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FO] 책 정보
- 저자: 저자/김윤희
- 번역:
- 출판사: 출판사/한겨레출판
- 발행일: 2023-06-12
- origin_title: -
- 나의 평점: 10
- 완독일: 2025-02-27 00:00:00
이완용 평전

1. Befor Qustion
YG 님 추천
2. Synopsis (개요)
2.1 저자 - 김윤희
인물정보 대학/대학원 교수 역사학자 저자 김윤희는 1967년 서울에서 태어났고, 고려대학교 사학과에서 『대한제국기 서울 지역 금융시장의 변동과 상업 발전』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자본주의와 근대국가의 관계에 관심을 두고, 세계 자본주의와 연결된 국내 시장의 투자 환경과 국가 경제정책의 관련성에 대해 연구해왔다. 현재 경원대학교 아시아문화연구소 연구교수로 재직하면서 국가주권과 인민의 관계를 규명하는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 『마주 보는 한국사 교실 7』, 『영화처럼 읽는 한국사』(공저), 『조선의 최후』(공저), 『통계로 본 근현대사』(공저)가 있고, 주요 논문으로는 「동양 담론 그리고 주권-정부-인민 관계의 균열과 전복」, 「근대국가 구성원으로서의 인민 개념의 형성」, 「파산, 식민지 근대 일상생활의 기표」 등이 있다
2.2 주제
2.3 기획 및 지필 의도
2.4 주요 등장 인물
2.5 전체 줄거리

3. After My Idea
3.1 Insight
나라가 힘이 없고, 세계 정세가 강대국의 땅따먹기 ‘The Greate Game’을 하고 있는 시대에, 조선은 강대국의 관심거리도 되지 않는다 오로지 그들의 야망에 이용할 도구에 불가했다. 그런 시대적 상황, 시류에, 저항해도 약하기만 한 국력과 무능하고 부패한 지도부를 보면 누구하나 막아선다한들 , 효과는 미미했으리라. 을사늑양 5인방이 아니었더라도, 누군가는 자신들의 배를 채우기위해 나라를 팔았을 것이다. 이미 곳곳에서 일본인과 협력하여 먹고사는 사람들이 있지 않았던가. 결국은 나라의 힘이 문제고, 교육과 인재의 문제였다. 조선시대부터, 그 이전부터 내려오던 봉건적 사상과 인간을 착취하는데 일말 양심도 없는 부르주아 계급이 만들어낸 결과 였을것이다.
지금 21세기도 수많은 이완용과, 을사늑약5적이 있지 않은가. 2024년 12월 3일 쿠테타를 일으킨 대한민국 대통령도 있는데, 무슨 증거가 필요할까.
3.2 After Qus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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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y) 이 책의 제목을 이렇게 지은 이유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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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w) 어떻게 설명하고 있는가? 어떻게 하라고 하는가? 어떻게 해야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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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ere) 어느 곳에서 쓴 책인가? 어느 것을 위해 쓴건인가? 어디로 가야하는가? 어디에서 읽어야 하나? 그곳은 어떤 곳인가?
-
(when) 이책은 언제 쓰여졌는가? 시대적 배경은 무엇인가? 언제를 기준으로 쓰였는가? 언제 할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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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o) 저자는 누구인가? 주인공은 누구이고 어떤 사람들이 나오나? 누구를 위해 저자는 말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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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y) 이책을 통한 질문을 만들기
- 질문 1.
- 질문 2.
-
(what) 이 책에서 말하는 주제라는 무엇?
- 알게된 것은 무엇인가?
- 해야할건 먼가?
- 다른 책과 다른 점은 먼가?
- 이 책의 특징은 먼가?
