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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전

☝️세계2차대전이 끝나고 제3국들은 독립을하게 되고 민족주의가 일어나며 미국과소련의 냉전 체제에서 고통받는다.

[!INFO] 책 정보

  • 저자: 저자/오드_아르네_베스타
  • 번역: 번역/유강은
  • 출판사: 출판사/서해문집
  • 발행일: 2025-03-10
  • origin_title: The Cold War- A World History
  • 나의 평점: 10
  • 완독일: 2025-06-01 00:00:00

냉전

1. Befor Qustion

2. Synopsis (개요)

2.1 저자 - 오드 아르네 베스타

역사학자 예일대학교 역사학·글로벌문제 담당 엘러휴 교수. 1960년 노르웨이에서 태어나 오슬로대학교를 졸업했고, 미국 노스캐롤라이나대학교 역사학과에서 〈냉전과 혁명: 소련-미국의 대립과 국공내전의 기원, 1944~1946〉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대 국제사와 지구사 연구자이며 전공 분야는 18세기 이후 동아시아다. 지금까지 16권의 저서를 냈는데, 대부분 20세기 아시아사와 지구사를 다루는 책이다. 런던정경대학(LSE) 국제사 스쿨교수, 하버드대학교 미국-아시아 관계 담당 S.T. 리 교수를 지낸 뒤 예일대학교로 옮겼다. 예일에서는 역사학과와 잭슨글로벌문제대학에서 강의하고, 데이븐포트칼리지의 지도교수이며, 국제안보연구소 소장으로 일한다. 또한 영국학술원을 비롯한 여러 학술원의 회원이자 베이징대학교 방문교수, 하버드 페어뱅크연구소 연구원이다. 지은 책으로 《제국과 의로운 민족(Empire and Righteous Nation)》과 벤크로프트 상을 받은 《냉전의 지구사(The Global Cold War)》 등이 있다.

2.2 주제

2.3 기획 및 지필 의도

2.4 주요 등장 인물

2.5 전체 줄거리

Summery

  • 냉전은 단순한 미국과 소련의 대립이 아닌, 산업혁명에 뿌리를 둔 전 지구적 이데올로기 대결로 봐야 함.
  • 냉전은 유럽에서 시작되었지만, 아시아, 아프리카, 중동에서 더 깊은 영향을 미쳤으며, 이 지역들의 경제 및 체제를 규정하는 데 영향을 줌.
  • 냉전 시대에 발생한 환경 위협, 사회적 분열, 종족 갈등이 현재까지도 많은 지역에서 문제로 남아있음.
  • 냉전은 미국의 힘의 부상과 공고화, 소련식 공산주의의 패배, 유럽 민주적 합의의 승리를 의미.
  • 이 책은 냉전을 100년의 시각에서 전 지구적 현상으로 평가하며,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의 충돌이 전 지구적 상황에 미친 영향을 이해하고자 함.

Keyword

#냉전 #세계사 #미국/소련 #이데올로기/대결 #지구사 #자본주의/사회주의 #역사/문화 #오드아르네베스타 #유강은 #옥창준

Author

오드 아르네 베스타는 예일대학교 역사학·글로벌문제 담당 엘러휴 교수이며, 현대 국제사와 지구사 연구자이다. 18세기 이후 동아시아를 전공하며, 20세기 아시아사와 지구사를 다루는 16권의 저서를 냈다. 런던정경대학(LSE) 국제사 스쿨교수, 하버드대학교 미국-아시아 관계 담당 S.T. 리 교수를 지낸 뒤 예일대학교로 옮겼다. 대표작으로는 《제국과 의로운 민족(Empire and Righteous Nation)》과 벤크로프트 상을 받은 《냉전의 지구사(The Global Cold War)》 등이 있다.

3. After My Idea

3.1 Insight

제3국에서 강대국의 제국주의, 억압의 고통에서 벗어나려, 소련의 강한 군대와 , 공산주의 를 도입하려고 한것이다. 냉전은 미국과 소련의 자존심같은 싸움이었는데 피해는 제 3국에서 가장 크게 받았다. 그 수많은 죽음들이………이데올로기의 결과다.

억압받고, 불합리하다고 느끼는 세대는 , 시스템을 바꾸려한다. 20세기, 그 때는 제국주의를 벗어나는 시기로, 식민국가들은 강대국의 체제에 치를 떨며 새로운 이데올로기를 찾았고 그것에 소련와 미국은 사회주의-자본주의의 틀을 제공했다.

냉전 핵을 통해 절멸의 위기를 넘어가게 된 것이 가장큰 안도이다 강대국의 싸움은 절멸로 끝난게 역사인데 천운으로 인류는 냉전이 핵전쟁없이 마무리를 할 수 있었다.

세계의 사람들이 빈부 격차가 커지고 계층이 더 벌어지면 또다른 전쟁이 시작 될 수 있다. 우리는 저저의 마지막 코멘트처럼 신중시 검토해야 한다. 이상적 이데올로기는 없고, 그것을 지키기 위해 죽어야 하는 수많은 젊은이들의 생명이 필요할 뿐이다.

877 좋은 결과를 이루기 위해 우리가 어떤 위험을 무릅쓰려 하는지 신중히 검토하는 게 더 낫다. 20세기가 완전한 세상을 만들려고 일으킨 끔찍한 피해를 고스란히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에필로그에서 말한 강대국간 싸움의 끝은 대재앙이었는데. 생각해보니 핵전쟁의 재앙을 벗어난것은 정말 다행스러운 일이었네요. 고르바초프의 노력에 고마운 마음도 ㅎ, 그나저나 억압화 불평등과 빈부의 격차확대되는 현 시대, 또다른 갈등이 시작될가 걱정이 되기도 합니다. 베조스의 결혼식이 이슈화 되는것처럼….

3.2 After Qustion

  • (why) 이 책의 제목을 이렇게 지은 이유는?

  • (how) 어떻게 설명하고 있는가? 어떻게 하라고 하는가? 어떻게 해야하는가?

  • (where) 어느 곳에서 쓴 책인가? 어느 것을 위해 쓴건인가? 어디로 가야하는가? 어디에서 읽어야 하나? 그곳은 어떤 곳인가?

  • (when) 이책은 언제 쓰여졌는가? 시대적 배경은 무엇인가? 언제를 기준으로 쓰였는가? 언제 할것인가?

  • (who) 저자는 누구인가? 주인공은 누구이고 어떤 사람들이 나오나? 누구를 위해 저자는 말하는가?

  • (why) 이책을 통한 질문을 만들기

    • 질문 1.
    • 질문 2.
  • (what) 이 책에서 말하는 주제라는 무엇?

    • 알게된 것은 무엇인가?
    • 해야할건 먼가?
    • 다른 책과 다른 점은 먼가?
    • 이 책의 특징은 먼가?

3.3 Top 3 Highlight

38 미국인은 무엇보다도 자원과 발상이 풍부해 서로를 비옥하게 만드는 나라에서 변화와 새 출발의 주체였다.

1장 69 1914년 이후 시기에 세계의 많은 것이 뒤집혔다. 제1차 세계대전은 유럽을 황폐하게 만든 한편, 세계를 집산주의적 방향으로 변혁하고자 하는 급진적 반자본주의운동의 일련의 도전을 열었다. 식민지 나라도 저항이 끓어올랐다. 미국은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나라로 올라섰지만, 경제적 의미를 제외하면 세계에서 어떤 역할을 맡아야 할지 확신하지 못했다. 공산주의 대 자본주의라는 이데올로기적 냉전은 이미 격화했지만, 아직 대립하는 국가들로 이루어진 양극화된 국제체계를 창출하지 못했다. 1941년에 이르면, 침략적인 민족주의 이데올로기에 따라 움직이는 나치 독일이 이런 세계 상황에서 가장 큰 이득을 보는 것처럼 보였다.

2장 89 1945년 소련군이 진출한 노르웨이 북부에서 은신처에 숨어 있던 어부들과 그 가족들은 스탈린과 붉은군대를 찬양하는 현수막을 들고나왔다. 장장 6년간 독일의 점령에 고통을 받은 체코슬로바키아 사람들은 도심을 행진하는 소련 병사를 끌어안았다. 동유럽에서 많은 이는 붉은군대를 독일의 인종 억압에서 자기를 해방하는 슬라브 군대로 바라보았다.

스탈린과 소련은 점령지 바깥에서도 대륙의 해방자로 환호를 받았다. 1930년대에 프랑스에서 공산주의를 비난한 상당수의 사람은 소련이 히틀러를 상대로 전쟁을 치르면서 막대한 희생을 당한 것을 보고 난 뒤 공산주의를 다소 긍정적인 관점에서 바라보았다. 서유럽에서 공산당에 대한 지지는 그 어느 때보다 높았다. 신참 공산당원 대부분은 전쟁 중에 성년이 된 젊은이였다. 그들이 볼 때 공산주의와 소비에트의 사례는 무엇보다도 자국에서 개혁이 시급함을 의미했다. 그들은 완전고용과 사회복지를 원했다. 전쟁 중에 노동력으로 가세한 여성은 가부장적 가정생활로 다시 밀려나는 것을 바라지 않았다. 전쟁 당시 무기를 집어 들지 않은 것을 후회하는 이를 비롯한 ==많은 사람이 독일의 점령에 맞서 저항하는 데 큰 역할을 한 공산주의자를 진심으로 존경했다. ==이제 나치즘과 파시즘은 수명을 다했고, 유럽은 다시 태어날 수 있었다. 소련에서 유혈이 낭자한 과거가 있었음에도 공산주의는 유럽의 전환을 위해 준비된 본보기였다.

108 미국은 국제 문제에서 미국의 우세를 인정하려 하지 않는 소련에 인내심을 보이지 않았다. 트루먼 대통령은 루스벨트 같은 정치적 기민함과 개인적 매력이 없었고, ==소련에 대해 오래전부터 강경 노선을 주장한 트루먼의 핵심 보좌진은 소련을 통합하기보다 오히려 봉쇄하는 쪽으로 결정하게 했다. 앞으로 살펴볼 것처럼, 전후의 충돌을 냉전으로 뒤바꾼 것은 바로 이 봉쇄였다. 트루먼은 모스크바를 국제적 합의와 조약에 묶어 두려고 한 루스벨트의 정책을 이해하지 못했다. ==최강대국으로서 미국은 소통과 무역, 문화와 과학의 교류를 위한 창구를 열기 위해 더 큰 노력을 기울였어야 했다. 아마 스탈린은 어쨌든 고립을 선택했을 것이다. 하지만 더 힘센 쪽이 모스크바를 여러 형태의 협력으로 유인하려고 노력했더라면, 나중에 양쪽에서 모두 생겨난 피해망상을 포함해 충돌의 강도가 한결 약해졌을 것이다.

12장 460 냉전이 지속되기는 했지만, 모스크바는 이미 일종의 “통상적인” 적-유럽인이고 신중하며 어느 정도 예측할 수 있는 적-이 되었지만, 제3세계는 혼돈 그 자체인 데다 무절제했다. 미국이 느끼는 공포의 핵심은 장래에 미국이 세계를 지배하는 데 맞서는 저항의 모습이 소련보다 중국이나 쿠바를 닮을 것이라는 의심이었다.

875 냉전이 세계의 모든 사람에게 영향을 미친 가장 중요한 이유는 핵 절멸의 위협이 함축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누구도 냉전에서 안전하지 못했다. 고르바초프 세대의 가장 위대한 승리는 핵전쟁을 피했다는 것이다. 역사에서 보면, 강대국 간 경쟁은 대부분 대재앙으로 끝난다. 냉전은 달랐다(지금 내가 비교적 안전한 하버드대학교의 연구실에서 이 사태에 관해 글을 쓸 수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핵무기 경쟁이 엄청나게 위험했다는 사실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몇 차례 우리는 대다수 사람이 깨달은 것보다 핵 절멸에 훨씬 근접했다. 정말 우연히 또는 첩보 실패의 결과로 핵전쟁이 발발할 수 있었다. #핵 #냉전 #핵전쟁

4. Key Word 책에서 뽑은 키워드 정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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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 키워드 1

키워드-제목 1

5.책 밑줄 정리 (책 밑줄 전체,page)

프롤로그

냉전

10 한국 국민은 어렵게 얻은 민주적 성과를 지켜내려는 의지를 거듭해서 보여 주었습니다. 또 한국은 세계에서 성공한 자본주의 경제 중 하나입니다. 북한의 왕조적이고 개인 숭배적 독재 체제에는 여전히 마르크스주의적 요소가 일부 들어가 있습니다. 그러나 마르크스주의는 북한의 지속적 경제 실패를 설명하는 데에만 의미가 있을 뿐입니다.

13 냉전은 자본주의와 사회주의가 맞선 대결로, 1945~1989년 정점에 이르렀지만, 그 기원은 한참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며, 그 결과는 지금도 감지할 수 있다. 전성기에 냉전은 하나의 국제체계를 구성했다. 세계 주요 강대국들이 냉전과 일정한 관계를 두고 그것을 바탕으로 대외정책을 세웠기 때문이다. 냉전에 담긴 경쟁적인 사고와 관념이 대부분의 국내 담론을 지배했다.

14 냉전은 자본주의와 사회주의가 맞선 대결로, 1945~1989년 정점에 이르렀지만, 그 기원은 한참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며, 그 결과는 지금도 감지할 수 있다. 전성기에 냉전은 하나의 국제체계를 구성했다. 세계 주요 강대국들이 냉전과 일정한 관계를 두고 그것을 바탕으로 대외정책을 세웠기 때문이다. 냉전에 담긴 경쟁적인 사고와 관념이 대부분의 국내 담론을 지배했다. 냉전의 유산은 대부분 이런 종류의 절대적 이분법에 초점을 맞춘다.

냉전은 100년의 시각에서 전 지구적 현상… 냉전은 전 지구적 자본주의가 첫 번째 위기에 빠지고, 유럽 노동운동이 급진적으로 변하며, 미국과 러시아가 대륙을 가로지르며 제국으로 확장한 1890년대에 시작해, 베를린 장벽이 붕괴하고, 소련이 몰락하며, 마침내 미국이 진정한 글로벌 패권국으로 부상한 1990년 무렵에 끝이 난다.

18 냉전을 100년의 시각에서 보려는 취지는 다른 중대한 사건들-두 차례 세계대전, 식민주의 붕괴, 경제와 기술의 변화, 환경 파괴-을 깔끔한 하나의 틀에 포함하려는 게 아니다. 그보다 사회주의와 자본주의의 충돌이 거대한 차원의 전 지구적 상황과 어떻게 영향을 주고받았는지를 이해하기 위함이다. 또한 20세기 내내 왜 일군의 충돌이 거듭 되풀이되었는지, 그리고 왜 다른 모든 물질적 또는 이데올로기적 권력 경쟁자가 그 충돌에 연루되었어야 했는지를 이해하기 위함이다. 냉전은 19세기 말 유럽의 근대가 정점에 도달하는 듯 보인 순간에 시작해 충돌의 단층선을 따라서 자라났다.

18 냉전은 미국이 세계 패권국으로 발돋움하는 판을 깔았다. 특히 레닌이 신봉한 형태의 사회주의 좌파가 (서서히) 패배한 과정으로도 볼 수 있다. 그리고 냉전은 두 차례 세계대전의 재앙 위에서 자라나, 1970년대와 1980년대에 새로운 세계 분열과 결합한 국제 경쟁의 극심하고 위험한 단계로도 묘사할 수 있다.

[18세기 후반, 19세기 유럽에서 자본주의와 사회주의가 탄생하게 된 배경](18세기 후반, 19세기 유럽에서 자본주의와 사회주의가 탄생하게 된 배경)

[19세기에 태동한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는 20세기에 들어서면서 전 세계로 팽창하며 인류의 역사를 크게 좌우 미국과 러시아](19세기에 태동한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는 20세기에 들어서면서 전 세계로 팽창하며 인류의 역사를 크게 좌우 미국과 러시아)

24 1860년대에 이르러 초기 사회주의 사상은 카를 마르크스와 그 추종자들의 사고에 압박받았다. 사회주의 원리를 근본적인 자본주의 비판으로 조직화하고자 한 마르크스는 과거보다 미래에 몰두했다. 그는 19세기 중반의 경제적・사회적 변화의 혼돈 속에서 사회주의가 자연스레 성장할 것이라고 가정했다. 마르크스는 과거의 봉건 질서나 현재의 자본주의 질서가 근대 사회의 도전을 다루지 못한다고 생각했다. 경제를 운영하기 위한 과학적 원리에 바탕을 둔 사회주의 질서로 두 질서를 대체해야 했다. 이런 질서는 자신의 몸 말고 아무 자산도 없는 산업노동자인 프롤레타리아트의 혁명으로 생겨날 것이었다. 마르크스는 《공산당 선언》에서 이렇게 말했다. “프롤레타리아트는 정치적 지배권을 이용하여 부르주아지에게서 모든 자본을 차례로 빼앗을 것이다. 그리고 모든 생산도구를 국가의 수중에, 즉 지배계급으로 조직된 프롤레타리아트의 수중에 집중하며, 최대한 신속히 생산력을 증대할 것이다.” #프롤레타리아트 #부르주아지 #사회주의

31 러시아와 미국이 팽창하는 데 관념과 숙명 의식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두 나라의 엘리트는 자국이 팽창하는 데 이유가 있다고 믿었다. 자국민의 자질 때문에 지역 안에서, 그리고 -결국- 전 지구적 차원에서 우위를 점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우위를 점하는 과정에서 두 나라 엘리트는 그들이 유럽의 사명을 수행한다고 느꼈다. 유럽계 출신인 그들은 어떤 의미에서 유럽을 세계화하는, 즉 태평양까지 유럽을 확대하는 기획에 참여했다. 또한 지식인 지도자 몇몇은 이 과정에서 그들이 자국민을 유럽인에 가깝게 변모하게 한다고 믿었다. 유럽의 가치를 중심에 두고, 제국 시대에 제국의 부담을 기꺼이 짊어지게 만든다고 본 것이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두 나라에 모두, 그러한 팽창이 유럽 제국의 팽창과 근본적으로 다르다고 보는 이도 있었다. 영국인과 프랑스인은 자원을 조사하고 상업적 이익을 추구했지만, 러시아인과 미국인은 고차원적인 팽창의 동기가 있었다. 기업과 사회 조직 개념을 확산하고, 종교뿐만 아니라 정치에서도 영혼을 구제하는 것이었다.

33 러시아도 영국의 세계 체계가 자국이 떠오르는 것을 가로막는 주요 걸림돌이라고 보았다. 1850년대 크림전쟁에서 영국이 주도한 동맹이 러시아의 흑해 지역 장악을 견제하자, 많은 러시아인이 영국을 자국의 부상을 저지하려는 반러시아 패권국으로 보았다. 영국과 러시아의 이해관계는 중앙아시아와 발칸반도에서 충돌했고, 1905년 전쟁에서 러시아가 일본에 패배한 것은 영국이 일본을 지원한 탓이라고 여겨졌다. 미국과 달리, 러시아는 세계 자본주의 패권국으로서 영국의 잠재적 계승자가 될 만한 경제 발전을 이루지 못했다. 하지만 영토 확장과 경제적 후진성이 결합하면서 러시아가 -소비에트 마르크스주의의 형태로- 기존 국제체계에 저항하는 지구적 강대국(global antisystemic power)으로 부상할 수 있는 맹아가 만들어졌다.

냉전은 미국이 영국의 계승자로서 세계 무대에 등장한 현상을 나타내지만, 이런 계승이 평화롭거나 순조로이 이루어졌다고 생각한다면 오산이다.

34 냉전은 미국의 힘이 떠오르고 그것을 공고화하는 문제였다. 냉전은 또한 그것을 넘어서는 의미였다. 그것은 소련식 공산주의의 패배와 유럽에서 유럽연합을 통해 제도화된 민주적 합의라는 형태의 승리에 관한 문제였다. 중국에서 냉전은 중국공산당이 실행한 정치적・사회적 혁명을 의미했다. 라틴아메리카에서 냉전은 냉전의 이데올로기 분단선을 따라 사회가 점차 양극화됨을 의미했다. 두 과정은 미국의 제1차 세계대전 참전 및 1917년 러시아혁명, 자본주의의 대안적 전망으로서 소비에트 국가의 창설과 나란히 이루어졌다. 세계대전과 대공황이 일어난 결과로 소비에트라는 대안은 세계 곳곳에서 큰 지지를 받았지만, 그 적수와 경쟁자는 비판과 공격의 초점으로 삼기도 했다. 1941년에 이르러 소련과 미국이 제2차 세계대전에 발을 들여놓았을 때, 소련은 내부적으로 어느 때보다도 강했지만, 국제적으로 더욱 고립되었다. 전시에 소련과 미국, 그리고 19세기 최대 열강인 영국 사이에 이루어진 상호작용이 미래 국제관계의 틀을 결정할 터였다.

1 출발점들

37 냉전은 20세기 전환기에 벌어진 두 과정에서 기원했다. 하나는 미국과 러시아가 점차 국제적 사명감을 갖춘 강력한 제국으로 전환된 과정이고, 다른 하나는 자본주의와 그 비판자 사이의 이데올로기적 분열이 첨예화한 과정이다.

37 19세기 말과 20세기 초 세계의 역사는 무엇보다도 경제적・기술적・군사적으로 미국의 힘이 성장한 역사다. 미국 남북전쟁과 제1차 세계대전 사이 50년간, 미국의 국내총생산은 7배 넘게 증가했다. 1870년에 겨우 영국의 5퍼센트 수준이던 철강 생산은 1913년 영국의 4배에 이르렀다. 기술 변화와 풍부한 천연자원이 결합해 자본주의가 발전하는 데 불가항력이 생겨났고, 이는 한 세대 만에 모든 경쟁자를 곤혹스레 만들었다.

38 #미국 이 성공한 한 요인은 거대한 경제력과 미국 시민의 일상생활이 서로 만났기 때문이다. 역사에서 부상한 다른 강대국은 주로 엘리트가 성장의 이득을 누린 데 비해, 보통 사람은 제국의 식탁에 남은 음식 찌꺼기에 만족해야 했다. 미국은 이 모든 것을 바꿔 놓았다. 미국의 경제적 성장은 국내 소비자 사회가 탄생하게 했다. 원래 차별되고 정치적 영향력도 거의 없던 최근 이민자와 아프리카계 미국인을 포함한 모든 이가 이 사회에 참여하기를 열망할 수 있었다.

38 미국인은 무엇보다도 자원과 발상이 풍부해 서로를 비옥하게 만드는 나라에서 변화와 새 출발의 주체였다.

39 미국이 에스파냐-미국 전쟁에서 승리를 거두면서 세기 전환기에 이념과 힘이 하나로 결합했다. 전쟁은 4개월도 되지 않아 끝났지만, 미국은 필리핀, 괌, 푸에르토리코, 쿠바 등 과거 에스파냐 점령지를 포함하는 식민제국이 되었다. 미국의 초대 필리핀 총독 윌리엄 하워드 태프트William Howard Taft는 필리핀 군도를 자기가 생각하는 미국식 발전의 실험장으로 만들었다. 자본주의, 교육, 근대화, 질서 정연 등이 목표였다.

1908년 미국 대통령으로 뽑혔을 때, 태프트는 미국 자본이 해외, 즉 카리브해나 중앙아메리카, 아시아 태평양 지역 등에서 유익한 역할을 할 수 있다고 역설했다. 또한 그는 미국 기업들이 해외에서 돈을 벌 수 있는 기회를 풍부히 제공하고 그 기업들을 보호할 정부의 역할을 강조했다. 태프트의 “달러 외교”는 미국이 세계적인 강대국으로 부상한다는 신호였다.

[미국의 1908년 태프트 대통령이 시행한 ‘달러 외교’ 란 무엇인가](미국의 1908년 태프트 대통령이 시행한 ‘달러 외교’ 란 무엇인가)

40 대통령이 볼 때, 미국의 전 지구적 임무 가운데 하나는 민주주의와 자본주의를 실행하는 다른 나라의 능력을 점차 높이는 것이었다.

#러시아 41 19세기 내내 러시아제국은 동유럽에서 중앙아시아, 만주, 한반도로 거침없이 팽창했다. … 대다수 러시아인도 그들의 운명을 바다에서 바다까지, 즉 발트해와 흑해부터 카스피해와 태평양에 이르기까지 지배권을 굳히는 것으로 생각했다. 영국이나 프랑스 같은 제국은 해군력으로 팽창할 수 있었지만, 러시아는 연속하는 지상 제국을 창조하고자 했다. 미국 본토보다 거의 2배 넓은 영토에 자국민을 정착하게 하려 한 것이다.

42 좌우파를 막론하고 러시아에서 반자본주의의 추세가 강해지는 가운데, 사회민주노동당의 등장은 러시아제국을 유럽의 광범위한 추세와 연결한 주요한 움직임이었다. 1898년에 창건된 당은 마르크스주의적 사고를 배경으로 삼았는데, 물론 이 사고는 당을 독일, 프랑스, 이탈리아 노동운동의 중요한 부분과 연결해 주었다.

[사회주의의 탄생과 주요 발전과정, 주요 지도자들](사회주의의 탄생과 주요 발전과정, 주요 지도자들)

45 #1차세계대전 총력전이 낳은 신체적 결과보다 더 나쁜 것은 심리적 결과였다. 나중에 냉전을 형성한 것이 바로 이 제1차 세계대전 세대다. 대전쟁의 모든 요소가 그 안에 있었다. 공포, 불확실성, 무언가를 믿을 필요성, 더 나은 세계를 창조하라는 요구 등등. 유럽의 총력전이 낳은 절망과 그 전쟁이 지구의 많은 지역에 퍼뜨린 공포는 전쟁을 겪은 모든 이의 마음속에 담겼다. 어디서 전쟁을 경험했든 상관없었다. 훗날 영국 총리가 되는 클레멘트 애틀리Clement Attlee 소령은 튀르키예와 이라크에서 싸웠다. 해리 트루먼 대위는 중요한 뫼즈-아르곤Meuse-Argonne 공세에서 싸웠다.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소위는 전선에 나가는 병사를 훈련했다. 후에 서독 총리가 되는 콘라트 아데나워는 전쟁으로 고통받은 독일 제4의 도시 쾰른의 시장이었다. 소련을 창건한 이오시프 스탈린은 시베리아의 혁명 유배지에서 전쟁을 혹평했다. 베트남의 냉전 시대 혁명가 호찌민은 프랑스가 쇠약해지는 것을 보면서 조국의 첫 번째 독립운동을 결성했다. 그들 모두 제1차 세계대전의 재앙에서 성장했다.

