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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 붕괴의 순간

☝️미국과 소련이 벌이던 냉전의 역사에서 소련은 갑자기 붕괴한다. 그것은 소련 내부에서 일어난 일이며, 갑자기 일어났다. 민주주의는 과연 안전한가. 지금 미국에서 벌어지는 사건을 보라.

[!INFO] 책 정보

  • 저자: 저자/블라디슬라프_M_주보크
  • 번역: 번역/최파일
  • 출판사: 출판사/위즈덤하우스
  • 발행일: 2025-03-26
  • origin_title: Collapse-The Fall of the Soviet Union
  • 나의 평점: 10
  • 완독일: 2025-06-29 00:00:00

소련 붕괴의 순간

1. Befor Qustion

그믐 YG 7월 벽돌책 모임 도서

2. Synopsis (개요)

2.1 저자 - 블라디슬라프 M. 주보크

인물정보 역사학자 (Vladislav M. Zubok) 런던정경대학의 국제사 교수이자 역사가. 1958년 모스크바에서 태어나 1980년 모스크바국립대학교에서 학사학위를, 1985년 러시아과학아카데미 소속 연구기관인 미국 및 캐나다 연구소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스탠퍼드대학, 미시간대학 등에서 방문교수를 지냈고, 2004년 템플대학에서 종신교수가 되었다. 또한 조지워싱턴대학 국가안보기록보관소의 러시아 및 동유럽문서 데이터베이스 프로젝트와 우드로윌슨국제학자센터 냉전국제역사프로젝트의 책임자였으며, 미국 외교정책연구소(FPRI)에서 수석 연구원으로 일했다. 대표 저서로는 《실패한 제국》 《크렘린의 냉전 속으로(Inside the Kremlin’s Cold War)》 《지바고의 아이들(Zhivago’s Children)》이 있으며, 이 책들로 라이어널 겔버상과 마셜 슐먼상을 받았다. 《소련 붕괴의 순간》은 2022년에 레지널드 젤닉 도서상을 받았으며, 컨딜역사상 최종후보에 올랐다. 이 책의 사료들은 적어도 30년에 걸쳐 수집한 것으로, 개인적 기록ㆍ편지ㆍ일기, 소련 고위 정치인ㆍ외교관ㆍ군 관계자ㆍKGB 관리ㆍ군산복합체 관리ㆍ소련 사회의 각계각층 사람들과 주고받은 대화뿐 아니라 러시아를 비롯한 다른 나라들의 기록보관소 및 도서관, 미국의 자료와 인터뷰 기록으로 구성한 것이다.

2.2 주제

2.3 기획 및 지필 의도

2.4 주요 등장 인물

2.5 전체 줄거리

Summery

  • 소련 붕괴의 불가피성이라는 기존 시각에서 벗어나 고르바초프의 리더십을 중심으로 붕괴 과정을 재구성함.
  • 고르바초프의 개혁 정책이 경제 혼란, 민족 분리주의를 야기했으며, 권위주의적 국가 권력의 취약성이 붕괴의 원인이 되었음을 강조함.
  • 다양한 사료와 인터뷰를 통해 소련 몰락의 전모를 객관적으로 드러내려 함.

Keyword

#소련붕괴 #고르바초프 #페레스트로이카 #글라스노스트 #냉전 #러시아사 #역사 #정치 #경제 #민족주의 #국제관계 #우크라이나

Author

블라디슬라프 M. 주보크는 런던정경대학 국제사 교수이자 역사가입니다. 모스크바 출신으로 미국 및 캐나다 연구소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습니다. 스탠퍼드 대학, 미시간 대학 등에서 방문 교수를 지냈습니다. 주요 저서로는 《실패한 제국》, 《크렘린의 냉전 속으로》, 《지바고의 아이들》 등이 있으며, 《소련 붕괴의 순간》으로 레지널드 젤닉 도서상을 받았습니다.

3. After My Idea

3.1 Insight

고르바초프가 추진한 [페레스토리아카 Perestroika](페레스토리아카 Perestroika) 는 소련을 개혁하려는 시도였으나, 소련을 망하게 한 결과를 낳았다.

(지피티 요약-동의) 옐친은 소련의 지도자가 되려 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소련 체제 자체의 붕괴와 러시아의 독립적 국가 건설을 주도하면서, “소련의 후계자”라는 목표 대신 “러시아의 초대 대통령”이라는 새로운 국가 리더십을 선택했다. 이는 고르바초프와의 노선 차이, 소련 해체 과정, 러시아의 주권 강화라는 전략적 선택에 따른 결과였다

10장까지 읽으며, 소련 연방국가 - 우크라니이나, 러시아 등이 각국의 주권을 주장하며, 고르바초프에게 대항하는 모습을 보면서… 고르바초프가 민주적으로 소비에트연방들을 다루지 않았다면 - 레닌이나 스탈린 처럼 폭력으로 통치했다면 - 과연 인류는 현재 어떤 상태일까. - 소련의 입장에서야 멸망의 - 그 멸망도 언젠가는 왔겠지 - 원흉이라고 생각했겠지만 - 큰 그림,큰 역사의 틀, 인류애적으로 보면 고르바초프의 선택이 보다 선한 것이 아니었나 생각해본다.

소련이 붕괴된 그 순간이 궁금했다. 어떤 일이 버러졌기에 갑작스럽게 소련이 해체되게 되었는가 그런데, 허무하게 옐친이 만취상태로, 우크라이나와 벨라루시의 준비되지 않는 대통령 3명이 모여서 자기들 끼리 결정해버렸다 그리곤 고르바초프에게 알리지도 않았고, 소련 해체 이후를 준비한 사람도 없었다. 옐친은 부시에게 소련 해체를 먼저 알렸고, 고르바초프에게는 그 이후에 알린다. 우크라이나와 벨라루스 대통령은 소련을 볼 면목이 없어서 일지, 자신들의 별장으로 들어가 버렸다. 참 역사란 우숩기도하다. 그 냉전 시기, 수많은 인민들의 목숨을 담보로한 제국이 이렇게 어처구니 없이 막을 내리다니. 그 옛날 로마의 멸망도 기억에 허무하게 무너진것으로 기억된다. 소련의 해체 결정한 3인방은 법적 효력도 없지만, 누구도 법적 책임을 묻지 않았다고 한다. 돈없는 소련은 그렇게 막을 내리게 된다.

3.2 After Qustion

  • (why) 이 책의 제목을 이렇게 지은 이유는?

  • (how) 어떻게 설명하고 있는가? 어떻게 하라고 하는가? 어떻게 해야하는가?

  • (where) 어느 곳에서 쓴 책인가? 어느 것을 위해 쓴건인가? 어디로 가야하는가? 어디에서 읽어야 하나? 그곳은 어떤 곳인가?

  • (when) 이책은 언제 쓰여졌는가? 시대적 배경은 무엇인가? 언제를 기준으로 쓰였는가? 언제 할것인가?

  • (who) 저자는 누구인가? 주인공은 누구이고 어떤 사람들이 나오나? 누구를 위해 저자는 말하는가?

  • (why) 이책을 통한 질문을 만들기

    • 질문 1.
    • 질문 2.
  • (what) 이 책에서 말하는 주제라는 무엇?

    • 알게된 것은 무엇인가?
    • 해야할건 먼가?
    • 다른 책과 다른 점은 먼가?
    • 이 책의 특징은 먼가?