3.3 Top 3 Highlight
201 #최익현 은 을사5적뿐만 아니라 내각을 이끌고 있는 참정대신 한규설의 무능을 지적하는 한편 고종의 태도에 대해서도 엄중히 질책했다. “심지어 회의석에 나가서 폐하께서 비록 곤란한 형편에 처한다해도 한 차례 큰 위엄을 떨치기를 마치 토로 장군 손권이 책상을 쪼개며 단안을 내리듯 하고, 참정 및 여러 대신들이 죽음을 무릅쓰고 완강히 배척하기를 마치 선정 김상헌이 문서를 찢어버리면서 머리는 얻을 수 있어도 조약을 얻지는 못한다고 한 것처럼 한다면 저들이 비록 군병을 배열하고 억지로 협박한다하더라도 우리를 어떻게 하겠습니까?” 라고 하면서 최익현은 분명한 거절의 뜻을 밝히지 않는 고종의 태도를 지적했다.
4. Key Word 책에서 뽑은 키워드 정리
4.1 이완용의 태도들
10 매국노 이완용은 국가 또는 민족 구성원이란 소속감을 지탱시켜주는 배제된 타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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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와 관계하는 보통 사람들처럼 욕망, 절제, 그리고 소신과 흔들림이란 어휘를 통해 이완용을 들여다보자 글을 써나갈수록 당혹스러워졌다.
주어진 현실 앞에서 어쩔 수 없다고 스스로를 위안하는 나약한 인간의 모습을 확인해야 했고, 현실에 순응하여 실리적인 선택을 하는 것이 현명한 세상살이라고 생각하는 오늘날의 합리성이 발견되었다.
…오히려 그는 합리적인 근대인이었다.
‘충군’과 ‘애국’이라는 이데올로기적 가치를 위해 용기를 내거나 또는 제국주의의 폭력에 분노하기 보다는
자신을 포함한 다수가 문명화의 혜택을 누리기 위해 절대로 분노하지 않는 이성적 인간이었다.
왕과 국가, 개인과 민족 사이에 심각한 균열이 빚어질 때, 이완용이 선택한 것은 어느 한쪽도 아니었다.
균열을 직시하고 그것을 파열시켜 새로운 질서를 만들려고 용기를 내기보다는, 국가와 민족의 가치를 ‘미래’로 밀어내고 왕과 개인이 살아갈 현실을 끌어안으려 했다.
근대적 합리성이 극단의 시대와 마주했을 때 어떻게 발현될 수 있는지를 그는 자신의 삶으로 보여주었다.
14 이완용은 현실에 분노하기보다는 현실을 조망하려고 했다.
15 지금은 국가와 민족의 가치보다는 인권, 공공, 자유, 평등의 가치가 호명되고 있고, 여전히 부름에 호응하는 또는 호응할 준비를 하는 사람들이 존재한다. 그래서 오늘날의 이완용은 ‘매국노’로서보다는 ‘부조리한 현실에 분노할 줄 모르는’ 또는 ‘그것을 극복하려는 사람들이 호명하는 가치에 호응할 줄 모르는’ 인물로 비판되어야 할 대상이다.
4.2 연대기
- 경기도 광주군 낙생면 백현리 (분당구 백현동) 에서 #1858년 6월 7일 태어남
- 10살에 이호준의 양자로 들어가 서울로 올라감
- 11살때 충북 연기군 전의면 출신 선비 정익호에게 교육 받음
- 16살때 서예가 이용희 에게 서법 배워 -> 이때부터 일당이란 호를 쓰기 시작
- 13살 , 양주 조씨 병익의 딸과 결혼
- 조선 후기 노른 명문가 <- 풍양 조씨
- 고종의 러시아 공사관 피신 이후 친러파로 세력 떨친 조병식이 양주조씨 가문이다
- 17살 , 첫 아들 죽음고, 장녀 태어남
- 19살, 생부 사망,
- 20살, 양모 민씨 사망
- 23살, 아들 승구 , 다음해 차남 항구 태어남
- 25살, 문과에 급제
- 고종이 이완용 급제에 증서 수여 -> 첫만남
- 29살, 1886년 규장각 시교로 등용 -> 규장각 검교로 승진
- [갑신정변 (甲申政變) 1884년](갑신정변 (甲申政變) 1884년)
- 김옥균이 고종의 명을 어기고 고종의 신임하는 대신들을 살해해서 사이가 멀어진다.
