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FO] 책 정보
- 저자: 저자/이언_모티머
- 번역: 번역/김부민
- 출판사: 출판사/현암사
- 발행일: 2023-01-12
- origin_title: Centuries of Change (2014년)
- 나의 평점: 9
- 완독일: 2025-04-23 00:00:00
변화의 세기

Summery
- 이 책은 ‘변화’라는 키워드를 중심으로 서양 천 년의 역사를 새롭게 해석하며, 각 세기별 중요한 변화와 그 주체 인물을 선정합니다.
- 평범한 사람들의 삶에 영향을 미친 사건과 인물을 찾아 사회사의 매력을 보여줍니다.
- 종교, 과학, 기술, 사회 등 다양한 분야에서 일어난 변화를 다루며, 각 변화가 유럽 대륙과 세계에 미친 영향을 분석합니다.
- 책은 11세기부터 20세기까지의 주요 사건과 인물을 통해 서양사의 흐름을 한눈에 조망할 수 있도록 돕습니다.
Keyword
#역사 #서양사 #변화의_세기 #이언_모티머 #사회사 #천년사 #유럽사 #종교개혁 #산업혁명 #프랑스혁명 #콜럼버스 #마르틴루터 #갈릴레오 #루소 #마르크스 #히틀러
Author
이언 모티머(Ian Mortimer)는 1967년 영국 출생의 역사가이자 작가입니다. UCL에서 기록학 석사, 엑서터 대학교에서 역사학 박사 학위를 받았습니다. 대표작으로는 베스트셀러 ‘시간 여행자의 가이드’ 시리즈와 영국 역사를 다룬 4편의 책이 있습니다. ‘타임스’는 그를 ‘우리 시대의 가장 주목할 만한 중세 역사학자’라고 평가했습니다.
1. Befor Qustion
2. Synopsis (개요)
2.1 저자 - 이언 모티머
인물정보 역사학자 Ian Mortimer 역사가이자 작가. 1967년 영국 펫츠우드에서 태어났으며 UCL에서 기록학 석사학위를, 엑서터 대학교에서 역사학 박사학위를 취득한 후 역사와 아카이빙 연구에 매진하고 있다. 베스트셀러 〈시간 여행자의 가이드〉 시리즈의 저자로 잘 알려진 그는 영국 역사를 다룬 4편-『중세 시대』, 『엘리자베스 여왕 시대』, 『왕정복고 시대』, 『섭정 시대』-으로 평단과 학계, 독자들에게 수많은 찬사를 받았다. 《타임스》는 그를 “우리 시대의 가장 주목할 만한 중세 역사학자”라고 평가했다. 2004년, 17세기 의학의 사회사를 연구한 공을 인정받아 왕립 역사학회로부터 알렉산더 상을 받았고, 2018년에는 소설 『시간의 방랑자』로 영국 사우스웨스트 지역을 다룬 작품에 수여하는 윈스턴 그레이엄 역사소설상을 만장일치로 수상했다. 12 권의 역사서와 4권의 역사소설을 썼으며 그의 책은 15개국 언어로 번역돼 130만 부 이상의 판매고를 올렸다. 기록물 연구자로서 모티머는 1991년부터 2003년까지 데번 레코드 사무소, 왕립 역사 원고 위원회 등 기록 보관 기관과 엑서터 대학교와 리딩 대학교를 포함한 역사 연구 기관에서 일했다. 현재 왕립 역사학회와 런던 유물협회 회원으로 활동 중이다. 기록 연구를 바탕으로 과거를 새로운 관점으로 해석하는 데 탁월한 그는 이번 책에서 연구와 집필 범위를 극적으로 확대한다. 지난 열 번의 세기, 천 년이라는 기간 동안 인간사를 바꾼 중대한 사건들을 새롭게 정의하고 변화의 주체를 꼽아 통시적이며 총체적인 역사 연구로 나아간다. 『변화의 세기』는 역사적 인물들의 위대한 업적보다는 민중에게 끼친 영향력을 중심으로 서술하며 기존의 역사관을 뒤집고 있어 역사 연구의 새로운 이정표를 세우는 작품이다. 일부 매혹적인 사료에 매몰된 역사 연구에서 벗어나 한 세기, 천 년을 넘어 진정으로 세상을 바꾼 역사적 특이점을 고찰한다.
2.2 주제
2.3 기획 및 지필 의도
2.4 주요 등장 인물
2.5 전체 줄거리
“변화의 세기들"은 독자들에게 역사를 통해 무엇이 변했는지 뿐만 아니라, 이러한 변화가 인간의 본성, 사회적 발전, 그리고 우리의 집단적 미래에 대해 무엇을 드러내는지 숙고하도록 초대합니다. 모티머의 탁월한 분석을 통해, 우리는 가속화되는 변화의 우리 시대와 진보와 함께 영원히 따라오는 질문들에 대한 관점을 얻습니다: 무엇을 향한 진보인가, 어떤 비용으로, 그리고 누구의 이익을 위한 것인가?
3. After My Idea
3.1 Insight
지금처럼 자원을 낭비하고 민족주의 이기주의로 계급 최상층 ,그들만의 영생을 위한 삶을 원한다면 인류는 다시 원시 시대로 돌가 갈듯하다는 저자의 예측 시나리오가 왜 공감이 되는지 모르겠다.
지구 환경의 위험을 다 알고 있지만, 현재의 권력과 부를 위해 누구도 꿈적하지 않는다.
긍정적 미래를 그려볼수 있을까?
암울한 시기가 오면 다시 종교의 힘이 필요할 것이라는 것도 흥미롭다.
3.2 After Qustion
-
(why) 이 책의 제목을 이렇게 지은 이유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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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w) 어떻게 설명하고 있는가? 어떻게 하라고 하는가? 어떻게 해야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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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ere) 어느 곳에서 쓴 책인가? 어느 것을 위해 쓴건인가? 어디로 가야하는가? 어디에서 읽어야 하나? 그곳은 어떤 곳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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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en) 이책은 언제 쓰여졌는가? 시대적 배경은 무엇인가? 언제를 기준으로 쓰였는가? 언제 할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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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o) 저자는 누구인가? 주인공은 누구이고 어떤 사람들이 나오나? 누구를 위해 저자는 말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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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y) 이책을 통한 질문을 만들기
- 질문 1.
- 질문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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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at) 이 책에서 말하는 주제라는 무엇?
- 알게된 것은 무엇인가?
- 해야할건 먼가?
- 다른 책과 다른 점은 먼가?
- 이 책의 특징은 먼가?
3.3 Top 3 Highlight
4. Key Word 책에서 뽑은 키워드 정리
4.1 키워드 1
키워드-제목 1
5.책 밑줄 정리 (책 밑줄 전체,page)
서론: 변화의 측정
모티머는 열 세기에 걸친 역사적 변화를 측정하기 위한 분석 프레임워크를 수립합니다. 그는 변화를 평가할 주요 영역인 정치, 기술, 경제, 사회, 문화를 소개합니다. 서론은 도발적인 질문을 제시합니다: 어느 세기가 진정으로 인간 존재를 가장 크게 변화시켰는가?
15 오직 독재자만이 천 년의 계획을 세우는 법이다. 우리 사회는 과거에 대단히 폭력적이고 성차별적이고 잔인했으며, 언제든 과거로 되돌아갈 수 있다. 이 사실을 가르쳐주는 것이 바로 #역사 다. 현대 세계가 어떻게 발전해왔는지 이해하는 것부터 인류가 어떻게 즐길 거리를 찾아왔는지 배우는 것까지, 역사 연구에는 여러 목적이 있지만 역사 연구의 가장 심오한 목적은 극단적인 상황에서 드러난 인류의 본질을 찾아내는 것이다.
18 가장 중요한 변화란 국가의 경계를 넘어서고 여흥entertainment이나 영적인 가치를 넘어서는 것임이 자명하다. 가장 중대한 변화는 자기 분야 밖에까지 영향을 미친다.
제1장: 11세기 (1000-1099) - 정복의 시대
11세기는 노르만의 잉글랜드 정복, 제1차 십자군 전쟁, 그리고 유럽 권력 구조의 극적인 변화를 목격했습니다. 모티머는 군사 기술과 봉건 제도가 어떻게 사회를 재형성했는지 조사하며, 동서양 관계를 영구적으로 변화시킨 동방으로의 확장을 이끈 종교적 열정을 탐구합니다.
서방 교회의 성장
27 서기 1001년의 인류는 읽고 쓰는 법을 배우지 못했으며, 미신을 맹신했으며, 외부 세계에 무지했고, 영적인 지도를 받지 못했다. 그뿐만 아니라 계속되는 고난과 위험에 직면했다. 굶주림과 빈곤은 어디에나 있었다. 사회는 폭력적이었으며, 자신을 지키려면 폭력에 폭력으로 맞서야만 했다.
29 #1001년 …기독교는 유럽 중부의 핵심 지역에서 북유럽, 동유럽, 남유럽으로 급속히 확장하고 있었다. 이는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을 매일같이 어긴 결과였다.
33 학자들 대부분이 로마 가톨릭교회의 부상을 11세기의 가장 큰 변화 가운데 하나로 꼽을 것이라는 데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기독교 세계의 확장이 부분적으로 로마 교회에 의존하여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기독교 세계의 지리적 확장은 교황청이 유럽 전역에 영향을 미치는, 광범위한 정치적·도덕적 권위를 지닌 권력 집단으로 부상하는 데 일조했다. 또한 교회의 권력이 강화되고, 교회가 사회 전체에 영향을 미치는 일련의 변화를 불러왔다. 교회의 성장이 없었다면 중세 시대는 우리 역사와는 퍽 다르게 흘러갔을 것이다. 955년부터 1100년까지, 서방 기독교 세계는 두 배로 커졌다.
…이 변화에는 복합적인 이유가 있었다. 열정적인 선교사들이 큰 역할을 했다는 데는 의심의 여지가 없지만, 더 중요한 요인은 폭력적인 이웃 국가에 대항하여 자국을 안정화하거나 새로운 땅을 정복해 자신의 권위를 높이려는 욕망이 지배자들 사이에서 퍼져나갔다는 점이다.
자국을 안정화하거나 새로운 땅을 정복하려면 동맹이 필요했는데, 가톨릭교회는 기독교 국가들끼리 상호 신뢰 관계를 형성하게 하는 도덕 체계를 제공했다. 더 많은 군주가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이자 눈덩이 효과snowball effect가 일어났고, 교회는 점점 더 강력하고 매력적인 존재가 되었다. 그러면서 각 지역의 이교도 신앙들은 힘을 잃어갔다. 여기에 덧붙여 지배자들은 실질적으로 독재권을 주는 종교를 받아들이는 것이 이로움을 깨달았다. 가톨릭교회는 군주의 권위를 강화해주었으며, 사회적 계급을 구분하는 철학을 제공함으로써 군주가 더 쉽게 왕국을 안정화하고 통제할 수 있게 했다.
평화
39 우르바노 2세는 그리스 정교회와 로마 가톨릭교회의 분열이 치유되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그리고 마침내 기독교 세계 전체에서 교황 수위권을 확고히 하기를 열망하며 기꺼이 도우려 했다.
#1095년 11월 27일, [우르바노 2세](우르바노 2세)는 수많은 군중 앞에서 설교했다. 기독교인들이 서로 싸우는 것을 중단하고 예루살렘으로 향해, 파티마 왕조 칼리프의 손아귀에서 주님 예수 그리스도의 성좌holy seat를 탈환하라는 내용이었다. 교황의 호소는 열광적인 반응을 얻었고, 제1차 십자군 원정으로 대표되는, 성지를 향한 여러 차례의 무장 순례로 이어졌다. 프랑크족과 노르만족 귀족들로 이루어진 제1차 십자군 원정대는 예루살렘으로 향하면서 아나톨리아와 시리아를 휩쓸었으며, 거대 도시인 안티오키아를 정복했고, #1099년 7월 15일 마침내 예루살렘을 함락했다. #1차십자군원정 #십자군전쟁
40 가톨릭교회는 유럽 대륙 전역에서 문해율을 높이고 저작 활동을 비롯한 지적 활동을 촉진했다. 그러나 가톨릭교회의 진정한 승리는 일반 대중에게 권위를 행사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11세기는, 가톨릭이 단순히 아이가 태어날 때 세례를 해주는 신앙에서 사람들이 어떻게 살고 어떻게 죽을지 좌우하는 거대한 조직체로 변화한 시기다.
42 유럽 사회가 폭력이 보편적인 낡은 문화에서 벗어나는 과정은 옛 이교도 적들이 새로운 기독교 친구가 되는 과정이 다가 아니었다. 이 변화는 사회경제적 변화, 특히 봉건 제도의 출현으로 인한 것이기도 했다.
노예제 폐지
48 교회가 성장하고 권위를 행사하려면 부유한 이들의 도움이 필요했는데, 부자들의 번영은 노예의 노동에 달려 있었다. 이런 부자들은 자신의 부를 부정하는 교회를 지원하려 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교회는 도덕적 사명과 돈의 영향력 사이에서 난관에 부딪혀 있었다.
49 #노예 slave라는 단어는 슬라브족Slav에서 파생되었다. 당시 슬라브족은 아직 기독교로 개종하지 않은 상태여서 기독교인 노예상들의 습격에 매우 취약했기 때문이다
구조 공학 , 건축 기술
51 1100년까지, 건축자와 구조 공학자들은 로마인 선조의 한계를 뛰어넘어 오늘날 우리가 로마네스크라고 부르는 양식을 개발했다.
클뤼니 수도원 복원도
클뤼니 대수도원은 프랑스 클뤼니에 있는 수도원으로, 전에 베네딕토회 소속 가톨릭 수도원이었다.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지어졌으며, 각기 다른 시기에 증축된 3개의 교회로 이루어졌으며, 10~12세기 경 완공되었다. 910년 12명의 베네딕도회 수사들이 지었으며, 그 후 수도권 개혁 운동을 주도하며 폭발적으로 성장해 건축 면에서든 수사의 수나 신학적 영향력에서든 가장 거대한 교회로 군림했었다. 교황도 4명이나 배출했다. (그레고리오 7세, 우르바노 2세, 파스칼 2세, 우르바노 5세)
거대한 건물은 로마네스크 양식의 절정으로 평가받아서 건축사에서도 매우 중요한 위치를 가지는 수도원이다. 그러나 18세기에 이르러서는 쇠퇴했고, 프랑스 혁명 때 철저하게 파괴되어 오늘날에는 잔해만 남았다.
스페인 레온 왕국의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대성당

53 투르부터 리모주, 콩크, 툴루즈를 거쳐 최종 목적지까지, 프랑스에서 스페인으로 순례하러 가는 여행자들의 주요 길목에 인상적인 로마네스크 교회들이 건설되었다. 이 도시들은 미래의 기사와 순례자들이 하느님의 경이로움 앞에서 경외심을 느낄 수 있도록 방문자들의 기부금으로 성당을 확장했다. 11세기가 흘러가는 동안 레콩키스타는 계속해서 성공했고, 이는 더 많은 방문객으로 이어졌으며, 이들의 기부금은 교회 건설 열풍을 더욱더 부채질했다.