47 리프크네히트나 레닌 같은 혁명가는 병사와 노동자, 농민이 자기편 상급자나 전선 뒤에 있는 자본가보다 반대편에 있는 형제와 공통점이 더 많다고 주장했다. 전쟁은 강도와 도둑이 벌이는 싸움이고, 보통 사람은 그들을 위해 고통을 받아야 했다. 자본주의 자체가 전쟁을 만들어 냈으며, 자본주의를 폐지하지 않으면 더 많은 전쟁이 벌어질 터였다. 극좌파는 그에 대한 해답으로 초민족적 형태의 혁명, 즉 병사가 자기네 장교에게 총부리를 돌리고 참호 건너편의 동지를 끌어안는 혁명을 선언했다.

47 대전쟁은 미래 냉전에서 두 초강대국의 운명을 촉발했다. 대전쟁을 계기로 미국은 자본주의의 세계 전형이 되었고, 러시아는 소련으로 변신해서 자본주의 세계의 영원한 적수가 되었다. 따라서 이 전쟁이 낳은 결과는 하나의 국제체계로서의 냉전을 예시했다.

이탈리아 파시스트[파시스트당(Partito Nazionale Fascista)]와 독일의 나치[국가사회주의독일노동자당(Nationalsozialistische Deutsche Arbeiterpartei, NSDAP)]도 대전쟁의 가마솥에서 등장했다. …러시아 볼셰비키 레닌의 소련

48 러시아에서 볼셰비키가 권력을 장악한 것은 프랑스와 영국의 전시 연합국이던 제국이 전쟁 때문에 약해진 탓이었다. …“토지, 빵, 평화”라는 레닌의 구호와 그가 전쟁에 반대하면서 다른 사회주의자에게서 얻은 인기 덕분에 레닌의 정치적 영향력이 커졌다. 1917년 11월, 임시정부가 내분을 겪으면서 한층 약화한 가운데 볼셰비키가 쿠데타를 성사해 페트로그라드(상트페테르부르크)와 모스크바에서 권력을 잡았다.

51 규칙적인 노동시간과 정규 임금을 갖춘 일자리를 갖는다는 생각은 세기 전환기에 대다수 유럽인에게 생소했다.

53 전간기에 많은 사람이 크나큰 배신감을 느꼈다. 각국의 엘리트는 풍족한 생활 대신 전쟁을 안겨 주었다. 기회가 많아지기는커녕 실업이 생기고 착취가 심해졌다. 식민지에서 여러 현지 지도자는 전쟁과 뒤이은 경제위기를 겪으면서, 유럽인은 해외에서 다스리는 이들을 위한 진보에 관심을 기울이기보다 자기 자신만 안중에 있음이 입증되었다는 결론에 다다랐다. 소비에트 공산주의가 전쟁과 궁핍, 억압에 대한 현실적인 대안으로 보였다.

54 훗날 북베트남 지도자가 되는 베트남 반식민주의 활동가 호찌민은 이렇게 말했다. “처음에는 공산주의가 아니라 애국 때문에 레닌과 제3인터내셔널을 신뢰했다. 그런데 투쟁을 따라 현실적 활동에 참여하는 것과 나란히 마르크스레닌주의를 공부함으로써 점차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만이 세계 곳곳의 피억압 민족과 노동대중을 노예제에서 해방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레닌이 죽고 -> 스탈린 후계 (레닌시절 행동대장 역활, 살인등 악덕 도맡아서 처리)

57 스탈린의 목표는 사회주의를 건설하기 위해 모든 사람이 단 하나의 의지와 일군의 목적을 추구하는 전체주의 사회였다.

59 테러와 정복에 바탕을 둔 소비에트 체계가 어떻게 세계 곳곳의 수많은 사람에게 매력을 발휘할 수 있었을까? 대공황이 기회를 제공했다. 자본주의가 그렇게 형편없이 망가지지 않았더라면, 공산주의가 모든 곳에서 헌신적이고 지적인 수많은 사람에게 애정을 받지 못했을 것이다

60 스탈린이 다스리는 소련은 매우 독특한 형태의 민족 정체성을 구성하면서, 소비에트 국가를 모든 나라 노동자의 자연스러운 “조국”으로 이상화하는 동시에 국내에서 지지를 얻기 위해 과거 러시아의 여러 상징에 의존했다. 스탈린이 소비에트 국가를 눈에 띄게 우선시했음에도, 공산주의 이데올로기는 민족주의가 아니라 국제주의였다. 이런 점에서 공산주의는 파시즘이나 나치즘 이데올로기와 근본적으로 달랐다. 그것은 권위주의적이고 무자비한 한편, 동시에 전 지구적 연대와 사회정의에 호소했다. 유럽과 다른 지역의 공산주의자는 종종 자국에서 파시즘 독재에 가장 용감하고 이타적으로 반기를 든 이들이었지만, 스탈린의 소련에서 벌어지는 억압에는 목소리를 높이지 않았다.

[스페인 내전](스페인 내전) [20세기 초 에스파냐 - 스페인 내전에서 이탈리아 파시즘과 독일 나치 소련등이 내전에 참전한 이유](20세기 초 에스파냐 - 스페인 내전에서 이탈리아 파시즘과 독일 나치 소련등이 내전에 참전한 이유)

62 히틀러와 무솔리니의 도움을 받은 프랑코는 에스파냐 입헌정부를 몰아내고 파시즘 독재를 세우려고 했다. 에스파냐 정부를 돕고 나선 것은 공산주의자만이 아니었다. 아나키스트, 노동조합원, 사회민주당원도 힘을 보탰다.

63 1930년대 후반은 유화의 시대라고 이름을 붙이는 게 마땅하다. 영국은 이미 지도적 역할을 상실했고, 영국 엘리트는 권력을 증강하는 히틀러에 맞설 생각이 없었다. 프랑스는 군사적으로 약하고 정치적으로 분열돼 있었다. 미국은 유럽에서 다시 전쟁에 가담할 마음이 없었다. 히틀러는 먼저 오스트리아를 집어삼킨(1938년) 뒤 체코슬로바키아 서부를 차지했다(1939년 초). 영국, 프랑스, 미국은 히틀러를 전혀 저지하지 않았다. 3개국 지도자는 히틀러의 영토 요구가 충족되기를 희망했고, 그중 일부는 독소전쟁이 이어지기를 기대했다. 영국의 많은 보수당원은 두 독재 정권이 서로 산산조각 낼 것이라는 전망에 아무 불만이 없었다. 본능적인 반공주의자임에도, 프랑스와 영국과 소련이 힘을 합쳐야만 히틀러의 팽창을 막을 수 있음을 일찍부터 깨달은 윈스턴 처칠 같은 부류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이는 거의 없었다. 서구 열강과 집단안보 협정을 교섭하려 한 스탈린의 필사적인 시도는 무위로 돌아갔다.

[만약 2차대전이 없어 미국의 자본주의가 힘을 잃었다면 세계는 사회주의화 되었을까](만약 2차대전이 없어 미국의 자본주의가 힘을 잃었다면 세계는 사회주의화 되었을까)

64 1930년대 영국과 프랑스, 미국은 전쟁보다 복지에 더 많은 관심을 쏟았다. 3개국 지도자는 대공황의 파국적인 사회적 결과를 누그러뜨리지 않는다면 자국 정치 체계가 내부에서 위협받을 것임을 깨달았다. 러시아, 독일, 이탈리아와 에스파냐에서 권력을 잡은 것과 같은 유형의 세력이 주요한 위협이었다. 영국 정부는 실업급여제를 들여왔고, 공공근로사업을 개시했으며, 전체 복지 지출을 2배로 늘렸다. 프랑스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실업급여를 의무화하고 노동시간을 국가가 정했다. 미국의 프랭클린 델러노 루스벨트 신임 행정부는 전임자들의 정책과 단절하고 이른바 뉴딜에 착수했다. …루스벨트의 의도는 자본주의를 폐지하는 게 아니라 국가를 활용해서 자본주의를 강화함으로써, 우파와 좌파 양쪽의 자본주의 비판자를 질적・양적으로 압도하려는 것이었다.

65 1930년대 말에 이르러 루스벨트는 나치 독일이 국제 평화를 위협하는 가장 위험한 세력임을 파악했지만, 독일의 침략이 미국에도 위협이 될 수 있음을 미국의 여론이 받아들이게 하려고 커다란 노력을 기울여야 했다. 1936년에 95퍼센트라는 절대다수의 미국인은 유럽에서 벌어지는 전쟁에 미국이 끼어들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16 대다수 사람이 실패한 십자군으로 여긴, 미국이 제1차 세계대전에 개입한 기억은 루스벨트의 대외정책을 무겁게 짓눌렀다. [미국이 2차대전에 참전하지 않았다면](미국이 2차대전에 참전하지 않았다면)

66 유럽에서 새로 벌어진 전쟁은 처음에 워낙 더뎌서 ‘가짜 전쟁(Phony War)’이라고 불렸다. 양쪽 모두 제1차 세계대전에서 치른 막대한 희생을 다시 겪을까 경계했다. 나치스가 소련을 공격할 준비를 한다는 수많은 경고가 있었음에도, 스탈린은 히틀러와 체결한 협정을 활용할 계획에 몰두했다.

68 하지만 히틀러는 소련을 공격해서 파괴한다는 장기 계획을 주저한 적이 없었다. 다만 모스크바와 체결한 조약을 위반할 적절한 시기를 찾아야 했다. 1941년 여름 유럽 대부분이 점령되어 영국이 고립되고, 미국이 전쟁에 직접 관여할 조짐이 전혀 보이지 않자, 히틀러는 이제 때가 되었다고 판단했다. 1941년 6월 22일, 독일의 117개 사단이 소련 영토로 진입했고, 나치 공군이 소련 비행장을 무차별 파괴했다. 스탈린은 큰 충격을 받은 나머지 몇 시간 동안 독일의 전면 공세에 직면했다는 사실을 믿으려 하지 않았다.23 6월 29일, 스탈린은 최측근 동지들에게 성난 목소리로 내뱉었다. “레닌이 위대한 국가를 창건했건만 우리가 망쳐 버렸군.”24 독일의 공격은 멈추지 않았다. 1941년 11월 히틀러의 군대가 벨라루스와 발트3국, 우크라이나 서부를 정복했다. 독일군은 레닌그라드(그전 이름은 상트페테르부르크 또는 페트로그라드)를 포위했고, 모스크바에서 6마일(약 9.7킬로미터)도 떨어지지 않은 곳까지 진격했다.

2 전쟁의 시험대

2장에서는 제2차 세계 대전이 냉전의 형성에 어떻게 결정적 역할을 했는지 살피는 장입니다. 특히, 전쟁을 통해서 소련이 부상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 그리고 전후 미국(과 영국)이 소련을 어떻게 견제하면서 새로운 국제 정치의 틀을 짜려 했는지 또 이에 대응해서 소련(스탈린)은 어떻게 대응했는지 등을 살피면서 그 과정에서 우연과 필연이 교직하면서 전후 냉전이 등장하게 된 과정을 설명합니다.

74 1941년 6월 독일이 소련을 공격했고, 그해 12월 일본이 미국을 공격했다. 대부분의 성공한 연합과 달리, 소련과 미국, 영국이 이룬 ‘대연합(Grand Alliance)’은 공동의 목표를 위해 오랫동안 협력한 바탕에서 형성되지 않았다. 이 연합은 각국이 당면한 위협을 물리치기 위해 도움을 찾아야 하는 순간에 현실적인 필요로 생겨난 일종의 강제 결혼(shotgun marriage)이었다.

75 스탈린은 히틀러와 불가침조약을 맺어서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게 했을 뿐만 아니라, 이 조약의 보호를 받는 가운데 폴란드 동부를 침공하고, 발트3국을 점령하고, 핀란드를 공격할 수 있었다.

76 1941~1942년 겨울에 나치 독일의 육·해·공군을 아우르는 국방군(Wehrmacht)이 잡은 소련 포로는 350만 명이었다. 독일 전선 배후에서 많은 민간인은 거리낌 없이 독일군에 협력했다. 특히 발트3국과 우크라이나에서 상당수의 사람은 독일의 점령을 소비에트 통치에서의 해방이라고 보면서 적극 협력했다. 유대인을 겨냥한 잔학행위가 흔히 벌어졌다. 히틀러는 볼셰비즘을 유대인의 지배와 동일시하면서 대스탈린 전쟁을 유대-볼셰비키의 위협에서 “유럽을 구하기 위한 십자군”이라고 불렀다. 루마니아, 헝가리, 크로아티아, 슬로바키아, 핀란드, 에스파냐 군대가 공세 초기 몇 달간 독일군에 합세했다.

77 런던 당국과 체결한 무기대여(Lend-Lease)협정이 1941년 3월 11일 입법화되자, 거의 무제한으로 미국의 산업 생산 역량을 영국의 총력전에 활용할 수 있었다. 미국 병사를 유럽에 투입하는 것 말고 모든 수단을 동원하는 전쟁이었다. 1941~1945년에 미국은 310억 달러(2016년 달러 가치로 환산하면 5000억 달러에 육박한다) 상당의 장비를 영국에 넘겼다. 선박, 항공기, 석유, 식료품 등이었다.

독일이 소련을 공격한 뒤, 루스벨트는 무기대여를 소련으로 확대했다. 처칠과 루스벨트는 공동 전문에서 스탈린에게 이렇게 말했다. “지금 우리는 귀국에 가장 시급히 필요한 최대한의 물자를 제공하기 위해 협력하는 중입니다. 이미 많은 선박이 화물을 가득 싣고 우리 해안을 떠났고 곧바로 더 많은 선박이 출항할 겁니다.”

77 스탈린과 그의 장군들이 조직한 모스크바와 레닌그라드 방어선은 끈질기게 유지되었다. 독일의 보급선은 지나치게 길어졌고 보급선이 끊기는 일이 잦아졌다. 독일의 인종 정책 때문에 현지 주민 가운데 신병을 모집하는 게 어려웠다. 히틀러가 광대한 점령지에서 유대인과 공산주의자를 절멸하는 데 잔인하게 집착하자 독일군은 진군하는 데 차질을 빚었다. 그리고 겨울이 시작되면서 기온이 영하 40도까지 내려갔다. 독일군 병사는 이런 상황에서 싸울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히틀러는 병사들에게 프랑스에서 그런 것처럼 공세가 금방 끝날 것이라고 말한 바 있었다.

78 동부전선의 교착 상태가 가장 큰 영향을 미친 곳은 일본이었다. 소련이 무너지거나 자국 군대의 손쉬운 공격 대상이 될 것이라는 믿음을 잃은 도쿄 당국은 공격 전략을 남쪽과 동쪽으로 바꿨다. 대중국 전쟁은 4년째 질질 끄는 중이었다. 일본 지도자들은 이제 아시아에서 유럽의 이해관계에 괴멸적인 타격을 가하고, 동남아시아의 중요한 원료에 접근하는 통로를 확보하기로 했다.

78 6개월 만에 일본은 동남아시아 전역을 장악하고 영국령 인도의 문턱 앞에 서 있었다. 동맹국 일본이 승리한 직후, 독일은 경솔히 미국에 선전포고했다. 독일과 그 동맹을 일컫는 추축국은 이제 유럽 대부분과 아시아의 많은 지역을 장악했다. 하지만 무모히 권력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그들은 세계가 이제껏 본 적 없는 가장 강력한 연합군을 결집하게 했다.

80 스탈린이 볼 때, 영국・미국과 히틀러・일본 사이에 근본적으로 아무런 차이가 없었다. 그가 생각할 때, 이데올로기적 적과 형성한 연합은 일시적이고 불안정했으며, 상대가 자기네 목적에 소련이 필요하다고 여길 때까지만 지속될 것이었다. 미국이 전쟁에 뛰어들었는데도 스탈린은 자본주의 연합국이 어느 시점에 나치 독일과 독자적으로 평화를 이루어 공산주의 소련을 저버리려 할 것이라고 예상했다.

스탈린의 붉은군대가 인적・물적으로 막대한 희생을 치르면서 서서히 독일군 사단을 밀어내는 가운데, 소련 지도자는 연합국에 독일에 맞서 유럽 북서부에 제2의 전선을 만들라고 끊임없이 요구했다. 소련 군인 900만 명이 전사한 뒤에도 1944년 6월까지 그런 제2의 전선이 형성되지 않은 사실은 스탈린에게 영국과 미국의 배신과 적대감을 보여 주는 증거였다.

80 스탈린이 연합국을 불신하고 경멸했다 하더라도 소련은 점차 양국의 지원에 생존을 의지했다. 1941년 6월부터 1945년 9월까지 전부 합쳐 113억 달러(2016년 달러 가치로 1800억 달러) 상당의 물품과 무기가 소련에 전해졌다. 소련 각지 항구에 원조품을 보내는 과정에 수병 5000명이 사망했다. 이 물자의 일부는 소련이 전쟁을 수행하는 데 매우 중요했다. 기관차와 철도 차량은 병력 수송에 도움이 되었다. 다지 트럭은 독일과 이후 일본을 상대로 벌인 거대한 전차전에서 소련 병참의 주축이 되었다. 오하이오와 네브래스카에서 생산된 통조림 식량 덕분에 소련인 수백만 명이 아사를 면할 수 있었다.

미국의 보급이 붉은군대의 전투 역량에 너무도 중요한 까닭에, 어떤 상황에서든 지속적으로 공급될 수 있게 위험한 상황을 만들어서는 안 된다는 것도 알았다. 따라서 스탈린은 전쟁이 계속되는 한, 그리고 가능하다면 전쟁이 끝난 뒤 소련을 재건하는 오랜 시간 동안 연합국과 협력을 이어 나가려는 아주 구체적인 동기가 있었다.

81 처칠은 1942년 8월 처음으로 모스크바를 방문하기 전에 루스벨트를 세 차례 만나러 갔다. 처칠의 스탈린 방문은 중대한 사건이었다. 세계 공산주의의 수장과 골수 반공주의자가 실질적인 협정을 이룰 수 있다면, 적어도 대독일 전쟁이 지속되는 동안 어울리지 않는 세 동반자의 연합은 유지될 것이었다.

82 무엇보다도 1943년 말에 이르러 미국은 아시아와 유럽 양쪽에서 전쟁을 수행하기 위해 병력을 전면 동원한 상태였다. 이후 수년간 미국은 군용기 30만 대와 대형 군함 529척을 생산한다. 독일의 생산량은 13만 3000대와 20척, 일본은 7만 대와 90척이었다. 1943년 일사분기에 미국은 일본이 7년의 전쟁 기간에 건조한 전체 규모와 맞먹는 톤수의 선박을 생산했다. 소련은 유럽에서 공세를 폈지만 나라 자체는 황폐해졌다. 미국은 전쟁 피해를 전혀 보지 않았고, 국내총생산은 1939년 이후 2배 가까이 늘어났다.

82 (만약)소련이 일본을 공격하면 일본 본토 침공 이후 벌어질 전투는 말할 것도 없고 태평양에서 미군 병사 수십만 명을 구할 수 있었다.

83 #1945년 2월 얄타 정상회담

85 1940년 폴란드 동부를 점령한 뒤 스탈린의 비밀경찰은 폴란드 장교와 경찰, 공무원, 지주, 공장주, 변호사, 사제 2만 2000명을 처형한 뒤 카틴Katyn 숲의 경우처럼 공동묘지에 매장했다. 소련은 폴란드에서 어떤 식으로든 선거를 치르게 하면 압도적 다수가 소련과 그들이 창립한 정부에 반기를 들 것임을 알았다.

85 중요한 점은 소련 체제가 동유럽에서 민주 선거를 시행하고자 했을지라도 들여올 수 없었다는 것이었다. 소련은 그런 체제가 아니었다.

86 러시아인이 지금도 제2차 세계대전을 대조국전쟁(Great Patriotic War)으로 알고 있는 데는 충분한 이유가 있다. 스탈린 자신의 견해가 크게 바뀐 것인지는 판단하기 쉽지 않다. 다만 과대망상증은 확실히 심해졌다.

소련은 그 어느 때보다도 스탈린 개인 권력의 도구가 되었다. 스탈린은 연합이 안겨 준 개인적 인정을 흡족히 즐긴 것은 분명하다 조지아 소읍 출신 전직 은행 강도로서(스탈린), 영국의 귀족(처칠)과 지구 최강대국의 대통령(루즈벨트)에게 동등한 대우를 받는 것이 즐거운 일이었다.

87 스탈린은 소련이 회복하기 위해서 평화가 필요하다는 것을 알았다. 그는 전쟁이 끝난 뒤에도 국민이 비참한 삶을 강요받는다면 공산당에 어떤 영향이 미칠지 우려했다. 하지만 스탈린은 평화가 정말로 무엇을 뜻하는지, 또는 자신과 공산주의에 맞서는 국제적 반대 세력이 기꺼이 그에게 휴식을 주려고 할지 결코 확신하지 못했다.

평범한 소련인에게 대조국전쟁은 스탈린과 공산당이 조국 방위의 상징이 되었음을 의미했다

88 1945년 스탈린 독재는 단지 독일의 침략에 맞서 싸우고 결국 물리침으로써 러시아 민족을 대표한다고 여겨질 수 있었다. 러시아정교회-1917년 볼셰비키는 원래 교회를 모조리 불태우려고 했다. 되도록 신자들이 안에 있는 채로-조차 1945년에 소비에트 체제를 축복했다. “러시아인은 이 전쟁을 성전聖戰으로, 자기의 신앙과 조국을 위한 전쟁으로 받아들였다. … 애국과 정교회는 하나다”15라고 어느 교회 지도자가 말했다.

89 제1차 세계대전이 유럽의 세계 지배에 종말을 알리는 사건이었다면, 제2차 세계대전은 특히 유럽인에게 이 지배의 폐지를 필연으로 만들었다.

91 미국의 관점에서 제2차 세계대전은 개인의 자유와 헌법 질서, 미국적 생활방식을 지키기 위한 싸움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막바지로 치닫는 가운데 미국에서 정치 영역 전반에 걸쳐, 미국이 본보기를 보임으로써 세계를 지도할 권리를 얻었으며, 다시 전쟁이 벌어지는 것을 막으려면 세계가 미국의 노선을 따라 개혁해야 한다는 인식이 굳게 자리 잡았다.

95 독일 수도를 차지한 것은 소련군이었는데도 스탈린은 독일의 점령 체제를 둘러싸고 연합국과 충돌을 피하고자 했다. 포츠담에서 소련 지도자는 무엇보다도 동유럽에서 소련의 지배적 지위를 미국과 영국이 수용하기를 원했다. 루스벨트와 처칠 둘 다 그렇게 될 것이라고 믿을 만한 태도를 보인 바 있었다. 하지만 포츠담에 모인 세 지도자 가운데 스탈린이 유일한 상수였다. 회담이 소집됐을 때, 루스벨트는 세상을 떠났고 트루먼이 그 자리를 이어받았다. 회담 중에 영국 보수당은 총선에서 노동당에 패해서 7월 26일부터 클레멘트 애틀리가 처칠 대신 포츠담으로 왔다. 스탈린은 애초에 트루먼과 애틀리를 신뢰하지 않았다-트루먼을 믿지 않은 것은 소련 정보 보고서에 그의 반공주의가 강조되었기 때문이고, 애틀리는 세계 전역에서 공산주의의 숙적인 영국 노동운동의 우파를 대표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소련 지도자는 자신에게 비장의 무기가 두 개 있다는 걸 알았다. 소련군이 유럽의 절반을 점령하고 있었다. 그리고 동아시아의 전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미국의 신임 대통령은 전임자와 마찬가지로 일본을 물리치기 위해 소련의 지원이 필요했다

96 유럽 전역에서 이런 경쟁이 벌어졌지만, 그래도 냉전이 시작된 곳은 폴란드였다고 주장할 수 있다. 이 나라에서 엄격한 소련의 통제를 시행하려는 스탈린의 정책은 연합국과 폴란드인 절대다수의 바람과 충돌했다.

98 폴란드는 연합국 지도자들에게 경계선처럼 보였다. 아시아에서 벌어지는 최종 단계의 전쟁에 큰 이해관계가 없던 처칠은 소련에 관해 이전의 견해로 쉽사리 돌아갔다. 5월 12일 처칠은 트루먼에게 개인적 서신을 보냈는데, 여기서 서방 지도자로는 처음으로 냉전을 규정하는 “철의 장막”이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소련) 전선 위에 철의 장막이 드리워져 있습니다. 우리는 그 뒤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알지 못합니다.

101 스탈린은 “자본주의의 위기는 자본가가 두 파벌-파시스트와 민주주의-로 나뉘면서 드러났다”라고 말했다. “우리가 민주적 자본가 파벌과 동맹을 맺은 건 그들이 히틀러의 지배를 막는 데 사활을 걸었기 때문입니다. 그 야만적인 국가는 노동계급을 극단으로 밀어붙여 자본주의 자체를 전복했을 테니까요. 현재 우리는 다른 파벌에 맞서는 한 파벌과 연합하지만, 장래에는 민주적 자본가 파벌과도 겨룰 겁니다.”

104 미국의 여론조사는 이처럼 세계에 관여하는 것과 정반대의 추세도 보여 주었다. 전후 초기에 절대다수의 미국인은 자국이 유럽과 아시아에서 상황 악화를 막기 위해 직접 노력하고 전장에서 피를 흘림으로써 충분히 희생했다고 느꼈다. 유럽인이나 아시아인과 마찬가지로, 전후의 미국인은 자국 정부가 국내의 생활환경을 향상하는 데 집중하기를 원했다. 무엇보다도 그들은 군복을 입은 젊은이가 최대한 빨리 돌아오기를 원했다. 제1차 세계대전 후 등장한 고립주의적 사고를 우려하면서, 미국이 일본의 공격을 받고 나서야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둔 트루먼 행정부는 전쟁이 끝난 뒤 미국이 국제 문제에 관여해야 하는 명백한 필요성과 자국의 유권자를 하루빨리 귀국시켜야 하는 필요성 사이에서 균형을 잡으려고 했다. 대통령 자신도 막대한 경제 자원을 활용해서 해외의 빈곤을 경감하고 각국 경제가 다시 돌아가게 만들면 이런 균형을 이룰 수 있다고 믿었다.

제2차 세계대전은 세계 경제의 전면적인 전환으로 이어졌다. 앞서 살펴본 것처럼, 미국이 세계 경제의 중심으로 부상한 것은 일찍이 20세기 초부터였고, 전간기에 그 속도가 빨라졌다. 장기적 변화가 급속히 전환되게 한 계기는 바로 제2차 세계대전이었다. 미국의 경제 규모는 전쟁 중에 2배 가까이 커졌다.