3.3 Top 3 Highlight

588 고르파초프가 선호한 정개, 인텔리겐치아를 달래고 공화국의 지배 엘리트에게 책임을 이양하는 정책은 더 나은 개혁이 아니라 혼란으로 가는 길이었다. 이는 발트 지역과 남캅카스에서, 그리고 궁극적으로 소련의 핵심 슬라브 공화국들에 걷잡을 수 없는 분리주의를 가능케 하고 정당화 했다.

4. Key Word 책에서 뽑은 키워드 정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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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 키워드 1

키워드-제목 1

5.책 밑줄 정리 (책 밑줄 전체,page)

서문: 퍼즐

17 드디어 그를 제거했군, 그 허풍쟁이를." 모스크바에서 뉴욕으로 향하는 아에로플로트사의 비행기가 아일랜드 섀넌에 잠시 기착했을 때 승객들이 수군거렸다. 그때가 1991년 8월 19일 아침이었다.

18 우리 가족은 소련으로 귀국하지 못했다. 우리가 탄 귀국행 비행기는 1991년 12월 31일에 모스크바 셰레메테예보 국제 공항에 착륙했지만, 그때는 러시아연방, 우크라이나, 벨로루시(벨라루스) 및 여타 공화국의 지도자들이 이미 소련을 해체한 후였다. 어둑어둑한 셰레메테예보 국제 공항은 텅 비어 있었다. 비행기에 재급유를 하고 탑승교를 작동시키는 직원이나 세관원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고, 승객들의 여권과 비자를 확인하는 사람조차 없었다. 새로운 러시아 국가는 국경선이 뻥 뚫려 있고, 세관이 없으며, 통화는 평가절하되고, 상점이 텅 비어버린 나라였다. 불변의 국가 구조가 증발해버린 듯했다. 몇 달 전 8월에 내가 떠났던 나라는 갑자기 사라졌다.

20 하지만 최근에 학자들은 미국의 압력이 베를린 장벽의 붕괴 및 냉전 종식과는 별 상관이 없었다고 결론 내린다. 그리고 적어도 1987년 이후로 서방 정부는 소련의 불안정화와 그 이후의 와해에 놀라고 당황했다.

공산당의 이데올로기적 정당성은 오래전부터 침식되었으나 그것이 1990~1991년에 당이 경제적•정치적 권력의 수단을 내준 주된 이유는 아니었다. 그것은 고르바초프의 결정이었으며 전례 없이 자발적으로 권력을 이양한 것이었다. (21쪽)

21 소련의 경제 위기는 소련 역사의 마지막 3년간 중심적인 역할을 했지만 흔히 과소평가되었다. 공산당의 과거 범죄가 폭로되는 것과 맞물려, 경제 위기는 중앙의 권위에 대한 대중의 민심이 이반하고 동원하는 데 기여했다. 소련 경제 체계가 낭비적이고, 파산 일보 직전이며, 민중에게 재화를 제공할 수 없다는 것은 자명했다. (…) 이 책은 더 넓은 역사적 서사 안에서 경제적, 재정적 요인에 아주 면밀하게 주의를 기울여 소련 붕괴를 살펴보는 최초의 연구서다.

23 냉전 역사가 오드 아르네 베스타도 이에 동의하는 것 같다. 그는 “냉전 최후의 드라마는 순전히 소련의 비극이 되었다” 라며 고르바초프는 억지로 나라를 보존할 수도 있었겠지만, “차라리 연방이 사라지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 ….“라고 결론 내린다

이 책은 악의 제국이 보존될 수 있었던 방법을 추측하는 책이 아니다. 그보다는 일어난 일에 관해 지적으로 정직해지려는 시도다. 역사는 불가피한 사건의 연속이 아니며 소련의 종말도 예외는 아니다. 다양한 우발적 상황이 넘쳐났다. 예측 불가능성과 불확실성은 인간, 국가, 세계정세의 근본적인 특징이다. 사회 운동과 이데올로기적 조류는 합리적이지 않으며 정치적 의지는 역사를 뜻하지 않은 방향으로 몰고 간다. 마지막으로 엄청난 결과를 가져오는 우연이 일어난다. 팬데믹 동안 이 책을 마무리하는 과정에서 나는 마지막 요점에 특히 공감했다. (24쪽)

24 #역사 는 불가피한 사건의 연속이 아니며, 소련의 종말도 예외는 아니다. 다양한 우발적 상황이 넘쳐났다. 예측 불가능성과 불확실성은 인간, 국가, 세계 정세의 근본적인 특징이다. 사회 운동과 이데올로기적 조류는 합리적이지 않으며, 정치적 의지는 역사를 뜻하지 않은 방향으로 몰고 간다. 마지막으로, 엄청난 결과를 가져오는 우연이 일어난다. 팬데믹 동안 이 책을 마무리하는 과정에서 나는 마지막 요점에 특히 공감했다.

27 이 증거를 수집하면서 나는 기존의 확신과 전제를 일부 조정했다. 30년 전처럼 지금도 중앙 경제와 고르바초프의 ‘사회주의적 선택’이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고 믿지만, 공산당의 종말에 관해서는 예전처럼 불가피했다고 느끼지 않는다. 전체적으로, 많은 사람이 다가오는 위기의 개별적 요소는 명확하게 인식했지만 국가 구조 전체가 무너지리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는 사실에 놀랐다.

1부 희망과 오만, 1983~1990년

1장 페레스트로이카

KGB 개혁가

#인텔리겐치아(러시아어: Интеллигенция ← 라틴어: intelligentsia)는 지식 노동에 종사했던 사회 계급이다. 이러한 사회 계급의 입장에 있는 사람을 지식인이라고 하며, 대비되는 말은 민중이다.

38 안드로포프는 국가 투자를 배분이 아닌 경쟁으로 전환할 것을 국영은행에 지시했다. … 소련 개혁에 안드로포프가 가장 크게 공헌한 점은 정치국과 소피에트정부에 일단의 관료들과 학계 인사들을 불러들인 것이었다.

권좌의 레닌주의자

40 안드로포프와 달리 고르바초프의 공산주의적 신념은 공포와 배신, 학살의 세월로 얼룩지 지 않았다. 남자들이 술을 입에 달고 살면서 아내들을 때리고 바람을 피우 는 지방의 소비에트 노멘클라투라 사이에서 고르바초프는 귀감이었다. 반짝이는 눈동자와 거부할 수 없는 매력, 꺾이지 않는 낙관주의와 넘치는 자신감은 모스크바에 팽배한 냉소주의와 비관적 분위기와는 대조되었다.

41 그는 아내가…고르바초프의 경력에 대한… 그는 권력 다툼을 벌인 적도 없고, 정적을 제거해야 했던 적도 없었으며,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무력을 쓴 적도 없었다. 소련 최고 권력을 손아귀에 쥐고는 권위를 확고히 내세우지 않는다는 것은 있을 수없는 일이었다.

41 퓰리처상을 수상했고 인정받는 고르바초프의 공인 전기를 쓴 미국 작가 윌리엄 타우브먼 은 “고르바초프는 이해하기 힘든 사람이다’“라는 문장으로 시작한다. 타우브먼은 고르바초프가 러시아를 변화시키려고 했으며, “민주주의의 초석’ 을 놓았지만 새로운 국가, 사회, 경제를 건설하는 데는 당연히 실패한 유례없는 “비극적 영웅"이었다고 결론 내렸다. 어느 러시아판 고르바초프 전기 작가는 그에 관해 “역사의 무자비한 변덕의 희생자 …. 러시아 역 사상 가장 비극적 인물 가운데 하나"라고 평가한다.