54 피사나 피렌체, 밀라노, 제노바 같은 이탈리아의 신흥 상인 공화국들이 축적한 막대한 부는 남유럽이 유행에 뒤처지지 않게 하는 보증 수표였다. 피사 대성당이 1063년에 건설되었으며, 높이가 48.8미터에 달하는 폼포사 수도원의 9층 탑 역시 같은 해에 건설되었다.
55 잉글랜드의 대성당과 수도원 성당은 전부 노르만인이 도착한 후 50년 안에 재건축되었다.10 이 변혁의 흔적은 성 알반스 수도원(현재는 대성당, 1077년 완공)과 글로스터 수도원(현재는 대성당, 1087년 완공), 윈체스터 대성당(1087년 완공), 더럼 대성당(1093년 완공), 노리치 대성당(1096년 완공)에서 오늘날에도 찾아볼 수 있다.
중요한 것은 고층 교회 건설에 담긴 상징적 의미가 아니라 고층 교회를 건설할 수 있게 한 기술, 즉 구조 공학 분야에서의 혁신이다.
56 봉건주의의 물질적 상징물인 성은 이렇게 유럽의 안전에 기여했으며, 더 나아가 기독교 세계 전체로 퍼져나가기 시작한 평화를 더욱더 공고히 했다.
60 동방의 기독교도를 돕기 위해 무장 원정을 떠나자는 계획을 최초로 제시한 사람은 1074년의 [그레고리오 7세](그레고리오 7세)였다. 임기 말년에 그레고리오 7세는 신성로마제국 황제에 의해 로마에서 쫓겨났고 1년 뒤인 1085년 망명 도중 사망했지만, 그의 업적은 빛이 바래지 않는다. 그레고리오 7세는 교황의 목소리를 기독교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목소리로 바꾸었으며, 사제의 지위를 전사 계급이나 노동자 계급 위로 올렸고, 그렇게 함으로써 학문과 토론에 힘을 실어주었다. 그리고 그 덕에 유럽 사회는 더욱더 발전할 수 있었다.
제2장: 12세기 (1100-1199) - 제도의 부상
이 세기는 법의 성문화, 대학의 등장, 지속적인 종교 단체의 설립을 목격했습니다. 모티머는 이러한 제도적 발전이 앞으로 수세기 동안 유럽 문명을 정의할 지식 보존과 통치를 위한 프레임워크를 어떻게 만들었는지 추적합니다.
인구 증가
65 인구 증가의 원인이 무엇이었는지는 역사학자들 사이에서 여전히 논의 중이다. 한 가지 가능한 이유는 말에게 쟁기를 끌게 하는 마구馬具가 점진적으로 도입되었다는 것이다.
66 인구 증가의 더 중요한 원인은 역사학자들이 중세 온난기라 부르는 현상 때문이다. 10세기와 11세기에 평균 기온이 아주 천천히 상승하면서, 12세기에는 900년대 이전보다 거의 1도 가까이 따뜻했다.
68 『둠스데이 북』을 근거로 한 11세기 잉글랜드의 인구 추정치는 170만 명 정도다. 1377년의 인두세 기록에 따르면 당시 인구는 250만 명으로 증가했는데, 1315년에서 1322년까지 기근이 이어지고 1348년에서 1349년 사이에 흑사병이 창궐하기 전에는 인구가 훨씬 더 많았을 것이다 이 자료와 다른 자료들을 통해 우리는 1100년에 약 180만 명이었던 인구가 1200년에는 거의 340만 명으로 늘어났다고 추정할 수 있다. 이는 1200년 잉글랜드 농경지의 생산력이 세기 초보다 거의 두 배로 늘어났음을 시사한다. 이렇듯 대규모로 인구가 증가한 것은 미개척지였던 거대한 토지를 처음으로 경작했다는 뜻이다. 더 많은 토지는 더 많은 식량으로 이어졌다. 이는 더 많은 사람들이 안정감을 느껴 결혼을 하고 가정을 꾸렸으며, 자녀를 더 잘 먹여 살릴 수 있었음을 의미한다. 그리고 세대가 지날수록 경작지는 더욱더 늘어났으며, 그 결과 인구도 더욱더 증가했다.
수도회 연결망의 확장
70 교황 에우제니오 3세가 클레르보의 베르나르에게 제2차 십자군 원정을 위한 설교를 요청한 사실은 12세기의 또 다른 중대한 발전을 암시한다.
#2차십자군전쟁 1144년 크리스마스이브, 십자군 국가 에데사가 무슬림 지휘관 장기Zengi에게 함락되었다. 포로가 된 기독교 기사들은 전부 학살당했고, 이들의 아내와 자녀들은 붙잡혀 노예로 팔렸다. 기독교 세계를 충격에 빠뜨린 사건이었다. 경악한 교황 에우제니오 3세는 오랜 친구이자 스승인 클레르보의 베르나르에게 설교를 통해 하느님의 유산을 되찾을 새로운 십자군을 조직하라고 요청했다.
(수도원의 급속한 증가 ) 72 어째서 이런 일이 생겼을까? 왜 사람들은 엄청난 재산을 기부해가며 새로운 수도원을 지원하게 되었을까? 이들의 동기를 이해하려면 우리는 연옥에 대한 교리의 등장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즉 죽은 자의 영혼이 곧바로 천국이나 지옥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영혼이 머무는 영적 보금자리인 연옥에서 한동안 머물다가 천국이나 지옥 한쪽으로 간다는 로마 가톨릭의 믿음이 그것이다.
72 1200년경, 연옥에 관한 정교한 교리가 확립되었다.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수도원과 예배당에 재산을 기부하면서 사후에 자신들을 위한 기도가 영원한 행복으로 이끌어주길 바랐다.
#수도원 수도회 연결망은 단순히 지식을 퍼뜨리는 데서 그치지 않고 지식을 만들어냈다. 건축에는 숙련된 석공과 조각가, 목수가 필요했으므로 수도회는 12세기에 설계와 건축, 구조 공학과 예술 부문의 주요 후원자였다. 수도원에는 글을 읽을 줄 아는 수도사와 신부 수사가 필요했으므로, 수도회는 읽고 쓰는 능력을 전파했다. 몇몇 수도회는 선행의 하나로, 혹은 자금을 모으기 위해 회랑 바깥에 남자아이들(때로는 여자아이들)을 교육하는 학교를 세웠다. 수도원 도서관에서는 이전 시대 작가들의 작품을 보존하고 새로운 책을 제작하여 정보를 저장하고 보급했다. 가령 노르망디에 있는 벡 수도원은 12세기 초에 164권의 장서를 보유하고 있었으며, 1164년에 유증을 받아 113권을 더 얻었다. 벡 수도원은 수업료를 내는 학생을 위한 학교도 열었다. 연대기 작가 오르데리쿠스Ordericus는 “벡 수도원의 수도사는 거의 모두 철학자처럼 보였다. 그곳에서 가장 적게 배운 이조차도 실속 없는 문법학자들에게 무언가를 가르칠 정도였다”라고 묘사했다. 수도원은 흔히 대성당에 딸린 시설로 세워졌는데, 이런 경우 수도사들은 왕실 행정실의 서신에 회신하는 역할을 맡았으며, 덕분에 기록보관소를 세우고 연대기를 만들 수 있었다. 수도사들은 직접 유럽 전역의 수도원을 오가며 소식을 전했다. 수도원 정원에서는 약용 식물을 재배했으며, 의무실이 있는 수도원에서는 어느 정도의 의술을 펼쳤다. 몇몇 수도회는 유럽 대륙 전역에 자신들의 기술을 유통하여 물레방아, 중重쟁기**, 더 나은 포도 재배술을 확산**시켰다. 그럼으로써 새로이 개간한 땅을 활용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지적 르네상스
75 1927년 미국의 중세학자 찰스 호머 해스킨스Charles Homer Haskins 해스킨스는 12세기에 학술 분야에서 전례 없는 부흥이 있었음을 증명했다. 우리 연구에서는 두 가지가 특히 중요하다. 첫째, 피에르 아벨라르의 선구적 사고방식이 등장하고 아리스토텔레스의 작품을 재해석하면서 변증법이 탄생한 것이다. 둘째는 풍부한 아랍어 번역본이 들어오면서 고대 세계의 지식을 상당 부분 회복했다는 점이다.
[피에르 아벨라르(Pierre Abélard, 1079-1142)](피에르 아벨라르(Pierre Abélard, 1079-1142))
아벨라르의 명성이 절정에 달한 순간이었다. 그가 대성당의 동료 신부 수사였던 풀베르투스Fulbert의 조카 엘로이즈와 사랑에 빠진 것은. 아벨라르는 엘로이즈를 유혹했고, 엘로이즈는 임신했다. ….그가 논리학과 변증법에서 높은 성취를 이루었기 때문이었고, 이러한 형태의 추론을 활용하여 신앙 문제를 연구했기 때문이었다.
77 “의심은 탐구로 이어지고, 탐구는 진리로 이어진다”는 금언을 남긴 이가 바로 아벨라르였다. 그리고 아벨라르는 논리를 종교에 적용하는 것에 ‘신학theology’이라는 이름을 붙였다.8 78 일반적으로 아벨라르는 클레르보의 베르나르처럼 일방적으로 신은 완전무결하다는 편에 서지 않았다. 그는 사람들이 스스로 결론 내릴 수 있도록 문제를 공개했다. 실제로 아벨라르는 ‘모든’ 견해는, 심지어 존경받는 교부들의 견해조차도 그저 의견일 뿐이며, 그러므로 틀릴 수 있다고 주장했다.
82 12세기 지적 르네상스의 경우, 아리스토텔레스의 새로운 논리는 사회에 서서히 스며들었고, 사회 전체에 영향을 주었다. 이는 지식에 대한 새로운 접근법으로 이어졌다. 그리고 여태껏 점점 더 큰 백과사전을 편찬하려고만 한 사람들에게, 지식에서 중요한 것은 단순히 더 많은 사실을 축적하는 것이 아니라 사실의 질 역시 양과 마찬가지로 중요하다는 사실을 가르쳐주었다.
의학
83 의료 개입은 하느님이 행하는 일을 무효로 만드는 일이라는 믿음까지 있었다.
84 당시 의학에서는 미신이 아주 중요한 역할을 했다 앵글로색슨족의 <의학서>
암 치료법: 염소의 담즙과 꿀을 같은 비율로 섞은 뒤 상처에 바른다. 대체 치료법: 신선한 개의 머리를 불에 태운 뒤 그 재를 상처에 바른다. 그래도 상처가 아물지 않으면 남성의 똥을 완전히 말린 뒤 비벼서 가루로 만들어 상처에 바른다. 이렇게 해도 환자를 치료할 수 없다면 그 어떤 방법으로도 치료할 수 없다.11
85 암 치료법: 염소의 담즙과 꿀을 같은 비율로 섞은 뒤 상처에 바른다. 대체 치료법: 신선한 개의 머리를 불에 태운 뒤 그 재를 상처에 바른다. 그래도 상처가 아물지 않으면 남성의 똥을 완전히 말린 뒤 비벼서 가루로 만들어 상처에 바른다. 이렇게 해도 환자를 치료할 수 없다면 그 어떤 방법으로도 치료할 수 없다.11
87 의학 발전에서 매우 중요한 사건은 기독교인들이 성지에서 유대인과 무슬림을 만난 일이었다.
88 크레모나의 제라드가 번역한 아비센나의 『의학 경전』은 특히 약학 이론을 잘 제시했는데, 이 책은 치료제로 약초뿐만 아니라 광물도 다루었다. 우리는 오늘날에도 ‘알코올’, ‘알칼리’, ‘알케미(연금술)’, ‘엘릭서(묘약)’ 같은 아랍어 단어를 사용하는데, 이는 아랍어가 과학 상식에 얼마나 깊은 영향을 미쳤는지 보여준다
89 서구 사회의 의료화는 수많은 단계를 거쳐 이루어졌다. 1100년에는 유럽에 의사가 매우 적었으나 1200년경에는 질병이나 부상의 고통을 줄여줄 전문 기술을 지니고 있거나 그러한 지식을 알고 있을 만한 의사 수백 명이 있었다. …그럼에도 12세기는 육체적 구원을 찾는 사람들이 신보다 인간을 더 신뢰하기 시작한 때이며, 기도나 주문에 의존하는 대신 체계적인 의학 전략을 수립한 시기이다.
법치주의
89 이전 세기, 유럽 전역의 법은 누더기에 가까웠다. 일부 이탈리아 도시국가들은 로마법으로 알려진 로마제국 옛 민법의 변질된 판본을 보존하고 있었다. 다른 국가들은 롬바르드족의 봉건법을 채택했다. 유럽 북부에서는 옛 프랑크 부족법과 게르만 부족법이 계속해서 쓰였다. 성문법 같은 것은 없었고 국제법은 더더욱 없었다. 게다가 법전은 지역에 따라 상당한 차이가 있었다. 법이지만 서면 형태로 배포되지 않았으므로 법을 실제로 읽어볼 수 있는 사람은 드물었고, 판사들 역시 자신의 기억력과 주관에 의존했다.
결론
[12세기 살라딘 Saladin 예루살렘 점령사건](12세기 살라딘 Saladin 예루살렘 점령사건) 기독교의 충격, #3차십자군 원정의 계기
그러나 1200년에 땅을 일구던 평범한 남녀들의 삶은 법이 성문화되고 엄격하게 적용되었다는 점에서 1100년에 살았던 선조들의 삶과는 명백히 달랐다.
인구의 급증이 가장 중요했던 시기
96 만약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서를 찾아내고 그 중요성을 깨달은 12세기 학자들이 없었더라면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작들은 아랍 도서관에 처박혀 있었을 것이고, 결국 그 어떤 영향도 주지 못했을 테니 말이다.
총명하지만 성급하고 난해하며 거만한 [피에르 아벨라르(Pierre Abélard, 1079-1142)](피에르 아벨라르(Pierre Abélard, 1079-1142))다. 아벨라르의 합리성은 진정으로 참신했으며, 누군가 다른 사람이 똑같은 생각을 했으리라고 믿기 어렵다. 클레르보의 베르나르가 ‘멍텅구리학stultilogia’라고 불렀던 아벨라르의 신학이 진정한 영향력을 발휘한 것은 토마스 아퀴나스가 합리주의를 더 발전시킨 다음 세기지만, 12세기에도 아벨라르의 영향력은 강력했다.
아리스토텔레스를 12세기 학자들 사이에서 저명한 철학자로 만든 것은 아벨라르의 영향력이었다. 아벨라르는 신학과 윤리학, 비판적인 사유 방법을 발전시켰고 그라티아누스의 『교령집』에 영향을 줌으로써 기독교 세계 전체의 도덕률에 간접적인 영향을 주었다.
제3장: 13세기 (1200-1299) - 지평의 확장
상업
107 12세기 유럽 영주들은 영적인 이득을 위해 수도원을 설립한 반면, 13세기 영주들은 지갑을 채우기 위해 시장을 설립했다.