이와 대조적으로, 세계의 다른 지역은 거의 전부 황폐해졌다. #일본 은 나라 전역에서 건물 4분의 1이 파괴되었다-도쿄는 절반 넘게 무너졌다. 일본의 산업 생산량은 1937년에 비해 60퍼센트 넘게 감소했다. 아시아에서 제2차 세계대전으로 가장 폐허가 된 나라 필리핀은 경제 총생산이 1941년의 20퍼센트를 약간 넘는 수준이었다. [필리핀의 수난-에스파나-미국-2차대전-미국](필리핀의 수난-에스파나-미국-2차대전-미국)

104 루스벨트의 핵심 구상은 독일과 일본에 맞선 전시 연합을 영속화하는 한편, 모든 나라가 속할 수 있는 세계 기구를 창설하는 것이었다. 루스벨트가 연합국과 자기가 하나로 묶고자 한 더 많은 나라를 통칭하는 용어로 사용한 국제연합(유엔 #UN)은 #1945년 에 하나의 기구로 창설되었다.

  • 런던에 설치한 본부는 얼마 뒤 뉴욕으로 옮겼다.
  • 유엔은 루스벨트 자신의 사고에서 상충하는 두 흐름을 타협한 결과물이었다.
    • 하나는 이상주의적 사고로, 평화를 유지하는 한편, 세계 곳곳에서 진보적 개혁을 도울 수 있는 진정으로 세계적인 토론의 장을 만들자는 것이었다.
    • 다른 하나는 현실주의적 사고로, 강대국이 연합해서 협력하고, 필요하면 다른 나라에 행동을 강제할 수 있는 토론의 장을 만들자는 것이었다.

106 새로 만들어진 세계 기구의 주요 임무 가운데 하나는 전 지구적 경제 문제를 다루는 것이었다. 경제가 가장 강한 미국은 자유무역과 해외시장 진출을 원했다. 또한 세계 경제체계의 안정성을 높이는 것도 원했다. 1944년 7월 뉴햄프셔주 브레턴우즈에서 주요 산업 연합국은 국가의 국제수지 불균형을 메울 수 있는 차관을 제공하는 국제통화기금(International Monetary Fund, IMF)과 훗날 세계은행(World Bank)의 일부가 되는 국제부흥개발은행(International Bank for Reconstruction and Development, IBRD) 설립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협정을 체결했다

107 미국과 소련은 전시에 연합국이었지만, 전후에 어떤 형태로든 충돌은 거의 피할 수 없었다. 양국 지도자는 1917년 러시아혁명 이후, 어떤 때는 그전에도 서로를 적으로 여겼다. 연합국과 친선 관계를 맺기보다 동유럽 장악을 우선시한 스탈린의 정책은 전쟁이 막바지로 치달으면서 ‘대연합’이 약해지는 데 큰 영향을 미쳤다.

108 1945년 당시 붉은군대는 유럽 대륙에 거대한 병력을 두고 있었다. 숫자와 입증된 역량으로 볼 때 어떤 나라보다도 군사력이 우세했다.

3 유럽의 불균형

3장과 4장에서는 전후 동유럽을 병합하지 않되 자기의 영향력 하에 두려는 소련의 전략과 이에 대한 미국의 반응으로 오늘날 우리가 냉전이라고 이해하는 틀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장의 제목처럼 특히 유럽을 중심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전쟁 후 유럽의 끔찍한 상황을 보면, 전쟁이 남긴 상흔이 얼마나 깊은지 알 수 있는데요. 전후 세대인 우리는 가끔 종전 선언이 되면 모든 게 깔끔하게 원상태로 돌아가는 그림을 생각하지만, 사실은 그 과정이 얼마나 길고 지난하고 수많은 희생의 과정인지를 3장~4장을 읽으면 알 수 있지요.

소련이 동유럽을 억누르느라 분주하고 미국은 향후 해외에서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지를 놓고 논쟁하는 동안,서유럽의 경제 상황은 계속 악화했다. 워싱턴이나 런던이 기대한 것과 전혀 딴판으로, 독일과 이탈리아는 말할 것도 없고 프랑스 대부분 지역과 저지대 국가도 군사적·정치적 상황이 안정되는 것과 달리 공급 상황은 개선되지 않았다.

112 유럽인은 1930년대와 1940년대의 재앙에서 최대한 멀리 벗어나고자 했고, 공산주의나 미국 자본주의는 각각 출구를 제시하고 있었다.

114 제2차 세계대전을 통해 국가사회주의와 파시즘은 완전히 붕괴했다.

115 유럽인 가운데 두 차례 대전과 심대한 경제위기를 낳은 체계로 돌아가기를 바라는 이는 거의 아무도 없었다. 희망은 더 나은 세계를 만들기 위한 것이었고, #공산당 은 반파시즘, 사회정의, 소련이 전쟁에서 노력해 생겨난 후광을 결합하면서 희망의 깃발을 높이 치켜들었다. 공산당은 프랑스(90만 명)와 이탈리아(180만 명)에서 규모가 압도적으로 큰 정당 조직이었다. 전후 서유럽에서 치러진 선거에서 공산당은 모든 나라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117 서유럽의 가장 강력한 공산당 지도자들-프랑스의 모리스 토레즈Maurice Thorez, 이탈리아의 팔미로 톨리아티Palmiro Togliatti-도 궁핍과 비참 때문에 대륙 곳곳에서 확산하는 사회적 소요의 물결을 억제할 수 없었다. …나라가 잘못된 게 모두 엘리트의 책임으로 여겨졌다.

프랑스 남부의 어느 공산당 열성 지지자는 동료와 함께 지역 귀족을 체포해 구타하면서 정부와 “나머지는 될 대로 돼라. 내게는 단 한 명의 보스, 스탈린이 있다”라고 소리쳤다.

116 스탈린은 자본주의 국가와 충돌이 벌어지고 결국 유럽에서 공산주의 혁명이 일어날 것으로 예상했다. 하지만 전쟁이 끝난 뒤 소련 자체가 폐허 상태였다. 스탈린은 소련이 약한 시기에 연합국과 대결하는 위험을 무릅쓸 수 없었다. 그렇다면 미국과 영국의 제국주의자가 전리품을 놓고 자기들끼리 싸우는 동안 미래에 협력하기를 희망한다는 표현을 하는 게 차라리 낫다는 게 그의 판단이었다. 그는 소련의 최대 위협은 제국주의 국가가 소련을 상대로 공동전선을 형성하는 것이라고 느꼈다. 전후 서유럽에 대한 소련의 초기 정책은 이렇게 적이 단합하는 상황을 피하려고 고안된 것이었다.

119 스탈린은 동유럽에서 소련의 영향력을 계속 유지하면서도 그 때문에 미국 및 영국과 맺은 관계가 어긋나서는 안 된다고 굳게 믿었다. 소련을 재건하는 게 급선무였다.

120 붉은군대 병사가 민간인을 상대로 살인과 강간, 약탈을 저지른 탓에 동유럽에서 소련의 통치 능력에 큰 차질이 빚어졌다. 소련 군인은 독일에서 여성 수십만 명을 강간했는데, 아마 전부 합치면 200만 명에 이를 것이다. 이런 끔찍한 경험에, 비무장 민간인을 무자비하게 살해하고 파괴하며 절도하는 일이 더해졌다. 1945년 중반에 이르면 독일의 소련 점령 지구에서 붉은군대의 야만적 행위를 당하지 않은 가족은 거의 없었다. 소련이 진입한 다른 지역 대부분도 많은 이가 피해를 보았다. 동프로이센 출신의 어느 독일인 소녀는 공격당한 피란민 집단 가운데 한 명이었다.

https://youtu.be/nwjFSQCrShM?si=Sno7OCtLa3W_x0bP

146 1948년 초에 이르러 유럽에서 국가 간 냉전 체계가 확립되었다. 여전히 많은 것이 불투명했지만, 주요 특징은 드러났다. 제2차 세계대전 말에 소련이 점령한 나라는 공산당이 정치를 장악할 것이었다. 미국은 유럽 문제에 여전히 관여할 터였다. 영국의 역할은 영원히 줄어들었다. 서유럽의 대다수 좌파는 공산당과 소련에 맞서 자국 정부 편을 들 태세였다. 소련이나 미국은 유럽에서 전쟁을 벌이려고 하지 않았지만, 군사적 긴장이 높아질 공산이 컸다. 미국 정부는 점차 유럽과 세계 정치를 소련과 공산주의의 봉쇄라는 측면에서 사고했다. 소련 지도자들-무엇보다도 스탈린 본인-은 미국 및 영국과 제한적으로 협력할 가능성 대신 안보와 이데올로기적 엄정함을 선택했다. 그리고 유럽 정치는 극적인 방식으로 바뀌고 있었지만, 경제와 사회의 구조를 재건하는 것은 누가 예상한 것보다 더 오래 걸렸다.

4 재건

4장에서는 ‘마셜 플랜’으로 대표되는 전후 서유럽의 재건이 어떤 맥락에서 이뤄졌는지, 그 과정에서 미국과 소련이 어떤 판단과 대응을 했는지에 초점을 맞춘 장입니다. 특히, 이 장에서는 네 조각으로 나뉘고 농업을 주된 산업으로 하는 국가로 만들려던 독일의 서쪽을 미국과 영국이 왜 서독으로 분리시켜서 산업 국가로 재건하기로 결정했는지, 또 그런 움직임에 소련이 어떻게 (무기력하게) 대응했는지가 자세히 나옵니다.

150 생활을 재건하느라-살 곳을 마련하고, 아이를 먹이고, 일자리를 찾느라- 분주한 가운데 사람들은 점차 자기가 냉전이 규정한 틀 안에서 이런 일을 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그들은 자신 또한 냉전 충돌의 일부라고 느끼지 못했겠지만, 냉전의 영향은 피할 수 없었다.

153 1947년 11월에 수립된 “브로일러 계획(Plan Broiler)”-미국 합동참모본부가 처음으로 작성한 전면적인 대소련 전쟁 계획-은 소련 24개 도시에 원자폭탄 34개를 투하하려는 구상이었다

154 소련은 대외적으로 미국이 핵기술을 공유하지 않는 것을 자국 “평화 운동”의 일부로 활용하면서, 트루먼 행정부가 핵 파멸에 광분한 전쟁광이라고 몰아붙였다. 스탈린은 이미 내부적으로 자체 핵무기를 개발하기 위한 속성 계획을 시작한 상태였다. 이 계획은 소련의 진보한 물리학과 미국 핵무기 계획 내부의 첩자에게 수집한 정보를 결합해서 신속히 진전을 이루었다.

156 트루먼 2기의 대외정책은 소련과 긴장 고조, 미국이 지원하는 중국 정부의 붕괴, 한국전쟁 발발 등이 특징이었다. 소련이나 미국의 관점에서 보면, 당시는 냉전이 군사화된 시기였다 …폴 니츠Paul Nitze는 미국 냉전 전략을 세우려는 문서를 작성했다.3 나중에 〈국가안전보장회의 보고서 68호(NSC-68)〉라고 불리는 이 문서에서 폴 니츠는 과격한 권고안을 내놓았는데, 제출된 지 3개월 만에 한국전쟁이 발발하지 않았더라면 행정부의 정책에 반영되지 않았을 것이다. 〈국가안전보장회의 보고서 68호〉는 미국이 방위 지출을 대폭 늘려야 한다는 것과 미국이 전 세계에 개입해야 한다는 점에 초점이 맞춰졌다.

〈국가안전보장회의 보고서 68호〉에서 가장 인상적인 측면은 실질적 제안보다 그것에 담긴 적에 대한 견해였다. “독일과 일본의 패배, 그리고 영국과 프랑스 제국의 쇠퇴는 미국 및 소련의 발전과 상호작용을 했으며, 힘이 점차 이 두 중심으로 끌렸다”라고 니츠와 그의 동료는 설명했다.

160 #영국 전쟁이 끝나면서 영국은 파산했다. 국부의 4분의 1이 사라졌는데, 이는 제2차 세계대전으로 지출한 전비가 제1차 세계대전의 대략 2배에 이르렀음을 의미한다. 처칠이 나치스에 맞선 총력 동원을 입에 올렸을 때, 정부는 이미 실제로 행동에 옮기고 있었다. 영국은 (미국에서) 돈을 빌리고, 해외 자산을 매각했으며, 전쟁을 계속 치르기 위해 국내의 민간 생산을 희생했다. 전쟁에서 승리를 거뒀지만, 영국이 전쟁 전에 누린 지위를 유지하기에 그 대가는 너무 컸다. 채무를 상환하고 국내에서 재건하기 위해, -노동당 정부가 약속한 복지국가를 만들기 위한 준비는 말할 것도 없고- 영국은 재화 대부분에 배급제를 시행했고 해외 군사 활동을 대폭 감축해야 했다. 그런데도 충분하지 않았다. 국민은 기본 물품을 구하기 위해 몇 시간 동안 줄을 섰다. 공습으로 집을 잃은 런던 시민은 새집을 구하기 위해 평균 7년을 기다려야 했다.

1950년에 이르러 영국은 수에즈 동부에서 철수하는 데 매진했다. 인도와 파키스탄은 #1947년 에 독립했고, 동남아시아가 곧 그 뒤를 따를 태세였으며, 중동과 지중해에서 영국의 지위는 대폭 축소되었다.

162 점령한 강대국 가운데 어느 나라도 독일에서 빼 가는 것보다 더 많은 자원을 독일 경제에 쏟아붓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재정난에 빠진 영국이 말한 것처럼 “독일인에게 배상금을 지급”하려는 생각이 없었다. 서구 연합국에 설상가상으로, 포츠담 합의 때문에 소련은 서부 지역에서 자기 몫의 배상금 일부를 받을 수 있었다. 따라서 미국은 사실 얼마 전의 적국을 유지하는 비용을 지급하는 한편, 소련-자국 점령 지구에 훨씬 적은 재원을 투입한-은 루르 지역에 남아 있는 독일 산업을 해체해서 동쪽으로 운송하느라 분주했다.

합군 점령하 독일

165 독일이 자기 몫을 하기 위해서 우리는 독일에 일할 연장을 주어야 합니다

167 #마셜플랜 덕분에 독일에 배상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줄어들었다. 그리고 유럽 각국 사이에서 국제수지 문제가 줄어들어 유럽 내부 교역이 다시 진행되는 데 도움이 되었다. 1947~1951년에 마셜플랜 국가에서 생산이 평균 55퍼센트 증가했다.

168 미국의 원조가 제공한 예산 보장 덕분에 서유럽 각국 정부는 현대적 복지국가 건설을 개시할 수 있었다. 이 원조가 없었더라면 분명 새로운 사회적 지출이나 정부의 기반 시설 투자에 필요한 여분의 자원이 없었을 것이다. 이런 사회적 지출과 기반 시설 덕분에 서유럽은 하나로 묶일 수 있었다.

172 #프랑스 미국의 원조가 제공한 예산 보장 덕분에 서유럽 각국 정부는 현대적 복지국가 건설을 개시할 수 있었다. 이 원조가 없었더라면 분명 새로운 사회적 지출이나 정부의 기반 시설 투자에 필요한 여분의 자원이 없었을 것이다. 이런 사회적 지출과 기반 시설 덕분에 서유럽은 하나로 묶일 수 있었다.

178 매카시즘 , 위스콘신주 상원의원 조지프 매카시 는 스탈린의 그 어떤 비밀공작보다도 미국의 이익에 큰 손해를 입혔다.

184 소련은 동유럽 다른 곳에서 지금이나 향후에 불복종이 의심되는 공산주의자를 상대로 일련의 숙청을 개시했다. 별 기준 없이 임의로 희생자가 선택됐지만, 언제나 독자적인 추진력을 보여 주고 자국의 당에서 인기를 끈 공산주의자가 대상이 되었다.

5 새로운 아시아

새로운 아시아에 접근하는 문제에서 미국도 소련만큼 주저했지만, 유럽의 과거 식민주의와 연계된 탓에 운신의 폭이 한결 좁았다. 반식민주의 유산을 종종 과시하는 나라로서는 모순적이게도, 전후 역대 미국 행정부는 대체로 냉전의 관심사보다 반식민주의를 우선시하지 않았다.

191 중국, 한반도, 베트남에서 전쟁 중에 공산당의 지위가 크게 올라섰고, 이제 권력을 다툴 태세였다. 인도네시아와 인도에서 급진 민족주의 단체는 식민 지배자 네덜란드와 영국에서 완전히 독립할 것을 요구했다. 대륙 전체에 최악의 폭풍이 휘몰아쳤다. 팽창주의적 열강으로서 일본은 사라졌고, 유럽 제국도 빠르게 무너졌다. 적어도 100년 만에 처음으로 아시아인이 그들의 운명을 결정할 수 있었는데, 이번에는 민족주의와 민주주의 깃발이 앞에 걸렸다-유럽에서 처음 수입한 개념이지만 지역적 색채가 뚜렷이 입혀졌다. 아시아의 새로운 혁명은 뒤보다 앞을 내다보면서 완전한 자치와 근대화, 국가 건설로 나아가려 했다.

192 …무엇보다 어떤 유럽 국가도 이제 더는 식민지 체계를 유지할 힘이 없었다. 유럽 각국 국민은 쓸모도 없고 도덕적으로 옹호도 할 수 없는 해외의 진지에 계속 돈을 퍼붓는 게 아니라, 국내에서 재건에 집중하기를 원했다.

192 아시아 전역에서 민족주의 운동이 권력을 잡을 태세를 취했다. 대다수 지도자는 흔히 과거의 영광으로 대표되는 민족 관념을 근대화 및 국가 계획 개념과 결합했다. 그전에 소련과 접촉하는 것이 제한되긴 했지만, 많은 이가 일정한 형태의 사회주의를 지향했다.

193 제2차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일본에서 이란에 이르기까지 아시아의 모든 핵심 국가에서 공산당이 민족주의 운동의 주요 대안으로 등장했다.

194 소련은 마침내 1945년 8월 9일 대일 전쟁에 참전한 뒤, 3주 동안 전격전을 수행해서 중국 동북부(만주)와 일본 북부 섬, 한반도 북부 등을 손에 넣었다. 서부에서 영국과 소련은 1941년 중반에 이미 이란을 침공해서 점령했는데, 소련이 테헤란 북부 지역을 차지했다. 영국은 중동의 나머지 지역의 책임을 맡았다.

197 소련(과 러시아) 역사를 해석한 것을 바탕으로 수령은 단기적으로 모스크바에 정말로 중요한 아시아 나라는 하나뿐이라는 견해를 보였다. 그 나라는 바로 일본이었다. 그리고 역설적이게도 전쟁이 끝났을 때 소련이 직접 영향력을 행사할 가능성이 가장 적어 보이는 곳도 바로 일본이었다

1945년 8월, 일본은 폐허만 남았다. 목조 건물로 이루어진 도시는 미국의 소이탄에 잿더미로 변한 상태였다. 도쿄에서 무너지지 않고 남은 지역은 3분의 1이 채 되지 않았는데, 그마저도 폭격으로 심하게 손상된 상태였다. …제국이 붕괴하자 해외에서 300만 명 가까운 일본인 난민이 몰려왔다. 난민 대부분이 만난 적도 없고 자신들을 환영하는 이도 거의 없는 고국이었다. 1945년 일본에 필요하지 않은 게 한 가지 있다면, 그것은 먹여 살려야 하는 굶주린 입이었다.

198 300년 동안 대규모 전쟁을 겪어 보지 않은 나라가 이제 폐허만 남았다. 도쿄 중심부의 황궁 앞에서 거대한 시위가 벌어진 것도 놀랄 일은 아니다.

“천황 폐하는 오늘 저녁으로 뭘 드실 겁니까?”

203 트루먼은 일본 정부가 먼저 미국과 양자 간 안보 조약에 합의할 것을 주장했다. 일본은 미국을 유일한 동맹국으로 받아들이고, 미국은 일본 정부의 권한에서 완전히 벗어난 기지를 일본에 둘 권리를 확보하는 조약이었다.

204 . 마오쩌둥은 명석하고 무모하기도 한 사령관으로, 사회정의에 철두철미하게 헌신하고 이른바 “낡은 중국”-후진성, 미신, 가부장제-을 깊이 혐오했다. 그는 근대적이면서 사회적으로 정의로운 “새로운 중국”을 창조하고자 했다. 그가 주목한 이상은 스탈린의 소련…

208 1948년 초에 이르면 소련의 군사 원조가 만주에 들어왔고, 붉은군대 교관이 만주와 소련 두 곳에서 중국인민해방군 장교를 훈련했다. 중국인민해방군은 붉은군대의 원조를 받지 않고도 내전에서 승리할 듯 보였다. 하지만 소련의 원조는 중국공산당에 정치적으로 중요했다. 모스크바에 있는 공산주의의 “위대한 대가”, 즉 이오시프 스탈린 본인이 이제 중국공산당의 방침을 수용하고 새로운 중국 공산주의 국가의 탄생을 도와줄 것임이 분명해졌다.

209 스탈린은 중국공산당의 “계급적 토대”를 신뢰하지 않았다. 스탈린의 결론에 따르면, 중국 공산주의자들은 노동자라기보다 농민이었다. 또한 중국 혁명은 사회주의 혁명이라기보다 “민족” 혁명이었고, 적어도 처음에는 민족 부르주아지와 연합해서 통치해야 했다. 스탈린은 중국공산당이 소련의 붉은군대에 의존하지 않고 그들의 힘으로 집권할 수 없을 것이라며 중국공산당을 마음속 깊이 불신했다.

210 새로운 체제가 중국에서 혁명적 폭력을 일으킨 데는 세 가지 주요 목적이 있었다. 마오쩌둥은 농촌과 도시에서 각각 전통 엘리트와 부르주아지의 권력을 깨뜨리고자 했다. 그리고 외국인을 쫓아내고 그들의 신문과 서적, 영화를 금지함으로써, 중국에서 비공산주의적인 해외의 영향력을 차단하고자 했다. 또한 중국 젊은이를 동원한 대중 운동으로 소련을 본뜬 새로운 사회주의 공화국을 건설하고자 했다.

211 수많은 중국인은 그 깃발 아래로 몰려들었다. 많은 이는 100년간 약했던 중국인이 마침내 떨치고 일어섰다는 마오쩌둥의 설명을 믿었다. 민족주의는 시대의 풍조였고, 수많은 중국인은 자부심을 가질 수 있는 나라를 절실히 원했다. 그들은 공산주의가 미래의 물결이라면 중국은 그것을 받아들이고 심지어 그 최전선에 서야 한다고 생각했다. 한반도에서 미국에 맞서 전쟁을 벌이는 것은 중국의 민족주의에 기름을 붓는 꼴이었다.

211 중국 혁명의 힘은 중국 국경과 멀리 떨어진 곳에서도 감지되었다. 동남아시아에서 반식민주의 혁명 정당이 용기와 힘을 얻었다. 한반도에서 김일성이 이끄는 공산주의자는 그들도 이제 무력으로 나라를 통일할 수 있다고 느꼈다. 엘리트가 중국 공산주의를 치명적인 위협으로 여긴 일본에서도, 아시아인이 미국의 반대를 무릅쓰고 그들의 힘으로 권력을 잡는 것을 보고 민족주의자는 은밀히 웃음을 지었다. 중국인 디아스포라에서 공산주의에 거의 친밀감을 느끼지 못한 많은 이도 중국에서 강한 정부가 등장한 것을 축하했다.9 인도와 유럽은 중국 혁명을 세계 정치에서 일어난 주요 변화로 바라보았다. 신생 독립국 인도의 민족주의자 총리 자와할랄 네루Jawaharlal Nehru는 의회에 이렇게 말했다. “이것은 수천만, 수억 명의 인류가 참여한 근본 혁명이었고, … 인기를 누리며 굳건히 자리 잡은 완벽히 안정된 정부를 낳았습니다.” 프랑스의 신문 사설도 정치 진영을 넘어 신속한 이행과 이를 통해 공산주의가 세계 전역에서 어떻게 하나의 이데올로기로 힘을 얻었는지 논평했다.

216 베트남은 아시아의 옛 식민지 가운데 지배적인 독립 지도자들이 공산주의를 선택한 유일한 나라였다. 역설적이게도 한 가지 이유는 베트남 엘리트가 프랑스 문화와 교육에 통합되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1914년 이후 세대는 프랑스 젊은이 사이에 우세한 급진주의를 이어받았다. 소비에트 공산주의의 국제주의는 베트남 독립 운동에 속한 많은 이에게 호소력이 있었다.

227 네루는 소련에 자유가 부재한 것을 개탄하면서도 이 나라가 “인간 사회에 대도약을 가져다주었다”라고 치켜세우면서, “낡은 과거의 잔재에서 놀랍고도 엄청난 노력을 통해 교육과 문화, 의료와 신체 건강, 민족 문제 해결 등에서” 소련이 이룩한 업적을 열거했다.25 네루는 인도의 시인이자 노벨상 수상자인 라빈드라나트 타고르Rabīndranāth Tagore가 임종을 앞두고 남긴 유언을 인용했다. “질병과 문맹에 맞서 싸우면서 러시아가 보여 준 전대미문의 에너지”를 경탄하는 말이었다. “러시아는 무지와 빈곤을 꾸준히 없애는 데 성공하면서 광대한 대륙의 표면에서 굴욕을 씻어내고 있다. 러시아 문명은 계급 간, 종파 간에 부당한 구별이 전혀 없다. 러시아가 신속히 이룬 놀라운 진보를 보면 흡족하면서도 질투가 난다.”

227 유럽인을 최상위에 두는 인종적 위계 인식이 미국의 정책 결정에 영향을 미쳤다. 종교관도 마찬가지였다.

228 한국은 또한 미국이 모든 곳에서 우려하는 소련의 침공 양상에 반격할 기회가 되기도 했다. 한국전쟁은 초강대국 간 대결을 아시아 민족주의와 결합했다. 그것은 아시아 내전이었지만, 또한 냉전 최대의 군사작전이기도 했다.

마셜플랜 ![Pasted image 20250609160821.png](Pasted image 20250609160821.png)

유럽의 군사적 분할과 경제 블록, 1947-1973 ![Pasted image 20250609160751.png](Pasted image 20250609160751.png)

6 한반도의 비극

한반도에서 막대한 파괴가 벌어졌다. 군사 행동이 벌어지는 동안 적어도 두 번 나라 전체가 전쟁으로 불길에 휩싸였다. 모든 도시가 폐허가 되었다. 인구의 절반가량이 피란민이 되었다. 생산시설이 대부분 파괴되었고, 전쟁 내내 굶주림이 널리 퍼졌다.

231 한반도에서 벌어진 전쟁…무엇보다 나쁜 것은 충분히 피할 수 있는 전쟁이었다는 사실이다. 한국인 사이의 격렬한 이념 대립과 초강대국의 개입을 가능케 한 냉전의 틀이 낳은 전쟁이었다. 한국전쟁은 가장 소름이 끼치는 냉전의 충돌을 상징했다. 극단적이고 야만적이며, 언뜻 끝없이 이어질 이 전쟁으로 한반도는 황무지가 되었고, 세계 곳곳의 사람은 자기 나라가 다음 차례에 재앙을 맞을지 궁금해했다. 따라서 이 전쟁은 냉전을 전 지구적 규모로 강화하고 군사화했다.