- 갑신정변 이후 고종과의 대화로 친밀해지고
- 경학원 동학교수, 우영 군사마, 의정부 검상, 해방영(해군) 군사마등을 겸직하게 된다.
- 육영공원 좌원 학생으로 선발 -> 신문물 익히다
- 고종이 미국에 관심이 많았고 -> 미국을 배우면 고종 유용한 자가 될것이라는 생각
- 31살, 1888년, 미국 센프란시스코항 -> 대륙열차 -> 1월9일 워싱턴 도착
- 고종이 중국 간섭을 벗어나고자, 러시아, 미국등에 관심
- 미국 대사관 파견 결정 -> 이완용 동행
- 클리블랜드 미국 대통령과 접견한다
- 이완용은 병이나서 5개월만에 조선으로 귀국한다
- 귀국후 초고속 승진 거듭 정3품이 되고, 당상관에 올랐다
- 12월 이완용 다시 미국에 간다 -> 박정양 대신 주미대리공사 로 부임
- 청나라는 끝없이 친미를 방해한다
- 민씨는 친청파 이고, 고종은 중국 간섭을 벗어나려 한다
- 미국인 호러스 알렌 (한국 왕실 의사겸, 정치 고문,외교관 역활) 과 친분 쌓기
- 30살, 1890년 10월 조선으로 귀국
- 이완용이 미국생활에서 느낀 것은? 조선의 역할함, 나약함? 51page
- 34살, 종2품 ,이조 참판 역임 -> 정부부처 차관정도 되는 고위직
- 고종의 수많은 관직을 사양한다 -> 민씨의 세력 눈치
- 1894년 [갑오개혁 (甲午改革) , 갑오경장](갑오개혁 (甲午改革) , 갑오경장)
- #1894년 갑오 농민전쟁 동학농민운동(1894) 일어남
- 청일전쟁 분위기 고조 -> 혼돈
- 일본 #1894년 7월 23일 경복국 점령, 군국기무처 설치, 섭정 시작
- 일본은 청일전쟁중으로, 러시아,미국과 친분 필요, 조선에서 친미세력의 정동파을 이용 정부에 간섭
- -> 고종의 신임을 얻고 있는 이완용은 갑오내각에 참여한다
- 중국,러시아,일본,미국 의 영향력 아래 복잡한 정치계파, 고종과 민씨의 정치적 싸움들
- #1895년 10월 8일 을미사변 (乙未事變)
- 민씨 집안 (명성황후)를 일본 자객이 살해,
- 정동파 , 이완용은 위기로 주미대사관으로 피신
- 김홍집 재집권
- 춘생문사건 (春生門事件) - 고종탈출 작적 실패 -로 이완용 궁지몰림
- 민씨 집안 (명성황후)를 일본 자객이 살해,
- #1896년 2월 11일 새벽 아관파천 (俄館播遷)
- 고종과 세자는 궁녀의 가마를 타고 경복궁의 북문인 신무문을 빠져나와 러시아공관으로 간다
- 이완용과 이범진의 아관파천 작전 성공(39세)
- 서재필과 윤치호의 배후에 이완용
- [이완용이 이범진을 제거하려는 이유](이완용이 이범진을 제거하려는 이유)
- [영국은 러시아가 조선을 점령하는 것을 왜 반대했는가](영국은 러시아가 조선을 점령하는 것을 왜 반대했는가)
- 94 이완용은 러시아공사와 일본공사의 힘을 지렛대 삼아 이범진을 축출하는 데 성공했다.