109 북유럽에서 국제 무역을 주도한 주요 상품은 양모였다. 엄청난 양의 양모가 잉글랜드에서 브뤼허와 겐트 같은 플랑드르 도시로 들어갔다. 유럽 북부에 양모 무역망이 있었다면 남부에는 제노바와 베네치아, 피렌체 같은 이탈리아 북부의 무역 도시들이 있었다. 이탈리아 무역 도시들의 주요 상품은 실크와 향신료였다.
113 환전상들은 ‘방카banca’라 불리는 의자에 앉아 일했는데, 여기에서 ‘뱅크bank’라는 말이 나왔다. 은행들은 신용과 환어음 말고도 복식부기를 처음 소개했다. 복식부기란, 수입과 지출을 대변과 차변에 별도로 기록한 뒤 대변 금액과 차변 금액의 합을 동일하게 맞추는 회계 처리 방식이다.
#은행
교육
116 기록 혁명은 중앙 정부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유럽 전역의 교구에서 주교들이 자신들의 행위를 주교 등록부에 기록하기 시작했다. 대부호와 고위 성직자들도 기록을 남겼다. 앞서 언급한 윈체스터 주교령의 재무 기록을 보면 방대한 주교령의 1209년도 지출, 대출, 부담금 및 기타 수입에 관한 자료를 주교에게 상세히 보고하고 있다.
117 교육 열풍을 주도한 진정한 힘은 바로 읽고 쓸 줄 아는 남성의 수요가 급증한 것이었다. 이 시기 유럽 전역에서 인구와 경제가 급격히 성장하면서 영주와 지주들은 자신들의 전통적인 권리가 위협받고 있다고 느꼈다. 무언가를 적어 기록으로 남기는 것은 훗날 법정에서 토지 소유권과 자산 향유권을 뒷받침해줄 정보를 보존하는 수단이었다.
118 상급 교육 기관을 뜻하는 대학조합(우니베르시타스univérsĭtas)이라는 말은, 교황의 특사 로베르 드 쿠송Robert de Courçon이 1215년에 파리 대학의 분쟁을 해결하기 위해 발표한 교령에서 처음 쓰였다. 초기 대학에서는 분쟁이 흔히 일어났다. #대학
119 1250년경 대학은 유럽에서 교육 생활의 한 부분으로 확고히 자리잡았다. 문학 석사 학위를 얻기 위해 학생들은 7가지 교양 과목, 즉 문법·수사학·논리학으로 구성된 ‘삼학과三學科, trivium’와 산술·기하학·천문학·음악으로 구성된 ‘사학과四學科, quadrivium’를 공부해야만 했다. 1230년대부터, 문학 석사 학위를 지닌 졸업자에게는 다른 자격 없이도 어디서나 강의를 할 권리가 있었다.
법적 책임
123 1215년부터 잉글랜드의 왕들은 마음 내키는 대로 행동할 수 없었다. 대헌장은 향후 몇 년에 걸쳐 여러 형태로 발행되다가 1237년에 영구히 확정되었다. 1297년 에드워드 1세는 대헌장을 법령집에 올렸다.
대헌장에는 많은 판본이 있지만 그 핵심은 항상 두 가지로 요약된다. 첫째, “어떤 자유인도 체포되거나 투옥되거나, 권리나 재산을 박탈당하거나, 범죄자로 선언되거나, 추방당하거나, 지위를 박탈당하지 않는다. (…) 동등한 자유인들에 의한 적법한 판결이나 이 땅의 법에 의하지 않고서는.” 둘째, “권리나 정의는 팔거나, 부정되거나, 지연될 수 없다.” 이후 수 세기에 걸쳐 잉글랜드 왕들은 이 조항들을, 특히 왕이라 해도 법에 따르지 않고서는 누군가를 마음대로 감금할 수 없다는 조항을 계속해서 유념해야만 했다. 물론 왕들은 계속해서 자기 마음대로 사람을 가뒀지만, 이때 이후로 부당하게 투옥된 사람의 지지자들은 대헌장을 언급하며 왕이 불법 행위를 저지른 폭군이라고 비난할 수 있었다.
탁발 수도사
탁발수도사는 사회에 나와 평신도들과 어울리며 자선사업을 비롯한 사회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한다. 주요한 탁발수도회로는 프란치스코회, 도미니코회, 가르멜회가 있다
126 베르나도네는 아들 조반니Giovanni의 이름을 프랑스인을 뜻하는 프란치스코Francis(이탈리아어로는 프란체스코Francesco)로 바꿨다.
127 그는 로마를 방문해 인노첸시오 3세에게 자신이 환영으로 본 형제회frere에 관해 설명했는데, 이 형제회라는 말에서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은 채로 살아가는 수도사를 뜻하는 탁발 수도사(혹은 형제 수도사, friar)라는 말이 나왔다. 큰 감명을 받은 교황은 프란치스코를 축복했다. 그렇게 프란치스코회가 탄생했다. 프란치스코회 혹은 작은 형제회Order of Friars Minor는 회색 수도사회라고도 불렸는데, 탁발 수도사들이 회색 수도복을 입었기 때문이다.
128 탁발 수도사의 등장이 왜 중요한 것일까? 탁발 수도회는 종교와 세속으로 엄격하게 나누던 사회를 뛰어넘어 종교적 덕목과 세속적 유연성을 모두 갖춘 단체를 만들었다. 이들은 수도사와 똑같이 교육받았기에 읽고 쓸 줄 알았고, 국제어인 라틴어에 정통했다. 이들은 수도사처럼 훈련받았기에 계율을 지키고 교회 고위층의 명령에 따랐다. 이들은 명성과 믿음과 성실함을 갖춘, 신을 섬기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수도사나 다른 일반 성직자들과 달리 특정한 교회나 지역사회, 교구에 묶여 있지 않은 채로 자유롭게 떠돌아다녔다. 이들은 도시에서 사람들과 어울리며 살았고, 십일조나 봉급을 받지 않고도 기도를 해주고 성사聖事를 주었다. 이전 세기의 수도회들이 지식을 만들고, 보관하고, 전파하는 연결망을 구축했다면, 탁발 수도회는 이 연결망을 예전보다 더 깊고 빠르게 사회에 스며들게 했다.
131 프란시스코회 -> 로저 베이컨 도미니코회 -> 토마스 아퀴나스 토마스 아퀴나스는 아벨라르를 따라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을 종교에 적용했고, 아벨라르의 금언 “의심은 탐구로 이어지고, 탐구는 진리로 이어진다”를 “경이는 탐구로 이어지고, 탐구는 지식으로 이어진다”로 수정했다.
아퀴나스를 비롯한 수많은 사람들이 탁발 수도회의 자원과 연결망의 도움을 받아 학식을 쌓았으며, 탁발 수도회의 지적 호기심이 이들에게 더 큰 성취를 이루도록 영감을 주었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는 없다.
여행
결론
137 무역 면에서 일어난 변화는 의심의 여지 없이 13세기에 일어난 커다란 변화 가운데 하나였다. 모든 사람들이 다 한 걸음씩 세계를 향해 나아갔다. 소작농은 도시 시장에 더 익숙해졌고, 시장도시의 시민은 도시에 더 자주 방문했으며, 대도시에서 온 부유한 상인들은 더 자주 더 멀리, 심지어 국제 정기시까지 여행을 다녔다.
[인노첸시오 3세](인노첸시오 3세)는 기독교 세계 전체에서 지위 고하를 막론한 모든 통치자와 결정권자에게 영향을 미친 마지막 교황들 가운데 한 명이다. 인노첸시오 3세는 위로는 잉글랜드의 존 왕에게 강경한 태도를 취했을 뿐만 아니라, 유럽의 여러 왕실 결혼을 강제로 무효화하고, 교령 ‘존경스러움Venerabilem’●을 내려 마침내 교황과 신성로마제국 황제의 관계를 확립했다. 그리고 아래로는 자신이 영적으로 다스리는 대중의 성향을 이해했다.
제4장: 14세기 (1300-1399) - 재난의 세기
흑사병, 백년전쟁, 그리고 대기근은 이 시기를 유럽 역사상 아마도 가장 재앙적인 세기로 만들었습니다. 모티머는 이러한 재난들이 어떻게 봉건 구조를 뒤엎고 사회적 이동성을 가속화했으며, 역설적으로 후속 혁신과 문화적 변화를 위한 조건을 만들었는지 조사합니다.
흑사병
#1348년 ~ 1349년 147 흑사병은 7개월 넘게 계속되면서 온 나라를 파도처럼 휩쓸었고 잉글랜드 인구의 약 45퍼센트를 죽음으로 몰아넣었다. 연간으로 따지면 사망률이 77퍼센트에 달한 셈이다.4 즉 1348~1349년의 사망률은 제1차 세계대전 당시보다 200배나 높았다.
152 그러나 이 책의 맥락에서 볼 때, 14세기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페스트가 맹위를 떨친 것이 아니다. 더 중요한 것은 사회가 무너지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인구의 절반 이상이 죽었음에도 사람들은 재산 소유권을 내던지지도, 파종과 수확을 멈추지도 않았다. 일부 지역에서는 법과 질서가 붕괴했지만 오래가지 않았다.
하느님이 이토록 고통스럽고 무시무시한 병으로 요람 속 아기들을 죽이는데, 과연 하느님이 인류를 위해 최선을 다한다고 할 수 있을까? 사회의 취약한 부분을 부수는, 페스트를 겪으며 사람들은 질병의 원인이 무엇인지에 관한 깊은 의문을 품게 되었다.
155 사람들은 죽음이 생명의 부재라 믿었으며, 죽음 뒤에도 다른 형태의 삶이 있다고 믿었다. 사후 세계에 관한 믿음에 변화가 일어났다. 14세기 유럽 전역은 죽음과 밀접히 연관되어 있었다. 문학 작품은 악마와 연옥, 사후 세계로 물들었다. 종교 회화와 조각에서는 해골 모티프가 점점 더 많이 사용되었다.
157 노동자들을 토지에 묶어두었던 봉건적 구속은 재정적 의무로 대체되었다. 강요된 충성심을 돈이 대신했다. 시골에서는 자본주의가 봉건주의를 대체하기 시작했으며, 도시에서는 자본주의가 이미 완승을 거둔 뒤였다
투사체 전쟁
민족주의
167 1336년 베네딕토 12세는 종교적 민족을 프랑스인, 이탈리아인, 스페인인, 독일인 등 4개로 줄였다(잉글랜드인은 독일인으로 배정되었다).15 그러나 에드워드 3세가 프랑스를 상대로 승리를 거두면서 잉글랜드의 국제적 지위가 상승하자 고위 성직자들은 피사 세계 공의회(1409)에서 잉글랜드인, 독일인, 프랑스인, 이탈리아인, 스페인인 등 5개 민족을 인정했다.
지역어
결론
178 절대 다수의 사람에게 14세기의 특징은 기근과 전염병, 전쟁과 정복이었다. 묵시록의 네 기사, 질병과 전쟁, 기근과 죽음이 한꺼번에 몰려와 도시와 마을에 들이닥쳤고 사람들은 모두 벌벌 떨었다. 귀족들의 빛나는 보물과 눈부신 튜닉은 우리에게 중세 시대의 세련미를 떠올리게 하지만, 14세기 사람들은 문화 발전과 지상의 즐거움보다는 죽음에 가까운 것들에 더 관심이 많았다.
제5장: 15세기 (1400-1499) - 현대 사상의 여명
구텐베르크의 인쇄기, 르네상스, 그리고 탐험 시대는 인간의 지식과 지리를 근본적으로 재구성했습니다. 모티머는 이러한 기술적, 지적 발전이 어떻게 아이디어의 빠른 보급과 최초의 진정한 글로벌 교류 네트워크를 가능하게 했는지 탐구합니다.
182 15세기의 압도적인 특징은 바로 전쟁이다. 오스만 제국이 부상하며 기독교 세계에 몇 차례 맹렬한 타격을 가했다. 한때는 위대했던 비잔티움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폴리스는 튀르크인들에게 함락되었고, 최후의 황제는 병사들과 함께 필사적으로 콘스탄티노폴리스를 방어하다 죽었다. 또한 튀르크군은 세르비아, 알바니아, 보스니아, 불가리아와 그리스의 상당수 지역을 점령했으며, 제노바의 흑해 무역 기지들과 베네치아의 지중해에 있는 수많은 소유지에 들이닥쳤다.
185 이탈리아에서 일어난 전쟁들은 르네상스 예술가들에게 풍부한 기회를 제공했다. 화가들은 서로 경쟁하는 가문들과 도시국가들 사이에서 벌어진 프로파간다 전쟁에서 그림 실력을 발휘했다. 성벽과 교량을 건설하는 기술자들도 마찬가지로 더 큰 힘과 기술을 얻었다. 그러나 이와 동시에 군국화는 예술가와 과학자, 작가들을 위한 후원금을 줄였다. 폭력과 불확실성은 무역을 억제했다. 그럼으로써 육지와 해상의 적들에게 생계를 위협받는 도시와 항구의 활력도 떨어뜨렸다. 실제로 여러 도시의 규모가 작아졌다. 구텐베르크와 콜럼버스의 세기에, 결과적으로 전쟁은 어떤 면에서는 변화를 촉발시켰고 다른 면에서는 변화를 억눌렀다고 말하는 편이 옳을 것이다.
대항해 시대
186 흔히 그렇듯 중요한 것은 기술 혁신이 아니라 탐험에 대한 정치적 의지와 돈이었으며, 이 둘은 흔히 서로 뒤엉켰다. 기술은 그저 정치적 의지와 돈이 결합해 생긴 강렬한 야망을 실현할 수 있게 했을 뿐이다.
새로운 대륙을 찾으려는 갑작스러운 열망의 뒤편에는 중요한 요소가 있었다. 그것은 바로 해외 왕국의 엄청난 부를 묘사한 책의 사본이 유통되었다는 것이다. 엄청난 인구가 사는 대도시와 이색적인 문화, 엄청난 보물 이야기로 가득한 마르코 폴로의 작품은 큰 인기를 끌었다.
187 사회 속 모험가들은 호기심이 아니라 황금에 따라 움직였다. 그러나 끝없는 호기심과 매년 탐험 원정대에게 장비를 갖추어줄 정도의 재력을 동시에 갖춘, 한 고등 교육을 받은 왕자가 부에 굶주린 선원들과 만났을 때 세상이 바뀌었다.
포르투갈 국왕 주앙 1세John I의 셋째아들이자, 샤를마뉴 대제 이후로 기독교 세계에서 가장 기사도적인 왕으로 이름 높았던 잉글랜드 국왕 에드워드 3세의 증손자였던 항해왕자 엔히크(1394~1460)다.
188 포르투갈인들은 아프리카의 이 지역에서 말과 노예를 교환하기 시작했다. 교환율이 궁금한 분을 위해 첨언하자면, 말 한 마리당 노예 아홉에서 열 명 정도로 거래가 이루어졌다.