한국전쟁의 기원은 19세기 말 동아시아에서 중국의 힘이 붕괴한 것, 그리고 냉전의 이념 대립이 부상한 것과 연결되어 있었다. 조선과 오랫동안 연결된 청나라가 몰락하자, 일본이 지역 전체에서 제국주의적 팽창에 나서는 길이 열렸다. 1894~1895년 청일전쟁에서 중국이 패배한 뒤 일본이 처음 차지한 나라는 조선이었다. 1910년에 이르러 조선은 일본제국의 필수적인 일부로 완전히 병합되었다. 일본 행정부는 조선의 정체성을 깔아뭉개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서울의 왕궁은 철거되었고, 일본어가 모든 고등교육의 주요 언어가 되었다. 도쿄 당국은 심지어 조선인이 일본 옷을 입고 사회관습과 가족생활을 일본과 동화하도록 강요했다. 동시에 일본인이 동경하는 만큼 두려워하는 유럽 제국처럼 식민자와 피식민자를 광범위하게 차별했다

233 1919년 강화회담에 참석하러 파리로 간 조선의 망명 민족주의자는 씁쓸히 낙담했다. 그들은 외국의 인정을 받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미국과 영국이 일본의 한반도 정책을 지지하는 듯 보였기 때문이다. 신생 소비에트 국가를 고립되게 하려는 시도에 일본이 합세한 상황에서, 워싱턴이나 런던이나 한반도 문제를 놓고 도쿄와 사이가 틀어질 위험을 무릅쓰려 하지 않았다.

235 러시아혁명은 많은 조선인에게 영감을 주면서 근대와 평등, 민족 권리의 존중을 약속했다. 첫 번째 공산주의자 집단이 1918년 시베리아의 조선인 사이에서 형성되었고, 1920년대 초에 이르면 이 운동이 지하 저항의 일부로서 한반도 자체에도 퍼진 상태였다. 1925년 서울에서 조선공산당이 결성됐지만, 금세 일본 경찰의 집중 표적이 되었고, 당 활동가 수백 명이 체포되었다. 탄압 때문에 분파 간 내분이 극심해졌는데, 1920년대 말과 1930년대에 소련에서 스탈린이 벌인 잔혹한 숙청과 뒤얽혔다. 한반도에선 공산주의의 미래는 쉽지 않아 보였다.

235 한 조선인 코민테른 요원이 1920년대 말 현지 상황을 보고하러 비밀리에 조선에 파견됐는데, 그는 다수의 젊은이가 언제든 공산당에 가입할 태세임을 발견했고, “젊은이들은 소련과 코민테른을 일본 제국주의에서 구해 줄 구원자로 봅니다”라고 보고했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그들은 “마르크스주의를 피상적으로만 알 뿐”이며, 주로 “부르주아적 독립 운동 출신의 학생과 지식인”이 다수였다. 그들의 활동은 “이론적 혼란과 대부분 아무 원칙 없는 장기간의 분파 싸움”에 시달렸다. 1928년 코민테른은 조선공산당을 해산했다. 조선인 간부를 모스크바에서 교육한 다음에 적절한 공산주의 운동을 펼치기 위해 다시 보내는 게 더 낫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1930년대 말 벌어진 숙청으로 모스크바의 고위 조선인 공산주의자가 전부 체포되어 총살당했다. 일본의 첩자라는 혐의였다. 1937년 소련 태평양 지역에 살던 소련의 조선인 20만 명 가까이가 중앙아시아로 강제 추방되었다. 소련 아시아 지역에 제오열이 암약한다는 스탈린의 공포가 조선 혁명에 헌신하는 것보다 더 중요했다

[한국이 38선으로 나뉘게 된 이유](한국이 38선으로 나뉘게 된 이유)

238 한반도 분할이 굳어진 것은 이승만과 김일성이 자기의 통치로 한반도를 통일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는 어떤 계획에도 완강히 동의하지 않았고, 또한 1940년대 말 다른 곳에서 냉전이 격화되었기 때문이다. 1948년 4월 남쪽에서 독자 선거를 치르게 해 달라는 이승만을 비롯한 반공주의자의 압박에 미국이 굴복했을 때, 주사위가 던져졌다. 이승만은 이미 공산주의자와 노동조합원을 비롯한 좌파를 박해하고 있었다. 선거에서 이승만이 승리한다는 것은 이미 거의 정해진 결과였다.

240 〈반민족행위처벌법(National Traitor Act)〉은 일제시대에 일본에 부역한 자를 반민족 행위로 규정하고 처벌하기 위해 1948년 9월 제정된 법이다. 이에 따라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가 구성되어 의욕적으로 활동을 벌였으나, 이승만 정부가 미온적인 태도로 일관하고 〈반민족행위처벌법〉이 개정되면서 결국 반민특위가 해체되었다. 파업을 진압하고 독립 단체를 불법화하기 위해 만들어진 법은 1948년 12월 1일에 제정된 〈국가보안법(National Security Act)〉이다. 국가의 안전과 국민의 생존 및 자유를 확보한다는 명분으로 내세운 〈국가보안법〉은 일제시대의 〈치안유지법〉과 〈보안법〉을 모태로 했다. 1949년 한 해 이 법으로 잡아 가둔 사람이 12만 명에 이르렀다.

242 스탈린이 마음을 바꿔 김일성의 남침을 고려해게 된 배경들

  • 중국공산당이 중국에서 승리했다
  • 미국이 이때문에 아시아 본토에 개입을 꺼렸다
  • 유럽에서 미국이 방해하는것에 짜증이 났다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 파견된 대사가 북한과 남한의 힘의 균형이 북한에 유리하다고 보고했다
  • 중국공산당 - 마오쩌둥이 - 동의을 받아오라고 김일성을 보낸다

마오쩌둥은 반대하지 않았다.

1950년 5월 김일성은 베이징에 도착해 마오쩌둥 승인을 받는다

245 원래 신중하고 현실적인 스탈린이 어떻게 해서 워싱턴이 자기의 세력권으로 여기는 것을 아는 지역에서 공격을 승인할 수 있었을까? 주된 이유는 노령의 소련 지도자가 점차 망상에 빠져들고 있었기 때문이다.

245 서울은 공격 3일 째에 함락되었고, 이승만은 남쪽으로 도망쳤다. 남한은 군대의 4분의 3을 잃었는데, 대부분 탈영한 것이었다. 남한군 2만 명 정도가 동남쪽 연안으로 도주하는 데 성공하긴 했지만, 저항이 워낙 약했기 때문에 포위 계획이 필요 없어졌다. 전투가 벌어짐에 따라 양쪽 모두 잔학행위를 저질렀다. 이승만 정권은 교도소에 갇혀 있던 좌익을 학살했다. 북한은 진군하면서 남한 공무원을 처형했다. 미군 고문관은 처음부터 남한 편에서 싸웠고, 전쟁 2주째에 일본에서 소규모 미군 증원군이 도착했다. 하지만 6월 말 김일성은 모스크바에 한 달 안에 전쟁이 끝날 것으로 예상한다고 보고했다.

254 트루먼은 한국을 활용해서 미국에서 세계 봉쇄 정책과 군비 지출 증대에 대중적 지지를 얻는 것과 전면전의 공포를 피하는 것 사이에서 균형을 잡아야 함을 깨달았다. … 정부는 충성심사위원회를 설치해 수많은 공무원을 심사하는 식으로 대응했다. 공무원은 어떤 시민단체에 속했는지, 독서 습관은 어떠한지, 아는 공산주의자가 있는지 등의 질문을 받았다. 언론인, 예술가, 평범한 노동자 수천 명이 감시 대상에 올라 취직이 가로막혔다. 반공 열풍에 가담하는 것을 거부했다는 게 이유였다. 교사를 비롯한 공무원은 -어떤 주는 우편 노동자와 무덤 파는 작업자도- 〈헌법〉에 손을 올리고 충성 선서를 해야 했다.

256 그렇지만 남아프리카 군대는 한반도에서 유엔군에 가세했다. 당시에는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1950년 11월 한국전쟁에서 장교로 복무한 마오쩌둥의 아들 마오안잉毛岸英을 죽인 것은 남아프리카 전투비행대의 소행이었다.

257 한국전쟁이 미국의 국제 동맹에 도움이 됐을지 몰라도, 중소 협력을 촉진하는 데 훨씬 더 큰 역할을 했을 것이다. 중국이 전쟁에 개입한 뒤, 소련은 지원 속도를 늘리면서 중국군과 북한군에 필요한 물자 대부분을 공급했다. 또한 소련은 군사고문단을 추가로 보냈고, 무엇보다 항공기와 대공포 지원도 늘렸다. 1951년 4월부터 스탈린은 북한 영공을 벗어나지 않는 조건으로 소련 조종사가 전투 임무를 수행하는 것을 허용했다. 약 800명의 소련 조종사가 주로 미그15 전투기로 한반도 상공을 비행했다. 소련이 동원할 수 있는 최첨단 항공기였다. 이따금 3개국 사이에 전술 문제를 놓고 의견이 갈리긴 했지만, 전쟁 중에 중국과 소련의 협력과 상호 신뢰가 상당히 높아졌다.

261 3월 5일 모든 상황을 뒤바꾸는 소식이 전해졌다. 스탈린이 사망한 것이다. 3월 1일 독재자는 흔히 그랬듯, 모스크바 외곽에 있는 한 시골 별장에서 친구와 늦은 저녁을 먹었다. 다음 날 스탈린의 아파트에서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다. 청하지 않으면 절대 들어오지 말라는 엄한 지시에 따라 경비원은 오후 10시 무렵까지 감히 문을 열어 보지 못했다. 경비원은 결국 바닥에 누워 있는 스탈린을 발견했다. 심한 뇌졸중이 와서 그 자리에서 마비가 되었다. 후임자가 서로를 예의주시하면서 상황을 정리하며 한 가지 합의한 문제는 한국전쟁을 끝내자는 것이었다. 그들은 전쟁을 계속하는 게 위험하고 불필요하다고 보았고, 종전이 긴장을 완화하자는 의도를 미국에 보여 줄 기회라고 기대했다.

262 냉전은 제로섬게임이었다. 추론을 계속할수록 적의 공격을 부추기는 셈이었다.

…남북한 자체에 미친 영향은 더욱 나빴다. 나라 전체가 폐허가 되었다. 350만 명이 전쟁으로 사망하거나 부상당했다. 1000만 명이 식량 원조에 의지했다. 남한에서만 생존한 친척이 없는 고아가 최소 10만 명 생겼다.20 고향 도시와 마을로 돌아올 수 있었던 한국인은 사방에서 죽음과 절망을 목격했다. 연합국이 “그들의” 한국을 각각의 동맹 체계에 편입하는 대가로 상황을 개선하려고 했다. 하지만 한국인에게 전쟁은 민족 재앙이었고, 전쟁이 남긴 상흔은 여전히 치유되지 않았으며, 그 비참함도 아직 사라지지 않았다.

7 동구권

271 공산주의 세계는 가구 소비에서 철강 생산에 이르기까지 계획이 모든 것을 아울렀다. 1960년대 초에 이르면, 소련과 불가리아의 국민소득 100퍼센트가 국영기업 및 집단기업에서 생산되었고, 다른 대다수 공산주의 나라도 비슷한 수치였다.3 사적 소유는 몰수를 통해 폐지되었다.

272 저발전 경제에서 중앙집중화의 자원 이점이 초기 성공에서 역할을 했으며, 공장과 나라를 재건해서 성공하는 것을 보려 한 노동자의 열의도 도움이 되었다. 하지만 계획경제에 비효율성이 굳어지기도 했는데, 이는 경제가 성숙함에 따라 더욱 확연해졌다. 효율적인 자원 할당과 혁신, 제품 차별화가 부족했다. 또한 노동자를 위한 유인도 부족하고, 천연자원과 산업 자원을 절약하거나 보전하려는 노력도 부족했다.

274 대다수 노동자에게 사회주의로의 이행은 한층 줄어든 보상을 내밀었다. 모든 이-특히 1930년대를 경험한 이들-가 고용 안정과 착실한 소득에 고마워했지만, 생활 조건은 여전히 열악했고, 소비재와 때로는 식료품도 부족한 상황은 풍요를 약속한 사회주의의 이상과 충돌했다. 설상가상으로 노동계급은 자율성을 누리지 못했다. 동유럽 전역에서 노동자는 전쟁 직후 몇 년간 그들의 영향력과 힘을 맛보았다. 몇몇 지역에서는 공장평의회가 공장 운영을 떠맡거나 공장주와 처우를 교섭했다. 하지만 1940년대에 이르면 공산당 노동조합이 들어와 노동자 조직을 넘겨받았고, 당국이 임명한 관리가 새로운 상관이 되었다. 그들은 위에서 내려온 지침에 따라 생산 할당량을 정했고, 노동자는 자기의 일상에 거의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모든 곳에서 노동자가 항의하면서 공산당을 변장한 나치스라고 비난하기도 했다. 스탈린 이후 시대에 당국은 점차 수준 낮은 생산성을 받아들이고, 식료품과 집세 보조금을 늘리는 식으로 노동자의 항의를 매수하려고 했다.

275 탄탄한 사회 조직과 국가에 관한 사고는 종종 집단적 노력의 상징인 최고 지도자의 우상화로 이어졌다. 각기 상황에 따라 형태는 서로 달랐지만, 이런 숭배가 공산주의 체계에 확고히 내장되었다. 최악은 지도자들이 우상화를 활용해서 개인 독재를 수립했다는 사실이다. 스탈린이나 마오쩌둥, 또는 ‘수령(스탈린)’ 통치기에 동유럽 전역에서 등장한 온갖 “소小 스탈린”이 그런 사례였다. 김일성 치하의 북한은 또 다른 조잡한 사례였다.

295 헝가리 혁명을 진압한 후과는 유럽인에게 짙은 암운을 드리웠다. 혁명을 통해 유럽 대륙이 두 세력권으로 나뉜 현실이 여전하다는 것이 드러났다. 미국과 그 동맹국은 이따금 “공산주의를 물리치겠다”라고 요란한 말을 늘어놓았지만, 동유럽을 “해방”하기 위한 계획이 전혀 없었다. 그리고 소련 내부와 외부에서 자유화를 이루려는 흐루쇼프의 시도는 바로 그 자신의 손에 큰 타격을 입혔다. 헝가리인 20만 명이 서구로 도주하고, 2만 명이 체포됐으며, 너지 임레 총리와 그의 측근 몇 명을 비롯한 230명이 처형되었다. 서유럽에서 헝가리 사태의 직접 결과로 각국 공산당이 힘을 잃었다. 몇몇 공산당은 이후 다시는 힘을 얻지 못했다. 그리고 동구에서 대다수 체제 반대파는 모스크바에 맞선 공공연한 반란으로는 승리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국제 상황이 변하지 않는 한, 개혁으로 가는 길은 점진적일 수밖에 없었다.

297 폴란드와 헝가리 사태가 흐루쇼프에게 남긴 교훈은 공산주의라는 건축물 자체를 위험에 빠뜨릴 수 있는 정치 개혁을 시도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대신에 흐루쇼프는 농업・과학・기술을 위한 소련의 계획을 확대하는 쪽으로 돌아섰다. 규모가 거대했음에도, 소련은 언제나 식량 공급 문제에 시달렸다. 집단농장의 생산성이 부족한 탓이 컸다.

8 서구의 형성

미국의 역대 행정부는 서유럽 통합이 미국에 이익이 된다고 믿었다. 미국 정부는 경제 회복을 지원하고, 유럽이 나토를 필두로 한 여러 다자간 기구에 참여하는 것을 강화했다. 미국은 통일된 유럽이 미국의 경쟁자가 될 것을 지나치게 걱정한 적이 없다.

308 냉전기 서유럽은 두 개의 국제적 기둥 위에 세워졌다. 하나는 나토를 통해 미국과 맺은 군사 협력이었다. 다른 하나는 서유럽 나라 사이에 맺은 협정을 통한 경제적・정치적 통합이었다.

최소한 1870년 이후 유럽 정치를 지배한 프랑스-독일의 적대 관계에서 벗어나기 위한 시도였다. 냉전 압박은 유럽 정책 결정권자들의 마음을 하나로 모았고, 협력을 피할 수 없게 했다.

314 독일인에게나 다른 유럽인에게나 아데나워가 내세운 ‘서방과 결속(Westbindung)’에 신빙성을 준 것은 서독 경제가 1950년 무렵을 시작으로 이례적으로 회복되었다는 사실이다. 독일이 ‘경제 기적(Wirtschaftswunder)’을 이룬 데는 여러 원인이 있었다. 마셜플랜의 원조, 도이치마르크와 미국 달러의 연동이 그 하나였다. 서독 경제를 서유럽의 틀에 점진적으로 통합한 것도 한 원인이었다. 아마 가장 중요한 것은 전시 부채와 전후 배상의 전면적인 영향에서 독일연방공화국을 보호하기로 한 미국의 결정이었을 것이다.

319 전후 유럽 세계는 사방에서 변화가 닥쳐오는 듯 보였다. 대륙이 이데올로기로 나뉘고 미국의 영향력이 커졌을 뿐만 아니라, 서유럽 자체가 점차 해외 식민지를 상실하면서 변모했다. 1945년 영국, 프랑스, 포르투갈, 에스파냐, 벨기에, 네덜란드는 모두 해외에 상당한 영토를 보유했다. 유럽의 식민지에 서유럽 자체 인구보다 약 3배 많은 사람이 살았다. 1965년에 이르면 포르투갈을 제외하고 거의 식민지가 남아 있지 않았다. 유럽에서 경제적 그리고 인식 차원에서도 이런 이행을 촉진하는 데 재조정을 상당히 해야 했다. 한 가지 쟁점은 옛 식민지에서 귀국하는 유럽인이나 식민 본국에 계속 남기로 선택한 식민지 출신 사람을 수용하는 문제였다. 또 다른 쟁점은 크게 축소된 자국의 세계적 지위에 익숙해지는 문제였다. 특히 영국과 프랑스는 이것이 쉽지 않은 이행이었다.

322 유럽인이 회복을 갈망했다면, 미국인은 안정을 열망했다. 지난 20여 년간 미국 유권자는 대공황, 뉴딜, 유럽과 아시아의 전쟁, 냉전 등 잇따라 비상 상황에 직면했다. 1952년 미국인은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장군이 이끄는 안정과 정상 상태에 표를 던졌다.

324 매카시 문책으로 미국에서 발작적인 방식의 냉전 정치에서 으뜸가는 상징이 사라졌다. 물론 그렇다고 반공의 대의가 크게 손상되는 일은 없었다. 매카시는 이미 미국 정치 영역 전체에 걸쳐서 당혹스러운 존재가 된 상태였다. 그가 물러난 뒤에도 민주주의, 종교, 자유시장을 위한다는 전 지구적 규모의 사명감은 그대로 남았다. 1950년대 대다수 미국인에게 공산주의와 대결하는 것은 자기 나라의 기본 특징의 일부였고, 국내외에서 승리해야 하는 싸움이었다. 자유주의자를 자처하든, 보수주의자(뚜렷한 소수였다)를 자처하든, 모든 사람을 아우르는 폭넓은 합의는 지구적 상황을 개선하기 위한 미국의 사명의 하나로 냉전 수행에 찬성했다. 당시 사람들의 생각에 미국인이 자연스러운 방향과 천부적인 선견지명에 따라 현대화하고 개선하려는 세계를, 공산주의자가 장악하려 하고 있었다. 따라서 냉전은 인류의 영혼을 지키기 위한 유례없는 싸움이었다.

326 아이젠하워가 이끈 ‘냉전기 미국(Cold War America)’에서 거의 혜택을 입지 못한 또 다른 집단은 가정과 가사노동의 울타리 바깥에서 자기만의 삶을 구축하고자 한 여성이다. 전쟁 중에 많은 여성이 산업과 서비스업에서 돈을 많이 버는 일자리를 발견한 바 있다. 하지만 냉전 시대에 가족의 가치와 육아가 강조되면서 많은 여성이 일터에서 밀려나 다시 부인과 어머니라는 1차적 역할로 돌아갔다.

327 아이젠하워는 미국을 냉전 초기의 정치적 광란 상태에서 벗어나게 만든 공로를 치하받아 마땅하다. …아이젠하워는 스탈린의 사망 이후 냉전 종식을 생각할 만큼 상상력과 정치적 의지가 없었다. 소련의 새로운 지도자들이 서방과 한국전쟁을 끝내고, 유럽 주둔 군대를 축소하고, 평화 공존에 관해 이야기하는 식으로 관계를 정상화하려 했을 때, 미국 대통령은 머뭇거렸다.

330 미국 대통령은 자기가 서방을 강화하고, 소련 및 그 동맹국과 대결하기 위해 공동의 목표의식을 불어넣었다고 느꼈다. 하지만 아시아에서 미국의 입지에 관해서는 그만큼 확신하지 못했다. 대통령은 중국의 팽창하는 힘을 우려했고, 베이징 당국이 동남아시아에 공산주의를 퍼뜨리려 한다고 믿었다. “공산주의자들이 라오스에서 탄탄한 입지를 세운다면, 서방은 동남아시아 전역에서 끝장나는 셈”이라고 아이젠하워는 퇴임 직전에 주요 보좌진에게 말했다

9 중국의 재앙

중국은 말 그대로 차원이 다른 규모였다. 중국공산당과 소련의 적대는 국제 정치를 뒤바꾸고 냉전의 이원론을 깨뜨릴 잠재력이 있었다. 중국이 문화대혁명 와중에 주로 스스로 분열하는 데 몰두하는 한, 이런 일은 벌어질 수 없었다.

335 1920~1980년대에 벌어진 전쟁이나 정치적 대량학살의 결과로 중국인 7700만 명이 자연사가 아닌 죽음을 맞았으며, 그 절대다수가 다른 중국인에게 살해되었다.1

340 소련이 원조하지 않았다면, 1950년대 중국은 급속히 구조를 바꿀 수 없었을 것이다. 소련의 중국 원조 계획은 모스크바가 국경 바깥에서 수행한 역대 최대 규모였을 뿐만 아니라, 상대적 기준에서 미국의 유럽 마셜플랜을 포함한 어떤 지역, 어떤 나라가 수행한 비슷한 계획 가운데서도 최대 규모였다. 1946~1960년에 원조 총액이 현재 물가로 250억 달러에 육박했는데, 소련의 연간 국내총생산의 1퍼센트에 약간 미치지 못했다. 하지만 실제 들어간 비용은 이보다 훨씬 높았다. 이 총액에는 기술 이전이나 중국에 파견한 소련 전문가 급여, 소련에 유학한 중국 학생들에게 지급한 생활비 등이 포함되지 않는다. 소련 동맹국이 부담한 약 18퍼센트와 중국이 결국 상환한 15퍼센트를 뺀다 하더라도 그 규모와 범위에서 양국에 대대적인 영향을 미친 원조 계획이다.

348 대약진운동….새로운 인민공사들에 비현실적이기 짝이 없는 생산 목표가 부여되었다. 국가의 철강 생산을 1년 안에 2배 늘리는 것으로 정해졌고, 농촌의 인민공사들도 철강 생산량 목표에 이바지해야 했다. 때로는 자포자기하는 심정으로 농기구를 녹여서 목표치를 채우기도 했다. 수많은 농민이 파종기와 추수기에 들에서 끌려 나와 허술히 계획된 건축이나 관개 사업에 동원되었다.

349 1958년 겨울, 많은 사람이 마오쩌둥의 새로운 계획으로 뼈 빠지게 일하면서도 굶주렸다. 1959년 봄 농민이 굶어 죽었다. 악몽이 누그러지는 1961년까지 최소한 4000만 명이 사망했는데, 대부분 과로와 식량 부족이 결합된 결과였다. 목격자들의 증언이 이 모든 사실을 묘사했다. 원래 부유한 허난성의 도시 신양信陽에서 얼어붙은 주검이 길가와 들판에 널려 있었다. 그중 일부는 사지가 잘린 상태였다. 살아남은 지역민은 개들의 소행으로 돌렸다. 하지만 개를 비롯한 온갖 짐승은 이미 사람들이 먹어 치운 뒤였다. 사람들이 살아남기 위해 동족의 살을 뜯어먹은 것이다

356 중국과 인도는 1940년대 말에 양국이 재구성되고 한동안 협력했지만, 10년 뒤 적대감에 사로잡혔다. … 중국공산당이 네루의 인도 국가를 단지 식민적 구성물로, 즉 실질적인 한 나라에 미달하는 존재로 보았다는 것이다. 네루는 중국식 혁명을 인도 발전을 향한 자기의 소망뿐만 아니라 아시아 전체의 안보에도 위협이라고 여겼다.

357 #1962년 10월 인도군 산악 순찰대가 히말라야산맥의 분쟁 지역에 진입하면서 전쟁이 발발했다. 중국 군인이 그들을 밀어내려 하면서 양쪽이 사격을 개시했다. 처음에는 인도군이 공세를 폈지만, 인민해방군이 대규모 증원군을 보내 인도군을 밀어냈다. 전투가 끝났을 때 인도는 완패했고, 중국은 분쟁 지역을 차지했다. 전쟁은 아시아 전체에 충격을 주었는데, 특히 인도가 주요 회원국으로 최근 결성된 비동맹운동(Non-Aligned Movement) 회원국이 깜짝 놀랐다. 하지만 전쟁의 주된 결과로 중국은 한층 고립되었다. 호전적 언사 때문에 공격적인 집단으로 여겨진 탓이 컸다.

361 #마오쩌둥 이 무산계급 문화대혁명이라는 이름으로 밀어붙인 숙청 계획은 낡은 당 지도부를 제거하고, 청년에게 직접 혁명을 일으키자고 호소함으로써 변화 과정을 심화했다. 그는 중국과 중국인을 근본적으로 개조하고자 했다. 그가 추구한 이상은 가족, 종교, 낡은 문화에서 자유로운 새로운 남녀 인간형이었다. 오직 이런 강건한 사람만이 중국의 변혁을 완수할 수 있다고 마오쩌둥은 주장했다. 그는 30년 동안 이끈 당을 격렬히 비난했다. 자기와 나라의 앞길을 막고 있다는 것이었다. 이제 시간이 바닥나고 있었다. 마오쩌둥은 젊은 시절에 시작한 과업을 완수해야 한다고 느꼈다.

362 소수민족은 문화대혁명에서 가장 큰 타격을 입은 집단에 속했다. 중국이 지배하는 내몽골에서 중국 홍위병은 “내몽골 인민당” 당원들을 쥐 잡듯 사냥해 최소 2만 명이 살해되었다. …티베트에서 공산당의 잔학행위는 훨씬 더 심했다. 티베트 불교 승려가 몰매를 맞거나 살해되었다. 예로부터 전해 내려오는 예술 작품이 불길에 던져졌다. 헬리콥터를 타고 날아온 홍위병은 절과 승원을 다이너마이트로 폭파하거나 유도탄을 쏘아댔다

363 평양에서 중국인 유학생들이 마오쩌둥의 저작을 김일성이 충분히 학습하지 않는다고 비판한 터무니없는 사건을 벌이자, 북한이 폭발했다. “우리 인민은 중국인의 교만한 행동에 분노한다. 중국인은 … 발작적인 환자처럼 행동한다. … 그들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이익을 손상하는 범죄 행동을 저지른 책임을 피할 수 없다.”