42 고르바초프는 전임자들처럼 정통성을 주장하거나 경쟁자들을 물리치기 위해 레닌의 말을 인용하지는 않았다. 그는 레닌과 자신을 동일시했다. 그는 진정한 마지막 레닌주의 신봉자였다.

42 안드로포프가 죽은 뒤 고르바초프는 러시아를 파괴한 혁명가를 멘토로 선택했다. 바로 1917년에 출현한 볼셰비키 독재의 장본인이자 소련의 설계자 블라디미르 레닌이었다. 그 후로 5년간 고르바초프는 공개 연설과 정치국 모임뿐 아니라 최측근 자문들과의 사적인 대화에서도 끊임없이 레닌을 거명했다. 고르바초프는 전임자들처럼 정통성을 주장하거나 경쟁자들을 물리치기 위해 레닌의 말을 인용하지는 않았다. 그는 레닌과 자신을 동일시했다. 그는 진정한 마지막 레닌주의 신봉자였다.

방향 설정이 잘못된 개혁

54 고르바초프의 개혁은 소련의 경제적.정치적 통일체가 의지하던 재정적 안정성 역시 해치기 시작했다. …소련에서는 두 종류의 통화가 유통되었다. 하나는 가상의 통화로 베즈날(beznal)이라 불렸는데 ‘현금이 없다’는 뜻이다 ….두번째 화폐는 날(nal) 이라고 하는 국영 은행이 발행한 은행권과 주화로 ‘현금’이른 뜻이었다. …소련에서도 이 체계의 작동 방식을 이해하는 전문 은행가는 거의 없었다

55 비효율적인 소련 농업, 농업에서 발생한 손실, 품질이 조악하여 팔리지 않은 상품에 대한 보조금은 군비 지출보다 비용이 많이 들었다. 문어발처럼 뻗어나가는 ‘그림자 경제’에서 불법 기업가들은 수십억 루블을 모았다.

사회적 민주주의

58 고르바초프는 소련을 민주화한디는 아이디어를 어디에서 얻었을까? …그는 광범위한 정치 자유화를 급진적 경제 개혁과 동시에 실시하기로 결심했다. 30년이 지났지만 윌리엄 타우브먼은 놀라움을 감추지 못한다 “대체 무엇에 올려서 자신이 수 세기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러시아의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양식을 단 몇 년 만에 극복합 수 있다고 생각했을까? 차르의 권위주의 체제는 소비에트 전체주의 체제로 변신했고 . 타 협과 합의를 비롯해 시민사회 활동에 대한 최소의 경험만 했을 뿐, 민주적 인자율적 조직의 전통도, 실질적인 법치도 경험한 적이 없는데 말이다.”

61 고르바초프의 구상은 기막히게 야심 찼다. 그는 러시아 사회주의를 원점으로 되돌리고 민주주의 방향으로 위대한 실험의 경로를 재설정하고자 했다.

63 수십년 동안 정치국의 결정에 무턱대고 찬성하던 소비에트들이 갑자기 입법과 집행 책임을 동시에 떠맡았는데, 그들로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책임이었다.

63 권력이 자존심에 미치는 효과는 어쩔 수 없었다

64 고르바초프의 전략에 대해 예두아르트는 ‘그는 스탈린 체제를 해체하기 위해 스탈린의 권력을 이용했다’ 라고 평가했다.

70 그의 진단은 틀렸다. 그가 소비에트 사회주의 프로젝트의 재활성화와 현대화의 주요 장애물이라고 여긴 당 관료제는 보수적이고 점진적인 개혁을 선호했지만, 여전히 최고 지도부의 수중에 있었다. 오판에 근거한 탈집중화는 다른 오류들과 맞물려 경제와 금융을 망가트렸다. 더욱이 ‘사회주의적 민주주의’는 안드로포프가 경고했던 대로 대단히 위험한 모험이었다. 고르바초프식 페레스트로이카라는, 그가 구상한 방식은 성공할 수 없었다. 대신에 그것은 경제 혼란과 정치적 포퓰리즘, 민족주의라는 악령에 소련을 노출시켰다.

2장 해방

보편적 임무

72 스탈린의 냉소적인 현실정치, 흐루쇼프의 벼랑 끝 전술, 브레즈네프의 힘을 통한 평화 데탕트라는 배경에 반해, 고르바초프의 프로젝트는 획기적인 돌파구였다.

과거의 복수

82 소련은 민족주의적 원한과 염원이 산재한 지뢰밭이었다.

82 대러시아인(great Russian) - 제정 러시아 시대에 현재 우크라이나 지방을 소러시아 벨라루스 지방을 백러시아 옛 모스크바 공국 영역을 중심으로 한 러시아 본토를 대러시아 전부합쳐 전러시아라고 불렀다.

폭풍 속으로

96 역사적 비교에는 항상 결함이 있다. 1989년에 고르바초프 지도부가 한 일을 포착한 사례나 은유를 찾아보기는 힘들다. 갑자기 머나먼 약속의 땅으로 항해하기로 결심한 거대한 배의 선장을 떠올려보라. 그는 선원들의 분위기와 본능을 거슬러 항해한다. 그와 그의 추종자들은 지도가 없고 나침반은 망가졌다. 배가 서쪽으로 항해한다고 생각했지만, 실은 남쪽으로 향하고 있다. 항해가 점점 힘들어지면서, 선장은 선원들이 믿을 수 없는 방해 공작원이라고 판단한다. 그래서 그는 항해에 열렬히 참여하고 싶어하는 경험 없는 승객들에게 가서 약속의 땅에 도달할 최상의 방법을 고민해보라고 한다.

‘강한 중심. 그러나 역시 강한 공화국들’이라는 불합리한 원칙은 민족주의와 더불어 경제적,정치적 개혁에 대한 고르바초프의 접근법에 줄곧 뼈대가 되었다. 1988년 말에 승인된 헌정적 변화는 공화국 민족주의를 막을 방화벽을 세우지 못했다. 동시에 공화국 엘리트들도 만족시키지 못해서 반항이 일어났다.

“피할수 없어 보일 때 참을성 있게 견딘 악은 일단 벗어날 수 있다는 생각이 들면 더는 참을수 없어진다” (알렉시 드 토크빌)

99 당의 강압이 없다면 농민들은 국가가 정한 낮은 가격에 식량을 도시에 넘길 의사가 없었다. 1988년 가을, 소비에트 농장들은 수확량의 3분의 1을 국가에 넘기지 않았다. 수확량의 또 다른 3분의 1은 낭비하거나 잃었다. 정치국은 구매 가격을 인상하거나 해외에서 식량을 더 수입해야 하는 딜레마에 직면했다. ….산더미 같은 양배추가 저장고에서 썩어가는 동안, 상점에서는 양배추를 구경도 할 수 없었다.

3장 혁명들

굿바이 레닌

121 고르바초프…그는 더이상 러시아 노동자들에게 지지를 바라지 않았다. 의원과 지식이을 상대하는 게 더 편했다

역사의 가속화

126 옐친…휴스턴 공항으로 가는 길에 대형 할인매장인 랜달스슈퍼마켓에 즉흥적으로 방문했을 때 진짜 충격을 받았다. 지역 당 서기로서, 옐친은 스베르들롭스크 지역의 식료품 공급 부족 사태를 두고 수년 동안 씨름했다. …..랜달스슈퍼마켓은 경이로웠다. 이곳에서는 최빈층 미국인들이 소련 최고위 노멘클라투라도 본국에서 살 수 없는 것을 구입할 수 있었다.

