안고 있던 1,000개의 욕망은 이후에 어떻게 구체적으로 또 보편적으로 전개되어 때로는 성공하고 때로는 좌절하고 때로는 배신하고 배신당했는지 등. 국문학도가 더듬거리면서 쓴 역사 책이기도 하고, 제대로 된 문학사 책이자 문화사 책이기도 하고, 한 편의 긴 역사 에세이 같기도 한 독특한 작품이에요. 전체 647쪽으로 @장맥주 작가님 기준 벽돌 책 기준(700쪽)에는 못 미치지만 내용의 밀도만 놓고 보면 벽돌 책 맞고요. 읽다 보면, 과거 함께 읽었던 한반도 바깥의 20세기 초반에 살았던 벽돌 책에서 마주쳤던 사람들이 수시로 등장하고, 또 1월과 2월에 읽었던 책과도 묘하게 겹치는 재미도 느낄 수 있답니다. https://www.gmeum.com/meet/2287?talkId=175689
3. After My Idea
3.1 Insight
3.1 운동, 서울 탑골공원, 종교단체-기독교,천주교- 기획, 학생들 - 중고등-이 주축으로 시작되어, 5월말 6월까지 전국에서 일어났다. 정보전달이 느렸던 시대라, 곳곳에서 해방된것으로 알고, 일본인에게 물러가라 일들이 있었다.
3.2 After Qus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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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y) 이 책의 제목을 이렇게 지은 이유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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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w) 어떻게 설명하고 있는가? 어떻게 하라고 하는가? 어떻게 해야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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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ere) 어느 곳에서 쓴 책인가? 어느 것을 위해 쓴건인가? 어디로 가야하는가? 어디에서 읽어야 하나? 그곳은 어떤 곳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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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en) 이책은 언제 쓰여졌는가? 시대적 배경은 무엇인가? 언제를 기준으로 쓰였는가? 언제 할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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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o) 저자는 누구인가? 주인공은 누구이고 어떤 사람들이 나오나? 누구를 위해 저자는 말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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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y) 이책을 통한 질문을 만들기
- 질문 1.
- 질문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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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at) 이 책에서 말하는 주제라는 무엇?
- 알게된 것은 무엇인가?
- 해야할건 먼가?
- 다른 책과 다른 점은 먼가?
- 이 책의 특징은 먼가?
3.3 Top 3 Highlight
500 3.1운동을 통해 가장 흔하게 목격되는 단어 중 하나는 #자유 다 (…) 황해도 해주 거주 50대의 농민이 그러했듯, 식민화 이후 새활이 개선됐는데 왜 독립을 바라느냐고 묻는 심문관에 대해 참여자들은 “타력적 진보는 그 쾌함이 무엇이며 피동적 일시의 안전은 무슨 만족이 또한 있을손가” 라고 질타하곤 했다. “세계의 대세상 사람은 자유이어야 한다”. “우리는 자유를 속박당하고 있으므로 겨우 월급장이에 만족하는 것 같은 일은 옳은 일이 아니다”. 제1차 세계대전의 종결과 아울러 세계적으로 고양되고 있던 ‘자유’는 식민지인의 불만에 이념적 기반을 제공했다. 식민 통치하 문명의 진보가 있었다손 치더라도 그것은 강요된 진보, 제국을 위한 진보, 착취와 불평등의 진보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
544 (염상섭) 3.1 운동을 통해 조선인은 비로서 집단적 ‘불령선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즉 저항하는 존재로서의 자존을 형성할 수 있었다. 조직망도 통신망도 저발달한 상태에서 사실상 전국 모든 지역에서 일어난 이 놀라운 운동은 지금까지도 부동의 민족적 알리바이다. ‘우리’는 단연 일제에 반대했던 것이다. 비록 힘이 모자라 짓밟혔을지언정 그것은 식민지시기 내내, 그리고도 오래 더 살아남은 기억이었다. ‘3.1 운동이 없었다면 민족으로서의 우리는 거의 아무것도 아니었을 것이다’
4. Key Word 책에서 뽑은 키워드 정리
4.1 3.1 만세운동 , 기미독립선언
<3.1 운동 전후 독립운동 단체들>https://www.chosun.com/site/data/html_dir/2017/02/21/2017022103410.html




- 정보 전달이 늦었던 시대, 운동은 전국에 걸처 6월까지 이어졌다
5.책 밑줄 정리 (책 밑줄 전체,page)
들어가는 글
3·1 운동 전후 국내외 주요 사건
[1910년대, 혁명의 시대](1910년대, 혁명의 시대) #1910년 멕시코 혁명
제1부 3·1 운동 그리고 세계
1장 선언: 현재가 된 미래
1919년 3월 1일 서울, 중앙학교생 채만식
27 #1919년 3월 1일, 당시 중앙학교 2년생이었던 채만식은 2시를 막 넘겨 탑골공원에 도착했다. 독립선언식은 즉흥적인 대로나마 예정된 시각에 거행되어 “만세!” 소리가 막 터져 나오고 있는 참이었다.
28 #선언 #기미독립선언 proclamation
- 소리높여 의견을 공표한다는 의미
- 기미독립선언 에서 사용한 단어,
declaration
- 경합 속에서 권리를 주장한다는 의미
- 미국의 독립선언,프랑스 인간과 시민의 권리선언에서 사용
- 군주가 행사하는 주권적 능력을 환수하겠다는 의지담은 명명법
- 오늘날의 <기미독립선언>에서 이단어 주로 사용
manifesto
- 공공연하게 입장을 밝힌다는 의미
- 미래를 당겨 쓰겠다는 의지가 가장 분명
- 공산당선언,파시스트 선언 , 초현실주의 선언 등에서 사용된 단어
‘독립’과 ‘만세’의 선후 관계
독립선언서 비교론
「기미독립선언서」의 비밀
1920년대 초까지 30여종이 - 독립선언서 - 발표되었다 ‘민족대표33인’이 서명한 <기미독립선언서> 는 그중 하나이다 38
전염되고 변형되고 증식되는 선언서
신문과 격문의 자발적 속전들
47 요컨대 <독립신문>은 기원에서부터 그러했듯 발행의 전 과정에 있어 대중의 자발성과 자결에 크게 힘입었던 것이다.
<독립신문>이 3.1운동을 상징하는 이름이 되고 임시정부의 기관지로까지 계승된 것… 창간호 1만부 인쇄에 그치지 않고 자발적 릴레이에 의해 여러 달 계속 발간 될 수 있었으며, 이로써 증식과 변형의 운동성을 상징해냈다. 그것은 곧 3.1 운동 자체의 생리이기도 했다.
등사기 https://www.khan.co.kr/article/200605151808051
언어의 힘, 운동의 테크놀로지
50 경상남도 통영군 연초면에 거주하던 21세의 농민 권오진은, 3월 25일 <조선 국민 독립단 경고문> 을 작성 등사한 후 시중에 뿌렸다 우편으로 일본 총리대신, 조선 총독 하세가와 요시미치에게 우편으로 부치고 각 지역 군수에 대한 사직 권고서를 작성 우편으로 배송시킨다. 징역 2년을 선고 받았다.
52 3.1 운동 당시 언어는 이렇듯 수행적(perlocutionary)이었다. #선언 이라는 말 그대로 그것은 미래를 당겨쓰는 방법이었으며, 목표한 미래를 일귀내려는 자기 결의의 표현이기도 했다.
민족대표 33인’은 청원과 선언 사이에서 고심했지만 3.1 운동의 대중은 ‘선언’의 급진성을 최대치로 고양시켰다. <기미독립선언서> 를 “조선이 독립이 되었습니다"라는 한 문장으로 요약한 18세 청년 채만식에 의해, 그리고 그 말을 고스란히 받아들여 “나두 만세! 만세!“를 외쳤던 촌로에 의해 그런 사람들에 의해 <기미독립선언서>의 선언은 (준)독립의 현실을 길러내는 생산적 모태가 되었다.
독립의 선언이 곧 독립의 현실을 구성한다는 믿음이야말로 3.1 운동의 비밀이다. ‘와야 할 현실’을 ‘도래한 현실’로 변형시킴으로써, 그러한 정언명령을 표현하고 전달하고 감염시킴으로써, 3.1 운동의 대중은 그 스스로 새로운 현실의 일부가 되었다.
무엇보다 그들은. 정작 ‘민족대표 33인’은 다 믿지 않았을지 모르는 <기미독립선언서> 를 곧이곧대로 받아들임으로써, 그 언어의 힘을 신뢰함으로써 1919년 봄의 거대한 봉기를 만들어 냈다.
그것은 ‘가리워진 언어가 드러나면서 언어의 빛이 뻗어나오는’ 희유한1 순간이었다.
2장 대표: 자발성의 기적
강화도 은세공업자, 전 육군 상등병, 34세 유봉진
“대표로서 소요를 감행하려 하니 사진을 찍으라”
‘대표’의 즉흥성과 비체계성
61 1910년대는 세계적으로 혁명의 연대였지만 3.1 운동만큼 자발적인 동시에 전국적인 봉기 양상을 찾아보기는 어렵다. 멕시코에서 도, 중국과 아일랜드에서도, 핀란드나 독일이나 헝가리에서도, 봉기가 더 끈질긴 일은 있었을지언정 3.1운동처럼 지역과 분파와 계층을 막론하고 참여가 거족적2] 이었던 경우는 없었다.
62 홀로 부른 만세가 부백 명의 호응을 얻어 대규모 거리 시위가 된 사례가 여럿인 반면, 몇 명이 만세를 외쳤으나 끝내 호응이 없어 무색하게도 선창자들만 체포돼 온 경우도 종종 있었다.
63 3.1운동을 통해 광범하게 목격되는 것은 오직 스스로의 힘에 의지한 결의와 궐기다.
64 ‘민족대표 33’인 에서 대표라고 자칭한 것은, 자칭 대표의 성격이다.