- [이완용은 처음에는 친미파, 을미사변 후 친러파, 러일전쟁 후 친일파로 변절](이완용은 처음에는 친미파, 을미사변 후 친러파, 러일전쟁 후 친일파로 변절)
- 고종은 주한러시아대사관에서 나라 재건을 도모하고, 왕권강화를 위해 보수세력을 이용한다 106
- 고종과 보수 세력은 정동파가 갑오내각과 을미내각에 동조했다는 사실을 부각시켜 -> 구체제복구하려 한다 107
- 정동파 세력 위축됨
- 일본이 경부선 철도 건설을 이완용에게 압박한다 -> 러일 전쟁에 중요한 수단이기에
- [이완용은 왜 미국대신 일본을 선택했는가](이완용은 왜 미국대신 일본을 선택했는가) 120
- 독립협회 내부의 문제로 이완용은 선인 이미지에서 , 비리 세력을 비호하는 지방관으로 이미지가 굳어진다
- 이완용은 지방으로 내려가있는 상태였다. 148
- 1898년
- 만민공동회가 탄압받고, 독립협회가 해산, 대한민국은 정치적으로 보수적 분위기
- 김홍륙, 커피에 독을 타서 고종 암살 시도, 사형당함
- #1899년
- 대한제국 선포
- #1904년
- [러일전쟁 1904년](러일전쟁 1904년) 173
- 고종은 러시아가 전쟁에 이겨 , 일본의 압박을 덜어줄 것을 기대 , 러시아를 돕지만 실패한다
- 고종은 반일 인사들을 등용하려 하나, 납치되거나, 사직등으로 난항.
- #1905년
- 한국에서 일본 우월권 승인하는 포트머스조약에 러시아 승인 - 러일전쟁 패배로 인해
- 9월 27일 영국도 일본의 한국 점령 승인, 영일동맹 2차 발표
- 이완용은 러시아와,미국에게 기댈수 있는 희망이 없어진걸 알았다.
- #1905년 11월 17일 [을사늑약 1905년](을사늑약 1905년) 채결
- #을사5적 으로 불리는
- 박제순 - 외부대신
- 이지용 - 내부대신
- 이근택 - 군부대신
- 이완용 - 학부대신
- 권중현 - 농상공부대신
- [최익현(崔益鉉, 1833
1907)](최익현(崔益鉉, 18331907)) 의 반발,
- #을사5적 으로 불리는
- 1907년
- 이완용은 일진회와의 제휴 가능성을 피력해왔던 덕에 6월 14일 내각 총리 대신(총리)이 된다.
- 이토의 결정
- 고종의 [헤이그 특사 사건](헤이그 특사 사건) 발생,
- 고종은 왕의 지위를 순종에게 양위 - 순종에게 위임,양위 (넘겨주는것) - 한다
- 정미7조약 - 한일신협약 - 체결
- 일번 통감의 지도를 받아야 하는 조약
- 송병준 은 일진회를 만든 매국노, 이완용 내각에서 대신(일본 군부를 등에 업고 있었음)으로 있다가 일본으로 넘어감.
- 순종의 평화 순행 행사에서 술처먹고 시종무관 어담과 칼로 싸우다 . 해임되고, 일본으로 넘어가 조선을 합병하자는 운동을 한다. 233p
- 이완용은 일진회와의 제휴 가능성을 피력해왔던 덕에 6월 14일 내각 총리 대신(총리)이 된다.
- 1909년
- 이토 히로붐미 가 조선 통감에서 사임된다 -> 이완용 입지 난감해짐
- 일본은 조선을 합병할 준비를 한다
- 10월 26일 하얼빈에서 이토 히로부미 저격 사건 발생 하얼빈
- 일본은 조선을 합방해야 한다는 주장이 강해진다.
- 이토 히로붐미 가 조선 통감에서 사임된다 -> 이완용 입지 난감해짐
- #1910년
- 8월 22일 조선 일본에 병합되어 식민지 시작
- [한일병합조약 일제 강점기](한일병합조약 일제 강점기)
- #1919년
- 고종 사망 -> 영친왕과 일본 메이지 천황의 친적딸 결혼식 연기
- 3월 1일 3.1운동 -> 이완용은 적극 강경 저지하고, 윤치호-사상가,종교가,친일반민족행위자-도 반대한다.