364 1969년에 이런 긴장 상황이 갑자기 악화했다. 중국과 소련 군인이 서로 자기네 영토라고 주장하는 우수리강 한가운데에 있는 섬을 놓고 몇 번 충돌한 뒤, 3월 2일 중국군이 소련 국경순찰대를 기습 공격해 약 60명을 살해했다. 모스크바의 지시를 받은 붉은군대가 2주 뒤 반격에 나섰지만, 아직 얼어붙은 강 유역에서 중국군을 몰아내지 못했다. 대규모 포격전이 잇따랐다.

366 중국 경영자들과 관리들은 마오쩌둥의 운동 이후 다시 사태를 수습하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한 위기에서 빠져나오면 다른 위기가 닥치곤 했다. 최악의 위기는 1971년 9월에 벌어졌는데, 마오쩌둥이 후계자로 점찍은 부주석이자 국방장관 린뱌오가 공황에 빠져 소련으로 도주하려 한 것이다.

367 공산주의 혁명과 냉전은 언제나 지도자나 인민이 예상한 방향을 따르지 않았지만, 중국을 완전히 바꿔 놓았다. 가장 중요한 변화는 “옛 중국”, 즉 농민과 상인, 관리의 가부장적 공동체였던 중국의 죽음이다. 이미 19세기 이후 쇠퇴 일로를 걸었지만 공산주의가 최종적으로 명을 끊었다. 대신에 일부는 중국적이고 일부는 외래 요소를 가진 혼성 사회가 등장했다. 통치자들의 정치 이론인 마르크스주의는 물론 외래 수입품이었고, 공산당도 마찬가지였다. 가족・교육・기술・과학에 대한 새로운 사고는 해외에서 들어왔다. 중국 혁명에서 무엇보다 뚜렷한 중국적 현상은 인간 변혁과 의지력, 그리고 “올바른” 이념과 사회악에 대한 해법을 찾으려 몰두했다는 것이다. 1970년대에 많은 중국인이 점차 뚜렷이 깨달았듯이, 혁명을 잘못된 방향으로 이끈 것은 현실 성과보다 기풍에 몰두한 마오쩌둥의 태도였다. 냉전 막바지에 중국이 다른 형태의 외국의 영향력에 저항하지 않은 것은 이렇게 자해한 상처와 직접 연결되었다.

368 중국의 마오쩌둥주의 시대가 국제적으로 미친 가장 중요한 영향은 공산주의가 완벽한 한 덩어리라는 관념을 영원히 없애 버렸다는 것이다.

10 부서지는 제국들

#탈식민지

373 냉전은 유럽과 유럽의 파생물인 러시아와 미국에서 이데올로기 경쟁으로 탄생했다.

373 냉전과 탈식민화의 이런 조우에서 제3세계 운동이 등장했다. 그 운동 지도자들이 제3세계 운동이라는 이름을 붙인 것은 1789년 프랑스혁명에서 반란을 일으킨 다수의 약자인 [제3계급(Third Estate)](제3계급(Third Estate))에 존경을 표하기 위함이었다 …인도나 인도네시아의 경우처럼 많은 나라가 그랬지만, 소련의 경험에서 배우려고 할 때도 제3세계의 의제는 세력권에서의 독립을 함축했다.

374 냉전 = 후기 식민주의 ,,, 제 3국이 볼때 미국과 소련은 정치적・외교적으로 통제하고자 하면서, 양국이 제공할 수 있는 틀 안에서의 발전을 추구했다. 비록 미국의 통제 시도가 소련이 발휘할 수 있는 수준보다 훨씬 더 강력하고 따라서 더 만연하긴 했지만, 양국은 같은 시장에서 활약하는 도둑들이었다.

376 양차 대전과 전 지구적 불황이라는 재앙을 겪으면서 반식민주의운동이 정치적으로 집중되고, 반식민주의운동에 대한 지지가 확대되었다.

378 미국은 냉전의 우려를 대외정책에 반영함으로써 반식민적 본능을 누그러뜨려야 했다.

379 식민주의 국가는….탈식민주의를 피하고자 하는 태도를 공산주의에 맞서는 공동 투쟁의 하나로 내세우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미국은 유럽 열강이 식민지를 상실하면 결국 유럽의 위신이 추락할 것이라고 걱정했다. 상황이 이렇게 전개되면 유럽의 안정이 위협받고 서유럽이 유럽 대륙 또는 전 지구적 차원에서 공산주의와 맞서 싸우는 데 제대로 이바지하지 못할 수 있었다.

380 미국 지도자들은 점차 자국이 공산주의에 맞서는 전 세계적 군사작전에 관여하고, 순조로이 작동하는 세계 자본주의 구조를 건설할 책임이 있다고 보았다. 이 싸움에서 미국의 군사기지망이 필요했고, 서유럽과 일본의 경제를 재건하려면 자원도 확보해야 했다. …미국은 전쟁이 벌어지면 활용할 수 있는 전 세계의 영국과 프랑스 기지에 더해, 어센션섬에서 아조레스 및 버뮤다 제도에 이르는 식민지를 자체 기지로 임차했다. 프랑스령 모로코에도 미군 기지가 있었다. 그리고 인도양의 디에고가르시아섬은 대규모 미군 기지를 건설할 수 있도록 탈식민화 이후에도 영국령으로 남았다. 원래 디에고가르시아섬에 살던 1200명의 사람은 퇴거해야 했다.

387 나세르는 수에즈 연설에서 제국주의가 비단 이집트만이 아니라 전체 아랍인을 상대로 자행한 불의를 요약 정리했다. 아랍인은 자기네 나라에서 이등 시민이었다. 팔레스타인 사람처럼 나뉘거나 추방되었다. 하지만 이제는 아니었다.

388 런던과 파리 당국은 이스라엘과 손을 잡고, 이스라엘이 먼저 이집트를 침공한다는 무모한 음모를 꾸몄다. 뒤이어 영국과 프랑스가 교전국을 떼어 놓겠다고 주장하면서 개입할 예정이었다. 마지막으로 간단히 덧붙이면, 양국은 수에즈운하를 되찾을 것이었다. 이스라엘은 #1956년 10월 29일 행동에 들어갔다-또 다른 전역戰域에서 헝가리 위기가 정점에 치달았다. 운하지대에서 전투가 벌어지면서 위기가 고조되었다.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격분했다. …. 미국은 즉시 휴전하고 외국 군대를 전부 철수하라고 했다. 유엔이 승인하지 않았는데도, 외국 땅을 공격해 점령하는 나라가 철수 조건을 내걸게 해야 합니까? 만약 공격자가 목적하는 바를 이루기 위해 무장 공격하는 데 우리가 동의한다면, 국제질서의 시계를 거꾸로 돌리는 것이 아닐까 두렵습니다.”

390 수에즈 위기가 낳은 결과 또한 다양했다. 추가로 확인이 필요하다면, 영국과 프랑스는 대외문제에서 이제 미국의 뜻을 거스르며 독자적인 행동을 할 수 없음이 너무도 분명해졌다. 이미 10년 넘게 분명한 현실이긴 했어도 이 사건은 양국의 국가 위신을 명백히 떨어뜨렸다.

390 네루는 인도 의회에서 다음과 같이 연설했다. “대국이 군사력을 사용해 어떠한 성과를 얻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실은 상황을 다룰 능력이 없음을 보여 줄 뿐입니다. 결국 약함이 드러나는 거지요.”

특유의 위풍당당한 어조로 네루는 말했다. “오늘날 세계가 겪는 최대의 위험이 바로 이런 냉전 사업입니다. 냉전은 철의 장막이나 높다란 장벽, 그 어떤 감옥보다 더 큰 정신적 장벽을 만들어 내기 때문입니다. 냉전은 상대방을 이해하려 하지 않는 정신의 장벽을 만들어 세계를 악마와 천사로 나눕니다.”

395 한편 소련도 1950년대 말에 세계를 바라보는 견해가 바뀌었다. 소비에트 국가는 세계혁명을 이룩하고 제국주의 및 여러 형태의 봉건적・자본주의적 억압을 타도한다는 원칙 위에 세워졌다. 소비에트가 통치한 처음 수십 년간, 특히 “서방의 혁명”을 현실화하지 못한 까닭에 “동방의 혁명”이 일어날 가능성이 점점 중요해졌다. 코민테른은 유럽 외부 출신의 공산주의자를 위해 소련에 학교와 훈련기관을 세웠고, 아시아,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에서 정당과 공산주의 단체를 조직하는 것을 도왔다.

#1921년 아시아 혁명가를 위해 일종의 혁명가 교양 학교인 동방노력자공산대학이 모스크바에 설립됐는데, 바쿠, 이르쿠츠크, 타슈켄트에 분교를 두었다. 인도네시아공산당 지도자 탄 말라카Tan Malaka, 중국의 덩샤오핑, 베트남의 호찌민(나중에 동남아시아와 중국 남부 곳곳에서 코민테른 요원으로 활약한다) 등 놀랍도록 다양한 지도자가 이 학교에서 교육을 받았다.

전간기에 아시아 대부분 나라와 아프리카 일부 나라에서 반제국주의 학생들이 소련 대학들에 몰려왔다. 특히 중국과 베트남, 인도, 중동, 튀르키예에서 많은 이가 무리지어 유학했다. 이 모든 학생이 공산당원은 아니었지만, 식민주의와 유럽의 지배에 반대한다고 공언한 소련에 전부 이끌렸다.

397 공산주의와 반제국주의 대의가 긴밀하다는 인식은 1920~1940년대에 여러 차례 열린 회의에서 드러났다. 출발점은 1927년 브뤼셀에서 처음 열린 ‘제국주의와 식민주의에 반대하는 국제회의’였다. 회의를 계획한 주역은 독일의 코민테른 요원, 그중에서도 특히 통일전선 조직을 창설하는 데 귀재이고 경력이 다채로운 빌리 뮌첸베르크Willi Münzenberg였다.

399 1961년 1월 모스크바 고급 당학교에서 흐루쇼프가 말했다. “민족해방운동은 점점 더 제국주의에 타격을 가하고, 평화를 공고히 하며, 사회진보의 경로를 따라 인류의 발전을 가속화하는 데 이바지합니다. 아시아와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는 이제 제국주의에 맞선 혁명 투쟁에서 가장 중요한 중심입니다.”16

1960년에 소련은 제3세계에 상당히 깊숙이 손을 뻗친 상태였다. 냉전 분할에 반대하는 나라와 반둥 의제에 충실하겠다고 약속한 나라조차 실제 지원을 받기 위해 기꺼이 소련에 의지했다. … 인도네시아와 쿠바, 그리고 가나, 기니, 말리 등 몇몇 서아프리카 나라는 소련과 긴밀히 협력했다. 중국과 관계가 악화하는 와중에도 소련은 제3세계에서 친구를 찾는 데 전혀 어려움을 겪지 않는 듯했다. 인도는 큰 전리품 가운데 하나였고, 비동맹 정책에도 네루 정부는 이미 소련의 경험에 의지해서 고유한 형태의 사회주의를 건설하고 있었다.

400 제3세계에서 소련의 힘이 미치는 범위와 그 한계를 동시에 보여 준 위기는 콩고에서 벌어졌다. 가난하고 착취당하던 벨기에 식민지는 1960년에 갑자기 독립했다. 광대한 나라의 지역을 연결하는 도로도 전혀 없고 유럽인이 소유한 광산 말고는 경제 발전도 거의 이뤄지지 않은 때였다. …소련은 아직 중앙아프리카에 힘을 투사할 만한 병참이나 군사 역량이 없었다. 이 사태에 관여한 중앙위원회 참모진과 붉은군대 장교, 국가보안위원회 관리 모두 절대 잊지 못할 교훈이었다.

403 국내에서 성공을 거두지 못했지만, 빈 벨라의 알제리는 아프리카와 중동에서 온 제3세계 혁명가의 중심이 되었다. 아프리카 식민지를 계속 고수하는 포르투갈에 맞서 싸우는 주요 단체 두 개가 알제리에 본부를 두었다

405 1960년대 초에 이르면, 탈식민화를 거치면서 1945년에 대다수 사람이 상상조차 하지 못한 정도로 세계가 바뀌었다. 전 세계에 독립국이 훨씬 많아졌을 뿐만 아니라 신생국 전부가 비유럽인이 이끄는 나라였다. …신생국 대다수는 냉전으로 탄생한 국제질서를 좋아하지 않았다. 그들은 그 질서에 제약을 받는다고 느꼈고, 그것이 유럽 지배의 또 다른 형태일 뿐이라고 믿었다.

11 케네디 시절의 돌발 사건들

케네디가 냉전의 한복판에서 했던 온갖 삽질(?)을 11장 ‘케네디 시절의 돌발 사건들’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11장을 읽고 나면 케네디가 이미지와 비극적인 최후 때문에 아주 과대평가되었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YG

케네디는 비록 경쟁자에 비해 많은 이점을 누렸지만, 재임 마지막 해에 고조된 아프리카계 미국인 민권 운동 같은 국내의 정치 위기에 대응하고, 확전 일로를 달리는 베트남전쟁에 몰두하며, 소련과 미국의 관계에서 지속적인 안정을 보장할 형식을 찾느라 바빴다.

414 케네디는 냉전에서 승리하기 위해서 탈식민지 국가가 소련의 품에 안기는 것을 막아야 한다고 믿었다.

419 1961년 8월 13일 베를린을 양쪽으로 가르는 선을 따라 철조망이 세워졌다.

425 아이젠하워 행정부는 쿠바 신정권의 급진적이고 권위주의적인 측면, 그리고 정부 안에서 공산주의자가 행사하는 영향력을 우려했다.

437 로버트 케네디는 미국 주재 소련대사 아나톨리 도브리닌Anatoly Dobrynin과 비밀리에 만났다. 그는 소련이 미사일을 전부 철수하면 미국도 쿠바를 침공하지 않을 것이며, 그 대가로 튀르키예에 배치된 미국 미사일을 없애겠다고 제안했다. 세계가 금방이라도 전쟁으로 치달을 상태임을 아는 흐루쇼프는 미국의 제안을 수용하기로 결심했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의식한 그는 라디오모스크바의 공중파 방송에서 수용 의사를 낭독했다. 심지어 방송을 두 번 반복하기도 했다. 10월 28일 아침 당면한 위기는 끝이 났다.

437 쿠바미사일위기는 냉전 시기에 미소 간에 벌어진 가장 위험한 핵 대결이었다(유일하지는 않다)

흐루쇼프…그는 왜 물러섰을까? 그는 핵전쟁이 벌어지면 소련이 가장 큰 피해를 볼 것임을 알았다. 미국에 피해를 줄 수 있는 능력이 반대일 때보다 훨씬 약했기 때문이다. 또한 그는 전쟁이 벌어지면 과연 정권이 생존할 수 있을지 우려했다. 하지만 진짜 이유는 아마 그가 마르크스주의를 신봉했기 때문일 것이다. 흐루쇼프는 공산주의가 세계 곳곳에서 상승 일로를 달리고 있으며, 자신의 역사적 역할은 소련이라는 함선을 조종해서 역사 자체의 법칙을 통해 글로벌 세력의 균형이 공산주의의 방향으로 기울어지는 시기를 헤쳐 나가는 것이라고 믿었다. 핵전쟁이 벌어지면 이런 역사적 성취가 파괴될 것이었다. 흐루쇼프는 공산주의의 화장용 장작더미를 칭송하는 게 아니라, 공산주의의 승리를 찬미하기를 원했다. #1962년 10월 28일

베를린 위기는 유럽 냉전이 뚜렷이 안정화되었다는 의미에서, 쿠바 위기는 미국과 소련 둘 다 일정한 형태의 데탕트détente가 필요하다고, 또는 적어도 장래에 극단적인 핵 위기를 피해야 한다고 보았다는 의미에서 분수령이 되었다는 것이다

[쿠바 혁명 개요](쿠바 혁명 개요)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이란의 주요 사건 연대기](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이란의 주요 사건 연대기)

12 베트남과 조우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냉전기 한국 전쟁과 함께 가장 심각한 열전이었던 베트남 전쟁에 미국이 어떻게 끌려가서 수렁에 빠지는지를 보여주는 장입니다. 베트남 전쟁이 저렇게 악화된 데에는 소련의 정략적 이용(미국을 인도차이나에 묶어 두려는) 및 방관과 중국의 부추김이 있었다는 시각(2024년 11월에 『마오주의』 읽을 때도 자세히 나왔었죠)도 흥미롭습니다. YG

450 #1959년 1월 베트남노동당은 남부에서 “인민 전쟁”을 벌이기로 승인하고, 라오스에서 “호찌민루트”로 알려진 연결망을 통해 남부로 간부들이 침투하게 했다. 1959년 7월 남부 수도 사이공 바로 외곽에서 남부 공산주의자가 미국 군사고문 2명을 살해했다. 베트남에서 새로 벌어진 전쟁에서 사망한 최초의 미국인이었다. … 1960년 하노이 당국이 응오딘지엠 정부에 대항하는 반란을 전반적으로 조직할 수 있었던 이유는 중소 분열 때문이다. 베트남인은 필요한 지원을 얻기 위해 능숙히 두 후원 세력을 서로 경쟁하게 했다.

451 케네디 행정부는 필사적으로 시도해, 남베트남 장군들에게 응오딘지엠에 맞서 쿠데타를 일으킬 것을 조용히 부추겼다. #1963년 11월 1일 남베트남 대통령이 군 장교들에게 납치되어 살해당했다. 3주 뒤 케네디도 댈러스에서 총에 맞았다.

455 상대적으로 온건파인 국무장관 딘 러스크Dean Rusk조차 대통령에게 재촉했다. “전쟁과 평화의 문제가 태평양에 놓여 있습니다. 소련과 중국공산당 앞에서 우리가 머뭇거린다면, 그들은 이를 지금까지 자신들이 좇아 온 경로에 보상을 받는다고 해석할 테고, 따라서 전쟁이 일어날 가능성이 높아질 겁니다. 만약 우리가 페이핑(베이징)에 우리가 약화한다는 신호를 보내는 행동을 한다면, 우리도 더 큰 위험에 직면할 겁니다.”

#1964년 8월 존슨은 북베트남 함정이 공해에서 미국 해군 함선에 발포했다는 부정확한 보고를 구실로 삼아, 의회에서 전쟁 확대를 승인받았다. 이른바 통킹만 결의안은 대통령에게 “미국 군대를 향한 모든 무력 공격을 물리치고 추가 공격을 방지하는 데 필요한 모든 조처를 하는” 권한을 부여했다.7

#1965년 미 공군은 북베트남에 폭격을 개시했고, 미군 병력은 20만 명에 육박하는 규모로 늘어났다. 그해 말에 이르면 거의 2000명의 미국인이 전사했고, 국내 대다수 사람도 이것이 미국이 지난 10년간 세계 곳곳에서 관여한 일종의 대리전이 아니라, 진짜 전쟁임을 분명히 깨달았다.

북베트남 지도자들은 베트남전쟁을 해방을 향한 민족적 투쟁으로 여겼다. 그들은 군사적 승리를 목표로 삼았는데, 이는 미국이 발을 뺀 뒤에야 얻을 수 있는 결과임을 깨달았다. 소련은 베트남전쟁이 전 지구적인 냉전 투쟁에서 미국에 해가 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 전쟁이 제3세계 국가와 운동을 소외하고, 소련이 골리앗 미국에 맞서 싸우는 소국 베트남에 평화와 원조를 상징하는 나라처럼 보이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456 마오쩌둥은 공산주의로 나아가는 길을 단축하려는 하노이의 시도와 남부 해방을 중국공산당이 전폭 지지한다고 선언했다. 이는 모스크바는 머뭇거렸지만, 베이징은 행동한다는 뜻이었다. 중국의 북베트남 원조는 해마다 크게 증가했고, 하노이는 중소 분쟁에서 이데올로기적으로 중국 편을 들었다.

457 중국은 북베트남과 남부의 베트남민족해방전선이 중국의 원조를 받아 미국에 맞서 “가차 없이” 싸우면서 협상하지 못하도록 구워삶는 방침을 세웠다.

461 미국이 베트남에서 군대를 철수해야 한다는 결론도 마찬가지로 실행할 수 없었다. 냉전의 측면에서 약하고 우유부단하며 패배주의적이라고 보이는 것이 두려웠기 때문이다.

466 자카르타 쿠데타에 이어 냉전 역사에서 최악의 민간인 학살이 벌어졌다. 군부의 우파 민족주의자와 일부 무슬림 종교 지도자가 전국 각지로 흩어져 공산당원을 학살했다. … 나라의 한 지역은 강물에 주검이 가득해서 물이 흐르지 않을 정도였다. 미국대사관은 군에 공산당원 명단을 제공하는 식으로 학살을 도왔다.

469 윌리엄 웨스트모얼랜드William Westmoreland 장군이 이끄는 미군은 베트남공산군에 대대적인 타격을 가했다. 북베트남군과 베트남민족해방전선 병사 80만 명이 전쟁 중에 사망했지만, 미군 전사자는 총 5만 8000명이었다. 하지만 미국이 전장에서 거둔 승리는 영토 확보로 이어지지 않았다. 미군이 다른 곳으로 이동하면 곧바로 베트남공산군 부대가 다시 들어왔다. 어떤 곳은 지역 전체를 낮에는 남베트남군과 미군이 차지하고 밤에는 베트남민족해방전선이 장악했다. 나라 전역에서 현지 주민이 과연 사이공 정부를 충실히 따르는지가 의심스러웠다. 대다수 농민은 그저 전투를 피하는 데만 관심이 있었지만, 상당수의 젊은 남녀는 베트남공산당을 위해 싸우려고 자원했다.

[냉전과 베트남 전쟁의 결과](냉전과 베트남 전쟁의 결과) 미국의 전략이 통하지 않은 핵심 이유는 중국과 소련이 북베트남을 지원했기 때문이다.

473 마틴 루서 킹도 1967년 4월 “침묵은 곧 배신이 되는 시기가 왔다”라고 선언했다.

베트남과 관련해 이런 때가 왔습니다. … 우리는 우리 사회가 불구로 만든 흑인 젊은이를 잡아다가 8000마일(약 1만 2875킬로미터) 떨어진 동남아시아에 보내, 그들이 조지아 남서부와 이스트할렘에서도 보지 못한 자유를 지키라고 했습니다 …

475 베트남의 진정한 비극은 당연히 베트남 자체의 비극이다. 한반도처럼 베트남은 냉전으로 갈가리 찢어졌다. 베트남공산당의 잔인성과 발전 계획이 실패했기 때문이기도 했고, 미국의 점령과 폭격 때문이기도 했다. 한국과 차이가 있다면, 베트남은 베트남공산당이 민족주의 활동을 거의 독점하고, 남베트남 지도자들이 스스로 믿을 만한 정부를 세울 능력이 없었다는 점이다.

476 세계 냉전의 측면에서 보면, 미국의 인도차이나 개입은 소련이 미국의 지배와 자본주의적 착취에 대한 보편적 대안으로, 다시 소련을 내세울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다. …베트남은 소련이 힘을 되찾을 기회를 주었다. 이런 회복이 소련의 힘보다는 남의 실패를 통해 이루어졌다는 사실은 이 시점에서 별로 중요한 이야기가 아니다.

13 냉전과 라틴아메리카

라틴 아메리카의 9.11과 브라질, 아르헨티나, 칠레 현대사가 왜 비극으로 점철되었는지 그 냉전의 배경을 알 수 있는 장입니다. 작년(2024년) 3월에 『앨버트 허시먼』 함께 읽었던 분들이라면,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남미의 역동적인 변화의 열기가 어떻게 사그라져서 비극으로 변했는지를 허시먼의 경험과 시각으로 접했을 텐데요. 그 내용을 좀 더 멀리서 조망할 수 있는 장입니다.

480 라틴아메리카의 냉전은 외부보다 내부에서 벌어졌다. 일부이긴 하나 정치적으로 훨씬 더 극단을 달리는 우파와 좌파의 점증하는 폭력적 충돌이 중심이었다. 하지만 우파와 좌파는 라틴아메리카에서 복잡한 범주다.

484 미국의 냉전 시기 대통령들에게 라틴아메리카는 미국의 기본 안보와 전 지구적 목표를 보호하기 위해 힘으로 대권을 장악해야 하는 특별지대였다.

486 1920년대와 1930년대는 확실히 첫 번째 냉전 시대였다.3 노동자가 조직을 이루고 땅 없는 농민이 특권과 억압에 저항하는 가운데, 러시아혁명은 몇몇 이에게 본보기가 되었다. 1929년 이 지역 15개국에서 이미 소규모 공산당이 등장했다 …이 시기 라틴아메리카에서 새로 등장한 대중정치 주요 지도자는 공산주의자가 아니라 급진 포퓰리스트로서, 유럽의 좌파만이 아니라 유럽의 급진우파에서도 영감을 많이 얻었다. 브라질의 제툴리우 바르가스Getúlio Dornelles Vargas, 아르헨티나의 후안 페론Juan Domingo Perón, 멕시코의 라사로 카르데나스Lázaro Cárdenas del Río는 때로 공산당 및 다른 좌파와 협력하긴 했지만, 그들이 추구하는 목표는 국가와 그들의 개인 권력을 강화하는 것이었다.

489 냉전 상황에서 미국이 라틴아메리카에 보인 관심을 처음 시험한 곳은 1954년 과테말라였다. 아이젠하워 행정부는 군소 정당인 과테말라공산당의 지지를 받아 선출된 급진 개혁주의 정권을 무너뜨리기 위해 개입했다.

496 브라질은 시에라리온과 근소한 차이로 세계에서 두 번째로 불평등이 심한 나라였다.15 소수 백인의 소득 수준은 유럽이나 북아메리카보다 훨씬 높았다. 한편 절대다수의 백인과 흑인은 극빈한 삶을 살았다.

505 1970년대 말 라틴아메리카의 많은 나라는 군사 독재자가 통치했다. 우루과이도 1973년 군부가 정권을 탈취했다. 아르헨티나는 1976년 후안 페론의 부인 이사벨을 축출하고 군사독재를 세웠다.

508 소련이 동유럽에서 존재감을 발휘한 것-흔히 미국과 비교된다-과 달리, 미국은 라틴아메리카에서 말 잘 듣는 이데올로기적 동맹국을 거느리지 못했다.