127 옐친은 자신의 사명이 ‘아메리칸드림’을 러시아 인민에게 제공하는 것이라고 결심했다.

”혁명은 불안정이다!”

장벽이 무너지다

144 봄과 여름에 고르바초프의 정치적 자유화 노선은 상당한 급진화를 가져왔지만, 이번에는 국경지대가 아니라 나라의 핵심부, 무엇보다 모스크바, 러시아어를 사용하는 공업지대, 지배 엘리트 내부에서 일어났다. 공산주의 이데올로기라는 전면이 먼저 무너졌고, 그다음은 동유럽에 위치한 외부 제국의 차례였다. 베를린 장벽의 붕괴는 고르바초프의 페레스트로이카를 무색하게 만들었고, 바르샤바조약기구에 미래가 없다는 것도 분명해졌다. 하지만 소련 지도자와 엘리트들에게는 내부의 위기가 외부의 사건을 점차 압도했다. 고르바초프는 해외에서 소련이 ‘유럽 공동의 집’에 참여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가장 가까운 보좌관들과 자문들은 소련이라는 집이 무사히 보전될지 의심하기 시작했다

142 소련 지도자는 돈이 필요했기에, 본국의 문제에 관해 솔직하게 밝히고 뜻밖의 적자 내역을 나열했다. (부시와 몰타 회담중) 체르노빌 사고로 80 ~ 100억 루블, 아르메니아 지진으로 120 ~ 140억 루블, 유가 하락으로 인한 적자의 증가 …

142 고르바초프는 “전략적이고도 철학적으로” 냉전은 이미 끝났다고 하기를 바랐다.

나는 당신과 미국에 대해 소련은 어떤 상황에서도 전쟁을 개시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소련은 미국을 더 이상 적으로 여기지 않습니다.

…부시는 반응하지 않았다.

143 체치천은 스코크로프트에게 놀라운 소식을 전했다. 소련이 매우 가난한 중국에 돈을 빌려달라고 요청했다는 것이다.

4장 분리주의

러시아가 깨어나다

고르바초프의 대통령직

154 1990년 1월 아제르바이잔에서 무력을 사용해야 했다…, 크렘린 지도자(고르바초프)는 딜레마에 직면했다. 무력을 사용해 기존 국가를 그대로 유지할 것인가, 공화국들에 권력을 이양하는 노선을 이어갈 것인가? 결국, 고르파초프는 두 번쨰 길을 택했다.

160 우주베키스탄,카자흐스탄 …. 우리도 대통령을 가지면 안되는가? 그러자 고르바초프는 맥없이 동의했다.

독일과 리투아니아

독일과 러시아

172 옐친은 고르바초프의 오만과 오류의 정치적 소산이자, 그의 거대한 야심 때문에 소비에트연방을 노림수로 만들어버린 정치적 도박의 산물이었다 “이제 그가 연방에서 러시아의 분리를 선언한다면, 고르바초프는 돌아가서 어떤 연방을 대표할 것인가? 그리고 고르파초프가 그 이단자를 저지하기로 한다면, 어떤 식의 전통적인 러시아 반란이 뒤따를 것인가?”

174 본국에서 갈수록 천박해지는 공격과는 대조적으로, 자신의 역사적 업적에 대한 미국의 찬양과 일반 미국인들이 그와 러시아에게 보내는 존경을 실컷 누렸다.

”고르바초프를 안정화하기”

176 러시아의 주권 선언은 다른 공화국들에 ‘주권들의 행렬’을 촉발했다.

177 부시와 만난 자리에서 콜은 “우리가 고르바초프를 안정화해야 할 것 같다” 라고 말했다.

181 고르바초프의 권위는 추락했고 정치적 기반은 좋게 말해서 위태로웠다. 국가 권력을 행사할 수 있다는 점을 빼면, 유일하게 유리한 입지는 세계 정치가라는 독특한 위상이었다. 서방 파트너들의 도움으로, 고르바초프는 자신의 정치적 수완을 재확인했다. 그는 독일의 재통일과 새로운 유럽 질서의 창건자가 되었다. 서방의 우군과 친구, 특히 부시와 콜의 도움을 받아 소련 지도자는 본국에서 자신의 권위를 재천명하길바 랐다. 하지만 고르바초프는 성공을 입증할 만한 근본적인 수단이 없었다. 소련 경제는 계속 나빠지고 있었고 이에 대처하기 위해 믿을 만한 전략이 없었던 것이다.

5장 갈림길

경제학자들의 시간

정책 싸움

182 1989년 2월, 모스크바를 방문한 영국의 경제학자 알렉 노브(Alec Nove)는 소련 경제에 관해 이렇게 말했다. “터널의 끝에 빛이 보이기는커녕 터널도 안 보인다.

201 (1990년 8월 말에서 9월 초) 고르바초프는 아카데미 회원이자 1983~1987년 경제 개혁의 설계자 아벨 아간베갼(Abel Aganbegyan)에게 두 프로그램을 조화시켜 달라고 요청했다. 소련 지도자는 500일 계획이 연방 정부 및 연방세와 연계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를 두고 많은 사람이 고르바초프를 비난했고, 일부 역사가들은 이때 소련 지도자가 자신의 비호 아래 개혁을 재개할 마지막 기회를 잃었다고 본다. 하지만 고르바초프가 망설인 데에는 나름의 정치적 논리가 있었다. 중앙 정부가 없다면, 대통령은 15개 공화국과 거대한 인민대표대회를 혼자서 상대해야 할 처지였기 때문이다. 모든 주요 산업이 중앙에서 통제되는 복합 기업들로 구성된 소련 경제에는 광범위한 혼란이 발생할 것이다.

검은 9월

206 부시는 소련의 파트너(고르바초프)에게 새로운 세계질서를 함께 건설하는전망을 제시헀다. 여태껏 미국의 정책은 중동 사안에서 소련을 배제해왔지만, 이제는 소련을 포함하길 원햇다. 그리고 부시는 두 사람이 지금부터는 이름을 부를 만큼 가까운 사이가 되자고 제의했다.

207 “그는 모든 사람에게 돈과 대출을 구걸하고 있었다”라고 체르냐예프는 당시의 고르바초프에 관해 썼다.

210 9월 29일, 고르바초프는 소련의 ‘창조적’ 인텔리겐치아 대표 수백 명과 만났다. ….고르바초프의 개혁으로 그들은 당의 통제와 검열, KGB의 밀고자로부터 해방 되었다. 그러나 회의에서 새로운 자유를 축하하고 고르바초프를 찬양하는 사람은 없었다. 모두 무정부 상태와 내전을 두려워하며 새로운 1917년에 대해 이야기 했다.

211 유명 배우이기도한 니콜라이 구벤코 문화부 장관은 과감하게 발언했다 “우리는 낯선 자유에 취해서, 많은 민족을 하나로 모으고 이제는 소비에트사회 주의공화국연방이라는 [국가를 형성한] 우리의 문화적.역사적 전통을 파괴하고 있다.”

분열된 집

212 1990년 10월 15일, 미하일 고르바초프는 노벨평화상을 수상했다. …서방이 고마워하며 준 또 하나의 선물이었다. …그러나 국내에서 온 편지는 고르파초프가 소련 국가와 안정된 경제를 파괴하고 있다고 비난했다.