- [1차세계대전과 3.1운동의 관계](1차세계대전과 3.1운동의 관계)
- 박영효 친일반민족행위자로, 이완용과 같이 후작을 하사 받음
- 1925년
- 조선인 재산 조사시
- 민영휘, 당시 6천만엔, 다음인 이완용 300만엔 -> 현재돈 600억
- 하지만 이완용은 소박하게 살았고, 투기와, 여색을 즐기지 않았다.
- 1926년
- 2월 11일 이완용 사망
5.책 밑줄 정리 (책 밑줄 전체,page)
#이완용
발간의 글
#사마천 #역사 역사란 크나큰 발자취를 남긴 위인만이 아니라 인간의 존엄성을 올곧게 지켜 나간 사람들이 함께 어울어져 만들어가는 것이라 여긴 사마천의 믿음 … 역사의 물굽이를 뒤바꾼 행적을 남긴 위인으로부터 하찮은 일상을 통해 시대의 가치를 되새기게 만든 범인에 이르기까지 소중하게 여겼던 그 마음
5 우리가 지난 역사 인물을 되살려보려는 이유는 시대와 개인이 맺고 있던 복잡다단한 관계를 읽어내고 싶기 때문입니다. 동일한 시대 상황에서 유사한 삶의 궤적을 읽을 수 있는 반면, 그들에게서 발견되는 미묘하지만 화해할 수 없는 차이를 추적하는 것이야 말로 시대의 요구와 인간의 선택이 빚어내는 공명과 파열을 생생히 전달하는 것이라 믿은 까닭입니다.
머리말
배제된 타자의 봉인을 열다
1장 관료로 내딛은 첫발, 그 신중한 한 걸음
- 당돌한 아이, 명문 반가에 발 들이다
- 과거 급제, 고종과의 첫 만남
- 육영공원 입학, 신문물을 익히다
- 1886년 9월
- 급변하는 정세 속에 결행한 미국행
- |서양의 눈에 비친 우리, 그 조선을 돌아보다
- |자못 신중한 행보, 뜻 펼칠 때를 기다리다
57 이완용이 미국에서 돌아와서 목도한 조선 정계에는 그의 생각을 실현할 만한 한 치의 여지도 없었다. 고종이 추진하던 개혁은 청의 간섭으로 거의 수포로 돌아갔고, 국가의 실권을 가진 내무부는 친청파 민씨 척족이 장악한 채 부정부패가 만연되어 있었다. 변화의 새로운 기운이 없는 정계에서 이완용이 자신의 입지를 찾기란 쉽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정치적 분란이 생길 수 있는 관직을 마다하고 때가 오기를 기다렸다. 1893년 가을, 생모 신씨가 사망했다. 이완용은3년간 꾸준히 지켰던 시강원 검교사서직을 사직하고 생모의 3년상을 치르기 위해 낙향했다.
2장 충성스러운 신하에서 기민한 정치인으로
- 갑오개혁, 급박한 정치적 소용돌이 가운데서
- |정동파의 입각, 그리고 친일 세력의 척결
- |성균관 개혁과 근대적 교육기관의 설립
- |친미파 수장으로 정치적 도박을 시작하다
- |정쟁을 가르며, 축출과 제휴를 거듭하며
62 1차 접보내각은 대원군 세력과 원로대신, 그리고 친일 성향의 젊은 개혁 관료 등으로 구성 자체가 매우 복잡했다. 그러던 중 그해 9월 청일전쟁의 두 번째 주요 전투였던 평양 전투에서 일본이 승리한 후부터 일본은 조선 정부에 대한 간섭을 강화하면서 반일적 성향의 대원군 세력을 제거해 나갔다. 조선 정부를 장악하려는 일본, 축소된 왕권을 강화하려는 고종과 중전 민씨. 개혁을 위해 정치 구조의 변화를 도모하려는 개화파 등의 입장이 뒤섞인 채 군국기무처를 통해 근대적 제도를 수립하기 위한 법률들이 결정되어갔다.