512 미국은 군사 독재 시대에 라틴아메리카를 특징짓는 불안정과 불확실성, 폭력에 상당히 이바지했다. 냉전의 우선순위 때문에 그렇게 한 것이다. 워싱턴은 라틴아메리카 좌파의 패배를 모스크바의 패배로 보았고, 폭력적 군사작전으로 이런 승리를 이룬 군사 독재를 기꺼이 지지했다. …냉전 시기에 흔히 그러하듯, 충돌의 논리가 자기이익과 공동의 인간 존엄을 모두 물리쳤다.

14 브레즈네프 시대

흐루쇼프와 고르바초프 사이에서 1964년부터 1982년까지 무려 18년간 냉전기 소련의 권력을 쥐었던 인물과 그의 시대에 세계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살피는 장입니다.

브레즈네프는 1956년 방위산업 책임자로 소련 최고 지도부 일원이 되었다. 우크라이나 시절 브레즈네프의 후견인이던 흐루쇼프는 1960년에 그를 소련 최고소비에트 상임위원장으로 임명했다. 명목만 국가수반이었다.

이오시프 스탈린 -> 게오르기 말렌코프 -> 니키타 호루쇼프 -> 레오니트 브레즈네프 -> 유리 안드로포프 -> 미하일 고르바초프 -> 소련해체

518 지도자로서 그는 이미 정해진 결정에 합류하게 하는 정도일 뿐일지라도, 다른 사람의 의견을 듣는 걸 좋아했다. 위협적인 스탈린과 변덕스러운 흐루쇼프 이후 등장한 브레즈네프는 호감형이고 “동지다운” 지도자였다. 동료들의 생일, 그리고 부인과 자녀 이름도 일일이 기억했다. 그가 가장 좋아하는 구절은 “정상적 발전”과 “계획에 따라”였다.

524 국가의 역할을 개조하는 추동력의 많은 부분은 양차 대전과 불황의 경험에서 나왔다. 이는 또한 경제가 성장을 시작함에 따라 유럽 좌파와 우파의 상당 부분이 전후에 새로운 형태의 사회복지 조직을 위해 헌신한다는 의지를 보여 주는 신호탄이었다. 실제로 선진 복지국가 건설을 가능케 한 것은 바로 서유럽의 경제 부흥이었다. 1970년 서유럽 모든 나라는 병자와 노인을 위한 사회보장 체계를 개발했다. 대학 수준까지 무상 교육, 퇴직 수당을 포함한 정년 보장, 무상이거나 탄탄한 보조금을 제공하는 의료 등을 이루었다.

530 미국공보처보다 훨씬 중요한 것은 미국의 상업 텔레비전 방송으로, 1960년대 중반 대다수 유럽인이 시청할 수 있었다. 1950년대에 엘비스 프레슬리와 말런 브랜도는 특히 반항적 면모 덕분에 유럽에서 숭배의 대상이 되었다. 그리고 록이 1960년대 세계를 정복했을 때, 그 기준은 대체로 미국의 록이었다. 심지어 극단적인 반체제 음악가도 마찬가지였다. 밥 딜런이나 지미 헨드릭스 같은 인물은 미국 정부가 추구하는 거의 모든 것에 반대했지만, 1960년대 유럽 젊은이에게 미국을 들여다보는 창을 열어 주었다. 정치적으로는 아니더라도 문화적으로

533 1960년대 서유럽 모든 나라에서 젊은이들의 시위가 벌어졌지만, #1968년 파리는 순식간에 학생과 젊은이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그리고 할 수 없는지)를 보여 주는 상징이 되었다.

534 1968년 5월의 진정한 패배자는 공산당이었을지 모른다. 젊은이들에게 공산당은 구식인 데다 소심하고 점점 세상과 동떨어진 세력처럼 보였다. 파리의 5월 시위대 일부는 그 대신 다른 나라의 동조자와 함께 신좌익(New Left)을 옹호했다. 그들에게 마르크스주의는 사회 해방만큼이나 개인 해방을 위한 도구였다. 그들의 상상 속 영웅은 레온 트로츠키와 체 게바라(다행히도 둘 다 1968년에는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다), 또는 놀랍게도 마오쩌둥이었다. 젊은이들은 마오쩌둥의 문화대혁명을 국내 권력에 맞선 그들의 반란과 동일시했다. … 젊은 반란자들은 소규모 마오쩌둥주의 정당이나 트로츠키주의 정당을 독자적으로 결성했다. 하지만 냉전이 지속되는 한 이 새로운 급진 정당-예를 들어 프랑스의 트로츠키주의 정당 노동자투쟁(Lutte Ouvrière), 네덜란드의 마오쩌둥주의 정당 공산당(마르크스레닌주의파), 노르웨이의 노동자공산당(마르크스레닌주의파)- 가운데 어떤 곳도 전국 투표에서 2퍼센트 넘는 득표를 하지 못했다.

535 미국의 페미니스트[ 베티 프리던]( 베티 프리던)은 여성운동의 방향을 제시한 많은 여성 가운데 하나였다. 1963년 프리던은 산업사회에서 여성이 가정주부 노릇과 교육을 받아 자격을 얻은 만족스러운 고임금 일자리를 결합할 수 없다는 것을 받아들일 수 있겠느냐고 물었다. “침대를 정리하면서, 식품점에서 물건을 사면서, 침구 짝을 맞추면서, 아이들과 땅콩버터 샌드위치를 먹으면서, 보이스카우트와 걸스카우트 아이들을 태우고 다니면서, 그리고 밤에 남편 옆에 누워 있으면서, 이 조용한 물음을 자신에게조차 던지기가 두려웠다. ‘이게 과연 전부일까?’”

537 프랑스 대통령 드골.. 유럽 통합으로 나아가는 유럽경제공동체에 영국이 가입하려 했을 때, 드골이 ‘안 된다’라고 반기를 든 것은 런던이 워싱턴의 트로이목마 노릇을 한다는 인식에 기반을 둔 행동이었다. 드골은 프랑스가 미국의 안보를 보장하고 미국과 동방에 다리를 놓으면서, 서유럽을 더욱 독립적으로 이끌 수 있는 유일한 나라라고 생각했다.

549 유럽인이 냉전의 유산을 관리하느라 분투하는 동안 제3세계 기획은 한층 더 분열되었다. 자유와 새로운 기회를 향한 열망이 탈식민지의 가혹한 현실 때문에 누그러지면서, 반식민 투쟁 와중에 발전한 연대와 초국적 남남南南협력 개념이 대다수 지역에서 과거로 물러났다. 1960년대 중반 정치 상황이 180도로 바뀐 뒤, 대다수 탈식민지 정부는 네루나 은크루마, 수카르노 등이 폭넓게 협력하거나 결집하리라고 기대한 것과 반대로, 자국의 이익과 독자적인 경제 발전 계획을 우선시했다. 아프리카, 아시아, 라틴아메리카의 나라는 여전히 냉전의 속박과 유럽의 지배에 맞서 협력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런 협력은 이제 제한적인 구상일 뿐이었고, 주로 각국의 전략적・경제적 이익을 바탕으로 삼았다.

551 그리하여 1970년대는 전 지구에서 정치적 역할만이 아니라 경제적 역할도 극적으로 변화하는 시대가 되었고, 이는 냉전을 수행하는 방식에 지속적으로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15 베이징의 닉슨

닉슨도 참으로 문제적 인물 같아요.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불명예 퇴진한 그 대통령이고, 정말 골 때리는 보수주의자인데 또 데탕트의 상징이 되었잖아요. 미국 경제 패권의 몰락, 일본과 한국 등을 포함한 나라의 성장, 소련과 중국과의 관계 속에서 갑작스럽게 성사된 베이징 방문까지.

#데탕트(Détente)는 프랑스어로 ‘긴장 완화’를 뜻하며, 냉전 시대 미국과 소련 간의 적대적 관계가 일시적으로 완화된 시기를 가리키는 용어입니다. 1960년대 말부터 1970년대까지 지속되었으며, 군비 경쟁 및 정치적 갈등이 줄어드는 현상을 보였습니다

555 1970년대 아시아의 다른 나라는 미국이 지배하는 자본주의적 세계 체계에서 경제 도약을 준비했다. 일본이 그 최전선에 있었다.

560 (닉슨)신임 대통령은 존슨 시절에 시행한 국내 사회 개혁을 대부분 유지했고, 일부는 확대하기도 했다. 국제적으로는 대통령 취임 초기부터 미국이 과거보다 낮은 비용으로 지배권을 유지할 수 있도록 세계 체제를 개조하고자 했다. 그리고 이를 위해 소련 지도자들과 나란히 앉아 어떤 형태로든 냉전의 임시 휴전을 협상해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563 1960년대와 1970년대 일본은 산업 세계의 환자에서 앞장서서 달리는 경제 강국으로 변신했다. … 1960년 샤를 드골은 프랑스를 방문한 일본 총리에게 “트랜지스터 외판원”이라고 멸시한 바 있었다. 그로부터 20년 뒤 일본의 경제 규모는 프랑스의 2배가 되었고, 생산성은 무려 25퍼센트 높았다.4

565 한국과 타이완은 둘 다 냉전의 최전선에 자리한 국가였다. 미국은 양국에 대규모로 원조했다. 1946~1978년에 한국은 거의 아프리카 전체를 합친 것만큼 많은 원조를 미국에서 받았다.5 미국과 일본 시장에 쉽게 접근할 수 있는 것도 그만큼 중요했다. 1970년 한국 수출의 4분의 3이 미국이나 일본으로 향했다.6 냉전 중반기는 분명 다른 방식으로는 얻지 못했을 두 가지 경제 기회를 한국에 제공했다. 또한 도전도 제기했다. 상당한 군사 원조를 포함한 미국의 원조를 받은 덕분에 독재가 그대로 유지된 면도 있다. 가장 중요한 점은 한국과 타이완이 주어진 기회를 붙잡고 예상치 못한 이점을 활용했다는 것이다.

573 헨리 키신저가 중국에서 돌아온 뒤인 #1971년 7월 15일, 닉슨은 텔레비전 생방송에 나와 조만간 중화인민공화국을 방문할 계획이라고 밝혀서 세계를 경악하게 만들었다.

574 1972년 2월 21일, 닉슨이 베이징에 도착했다. 미국 역사에서 처음으로 중국을 방문한 대통령이었다. 소련과 여전히 무기 제한을 협상하는 중이고, 베트남전쟁도 끝이 보이지 않는 가운데, 대통령은 대외정책에서 성과가 필요했다. 그는 중국 방문을 그 성과로 만들기로 결심했다.

576 중-미 합의 내용 타이완이라는 중대한 쟁점에서, 어느 쪽도 중미가 소통하는 데 타이완섬의 미래가 걸림돌이 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미국은 타이완해협 양쪽에 있는 모든 중국인이, 하나의 중국만이 존재하며 타이완은 중국의 일부라고 주장하는 것을 인정한다. 미국 정부는 그런 태도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 또한 타이완 문제를 중국 자체로 평화 해결하는 것이 미국에도 이익임을 재확인한다. 이런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미국 정부는 타이완에서 미군과 군사 시설을 철수하는 것이 궁극적 목적임을 확인한다. 그때까지 해당 지역의 긴장이 완화됨에 따라 미국은 타이완에 주둔한 군대와 군사 시설을 점진적으로 줄일 것이다.19

579 닉슨이 베이징 방문 3개월 뒤인 1972년 5월 모스크바에 도착했을 때, 1차 전략무기제한협정(SALT Ⅰ)이 조인될 준비가 끝났다. 브레즈네프에게 이 정상회담은 정치인 경력에서 최고점이었다.

평화 공존을 바탕으로 [미-소가] 상호관계를 수행하는 것 외에 다른 대안은 존재하지 않는다. 미국과 소련이 이데올로기와 사회 체계에서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양국이 주권과 평등, 내정불간섭과 상호 이익의 원칙을 바탕으로 정상적인 관계를 발전하게 하는 데 걸림돌이 되지는 않는다. … 양국은 항상 상호 관계에서 자제할 것이며, 평화 수단으로 교섭하고 차이를 해소할 준비가 되어 있다. 미해결 쟁점은 호혜와 상호 합의, 상호 이익의 정신에 따라 토론과 협상을 진행할 것이다. 양쪽은 직접적 또는 간접적으로 상대를 희생하면서 일방적인 이득을 얻으려는 시도가 이런 목적에 맞지 않음을 인정한다. 미국과 소련의 평화 관계를 유지하고 강화하기 위한 선결 조건은 평등의 원칙을 지키고 무력의 사용이나 위협을 포기함으로써, 양국의 안보 이익을 인정하는 것이다.23

585 다른 냉전 비판자는 세계적인 차원에서 주장을 펼쳤다. 그들은 사회주의나 자본주의나 인류가 직면한 거대한 공통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으며, 이데올로기 경쟁은 문제 해결에서 관심을 분산할 뿐이라고 주장했다.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두 형태의 산업 발전이 일으키는 환경 파괴, 많은 전문가가 기아와 소요를 부추긴다고 평가한 급속한 인구 증가, 탈식민지 국가의 극심한 빈곤을 두고, 서방의 많은 이는 냉전이 조만간 과거의 일이 될 것이라고 확신했다.

초강대국의 개입보다 자원 경쟁과 종족 갈등으로 촉발한 1967~1969년 나이지리아 내전은 유럽의 냉전 분열에 잠재한 그 어떤 충돌보다 더 현실적으로 보였다. 동방과 서방에서 전 세계에 방송된, 비아프라에서 굶주리는 아이들의 모습은 핵전쟁의 아마겟돈이라는 모호한 위협보다 인류 공동의 미래를 한층 더 생생히 위협하는 듯 보였다.

586 서유럽의 각종 여론조사에 따르면, 많은 사람은 냉전이 영원히 끝났다고 생각했다. 서독인 가운데 소련이 자국에 실질적 위협이 된다고 생각하는 비율은 10퍼센트에 미치지 못했다. 흥미롭게도, 향후 50년 안에 어떤 나라가 가장 강력해질 것인지를 묻는 말에 미국보다 소련을 언급하는 응답자가 2배 넘게 많았다

589 닉슨은 기본적으로 국민을 불신했기 때문에, 냉전 역사에서 처음으로 미국의 세계 패권이 영원히 지속되지는 않을 것이라고 가정해 상대를 다룸으로써, 미국 대외정책의 경로를 바꿔 놓았다.

16 인도의 냉전

이번 장의 주인공은 자와할랄 네루와 그의 딸 인디라 간디입니다. 식민지에서 독립하고 나서 미국도, 소련도 아닌 독자 노선을 걸어보려고 했던 네루의 행보와 아버지의 비전을 이어받지만, 미국과 파키스탄 또 중국을 견제하고자 소련과 좀 더 가까워보려고 했던 인디라 간디의 행보를 중심으로 냉전기 인도사를 요약하는 장입니다.

탈식민지 세계의 여러 지역이 혼돈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상황에서, 인도를 다른 나라의 본보기로 내세우는 것은 비교적 쉬워 보였지만, 네루가 국내외에서 추구하는 목표를 이루게 하는 정책을 밀어붙이는 것은 쉽지 않았다.

593 마오쩌둥의 중국은 너무 이데올로기에 치중하고 국내 문제에만 관심을 기울였기 때문에 그런 역할을 하지 못했다. 냉전에서 예상할 수 없는 요인이 존재했다면 그것은 바로 인도였다. 당시 이 민주주의 국가의 인구는 4억이 넘었는데, 1947년 영국에서 독립해 대체로 영국식 정부 체계를 채택했다. 자와할랄 네루와 그의 국민회의파가 이끄는 새 인도 지도부는 비동맹, 반식민, 사회주의 국가를 자처했다. 중앙집권적 계획이라는 소련의 발상에 상당한 영감을 받은 네루는 세력권 개념에 격렬히 반대했다. …네루가 볼 때, 냉전은 본질적으로 유럽이 주로 집착하는 문제였고, 세계 대다수가 직면한 현실 문제, 즉 저발전, 기아, 식민 억압 등의 문제에서 다른 데로 관심을 돌리는 작용을 했다.

601 인도에서 네루는 신속한 국가 발전을 꾀하려 하면서 한층 왼쪽으로 이동했다. 1930년대 이후 국민회의당 지도부는 소련의 계획 모형과 이 계획들이 후진국을 근대화하는 데 성공한 것처럼 보이는 모습에 매료되었다.

602 중국 내전 당시 네루는 주로 공산당에 공감했는데, 농촌에 뿌리를 두고 사회정의 강령을 내세웠기 때문이다. 하지만 네루는 무엇보다도 전쟁의 폭력과 중국공산당이 승전 이후 보여 준 교조적인 마르크스주의 접근법을 개탄했다.

605 네루는 중국이나 일본 같은 아시아 국가가 냉전 동맹국임에도, 이 연대에 합류할 수 있기를 기대했다. 네루가 공공연히 밝힌 것처럼, 장기 목표는 양국을 냉전 지향에서 단절하게 해 전 지구적 변화를 위한 아프리카-아시아 동반 관계로 완전히 끌어들이는 것이었다.

606 인도 대외정책에서 또 다른 주요한 점은 냉전을 물리치도록 비동맹 국가가 광범위한 세력권을 건설하는 데 있다. 이 기획은 반둥에서 나온 제3세계 구상과 연결되면서도 독자적인 성격이 있었다. 그 의도는 정치 지향이 아주 다른 나라가 냉전의 이분법과 단절하고 비동맹 세력임을 선언하게 하는 것이었다

611 #1962년 중국 군대가 진격하자, 네루는 절망한 나머지 소련에 이어 미국의 개입도 요청할 지경에 이르렀다. [1962년 중국과 인도의 전쟁](1962년 중국과 인도의 전쟁)

인도 정부가 전쟁 발발에 상당한 책임이 있지만, 전쟁으로 네루의 가슴이 무너진 것은 사실이다. 원래 그는 동방과 서방의 평화 조정자가 되고자 했다. 그리고 인도가 대외정책만이 아니라, 국내 정책에서도 다른 나라가 따라야 하는 자급자족과 비동맹의 본보기가 되기를 기대했다. 하지만 이제 그는 다른 아시아 나라 군대의 진격을 차단하려고 두 초강대국에 지원을 호소하는 신세가 되었다. “모든 곳에서 평화를 옹호하는 우리가 이런 식으로 공격을 당하고 무력으로 공격에 저항할 수밖에 없다는 건 비극입니다.”22 휴전 이후 네루는 자신의 아시아 정책이 너덜너덜해졌다고 느꼈다.

613 샤스트리가 타슈켄트 교섭 와중에 심장마비로 갑자기 사망하자, 네루의 딸 인디라 간디가 총리로 선택되었다. 인도의 새 지도자는 어떤 전임자보다 정책을 결정하는 데 한결 강경했다. 인디라는 지역을 지배하면서 자신이 생각하는 국익에 비추어, 유엔과 #비동맹운동 으로 전 지구적 영향력을 행사하고자 하는 세속적인 사회주의 국가 인도를 만드는 데 전념했다. 아버지를 훌쩍 넘어서 세계 속 미국의 역할에 심각히 회의적이었고, 특히 미국이 파키스탄과 계속 동맹을 유지하고 파키스탄이 중국과 놀아나는 상황에서도 소련과 수월히 협력할 수 있다고 보았다. 인디라가 안보와 관련해 가장 우려하는 대상은 베이징이었고, 1960년대 말 중소 분쟁이 격화하자, 인디라 간디는 모스크바의 공산주의 이데올로기를 공유하지는 않았지만 소련과 인도가 전략적으로 얼마나 많은 공통점이 있는지 깨달았다.

617 1971년 7월 키신저가 베이징을 방문해 미국과 중국이 갑자기 화해하자, 전쟁의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인도에 특히 중요한 위험은 파키스탄이 미국, 중국과 긴밀한 관계를 맺는 것이었다 [1971년 인도와 방글라데시 전쟁](1971년 인도와 방글라데시 전쟁)

619 “인도-소련 우호 조약을 보고 베이징과 워싱턴 모두 깜짝 놀란 것 같다”라고 워싱턴 주재 인도대사관은 보고했다. “이 조약은 인도가 어느 정도 안심하게 해 주고, 소련이 아시아에 확실히 진출하며, 따라서 중-미 책동에 차질이 생김을 의미한다.”

626 인디라는 총리로 복귀하면서 냉전의 영향력이 여전히 인도에 작용한다고 느꼈다. 인디라는 “다른 나라가 우리의 정책을 전 지구적 전략에 끼워 맞추려고 끊임없이 시도한다”라고 개탄했다. …“우리는 다른 나라나 다른 체제를 모방해서는 안 되며, 우리의 목표는 그것들의 개량된 판본이 되는 것이 아니”라고 인디라는 경고했다.45 하지만 선임자들과 마찬가지로, 인디라 간디의 운신의 폭은 여전히 냉전의 제약을 받았다. 노력을 많이 기울였어도, 인도같이 큰 나라조차 전 지구적 충돌이 국가 정책을 좌우하는 상황을 완전히 단절할 수 없었다.

리처디 닉슨과 인디라 간디 1971년 400

17 소용돌이치는 중동

미국과 소련은 중동에서 각자 마음에 드는 정권을 찾고자 했는데, 그런 나라를 거의 발견하지 못했다. 미국은 이스라엘에서 민주주의를, 소련은 남예멘에서 마르크스레닌주의를 발견했지만, 두 나라 모두 이웃 나라를 적대하는 데 몰두한 작은 나라인 한 별로 도움이 되지 않았다.

629 1967년과 1973년의 전쟁처럼, 이따금 중동의 냉전은 그 목적을 위해 양극 세계를 활용하는 듯 보였다.

629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났을 때, 중동 대다수 지역은 외국 강대국이 지배했다. 영국군은 시리아와 레바논, 그리고 멀리 서쪽 마그레브 지역에서 프랑스의 영향력을 뒷받침했다. 영국은 팔레스타인을 직접 점령했고, 이집트, 이라크, 요르단, 페르시아만 국가의 정부를 장악했다. 아라비아반도 대부분은 보수적이고 독실한 사우디아라비아 왕정이 미국 석유 회사와 손을 잡고 지배했다. 이란 북부는 소련이, 남부는 영국이 점령했는데, 표면적인 이유는 풍부한 석유 자원이 독일의 수중에 들어가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다. 속속들이 식민주의가 지배하는 세계에서 아랍인과 페르시아인은 언제나 지배와 통제를 받는 지위를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631 원유 공급 외에도 중동과 냉전을 연결하는 주요 고리가 두 개 더 있었다. 하나는 중동 지역에서 벌어지는 세속적 정치와 종교적 정치의 충돌이었다. 중동의 모든 나라에서 세속주의자들-전부는 아니지만 주로 사회주의자-이 정부를 종교법에 따라 조직해야 한다고 믿는 이들과 대결했다. … 다른 연결 고리는 중동에 신생 유대 국가가 탄생한 것이었다. 미국과 소련 모두 초기에 이스라엘 국가를 지지했다. 이유는 서로 전혀 달랐기 때문이다.

632 미국이 볼 때 이스라엘은 유럽의 홀로코스트에서 살아남은 유대인을 위한 피난처였고, 적어도 일부 사람에게는 유대인이 조상 대대로 산 고국으로 돌아간다는 성경의 예언이 실현된 결과였다 이스라엘의 탄생은 서방의 근대를 중동에 들여오는 첫걸음이자, 지역에서 미국 대외정책의 잠재적 동맹국이 탄생하는 과정이었다. 소련이 볼 때 이스라엘은 적어도 처음에는 영국에 더 큰 골칫거리가 생기고, 일종의 좌파 시온주의가 승리한 것을 의미했다. 마음속 깊이 반유대주의자였던 스탈린조차 시간이 흐르면서 협력할 수 있다고 본 세력이었다. 또한 이스라엘은 유대인 문제에 스탈린식 해법이 될 수 있었다. 스탈린은 늙거나 병약하거나 정치적으로 탐탁지 않은 소련 유대인을 이스라엘로 보낸다는 구상을 싫어하지 않았다. 이미 민족 전체를 소련 내부에서 이동하게 했었다.

…훗날 미국과 소련 모두 유대 국가가 미국 및 소련과 중동 지역에서 어떤 의미를 가질지 심각히 오판한 것으로 드러났다. #이스라엘 #유대인 #소련 #미국 의 생각

632 중동에서 두 초강대국이 저지른 최대 실수는 아랍 민족주의의 활력과 진전을 오판한 것이다. 아랍 민족주의가 힘을 얻은 데는 아랍 지역에 유대 국가가 탄생한 것도 역할을 했다. 많은 아랍인이 볼 때, 이스라엘의 존재와 성공은 팔레스타인 아랍 난민의 거대한 수와 함께, 강력히 단합된 아랍 민족주의 운동이 필요하다고 끊임없이 상기하게 했다. 이런 운동만이 아랍 민족을 부활하고 독자적인 근대화로 달려갈 수 있게 해 줄 터였다.

638 [1958년 이라크 혁명과 냉전 구도](1958년 이라크 혁명과 냉전 구도)은 중동 냉전의 분수령이 되었다. 몇 주 만에 이라크가 미국의 안보 설계에서 중심을 차지하는 동맹국에서 미국의 주적인 나세르와 소련 편으로 변신한 것이다. “우리는 지금 행동하든지 아니면 중동에서 발을 빼야 합니다.”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보좌진에게 말했다. “손을 놓고 있다가 이 지역을 잃으면 중국에서 입은 손실보다 훨씬 나쁜 일이 될 겁니다. 중동의 전략적 입지와 자원이 그만큼 중요하니까요.”

639 모스크바에서 흐루쇼프는 중동 각국에서 일어나는 혁명을 만족스러우면서도 아주 고소한 일로 바라보았다. “바그다드 없는 바그다드조약기구를 상상할 수 있습니까? 이런 생각만 해도 덜레스는 신경쇠약에 빠질 겁니다.”8 모스크바의 소련 지도자는 동지들에게 흐뭇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643 1948년 이후 국가를 잃은 팔레스타인 사람 100만여 명이 아랍 세계 전역에서 난민으로 살았다. 모두 불안정한 삶을 살았다. 대다수 아랍 정권은 팔레스타인 사람에게 시민권을 주지 않았고, 팔레스타인 사람은 노동과 생활하는 데서 대개 착취를 당했다.

643 1967년 #중동전쟁 의 기원은 아랍이 팔레스타인의 대의를 재발견한 사실과 지역에서 냉전이 격화한 상황이 교차하는 지점에서 찾아야 한다. 아랍이 일사불란하게 행동하자 두려움을 느낀 이스라엘은 선제공격하기로 했다. #1967년 6월 5일 이스라엘 공군은 기습 공격으로 비행장에 있던 이집트 공군을 파괴했다.

645 아랍 지도자들이 실패한 것은 그들끼리, 그리고 소련과 제대로 조정하지 못한 탓이었다.

657 1980년 시리아와 이라크는 전 세계에서 소련의 지원을 가장 많이 받는 나라였다. 하지만 미국이 이스라엘과 이집트에 원조하는 것에 비하면 초라한 규모였다.