192 콜럼버스는 자신만의 사적인 제국을 쟁취하는 일에 착수했다. …콜럼버스의 통치는 광산에서의 강제 노동, 가족의 붕괴, 노예화, 고문, 사형, 질병을 통한 원주민의 조직적인 파괴로 특징지을 수 있다. 훗날 신세계 원주민들의 ‘권리의 수호자’가 된 바르톨로메 데 라스카사스는 콜럼버스의 잔학 행위로 본래 300만 명에 달했던 히스파니올라 인구가 1508년에 6만 명으로 줄었다고 기술했다. 이는 원주민 사망률이 15년간 95퍼센트에 달했다는 이야기다. 콜럼버스의 두 번째 항해에 따라온 사람들은 콜럼버스의 파괴성을 용납하고 싶어 하지 않았다. 그들은 콜럼버스가 약속한 부를 찾지 못했기 때문이다. 1500년경, 콜럼버스가 폭정을 저지르고 있다는 소식이 스페인에 전해지면서 콜럼버스는 즉시 총독직에서 해임되었다.
15 콜럼버스의 발견은 기독교 세계 전체에 고전 학문이 절대적이 아니라는 사실을 분명히 보여주었다. 콜럼버스와 캐벗과 카브랄의 발견은 프톨레마이오스의 권위를 산산조각내 버렸다. 대체 어떻게 고대 세계의 가장 위대한 지리학자라는 사람이 한 대륙을 통째로 놓칠 수 있단 말인가? 아무리 다른 분야라 해도 이런 오류를 범한 사람의 말을 대체 어떻게 믿을 수 있단 말인가? 따라서 15세기의 마지막 10년에 나타난 것은 인지 혁명이라 부르기에 손색이 없다. 기존의 지식에 얽매이지 않는, 세계에 관한 완전히 새로운 사고관이 갑자기 생겨나 기존 지식의 한계를 넘어서게끔 강요했으니 말이다.
시간 측정
#시간 시계를 발명하고, 대중화 되면서, 하나님의 고유 시간 개념이 약해진다.
개인주의
#거울
202 예술가들의 손을 통해 거울은 다른 사람들이 자신을 어떻게 보는지 탐구할 수 있게 한 도구였다. 지금까지 다른 사람의 초상만 그려온 예술가들은 이제 자기 자신을 그림 속에 넣을 수 있었다. 자화상은 예술가들이 자신의 본성에 관한 단서를 찾고자, 자신의 얼굴을 놓고 벌인 열띤 심문이었다. 예술가의 자화상을 본 사람들은 잠시 멈춰 서서 자기 자신의 정체성에 관해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사실주의와 르네상스 자연주의
205 사실주의와 개인주의는 사람들이 어떤 방식으로 주변 환경을 대하는지에 대한 새로운 접근법을 구체화한 것이다. 그리고 둘 다 인류와 하느님의 관계가 아니라 인간 자체에 큰 관심을 기울인다. 그러나 개인주의가 자기 성찰을 통해 자기 이해와 자기 존중을 얻는 것이라면, 사실주의는 세상과 세상 만물의 복잡성을 설명하기 위해 학자와 예술가들이 세상 만물을 거울에 비추어 보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결론
211 15세기의 가장 중요한 변화는 ‘발견’이라는 단어로 요약할 수 있다. 세계와 자아의 발견 말이다.
212 1480년대와 1490년대에는 발견 정신이 충만했다. 그리고 콜럼버스는 이 점에서 선구적인 역할을 했다. 그러나 콜럼버스의 탁월한 자기 홍보 능력과 훗날 얻은 명성 때문에 그의 역할을 부풀려서는 안 된다. 포르투갈의 항해왕자 엔히크와 주앙 2세 모두 콜럼버스보다 더 끈질기고 단호했으며, 유럽 확장을 위한 정치적·경제적 추진력을 제공했다는 점에서 인정받아야 마땅하다. 콜럼버스는 탐험 후원자를 구하기 위해 유럽의 군주들을 7년간 괴롭혔지만, 항해왕자 엔히크는 항해자들을 설득해 보자도르곶 너머로 항해하게 하는 데만 장장 15년이 걸렸다. 주앙 2세의 해상 무역 왕국이라는 비전과 요새화된 재외 상관은 포르투갈이라는 작은 나라가 넓은 영토를 직접 지배하는 영토 제국territorial empire을 운영하지 않고서도 인도에 기반을 마련할 수 있게 해주었다.
213 흑사병 이후 유럽을 강타한 가장 큰 청천벽력은 바로 콜럼버스의 발견이었다. 스페인을 거대한 해외 제국의 길로 이끈 것은 바로 통치권을 얻고 싶어 했던 콜럼버스의 야망이었다. 오늘날 스페인어가 중국어에 이어 세계에서 두 번째로 널리 쓰이는 언어가 된 것은 콜럼버스 덕분이다. 그리고 전 유럽에 콜럼버스의 이름이 울려퍼지게 한 것은 바로 그의 자기 홍보 능력 덕분이었다. 그리고 사람들이 불현듯 “고대의 위대한 작가들이 대륙 두 개에 관해 전혀 알지 못했다면 그들은 또 무엇을 놓쳤을까?”라는 심오한 질문을 하게 만든 사람도 바로 콜럼버스였다.
제6장: 16세기 (1500-1599) - 종교 혁명
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 반종교개혁, 그리고 종교 전쟁은 유럽의 영적 경관을 재정의했습니다. 모티머는 신학적 분쟁이 어떻게 개인주의, 민족주의, 새로운 형태의 정치 조직을 촉진하면서 서구 지적 발전의 방향을 재조정했는지 보여줍니다.
216 현대식 계산으로 16세기는 1501년 1월 1일에 시작되었다. 당시에는 계산이 이런 식으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여러분이 제노바나 헝가리, 노르웨이, 폴란드에 살지 않았다면 말이다. 베네치아에서는 신년이 1501년 3월 1일에 시작되었다. 잉글랜드와 피렌체, 나폴리, 피사에서는 3월 25일이었다. 플랑드르에서는 부활절이 새해 첫날이어서 매년 바뀌었다. 러시아에서는 9월 1일에, 밀라노와 파도바, 로마, 여러 독일 나라에서는 12월 25일에 한 해가 시작되었다. 가장 헷갈리게 하는 나라는 바로 프랑스였다. 프랑스에서는 지역 교구에 따라 신년이 크리스마스, 3월 1일, 3월 25일, 부활절 넷 중 하나에 시작되었다. 1564년에 1567년부터 시행되는 루시용 칙령Édit de Roussillon이 발표된 후에야 새해 시작이 1월 1일로 표준화되었다.
217 식사 시간에 관해 이야기하자면, 1501년 북유럽에서는 아침을 먹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중세식 하루 두 끼의 식사 주기가 지속되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오전 11시경에 정찬dinner을 먹었고, 오후 5시경에 만찬supper을 먹었다. 그러나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도시로 이주하고 생계를 위해 다른 도시 사람들을 위한 장시간 노동에 종사하기 시작하면서 만찬 시간이 늦춰져 저녁 식사가 되었다. 이에 따라 하루의 주된 식사였던 정찬을 원래보다 두 시간가량 늦게 먹게 되었는데, 이것이 점심 식사가 되었다. 그러자 점심 시간까지 버틸 수 있도록 이른 시간에 먹는 식사인 아침 식사가 등장했다. 학교 역시 이러한 변화를 도왔다. 긴 수업을 버티려면 아침 식사를 해야 했는데 학교에 가는 남자아이들이 점점 더 늘어났기 때문이다. 그래서 1600년경 도시에서는 아침 식사가 아주 흔한 일이 되었다.
윌리엄 해리슨William Harrison의 『잉글랜드 묘사Description of England』(1577)에 따르면 평민들의 생활수준은 근 몇 년간 세 가지 측면에서 크게 향상되었다. 첫째, 도시에서 굴뚝이 엄청나게 전파되었다. 둘째로, 보통 사람들도 이제 베개와 린넨 시트가 딸린 털 부스러기 침대flock bed에서 잠을 잤다. 셋째, 전에는 사실상 모든 식기가 나무로 제작되었던 반면, 이제 대다수 사람들이 백랍pewter 접시에 음식을 담아 백랍 숟가락으로 먹고 커다란 백랍 잔으로 음료를 마셨다.
책 인쇄와 문해력
223 사람들이 모국어로 성경 공부를 하기 시작하면서 읽는 법을 배우는 사람 수가 급증한 사실은 대단히 중요하다. 1530년경 이전에 잉글랜드에서 출판된 책 가운데 절반가량은 영어로 나머지는 라틴어로 출판되었지만, 1530년대에는 영어로 출판된 책의 비율이 76퍼센트로 치솟았다. 1539년에 『대성경』이 출판된 이후로 이 비율은 80퍼센트를 넘어섰다. 이것은 눈덩이 효과를 일으켰다. 더 많은 책들, 특히 성경이 지역어로 출판되면서 더 많은 사람들이 읽는 법을 배웠고, 새로운 책에 대한 수요도 더욱 늘어났다. 잉글랜드에서는 16세기의 첫 10년 동안 400권이 조금 넘었던 책 생산량이 16세기의 마지막 10년 동안에는 4,000권 이상으로 증가했다. 1550년에는 한 이탈리아인 작가가 책이 너무 많아서 책 제목을 읽을 시간조차 없다고 불평할 정도였다.2 게다가 각각의 책들은 더 자주 읽혔다. 라틴어 책은 책마다 부유한 소유자가 있었다. 이들은 라틴어 책을 도서관에 보관하며 고등 교육을 받은 믿을 만한 친구들하고만 공유했다. 반면 지역어 서적은 여러 사람이 서로 돌려보며 수차례씩 읽었다.
226 건축학과 지리학, 천문학 역시 그림 인쇄로 엄청난 덕을 봤다. 비트루비우스를 비롯한 고전시대 건축가들의 건축 원리를 묘사한 안드레아 팔라디오의 『건축4서』(1570)는 이탈리아어로만 출판되었지만 전 유럽에 큰 영향을 미쳤다. 또한 그림 복사 기술의 진보 덕분에 1570년 아브라함 오르텔리우스는 메르카토르 도법을 이용한 최초의 근대적 지도책을 제작할 수 있었다. 튀코 브라헤의 저서 『새로운 별에 관하여De Nova Stella』는 1573년에 출판되었는데, 이 책에는 작년에 하늘 어디에서 초신성이 보였는지 나타내는 도표가 들어 있었다. 그가 1598년에 출간한 『천체 운동론Astronomiae Instauratae Mechanica』은 브라헤의 천문대에 있는 기구를 상세히 묘사하여 그가 어떻게 그토록 정확하게 하늘을 관측할 수 있었는지,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그의 연구를 이어갈 수 있는지를 보여주었다. 따라서 인쇄술은 기술 전파뿐만 아니라 과학 발전의 촉매 역할을 했다.
종교개혁
231 다양한 독일어 성경 판본으로 많은 사람들이 하느님의 말씀을 개인적으로 읽고 토론했다. 독일인들의 걱정은 커져만 갔다. 그들이 보기에 성경에 나타나는 초기 교회의 모습과 당시 로마 가톨릭교회의 모습은 크게 달랐기 때문이다.
233 루터가 이단자로 선포된 1520년에 루터는 존경받고 인기 있는 인물이었고, 사람들은 신앙과 예배를 루터의 가르침에 맞게 조정하기 시작했다. 가톨릭교회를 내부적으로 개혁하려는 시도로 시작되었던 것이 순식간에 전체 교회 구조와 기독교 세계의 통합을 깨뜨렸다. 다양한 신념을 지닌 개혁자들이 자신의 영적 목적과 그다지 영적이지 않은 목적에 맞게 교회를 다시 설계하려고 노력했다. 울리히 츠빙글리, 장 칼뱅, 필리프 멜란히톤, 토마스 뮌처 모두 다양한 가르침으로, 특히 유아 세례를 용인할 수 있는지, 미사 중 성체聖體에 실제로 그리스도가 존재하는지 아니면 단지 그리스도를 기념하는 것인지 등에 관한 가르침으로 지지자들을 매료시켰다.
236 11세기에 유럽 전역에서 평화를 촉진하기 위해 많은 일을 했던 교회가 이제는 스스로 분열을 향해 나아갔다. 각국은 개신교냐 가톨릭이냐에 따라 서로 대립했으며, 국가 안에서는 종교 파벌들이 내전을 벌이며 사람들을 위협했다. “지옥으로 향하는 길은 선의로 포장되어 있다”는 옛 속담을 이보다 잘 보여주는 예는 없었다. 루터는 그저 교회의 타락을 막고 싶었을 뿐이며, 누가 봐도 칭찬받아 마땅한 일이었다. 그러나 루터가 촉발한 것은 유럽에서 100년 넘게 지속된 전쟁, 향후 300년간 이어진 정부 주도의 종교적 소수자에 대한 박해, 어떤 곳에서는 오늘날까지도 이어진 종교적 편협함이었다.
소형 화기
242 총기가 출현하면서 왕들은 전쟁터에서 물러나 경험이 풍부한 전문 군인에게 지휘권을 맡기게 되었다. 1500년까지는 왕이 직접 군대를 지휘하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사적 폭력의 감소
250 국가가 폭력적인 박해자를, 설령 그가 힘 있고 부유한 사람이라 해도 짓밟을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영주들이 소작인을 학대하거나 두려움에 떨게 하는 일이 점차 사라진 이유다. 이는 영주들이 궁정에서 왕과 그의 측근들의 비위를 맞추려 했다는 핑커의 주장과는 무관하다. 오히려 영주들이 법을 어기면 자신들조차 국가에 의해 처벌받을 수 있다는 두려움이 커졌기 때문이다. 나머지 사회에도 똑같은 이치가 적용된다. 국가가 폭력범을 처벌할 준비가 되어 있을 때, 사람들은 폭력을 사용하기 전에 한 번 더 생각했다.
그렇다면 16세기에 무엇이 정부에게 기꺼이 행동하도록 만들었을까? …이런 현상을 일으킨 것은 오히려 우리가 앞서 논의한 문해력 증가, 바로 글을 읽고 쓸 줄 아는 사람이 늘어났기 때문이다. 글은 중앙집권화된 국가와 현장 관리들 사이의 의사소통을 원활하게 했다.
251 개인주의의 고취 역시 ‘문명화 과정’이 일어나게 한 필수 요소 가운데 하나였다. 16세기 후반에 일기를 써서 내적 삶을 표현하는 사람들이 늘어났다는 사실은 사람들의 자의식이 강화되었음을 보여준다. 자의식이 커지고 자신의 고통을 더 중요하게 여기면서 사람들은 점점 더 타인의 고통에도 눈을 뜨게 되었다.
252 국가가 언제나 그래왔듯, 사적인 폭력을 전쟁 등의 공적 사업으로 전환함으로써 계속해서 직접적으로 줄여왔다는 점이다. 중세 왕들은 십자군 전쟁이나 이웃 왕국과의 전쟁을 일으키는 식으로 신하들의 폭력적인 성향을 외부의 적에게 집중시켜 왕국 안의 파벌들을 통제했다. 현대에도 같은 현상을 찾아볼 수 있다. 가령 20세기 중반에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했을 때 미국 안에서는 살인이 눈에 띄게 줄었다.2
유럽 열강의 설립
255 대량의 금과 은이 라틴아메리카에서 스페인 재무부로, 스페인 재무부에서 전체 유럽 경제로 유입되면서 사상 처음으로 유럽에서 장기 인플레이션이 나타났다.