64 1차갑오개혁 - 대원군 과 민씨 대립, 왕이 배제된 상황에서 새로운 내각 2차갑오개혁 - 대원군,민씨 배제된 상태로, 친일적 관료 중심으로 개혁 -> 김홍집,어윤중,김윤식, 일본에서 돌아온 박영효등 갑신파 핵심
73 친러파의 대표격인 이범진과 친미파의 대표격인 이완용은 정동파라는 하나의 정치 세력으로서 강력한 반일 정책을 표방하면서 김홍집-온건개화파,친일파- 내각을 압박했다.
81 갑오개혁이 근대적 개혁을 표방하고 있었지만, 잇단 개혁 조치에 대한 반대 상소는 끊이지 않고 올라오고 있었다. 일본의 무력에 의해 겨우 유지되고 있는 취약한 정권이 500여 년이라는 긴 시간을 통해 형성된 유교의 기반을 바꾼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
3장 정계의 중심에서 세상과 만나다
- 보수 세력과 고종의 틈바구니에서
- |독립협회를 중심으로 세력 결집을 시도하다
- |정계의 주도권 다툼, 그리고 고종의 환궁
- |고종과의 대립, 뒤이은 중앙 정계에서의 퇴출
- |러시아 견제의 배후 세력으로 재기를 노리다
- |상반된 평판의 기로에 서서
118 독립협회 고문이었던 서재필 역시 <독립신문>을 통해 정동파의 정책을 지지하는 여론을 조성하는 한편 이완용을 서양 각국과의 교제에서 뛰어난 능력을 발휘하는 관료라고 평가했다.
144 일반적으로 을미사변 전후에 반일적 입장을 표명한 데 반해 아관파천 이후 반러로 입장을 바꾸었다는 점 때문에 우리는 그가 변신의 귀재이고, 그래서 을사늑약 체결 과정에서 친일파로 변신한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라고 간주해왔다. 그러나, 고종의 통치권을 회복하여 조선을 개혁해야 한다는 소신을 갖고 있던 이완용에게 그것은 변신이 아니었다. 더구나 고종의 신임을 통해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강화할 수 밖에 없는 권력 구조 속에서 이완용은 일관되게 군주를 보필해야 한다는 자신의 소신을 밀고 나갔다. 그 과정에서 그는 경륜있는 정치가가 되었고, 조선 인민을 자기 소신에 따라 움직이게 하는 방법도 체득할 수 있었다.
4장 정계 밖에서 설움을 겪다
- 지방의 부정부패와 민심의 이반 가운데서
- |정계에서 물러났으나 무시할 수 없는 정치인으로
- |시세를 관망하며 재기를 기다리다
- |정계의 혼란, 그리고 다시 찾아온 기회
157 이완용은 부조리한 사회의 구조와 관행이라는 거대한 힘에 맞서 승산 없는 싸움을 할 만큼 분노와 투지를 가진 인물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지방 향리 및 양반 토호와 한패가 돼서 진흙탕 속에 자신을 내던질 만큼 탐욕스러운 인물도 아니었다. 목민관으로서의 자세를 되새기면서 자신만이라도 오롯이 지켜내려 노력하는 완고한 원칙주의자도 아니었고, 주위의 시선을 무시하고 과감하게 관행을 잘라내는 과격한 행동주의자도 아니었다. 그는 주어진 상황에서 어느 누구에게 일방적으로 피해가 가지 않는 방법을 찾아내서 가능한 한 무리수를 두지 않고 일을 처리하려 하는 현실주의자, 합리주의자, 실용주의자였다.
5장 애국과 매국의 갈림길에서
- 대한제국 점령을 위한 일본의 압박이 시작되다
- |누구도 찬성하지 않았으나 체결된 을사조약
- |조약 체결의 책임은 누구에게?
- |합리성과 실용성을 갖춘 역적의 논리, 사회에 침윤되다
196 (이토 히로부미의 을사조약 건의에 대해) ㄱ 고종은 이토와의 만남을 피했다. 그는 이재극에게 “짐이 이미 각 대신에게 협상하여 잘 처리할 것을 허락하였고, 또 지금 인후통을 앓고 있어서 접견할 수가없다. 모름지기 모양 좋게 협상하기를 바란다"는 말을 전했다. 고종은 조약 체결 문제를 일단 대신들에게 넘겨버린 것이다.