220 1990년 내내, 고르바초프는 자신과 중앙 국가에 주도권을 되찾아줄기 회를 여러 차례 얻었지만 다 날려버렸다. 국가의 통제력을 유지하고 새로운 규제 장치들을 발전시키면서 체게적인 시장 개혁을 개시할 기회의 창이 아주 잠시나마 열려 있었던 듯하다. 그러나 그 기회를 붙잡으려면 엄청난 비전과 의지와 행운까지 따라야 했지만 소련 지도부에는 그런 것이 없었다. 심각한 경제 상황에 대한 소련(과 러시아) 엘리트의 무지, 포플리즘적 혼란, 이렇다 할 만한 서방의 지원이 주어지지 않은 탓에, 기회의 창은 열리자마자 닫혔다. 경제적 파멸에 대한 여감이 분리주의의 주요 동인이 되어감에 따라, 이것은 소련이라는 국가의 미래에 운명적인 결과를 가져왔다.

6장 리바이어던

레임덕 당

223 소련이 붕괴한 지 몇 년 후, 러시아 역사학자 루돌프 피호이아(Rdolf Moin)는 이해할 수 없었다. 당 조직의 내부에서 시작해 정점에 오른 고르바초프가 왜 공산당 노멘클라투라의 권력을 줄곧 파괴하기만 했을까? 그는 새로운 권력 기반을 만들지 않고 자신의 오래된 권력 기반을 훼손한 지도자였다. 그리고 여기에는 고르바초프가 차마 인정할 수 없는 사연이 더 있었다. 변화를 실시하기 위해 강력한 정치적 수단을 이용할 줄 모르는 이 개혁의 설계자는, 당 없이 통치하는 법도 역시 배우지 못했다

🤔 고르바초프는 **공산당(당)**을 비판하고 개혁하며 당의 기존 권력을 약화시켰습니다. 그러나 정작 공산당을 대체할 새로운 권력 구조나 정치 시스템(예: 민주주의적 통치 방식, 의회 중심 체제 등)을 만들지도, 그것을 효과적으로 운영할 능력도 갖추지 못했다는 뜻입니다. (chatGPT)

226 고양이 당은 폭력적인 갈등을 벌일 생각이 없다고 야로셴코는 결론 내렸다. 대신, “그들은 민주 진영에 암묵적인 사회계약을 요구한다. 우리 주머니를 두둑하게 채워 무사히 물러나게 해주면 …… 너희를 감옥에 처넣고 총살하지 않을 것이다.” 10년 뒤에 이 ‘계약’ 은유는 서구 학자들에 의해 재발견된다.

227 한때 극한의 상황에서 인민과 경제를 동원할 수 있는 막강한 정치 세력이었던 당은 각자의 이익에 따라 행동하는 파벌과 사람으로 이루어진 거대한 집단이 되었다.

그들 중 다수는 고르바초프를 권좌에서 끌어내리고, 민주적 실험 없이 국가 자본주의로 나아가고 싶어 했을 것이다. 그러나 당총회와 당대회에서 여러 차례 드러났듯이, 고르바초프는 노멘클라투라의 쿠데타를 두려워할 이유가 없었다. 분노와 좌절을 느껴도, 누구도 감히 서기장에 대항할 수는 없었다. 그들은 투표로 고르바초프를 몰아내더라도, 여전히 그가 헌법상 군 통수권자이며 KGB를 통제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군과 KGB야말로 고르바초프 권력의 핵심이었다.

대후퇴

227 1990년 말, 소련군은 여전히 세계 최대 규모였다. 가을 징집으로 충원된 지상군은 최소 400만 명의 현역병을 보유하고 있었다. 군은 최대 6만 4000대의 탱크, 7만 6500대의 장갑차, 1만 2200대의 군용 항공기와 헬리콥터를 보유하고 있었는데, 이는 NATO군보다 훨씬 많은 숫자였다

동유럽의 혁명과 독일 통일로 인해 소련군이 소련 국경을 넘어 배치될 수 있는 법적.정치적 근거가 사라졌다.

231 소련군에 관한 미국 최고의 전문가인 윌리엄 오둠(William Odom)은 당시 소련군이 겪어야 했던 일에 감정을 이입하며 나중에 이렇게 썼다. “가령 [1968년에] 베트남에서 격전을 치른 미군 연대가 적절한 주거와 지원 시설도 없는 군사기지로 막 귀환했는데, 그러고 나서 그 연대가 다시 대학 교정의 반전 시위자들을 진압하러 파견됐다고 상상해 보라. 폭력이 발생할 가능성이 컸을 것이라고 말하는 건 지독하게 절제된 표현이다.”

감시견

236 KGB의장은 소비재 부족을 반대파의 활동과 조직범죄 탓으로 돌렸다.

압박받는 MIC

241 대표단은 우주위성을 궤도에 쏘아올리는 프론톤 로켓을 생상하던 에네르기아 기계제작 공장에도 방문했다. 회사의 책임자는 방사능 정화와 암 치료, 수질 정화, 레이저 및 방사선학을 위한 생태 및 로봇 장비를 생산하고 싶어 했다. 하지만 정부의 전환 프로그램으로 인해 그 대신 자전거, 썰매, 프라이팬을 생산해야 한다고 불만을 토로했다.

242 고르바초프는 늘 그렇듯 소련의 위대한 잠재력과 미래에 관해 이야기했다. 래퍼포트는 점점 조바심을 내며 듣다가 말을 잘랐다. “대통령님, 제가 유대인 농담을 들려드리겠습니다. 한 유대인이 아내의 장례를 지낸 뒤 랍비를 찾아가 어떻게 해야 하느냐고 물었습니다. 랍비는 ‘1~2년 정도 시간을 두게. 적응하고 위원도 찾을 거야’라고 말했지요. 유대인이 대꾸했습니다. ‘1년, 2년……. 그럼, 오늘 밤은 어쩌죠?’” 마지막 문장은 MIC가 처한 어려움과 고르바초프 개혁의 본질을 요약했다. 소련 최고의 산업 부문과 관리자는 시장과 개혁을 적극적으로 포용했지만, 세계 시장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시간, 전문성, 국가 지원이 필요했다. 하지만 어느 것도 없었으로, 그들은 힘든 처지였다.

도전받는 리바이어던

245 (1990년 12월) 체르냐예프는 자신 앞에 ‘두 명의 고르바초프’가 있다는 인상을 받았다. 한 명은 매력적인 비전을 가진 세계적인 인물이었고, 또 한 명은 “탄약이 바닥나서” 막대한 집행 권한을 행사하지 못하는 임기 말의 국내 정치인이었다. (…) “나에게 독재를 강요하지는 못한다. 독재를 하느니 차라리 사임하겠다. …… 이것은 확고한 신념, 일생의 원칙이다.”

247 옐친은 솔제니친의 또 다른 주장에도 감명을 받았다. 러시아인들이 ‘전체주의적 제국’을 떠받치는 찰흙 인형 역할을 하는 데 지쳤다는 것이다.

…옐친은… 우크라이나 내부의 ‘러시아 영토’라는 쟁점을 제기하는 것조차 거부했다. …크림반도 문제는 “크림반도의 인민들과 우크라이나 의회의 (내부)사안” 이라는 점을 재확인 했다.

이것은 역설이었다. 모스크바의 러시아 지도부는 우크라이나 지도자들이 사실 원치 않은 우크라이나 독립을 요구한 것이다.