결론
257 16세기에는 사람들이 언제, 무엇을 먹느냐가 바뀌었다. 또 무엇을 읽느냐가 바뀌었으며, 수많은 사람이 시골에서 도시로 이주했다.
16세기에는 인류의 가장 큰 관심사들 가운데 일부가 다음과 같은 질문으로 표면화되었다. 인체의 내부는 어떻게 생겼는가? 우주 속 지구의 위치는 어디인가? 창조된 천지의 규모가 어떻게 이전에 생각했던 것보다 이토록 클 수 있는가? 영혼을 구하려면 무엇을 해야 하는가? 16세기의 지배적인 변화를 규명하는 과정에서 나는 두 가지 강력한 후보를 찾아냈다. 하나는 읽고 쓸 줄 아는 사회로의 전환이고, 다른 하나는 세계의 확장이다. 둘 중 무엇이 1600년의 서구와 1500년의 서구를 구분짓는 더 중요한 요소였는지 판별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이 딜레마는 16세가 얼마나 놀라운 세기였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259 16세기가 끝날 무렵, 사람들은 과거를 돌이켜 보며 삶이 근본적으로 변화했으며 다시는 전과 같아질 수 없음을 깨달았다. 신세계를 발견하기 전으로 돌아갈 수는 없었다. 매년 사람들의 관심을 끄는 새로운 책과 발견들이 쏟아졌다. 유럽 북부에서는 폐허가 된 수도원을 보며 이제 수도원의 시대가 끝났음을 깨달았다. 성벽이 대포에 취약하다는 사실이 드러나면서 수많은 성이 버려졌는데, 사람들은 이를 보고 기사도의 시대 역시 끝났음을 알았다. 도시와 주들은 자신들의 흥망성쇠를 역사로 남기기 시작했다. 역사학자들은 먼 과거에 쓰인 연대기의 단편적인 자료를 그대로 적는 대신, 광범위한 문서를 종합하여 과거를 논리적으로 분석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진정한 의미의 역사 집필이 시작되었다. 중요한 것은 16세기에 엄청난 변화가 있었을 뿐만 아니라, 사람들이 사상 처음으로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는 점이다. #변화 에 대한 인식은 중세인과 근대인의 사고방식을 구분짓는 또 다른 중요한 차이점이다.
레오나르도 다빈치 미켈란젤로 마젤란 코르테스 코페르니쿠스 에라스뮈스 베이컨 노스트라다무스 마키아벨리 갈릴레오 셰익스피어 마틴 루터
260 확실한 것은 루터가 1517년에 취한 태도가 지난 천 년 동안 가장 극적인 종교적 격변을 일으켰다는 사실이다. 그러한 이유로 루터는 16세기의 변화의 주역이라는 칭호를 받을 자격이 있다.
제7장: 17세기 (1600-1699) - 과학 혁명
뉴턴, 갈릴레오, 그리고 과학적 방법론은 자연 세계와 인류의 관계를 변화시켰습니다. 모티머는 경험주의, 합리주의, 실험 과학이 어떻게 고대 우주론을 뒤집으면서 전례 없는 기술적 진보를 가능하게 하는 원칙을 확립했는지 조사합니다.
263 부유한 사람들은 굴뚝과 유리창, 편안한 가구가 있는 집에서 살았을 것이며, 영양실조 상태였던 조상들보다 더 잘 먹었을지도 모르지만, 17세기 파리의 출생 시 기대수명은 23세에 불과했다. 만약 여러분이 제네바 중산층 집안의 자식으로 태어났다면, 아들이면 30세 정도까지, 딸이면 35세 정도까지 살았을 것이다. 잉글랜드의 출생 시 기대수명은 30년 동안 상당히 일정하게 유지되었는데, 가장 나쁜 해인 1658년에는 최저치인 24.7세를 기록했고, 가장 좋은 해인 1605년에는 최고치인 35.3세를 기록했다. 이것은 때때로 40세를 넘어갔으며 30세 아래로 내려가는 일이 거의 없던, 이전 세기의 출생 시 기대수명에 비해 상당히 낮은 수치였다.1
과학 혁명
268 사물의 본질을 이해하는 데 진정으로 관심을 기울였던 사람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 과학적 방법론이라 인정받게 된 방식을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이들은 연구 질문을 가정한 뒤, 이 질문에 답할 수 있는 가설을 세우고, 여기에 필요한 적절한 자료를 찾아내고 검정한 뒤, 원 가설이 불충분하다고 판명되면 폐기하고 새로운 가설을 세웠다. 이는 프랜시스 베이컨이 1620년에 그의 저서 『노붐 오르가눔』에서 간략히 설명한 연구 모형이다. 이 무렵에는 이미 유럽 대륙의 자연철학자들 대부분이 이 연구 모형을 채택하고 있었다. 역사학자들은 일반적으로 이 변화를 과학 혁명이라 부른다.
268 #과학 사물의 본질을 이해하는 데 진정으로 관심을 기울였던 사람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 과학적 방법론이라 인정받게 된 방식을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이들은 연구 질문을 가정한 뒤, 이 질문에 답할 수 있는 가설을 세우고, 여기에 필요한 적절한 자료를 찾아내고 검정한 뒤, 원 가설이 불충분하다고 판명되면 폐기하고 새로운 가설을 세웠다. 이는 프랜시스 베이컨이 1620년에 그의 저서 『노붐 오르가눔』에서 간략히 설명한 연구 모형이다. 이 무렵에는 이미 유럽 대륙의 자연철학자들 대부분이 이 연구 모형을 채택하고 있었다. 역사학자들은 일반적으로 이 변화를 과학 혁명이라 부른다.
269 사람들에게 새로운 생각을 하게 만드는 그 모든 관찰 가능한 현상들 가운데 가장 많은 관심을 받고 혁신적인 연구 방법을 적용하게 한 것은 바로 #별 #start 이었다.
튀코 브라헤가 1572년에 목격한 그 유명한 ‘신성nova’은 지구의 대기권에 진입하지 않았다. 그에 따라 신성은 창공에 새로이 등장한, 움직일 수 있는 천체라는 견해가 생겨났다. 이런 현상은 별들이 지구와 다른 행성 주위에서 결정질 구조crystalline structure를 이루고 있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가르침에 정면으로 반하는 것이었다.
케플러의 행성 운동 법칙은 검증된 이론이었다. 화성의 움직임에 관한 자료 덕분에 케플러는 화성이 타원 궤도를 따라 움직인다는 사실을 밝혀냈으며, 이윽고 화성이 미래에 어떻게 움직일지 알 수 있었다. 행성의 움직임은 한때 경이와 신앙의 영역에 속했으나, 이제 과학적 지식과 이해의 문제가 되었다.
네덜란드의 도시 미델뷔르흐에서 한스 리퍼세이가 천체를 3배 확대해 볼 수 있는 망원경을 제작했다. 1608년, 리퍼세이는 특허 등록을 했다. 리퍼세이의 발명품에 관한 소식은 금세 해외로 퍼졌다. 이듬해 잉글랜드에서는 토머스 해리엇이 망원경을 만들어 달의 표면을 관측했다. 이탈리아에서는 갈릴레오가 영상을 33배 확대할 수 있는 망원경을 만든 뒤 이것으로 목성의 가장 큰 달 4개를 관측했다. 갈릴레오는 관측 결과를 1610년에 『별 세계의 전령Sidereus Nuncius』에 실었다. #망원경
273 망원경의 발전은 곧 현미경의 발전이었다. 갈릴레오는 리퍼세이와 그의 동료 자하리아스 얀센Zacharias Jansen의 발상을 받아들여 더 개량된 형태의 현미경을 개발했는데 갈릴레오는 이를 ‘작은 눈’이라 불렀다. 로버트 훅은 『마이크로그래피아Micrographia』(1665)에서 크게 확대한 식물 ‘세포’(훅은 그렇게 불렀다)를 묘사했다. 네덜란드인 미생물학자 안톤 판 레이우엔훅은 미생물학 분야의 탐구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최대 200배로 확대 가능한 현미경을 사용해 레벤후크는 박테리아와 정자 세포, 혈액 세포, 선충, 조류algae, 기생충을 발견했다. #현미경
과학 지식에 관한 이 모든 선구적 연구들은 아이작 뉴턴의 『자연철학의 수학적 원리Philosophiae Naturalis Principia Mathematica』(1687)에서 절정에 달했다. 널리 받아들여지기까지 약간의 시간이 걸렸지만, 이 책은 훗날 사상 최고의 과학적 업적 가운데 하나로 칭송받았다. 책에서 뉴턴은 중력 이론의 개요를 설명했으며─전설에 따르면, 사과가 머리에 떨어졌을 때 뉴턴의 머릿속에 처음으로 이 이론이 떠올랐다고 한다─무엇이 행성의 궤도를 유지하게 하는지에 관한 토론으로 끝을 맺었다. 이 책이 중력을 계산할 수 있는 비율을 제공한 덕분에 중력을 질적으로 이해할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양적으로도 연구할 수 있게 되었다. 이 책은 행성과 태양의 상대적 밀도를 측정하는 법을 제공했으며,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이 옳음을 확인해주었고, 달의 움직임과 지구의 조수가 어떻게 달의 영향을 받는지 설명했으며, 어째서 혜성이 각자의 경로를 따르는지 서술했다. 그리고 이 책에는 뉴턴의 유명한 3가지 운동 법칙이 포함되어 있었다. 뉴턴이 1670년대에 시작해서 1704년에 출판한 광학에 관한 연구와 함께, 그의 발견들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 세계에 관한 잘못된 추론들을 대다수 뒤집었으며, 자연 현상을 실험하는 보다 엄격한 틀을 제공했다.
277 위대한 과학적 발견을 한 거의 모든 사람이 신실한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이들은 자신들의 집단적 노력을 하느님의 천지창조의 본질에 관한 끊임없는 탐구라고 여겼다. 프랜시스 베이컨은 무신론을 경멸조로 비판하는 소논문을 썼으며, 라이프니츠는 『신정론Théodicée』에서 기독교 신앙과 과학 철학의 조화를 시도하면서 하느님이 “가능한 모든 세계 가운데 최선의 세계”를 창조했다고 주장했다. 아이작 뉴턴 역시 경건한 사람이었는데, 뉴턴은 성경에서 과학적 진리─지구 종말 예언을 포함한─를 찾는 데 일생을 보냈다. 종교적 목표 의식과 과학적 연구의 결합은 17세기의 자극적인 칵테일이었는데, 여기서 종교적 차원을 과소평가해서는 안 된다.
의학 혁명
283 1600년에는 죽어가는 사람의 90퍼센트 이상이 사제를 찾았다. 죽어가는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오직 치유자이신 하느님뿐이었다. 최소한 많은 사람이 그렇게 믿었다. 중요한 것은 몸의 회복이 아니라 고통을 통해 영혼을 구원하는 것, 이른바 ‘좋은 죽음’을 맞이하는 것이었다.
진정한 변화의 촉매제는 1541년에 죽은 한 거만한 스위스인 천재였다. 그의 이름은 필리푸스 아우레올루스 테오프라스투스 봄바스투스 폰 호엔하임Philippus Aureolus Theophrastus Bombastus von Hohenheim이지만, 흔히 파라켈수스Paracelsus로 알려졌다.
285 의학 혁명은, 극도로 종교적이고 집단적 사고를 했던 중세 유럽인들이 양심적이고 개인적인 근대 유럽인으로 변화하는 가장 중요한 과정 가운데 하나였다.
세계의 정착
292 농사를 망쳐 절박해진 사람들은 교수형의 위험을 무릅쓰고 가축이나 빵을 훔쳤다. 프랑스에서는 영주들이 영지에 폭정 수준으로 권력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이탈리아와 스페인에서는 봉건 영주들이 도적 떼를 이끌었다. 유럽 전역에서 혁명과 반란이 일어났다. 러시아에서는 1606년부터 1607년까지 볼로트니코프 봉기가 일어났고, 헝가리에서는 1614년에 도저 반란Dózsa insurrection이 일어났으며, 상上 오스트리아에서는 1626년에 대규모 민란이 일어났고, 잉글랜드에서는 1643년부터 1649년까지 내전이 있었다. 프랑스에서는 1647년부터 1648년까지는 나폴리 혁명이 있었고, 1648년부터 1653년까지 프롱드의 난이 일어났다. 여기에 더해 여러 나라에서 가톨릭교도나 개신교도, 소수 유대민족이 박해를 받았다. 그렇기에 신대륙으로 항해하여 기근이나 종교적 박해의 두려움 없이 자치 공동체에서 자유롭게 살아가는 것은 대단히 매력적인 일이었다. 비록 이 시점까지는 실제로 이주한 사람 수가 얼마 되지 않았지만, 신대륙으로 이주한다는 생각은 사람들의 마음에 강력한 영향을 미쳤다. 다음 두 세기 동안 인구 압력이 더욱 심화되면서 유럽인 수백만 명이 신대륙으로 몰려갔고, 훗날 자신들이 떠나온 사회에 필적하게 될 사회를 건설하기 시작했다.
사회 계약
292 유럽인들은 유럽 사회를 돌아보며─그리고 총포와 인쇄된 책, 지난 100년 동안 과학과 항해 분야에서 이룬 업적을 보며─자신들이 인류 본연의 상태에서 얼마나 빨리 벗어나고 있는지 깨달았다. 무엇보다도, 발달한 것과 원시적인 것을 나란히 놓고 보면서 유럽 철학자들은 법과 도덕 문제를 재고하기 시작했다. 인류 전체를 지배했던 자연 법칙은 무엇이었을까?
토머스 홉스 자연권 294 이들 가운데 가장 저명한 인물인 존 로크는 『통치론』(1689~1690)에서 자연권 사상을 더욱 발전시켰다. 로크는 모든 인간은 자연 상태에서 평등하며 세 가지 자연권을 누린다고 주장했다. 자연권 가운데 으뜸은 생명권이며, 둘째는 첫 번째 권리와 상충하지 않는 한 무엇이든 할 수 있는 권리인 자유권이고, 셋째는 첫 번째와 두 번째 권리를 침해하지 않는 한 자신의 재산을 향유할 수 있는 권리인 재산권이다.
중산층의 발흥
결론
17세기가 고대와 근대 세계를 나누는 문턱이라고 말하는 것은 솔깃한 일이다. 사람들의 행복에 대한 희망이 신에게서 다른 인간에게로 옮겨간 시기이기 때문이다. 홉스의 사회계약론에서 전쟁 수행 방식에 이르기까지 모든 면에서 17세기는 세속적 물질주의를 향한 변화가 이루어지는 시기였다.
301 #갈릴레오 나는 갈릴레오를 으뜸으로 꼽는다. 갈릴레오는 과학적 방법론을 대중화했을 뿐만 아니라 기구 제작, 기초 물리학, 시간 기록, 천문학 분야를 선도했다. 지식 분야에서 계속 권위자 행세를 하려 들던 교회에 맞서 갈릴레오는 당대의, 아니 어느 시기의 누구보다도 강하게 도전했다. 자유를 희생하면서까지 자신의 과학적 발견에 깊은 믿음을 표현한 갈릴레오는 일련의 과학적 사실 이상의 것을 옹호했다. 그것은 진리 그 자체였다.