198 을사조약은 고종과 9명의 대신들 누구도 찬성하지 않고 결정하지도 않은 채, 일본의 강압에 의해 채결되었다. 그리고 최고 결정권자였던 고종이 ‘거부한다’는 분명하고도 공식적인 결정을 내리지 못한, 그래서 결정한 바 없이 결정된 조약이었다.
203 고종은 대한제국을 자신의 나라로 보았지,백성의 나라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자신이 없는 나라는 상상할 수 없었던 것이다.
207 처음에 이완용은 을사조약을 예견하고 거부의 의지를 갖고 있었다. 그러나 일본 정부의 강력한 관철 의지를 확인한 후 고종이 이 문제에 대해 분명한 거절 의사를 표명하지 못할 것이라는 점을 알고서 자신의 역할을 결정했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그는 상황을 변화시킬 수 없다는 판단 속에서 조약문을 수정하여 되도록 왕권 행사에 유리한 조건을 마련하는 쪽으로 생각을 바꾼 것이었다. 그래서 통감의 권한을 외교에 한정시킴으로써 고종의 통치권을 침해하지 못하게 하려 했다.
6장 현실주의와 실용주의를 표방하며 친일로 나아가다
- 노련한 정치 편력으로 입지를 강화하다
- |신중한 개혁 노선의 표방, 그리고 제국의 분열
- |대한제국 통치권의 상징, 사법권이 일제의 손으로
- |정치적 위기, 칼을 맞고 쓰러지다
- |한 달간의 고민, 그리고 결단
- |의리와 매국 사이에서
213 이토는 박제순보다는 군부대신 이근택에게 정치적 힘을 실어주었다. 이근택은 대한제국 주차 일본군 사령관 하세가와 요시미치와 의형제를 맺을 정도로 친분이 두터웠기 때문에 이토의 신임을 쉽게 받을 수 있었다.
이완용은 1904년 이전의 고종 측근 세력으로 일본 라인이었던 이근택과 친분이 두터운 사이는 아니었다. 그러나 그는 내각의 실권을 장악하고 있는 이근택과 제휴하여 중앙 정치를 장악하고, 지방 행정은 이토와 협의해 개혁한다는 계획을 세운 후 실행에 옮길 기회를 보고 있었다.
214 이근택과 박제순의 대립 속에서 이완용은 ‘개혁’이란 명분을 내걸고 박제순의 내각 운영에 비판적 입장을 취했다.
217 이완용이 총리대신이 될 수 있었던 이유는 그가 고종과 이토, 그리고 송병준에게 모두 수용될 수 있는 인물이기 때문이었다.
242 만주에 대한 열강의 이권이 복잡하게 얽혀 있었기 때문에 일본 정부는 병합 시기를 쉽게 결정하지 못하고 있었다.
7장 권력의 정점에서 지탄의 절정으로
- 병합의 회오리 속에서 조선 상류층의 버팀목이 되다
- |일본인과의 인맥 형성을 통해 구가한 화려한 시절
- |격렬한 저항 운동의 발발, 내선융화의 논리가 강고해지다
- |일상생활에 대한 이완용의 소신
- |‘매국노’ 이완용의 죽음
274 대한제국의 총리대신이면서 황실의 인척을 제외하면 최고 작위를 받았던 백작 이완용의 인맥은 조선총독과 총독부 고위 관료뿐만 아니라 일본의 재계와 학계, 정계의 거물급까지 미치고 있었다. 이들은 식민지 조선에서 이완용이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게 하는 힘이 되어주었고, 고종과 순종 그리고 이왕직을 둘러썬 조선귀족과 상류층이 이완용을 필요로 하는 이유였다.