우드로우 윌슨의 ‘대표’
67 파리평화회의 당시 윌슨이 구상한 것은 식민지의 ‘독립’이 아니라 ‘위임통치 mandate’ 였다. 윌슨을 비롯한 구미 지도자들의 눈에 아시아.아프리카 지역의 식민지들은 아직 민족국가로서의 존재를 감당할 만한 ‘자아’가 아니었다. 아직 그 스스로를 통치할 만한 준비가 돼 있지 않은 민족, 그들은 신탁 되어야 할 대상에 불과 했다. 윌슨 자신부터 필리핀을 독립시키자는 논의를 ‘무책임하다’며 반박했던 터다
선교사의 양자 김규식, 조선을 대표하다
68 언더우드 선교사의 양자 김규식, 파리에 조선의 대표로 도착한다
고작 네 살이었던 그-김규식-은 벽지를 뜯어먹으며 목숨을 부지하고 있었다고 한다. 회생하기 어려울 듯 보였던 어린 소년은 , 언더우드 부부의 도타운3 사랑아래 발군의 재능을 발휘하며 자라났다
69 #김규식 일본어, 중국어,러시아어는 물론 몽골어, 산스크리트에 까지 통달… 1919년 2월 1일 중국 상하이 출발 파리에 3월 13일 도착
대표와 인민 사이 ― 유토피아적 직접성의 논리
79 (프랑스혁명)의회제도나 대표의 정치에 의존하지 않았다. 그런 제도는 존재하지 않았거나 그들의 생활영역에 들어와 있지 않았다. 대신 그들은 궁핍과 억압과 차별에 대한 분노, 안전과 자유와 평등에 대한 갈망에서 출발하여 ‘혼돈의 개방성 chaotic openness’ 속에 뛰어듦으로써 거대한 정치적 에너지를 형성했다. …3.1운동이 일어났던 1919년은 이같은 직접성-즉각성이 유례없을 정도로 고양된 시기였다.
매개 없는 세계 혹은 또 다른 대표
84 (대표) 정당성이 민중봉기에 의해 추인됨으로써 ‘민족대표’는 1919년 4월 상해 임시정부 구성까지 어어지는 동력이 될 수 있었다.
…갈래 갈래 분열됐을지도 모를 그들 흐름은 3.1운동의 폭발에 힘입어 ‘대한민국 임시정부’로 통일될수 있었다. … 이것은 ‘대표’ 개념 자체가 해체.재구성되고 있던 세계적 상황에서 일어난 숱한 실험 중 하나가 성공한 결과였으며 ,그 성공을 가능케 한 것은 봉기 대중이었다.
3장 깃발: 군왕과 민족과 대중
경성직뉴주식회사 서기, 24세 이희승
3월 1일 서울, 깃발 대신 모자를 휘두르며
태극기, 대한제국의 기억
왕의 목을 베는 대신 왕을 위해 통곡하고
‘공화만세’와 국민주권론
독립만세기와 만세 태극기, 대한제국의 비판 혹은 보충
106 3월 1일 서울, 4우러 23일 국민대회의날 서울에서 태극기가 목겨되지 않았다는 사실은 의미심장하다. …대신 등장한 것이 ‘조선독립’,‘국민대회’,‘공화만세’ 등을 대서한 깃발이다.
107 요컨대 3.1 운동에 있어 태극기의 위상과 의미는 통념보다 불안정했던 것이다. 한편으로 1900년대와 1910년대를 통해 국기의 의미 자체가 변화했기에 태극기는 3.1 운동에서도 등장할 수 있었다. 즉 군주의 통치권을 표상하는 측면이 약화되면서 국가-국민의 일체화 쪽으로 그 중심축이 옮아갔기에 태극기는 1910년 강제병합 후에도 민족 상징으로서 살아남을 수 있었다. (…) 3.1 운동기에 ‘독립만세’로써 보충된 태극기는 바로 그런 일련의 변형을 상기시키는 바 있다. 대한제국에 빚지고 대한제국을 기억하면서도 그 못지않게 강렬하게 신생(新生)에의 열망을 품고 있는 ‘만세 태극기’라면 말이다.
109 군주의 통치권을 표상하는 측면이 약회되면서 국가-국민의 일체화 쪽으로 그 중심축이 옮아갔기에 태극기는 1910년 강제 병합 후에도 민족 상징으로서 살아남을 수 있었다.
공론장으로서의 3·1 운동
1890년대부터 각국 ‘혁명사’와 ‘망국사’를 통해 수용되기 시작한 공화주의는 이 시기에 더욱 강력해졌다. 황제가 무력해진 대신 민간 영역이 활성화된 애국과 계몽의 경험이 ‘민 중심’의 정치적 실감을 돈독하게 한 까닭이다. ….문제는 그것을 논할 수 있는 장의 부재였다. 3.1운동은 봉기의 터전일 뿐 아니라 공론의 토대였다.
113 3.1 운동은 각성의 과정이자 아아 형성의 과정이었다. 목표를뚜렷하게 정하고실현 가능성을 가늠한 후 나선 운동은 아니었지만, 전략적 숙고와 준비 끝에 결행된 어떤 사건보다 폭발적인 혁명이기도 했다. 3.1 운동을 통해 한반도 주민들은 비로소 수천 년 군주 체제와 작별할 수 있었으며, 3.1운동을 통해 태극기는 비로서 만인의 국기가 되었다.
3·1 만세와 6·10 만세
115 3.1운동을 통해 대중은 (망명) 공화국을 추동해냈고 또한 스스로 공화국의 (잠재적)국민이 되었다.
왕(정)에 대한 식민지시기의 반응은 그야말로 ‘비동시성의 동시성’이라 불러야 할, 수백 년 기억이 얽혀 있는 복합성을 특징으로 한다.
4장 만세: 새 나라를 향한 천 개의 꿈
천도교구실 소사, 36세 이영철
독립했다면 어떤 나라를
125 ‘만세’가 저마다의 불만과 희망을 표현했듯 ‘독립’은 그런 불만과 희망이 해결된 미래상을 지시했다. 인민은 고통스런 현실이 철폐되길 소망했고 또한 현재의 부조리를 보상할 만한 새 나라를 꿈꾸었다.
희망과 요구, 불쾌와 평화의 ‘만세’
‘새 나라’, 토지 분배와 생활 개선에의 소망
132 1910년대의 폭력과 억압과 차별은 ‘일본’이라는 기호로 압축됐으며 ‘독립’은 그런 온갖 족쇄로부터의 해방을 의미했다. 헌.철종대 이후 조선의 역사는 민란이 끊이지 않은 역사였으나 그런 내력이 새삼 상기되는 일은 없었다.
133 한 걸음 나아가 독립되면 재산을 균분하리라는 소문도 전라남도 및 충청남도 일원을 중심으로 퍼졌다.
134 국유지를 경잘할 때는 내지 않아도 됐던 세금 또한 더 징수당해야 했으므로, 농민층에 있어 1910년대 토지조사사업은 그야말로 ‘땅을 빼앗기는’ 경험이었다. 3.1운동은 바로 그런 박탈의 근과거를 취소해버릴 수 있는 해방의 가능성으로 비쳤다. 단순히 토지조사사업 이전으로의 회귀가 아니라 진작부터 꿈꿔왔던 균분 혹은 보다 공평한 분배에 대한 소망까지 곁들여졌다.
[일제강점기 1910년대에 시행된 토지조사사업 1](일제강점기 1910년대에 시행된 토지조사사업 1)
138 1910년대를 통해 천도교의 약진은 대단했다. 1919년 당시 교단 측에서는 열성 신도만도 100만이라고 주장하고 있었을 정도다. …3.1운동 때도 교주의 뜻이라면 목숨까지 걸었다.
“만세 안 부르면 백정촌이 된다”
‘조선독립만세’를 외친 일본인들
파리평화회의를 논하는 농민들
147 …폭압적 식민통치에 시달리던 평범한 조선인으로서 감히 지역과 민족과 세계를 의식하며 사고하고 행동한 경험은 개인과 민족의 생애에 오래도록 영향을 남겼다. 3.1 운동의 ‘만세’는 한반도를 넘어 전 세계를 지향했으며, ‘독립’이라는 말로써 상상한 미래상 역시 전 지구를 겨누었다.
희생의 실체론― “11인 영혼이 씻사오니”
제2부 1910년대와 3·1 운동
1장 침묵: 망국 이후, 작은 개인들
1910년 8월, ‘이상할 만큼 조용한’ 서울
163 1910년대 중후반 물가고와 생활난이 극심해지면서 곳곳에서 조세 저항과 노동 분쟁이 있었으나 그 또한 산발적 수준을 넘어서지 않았다. 근 10년 동안 식민지 조선인들은 다만 침묵하는 듯 보였다. 그러나 1919년 봄. 그동안의 침묵과 공백은 거대한 운동성을 함축하고 있었음이 드러났다. 안재홍은 3.1 운동 지도 제안은 사양했지만 대한민국 청년외교단을 만들어 임시정부와의 연락을 책임졌고 이광수는 유학생 신분으로 도쿄에서 2.8 독립선언을 기초했으며, 박순천은 마산 의신학교 교사로서 독립선언서를 전달받아 학생 시위를 조직했다 순웅적이고 어리석은 듯 보였던 사람들은 3.1 운동을 통해 새로운 주체로 거듭났다. 특히 1910년대에 자라난 젊은 세대가그러했다.
뜻밖에 견딜 만한 식민지
[남한대토벌 1909년 1](남한대토벌 1909년 1)
양민으로서의 생애, 작은 성공과 쾌락
169 온순하고 선량한 백성, 제 앞가림에 착실한 백성, 성실히 일하고 근검히 저축하며 휴일에는 공원 산보로 만족해하는 백성 - 무엇보다 정치나 세계 대세 같은 허황한 화제에 유혹되지 않고 개인과 가족을 지상가치로 삼는 백성이 식민권력의 이상이었다.
170 “오직 돈이니라 오직 돈이니라"는 욕망은 용인되어야 했지만 한편 그 배금주의는 자칫 도덕과 규칙을 위협하지 않도록 제어될 필요가 있었다. (…) 성실히 노동하여 사사화(私事化)되고 가정화된 개인의 영역을 공고히 한 후, 여가에는 건전한 쾌락을 추구하고 사회적 관계에 있어서는 공익심, 자선심을 견지함으로써 성공적인 타협을 이루는 것이 1910년대 식민지 조선에서 모범적 처세술의 요약본이었다.