제8장: 18세기 (1700-1799) - 계몽주의 시대
미국과 프랑스의 민주 혁명은 초기 산업 혁명과 함께 정치적 권위와 경제적 생산을 재구상했습니다. 모티머는 자유, 평등, 인권에 대한 계몽주의 이상이 어떻게 세습 권력 구조에 도전했으며, 기계화가 인간 노동을 대체하기 시작했는지 분석합니다.
306 18세기에 담긴 모순에는 어느 정도 현대적인 특징이 있다. 그것은 바로 질서와 규제가 낭만적 충동, 즉 벗어나고자 하는 욕망과 결합했다는 것이다.
운송과 통신
잉글랜드 - 유료도로 개발
#1783년 11월 21일, 조제프 미셸 몽골피에와 자크 에티엔 몽골피에 형제가 파리에서 최초로 유인 비행을 개시했다. 종이와 마대자루로 만든 열기구 바구니에 탄 용감한 사람들은 필라트르 드 로지에Pilatre de Rozier와 마르키스 다란데스Marquis d’Arlandes였다. 열흘 뒤에는 자크 샤를과 니콜라 루이 로베르Nicolas-Louis Robert가 파리에서 최초로 유인 수소 풍선 비행 분야를 개척했다. 부착식 날개를 매단 채 중세 교회 첨탑 위에서 몸을 던진 수많은 사람이 공중에서 허우적대다가 땅에 처박혀 죽었다. 적어도 13세기 로저 베이컨의 시대 이래로 수많은 자연철학자들이 새처럼 날 수 있는 장치를 고안해왔다. 새처럼 하늘을 날 수 있다는 그들의 믿음은, 비록 그들이 상상했던 방식은 아니었으나 마침내 사실로 입증되었다.
농업 혁명
318 농업 개혁가들의 공로를 마땅히 더 많이 인정해야 하는 또 다른 이유는 이들이 농업에 사업의 개념을 도입했다는 것이다. 여태까지 땅은 안정적인 수입원이긴 했지만 땅으로 큰돈을 벌기는 불가능했다. 땅은 다른 곳에서 얻은 부를 공고히 하는 수단에 가까웠다.
319 중세 잉글랜드에서는 4만 2,000제곱킬로미터의 농지에서 연간 4,950만 부셸의 밀이 생산되었는데, 1800년에는 4만 6,000제곱킬로미터 농지에서 연간 1억 4,000만 부셸의 밀을 생산했다.13 게다가 잉글랜드 땅이 먹여 살리는 소와 양, 돼지의 수도 각각 133퍼센트, 33퍼센트, 50퍼센트 증가한 상태였다. 심지어 이 가축들은 중세 시절의 가축들보다 훨씬 더 컸다. 중세에 평균 76킬로그램의 고기를 제공했던 소는 이제 평균 272킬로그램을 제공했고, 10킬로그램을 제공했던 양은 이제 31킬로그램을 제공했으며, 29킬로그램을 제공했던 돼지는 이제 45킬로그램을 제공했다.14 부산물인 양털과 가죽 생산량도 늘어났으며, 늘어난 가축 분뇨 또한 토양으로 되돌아가 농사 순환에 도움을 주었다. 선택 교배된 가축은 더 빨리 자랐으므로, 더 빠른 속도로 더 많은 고기를 생산했다.
계몽 자유주의
322 계몽주의의 심장은 파리에서 드니 디드로와 장 바티스트 르 롱 달랑베르가 편집한 28권짜리 『백과전서Encyclopédie』였다. 1752년부터 1771년까지 20년 가까운 세월 동안 출판된 이 작품은 마치 영원한 불꽃과도 같았고, 천재들은 그 주변을 훨훨 날아다니는 나비들과 같았다. 이 나비들 가운데는 몽테스키외, 볼테르, 장 자크 루소 , 튀르고, 그리고 혼자서 『백과전서』 전체 분량의 4분의 1 이상을 쓴 루이 드 조쿠르Louis de Jaucourt 등이 있었다. 그러나 전체 『백과전서』는 부분의 합보다 훨씬 더 큰 무엇이었다. 이 책은 마법, 미신, 종교에 의지하지 않고 오직 이성을 통해 인간과 자연 세계와의 관계를 재정립하려는 시도였다. 『백과전서』의 편집자들은 모든 지식을 기억, 이성, 상상의 3가지 유형으로 구분함으로써, 신의 뜻이나 영적 중재 같은 사안이 끼어들 여지가 없는 분류법을 만들었다. 편집자들의 목적은 『백과전서』 전체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한 하나의 주제 제목으로 요약할 수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이해’였다.
[장자크 루소 ean-Jacques Rousseau](장자크 루소 ean-Jacques Rousseau) [루소 - 인간 불평등 기원론](루소 - 인간 불평등 기원론)
경제 이론
335 사람들은 더 높은 수익률을 위해 토지에 투자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투자에서 자본 문제는 대단히 중요한 사안이었다. 사업가들이 땅을 사거나 늪지에서 물을 빼는 등 토지 개선에 들어가는 비용을 지불하려면 어디선가 돈을 빌려야 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18세기에는 은행업이 발흥했다. 1750년 잉글랜드에는 약 12개의 개인 은행private bank이 있었다. 이 수는 1784년에 120여 개, 1793년에 280여 개로 늘어났다.24 1800년경에는 엑서터 한 곳에만 개인 은행 5개가 있었으며, 모어턴햄스테드와 여타 지역 사람들에게 돈을 빌려주었다
산업 혁명
정치 혁명
354 프랑스 혁명이 없었다면 다음 세기의 유럽인 사상가들이 사회에서 개인의 가치가 동등하다는 생각을 바탕으로 사회 개혁 문제에 접근했을 가능성은 매우 낮다. 또한 서구 세계에서 정치적 평등이 기본적인 도덕관이 되지도 못했을 것이다.
결론
중세 이래로 사람들은 이웃의 도덕적 행동을 엄격히 통제해왔다. 하느님이 지역사회의 부도덕함을 가령 흉작과 같은 방식으로 공동 처벌할 것이라는 믿음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이웃의 무분별한 행동을 외면하는 공동체 구성원 역시 유죄이며 벌을 받아 마땅하다고 여겼다. 그러나 1710년 이후 식량 공급이 증가하고 굶주리는 사람이 줄어들면서 하느님이 공동 처벌을 내릴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나 그에 따른 사회적 훈계가 줄어들었다. 동시에 인간과 환경의 관계를 더 잘 이해하게 되면서 역경의 원인에서 신을 분리할 수 있었다. 1780년대에 프랑스에서 또다시 식량 비축분이 고갈되었을 때, 사람들은 하느님보다는 동료 시민들을 탓했다. 이렇게 판단해보면 18세기의 농업 변화는 인구를 증가하게 했고, 산업 혁명을 위한 노동력을 제공했을 뿐만 아니라 사회를 더 관용적이고, 더 관대하고, 덜 잔인하게 바꾸었다.
최초의 위대한 증기 기술자 토머스 뉴커먼
나는 18세기 사람들의 삶을 가장 많이 변화시킨 인물로 장 자크 루소를 제안하고 싶다. 루소의 글에는 오류가 가득할지도 모르지만 그의 사상은 관용, 자유, 평등을 부르짖는 요구에 영감을 주었다. 1789년에 재정 위기 사태가 혁명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이러한 요구들이 결합한 결과였다. 그리고 프랑스 혁명이 왕과 영주부터 극빈층까지, 서양의 모든 사람에게 영향을 주었음은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다.
제9장: 19세기 (1800-1899) - 기술적 변화
철도 네트워크, 전기, 대량 생산은 인간의 이동성, 통신, 일상적 존재를 근본적으로 변화시켰습니다. 모티머는 산업화가 어떻게 현대 도시 경관, 계급 구조, 글로벌 경제 네트워크를 만들면서 전례 없는 물질적 번영을 가능하게 했는지 탐구합니다.
인구 증가와 도시화
#역사 가 곧 시간은 아니며 시간이 곧 역사는 아니기 때문이다. 역사는 과거 그 자체에 관한 학문이라기보다는 과거의 ‘사람들’에 관한 학문이다. 인간과 분리된 시간은 오직 과학자와 몽상가들에게만 중요한 문제다.
370 산업 혁명으로 인한 변화에 기하급수적인 인구 증가와 도시화가 더해지자, 석기 시대에 농사가 시작된 이래로 존재해온 인간과 땅 사이의 직접적인 관계가 종말을 맞았다. 경제학자 존 메이너드 케인스의 말을 바꾸어 표현하자면, 급격히 증가하는 인구 대다수에게 유럽에서의 삶의 문제는 더는 어떻게 살아남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살아갈지 정하는 것이었다.
운송
371 스티븐슨이 제작한 증기기관차 가운데는 이보다 훨씬 더 유명한 로켓호도 있는데, 이 로켓호가 바로 1829년에 리버풀에서 맨체스터까지 56킬로미터를 질주하는 대회에서 우승한 기관차였다. 이 리버풀-맨체스터 노선은 1830년 9월 15일에 극적인 사건과 함께 개통되었다. 리버풀의 하원의원이자 최근에 국방부 장관직을 사임한 윌리엄 허스키슨William Huskisson이 부주의로 로켓호 앞에 넘어지면서 다리 한 쪽이 절단되고 심각한 출혈이 발생하는 열차 사고를 당한 것이었다. 스티븐슨은 시속 58킬로미터에 이르는 맹렬한 속도로 에클스를 향해 열차를 몰아, 죽어가던 하원의원을 치료받게 하려 했지만 슬프게도 허스키슨 씨는 철도업계의 순교자가 되고 말았다. 그의 죽음은 모든 국내외 모든 신문에 상세히 보도되었다. 그리고 이것은 모든 사람이 미래를 향한 문이 활짝 열리는 모습을 목도할 수 있었던 또 다른 ‘콜럼버스의 순간’이었다.
372 미국의 첫 번째 여객 철도는 1830년에 개통되었다. 벨기에와 독일에서는 1835년, 캐나다에서는 1836년, 오스트리아와 러시아·프랑스·쿠바에서는 1837년, 이탈리아와 네덜란드·폴란드에서는 1839년에 첫 노선이 개통되었다.
374 오늘날 우리는 철도의 등장을 매우 긍정적인 시각으로 바라보며 놀라운 업적으로 여기지만, 철도가 불러온 ‘근대적 삶’이 당시 수많은 사람들에게는 정신적으로 엄청난 충격을 준 경험이었다는 사실 또한 잊어서는 안 된다. 자신들이 자란 농촌에서 멀리 떠나온 수많은 사람들은 도시에서 살아갈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이들이 아는 문화는 주로 시골의 복합적이고 안정감을 주는 인간관계에 기반을 두었기 때문이다. 사람들 수천 명이 말 그대로 사회 구성원으로서 기능하는 능력을 잃어버렸다. … 대도시와 도시들은 잉글랜드의 시골로부터 활력을 빨아들였는데, 철도가 바로 활력을 빨아들이는 빨대였다.
1899년에 미국의 언론인 넬리 블라이가 단 72일 만에 세계 일주 업적을 달성했다. 이전 세기에 배를 이용한 최초의 세계 일주에 3년이 걸렸던 것과는 하늘과 땅 차이였다.
통신
379 #1840년 에 세계 최초의 우표인 페니 블랙Penny Black이 판매되면서 수십만 명의 사람들이 우표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힐이 옳았음이 증명되었다. 1839년에는 3통에 불과했던 인구 1인당 연간 편지 발송 수가 1860년에는 19통으로 증가했다.6 그러나 메이벌리의 반격이 이어졌다. 편지 배달이 늘어났음에도 우체국이 적자를 보기 시작하자 1843년에 힐은 일자리를 잃었다.
#1816년 에는 프랜시스 로널즈가 최초의 전기 전신기를 발명했다. 해머스미스에 있는 자택 뒤뜰에서 로널즈는 8마일 떨어진 두 개의 전극을 전선으로 묶은 뒤, 전선으로 전기 신호인 전신을 전달하는 데 성공했다. 그가 발명한 전기 전신기는 전신을 알파벳 문자로 변환하는 수신기가 딸린 형태였다.
공중 보건과 위생 관리
파리 거리에 사는 가난한 사람들이 이웃 부르주아들보다 사망률이 50퍼센트나 높은 이유를 궁금해하던 한 프랑스 외과 의사는 그들이 부도덕하기 때문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그들이 도덕적으로 행동하는 법을 배운다면 그들 자신과 자녀들이 더 오래 살 수 있을 거라고 보았다.10 도덕성 개선에 따른 건강 개선 효과에 회의적인 사람들은, 썩어가는 물질에서 뿜어져 나온 독기가 악취 나는 공기를 만들고 이 공기를 흡입하면 병에 걸린다는 옛 생각으로 되돌아가는 경향이 있었다.
386 헝가리의 의사 이그나스 젬멜바이스 …이그나스는 부검 과정에서 ‘사체 입자cadaverous particle’가 시체에서 학생의 메스로 옮아갔으며, 이 사체 입자가 동료 의사를 죽였다는 이론을 제시했다. …이그나스는 진료소 의료진들에게 염화 석회액으로 손을 씻으라는 지침을 내렸다. 거의 즉시 이그나스의 진료소 사망률은 다른 진료소와 같은 수준으로 떨어졌다. … 이그나스는 이런 의사들의 반대에 더욱 집착하게 되었다. 그는 신경쇠약에 걸려 정신병원에 수용되었으며, 병원에서 경비병들에게 구타당하다가 1865년에 47세의 나이에 패혈증으로 사망했다. 루이 파스퇴르가 논문에서 이그나스 젬멜바이스의 ‘사체 입자’ 이론이 본질적으로 옳았다는 사실을 증명한 것은 이로부터 20년 후였다
1858년 런던에서는 처리되지 않은 하수가 너무나도 지독한 악취를 풍기는 ‘대악취Great Stink’ 현상이 일어났다. 악취가 어찌나 심했던지 의회가 휴회를 선언할 정도였다. 정부는 조지프 바잘게트Joseph Bazalgette에게 수도 런던의 전체 하수도망을 다시 건설해달라고 의뢰했다. 이 작업은 1875년에야 끝났다. 같은 해, 두 번째 공중보건법이 통과되었다. 이 법에 따라 모든 신축 주택은 상수도와 하수도를 반드시 갖춰야 했으며, 모든 보건 의원회는 의무적으로 의료진을 고용해야 했다.
390 커다란 의학 진보 가운데 하나는 1840년대에 도입된 마취제이다. 제왕절개의 성공적 정착 역시 커다란 진보였다. 19세기가 시작할 무렵 제왕절개는 최후의 수단이었으며 거의 항상 외상성 출혈과 산모의 죽음을 초래했다. 19세기 초, 의사들은 대개 태아 개두술foetal craniotomy을 실행하여 산모의 생명을 보존하는 편을 선호했다. 태아 개두술이란, 태아의 두개골을 부수고 태아를 조각낸 뒤, 산모의 질을 통해 제거하는 수술이다.