658 미국과 소련은 중동에서 각자 마음에 드는 정권을 찾고자 했는데, 그런 나라를 거의 발견하지 못했다. 미국은 이스라엘에서 민주주의를, 소련은 남예멘에서 마르크스레닌주의를 발견했지만, 두 나라 모두 이웃 나라를 적대하는 데 몰두한 작은 나라였기에 별로 도움이 되지 않았다.

658 제3세계의 다른 나라만큼 중동의 세속적 민족주의 정권도 대다수 사람이 바라는 생활 수준을 높이는 데 실패했다. 그 대신 국민은 점점 자신의 생활수준은 별로 안중에도 없고, 해외 강대국과 동맹하는 고압적이고 비민주적인 정부를 얻었다. 당연히 일부 젊은이는 다른 형태의 권위와 자신이 몰두할 수 있는 대의를 찾아 나섰다. 특히 1973년 전쟁 이후 무력감과 모욕감에 빠진 수많은 사람이 이슬람 학교와 사원으로 몰려갔다. 설교자는 아랍 정권이 신에게서 멀어졌다고 비난했다.

660 몇몇 핵심 이슬람주의 지도자는 냉전을 중동 각국 정권이 타락한 으뜸가는 징표로 삼았다. 미국을 여행하고(이때 미국식 생활방식에 혐오를 느꼈다) 주로 교도소에서 많은 글을 쓴 이집트인 사이드 쿠트브Sayyid Qutb는 오직 이슬람만이 세계의 병폐를 치유하는 해답을 내놓는다고 주장했다.

오늘날 인류는 머리 위에 매달려 있는 절멸의 위험만이 아니라 … 인류가 필수적 가치를 상실했기 때문에 벼랑 끝에 서 있다. … 서방의 민주주의가 너무도 무력해진 나머지 사회주의의 이름으로, 특히 경제체제에서 동구권의 체제를 빌려 오는 중이다. … 처음에 마르크스주의는 동방만이 아니라 서방에서도 신념에 바탕을 둔 하나의 생활방식으로서 많은 사람을 끌어당겼다. … [하지만] 이 이론은 인간의 본성과 욕구에 위배된다. 이 이데올로기는 타락한 사회나 어떤 종류의 독재가 장기간 이어진 결과로 겁에 질린 사회에서만 번성한다. 하지만 지금은 이런 상황에서도 사회주의의 유물론적 경제체제가 실패하고 있다.

660 오히려 이슬람주의자는 미국이 경멸하면서 제거되기를 원하는 좌파 민족주의 정권에 반대하기 때문에 유용할 수 있었다

661 (미-소련)아랍-이스라엘 분쟁을 해결하는 데는 관심이 없었다. 미국은 팔레스타인 지도자를 테러리스트 취급하면서 대화를 거부했다. 소련은 팔레스타인의 대의를 지지한다고 주장했지만, 팔레스타인 조직을 통제할 수 있는 한에서만 지지했다. 미국은 중동의 석유를 확보하는 데 집착했기 때문에, 이란이나 사우디아라비아 같은 독재 정권이 자연스레 미국의 동맹국이 되었다. 이런 폭발적 혼합 때문에 중동 지역은 냉전이 끝날 때까지, 그리고 그 후에도 여전히 언제든 위태로울 수밖에 없었다.

기사-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70년의 교착

18 데탕트를 무너뜨리다

베트남 전쟁이 끝나고, 포르투갈에서는 카네이션 혁명이 일어나고, 미국에서는 존재감 없었던 지미 카터가 금세 무대에서 내려오고 레이건이 등장합니다. 브레즈네프-닉슨이 쏘아 올린 데탕트가 갑작스럽게 사라지는 1970년대 후반부터 1980년대 초반의 혼란스러운 시기를 정리하고 있는 장입니다.

결국 데탕트를 무너뜨린 것은 미국의 국내 정치였다. 닉슨과 키신저는 대다수 미국인이 받아들이려는 수준을 넘어 소련과 함께 냉전을 관리하려고 했다.

665 《뉴욕타임스》 모스크바 통신원이 1973년에 보도한 것처럼, 브레즈네프는 “서방에서 음식과 음주, 사냥과 스포츠카 취향, 그리고 체중과 흡연 문제로 명성을 얻었다. 점점 늘어나는 서방 방문객은 그가 사교성 좋은 수다쟁이임을 깨닫고, 그의 따뜻한 미소에 좋은 인상을 받은 채 … 소련을 떠났다.” 그렇게 인생을 즐기는 사람에게 이데올로기는 별로 중요하지 않아 보였다.

667 #1976년 포드와 후보 지명 경쟁에 나선 로널드 레이건은 선거운동을 하면서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키신저와 포드 시절에 이 나라는 군사력에서 세계 2위가 되었는데, 이 세계에서 2위가 된다는 건 -치명적이지는 않더라도- 위험한 일입니다. … 우리 나라는 위험에 빠졌습니다. 평화는 약함이나 후퇴에서 오지 않습니다. 미국의 군사 지배권을 복구하는 데서 오는 겁니다. … 라트비아나 에스토니아, 리투아니아, 체코슬로바키아, 폴란드, 헝가리, 다른 어떤 나라 국민에게든 물어보십시오. 동독, 불가리아, 루마니아 국민에게 소련이 최고인 세계에서 사는 게 어떠냐고 물어보십시오. 저는 그런 세계에서 살고 싶지 않습니다. 여러분도 마찬가지일 거라고 생각합니다. … 저는 하느님께서 이 땅을 두 대양 사이에 자리하게 하고, 자유를 특히 사랑하며 자신이 태어난 나라를 떠날 용기를 지닌 이들이 발견하게 한 데는 성스러운 목적이 있다고 믿습니다. 우리 선조부터 오늘날의 이민자에 이르기까지, 우리는 지구 구석구석에서 여기로 왔고, 온갖 인종과 민족이 섞인 채로 세계에서 새로운 종자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미국인이며 운명과 만날 약속을 했습니다.3

671 (소련과 중국)베트남민족해방전선의 지원을 받은 북베트남군이 1975년 4월 사이공을 장악했다. 미국 인력과 최대한 많은 남베트남 공무원을 다급히 공중으로 끌어올리는 미국 헬리콥터에 관한 인상은 미국의 세계적인 지위에 아무 도움이 되지 않았다. … 사이공 탈출은 의심의 여지 없이 전후 시대에 미국 대외정책이 최악의 나락으로 떨어진 순간이었다. 공산당과 제3세계 혁명가는 환호했고, 전쟁에 반대한 미국과 유럽의 많은 젊은이도 패배를 축하했다. 하지만 베트남에서 목숨을 잃은 5만 명과 중증 장애를 입은 7만 5000명의 가족은 말할 것도 없고, 베트남에서 복무한 250만 미국인은 사이공 함락으로 미국의 정치 지도자에게 절대 사라지지 않는 쓰라린 환멸을 느꼈다.

672 남부에서 적어도 100만 명-전직 군인, 사업가, 교사-이 재교육 수용소로 보내졌다. 그 결과 남부 경제는 붕괴했다. 베트남인 200만 명이 해외로 도망쳤는데, 일부는 공포 때문이었지만 대부분은 경제적 궁핍 때문이었다.

672 1975년 이후 많은 베트남인이 불행한 시간을 겪었다면, 국경 너머 #캄보디아 는 상황이 10배는 더 나빴다. 이 나라에서 미국이 지지하는 정권이 무너진 뒤 극단적 형태의 마오쩌둥주의와 중국 문화대혁명에 고무된 광신적 공산주의자 단체가 권력을 잡았다. … 폴 포트의 캄푸치아공산당(프랑스식 별명인 크메르루주Khmer Rouge로 알려졌다)은 권력을 잡자마자 …베트남인과 중국인을 비롯해 캄보디아에 있는 모든 소수민족을 잔인하게 공격했다. 전체 인구의 약 3분의 1인 250만 명이 크메르루주의 정책으로 사망했다고 추산된다

673 이 모든 사태의 한가운데서 포르투갈 혁명이 일어났다. 이 혁명은 심지어 인도차이나 충돌의 종식보다 냉전에 더 큰 영향을 미쳤다. #포르투갈 은 1933년 이후 파시즘식의 독재 국가였다. 유럽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를 이끈 정권은 식민지에 집착했다. … 다른 유럽 국가가 어쩔 수 없이 탈식민화를 실행한 뒤에도 포르투갈은 아프리카의 속국(앙골라, 모잠비크, 기니비사우, 카보베르데, 상투메프린시페)만이 아니라 인도네시아 군도의 동티모르도 계속 유지하려고 했다. …

674 정권을 두 동강 낸 사건응 1973년 석유 위기…. #1974년 4월 25일 모두 해외 복무 경험이 있는 청년 장교 한 무리가 정권을 무너뜨리려는 행동에 나섰다. 훗날 포르투갈-카네이션혁명이라는 이름을 얻은 무혈 쿠데타에서 장교들은 정부를 끌어내리고 나라를 통치하기 위해 고위 장군으로 구국군정(National Salvation Junta)을 구성했다. 식민지는 독립을 약속받았다.

680 많은 미국인이 여러 면에서 소련을 두려워하고 불신하는 것은 자국 사회에서 벌어지는 충돌과 쇠퇴, 무기력에 대한 우려가 반영된 결과였다.

681 소련의 관점에서 보면, 1970년대 중반 전 세계의 상황은 실로 희망찬 듯했다. 중동에서 차질이 있기는 했지만, 브레즈네프가 보고받은 것처럼 이는 아랍 각국의 계급투쟁 때문이 아니라 제국주의의 배신 때문이었다. 시리아와 이라크는 소련과 한층 더 긴밀히 협력했다. 남예멘은 이제 인민공화국이었다. 아프리카의 모든 신생 독립국은 마르크스레닌주의자가 통치했다. 베트남은 공산당이 통치해 통일되었다. 인도는 이미 소련의 동맹국이었다. 예멘과 마주 보는 아프리카의 뿔 지역에 있는 소말리아는 혁명사회당이 권력을 잡고, 소련 해군에 베르베라항에 군함을 주둔하도록 요청했다. 국제 상황이 전반적으로 소련에 유리해 보였다. 소련의 젊은 공산당원이 볼 때, 이런 전 지구적 진전은 소련 내부에서 높아지는 사회주의 현실에 대한 환멸을 보상해 주었다.

682 소말리아는 소말리인이 주로 거주하는 에티오피아 남부의 오가덴 지역을 자국 영토로 통합하고자 했고, 에티오피아 혁명으로 생겨난 혼돈으로 기회가 생길 것이라고 생각했다.

684 아프리카의 뿔에서 발생한 위기는 카터 행정부 내부의 충돌을 드러내는 계기가 되었다.

685 중국 지도자는 목격한 것처럼 소련의 힘이 전 지구적 차원에서 대규모로 강화되는 것을 두려워했다. 그는 특히 소련-베트남 관계가 점점 가까워지는 것을 주목했는데, 이를 중국을 에워싸려는 소련의 종합 계획 가운데 하나라고 의심했다. …베트남은 잔인한 (캄보디아의)마오쩌둥주의 독재를 제거했다는 이유로 응징을 받아야 했다

686 미국은 결국 그다음 달에 중국의 공격을 공개 규탄했지만, 카터는 비밀리에 중국과 기밀정보를 공유하면서, 소련이 북부에서 위협을 가하면 미국이 중국을 지원하겠다고 약속했다. … 중국의 침략은 베이징에 재앙이 되었다. 한 달간의 전쟁으로 중국은 베트남전쟁에서 발생한 전체 미군 전사자의 절반 가까운 병력을 잃었다.

689 이란 이슬람 혁명은 냉전 질서와 단절하려는 의도적인 시도였다.

695 레이건의 거친 언사에 모스크바의 나이가 든 지도부는 정말로 겁에 질렸다. 처음으로 세계가 초강대국 간 전면전을 향해 치닫는다고 믿은 것이다.

695 1982~1983년에 레이건이 아프간 이슬람주의 세력인 무자헤딘mujahedin(이슬람 전사)과 파키스탄의 지지 세력에 지원을 강화하자, 소련이 직면한 문제는 더욱 확대되었다.

697 미국과 소련의 지도자가 긴장완화를 서로 달리 해석한 것도 분명했다. 소련은 두 초강대국이 진정으로 대등한 위치에 섰다고 믿었다. 반면 미국의 대다수 지도자는 미국이 이끄는 세계 체계에 소련이 협조하기로 동의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698 결국 데탕트를 무너뜨린 것은 미국의 국내 정치였다.

19 유럽의 불길한 징조

이번 장은 1970년대 후반부터 1980년대 초반까지 유럽을 중심으로 냉전의 급격한 변화상을 짚고 있습니다. 미국과 소련 사이에서 부유하면서 유럽 통합의 길로 가는 서유럽, 봉합했던 냉전의 상처에서 고름이 나오기 시작한 동유럽, 그리고 한국 독자 처지에서는 스쳐 지나가기에는 가슴 아픈 사고의 기억까지.

유럽 통합 과정의 가속화가 낳은 또 다른 결과는 지역 정체성의 확장이었다. 점점 더 많은 유럽인이 자국에만 초점을 맞추는 대신, 국경을 초월하거나 국경에서 두드러지는 지역의 성원으로 일체감을 가졌다.

709 레오니트 브레즈네프는 18년간 소련 지도자로 살다 1982년 11월 사망했다. 많은 이가 애도하지는 않았다. 최측근 인사조차 이미 소련이 그의 통치 막바지에 정체에 빠졌다고 인식했다. 브레즈네프는 의심의 여지 없이 소련의 국제 위상을 향상하고, 소련을 군사 초강대국으로 끌어 올렸다. 전임자들은 꿈에서나 기대한 수준이었다. 하지만 소련의 대외 팽창은 경제적 대가가 컸고, 이 과정에서 많은 공산당원은 국내 문제의 해결도 희생되었다고 느꼈다.

710 #1983년 9월 소련 공군은 항로를 이탈해 자국 영공에 들어온 한국 민간 여객기를 격추했다. 미국 정찰기로 오인한 것이다. 탑승자 269명이 모두 사망했는데, 그중 61명이 미국인이고 하원의원도 한 명 있었다. … 미국의 냉전 강경파는 신이 났다. 레이건의 유엔 주재 대사인 신보수주의자 진 커크패트릭은 미국 정보기관이 녹음한 소련 조종사와 방공 사령부 사이에 오간 교신을 유엔 안보리에서 틀었다. 레이건이 전국 방송에 나와 이를 “한국 여객기 학살 사건”이라고 불렀다. “비무장 한국 여객기에 탑승한 269명의 무고한 남녀를 소련이 공격했습니다. 이 반인도적 범죄는 미국이나 전 세계나 결코 잊어서는 안 됩니다.”

711 소련 지도자를 집어삼킨 공포는 단지 그들이 서방에서 받은 압박의 소산만은 아니었다. 그들이 대표하는 경제・사회 체제가 고난에 빠진 듯한 상황 때문이기도 했다. 경제성장이 점점 느려졌다. … 강력한 중앙집중적 계획이 경제의 발목을 잡았다. 국방비가 지나치게 급증했고, 소련은 지원하는 제3세계 국가와 운동이 너무 많았다. 이들은 모스크바의 후한 지원에 의지하는 데 익숙해졌다. 하지만 문제가 산적한 상태인데도 해답을 내놓는 이는 거의 없었다. 그리고 이런 문제를 소리 높여 제기할 수 없었다. 소련은 독재 국가였고, 승진을 위한 수단은 충성이었다.

722 남유럽을 아우르는 유럽공동체의 확대는 냉전에 대단히 의미심장한 사건이었다. 이는 동유럽이 유럽의 공동체에 참여할 수 있다는 약속과 같았다. …이는 양대 세력권으로 나뉜 유럽의 대안이 전쟁이나 혼란이 아니라, 각국이 하나로 뭉쳐 초강대국의 통제 없이 미래를 결정하는 세계일 수 있다는 신호였다. 공산당이 지배하는 데 최악의 적은 나토 군대의 기동훈련이 아니라, 유럽을 관통하는 장벽을 제거하면 풍요를 누릴 수 있다는 약속이었다.

20 고르바초프

국제질서 재편을 위한 고르바초프의 계획은 유럽을 넘어 확대되었다. 그가 볼 때, 냉전을 끝내는 것은 냉전이 장악하기 전인 19세기 말에 존재한 국가 이익 개념으로 돌아가는 것을 넘어선다는 의미였다

1980년대 …소련은 동유럽의 동맹국보다 심하게 세계 경제체계에서 고립되었다.

740 1917년 혁명 전 러시아는 곡물 수출국이었다. 1985년에 이르면 해외 수입에 전적으로 의존해 그해에만 4500만 톤 넘게 들여왔다. 또한 국민을 먹여 살리려고 90만 톤의 육류를 수입했다.1 실질 개혁은 마련되지 않았다. 노인만 모인 정치국은 경제에서 어떤 유의미한 실험도 거부했다. 중국은 말할 것도 없고 동유럽처럼 제한된 개혁조차 고려되지 않았다.

742 아프간 이슬람주의자가 다른 저항 집단을 압도한 핵심 이유는 파키스탄과 미국에서 지원을 받았기 때문이다. 레이건 행정부의 계산은 간단했다. 이슬람주의 단체가 조직력이 가장 강하고 저항에서 가장 효과적으로 보인 것이다. 그들은 부패도 덜하고, 아프가니스탄 전쟁에서 흔히 요구되는 수많은 지방 차원의 타협에 관여할 가능성도 적었다. 무엇보다 그들은 소련인을 더 많이 죽였다.

743 1985년 이 물자 보급은 주요 작전이 되었다. 레이건은 아프가니스탄을 비롯해 아시아와 아프리카에서 소련의 지원을 받는 정권을 때리면, 소련이 해외에 개입하는 비용이 커질 것이라고 판단했다.

755 . 1986년 말 고르바초프와 그 보좌진은 이른바 페레스트로이카Perestroika(개혁)와 글라스노스트Glasnost(정보 공개)라는 새로운 구상을 만들었다. 1987년 1월 중앙위원회 전체회의에서 서기장은 악화 일로를 걷는 소련 경제 문제를 극복하려면 근본적으로 개혁해야 한다고 선언했다. 고르바초프에 따르면, 페레스트로이카는 “침체를 극복하고, 지지부진한 구조를 무너뜨리며, 소련 사회의 사회적・경제적 진보를 촉진하는 데 의지할 수 있는 효율적인 기구를 창건하기 위한 단호한 시도”였다. “우리 전략의 주요 목표는 과학・기술 혁명의 업적을 계획에 기반을 둔 경제와 결합하고, 사회주의의 모든 잠재력을 작동하게 하는 것입니다.”

768 집권 초기에 미하일 고르바초프는 소련 안팎의 정치 지도를 다시 그리고자 했다. 그가 볼 때, 냉전은 적어도 전 지구적 대결과 대화의 부재라는 고전적 형태로는 이제 의미를 잃은 상태였다. 그의 출발점은 마르크스레닌주 의, 아니 마르크스주의와 레닌주의였다.

768 고르바초프는 소련이 소비에트 사회주의를 유지하고 발전하게 하는 데 서방의 관행을 일부 채택해야 함을 깨달았다. 배워서 적용하는 것은 약함의 징표가 아니라 힘의 원천이라는 게 그의 판단이었다. 그의 지도자 자질과 공산당의 권위만 있으면 페레스트로이카를 성공으로 이끌 것이었다.

769 국제 정책에서 고르바초프는 냉전을 극복하고 소련을 서유럽, 그리고 특히 유럽 사회민주주의에 가깝게 이동하게 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21 전 지구적 전환

21장에서는 1980년대 유럽을 제외한 다른 곳에서 무슨 변화가 있었는지 중점적으로 살피고 있어요. 전쟁 후 베트남, 남아메리카의 군사 독재 정권, 한국과 타이완(대만), 그리고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전쟁까지. 이번 장의 끝에 오사마 빈 라덴이 특별 출연합니다. (원래 오사마 빈 라덴이 소련을 견제하고자 미국이 지원하는 이슬람 근본주의 세력이었잖아요. 그 첫 무대가 1980년대 아프가니스탄이었고;)

냉전이 끝나는 과정은 그 기원만큼이나 다층적이고 복잡했다. 남아프리카나 동남아시아에서 드러난 것처럼, 전 지구적 충돌의 종언은 좋은 일을 위한 엄청난 기회를 낳았다.

773 냉전이 종식될 무렵이면 세계는 이미 변모해 전 지구적인 이념 대립은 수많은 사람에게 거의 의미를 잃은 한편, 다른-종족・종교・민족・경제- 충돌이 더욱 중요해졌다.

세계 뉴스 방송과 위성 연결을 비롯해 영화와 텔레비전을 통해 놀라울 정도로 정보가 확산되자, 이제껏 거의 본 적이 없는 풍요롭고 다른 삶이 사람들의 눈앞에 펼쳐졌다.

776 세계 문제에서 미국의 중심성은 거의 훼손되지 않았다. 전 세계에 퍼진 사고와 관행, 기술과 생산물이 대부분 미국이 기원이었던 까닭에, 미국은 그 어느 때보다 더 중요해 보였다. 그리고 레이건 행정부가 주로 군사 목적으로 의도한 대규모 적자 지출은 미국에서 국내 소비와 해외 투자를 동시에 자극했다. 이는 물론 군사력도 세계를 압도하는 최강국이라는 지위를 확대해 주었다.

776 사회주의 국가를 잠식하고 자본주의가 지속적으로 팽창하는 데 동아시아를 중심지로 만든 동일한 세계적 상황 전개가 레이건의 팽창을 가능케 했다. 그리고 이전의 적을 포함한 많은 이가 마케팅부터 기업 경영, 금융 (탈)규제에 이르기까지 대다수 사안에서 미국의 경제 관행을 재평가해야 한다고 확신하게 만든 것도 바로 이런 팽창이었다. 따라서 냉전이 끝난 시점에 일어난 세계적 전환은 과거 미국 지도자들이 도저히 가능하다고 믿기 어려운 방식으로 미국에 특권을 부여하는 듯 보였다.

777 중국 지도자가 된 덩샤오핑은 마오쩌둥이 아무리 상상해도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미국과 협력하는 데 심혈을 기울였다. 덩샤오핑은 무엇보다도 경제를 목표로 했다. 그는 기술의 후진성 때문에 중국이 약해지고 소련의 침공에 언제든 희생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는 또한 중국 인민의 생활수준이 향상되기를 원했다. 1979년 처음으로 나선 미국 방문길에 비행기가 이륙하는 순간, 덩샤오핑은 보좌진에게 20세기의 핵심 교훈으로 생각하는 바를 알려 주었다. “미국과 협력하는 이는 누구나 이득을 얻지만, 미국에 반기를 들려고 하는 이는 죄다 실패할 겁니다.”

778 처음에 덩샤오핑과 보좌진은 중국을 어떻게 바꿀지 뚜렷한 생각이 거의 없었다. 그들이 아는 것은 과거가 재앙이었다는 사실이다.

779 덩샤오핑의 개혁 계획은 세 가지 목표를 추구했다. 현대 기술을 확보하고, 생산을 증대하며, 공산당의 절대 권력을 유지하는 것이었다.

780 무역과 서비스업에서 소규모 사기업을 허용한 것 이외에 덩샤오핑이 취한 첫 번째 조치는 집단농장을 해체한 것이다. 인민공사를 해산하고 가구가 책임지는 체계를 시행했다.

780 소련이 중국에 치명적인 위협이 된다는 마오쩌둥의 인식을 고스란히 물려받은 덩샤오핑은 미국과 협력하면 경제 기회를 얻는 것만이 아니라 보호도 받을 수 있다고 믿었다. 그리고 미국은 기꺼이 도움을 베풀었다.

783 일본이 경제성장에 집중할 수 있었던 주된 이유는 물론 미국이 군사 보호를 했을 뿐만 아니라, 국제 시장, 무엇보다도 미국 시장에 쉽게 접근할 수 있게 해 주었기 때문이다.

784 냉전의 가장 기묘한 뒤틀림 가운데 한 사례가 #캄보디아 다. 대량 학살을 자행하다 몰락한 뒤 베트남이 지지하는 캄보디아 정부와 싸운 크메르루주 정권의 잔당은 미국과 중국의 지원을 받아 1991년까지 살아남았다. 소련과 동맹을 이룬 베트남에 반격을 가하는 것이 이 악명 높은 동반 관계의 주요 목적이었지만, 레이건이 중국에 인도차이나에서 소련의 영향력을 억제하는 데 진지하게 노력한다고 말하기 위한 방법이기도 했다. 그 결과 캄보디아인은 더 비참한 상황에 빠졌고, 베트남과 타이는 선전포고도 없이 국경 전쟁을 벌였다. 캄보디아 반정부 집단 대부분이 활동하는 지역이었다.

798 냉전이 막을 내리던 때 세계 여러 지역이 독재에서 벗어나 책임감이 더 강한 정부로 옮겨 간 것은 권리와 규범에 관한 국제 논쟁이 활발해진 데서 많은 도움을 받았다.

802 1980년대 초까지 수니파와 시아파 모두 이슬람에 대한 정치적 해석은 주로 냉전의 정치적 우파와 동일시되었다. 예를 들어 수니파 무슬림형제단은 공산주의나 사회주의, 바트당 등 중동의 모든 좌파와 싸운 극단적인 보수 집단이었다. 하지만 1980년대에 이슬람주의자는 점차 사회주의와 자본주의 둘 다에, 그리고 소련과 미국 둘 다에 등을 돌렸다. 이집트와 사우디아라비아의 극단주의자가 이런 전환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805 냉전의 이분법을 앞지른 몇몇 이데올로기, 그중에서도 특히 종교적 광신주의나 민족주의의 자기강박은 과거 자본주의와 사회주의가 벌인 이데올로기 투쟁만큼 거기에 휘말린 사람에게 위험했다.

22 유럽의 현실

유럽 냉전의 종언은 무엇보다도 독일 문제를 끝낼 수 있는 기회를 의미했다. 냉전은 대다수 국민의 바람을 거스르며 독일의 분단 상태가 유지되게 했다.

809 1989년 유럽의 냉전이 끝난 것은 동유럽 사람이 반란을 일으키고 고르바초프가 공산주의 정권을 구하려는 시도를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1989년 고르바초프는 냉전이 끝났다고 주장했다. 그는 점차 소련에서 어떻게 개혁을 심화할 것인지에 관심을 쏟았다. 그가 주로 몰두한 문제는 정치 변화였다. 고르바초프는 소련을 민주 연방국가로 만들고, 여전히 자신이 이끄는 공산당을 이 과정으로 끌어당기고자 했다. 하지만 그의 고귀한 목표는 경제적 곤경과 온갖 민족주의, 경쟁하는 관료제 등에 순식간에 추월당했다. 고르바초프가 계속 버티려고 하고 다른 곳에서 실질적인 지원이 전혀 없자, 소비에트 국가는 곧 심각한 상황에 빠졌다. 1991년 국가의 존재 자체가 위협받는 듯 보였다. 소련 국민이나 세계가 놀랄 만한 전환이었는데, 이 모든 변화가 10년이 채 되지 않은 시간에 일어났다.