고르바초프의 나쁜 선택들

249 (1990년 11월 말 즈음) 고르바초프 측근들의 수준이 떨어진 와중에 53세의 정력적이고 고등 교육을 받은 재무부 장관 발렌틴 파블로프만은 예외인 듯했다. 파블로프는 (…) 스스로를 ‘순전한 재정 전문가’라고 여겼다. 그는 소련 통화 체계 작동 방식과 그 위기의 진짜 원인을 아는 극소수 중 하나였다. 파블로프는 500일 계획이 소련 경제에는 처참한 계획이라며 거부했다. 그는 싱가포르, 한국, 대만의 경우와 현재 중국공산당 지도부 하에서 그렇듯, 시장 경제로의 이행이 권위적인 국가 통제 하에서 이루어져야 한다고 확신했다. IMF와 세계은행에 소련이 가입하는 것은 찬성했지만, 외국 자본을 유치하려면 특별한 국가 정책이 필요할 것이라고 믿었다. (…) 그는 모든 국영 기업에 20퍼센트의 의무 과세를 제안했다. 이 돈은 연방 안정화 기금으로 들어갈 예정이었다. (…) 특히 러시아연방에 지나치게 양보하면 “소비에트연방이 연방 국가로서 기능하기 위한 경제적 기반을 사실상 해체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253 소련으로서는 쇠퇴하고 무너져가는 국가의 여러 정파 간의 불화라는 불길한 전망으로 그해(1990년)가 마무리되었다. 모스크바의 자유주의적 친구들에게서 분위기를 감지한 서방 외교관들과 언론인들은 곧 피가 흐르고 소련군이 개입할 것이라고 확신하다시피 했다. 새로운 연방이 생겨날까? 아니면 혼란만 커지고 어쩌면 유혈 사태가 발생할 것인가? 답을 아는 사람은 없었다. 그러나 이 시점에도 소련이 1991년을 넘기지 못할 것이라고 예상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

2부 쇠퇴와 몰락1991년

7장 대치

발트 국가들에서의 유혈사태

257 하지만 의지가 있으면서도 의지를 발휘하지 않는 그 사람에게 가장 처참한 패배 말고 무엇이 기다리겠는가? (루이 16세를 두고 토머스 칼라일이 한 말(1789))

258 스코크로프트(미국 안보국)는 엘친을 고르바초프의 통치 스타일이 만들어낸 혼란의 산물이며 “야심에 찬 최고의 기회주의자이고, 민주주의자로서의 자격은 아무리 봐도 의심스럽다"라고 보았다.

265 옐친은 고르바초프의 난국을 십분 활용했다. […] 민주주의와 권위주의 사이에서 오락가락한 고르바초프의 ‘6년’을 비판한 다음, 역피라미드형 연방 구상을 제시했다. 한마디로, 소련 내 최대 공화국의 지도자가 공공연히 반란을 선동했고, 고학력 러시아인의 대다수가 그를 지지하고 있었다.

1991년 2월 7일, 크류치코프는 고르바초프에게 나라의 정치적 상황에 관해 암담한 메모를 보냈다. “‘민주주의 진영’의 호전적 일파에 대한 유화책은 사이비 민주주의자들이 아무런 제지도 받지 않고 정권을 장악하려는 계획을 실현하게 해준다.” 옐친이 이끄는 전복적 세력은 페레스트로이카의 의제를 가로챘다. 사회주의를 혁신하는 대신, 그들은 사회주의 질서를 파괴하고 싶어 했다.

265 크류치코프는 발트 지역의 유혈사태 이후로 고르바초프가 ‘과학계와 인문학계 인텔리겐치아’의 지지를 잃었다고 인정했다.

263 독재자와 역사학자들은 어정쩡한 무력 사용의 효과에 대해 잘 알고 있다. 무력을 쓰고 나서 주춤하느니 아예 안 쓰는 게 낫다는 것을 말이다. 발트 지역 사태로 소련 보수파의 사기는 땅에 떨어지고 군은 낙담했다.

267 파블로프는 소련 지도부의 대다수가 간과하는 사실을 믿었다. 즉, 진짜 권력은 돈에 대한 국가의 통제에 의지한다는 것이었다. 중앙의 재정, 통화 시스템이 존재하는 한 소비에트연방은 생존할 수 있었다. 파블로프는 1989년 가을에 이미 중앙 정부가 무책임한 정치 세력들에게 돈에 대한 통제권을 위임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 통제권을 되찾아야만 했다. 1990년 7월에 러시아 의회가 러시아은행을 설립하기로 결정했을 때, 파블로프와 국영은행의 총재인 빅토르 게라셴코는 기겁했다. 고르바초프가 대통령의 권한으로 러시아 법령을 무효화하지 않자 그들은 한충 낙심했다. 고르바초프는 그들의 ‘제왕적 야심’을 나무라기까지 했다.

새로운 스트롱맨

국민투표

270 샤흐나자로프와 체르냐예프는 고르바초프의 연방조약이 비현실적인 프로젝트이며, 국민투표로는 아무것도 바뀌지 않을 것이라고 예전부터 생각했다. 기껏해야, EEC나 영연방과 비슷할 것이었다. 또한 체르냐예프는 굳이 여론 조사를 하지 않아도 모스크바 시민 대다수는 고르바초프와 소련 정부에 몹시 분노하고 있음을 알고 있었다. “국민투표는” 파국적인 폭발의 “기폭제가 될 수 있다.”

271 다수의 보수파도 국민투표에 매우 회의적이었다. 1월 30일의 정치국 모임에서, 우즈베키스탄의 당 지도자이자 대통령인 이슬람 카리모프는 “국민투표를 준비하면 격한 감정을 부추기는 데 일조할 것”이며, 우즈베키스탄 속담처럼 “잠자는 사자의 꼬리를 밟지 말라”라고 말했다. 크류치코프도 같은 이유에서 국민투표 방안이 마뜩잖았다. 회고록에서, KGB 의장은 3월 국민투표는 소련의 적이 이득을 볼 뿐인 도발이라고 주장했다. 크류치코프는 “국민투표를 실시할 필요가 없었다. 대중에게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라고 회상했다.

.. 국민투표가 다가오자, 옐친과 측근들은 우크라이나와 벨로루시의 지도자들이 중앙에 맞서 자신과 ‘협약’을 맺으려 서두르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미래에 드러나겠지만, 우크라이나인들은 옐친의 러시아와의 불평등한 동맹이란 전망을 고르바초프가 주재하는 중앙이란 구상보다는 반기지 않았다.

272 부르불리스는 러시아 국민투표가 알고 보니 뜻밖의 행운이자 묘책이었다고 회고했다. “고르바초프는 저도 모르게 우리에게 엄청난 기회를 선사했다”

274 (1991년 3월 2일 고르바초프의 예순 번째 생일) 축하 메시지에는 에이브러햄 링컨의 인용문도 있었다. “만일 결과가 내가 옳았음을 보여준다면, 나에 대한 나쁜 말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다. 결과가 내가 틀렸음을 가리킨다면, 열 명의 천사가 내가 옳았다고 단언하더라도 의미가 없다.”

불평등한 파트너들

277 고르바초프는…(미국대사에게) “귀국의 대통령이 우리가 내전이 벌어지기 직전이라는 점을 이해하게 도와주십시오. 대통령으로서 나의 주요 책무는 내전을 막는 것입니다.” 라고 부탁했다. 그는 자신이 “누구의 볼모도 아니"라고 힘주어 말했고 미국이 제재를 가하더라도 이전의 모든 양해 사항은 지킬 것이라고 매틀록에게 확인해주었다. “내 친구인 부시에게 전해주시오. 걸프전이나 독일 문제 또는 CFE와 관련해 내게 어떤 압력이 가해져도, 나는 합의 내용을 지킬 거라고요” 미국 대사는 고르바초프의 결의에 감명받아서 이 좋은 소식을 워싱턴의 상관들에게 보고했다.