사진술
398 사진술이 발명되기 전에는 범죄자들을 오직 이름과 성별, 눈동자 색, 키로만 식별할 수 있었다. 키 180센티미터에 청회색 눈동자, 벗겨진 갈색 머리를 한 중년 남성이라는 정보만으로는 특정인이 바로 그 범죄자라는 사실을 증명할 방법이 없었다. 1850년대부터는 과학자들도 점차 사진을 이용하기 시작했는데, 특히 천문학자들은 1880년에 성운을, 1883년에는 육안으로 식별할 수 없는 물체를 촬영했다. 1900년경에는 이 거대한 전환이 거의 완료되었다. ‘진실’을 판가름하는 절차는, 1800년에는 전적으로 목격자들의 인식력과 말솜씨에 의지했지만, 이제는 객관적 증거에 중점을 두는 체계로 대체되었다. 이러한 전환에 사진의 공로는 작지 않았다.
사회 개혁
400 19세기 사회 개혁의 4가지 핵심 측면인 노예 제도, 선거 대표성, 여성의 권리, 교육
403 투표권을 모든 여성에게 확장한 최초의 국가는 1893년이 되어서야 등장했는데 바로 뉴질랜드였다. 1894년에는 남호주가 그 뒤를 이었고, 1902년에는 호주 나머지 지역이, 1907년에는 핀란드가, 1913년에는 노르웨이가 여성 보편 선거권을 보장했다. 유럽 국가 대다수는 제1차 세계대전 이후까지 여성에게 투표권을 부여하지 않았다.
결론
일상의 변화가 너무도 급진적이었기 때문에 변화에 어떤 커다란 방향성이 있었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만약 이 모든 요소를 아우를 수 있는 단 하나의 이미지가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바로 증기였다. 기관차, 선박, 공장, 견인차 모두 증기의 힘으로 세상을 알아볼 수 없을 만큼 바꿔놓았다. 그러나 가장 지대한 영향을 미친 변화는 사회 개혁이었다. 즉 한 사람이 다른 사람과 동등한 가치를 지닌다는 인식이 사회적으로 널리 받아들여진 것이었다.
여가 시간 증가다. 더는 가족들을 먹여 살리고 입히느라 몸부림칠 필요가 없어지면서 사람들은 게임이나 취미를 위한 시간을 낼 수 있었다. 19세기 후반, 영국의 1인당 소득은 급상승했다. 낮 시간에 일을 쉬고 단체 스포츠 경기를 관람하러 가거나, 저녁 시간에 극장이나 음악당, 클래식 연주회장, 오페라극장을 찾는 남녀가 점점 더 늘어났다. 사람들은 소설을 읽고, 피아노를 치고, 자국은 물론 외국의 휴일까지도 즐겼다. 축구나 럭비, 크리켓으로 대표되는, 세계에서 큰 인기를 끄는 단체 스포츠의 상당수는 영국에서 개발되었다. 왜 그랬을까? 영국이 세계 각지를 통치했을 뿐만 아니라 영국 노동자들이 연고지를 떠나 다른 팀을 상대로 정기적인 경기를 치를 만큼 여가 시간이 충분한 최초의 노동자였기 때문이다. 1900년까지 서양 여러 지역에서 노동 계급이 공구를 내려놓고 공을 차기에 충분한 시간과 돈을 얻었다. 기근에 시달리던 이전 세기들을 되돌아보면 이것은 그 자체로 엄청난 일이었다.
명단에 이름을 올린 이들은 알렉산더 그레이엄 벨, 루이 다게르, 찰스 다윈, 토머스 에디슨, 마이클 패러데이, 지그문트 프로이트, 로베르트 코흐, 카를 마르크스, 제임스 클러크 맥스웰, 루이 파스퇴르다.
제10장: 20세기 (1900-1999) - 극단의 세기
두 차례의 세계 대전, 핵무기, 디지털 기술, 우주 탐사는 인간의 잠재력과 위험을 재정의했습니다. 모티머는 이 세기의 숨막히는 기술적 진보가 어떻게 전례 없는 인간 파괴와 함께 발생하여 인류의 미래에 대한 실존적 질문을 만들어냈는지 조사합니다.
운송
전쟁
기대수명
매스컴
#인터넷 20세기 말에는 마침내 인터넷을 정보, 교육, 유흥의 주요 원천으로 여기는 사람들이 점점 더 많아졌다. 그러나 우리는 디지털 시대가 예정보다 매우 늦게 도래했다는 사실을 유념해야만 한다. 어찌나 늦게 도착했던지, 2000년에 디지털 시대의 도래에 감명받은 사람은 많지 않았다. 인터넷은 1969년에 네 곳의 미국 대학에서 특별하게 고안한 컴퓨터를 서로 연결하면서 형성되었다. 수십 개의 연구 기관들이 인터넷망에 합류했지만, 1991년 8월에 출시된 팀 버너스 리의 월드 와이드 웹World Wide Web이 성장한 이후에야 인터넷이 대중 매체가 될 수 있다고 깨달았다. 인터넷이 엄청난 속도로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이용료가 없었기 때문이다. 19세기에 철도가 등장했을 때와 마찬가지로 즉시 인터넷 사업 열풍이 불었다. 이런 사업들은 대부분 수익을 내는 데 실패했지만, 1995년 말에는 전 세계적으로 100만 개가 넘는 웹사이트가 활성화되어 있었다.
전기제품과 전자제품
중요한 것은 바로 이 속도였다.
미래의 발명품
결론
내가 보기에 20세기 서양에서는 삶의 환경 측면에서 세 가지 거대한 변화가 일어났다. 그것은 바로, 세계화가 일어나고, 대량 살상의 위험성이 등장하고, 우리가 지속 불가능한 생활수준에 도달한 것이었다. 운송 발전에 따른 세계화, 전쟁이 변하면서 생긴 대량 살상의 위험, 직전 두 소챕터에서 다룬 지속 불가능성에 관해, 내가 독자들의 관심을 충분히 끌었기를 바란다.
라이트 형제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이오시프 스탈린 프리츠 하버 - 유대계 독일인, 과학자, 암모니아 합성 하버-보슈법 발명, 비료 생산 가능 혁명, #1차세계대전 에 독가스 개발 아돌프 히틀러
결론: 가장 큰 변화의 세기는?
10세기의 변화를 분석한 후, 모티머는 그의 발견을 종합하여 중심 질문을 다룹니다. 확정적인 순위를 제공하는 대신, 그는 독자들이 고려할 수 있는 미묘한 기준을 제공합니다: 변화의 규모 대 변화율, 긍정적 영향 대 부정적 영향, 물질적 중요성 대 문화적 중요성. 결론은 독자들에게 인간 번영을 위해 어떤 종류의 변화가 진정으로 가장 중요한지 고려하도록 도전합니다.
여러분이 숲에서 고지로 갈 수 있는 경로는 셀 수 없이 많을 것이다. 선구자로서, 여러분은 아마도 쓰러진 나무와 물에 잠긴 땅과 협상을 벌여가며 가장 쉬운 길을 택할 것이다. 그리고 때마침 더 빠른 길을 발견한다면 이전에 오던 길은 버릴 것이다. 그러면 얼마 지나지 않아 여러분이 선호하는 길이 생길 것이다. 그리고 이 길이 수 세기 동안 사용된다면 도로가 될 수도 있다. 도로가 생긴다면 누군가가 도로 한 편의 땅을 차지하게 될 것이며, 그 땅을 개간하여 농사를 짓거나 건물을 지을 것이다. 이렇게 되면 다른 길에는 모두 통행자가 없어진다. 모두가 다 기존의 길만 이용할 테니 말이다. 이렇게 된 다음에는 변화가 일어나기가 매우 어렵다. #변화
우리가 변화를 ‘일으키려면’ 어떤 조건이 필요한지에 대해서도 가설을 세울 수 있다는 의미다. 핵심어는 바로 ‘필요’다.
우리는 사회의 가장 중요한 ‘필요’가 무엇인지를 먼저 자문해보아야 한다.
🤔 필요가 변화를 이르킨다
이제 사람들은 하느님이 ‘싸우는 자’와 ‘기도하는 자’와 ‘일하는 자’라는 세 계급을 만들었다는 낡은 금언을 거부하기 시작했다. 그 이후로 개인적 풍요personal enrichment에 대한 열망이 모든 변화의 근본 요인이 되었다. 16세기의 탐험가, 17세기의 부르주아, 18세기의 농업 개혁가, 19세기의 공업가와 기업가들을 움직인 것은 모두 부자가 되려는 꿈이었다. 20세기에는 사업가와 여성들이 세계의 자산으로 ‘현실판 모노폴리 게임’을 하면서, 자신을 풍요롭게 하는 행위를 예술적 형태로 승화시켰다. 따라서 나는 지난 천년기 동안 일어난 변화의 근본 원인이자 원동력은 날씨와 날씨가 식량 생산에 미친 영향, 안전에 대한 필요, 건강 악화에 대한 두려움, 개인적 풍요에 대한 욕망 등이라고 주장하고 싶다.
변화의 네 가지 원동력 미국의 심리학자 에이브러햄 매슬로가 1943년에 만든 욕구단계이론 만성적으로 극도로 굶주리는 사람에게 유토피아란 음식이 넘치는 곳이라고 아주 간단히 정의될 수 있다. 굶주리는 사람은 평생 먹을거리만 보장된다면 자신이 완전한 행복을 누릴 것이며 그 이상 바랄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이들은 삶 그 자체를 먹는 행위의 관점에서 정의하는 경향이 있다. 이들은 다른 모든 행위는 중요하지 않다고 여긴다. 이들은 배를 채우지 못하기에 자유, 사랑, 소속감, 존중, 철학을 모두 쓸모없는 사치품으로 보고 하찮게 여긴다.
이념이 속하는 필요의 단계가 사람마다 다를 수 있다는 사실에 주의하면서, 우리는 더 역사적인 관점에서 필요의 단계를 정하고, 이를 이용하여 사회적 변화를 평가할 수 있다.
- 생리적 필요: 사회 구성원들이 생명을 유지하기에 충분할 만큼 음식, 난방, 거주의 필요를 채울 수 있는가? -> 평가 방법 : 인구 증가
- 안전에 대한 필요: 사회가 전쟁으로부터 자유로운가? -> 전쟁, 분쟁,사상자수
- 법과 질서에 대한 필요: 사회 구성원들이 평시에 안전한가? -> 살인율
- 건강에 대한 필요: 사회 구성원들이 심신을 약하게 하는 질병으로부터 자유로운가? -> 병자의 비율과, 의료기간? 병자를 돕는 능력,기대수명
- 이념적 필요: 사회 구성원들이 도덕적 요구나 사회적, 종교적 편견으로부터 자유로운가? 그래서 아래에 있는 필요 가운데 무엇을 충족할 수 없거나, 위의 필요 가운데 무엇을 포기해야만 하는 일이 없는가? -> 인종, 여성,아동,계급 차별,종교
- 사회적 지지에 대한 필요: 사회 구성원들이 거주하는 지역사회 안에서 사회적 교류를 충분히 할 수 있고, 정서적 만족감을 얻을 수 있는가?
- 개인적 풍요에 대한 필요: 사회 구성원들이 개인적 풍요를 추구할 수 있고, 그렇게 얻은 부를 통해 포부를 이룰 수 있는가? 혹은 다른 식으로 포부를 이룰 수 있는가?
- 사회적 풍요에 대한 필요: 다른 사회 구성원들이 위에서 언급한 필요 가운데 무언가를 충족하도록 사회 구성원들이 도울 수 있는가?
이 책의 10개 장에서 나는 변화의 주체로 전혀 다른 10명의 사람을 제시했다. 교황 그레고리오 7세와 피에르 아벨라르, 교황 인노첸시오 3세, 잉글랜드 왕 에드워드 3세, 크리스토퍼 콜럼버스, 마르틴 루터, 갈릴레오 갈릴레이, 장 자크 루소, 카를 마르크스, 아돌프 히틀러!
누가 지난 천년기 동안 변화의 주체였느냐에는 사실 의문의 여지가 없다. 그것은 바로 하느님이었다.
11세기와 12세기에 하느님의 평화 운동과 하느님의 휴전 운동이 있었고, 노예제 폐지가 일어난 배경에는 가톨릭교회가 인식한 하느님의 뜻이 있었다. 하느님은 중세 내내 국제적으로 평화 활동을 벌인 유일한 주체였다. 서구가 교황의 권위를 받아들였던 것은, 기독교 공동체가 모두 하느님을 숭배했기 때문이다. 12세기 르네상스를 일으키고, 초기 세기에 서구에서 학문과 과학을 이끌었던 것은 바로 기독교의 수도원 제도였다. 13세기 이전에 읽고 쓰는 능력을 보존해준 이들은 거의 전부 종교인이었다. 인쇄술이 발명된 이후로, 평민 남성과 여성들은 성경을 읽고 하느님 말씀을 공부하면서 읽는 법을 깨우쳤고, 그 덕분에 여성들은 다수의 다른 여성들에게 자기 생각을 표현할 기회를 처음으로 얻을 수 있었다. 사람들이 두루두루 문해력을 갖추게 되면서 정부의 행정과 관료 체제가 개선되었고, 이는 결국 사적 폭력의 감소로 이어졌다. 수많은 과학자들은 스스로 하느님의 천지창조를 탐구하고 있다고 여겼기에, 평생을 바쳐가며 우주의 신비를 파헤치고 전 세계 식물 표본의 특징을 연구했다. 17세기에 수많은 의사들에게 자신감을 주어 병들고 쇠약해진 사람들을 도울 수 있게 한 것은 바로 하느님의 치유 능력이 의사의 몸을 통해 발현된다는 믿음이었다. 19세기에 남성과 여성, 흑인과 백인, 부자와 빈자의 동등한 권리를 부르짖었던 수많은 사람들이 도덕적으로 기댈 수 있던 유일한 버팀목은 하느님이 모든 사람을 평등하게 창조하셨다는 사상이었다. 이 책에서 살펴본 주요 변화들 가운데 오직 20세기에 일어난 변화만이 하느님에게 명백히 영향을 받지 않았다.
“이제 도전은 확장이 아니라 자기 억제다. 모든 것을 정복하려 드는 남성들이 잘 해내지 못하는, 자기 억제가 필요한 문제들이 산적해 있다”라고 말했다. 이 문장에서 ‘남성’을 강조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 테스토스테론을 동력으로 삼는 정복보다는, 흔히 여성과 연관 짓는 양육이나 보호의 특성들이 우리를 미래로 이끌기에 훨씬 더 적합하다. 만약 남성의 본성이 변한다면 틀림없이 여성의 본성도 변할 것이다. 여기에는 중대한 위험이 있다. 여성들이 그저 남성적 특성을 취한다면 세상에 아무런 이점이 없을 터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인류에게 희망이 있으려면 21세기의 변화의 주체가 여성인 편이 모두에게 더 좋을 수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받아들여야 한다.
인간은 제도, 규칙, 제한 때문에 겸손을 강요받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는다. 그것이 진실이다. 우리는 사람들이 제약과 억압에서 벗어나는 이야기를 즐긴다. 인간 정신 안에는 자유를 향한 열망이 있기 때문이다. 베네치아 공화국이 그랬듯, 우리가 우리 자신이 아닌 다른 무언가가 된다는 생각을 견디지 못해 파멸을 맞이할 운명이 아닌지 나는 의심스럽다.