172 3.1운동이 없었다면 이 아이는 서른여섯이 되는 1945년까지 한번도 ‘독립’을 실감할 수 없었을 게다. 3.1운동 후 태어난 사람들이 1945년 해방 때 흔히 그랬듯, 일본이 패망했다는 소식에 환호하는 노년층을 보면서 알 수 없는 배신감을 느꼈을지도 모른다.
173 다른 지역의 식민지 기억과 비교해보면 한반도의 식민지 기억은 오히려 특별하다. 제2차 세계대전 종전 직후 독립한 여러 지역 중 한반도처럼 단호한 적대성으로써 식민지 시기를 기억하는 경우는 드물다. 1950~1960년대 반식민투쟁의 전면성과 폭력성에 비한다면 20세기 전반기의 반식민투쟁은 그 규모와 강도가 비교적 약했기 때문이리라. (…) 식민 이전을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에게 반식민을 요구할 수 있을까. 식민 바깥을 경험하지 못한 사람이 탈식민을 갈망할 수 있을까. 인간은 경험의 지평에만 갇혀 살지 않으니 그런 일도 응당 가능하겠지만, 경험과 기억의 힘이란 막강한 터, 적어도 그것을 대신할 만한 욕망과 상상력이 필수적이리라. 이런 맥락에서 볼 때 3.1 운동은 일종의 가상적 독립이었다.
운동회와 탐승회, 그리고 1915년 조선물산공진회
‘만세전’의 풍경 ― 증세, 토지조사사업, 공동묘지령
182 식민권력은 농업에 있어서도 근대화.합리화를 추구하면서 농민들에게 일본 벼 품종을 강제하고 면작과 잠업을 장려했다. 지극히 식민주의적인 근대화.합리화, 즉 “재래품종의 못자리를 짓밟아 못쓰게” 만드는가 하면 네모반듯한 정조식 모내기가 아니면 “묘를 뽑아버리고 다시 심도록” 하는 등 폭력을 통해 관철한 농업개량책이었다. 그 결과 벼품종의 경우 일본종이 1912년에는 2.8퍼센트에 불과하던 것이 1921년에는 61.8퍼센트를 차지하기에 이르렀을 정도다. 부역부담도 무거워져서, 평남 지역의 경우 도로 부역에 동원되는 횟수가 많게는 한 집당 연 12~13회. 최대 64회에까지 달했다. 3.1 운동 당시 여러 지역에서 “묘포 일도 할 것 없고, 송충이도 잡을 필요도 없으며 (…) 공사도 하지 않아도 좋다"는 외침이 터져나온 것은 이런 식민주의적 농정에 대한 반발 때문이었다.
물가고, 동맹파업, 1918년의 쌀소동
185 토지조사사업과 조세 신설에 중과, 공동묘지령 등은 식민지인들 사이에 큰 불만을 불러왔다.
조선 내 양질의 쌀을 대거 매수해 일본으로 보내는 반면 싼 값의 안남미는 조선으로 내보냈다. 그런데도 한 되당 10전 안팎이었던 쌀값은 40전 가까이까지 폭등했고, 제철소 노동자에서 부터 전차 운전수에 이르기까지 임금인상을 요구하는 시위가 끊이지 않았으며, 궁핌에 못 이겨 자살한 일가 소식도 신문지상에 오르내렸다.
2장 약육강식: 진화론의 갱생, 인류의 탄생
윤치호, “물 수 없다면 짖지도 마라”
약육강식이 보편법칙이라면 식민지는 왜
196 조선은 임진년이나 병자년의 수난을 겪으면서도 ‘도’와 ‘의’의 수호자라는 자긍을 잃지 않았던 나라다. 그러나 중화체제의 구심점이었던 중국 자체가 무너지는 과정을 겪으면서 조선 역시 ‘힘’이야말로 세계의 법칙이라는 사실에 충격적으로 맞닥뜨릴 수 밖에 없었다. 중화체제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국가 간 체제에도 익숙해져야 했다. “생존경쟁은 사회원리 … 민족제국주의는 천하풍조” 같은 표현은 이런 변화를 요약한 것이다.
199 3.1 운동은 사회진화론을 돌파함으로써 가능해졌고, 3.1 운동 이후 약육강식.적자생존은 시대에 뒤떨어진 명제로 취급받았다. 그것은 국망 이후 조선인들이 갈망해오던 변화이기도 했다. 1900년대에 사회진화론이 부국강병과 문명화를 추진하는 데 동력이 될 수 있었다면 1910년대에는 나라 잃은 상황을 수긍케 하는 자기비하의 방향을 벗어나기 어려 있던 까닭이다.
1900년대의 사회진화론은 민족과 개인의 상승 욕망을 함께 자극하는 효과가 있었다. ‘국민’의 일원으로서 계층과 성과 지역의 질곡을 벗어날 수 있다는 가능성이 열리고 있던 시기였다. 소외받던 계층∙성.지역에 속하는 사람들은 ‘나라를 위해’ 대중 집회를 열고 ‘나라를 위해’ 단체를 조직하고 ‘나라를 위해’ 신식 교육에 입문함으로써 저절로 자신의 사회적 입신까지 추구하는 이중의 효과를 거둘 수 있었다.
백정이 만민공동회에서 연설하고 여성들이 국채 보상을 위한 탈환회를 조직하며 서북 사람들이 기독교를 앞세운 문명화론의 선두에 섰던 시절, 나라의 독립과 부강을 위한 노력은 동시에 소외에서 벗어나는 자기실현의 방편이기도 했다
경쟁하는 우리, 이 구차한 현실을 넘어서
걸인과 낙오자를 바라볼 때
문명론에서 인류의식으로
210 1900년대에 조선이 맞닥뜨린 세계는 문명론적 위계로 분할된 세계였다. 인종과 민족과 국가의 경계에 따라 엄격한 구분이 적용되는 대신 각 집단 내부는 균질한 단일체처럼 가상된느 것이 그 세계의 특징이다.
211 ‘세계’와 ‘인류’의 보편주의가 학생과 지식인 사이에서의 동향을 벗어나 일반적인 기류가 된 것은 3.1운동 이후다. 거꾸로 말하자면 인류 보편주의의 성장에 힘입어 3.1운동의 이념은 비로소 형성될 수 있었다. …1900년대의 ‘대한제국만세’가 진화론적.문명론적 믿음에 기초해 있었다면 -우리 민족이 진화 발전해야한다는, 우리도 발전해서 유럽과같이 되야한다는 - 1910년대의 ‘독립만세’는 그 믿음을 회의하고 대안적 세계관을 모색하는 가운데 자라났던 것이다. -진화론적으로 우월하다고본 유럽의 부조리를 보고, 다른 세계관을 모색한다-
‘인류적 양심’과 ‘도의의 시대’
212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1918년 11월쯤, 불만은 무르익을대로 무르익어 있었다 종래의 약육강식론 대신 새롭게 현실을 진단하고 미래를 처방할 신선한 이념도 거의 준비된 상태였다. 때마침 유럽과 미국에서는 종전 직후의 이상주의적 분위기가 뜨거웠다. 3.1운동과 같은 운동은 어떤 규모, 어떤 방식으로든, 어떤 주체에 의해서든 일어날 터였다.
일본의 보편주의와 조선의 보편주의
218 비약적으로 발전한 국가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아의 공간을 허락하지 않는 데 일본 청년들이 반발했다면, 식민지 조석의 젊은이들은 국가가 사라진 상황에서 ‘그렇기 때문에’ 온전한 자유가 허락될 수 없다는 문제와 싸워야 했다.
“이 기회가 어찌하여 체코·폴란드만의 기회이겠습니까”
221 3.1운동 후 <학지광>에 실린 글.. “재래에는 약육강식이니 우승열패니 힘 즉 권리니 하는 등 여러 가지 우상을 많이 만들었다. 강자를 숭배하고 우자를 숭배하고 힘을 숭배해왔다. 약자.열자는 생존을 요구할 권리가 없다는 사상이 19세기 횡행하였다.” 그러나 김항복의 말마따나 이제는 ‘별천지의 별야망’, 다른 세계의 다른 이념이 요구되기 시작했다. 그는 “우리 일생에 이렇게 큰 변화를 보기는 다시 없을 것"이라고 예상했다. 그 말대로였다. 프랑스혁명 이후 오래도록 지체돼온 자유,평등,박애의 기류가 전 세계를 덮는 듯 보였다. 민족뿐 아니라 계급과 여성의 해방을 포함한 움직임이었다. 한반도에서 이미 입지가 좁아질 대로 좁아질 약육강식론은 마침내 종막을 맞으려 하고 있었다. 3.1운동은 바로 이같은 사상적 변동 위에서 태어났다.
3장 제1차 세계대전: 파국과 유토피아
1915년 10월, 블라디보스톡에서 민스크까지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조선인들
황기환 - 프랑스에서 정착하게되고 김규식등 조선인들을 도움
229 1922년 워싱턴회의 때 이승만의 지원 요청에 따라 미국으로 돌아갈 때까지, 황기환은 사실상 홀로 유럽 대륙에서 조선-한국의 대표로 활약했다.
일본의 시베리아 출병
235 신흥 군사강국 독일에 비해 영국이나 프랑스는 숫자에서부터 군사력이 열세였던 만큼 식민지 군데의 동원은 중요했다
236 #1914년 7월 개전 직후(1차세계대전) 동맥구인 영국의 지원 요청에 신속하게 참전을 결의, 11월에는 독일 식민지인 칭다오를 점령했으며 이듬해 3월에는 중국 동부 지역 병력을 증강했다.