밤 11시 무렵 자신들의 안전이 걱정된 동독 장교가 결국 군중을 막는 것을 포기하고 차단기를 올렸다.18 수많은 사람이 아무 서류도 없이 무리를 지어 동에서 서로 넘어갔다. 그날 저녁 사람들은 서베를린의 주요 대로를 활보하며 놀란 표정의 서독 동포를 끌어안았다. “이 일은 정말 잊지 못할 겁니다.” 동베를린 시민 한 명이 그때 기억을 떠올리며 말했다. “처음 딸기 요거트를 먹었을 때의 맛이었죠! 너무 맛있어서 일주일 동안 그것만 먹었거든요!”

830 프라하에서 연설하면서 둡체크는 변화와 비폭력을 호소했다. “한때 빛이 있었다면 왜 다시 어둠이 존재해야 합니까?” 둡체크가 군중에게 말했다.

841 동유럽에서 공산주의가 붕괴된 뒤 벌어진 여러 사태의 불운한 희생양이라는 고르바초프에 대한 인식은 자세히 조사해 보면 허구임이 드러난다. 고르바초프는 동유럽 나라의 민주화와 철의 장막 제거를 실제로 원했다. 또한 서쪽에서 벌어지는 변화와 비슷한 노선을 따라 소련을 민주화하는 것도 원했다. 1990년 여름 그는 제28차 공산당 전당대회에서 연설하면서 자신의 견해를 분명히 밝혔다.

스탈린식 사회주의 대신 우리는 자유로운 사람의 시민사회로 다가가고 있습니다. 바야흐로 정치 체제가 근본적으로 바뀌며, 자유선거를 치르는 진정한 민주주의, 다수 정당의 존재와 인권 등이 확립되고 진정한 인민 권력이 부활하는 중입니다. … 초집중화된 국가를 자결권과 인민의 자발적 단합에 근거한 진정한 연방국가로 바꾸는 과정이 시작됐습니다. 이데올로기적 독재 대신 우리는 사상의 자유와 글라스노스트, 사회에서 정보에 대한 개방으로 다가가고 있습니다.

843 서독은 유럽의 주요 경제 강국일 뿐만 아니라 동독은 여전히 소련의 실패한 유럽 정책을 끊임없이 상기하게 하는 존재였다.

851 미국 대통령에게 이제 소련의 해체가 소련의 힘보다 더 위험해 보였다. 유라시아 전역에서 거대한 규모로 내전과 국가 간 전쟁이 발발할 위험이 있었기 때문이다.

857 마지막 순간에 잠시 주저한 끝에 고르바초프는 소련 대통령직을 사임하기로 했다. 12월 25일 저녁 텔레비전으로 중계된 대국민 사임 연설에서 대통령은 자신이 “연방 국가의 유지와 이 나라의 보전”을 위해 분투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상황이 다른 경로로 진행됐습니다. 이 나라를 해체하고 국가를 분열하는 정책이 팽배했는데, 저는 여기에 동의할 수 없었습니다. … 운명은 너무도 가혹해서 제가 이 국가의 방향타를 잡은 바로 그 순간 이미 뭔가 잘못됐다는 게 분명했습니다. … 국가는 아무 진전을 이루지 못했고, 우리는 전과 같은 방식으로 살 수 없었습니다. 모든 걸 근본적으로 바꿔야 했습니다. … 역사적으로 중요한 노력을 수행했습니다. 오래전에 이 나라가 번영하고 잘사는 나라가 되는 것을 가로막은 전체주의 체제를 제거했습니다. … 저는 조만간, 언젠가는 우리 공동의 노력이 결실을 맺고 우리의 나라들이 번영하는 민주사회에서 살리라고 낙관합니다. 모든 국민의 행운을 빕니다.

에필로그

862 클린턴이 번영을 강조했다면 부시는 지배를 강조했다. 그 사이에 물론 911테러사건이 있었다.

864 냉전 이후 미국이 방향성을 잃은 것이 본질적이거나 운명적인 결과가 아니라, 상상력 있는 지도력의 부재가 낳은 결과임에 주목한다.

866 미국은 중국과 인도의 부상, 서양에서 동양으로 경제적 힘의 이동, 기후변화나 전염병 등과 관련한 체계적 시험 등 미래의 커다란 도전에 대처할 준비를 충분히 하지 못했다.

869 1990년대 러시아가 유럽연합에, 그리고 가능하면 나토에도 어떤 형태로든 가입할 기회가 적어도 열려 있었다면 서방과 러시아 모두 오늘날 한층 더 안전했을 것이다.

러시아는 군사적・경제적 통합 과정에서 배제되었고, 이 통합은 결국 러시아 국경까지 줄곧 확대되었다. 그리하여 러시아는 따돌림을 당하는 나라라는 인식이 생겼고, 유럽의 문간에서 뚱하게 골이 났다. 결국 현 대통령 블라디미르 푸틴 같은 러시아의 맹목적 애국주의자와 편협한 강경파가 신임을 얻었다.

873 불가리아의 오랜 공산당 지도자 토도르 집코프는 솔직히 인정했다.

“만약 그때로 돌아가야 한다면, 나는 공산주의자가 아닐 것이며, 레닌이 지금 살아 있다면 그도 똑같이 말할 것이다. … 이제 나는 우리가 그릇된 토대에서, 잘못된 전제에서 출발했음을 인정해야 한다. 사회주의의 토대는 틀렸다. 사회주의 이념은 수태된 순간부터 사산되었다고 본다.”3 승리한 쪽도 그 대가와 위험이 때로 너무 컸던 것 같다. 인명 손실과 비용, 핵전쟁의 위협으로 볼 때 말이다.

874 이 책에서 나는 자본주의와 사회주의가 벌인 냉전이 20세기의 많은 일에 영향을 미치긴 했으나, 모든 것을 결정하지는 않았다고 주장했다. 양차 대전, 대공황, 탈식민화, 서양에서 동양으로 부와 권력의 이동 등은 아마 냉전이 없었더라도 일어났을 것이다(하지만 그 형태는 분명 달랐으리라).

20세기에 불의와 억압이 더욱 두드러지게 보이면서 사람들-특히 젊은 사람-은 이런 병폐를 치유해야 한다고 느꼈다. 냉전의 두 이데올로기는 복잡한 문제에 즉각적인 해법을 제공했다.

해제

옥창준 《냉전》은 냉전을 1945~1991년이 아니라, 1890년대부터 1990년대까지 100년의 역사로 정리한다. 즉 ‘장기 100년사’의 관점을 도입한 것이다. 냉전은 “전 지구적 자본주의가 첫 번째 위기에 빠지고, 유럽 노동운동이 급진화하고, 미국과 러시아가 범대륙적 제국으로 확장한 1890년대에 시작되어 베를린 장벽이 붕괴하고, 소련이 몰락하고, 마침내 미국이 진정한 글로벌 패권국으로 부상한 1990년대에 끝이 난다.”

베스타는 냉전의 종식이 자본주의의 승리이지, 미국과 자유 진영의 승리가 아니라는 점을 명확히 한다.

6.읽으면서 떠오른 생각들

  • 1장

    • 냉전은 미국과 소련이 점점 힘이 강해지면서 국제적으로도 사명감, 형님 노릇을 해야하는 입장이 되었다
    • 미국은 자본주의 대표, 소련은 자본주의 비판자의 대표가 되었다.
    • 미국이 에스파냐 전쟁에서 이기고, 에스파냐의 속국들을 넘겨 받았다.
      • 그중 필리핀은 미국실 발전의 실험장이 되었다.
    • 루즈벨트의 ‘곤봉외교’ - 힘으로 다스린다
      • 후임 태프트 ‘달러외교’ - 돈으로 다스린다
    • 러시아
      • 차르 니콜라이 2세 1894 ~ 1917년
      • 마르크스주의적 ‘사회민주노동당’ 창당되고 -> 차르 정권이런던으로 지도부 망명 시킴 -> 2개 당으로 쪼개짐 -> ‘다수파 - 볼셰비키’ -> ‘소수파 멘세비키’ -> 다수파 볼세비키 리더는 레닌이 된다
    • 1차세계대전 (이전 100년동안 유럽에 전쟁은 없었다?)
      • 대전쟁의 세대는 냉전를 만들어 냈다.
      • 미국은 자본주의의 대표
      • 소련 등장 (볼셰비키 레닌) , 이탈리아 파시스트,독일 나치
    • 전쟁으로
      • 서민들은 엘리트층에 대한 불만이 고조됨 53
    • 1차대전후
      • 그리고 스패인 내전으로 프랑코 파 승리후
      • 히틀러는 자신감을 가지고 유럽을 차지하기 시작한다
      • 영국,프랑스는 간섭할 여력이 없었고, 미국은 유럽에 관여하지 않으려 했다.
    • 미국의 대공항 -> 영국과 미국, 프랑스는 자유주의 자본주의의 붕괴를 방지하려 사회복지 를 도입하기 시작한다.
    • 독소 협정이 있었는데
      • 스탈린은 독일 히틀러를 신뢰했는데,,,히틀러는 주저없이 소련을 공격했구나
  • 2장

    • [폭격기의 달이 뜨면](폭격기의 달이 뜨면)
    • [존 메이너드 케인스](존 메이너드 케인스)
    • 스탈린-히틀러 불가침 조약 맺음
      • 독일은 동부를 안심하고 발트3국, 폴란드 동부 공격
    • 스탈린은 히틀러 신뢰
      • 히틀러는 1941년 6월 소련 기습 공격
      • 일본 1941년 12월 미국 진주만 기습 공격
    • 미국과 영국은 스탈린의 공산주의가 맘에 안들었지만 독일을 제압하기 위해 인정하게 됨
    • 독일은 러시아 침공에 애를 먹는다,
      • 보급경로가 길어지고, 날씨는 영하40도에, 인종차별로 유대인등을 병사로 고용하지 못했다.
    • 미국,영국이 스탈린 편에서 연합국 이뤘지만,
      • 스탈린은 언제든 그들과 결별될 것을 알고 있었다
    • 독일의 섯부른 소련공격, 일본의 힘을 빗대어 미국에 선전포고등 경솔
    • 미국의 보급품이 소련에서 식량과 전차 무기등 중요한 버팀목이 되었다.
      • 이 물자들이 이후에 미국과 싸우는 도구가 된것인가
      • 역사의 아이러니
    • 골수 반공산주의자 처칠이 전쟁때문에 스탈린을 만다는 사건 -> 중대한 사건으로 기억된다.
    • 전쟁이 끝나가는데
      • 영국과 미국 연합국은 스탈린이 민주주의 , 최소한 선거를 시행 할 것으로 예상 -> 마르크스주의는 그런 체계가 아니다.
    • 러시아의 붉은 군대가 나치에게 승리하자, 공산주의에 대한 호감이 유럽에 퍼저 나갔다.
    • 처칠은 소련을 의심했고, 미국-투루먼-은 스탈린과의 이전 협정을 준수하려 한다
    • 나치에 대항하려 영국과 미국은 공산주의에 반대함에도 스탈린과 손잡는다. 나치가 항복하고 영국과 미국의 지도자가 바뀌고 이제는 공산주의와 대립하게 된다. 107
  • 3장

    • 2차대전이 끝나고 유럽은 미국과 소련만 바라보는 상태에 빠졌다
      • 반파시즘, 엘리트 책임론이 불거지고, 새로운 시스템을 원하게 된다.
      • 나치를 몰아낸 소련의 사회주의 인기가 높아졌다
    • 마셜플랜,
      • 황폐한 유럽에 미국의 달러를 공급하기로 한다
      • 소련은 여기에 위기감을 느낀다.
  • 4장

    • 미국의 핵폭탄,원자폭탄 계속 많이 생산하고, 소련도 첩자와 물리학자들 동원해 만들기 시작
    • 독일의 문제,
      • 영국,프랑스,미국,소련은 독일을 분할해서 차지하려하고, 전쟁 배상금도 가져가려 했다
      • 하지만 독일은 난파선이었다.
      • 가져갈 돈보더 더 많은 돈을 투입해야 재건가능해서,…
      • 미국은 독일에 돈을 투자한다.
      • 미국과 영국의 점령지를 경제적 문제로 병합 하였는데, 이는 서독의 근본 토대가 되었다 162
      • 미국은 독일 서부 지역을 마셜플랜-자금지원-에 포함시킨다.
        • 독일의 경제를 일으켜서 배상금을 받고, 소련을 견재할 국가로 유지되어야 했다.
      • 이탈리아에서 공산당은 선거에서 패배
        • 바티칸과 미국의 원조 받은 기독당등이 승리
        • 소련의 지원을 받은 공산당은 패배
      • 프랑스는 아직도 대국인것으로 착가하고
        • 독일에 패배한 굴욕
        • 미국 원조를 받는다는 굴욕을 극복하지 못했다
        • 프랑스 공산당은 어째튼 소련의 지원을 거의 못받고 패배한다. 171
  • 5장

    • 아시아에서는 유럽의 손빼기가 시작되었고
      • 그와 함께 각국의 민족주의가 일어나기 시작 -> 새로운 정치를 원했을 테고 -> 일정한 형태의 사회주의가 지향되고 있었다. 192
    • 일본이 무너지자 해외에 있던 동포들이 귀국했다
      • 왜?? 귀국한걸까? 그 나라에서 살수 없었을 것이다. 패전국
      • 일본은 폐허에 귀국인들의 식량까지 해결해야 하는 상태가 된다.
    • 미국, 일본을 동아시아의 가장 안전한 우국을 만들어 군사기지를 주둔 시키려했고, 공산주의 확산을 막으려 했다.
    • 전후 아시아 곳곳이 독립을 시도 했고, 발전 모델로 소련을 바라 보았다.
      • 실제로 소련은 전후 초기 자본주의보다 더 잘 굴러가고 있었다.
  • 6장

    • 조선은 소련의 러시아 혁명을 부러워했지만
      • 오합지졸이였다. 조선공산당. 결국소련은 조선공산당을 해산 시켜버린다.
    • 이승만은 조선 민족주의를 끊임없이 미국에 설득하려고 노력했다.
    • 일보과 스탈린의 2중 탄압을 받은 조선공산당의 일부는 중국공산당에 가입했다
      • 그중 한명이 김일성이고
      • 독일이 소련을 침공하자 김일성은 붉은 군대에 입대한다.
      • 전투에서 영웅적 활약으로 훈장을 달게 된다.
    • 김일성과, 이승만은 남과 북에서 어떠한 중재도 본인들의 요구 맞을때 까지 동의하지 않는다.
      • 그렇게 민족의 38선은 굳어졌다.
    • 한반도 전쟁, 많은 국가들이 전쟁이 이유에 대해 불만을 품었다
      • 왜 이전쟁을 하는것인가
      • 한반도 전체 되는 폐허가 되었다
      • 2번의 큰 전투로 끝나고 휴전선 부근에서 지지부진 대치 상황
      • 갑자기 스탈린이 죽는다.
      • 스탈린의 죽음으로 휴전이 급진전 된다.
  • 7장

    • 스탈린이 죽고 동유럽은 혼돈에 빠진다
    • 사회주의의 단점들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 노동자의 삶은 나아지지 않는다.
    • 스탈린의 후계자로 흐르쇼프가 이끌게 되는데
      • 그는 스탈린의 단점을 공개 비판하기도 한다
      • 동독에서 반사회주의 폭동이 일어나고
      • 폴란드 / 헝가리 에서 반사회주의 폭동 이러난다.
  • 8장

    • 미국의 도움과 유럽의 경제적 구조 통합 노력들
    • 서독일의 재건을 위한 미국의 지원
    • 미국은 공산주의와 대결하는 것이 , 냉전을 통해 인류의 영혼을 지키는 사움이라는 정책을 지속한다.
    • 냉전의 상태가 확대 될수록 미국민의 경제는 호황이 되었다. 325
  • 9장

    • 소련은 중국이 60여년간의 전쟁으로 피폐해진 국가재건에 교육,자본,군대,사회기반시설등 원조를 전폭적으로 지원했다.
    • 마오쩌둥은 소련 흐루쇼프 주석의 사회주의 노선이 맘에 들지 않았다
      • 소련을 비난하고 , 우편향적으로 변절했다고 비난을 버붓는다
      • 중국을 방문한 호루쇼프에게 중국은 모욕을 노골적으로 준다. 353
      • 1960년 호루쇼프는 인내심 바닥, 중국과 손절.
      • 1969년에는 우수리강에서 전투를 하고 -소련,중국- 소련이 핵무기쓸가 중국은 두려워한다
  • 10장

    • 2차대전이 끝나고 유럽의 제1국들은 식민지 나라를 다스릴 힘이 없어졌다
    • 미국은 그런 유럽이 공산주의에 넘어갈것, 공산주의를 막을 힘이 없어 질까 두려워했다.
    • 이집트에서 영국과 프랑스 이스라엘이 수에즈 운하를 점령한 이집트를 공격한다 -> 미국의 개입으로 3개 국가는 철수한다
      • 남의 나라 땅을 차지하라려는 1국들의 만행
    • 공산주의와 반제국주의가 긴밀하다는 인식이 퍼지기 시작한다
      • 1국의 제국주의를 반대하기 위해 식민지 국가들은 공산주의에 관심을 갖게 되고
      • 공산주의가 반제국주의의 대안처럼 보이게 된다
      • 이에 미국은 흥분한다.
  • 11장

    • 소련은 쿠바에 미사일 기지를 건설하고
    • 미국은 긴장한다.
    • 미국이 공격하면 지구적 핵전쟁의 시작이다
    • 소련 흐루쇼프는 쿠바에서 미사일을 철수한다
      • 지구는 그렇게 가장 긴박한 핵전쟁 위기를 또 넘어간다?
      • 흐루쇼프는 잿더미가 된 세계의 공산주의를 원한건 아니기에 철수 했을 거라는 저자의 생각
  • 12장

    • 북베트남
      • 소련과중국의 영향 - 호치민 - 소련을 모델로 통일된 공산국가 건설 목표
    • 남베트남
      • 이전 황제 바오다이 - 프랑스와 일본에 협력한 전력으로 비인기
      • 응오딘지엠 - 미국 유학파 - 남베트남 대통령 취임 449
    • 케네디가 와 응오단지엠이 암살 당한다
      • 미국은 베트남전쟁에 강함을 보여주기 위해 본격 참전한다.
    • 소련은 베트남 전쟁을 소심하게 지원했고
      • 중국은 중소분쟁에서 우위를 차지하려 적극적 베트남을 돕느다.
    • 베트남은 소련이 힘을 되찾을 기회를 주었다. 이런 회복이 소련의 힘보다는 남의 실패를 통해 이루어졌다는 사실.
  • 13장

    • 브라질, 쿠바,아르헨티나,칠레… 그들의 20세기 냉전의 시대에 참으로 혼돈의 시기를 보냈었구나
      • 남한만의 문제적 현상은 아닌것이다.
      • 이것이 권력과 인간의 본성이라는 뜻일까
      • 미국과 영국등 1국들이 망쳐놓은 20세기
      • 냉전의 이데올리기,
      • 자본주의의 탐욕과 권력에 의한 서민들의 죽음들
  • 14장

    • 서유럽 등에서는 젊은 세대를 중심으로 기존 체계에 대한 반항이 일어 났다
    • 리바이스,엘비스 프레슬리, 체 게바라,…
      • 심지어 마오쩌둥의 문화혁명 을 국가의 권력에 반란의 모델로 삼았다.
  • 15장

    • 리처드 닉슨
      • 중국을 방문한 최초의 미국대통령
      • 헨리 키신저
      • 소련도 방문
      •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불명예 퇴임
      • 하지만 그는 미국이 중국과 소련과의 관계를 바꿔놓은 대통령이었다
  • 16장

    • 인도
      • 네루는 냉전시대, 어느 제국에도 속하지 않으려 했다.
      • 신속한 국가발전을 하려면 소련의 모델을 참조하려했다.
        • 탈식민지, 제국주의, 아시아의 힘과 제국에 반대하는 그의 기조가 지도자로서 좋아 보인다.
          • 평가는 일단 제쳐두고라도
      • 인도는 소련식 사회주의를 참고하려 했고
      • 중앙아시아의 영향력있는 주도국이 되려했다
    • 미국이 파키스탄을 비밀리에 돕고, 중국과 협력하려하자
    • 인도는 당황한다.
      • 인도-파키스탄 전쟁에 미국이 인도지원을 안한다고 발표
      • 닉슨이 중국 방문 발표
    • 인도는 소련과 손을 잡는다.
      • 워싱턴 당황
    • 인도-파키스탄 전쟁에서 인도가 이기고, 미국은 분노를 같는다
      • 키신저는 인디라 간디에게 ‘그년’ 이라고 말했다!!!
    • 냉전, 제국주의에서 벗어나려한 인도, 인디라 간디와 네루,
      • 그큰 나라도 벗어나기 힘들었다
  • 17장

    • 중동에 이스라엘이 생겨나면서

      • 미국과 소련 모두 자국에 이익이라고 생각했으나
      • 심각한 오판임이 나중에 드러나게 된다.
    • 이스라엘 - 유대인국가가 생기면서

      • 아랍은 더욱 민족주의로 뭉칠수 밖에 없었다
      • 그 여파는 끝없는 갈등과 전쟁과 죽음, 현재 진행형이다.
    • 이집트의 나세르와 , 아랍은 이스라엘과의 전쟁에서 참패

      • 미국은 기분좋아 웃는다
    • 아랍의 서민들, 지도자들이 국민보다 강대국에 빌붙어 자신들의 권력만 유지하려는 모습에

      • 그들은 이슬람 사원과 학교로 모여든다
      • #신 #종교 에게 더 집중한다. 658
    • #사회주의 는 인간의 욕구에 위배된다.

      • 이 이데올로기는 타락한 사회, 독재가 강기간 이어진 사회에서, 겁에 질린 사회에서만 번성한다
      • 하지만, 결론적으로 사회주의 는 경제체제가 실패한다 - 인간의 욕구를 무시한 단발성 체제 660
    • 미국은 이슬람 주의를 오히려 반겼다. 그들이 반공, 좌파를 반대했기 때문이다.

      • 그런데 결국은 그 이슬람인에게 본토가 테러 당하게 된다.
      • 인간의 어리석음… 이데올로기를 강제하자,… 종교가 뜨고
      • 종교를 이용해 이데올로기를 유지하려 했는데, 근본 종교자들에게 공격당하고
  • 18장

    • 약한 캄보디아가, 베트남을 처들어가고
      • 베트남은 2주만에 캄보디아 정권을 몰아내고 친 베트남 정권을 세운다
    • 미국과 중국은 친미,친중 의 캄보디아 정권이 무너지는걸 보고 화났다
      • 중국이 베트남과 전쟁을 하고, 미국은 뒤로 응원한다.
      • 소련이 개입하려할때 뒤를 바주기로 한다.
    • 중국이 베트남을 공격하고, 처참한 인명 피해와 적대 관계를 만들어 버린다.
    • 아프가니스탄의 난장판
      • 미국과 소련의 개입
    • 결국 데탕트는 무너지고 3세계는 혼돈이 계속된다.
      • 미국의 국내정치가 데탕트를 무너트렸다
      • 미국과소련 그들은 세계의 지배자가 되길 원하고 있다.
    • 18장도 정말 재미있는 장이지만 슬프고 우울하네요, 초 강대국이 만들어 놓은 난장판의 20세기, 그들이 아니었더라도 순탄하진 않았겠지만, 참 여러나라에 고통을 주고 있네요
  • 19장

    • 서유럽이 자본주의 체제로 잘 살기 시작하고
      • 빵을사기위해 줄을 서지 않아도 되는것
    • 각국이 연합하게되자 동독과 공산주의 국가들은 불만이 쌓여간다
  • 20장

    • 미국은 아프가니스탄의 이슬람 무장단체를 지원했다. 파키스탄을 통해
      • 왜? 소련이 아프간 공상정권을 도와 집권하고 있어기에
      • 그래서. 현재의 아프간은 난장판이 되었다.
    • 레이건, 미국은 소련이 간섭하는 나라에
      • 소련을 반대하는 단체에 물자를 재공하는 방식으로 대응했다
      • 묻지마 지원, 무조건 소련만 반대하면됨
      • 그래서 소련의 재정을 힘들게 하려는 전략
  • 21장

    • 미국의 경제와 기술이 세계에서 중심이 되게 만들었다
    • 중국 덩샤오핑 미국 방문, 미국과 교류 하며 기술,생산등 자본주의 도입 추진
    • 유럽, 러시아, 남아시아 , 중국등 대다수의 친공산주의 국가들은 20세기 잘살고자하는 욕망으로 친미를 추구한다.
    • 냉전이 사라지는 과정들
      • 아프가니스탄은 진정한 카오스 나라이다.
  • 22장

    • 소련 = 소비에트연방국가
      • 우크라이나,러시아,벨라루스,카자흐스탄, 발트3국등
    • 소련 해체 후 고르바초프는 어떻게 되었나?
      • 1991년 12월 25일, 고르바초프는 소련 대통령직에서 사임.
      • 소련은 공식적으로 해체되었고,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됨.
      • 후 고르바초프는 정계에서 은퇴, 일부 국제 활동(평화·민주주의 관련 단체)과 저술 활동에 집중.
      • 정치적으로는 영향력 상실, 러시아 내에서는 비판받는 인물로 남음 (특히 보수층과 민족주의자들에게는 소련을 무너뜨린 인물로 간주됨).
    • 살육을 막고, 소련 연방을 민주적으로 공산주의 체제로 유지하려 고군분투하는 고르바초프
  • 에필로그

    • 냉전이 끝난 주된 이유는 세계 전체가 변화하고 있었기 때문
      • 소련만의 실패도, 미국의 승리도 아니다.
        • 미국의 수많은 삽질들
    • 사람들, 특히 젊은 이들은 사회의 문제들 ,불합리를 고치고 싶어하며
      • 그것에 딱 맞는 체제는 없지만 미-소의 이데올로기중 하나를 고를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 그 이전 제국시대 비지배국입장에서는 더욱더 그랬을 것이다.

7. 연관 문서

한국전쟁 당시 피란민과 아기를 촬영한 사진

1950년 한국전쟁 발발 후 남하하는 수천 명의 피난민과 북상하는 아군의 모습. [연합뉴스 자료사진]

대치 중인 미군과 소련의 탱크

  • 마오주의
  • 화석자본
  • [일본 제국 패망사](일본 제국 패망사)
  • [세상이라는 나의 고향](세상이라는 나의 고향)
  • [앨버트 허시먼](앨버트 허시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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