298 이완용이 매국노라는 오명을 쓴 것은 인간성을 상실한 그의 탐욕 때문이 아니라 현실을 인정한 가운데서 나름대로 ‘합리적인실리’를 추구했던 그의 사고 대문이었다. 무모하게 분개하거나 실리없는 의리만을 고집하는 태도를 버리고,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최대한 얻을 수 있는 이익을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더 중시했던 그는 100년 전 다른 양반 관료들과 달리 선진적이고 합리적이며 실용적인 사고를 지닌 인물이었다. 그래서 그는 망국의 현장을 떠날 수 없었다. 마찬가지로 3.1운동으로 민족의 분노가 표출되었을 때도 그는 일본의 식민 지배에 분노하는 군중의 모습을 안타까워했다. 차별, 불평등, 억압에 분노하기보다는 그 현실을 받아들이고, 그 속에서 실리를 추구했던 그의 태도 가운데서 우리는 부조리한 현실 속 에서 최대한의 이익을 얻는 것이 가장 합리적인 선택이라고 믿는 현대인의 태도를 발견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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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읽으면서 떠오른 생각들
- 10, 우리는 매국노 이완용을 비난함으로써 나는 국가에 이바지한다라는 상대적 우월감을 유지할 수 있다.
- 12 이완용의 삶을 들여다 보면서, 현실에 순응, 오늘날의 합리성이 그에게서 보였다. 우리는 과연, 나는 과연 다를까?
- 57 30대때 까지의 이완용의 삶은 합리적이고, 납득될만한, 오히려 정치적 행보에 대해서는 ..잘했다 말할만 한 삶이었든 한데…
- 1890년대, 갑오개혁 당시 이완용은 친미성향에, 고종에게 신임을 받는 자였는데…..
- 71, 이완용은 (정동파 , 친미) 갑오개혁당시 일본을 배척하는 입장에 슨다
- 81, 조선이라는 나라, 사대부들, 관료들의 부정부패로 허약한 국력, 일본이 거침없는 진격에 싸움을 걸 시도조차 하지 못한다.
- 청나라는 전쟁하고, 러시아도 전쟁하고, 협상하고 하는데, 조선은 그냥 정치질로만 버텨야했다.
- 정동파, 이완용으로 아관파천에 성공까지 했지만, 고종은 자신의 권력 복권을 위해 보수와 손잡고, 정동파 힘을 빼려한다
- 이완용은 정동파 입지가 좁아지고, 정치적 고립을 방지하고자 친일파도 손을 잡는다
- 러시아와 미국은 조선에 이득이 없어보이기에 간섭하려하지도, 차관을 주지도 않는다
- 이완용은 정동파 입지가 좁아지고, 정치적 고립을 방지하고자 친일파도 손을 잡는다
- 118, 현재 서울의 독립문과 서대문 독립공원에 서재필 동상이 있는데, 초대 대표위원장은 이완용이다. 이완용 대표 매국노 이미지로 서재필 동상만 있는듯 하다.
- 196, 을사조약을 강요받는 상황에서 고종은 끊임없이 모양좋게, 너내들이 잘 결정해라 라는 최악의 리더모습을 보인다. 찌질하게 …
- 200, 을사늑약에 대해 고종과 대신들의 무능함을 최익현은 성토한다. “문서를 찢어버리면서 머리는 얻을 수 있어도 조약은 얻지는 못한다"라는 선정 김상헌의 말이 애잔하다.
- 대한제국은 당시 왕정 체제이였고, 대신들이 의견을 내더라도 최종 결정은 왕이 한다
- 을사늑양 5인방에게 모든 비난이 쏟아지고 있는데, 왕 고종은 뒤에 숨어서 책임을 영원히 묻어두게 되었다.
- 225, 헤이그 파견 사태로 고종은 왕을 순종에게 물려주게 된다. 고종은 일핏보면 나라를 위해 갖은 애를 쓴것처럼 보이나.
- 속내는 개인의 영화를 되찾으려는 노력으로만 보인다.
- 240, 이완용 보다 송병준이 더 매국노였다.
- 242, 일본이 조선을 바로 합병하지 못한 이유는, 열강들의 눈치를 봐야하는 처지였기 때문이다. 러시아,영국,미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