전쟁의 위생학, 죽음이라는 대가
전쟁의 도덕화, ‘폐허 이후’의 기대
245 자유주의 대 파시즘 사이 충돌을 핵심으로 한 #세계2차대전 과 달리 #세계1차대전 은 선발 제국주의 국가 대 후발 제국주의 국가 사이 식민지 쟁탈 전쟁의 성격을 띠었으며… 제1차세계대전은 세계역사상 최초로 ‘전쟁범죄 war crime’와 ‘전쟁 책임 war respnsibility’ 개념을 낳은 전쟁이었다.
249 세계1차대전은 실로 크나큰 변화를 불러왔다. …식민지 조선 또한 3.1운동 이후 9시간 30분 노동제를 맞이했고 여성의 계몽과 해방을 논하게 되었으며, 반제국주의의 정서를 선명히 하면서 개조주의.사회주의.무정부주의를 받아들였다. 19세기 후반 세계와 조우했던 한반도는 제1차 세계대전과 3.1운동을 통해 비로서 세계의 의제를 동등하게 고민하는 주체가 되었다. 1900년대부터 문제됐던 민족의 생존과 부강은 이제 세계적 상황속에서 짚어야 할 문제가 되었고, 식민지 청년들은 세계적 존재와 인류적 실존을 개척함으로써 그 상황에 동참하였다.
4장 혁명: 신생하는 세계
메이지대 학생 양주흡, “민중이 회집하여 혁명을”
1911년 신해혁명, 중화체제의 종말
동아시아 진보 연대
『학지광』의 ‘혁명’
263 ‘혁명’은 인간의 욕구가 비정치적 사적 생활로 다 충족될 수 없음을 선명하게 각인시켰다. 위축된 생애, 경제・사회・정치적 제약에 짓눌린 생애에 ‘혁명’이란 실로 매력적인 촉발이요 선동적인 자극이었다. (…) “우리들의 목적은 실업에 있는 것이 아니”고 “다만 정치적 혁명”이라는 것이다. 그것은 즉, 1900년대의 열렬한 애국주의를 등지고 ‘양민’의 세계에 굴종해야 했던 변화를 한번 더 뒤집어 놓은 제3의 변신이었다. 사회・정치적 제약에 짓눌린 생애에 ‘혁명’이란 실로 매력적인 촉발이요 선동적인 자극이었다. (…) “우리들의 목적은 실업에 있는 것이 아니”고 “다만 정치적 혁명”이라는 것이다. 그것은 즉, 1900년대의 열렬한 애국주의를 등지고 ‘양민’의 세계에 굴종해야 했던 변화를 한번 더 뒤집어 놓은 제3의 변신이었다.
판단키에 따라 혁명의 핵심은 반역도 충성도 파괴도 건설도 될 수 있다. 전제가 입헌으로, 입헌이 공화로 변화하는 것이 혁명인 것과 마찬가지로 “부속국이 독립국으로” 되고 “식민지가 자립하게” 되는 것도 혁명이다. (…) ‘인상주의에 대한 사실주의’, ‘유물론에 대한 이상주의’라는 우열 관계를 설정하고 그 항목 간 전이를 ‘혁명’이라고 부르고 있는 점이 흥미로운데, 그러니까 여기서 ‘혁명’은 맑스・레닌주의적 함의와는 무관하게 일체의 본능 및 욕망의 해방을 가리킨다. 사회혁명이 곧 자아혁명일 수 있는 까닭도 그것이다.
267 종교개혁과 프랑스혁명과 산업혁명은 서로를 지지.보충하면서 ‘혁명’의 정당성을 강화한다. 그것은 유럽의 대표적 세 나라 각각의 산물이며, 자유와 번영을 향한 전진 운동이다. 종교개혁이 ‘혁명’의 정당성을 보증한다면 프랑스혁명은 그 위력을 증명하고 산업혁명은 그것이 문명화에의 길임을 약속한다. 종교와 정치 경제가 바뀌지 않는다면 진정한 #혁명 은 없다.
러시아혁명이라는 새로운 의제
3·1 운동과 ‘혁명’
277 ‘독립’을 최고의 가치로 추구했을 이들에게 있어 ‘혁명’은 어떤 의미였을까. … 조소앙은 1930년대 이르러 ‘독립’만으로는 운동가들의 목표를 다 표현할 수 없다 설파한 바 있다. 그는 근대 이전 중국의 ‘혁명’이 “찬탈행위 (…) 구 군주를 집어내고 통치자가 대체하였다는 의미” 였던 데 비해 서양어에서 유래한 ‘혁명’ 은 “폭력으로써 (…) 통치계급의 모든 기관을 여지없이 전복하고 즉각에 그들이 표방하는 주의로서 새로 통치기관을 시설하는 정치운동"이라고 정리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3.1운동’ 이라는 명칭은 다분히 해방 이후의 산물이다 ‘3.1’이라고 하여 사건의 내용보다 날짜를 앞세우는 명칭부터 암유적 수사가 3.1운동을 지배해왔음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독립이라는 문구로서 만반을 표현할 수 없는 약점”이 있고 “운동하는 방법도 독립 두 자만으로는 표현되기” 어렵다는 것이다. (…)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3.1 운동’이라는 명칭은 다분히 해방 이후의 결과다. ‘3.1’이라고 하여 사건의 내용보다 날짜를 앞세우는 명칭부터 암유적 수사가 3.1 운동을 지배해왔음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 모든 사건이 그러하듯 3.1 운동 역시 후속의 언어와 행위에 의해 끊임없이 다시 개시되고 경험되었다.
278 ‘개조’와 ‘혁명’을 겹쳐 보며 전 세계의 변화를 기대했던 청년들의 심리는 배반당했다. ‘혁명’과 3.1 운동 사이의 거리, ‘혁명’과 파리평화회의 이후 실제 세계 사이의 격차 - 3.1 운동 후 조선인들이 맞닥뜨린 질문은 그 간격을 어떻게 해결할 것인지의 문제였다. 1920년대 다양한 정파와 입장의 분기는, 이 같은 ‘혁명’의 불만족 또는 잉여에서 비롯된 결과다.
제3부 3·1 운동의 얼굴들
1장 시위문화: 정치, 일상의 재조직
북 치고 나팔 불고 노래를 부르며
284 (평양 숭덕학교에서) ‘반도 강산아/ 너와 나와 합께 독립만세를 환영하자 / 충의를 다해서 홀린 피는 / 우리 반도가(sic] 독립의 준비이다 / 4,000년 이래 다스려 온 우리 강산을 / 누가 강탈하고 누가 우리 마음을 변하게 할 수 있으랴 / 만국 평화회의에서의 민족자결주의는 / 하늘의 명령이다 / 자유와 평등은 현재의 주의인데 /누가 우리 권리를 침해할쏘냐"는 가사였다고 한다. 곡조는 찬송가 곡조를 차용했다. 악대를 선두에 세운 군중은 의기충천했다. 당시 평양고보 학생이었던 함석현은 훗날까지도 “대열을 해산키 위해 행진해오던 군대(71연 대)를 피하지 않고 오히려 그들을 향해 평양고보 악대를 앞세워 행군하던 감격은 잊을 수 없다"고 그 순간을 떠울리곤 했다.
팔각정·가마니더미·고무신수레
산상시위와 봉화
물동이 준비한 시민들과 한복 입은 학생들
296 서대문역 인근 의주통에는 아예 물동이가 등장했다. “평양 수건을 쓴 할머니들이 지켜서서 바가지로 물어 떠 주다가 바가지째 두 손을 번쩍 들고 만세를 부르"곤 했단다. 물을 주고 떡을 먹이고, 시위 대중을 성원하는 움직임은 3.1운동 내내 이어졌다.
297 ‘3.1 운동 계획을 미리 입수했지만 침묵, 그 사실이 발각나자 자결한 조선인 형사’ 정도 서사로 압축 전승된 사연은 실제 종로경찰서 고등계 형사였던 신승희의 행적이 투영 굴절된 결과로 보인다. <매일신보> 1919. 5. 22에 따르면 신승희는 “독립운동 관계로 천도교에서 5,000원을 받고 3.1 독립 운동 거사 계획을 묵인한 혐의”로 체포된 후 유치장에서 자살했다고 한다. 신승희 대신 신철이라는 이름이 거론되는 경우도 있지만 사연은 대동소이하다.
선언과 격문의 테크놀로지
유생 송준필, 서당 마룻장을 뜯어내 통고문을 인쇄하다
등사기 네트워크와 출판의 법리
310 등사기를 구하고 종이와 잉크를 조달하고 집필과 인쇄.배포 작업을 분담하는, 3.1운동 당시 그 자체 실천이자 현싱이었던 문자 언어, 그 중심에 위치한 등사기…
독립의 비밀, 독립의 자금
310 ‘언어의 사건’이기도 했던 3.1운동에서는 선언서와 격문을 제작하고 지하신문을 운반하는 일이 결정적으로 중요했다.
311 독립선언서를 지방에 전달할 때는…서울 지역 배포는 학생들에게 맡겼지만 지방의 경우 “언언서에 이름을 올린 사람이 각기 그 지방을 맡아서 배포하기로” 한 것이 원칭이었다.
313 ‘성미’라 하여 교인들이 밥 지을 때마다 한 숟가락씩 쌀 덜어낸 것을 모아 팔고 ,천도교회당 신축 기금을 걷었다 반납을 지시받은 것…
316 고무신 수레 위에 서는 데서 팔각정에 오르는 데까지, 손으로 쓴 격문에서 대량 인쇄의 출판물까지, 정감록풍 주문에서 기독교의 찬미가까지 - 3.1운동은 실로 각색의 문화가 공존한 장이었으며, 각양의 테크놀로지가 병립한 현장이었다.
2장 평화: 비폭력 봉기와 독립전쟁
마사이케 중위 피살 사건
식민자의 목숨과 피식민자의 목숨
324 아마 은신처를 전전하면서 조진탁과 고지형은 매일 손꼽아 독립을 기다렸겠지만, 체포되고법정에 서고 마침내 숨을 거둘 때까지 끝내 독립은 오지 않았다. 둘 다 60대의 노령이었다. <동아일보>는 조진탁의 재판을 보도하면서 “백발성성한 머리를 숙이고 가만가만히 하나님께 억울한 기도를 드리"는 것으로 피고의 모습을 묘사하고 있다.