277 소련 지도자는 걸프에서 유혈사태를 피할 수 있을 거란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 그에게 걸프전은 그와 부시가 함께 건설하기로 다짐한 평화로운 세계 질서라는 비전에 타격을 입힐 것이었다. 미국이 주도하는 연합군이 지상전을 개시하기 직전, 쿠웨이트에서 철군하도록 사담 후세인을 설득히기 위해 예브게니 프리마코프가 바그다드로 날아갔다. 2월 22일, 미국 지상군이 투입되기 직전에 부시는 고르바초프의 평화 중재 시도를 일축했다. 미국 행정부는 완벽한 군사적 승리와 중동의 정치적 재건을 원했다. 미국 대통령이 전쟁이 왜 필요한지 설명하자, 소련 지도자는 그를 막으려 했다. “조지! 조지! 조지!” 하지만 부시는 듣지 않았다.

278 걸프전은 부시에게 엄청난 성공이었다. (..) BBC는 “전쟁 당시 얼마나 많은 민간이이 죽었는지는 아무도 모르지만, 전쟁의 직접적 결과로 민간이 사망자 추정치는 10-20만명이다”라고 보도했다. 리투아니아에서 사망한 민간인 14명과는 대조적으로, 서방은 이 거대한 사망자 수치를 대체로 무시했다.

파블로프의 개혁 중 마지막 항목은 가장 큰 원성을 자아냈다. 1991년 1월 22일 저녁, 소련 사람들은 가장 단위가 큰 통화인 50루블과 100루블 지폐가 더는 유효하지 않다는 TV 발표를 들었다. 지폐는 3일 이내에 같은 가치의 새로운 은행권으로 최대 1만 루블까지 교환할 수 있었다. (…) 그는 화폐 개혁으로 그림자 경제 기업가들과 통화 투기꾼에게서 300억 루블을 흡수할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 그것은 실제로 현금 공급을 줄이고 금융 붕괴를 지연시킴으로써 정부가 얼마간 시간을 벌게끔 도와주었다.

280 (1991년 3월) 그 순간부터 백악관에서 논쟁의 초점은 소련의 해체가 얼마나 빠르게 진행될 것이고 미국 지도자는 리스크를 최소화하기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지에 맞춰졌다.

281 만찬회에서 일부 공화국 지도자들은 공공연하게 고르바초프를 무시했다. 그루지야 지도자인 즈비아드 감사후르디아는 그루지야 공화국이 국민투표를 보이콧할 것이라고 밝혔다. 아르메니아 지도자들은 완전한 독립을 선언하기 위한 자체 국민투표를 9월에 실시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경제학자 샤탈린은 신연방조약 구상을 비웃고 파국을 예견했다. 베이커는 당혹스러워서 고르바초프를 옹호하려고 나섰다. 소련 지도자가 시작한 페레스트로이카가 없었다면 미국 대사관저에서 열리는 이 같은 만찬은 생각할 수도 없었을 것이라고 국무부 장관은 비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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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목 소련 입장 러시아 입장
3월 소련 국민투표 소련 존속 의지 확인했으나 일부 공화국 이탈 러시아도 소련 유지 찬성, 하지만 주권 강화 분위기
6월 러시아 대통령 선거 고르바초프 권위 약화 옐친 정통성 확보, 소련과 독립적 노선 강화
12월 우크라이나 독립 투표 소련 해체로 가는 결정타 옐친이 소련 해체를 주도할 정당성 확보

모스크바에서의 대결

288 (1991년 3월) 알렉산드르 야코블레프는 고르바초프가 군에 의존하지 말고 ‘민주주의에’ 기대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말에 체르냐예프는 폭발했다. “민주주의는 무엇으로 이뤄져 있습니까? …… 민주주의는 정당, 기관, 법의 지배, 합법성에 대한 존중으로 조직된 사회의 한 형태요. 민주주의는 지도자들이 집권을 위해 경쟁하는 것이지, 국가에 반대하는 것이 아니오.” 야코블레프와 체르냐예프 간의 논쟁은 국가의 강압으로부터 즉각적인 자유를 주장하는 인텔리겐치아의 요구와 국가 붕괴를 막을 필요성이라는 변함없는 러시아식 딜레마를 반영했다.

290 러시아공산당 반대파가 사라지자, 인민대표대회는 옐친에게 러시아 경 제를 해결할 권한을 추가로 부여했다. 옐친이 이를 어떻게 해낼지는 아무도 몰랐지만, 옐친의 자문들이 작성한 프로그램은 일관성을 지닌 것 같았다. 가장 결정적으로, 다수의 러시아공산당원을 비롯해 대의원의 3분의 2 이상이 대통령직을 신설하도록 러시아연방 헌법을 수정하는 데 찬성표를 던졌다. 대통령 선거일은 1991년 6월 12일로 정해졌다. 이것은 정치적 기적에 가까웠다. 몇 주 전만 해도 보수파의 희생자로 낙점되었던 옐친이 이제 러시아 최고 헌법 기관으로부터 권한을 부여받고 러시아 인민에 의한 민선 행정부의 지도자가 될 유례없는 기회를 얻은 것이다 …..이 혁명적 전개는 국가의 소멸과 해체를 불러올 터였다. 이것이 3월 17일의 국민투표와 고르바초프의 갈지자 행보의 결과였다.

8장 이양

308 (1991년 6월 6일) (TV 프로그램) 사회자인 이고르 피수넨코(Igor Fisunenko)는 서구식 인터뷰 기법을 구사해 후보자들을 닦아세웠다. 이런 접근법은 옐친과 특히 그를 지지하던 TV 시청자들에게는 오히려 역효과를 불러일으켰다. 그들은 자신들의 영웅이 편향된 심문의 희생자가 되었다고 여겼다. 많은 시청자가 프로그램에 전화를 걸어 피수넨코에게 ‘무도한 행태’를 그만두라고 요구했다. 결국에는 무려 세 자루 분량에 달하는 항의 편지가 방송국에 도착했다. 피수넨코는 나중에 옐친과 지지자들의 행태가 정치적 불관용을 드러냈다고 논평했다. 그들은 대화와 타협에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9 더하기 1

296 옐친과 러시아 의회는 연방 층위에서 내려지는 모든 중대 결정에 대한 거부권을 가질 것이고, 러시아연방은 자국 영토상의 과세를 완전히 통제할 것이다. 하지만 그 대가로….중앙 부처와 소련군에 자금을 대기 위해 세입이 곧장 중앙으로 가는 연방세… 루킨은 이 제안을 수락할 것을 러시아 대통령에게 촉구했다. 옐친은 이 거래를 거부했다. 그는 전부를 원했다.


1991년 4월 노보오가료보 회담

9개 소련 공화국 대표 국가 및 주요 참가자

1991년 4월 23일, 소련 대통령 미하일 고르바초프는 모스크바 근교 노보오가료보에서 신연방조약(신연방조약, “9+1 협정”) 초안을 논의하기 위해 9개 공화국 대표자와 중앙정부 대표(고르바초프) 모임을 소집했습니다. 이 회담은 소련 붕괴를 앞두고 연방 존속의 마지막 가능성을 논의한 중요한 정치적 순간이었습니다[1][2][3][4].