파울 에를리히는 최근 왕립학회 연설에서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오늘날’의 70억 인구를 지속 가능하게 지탱하려면, 즉 현재 기술과 생활수준을 유지하며 평상시와 다를 바 없이 살게 하려면, 지구가 0.5개 더 필요하다. 지구의 모든 시민이 미국인 수준으로 자원을 소비한다면 지구가 4개에서 5개 더 필요하다. 2050년에 현재 예측대로 인구가 25억 명 증가하면, 인간이 문명의 생명 유지 시스템에 추가로 가하는 공격 강도는 인구 증가 비율보다 상대적으로 더 높을 것이다. 왜냐하면 거의 모든 곳의 생명 유지 시스템에서, 인구가 늘어날 때마다 환경 피해가 더욱더 빠르게 일어나는 비선형적인 반응이 나타날 것이기 때문이다.19
전 세계적으로 종교와 빈곤 사이에는 강한 상관관계가 나타난다.
그렇다고 해서 단순히 가난을 사람들이 종교를 갖게 하는 원인으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돈과 종교의 관계는 그리 단순하지 않다. 오히려 그 역이 진실일 가능성이 크다. 즉 가난이 영적 헌신을 부른다기보다는, 부가 영적 헌신의 부재를 낳는 것일 가능성이 크다. 둘 중 어느 쪽이든, 나는 신앙이 주는 위로와 종교 공동체가 미래에 다시금 중요해지리라 생각한다. 세계의 전통적인 종교는 수 세기 동안 귀족과 하인 모두를 만족시켜왔으며, 계급 사회의 수요에 딱 들어맞는 듯하다. 사회에 계급 구조가 다시금 나타나면서 세계의 신앙이 저절로 늘어날 것으로 보인다.
변하지 않은 것들이란, 우리가 살면서 발견한 수많은 귀중한 것들이었다. 사랑, 아름다움, 자녀들, 친구들이 주는 편안함, 농담 따먹기, 함께 먹고 마시는 즐거움, 이야기하기, 재치, 웃음소리, 음악, 바닷소리, 따스한 햇볕, 달과 별 바라보기, 노래하고 춤추기 같은 것들 말이다.
변하지 않을 것들이란? 우리가 한순간 넋을 잃고 빠져드는 모든 것들.
꿈꿀 만한 가치가 있는 모든 것들.
그리고 값을 매길 수 없는 모든 것들이다.
부록
부록 I: 세기별 주요 혁신 연대표
세기별로 정리된 중요한 발명품, 발견, 제도적 발전에 대한 종합적인 연대순 목록으로, 독자들에게 책의 광범위한 역사적 범위에 대한 참고 가이드를 제공합니다.
부록 II: 방법론적 고려사항
모티머는 완전히 다른 맥락에서 역사적 변화를 측정하는 과제를 논의하며, 잠재적인 편향, 역사적 기록의 한계, 그리고 기술적, 사회적, 문화적 변화 사이의 복잡한 관계를 다룹니다.
부록 III: 더 읽을거리
세기별로 조직된 광범위하게 주석이 달린 참고문헌으로, 독자들에게 책 전체에서 다루어진 특정 시기와 주제에 대한 더 깊은 탐구의 길을 제공합니다.
6.읽으면서 떠오른 생각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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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세기 기독교가 팽창한 이유는, 폭력에서 자신을 구하고,
- 폭력으로 다른 곳을 빼앗기 위함이였다
- 카톨릭교의 군주를 강화, 계급을 정당화 해주었기때문에 지배 논리가 기반되었다.
- 결과로 기독교 세계는 돈이 몰리게 된다.
- 로마 교황과 비잔티움의 교황간 세력 다툼
- #1054년 카톨릭교화, 그리스정교회 로 분열된다.
- 11세기 기독교가 팽창한 이유는, 폭력에서 자신을 구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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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
- 카톨릭 교회와 그리스 정교회의 다툼을 정리하려고
- 시선을 예루살렘 정복으로 전환하여 성공한 [우르바노 2세](우르바노 2세)
- 카톨릭은 중앙집권화 되고, 조직화 되었고, 가장 큰 영향으로 일반대중에게 권위를 행사할 수 있게 되었다.
- 카톨릭 교회와 그리스 정교회의 다툼을 정리하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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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
- 교회가 폭력을 줄이기 위해 한일
- 첫번째, 폭력을 행사한 영주 -> 속죄 -> 십자군 성전참여, 성당 건립요구
- 두번째 ‘하느님의 평화’운동 -> 종교선전,수호인의 유물행력에 활용
- 당시는 유물의 신비적 힘을 믿는 믿음이 널리 퍼져있었다 44
- 세번째 ‘하느님의 휴전’ 운동
- 교회가 폭력을 줄이기 위해 한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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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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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회 돈이 영주에게서 나오고, 영주의 돈은 노예를 부림으로 나온다.
- 그래서 교회는 노예제를 폐지하기 어려운 구조
- 노예 제가 끈나가네 된것은
- 첫째, 사회적 발전
- 전쟁이 줄어 (패배한)노예가 줄어듬
- 경제 발전, 도시화로 인해 노예 스스로 노동자가 되기위해 도시로 감
- 교회의 부가 많아지면서 영주 권한 축소
- 둘째, 개별통치자의 정책
- 노예제 반대 목소리 커짐
- 첫째, 사회적 발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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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기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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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회 야망이 커지면서 건출술 발전 -> 위대한 성전을 건축하라! 다른 성전 보다 멋지게!!
- 안전한 성을 짓고, 영주와 노동자 들은 안전이 확보된다.
- 군사적 기능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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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세기
- 인구의 증가
- 날씨가 따뜻해짐 -> 농작물 풍년
- 사람들 먹고살기 걱정 덜함 -> 결혼 출산 증가
- 수도원의 급정 -> 연옥개념 도입 -> 사후기도가 고인을 천국으로 가게하는데 도움된다 -> 기도하는 곳 수도원
- 수도원내에서 지식 확장
- 학교,의술,건축술,정보전달,농업술,도서관 발달
- 수도원내에서 지식 확장
- 지적 르네상스 75
- 기독교가 아랍세계를 점령 -> 아랍인들의 기술, 저서를 번역 -> 라틴어로 -> 유럽에 확산 -> 지적 팽창
-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적 사고 구조가 유럽에 전파되다
- 의학
- 아랍세계에서 유럽으로 번역,전파 된 기술이 많다
- 기독교인의 의술이 낫고 있는 사람도 죽인다. ..기가막힌다. 88
- 12세기 기독교의 미신과 신앙에 의한 광적 의술이…아랍의 체계적인 의술,저서, 기술등에 도움으로 비약 발전하게 된다. 89
- 법의 성문화
- 그전에는 재판관의 개인 주관이나 기억에 의존
- 인구의 증가
-
13세기
- 상업,은행의 생성, 발달
-
14세기
- 흑사병
- 사람들은 하나님에 대해 더 생각하기 시작
- 이 고통을 주는 이유?
- 죽음을 이해, 사후에 관심
- 문학 작품등에서 연옥,악마,사후 세계등이 나타남
- 사람들은 하나님에 대해 더 생각하기 시작
- 흑사병
-
15세기
- 수많은 전쟁이 일어나고
- 화약,나침판이 발명된 시기
- 2025년 지금의 세계도 교역에서 자국내 정책으로 전환되며 관세전쟁을 하고, ai신기술도 등장한다. 비슷한 시대일까?
- 사람들의 호시김,욕심,모험심을 자극하기 위해서는 문화적 요소가 필요하다 186
- 말 1 = 사람 9 기가막힌다. 188
- 콜롬버스는 위대한 자가 아니라 탐욕에 폭군이었다. 192
- 고대 지식인들이 말한것이 틀렸다는것을 알게해준 콜럼버스
- 사람들은 또 어떤것이 다를지 의심과 호기심, 탐험심이 크게 증가했다.
- 개인주의 , 사실주의,르네상스 시대인 15세기다. 195
- 수많은 전쟁이 일어나고
-
16세기
- 나라마다 새해 시작일이 달랐다니..
- 책인쇄, 문해력 증가
- 성경의 지역어 번역, 대중의 문해력 증가
- 과학자 교류 증가,코페르니쿠스의 천동설 확산
- 의학 지식 , 인체 해부학 명황, 지식확대
- 책의 삽화 덕분
- 식물,약초 - 건축 - 대학의 전성
- 기록 문화 확산 , 정부등
- 종교개혁
- 문맹인들을 대상으로 사기를 쳐온 카톨릭 -> 성경이 보급도되고 사람들이 성경을 읽기 시작하자 들통이 났다
- 사람들의 귀와 눈을 막는 거대한 탐욕 종교인들
- 지금은 어떤가?
- 문맹인들을 대상으로 사기를 쳐온 카톨릭 -> 성경이 보급도되고 사람들이 성경을 읽기 시작하자 들통이 났다
- 폭력감소
- 국가의 힘이 증가하면서 폭력행사하던 주체들,영주들이 처벌을 두려워하게 됨
- 국가가 이렇게 폭력,사회를 통제할 수 있었던 이유중 하나는 기록과 글을 읽는 사람이 증가했기 때문 250
- 법과 국가의 법에 의한 판단 기능 강화
- 글을 쓰면서, 글을 읽으면서 생각을 하면서 분노를 다스림 251
- 폭력을 외부 나라와의 전쟁을 통해 해소,봉합시킴, 현대에도 마찬가지
- 국가의 힘이 증가하면서 폭력행사하던 주체들,영주들이 처벌을 두려워하게 됨
- 16세기의 특징
- 읽고 쓸수 있게 되었고, 세계을 탐험할수 있는 기술이 개발 도전하는 사람도 많아졌다
- 변화, 16세기의 특징
- 그 변화에 대한 ,그리고 지식의 확장으로 계몽이 이루어지는 그 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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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세기 프랑스 기대수명이 23세라니 충격적이다
-
과학의 발달
- 망원경의 개발, 현미경 개발
- 가설-검증-증명의 지식 체계
- 이전 논문을 기반으로 새로운 지식 확장 가능 문화 형성
- 갈릴레오, 뉴턴든 천재 등장
- 신앙 -> 과학 으로 혁명
-
모라고 적어야되까?
-
520
- 미래에는
- 자원 전쟁, 석유 고갈, 식량 문제, 인구 증가 문제, 재생에너지도 결국 땅 ,
- 땅이 부족해진다. ————–> 지구의 자원은 고갈되어 간다. 과연 인류는 똑똑한 결정을 할 수 있을까? 상당히 회의적이다.
7. 연관 문서
독서록 (feat Gemini 2.5)
독서록: 변화의 세기 (이언 모티머 저)
세기의 변화를 통계적으로 설득력 있게 설명하며, 인류의 미래에 대한 깊은 질문을 던지다.
이언 모티머의 ‘변화의 세기’는 서양 천 년의 역사를 꿰뚫으며 각 세기의 결정적인 변화들을 통계적이고 설득력 있는 시각으로 제시하는 책이다. 단순한 연대기적 서술을 넘어, 각 시대의 사회, 문화, 경제, 사상적 변화가 어떻게 다음 시대를 이끌었는지 유기적으로 연결하며 독자에게 깊은 통찰을 선사한다. 특히 11세기부터 16세기에 이르기까지, 유럽 사회를 뒤흔들었던 주요 사건들과 그로 인해 촉발된 변화의 양상들을 면밀히 분석하고 있다.
11세기: 인구 증가와 삶의 변화
11세기는 인구 증가와 함께 전반적인 삶의 질이 향상된 시기였다. 영양 상태 개선으로 평균 수명이 늘어나고, 건축 기술의 발전은 더 견고한 주거 환경을 제공했다. 특히 물의 순환을 이해하고 하수도를 정비하며 도시의 위생이 크게 개선된 점은 주목할 만하다. 또한 법의 성문화가 시작되어 재판관의 주관에 의존하던 이전과는 달리, 보다 객관적인 사법 시스템의 기반이 마련되었다는 점은 사회 질서 확립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13세기: 상업과 은행업의 발달
13세기는 상업과 은행업이 비약적으로 발전하며 경제 활동이 활발해진 시기다. 이는 단순히 물물교환을 넘어선 복잡한 경제 시스템의 등장을 의미하며, 유럽 전역의 교역망이 확장되는 계기가 되었다. 이러한 경제적 변화는 도시의 성장과 함께 새로운 사회 계층의 등장을 촉진했다.
14세기: 흑사병과 신에 대한 질문
14세기는 흑사병이라는 전례 없는 재앙이 유럽을 휩쓴 시기였다. 이 엄청난 고통 속에서 사람들은 신의 존재와 고통의 의미에 대해 깊이 성찰하기 시작했다. 죽음에 대한 이해와 사후세계에 대한 관심이 증폭되면서, 문학 작품에서는 연옥, 악마, 사후세계와 같은 주제가 빈번하게 등장하며 시대의 고민을 반영했다. 이는 르네상스 시대를 향한 사상적 토대가 되었다고 볼 수 있다.
15세기: 전쟁, 기술 혁신, 그리고 새로운 세계
15세기는 수많은 전쟁이 발발했지만, 동시에 화약과 나침반의 발명이라는 획기적인 기술 혁신이 이루어진 시기였다. 특히 나침반은 대항해시대를 열어젖히는 결정적인 도구였다. 저자는 2025년 현재의 세계가 교역에서 자국 중심 정책으로 전환되며 관세 전쟁을 벌이고, AI와 같은 신기술이 등장하는 15세기와 유사하다고 질문하며, 과거와 현재의 연결점을 찾으려 한다.
또한, 콜럼버스의 대서양 항해는 고대 지식인들의 세계관이 틀렸음을 증명하며 사람들에게 또 다른 미지의 영역에 대한 의심과 호기심, 탐험심을 크게 증가시켰다. 이는 개인주의, 사실주의, 르네상스 시대를 이끌었던 15세기의 중요한 특징 중 하나이다. 호기심, 욕심, 모험심을 자극하는 문화적 요소의 중요성 또한 강조된다.
16세기: 인쇄술과 문해력의 증가
16세기에는 책 인쇄술이 발달하면서 문해력이 크게 증가했다. 특히 성경의 번역 및 인쇄는 종교 개혁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으며, 지식의 대중화를 촉진했다. 이는 개개인의 사고 능력 발달과 비판적 사고의 확산에 기여하며 사회 전반의 변화를 가속화했다.
결론: 변화의 물결 속에서 인류의 미래를 묻다
‘변화의 세기’는 각 시대의 특징적인 변화를 통계적 데이터를 바탕으로 설득력 있게 설명하며, 독자들에게 인류가 걸어온 길을 명확하게 보여준다. 책의 마무리는 상당히 위기감을 안겨준다. 과거의 변화 속에서 인류는 발전해왔지만, 현재 우리는 기후 위기와 새로운 기술의 등장이라는 거대한 변화의 물결 속에서 과연 지구를 살리고 공존할 수 있을지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이 책은 과거를 통해 현재를 이해하고, 더 나아가 미래를 어떻게 만들어갈지에 대한 깊은 고민을 유도하는 훌륭한 독서 경험을 제공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