그들은 왜 무기를 탈취하지 않았나
329 인도에서 간디가 사따그라하 운동 -비폭력- 운동을 시작 비폭력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고, 페루의 마리아테기 는 간디에게 깊은 존경을 표하면서도 “혁명은 불행하게도 단식으로 하는 것이 아"님을 분명히 했다. …1919년 봄은 이렇든 평화의 역설과 폭력의 옹호가 교차하면서 전 지구적 유토피아니즘 속에서 평화와 폭력이 재조형되던 시기였다.
…3.1운동 당시 조선인들은 왜 비폭력을 선택하고 실천했을까?
“때리고 불 지른다고 해서 만세를 불렀다”
338 만세를 부르지 않으면 구타한다고, 시위에 협력하지 않으면 불지른다고 위협할 때, 그것은 물론 위험을 나누자는 협박이었지만 동시에 환희를 함께하자는 초대이기도 했다
구타와 파괴, 때로는 축제 같은
343 생각해보면 그렇듯 축제 같은, 난장 같은 일면이 없었다면 3.1운동의 봉기는 훨씬 제한적이었을 것이다. 비굴했던 자아를 펴고 힘을 발휘하면서 3.1운동의 대중은 공동 행동에 의해 탄생하는 권력을 만끽했다. 그것은 존재가 새롭게 개시되는 순간, 폭력과 비폭력의 인간주의적 구분을 재고케 만드는 순간이다.
3·1 운동 이후의 무장투쟁, 잔혹한 반격 그리고
해외에서는 1919년 5월 독립전쟁을 위한 군정서4 가 설치됐고 같은 해 11월에는 암살 파괴.폭파를 행동방식으로 채택한 의열단이 창설됐다. 이러한 흐름 중 일부는 국내에까지 들어와 9월에는 강우규가, 이듬해 8월에는 안경신이 각각 총독과 평남도청을 대상으로 폭탄테러를 감행합으로써 일대 충격을 주었다. 거사 당시 강우규는 65세의 노인이요 안경신은 임신 4개월의 임부(차세)였다. 상해 임시정부에서는 ‘독립전쟁 원년’을 선포하고 공중전에 대비할 비행기 구입까지 추진하기 시작했다.
독입 운동가 임신4개월의 아낙내 https://ko.wikipedia.org/wiki/%EC%95%88%EA%B2%BD%EC%8B%A0
345 #1920년 10월에는 북로군정서 #김좌진 부대와 대한독립군 홍범도 부대 등이 중국 화룡현 청산리 일대에서 일본군에 맞아 싸워서 있따라 대승을 거두었다.
청산리전투5에서 큰 타격을 입은 일본은 그야말로 식민자다운 보복을 단행했다 간도대학살6 이라고도 불리는 경신참변7 이 바로 그 결과다
347 3.1운동은 인도의 사따그라하처럼 철두철미한 정신적 기반을 가졌던 것은 아니다. 조선과 인도의 식민지 경험이 크게 다르기도 했다. 일본에 비해 영국은 세계여론을 민감하게 의식하는 국가였고, 영국의 식민지 인도는 유럽에 그 목소리를 전할 통로를 다양하게 확보하고 있었다.
350 …아직까지도 폭력은 과거를 취소하고 미래를 앞당기는 유일한 방법으로 이용되곤 한다.
3장 노동자: 도시의 또 다른 주체
서울 봉래동, 3월 22일 노동자대회
356 표면상의 평온을 깬 것은 3우러 22일 아침에 열린 노동자대회다. 오전 9시 반쯤 봉래동에서 노동자 200 ~ 300명을 위시한 700 ~ 800 군중이 모인 것이 발단이었다.
…노동자는 운동을 계획할 때 필수적으로 고려해야 할 존재가 되었다. 예컨대 4월 23일 ‘한성 임시정부’ 주도하에 기획된 국민대회에서 노동자는 학생보다 더 중요한 동원 대상으로 고려된다.
밤의 노동자, 대안적 봉기 주체
358 밥과 술과 돈을 제공하면서 노동자들에게 만세를 의뢰하려는 이들도 간간이 있었다.
362 기생독립단이며 걸인독립단까지 등장했던 3.1운동기에 열 살 안팎 어린이들이 벌인 시위는 드물지 않았는데,
3월 말 서울, 투석과 횃불의 게릴라성 시위
‘노동의 레짐’의 변화와 8시간 노동제
파리평화회의 본회으가 폐막된 것은 #1919년 6월 28일 … 베르사이유 평화조약 제 13편 ‘노동편’, 노동조합권, 최저임금제, 8시간 노동제 명문화 한 조항 평화조약에 조인한 일본 역시 노동조합법을 제정하고 최저임금제 및 8시간 노동제에 대응해야 했다.
365 …한반도 남녘을 기준으로 노동법이 제정된 것은 훨씬 후일, 한국전쟁 중인 #1953년 이다.
“삼베로 머리띠를 두른” 자들, 광산·농업 노동자
1907년 8월, 12년간의 일본 망명을 마치고 귀국한 유길준(1856~1914)<사진 왼쪽>, 노동야학회에서 1908년 펴낸 노동야학독본.
3·1 운동의 주체와 한국 사회주의
371 농민은 농민군이 될 수는 있을지언정 뭉쳤다 사라지는 익명의 대중이 될 수는 없다. 비밀결사를 꾸리는 일도 쉽지 않고 테러의 주체가 될 수도 없다.
강원도 지역 시위에서는 삼베로 머리띠 동이고 삼베 도시락 지참한 ‘만세꾼’들이 목격된 바 있으며 3개 과격 시위 지역 중 하나로 꼽힌 수원 장안면 시위때도 “머리에 수건을 동여맨” 자들, “무덤의 봉분을 짓는 극하층 사람들"이 선두에 섰다.
372 3.1운동은 한반도 역사상 처음으로 도시를 진지로 한 대중운동이었고, 도시를 근거지로 한 주체들을 탄생,강화시킨 운동이었다.
373 3.1운동을 혁명과 해방 운동으로 의미화하려는 시도에 있어 노동자 시위는 적기 등장 및 토지균분설과 더불어 중요한 실증적 근거였다. #1917년 #러시아혁명 이후 사회주의에 대한 대중적 관심이 확산되고 있었고, 재러시아 한인 중 상당수가 적군에 가담하고 러시아 지역에서 한인사회당이 창당되는 등, 3.1운동 이전에 한국 사회주의의 기초 동력이 마련돼 있었으며 그 영향이 3.1운동을 통해 부분적으로나마 목격된다는 것이다. …한국 사회주의의 첫 장면에 3.1운동을 두려는 경향… #사회주의
380 식민지 조선의 제1세대 사회주의자들 중 상당수가 3.1운동 경험에서 그 정치적 생애를 시작 했다.
- 노동자들 도시의 중요한 시위 주체로 등장, 서울 봉래동 노동자 대회와 밤의 게릴라성 시위를 통해 독자적인 저항 방식을 보여줌
- 당시 노동 환경의 변화와 8시간 노동제 요구가 나타났고, 노동법 제정은 한국전쟁 중인 1953년에 이루어졌으나 식민지 시기에도 노동운동의 진전과 노동조건 개선이 점진적으로 이루어짐 ??
- 삼베 머리띠를 두른 농업 노동자, 광산 노동자, 도시 하층민 등 다양한 노동계층이 3.1운동에 참여, 이는 후일 한국 사회주의 발전의 토대가 됨
381 제1차 세계대전 전후 세계가 그러했듯 식민지 조선에서도 평화와 토지에 대한 요구가 드높았던 것은 사실이다. 고전적인 자유주의 정치학으로서는 그같은 요구를 수용하기 역부족이었다. 바야흐로 사회.정치적 대중이 탄생하는 가운데. 그들의 요구에 응답하는 데 있어 ‘윌슨과 레닌 가운데 어느 쪽을 선택할 것인가’ 가 점차 민감하게 의식되는 상황이었다. 사회주의는 1910년대 중반부터 아나키즘.생디칼리즘 등 다양한 사상과 더불어 조선 청년들 사이에도 소개되기 시작했고, 해외로 떠난 조선인들 중에서는 러시아혁명과 볼셰비키의 활약상을 직접 목격한 이들도 적지 않았다. 사회주의적 영향의 증거로 거론되는 3.1 운동기 적기나 토지균분설의 사례도 지금까지 보고된 외 상당수를 추가해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3.1 운동기 조선에서 ‘윌슨과 레닌 사이 선택’은 아직 문제되지 않았다. 사적 소유냐 집단적 소유냐. 자유주의 의회정치냐 평의회식 공화제냐의 논점도 자라나지 않았다. 조선인들은 근대의 입구에서 이미 근대를 향해 불만을 느끼고 있었고, 세계 여러 지역에서의 그 해결 시도에 공명하고 있었지만, 그 방향은 ‘비근대(un-modern)‘라고나 불러야 할 막연한 것이었다. 전근대적 요소와 탈근대적 요소를, 근대적 욕망과 반근대적 욕망을 함께 품은 혼잡한 벡터의 운동성이었다. 그런 가운데 복고보다 공화로, 중앙집구너보다 자치로 대중의 욕망이 수렴돼 가긴 했으나, 그 방향성의 최대치는 세계적 유행 사조인 ‘개조’를 넘어서지 않았다.
382 미국이 러시아 10월 혁명을 지지하는가 하면 유럽 사회주의자들이 월슨을 예찬하는 등 상호 연대의 저수량은 풍부했다. 명성 높았던 일본의 요시노 사쿠조는 ‘월슨 + 레닌 = 국제평화주의’ 라는 등식을 제안하기도 했는데 아마 그것이 제1차 세계대전 #1차세계대전 직후의 일반적 실감이었을 것이다.
… 그이전, 개조의 희망이 한창 빛나던 무렵의 사건이었다. 개조와 이상주의의 기만성을 비판하는 시각이 없지 않았으나 그런 현상을 바로 사회주의적 방향으로 해석하려는 것은 무리다. 맑스(K Marx)와 엥겔스(F. Engels)의 제1인터내셔널과 조레스(.Jaures)가 주도한 제2인터내셔널이 지나간 후, 래닌이 주도하는 새로운 사회주의는 막 형성 중에 있었다. 격심한 내전 중에서 신생 소비에트 러시아가 살아남을 수 있을지부터 불확실했다. 제1차 세계대전이 한창일 때 부상한 ‘개조’라는 사상이 그 추상성을 드러내면서 분화. 해소되는 데도 역시 몇 해가 걸릴 터였다. 계급과 인종과 성의 장벽이 철페되리라는 유토피아적 전망이 각 지역의 민족적 열망을 현실화하는 회로가 되고 있던 당시, 사회주의는 그 유토피아적 전망의 일부 혹은 이웃으로 비쳤다. 막 제기되기 시작한 ‘노동’문제 또한 아직은 ‘독립’과 ‘만세’의 영역에 있었다.
[한반도 조선에 사회주의가 유입된 배경 1](한반도 조선에 사회주의가 유입된 배경 1) [조선에 사회주의가 유입 전파된 원인 1](조선에 사회주의가 유입 전파된 원인 1)
4장 여성: 민족과 자아
아산보통학교 교사, 15세 박경순
388 #유관순 그와 같은 또래였던 유관순이 죽지 않고 살아 출옥했다면 어떤 길을 걸었을까. 연애열이 몰아치고 이념에의 열정 또한 대단 했던 1920년대에 어떤 선택을 했을까. 유관순의 애국은 가혹한 대가를 가져왔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한날 목숨을 잃었고, 감옥 에서 “저년이 너무 잘난 체하다가 제 부모도 잡아먹고 (..) 저년 하나 때문에 몇 고을이 쑥대밭이 되고 ( ..) 아이고 요년!” 같은 동 리 아낙의 악다구니까지 감수해야 했다. 그런데도 열여섯 살 소 녀는 포기하지 않았다. “유관순은 애달픈 목소리로 ‘만세’를 외쳤 다. 간수들이 달려가도 개의치 않고 만세’, ‘만세’, ‘대한독립만세” 를 외쳤다. 간수가 감방문을 열고 구타하여 그 소리를 잠재운 후 에도 관순의 흐느낌은 오래도록 이어졌다. ‘나는 이제 아무도 없 다. 아버지도 어머니도 없다. 부모님이 다 돌아가셨어..” 어 깨면 그가 재판정에서나 옥중생활에서 놀랄 만큼 전투적이었던 것은 분노와 절망과 슬픔이 너무나 컸기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아끼고 집착할 어떤 것도 남지 않았다는 뼈저린 마음 때문이었는 지도 모른다.
서울 대정권번 기생, 21세 정금죽
개성 북부교회 전도사, 39세 어윤희
‘미친 누이’, 칼 휘두른 백정 아낙들
396 결혼하여 평범한 아낙으로 살고 있었던 24살 김정희 …옷감으로 사둔 흰 비단을 사용했다는데, 거기 한글과 한자를 섞어 ‘대한독립만세’를 써 넣을 때 김정희는 피를 내서 한 글자 한 글자를 써 나갔다. 집게손가락을 베었다고도 하고 잘랐다고도 한다. 그 후 아침을 치르고 정돈까지 하고 나왔을지, 김정희가 체포된 것은 오전 11시경이었다. 홀로 노상을 배회하며 피로 쓴 독립기를 휘두르고 만세를 부르다 체포됐다고 한다.
397 1919년 5월 재감 인원을 기준으로 할 때 3.1운동을 통해 체포.기소된 여성은 총 212인 이었다. 대부분은 교사나 학생신분이다. 그 밖의 숫자가 많은 분류로는 무직 38인, 농업 18인, 해당 숫자가 적은 축으로 하는 하녀.고용인 2인에 여인숙이나 요식업 운영자 2인등이 눈에 띈다.
여성이 정치와 조우할 때
406 민족과 국가라는 명분은 신분ㆍ지역ㆍ성별에 있어서의 소수성을 넘어서는 데 훌륭한 명분이자 계기였다. 그러나 혁명은 흔히 전개 과정에서 소수자에 빚지고도 최종적으로는 소수자에 등을 돌린다.
3·1 운동기 여학생의 소설적 재현
408 3.1운동을 통한 여성의 변모는 놀라울 정도다. 본래 공적.사회적 존재였던 남성과 달리 오래도록 집안의 존재였던 여성은 3.1운동을 통해 비로소 사회적 기반을 얻는다.
이광수와 심훈의 여성 주인공
‘팔 잘린 소녀’, 여성과 희생제의
제4부 3·1 운동과 문화
1장 난민/코스모폴리탄: 국경을 넘는 사람들
3·1 운동과 망명 문학, 강용흘과 이미륵
425 이의경 그는 잠시 상하이에 머무른 후 1920년 4월 중국인 신분의 여권을 얻어 유럽으로 향한다. 안중근의 사촌동생 안봉근과 동행이었다. 안봉근 덕에 독일 남부의 수도원에 여러 달 체류한 후 의과대학에 입학한 것이 1921년 초. 몇 해 뒤에는 의학을 포기하고 뮌헨대학에서 동물학을 전공하기 시작해 박사학위를 받았다. 이러나 이후 이의경의 생애를 이끈 것은 의학이나 동물학이 아니라 문학이었다.
『초당』과 『압록강은 흐른다』, 이주자의 행로
헤이그 밀사 이위종과 몽골의 어의 이태준
민족주의 너머의 방랑
신분 증명과 여행 증명
442 3.1운동 이전 유럽에 거주하고 있던 조선인은 총6인에 불과했다.
민족국가와 치안의 경계―국민과 난민
450 3.1 운동 전후 20대를 맞은 청년들은 ‘조선’을 품었으되 전 세계로 유랑을 거듭했다. 역사학자 정병준이 2015년 출판한 <현앨리스와 그의 시대>에서 적은 말을 빌자면, 현앨리스뿐 아니라 “독립과 혁명의 찬란한 빛에 매료되었던” 실로 많은 청춘들이 “상하이, 블라디보스토크, 하와이, 뉴욕,도쿄, 서울 , 로스앤젤레스, 프라하,부다페스트,평양으로 줄달음질치며 역사와 자기 운명의 주인공이 되고자 했다.”
2장 이중어: 제국의 언어와 민족의 언어
조선어를 잡아먹는 일본어
식민권력의 유학 정책과 한문 정책
‘허약한 제국주의’와 매체의 지형
신문관과 최남선, 『매일신보』와 이광수
463 일본어 능력이 돈이나 출세와 직결되는 상황이 반복되면서 일본어에 대한 자발적 학습열은 서서히 높아져 갔다.
한글운동과 문학운동, 그리고 동인지 세대
식민지의 이중 언어
472 ‘문학’은 ‘간이실용’의 조선어로서는 감당할 수 없는 고급한 영역으로, 일본어 교육에 할당된 영역으로 간주되었던 것이다. 실제로 일본어를 통해 문학에 접했고 일본어로 문학을 실천하고 일본 문단에의 진출을 고민했던 청년들은 ‘조선어 문학’이라는 미지의 가능성 앞에서 혼란을 겪어야 했다. 한글 글쓰기의 규범이 완성되지 않았던 데 더해 한글 매체의 부재라는 악조건 또한 겹쳐 있었으므로 상황은 더욱 곤란했다.
‘국어를 상용하는’ 조선인들
476 “한국 근대문학사는 그 출발부터 이중언어적 상황에 놓여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3.1 운동 이후 제2차 세게대전에 이르기까지 한국문학은 한글-민족문학을 정상태로 여길 수 있었고, 그에 따라 그 바깥의 역사를 지속적으로 소외시켜 왔다. 3.1 운동 이외의 역사에 그만큼 맹목이었다고도, 민족주의 외 3.1 운동의 다른 측면에 그만큼 맹목이었다고도 할 수 있다. 그러나 3.1 운동을 잘 읽기 위해서라도 그 전후를, 맥락을 기억하는 일은 필요하고 또 소중하다.
3장 낭만: 문학청년, 불량의 반시대성
‘3·1 운동 세대’로서의 『백조』 동인
배재고보 3년생, 김기진의 봄
485 유명한 유관순을 비롯해 귀향 후 지역에서 만세시위를 조직하는 데 기여한 학생들이 여럿 있었으나 보다 다수가 택한 것은 관망과 숙고 쪽이었던 듯 보인다. 그럼에서 3월 1일 탑골공원에서, 3월 5일 남대문역 광장에서 출발해 수천명이 함께 시내를 활보하고 몇 시간 동안 “만세!“를 외쳐대며 거의 해방을 구가했던 경험은 이 세대에게 평생토록 흔적을 남겼다.
휘문고보 3년생, 정지현의 문학과 노동자대회
3월 1일 이전, 외롭게 죽어갈 때 민족은
492 3.1 운동은 좌우를 막론하고 이후 운동의 수원지였을 뿐 아니라 사상.지식.문화의 발원지였다. 개인과 공동체의 생애에 있어 도드라진 불회귀점으로, 3.1운동은 1910년대의 문화 변동을 계승하면서도 그것과 근본적으로 다른 장을 열어젖혔다.
3.1 운동 이전, 전근대적 왕조-가족-촌락 유대가 끊기고 1900년대식 애국주의도 불가능해졌던 1910년대에, 개인은 저마다의 생물학적 실존을 움켜쥐고 홀로 남겨졌던 바 있다. 전근대에도 1900년대에도 속박되지 않았던 도시 청년들, 특히 유학생들이 그러했다. 당연히 ‘죽음’을 화두로 한 1910년대의 문학 텍스트는 적지 않다
495 그러나 ‘죽음’이 문학적 주제의 핵심이 된 순간, 개체들이 저마다의 자유와 공허 속에서 씨름해야 했던 시절은 근대 한국에서 오래 가지 않는다. 3.1 운동을 만들어냈기 때문이다. 죽음을 직시하면서도 신생에의 의지와 공동체적 감성, 개조에의 의지를 키워내게 됐기 때문이다.
‘자유’와 ‘문화’의 관계
“피동적 문명이 무슨 만족이 있을손가”
498 1919년 3우러 이후 서울 소재 중등 이상 교육기관은 약 6개월간 공식적이거나 실질적인 휴교 상태에 있었는데, 9월부터 학교에 복귀한 학생들은 반항과 혁명의 기운을 완연히 몸에 익히고 있었다 “얼어 산술책은 집어던지고 천하대세를 통론"하기를 일삼았고, 여학생들 또한 “수틀과 골무를 뿌리치고 여자해방을 부르짖"었다.
청년대중이 가장 열렬하게 호응한 것은 다름 아닌 문화·예술 분야에서의 실험과 성취였다. 스스로 후진이라 여기는 처지로서 가장 역전 가능성이 높은 분야가 문화 쪽이기 때문이기도 했겠고, 신채호가 일갈한 대로 문예가로 행사하면 “혁명이나 다른 운동같이 체수와 포살의 위험은 없"기 때문이기도 했을 터이다.
신채호는 1920년대 초중반 학생 사회가 적막해진 이유를 “학생들이 신문예의 마취제를 먹은 후로 혁명의 칼을 던지고 문예의 붓을 잡으며, 희생,유혈의 관념을 버리고 신시.신소설의 저작에 고심"하는 까닭이라고 통매한다. 그의 말대로3.1운동의 소망을 이어 정치.경제적 ‘자유’를 추구하는 길이 험하디험한 길이라면 문화와 예술에서의 ‘자유’를 추구하는 길은 적어도 물리적으로는 훨씬 안전한 길이었다.
[3.1 운동으로 인하여 변화된 한국의 문학의 특징 1](3.1 운동으로 인하여 변화된 한국의 문학의 특징 1)
패션의 정치학과 ‘꿈’의 지도
500 3.1운동을 통해 가장 흔하게 목격되는 단어 중 하나는 #자유 다 (…) 황해도 해주 거주 50대의 농민이 그러했듯, 식민화 이후 새활이 개선됐는데 왜 독립을 바라느냐고 묻는 심문관에 대해 참여자들은 “타력적 진보는 그 쾌함이 무엇이며 피동적 일시의 안전은 무슨 만족이 또한 있을손가” 라고 질타하곤 했다. “세계의 대세상 사람은 자유이어야 한다”. “우리는 자유를 속박당하고 있으므로 겨우 월급장이에 만족하는 것 같은 일은 옳은 일이 아니다”. 제1차 세계대전의 종결과 아울러 세계적으로 고양되고 있던 ‘자유’는 식민지인의 불만에 이념적 기반을 제공했다. 식민 통치하 문명의 진보가 있었다손 치더라도 그것은 강요된 진보, 제국을 위한 진보, 착취와 불평등의 진보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
502 그것은 선택의 문제라기보다 불가피한 변화였다. 많은 이들에게 있어 3.1 운동 후 이전으로 돌아간다는 것은 불가능해졌기 때문이다. 식민권력에 의해 찍힌 낙인 때문이기도 했고, ‘더 알게 된’ 주체의 어쩔 수 없는 운동성 때문이기도 했다. 마치 더 행복하지는 못할지라도 더 자유로워졌다는 실존의 주체처럼 3.1 운동 세대는 ‘자유’의 윤리에 충실한 새로운 존재 방식을 모색했다.
503 어차피 죽어야 한다면 어떻게 살고 어떻게 죽을 것인가
507 식민지 조선에서 ‘신사’는 중산모-금안경-인력거-외투, 혹은 지팡이-머릿짓-금지환-양복-별댁(첩) 같은 패션이며 형태와 연관된 칭호이다.
510 ‘허위의 생’을 거부하고 ‘가진 자들’과의 결별을 선언한 문학청년들은 어디로 가는가? 그들 중 일부는 “철두철미 예술(…)새로운 정열과 경이"를 지향했지만 보다 다수는 문학이로든 정치로든 현실에 더 깊이 관여하는 길을 택했다. (…) 3.1 운동 이후 청년 세대 문학의 핵심은 ‘개인성의 고양’이었으되 그것은 군중-대중-다중에 적대적이지 않고 오히려 친화적인 개인성이었다.
511 3.1운동 세대의 소설에 있어서 그들 직업군은 무찔러야 할 대상이다. 3.1운동 세대는 그렇듯 ‘양민’을 거부하고 ‘불량’을 연기하며, ‘개인’을 추구하면서도 ‘대중’을 경애하는 자리에서 출발한다. (…) 3.1운동은 반시대적 정신까지 물들인 거대한 사건이었다.
1929년 11월 3일 대구, 시인 이장희
522 식민지시기에 3.1 운동을 민족주의적 숭고로 재현한 사례는 없다시피 하다. 그것은 이중의 난제였다. 외부적 규제, 즉 직·간접적 검열의 문제가 있었고, 그 숭고를 배반하면서 생활하는 자기 자신을 처리해야 한다는 자아의 난관이 있었다.
525 3·1 운동이 즉각 독립을 가져오지 못했다는 사실을 이제는 다 안다. (…) 침략주의·강권주의에 맞선 평화주의란 국제 정세를 오인한 결과에 불과했다는 견해가 주류화된 지 오래다. 3·1 운동 이듬해부터 이른바 문화통치가 조선에 시행되기 시작했지만, 그것을 운동의 성과로 인정하는 시각은 대체로 인색한 편이다. 봉기의 시간이 지나가고 나서, 한편으로는 파리평화회의와 워싱턴회의가 끝나고 나서 3·1 운동은 완연히 과거의 사건이 된다. 사회주의가 유행의 초점이 되는 가운데 3·1 운동 때 경험했던 민족의 공동체적 시간은 빠르게 박제화된다.
531 임시정부에서는 회의에 대표를 파견하는 등 독립을 위한 활동을 전개했으나 한편으로는 그런 국제회의를 불신케 된 사람들도 많았던 것 같다. 워싱턴회의를 ‘제국주의적’인 행사로 규정하고 대신 소비에트 러시아로 희망을 옮기는 자취는 회의 직전부터 보인다. 3·1 운동 후 여러 달이 지나고 심지어 1~2년이 지날 때까지 계속된 독립에의 기대가 이때쯤 좌절됐다고 해도 되겠다. 그야말로 센세이셔널했던 이광수의 「민족개조론」은 이 맥락에서 징후적인 글이다.
4장 후일담: 죽음, 전락, 재생 그리고 다 못한 말
이토록 많은 후일담
배반당한 숭고―「피눈물」과 「태형」 사이
「민족개조론」, 변신 또는 배신
534 (이광수) 독립이 불가능하다는 인식이 확산되면서 3.1운동에 대한 평가도 동요했을 당시, 이광수는 한때 자부심의 원천이었던 운동을 반성의 출발점으로 바꿔 놓는다. (…) 4,000 ~ 5,000년에 걸친 민족의 생애 중 2 ~3차에 불과한, 즉 기적에 가까운 전면적 개조 없이는 조선민족이 멸망하리라는 암울한 시선인 것이다.
이광수와 신세대, 시간을 둘러싼 경쟁
이광수와 동인지 문학사이의 관계는 역설적이다.
538 이광수가 시간과 성장의 서사-따라서 그것이 불가능할 때는 타락의 서사를 중시했다면 동인지 세대는 공간의 상징, 회귀와 비약의 서사를 좇는다. 이들은 이미 1910년대 중후반부터 오이켄·베르그송과 신칸트학파 등을 동시대 사상으로 호흡했고, 더구나 제1차 세계대전을 목격하면서 구미 문명의 우월성이라는 신화의 몰락을 절감한 세대다.
‘만세후’로서의 「표본실의 청개구리」
이광수가 3.1 운동의 타락을, 심훈이 3.1운동을 타락에의 항체로 의지하는 서사를 보여주었다면 <만세전>의 작가 염상섭의 자리는 이광수와 김훈 사이에 있으되 배신과 계승이라는 그 구도를 벗어나 있다.
544 3.1 운동에 대한 염상섭의 평가는 두 가닥이다. 하나는 3.1 운동을 통해 개선된 바는 사실상 전무하다는 내용이다. 무단통치가 문화정치로 치장을 바꾸었지만 일본의 경제·문화적 지배는 조금도 줄어들지 않았으며, 넓게는 세계적으로도 해방의 과제가 전연 달성되지 못했다는 것이다. 다른 한편 염상섭은 한반도에서 오랫동안 살아온 백성이 3.1 운동을 통해 “그래도 우리가 민족적으로 살아 있다는 것을 중외에 선포하였고” “아직은 죽지 않았다는 입증을 하는 데서 마음 든든한 정적 결속을 얻었"다고 평가한다. 말하자면 3.1 운동은 폐색과 해방이라는 이중적 효과를 가져왔다는 것이 평가의 골자라 할 수 있겠다.
염상섭의 시각마따나 3.1 운동은 종착점보다 출발점이라는 시각에서 바라볼 때 적극적 의의를 갖는다. 3.1 운동은 개인적·민족적 층위에서 공히 불회귀적 사건인 동시, 실패냐 성공이냐의 질문을 무의미하게 만들어버리는 종류의 사건이다. 그것을 부정한다면 ‘나’ 자체를 부정하게 되는, 존재의 기초이자 폭발적 성장의 계기인 것이다.
신세대의 기억, 유년 속 3·1 운동
552 이렇듯 문학사에서 계속 형상화돼 왔음에도 3.1 운동은 아직 미지의 영역이다. 이광수 장편에서의 타락-배신과 심훈 장편에서의 성장-사회주의를 두 축으로 둘 때 그 사이, 후일담 이전 3.1 운동을 그 자체로 탐사한 예는 거의 보이지 않는다. 이렇듯 편재하지만 결코 풍부하지 않은 3.1 운동의 유산 가운데 「표본실의 청개구리」는 그 충격과 모순을 그대로 드러냄으로써 특이한 지점에 도달하고 있다.
553 이들 소설… 이들에게 있어 3.1운동은 가능성의 정점이자 불가능성의 극점이다.
나가는 글
554 ‘나’ 아닌 어떤 것에 의지해서 ‘나‘를 설명할 수 없다는 사실을 절감한다.
555 이 책을 통해 제안하고 싶은 바는 간단하다. 3.1 운동을 그 세계사적 맥락으로 되돌리고 3.1 운동에서 토의된 정치·경제·문화적 쟁점들을 오늘에 되살려 보자는 것이다. 3.1 운동은 빛나는 경험이다. 그러나 그 빛은 천상의 순일성이 아니라 지상의 악전고투로 물들어 있다. 모든 가능성을 품고 있으나 가능성을 오용할 위험 또한 수태하고 있다.
557 어릴 적부터 독립운동가들은 고립된 영웅처럼 보였다. 외롭고 때로는 무서워 보이기마저 했다. 만세 외친 대가로 고문당하고 난자당했다는 유관순의 일화는 어린 마음에 악몽 같았다. 그가 그렇게 기억되길 즐길까 싶었다. 개발독재 시절 본격화된 유관순 신화는 한편으로는 민족주의적 숭고의 선양이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정치에의 공포를 조장한 은밀한 덫이 아니었는지, 그 고통의 반복적 현시는, 섣불리 정치에 뛰어들지 말라는 경고는 아니었을는지. 나는 위대한 운동가들을 고립과 소외에서 구출해내고 싶다. 인간으로 마주 대하되 여전히 숭고하게 느끼고, 그 단처와 약점을 받아들이면서 그럼에도 경애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3.1운동을 공부하면서 많은 존엄한 인생을 목격했다. 김경천, 김규식, 김필순, 신규식, 이태준, 이회영, 주세죽, 지청천….이름을 따로 꼽기 저어될 정도로 이들 외에도 상처투성이인 채 시종 자신과 민족에 성실했던 생애를 만나고 또 만났다. 그 경험이 내 자아의 작은 뿌리가 되면 좋겠다.
감사의 말 미주
장 표제지 인용문 출처
시각자료 출처
6.읽으면서 떠오른 생각들
- 1장,
- 정보전달이 늦는 시대라서, 정말로 독립이 되었다고 믿는 사람들, 심지어 공무원들도 있었다고 한다.
- 용어도 대한독립만세로 할것인지, 조선독립만세로 할것인지, 생각해보면 핸드폰도 없던,신문도 변변치 않던시절 일시에 운동이 시작되는게 신기할 따름이다.
- 지역마다 날짜가 다르긴 하지만.
- 독립선언서는, 기독교,천주교 조직을 타고 전국으로 배포되었다. 42
- 2장
- 한국의 3.1 운동은 중앙 조직 없이, 각지, 각 위치에서 자발적, 산발적으로 일어난 운동이었다.
- 65, 미국의 우드로 월슨 대통령을 , “우리는 당신을 아버지처럼 보고 있습니다” 라고 편지를 쓰곤했단다. 유럽에서도 미국의 월슨에게 도덕적 권위를 부여했다…..
- -> BUT 25년 미국 트럼프 대통령은 미국은 세계 경찰이 아니다. 이득이 되는 경우만 찾아 다니겠다 라는 노선이다.
- 미국의 윌슨 대통령등 선직국들은 아시아.아프리카에서의 피지배 현상을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그들이 조직을 이루고, 스스로를 통치할 준비가 안되어 있다고 봤단다…. 개소리
- 자기들 기준의 정치 체제가 아니면 조직이 아니란 소린가
- 조선은 500년을 이끈 정치조직이다
- 72, 김규식이 파리에 조선 대표 - 많은 대표가 있지만 제일 먼저 도착, 이승만도 가려고 했지만 여행허가 못받음 - 로 윌슨을 만나고 싶었지만, 이미 아시아,아프리카등 수많은 대표들이 파리에 와있었다. 중국마저 소외,묵살당했다.
- 84
- 미국이 아시아.아프리카의 ‘대표’가 없음을 무시했던것에 대해
- 저자는 ‘대표’라는 개념 자체가 재구성되는 시대적 흐름과 - 러시아 - 조선은 민중에 의한 ‘대표’ 개념을 재구성하고 성공한 경우라고 반박하는 듯하다 - 멋지다!!
- 102
- 고종의 죽음으로 인한 전국민의 애도
- 고종의 죽음 때문인가, 조선의 미래에 대한 희망이 좌절 되서 인가?
- 왕정체제에 대한 불만을 갖고 있던 민심은 어떤 마음이 었을까
- 대한민국이라는 이름을 지은것처럼, 왕정에서 민정, 민주주의로 전환을 희망했을 수도 있겠다.
- 134
- [한국전쟁의 기원 1](한국전쟁의 기원 1) 에서 조선의 토지 문제가 심각했음을 알게되었는데. 저자역시 그부분을 집어준다. 농민층의 억압과 분노가 3.1동으로, 불평등을 바로잡을 기회로, 혁명의 마음으로 동참했던거라///
- 172, 3.1운동후 태어난 아이가, 1945년 해방되었을때 무슨 느낌이었을까? 독립은 무엇이고, 노년층이 만세를 부르며 환호하는것을 이해할수 없었을까?
- 189
- 3.1운동 이전해부터 가뭄과 일본의 전쟁으로 물가 폭등 쌀값 폭등으로 곳곳에서 폭력과 항의가 들끓었다.
- 조선에서도 스페인 독감 - 1918년 - 이 퍼져 약 14만명이 사망했다고 한다
- 211
- 조선의 국민들은, 유럽을 동경하였으나, 문명화 되고 진화된 것 나라라는 것
- 그러나, 1차세계대전후 그것에 대한 회의적 시선을 갖게 되고 세로운 세계를 모색하는 분위기가 생겨났다.
- 조선일들도 1차세계대전에 노동력으로 참전했던구나
- 그때 유럽으로 나간 조선인들이 얼마나 되었을지 모르겠다.
- 236
- 1900년대 영국이 왜 일본하고 교류했는지 궁금했는데, 러시아의 아시아 진출을 견재하기도하고
- 1차세계대전당시 군사력 부족하여, 일본이 도와주기를 바란것이었구나
- 313
- 어릴적 교회에 할머니들이 주일마다 쌀을 조금씩 교회에 내던 생각이 떠오른다
- 그 쌀을 모아 공동의 식사를 하고 목사댁에 주식으로 썻을지 모르겠다.
- 그 기원인지 모르겠으나 3.1운동 당시에도 그렇게 쌀 한숟저, 십시일반해서 운영했구나
- 362
- 열 살 안밖의 어린이들도 3.1운동을 했다!!!!!
- 373
- 1917년 러시아 혁명으로 사회주의에 대한 조선의 노동자들의 관심이 증가했다.
- 부르주아 계급의 횡포가 역사적으로 계속되었던 조선;;
- 1917년 러시아 혁명으로 사회주의에 대한 조선의 노동자들의 관심이 증가했다.
- 382
- 조선에 사회주의가 소개되고, 중앙집권보다 권력 분배를, 새로운 사회 시스템을 필요로 하던 20세기초 한국과 세계들
- 그가운데 윌슨의 자본주이, 레닌의 사회주의는 당시에 선택지들 중 하나였다
- 결과론적으로 지금의 시선에서 보면 사회주의가 실패했기에 ‘악’으로 보게된느 우를 범한하다.
- 심지어 당시 레닌주도 사회주의는 막 형성되는 중이었고
- 신생 소비에트 러시아가 살아남을 수 있을지도 미지수 였다.
- 388
- 나는 유관순에 대해 잘 모르고 있었다.
- 삶을 바친 그의 독립을 향한 열정이 이랬구나
- 나는 유관순에 대해 잘 모르고 있었다.
- 400
- 31.운동 전후로 많은 청년들이 해외로 나가고 있었구나,
- 그시절에 태어났다면, 나의 처지상 나는 그렇지 못했을것 같다.
- 책을 읽거나, 선교사를 통해 예수를 영접하고 학자로서의 능력을 보인자들은 , 출국할수 있었으려나
- 31.운동 전후로 많은 청년들이 해외로 나가고 있었구나,
- 454
- 조선에서는 1943년 말이 되어야 겨우 일본어 사적영역에서 사용되는 비율 - 22.15% 라는데
- 타이완에서는 1940년에 일어 해독자 비율이 50%라고 한다.
- 이 차이는 무엇일까?
- 한국말의 문학적 어휘와 표현등이 부족하여, 일본어의 많은 표현들이 한국어로 재 표현되었다… 3.1운동 전후
7. 연관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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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하지 않고 드물다 稀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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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 결에에 관계되거나 참가하는 , 擧族的, 들거, 겨레 족, 과녁 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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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탑다, 우리말, 서로의 곤계에 사랑이나 인정이 많고 깊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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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로군정서는 1919년 동간도에서 만든 무장독립운동 단체이다. 대종교 계통에서 비롯되었다. 1919년 만주 지린성에서 서일, 김좌진을 중심으로 조직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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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산리 전투(靑山里 戰鬪) 또는 국내 한정 청산리 대첩(靑山里 大捷)은 1920년 10월 김좌진, 나중소(羅仲昭), 서일, 이범석의 북로군정서군(北路軍政署軍), 홍범도가 지휘하는 대한독립군, 대한신민단 예하 신민단 독립군을 주축으로 한 만주 독립군 연합 부대가 중화민국 길림성 화룡현 청산리 백운평(白雲坪)·천수평(泉水坪)·완루구(完樓溝) 등 간도에 10여 차례 출병한 일본 제국 육군과 벌인 전투다.
중국 마적이 일으킨 훈춘 사건을 계기로 만주에 대규모 부대를 투입하게 된다. 1920년 10월 21일부터 10월 26일까지 길림성 화룡현 내의 여러 지역에서 교전하여 청산리 골짜기에서 독립군은 일본군과 교전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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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도참변 - 간도참변 또는 경신참변 1920년 10월~21년 4월까지 일제는 만주의 관동군에 조선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 병력까지 합류시킨 대규모 정규군을 간도로 보내, 독립군을 토벌한다는 명목으로 그 지방에 살고 있던 무고한 한국인을 대량으로 학살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