참석한 9개 공화국
국가(공화국) 대표 인물 (주요 참석자)
1. 러시아 보리스 옐친(Boris Yeltsin)
2. 우크라이나 레오니드 크라프추크(Leonid Kravchuk)
3. 벨로루시 스타니슬라프 슈슈케비치(Stanislav Shushkevich)
4. 카자흐스탄 누르술탄 나자르바예프(Nursultan Nazarbayev)
5. 우즈베키스탄 이슬람 카리모프(Islam Karimov)
6. 투르크메니스탄 사파르무라트 니야조프(Saparmurat Niyazov)
7. 타지키스탄 라흐몬 나비예프(Rakhmon Nabiyev)
8. 키르기스스탄 아스카르 아카예프(Askar Akayev)
9. 아제르바이잔 아야즈 뮈타릴리보프(Ayaz Mutallibov)

고르바초프는 대통령 및 연방정부 대표로 본 회담을 주재했습니다.

  • 불참(6개 공화국): 에스토니아, 라트비아, 리투아니아, 아르메니아, 몰도바, 조지아(보이콧 · 독립 지향)[1][2][3].

1991년 4월 노보오가료보 회담 성명 핵심 내용 노보오가료보 회담 성명은 각 공화국의 주권을 인정하는 느슨한 신연방체제 수립 의지, 평등하고 자유로운 결합, 연방 내 평화적 이행을 주요 골자로 합니다. 이는 곧 소련의 해체 국면과 각 공화국의 독립 흐름을 제도적으로 승인하는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러시아 민주주의자들과 그 친구들

301 닉슨은 <뉴욕타임스>에 “고르바초프는 월스트리트고, 옐친은 메인스트리트다. 옐친은 혁명적 지도자가 될 수 있다.”

302 미국 대통령도 동의했다. “옐친이 옳은 말을 하지만”, 부시가 이야기를 나눠본 각국의 지도자들은 하나같이 그가 대중 선동가이고 집권하면 독재자가 될 것이라고 믿었다.

303 CIA의 고위 소련통인 프리츠 어마스는 지금이 그의 모든 생각을 백악관과 공유하기에 적기라고 여겼다 그는 ‘소련이라는 도가든니’ 라는 제목의 메모에서, “경제 위기, 독립에 대한 염원,반공 세력이 소련 제국과 통치 체제를 무너트리고 있다"라고 썼다. 중앙 계획적인 소련 경제는 “돌이킬 수 없게 망가졌고” 더는 “일관된 시스템"이 아니다. 당도 무너지고 있었다. 고르바초프에 대한 신임은 “뚜렷한 지향점이 보이지 않는 정치적 행보와 정책 실패 때문에 … 제로에 가깝다”
어마스는 고르바초프와 옐친 모두 암살당할 수도 있는 폭력적인 루마니아 시나리오를 예견했다. 가능성 높은 또 다른 시나리오는 옐친과 민주 세력을 겨냥한 강경파의 ‘푸치’(폭력적인 정부 전복 시도)였다. …어느 경우에도, 어마스는 소련이 해체되거나, 해체되지는 않더라도 이전과 같은 초강국의 지위와 전세계적 영향력을 회복하지는 못할 것이라고 결론 내렸다. 개인적으로는,어마스는 ‘아래로부터’ 새로운 연합을 건설하려는 옐친의 계획이 고르바초프가 말하는 ‘중앙이 지배하는 연방’ 보다 결국 더 오래가는 해법이라고 믿었다.

옐친의 대통령직

310 옐친은 1차투표에서 57.3퍼센트의 표를 얻어 승리했다… 몇 달 동안 옐친 쪽 관계자들은 부시에게서 초청을 받아내려고 애썼다. 하지만 백악관은 미국 대사에게 옐친과의 그런 만남을 약속하지 말라고 지시했다.

314

곰과 여우

315 (옐친 취임식) 알렉시 2세 총대주교는 옐친에게 나라를 다스릴 때 ‘인류학적 현실주의’를 실천할 것을 요청했다. 그는 정치적 반대파를 포함한 러시아의 모든 인민에 대한 이해와 용서를 의미한다고 설명했다. 공산주의자들은 권력을 잡은 뒤 ‘새로운 인간적 자질과 아름다운 사회’를 창조할 것이라 기대하며 과거를 지워버렸다. 이것은 커다란 비극으로 이어졌을 뿐이다. “이 땅의 악이 정치적 무대에서 제거되었다고 해서, 모든 것이 제자리를 찾을 것"이라고 기대하는 것 은 순진하다. 러시아 인민이 “하룻밤 사이에 바뀔 수는 없다”

315 고르바초프는 옐친에게 크렘린 내에 사무실을 내주었는데, 자신의 대통령 집무실에서 광장을 가로질러 바로 맞은편이었다. 하지만 옐친은 고르바초프가 크렘린의 특별 연대를 거느리며 방비가 삼엄한 그곳을 누가 드나들지 결정하는 한, 그 유서깊은 러시아 요새의 거주자가 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크렘린 내 새 집무실은 의전용으로만 이용하고, 2.4킬로미터쯤 떨어진 러시아 의회에서 집무를 보았다.

318 옐친…러시아 당국은….효과적인 새 제도들을 창출하는 데 완전히 실패했다. 민주러시아 활동가들은 국정 운영과 통치에 대한 경험이 전혀 없었다. 러시아연방은 발트 국가들, 우크라이나, 벨로루시, 카자흐스탄과 비교해봐도 여전히 ‘유령’ 공화국이었다

러시아 정부는 한탕주의 사업가들과 야심만만한 지방 관리자들이 제멋대로 모인 집단이었다.

9장 합의

워싱턴 독트린

322 1991년 여름은 소련의 미래와 소련 경제를 세계 시장에 적응시킬 방안에 관한 합의 없이 시작되었다. 가장 자연스러운 선택은 국가 자본주의와 소기업 자유화의 조합으로, 이미 중국이 선택한 길이었다. 하지만 중국 경제의 진로는 소련 언론에서 주목받지 못했다.

322 가능한 서방의 선택지는 단 하나, ‘워싱턴 컨센서스’였다. (…) 국경 경제의 급격한 축소, 민영화, 자유화, 규제 완화, 재정 규율과 균형 예산 등의 정책을 포함했다. 1991년에 세계은행의 수석 경제학자가 된 하버드 대학교 경제학자 래리 서머스는 워싱턴 컨센서스를 두고 이렇게 말했다. “진리를 전파하라. 경제학의 법칙은 공학의 법칙과 같다. 법칙은 어디서나 통한다.”

323 워싱턴 컨센서스의 정책은 경제에 대한 규제를 철폐했고 기존의 국가 제도를 종종 치명적으로 약화했다. 주춧돌이 되는 개념인 거시 경제적 안정성은 대개 사회보장적 정책과 민간 소비를 희생시켜서 이룬 것이었다. 동유럽 공산 정권의 붕괴는 신자유주의 경제학의 실천자들에게 광활한 공간을 열어젖혔다. (…) 워싱턴 컨센서스는 그들(반공주의자들)의 슬로건과 잘 어울렸다. 국가 재정 지원의 급격한 축소는 반공주의 혁명의 의제와 부합했다. 누구도 신자유주의 정책이 거대한 사회 불평등과 정치적 긴장을 불러일으킨다는 점을 신경 쓰지 않았다.

324 (워싱턴 컨센서스를 수용하며 칠레를 방문한 소련의 경제학자) 피노체트의 범죄 행위는 전혀 신경 쓰지 않았으며, 그들은 칠레의 경제적 성공에 감명받았다. 비탈리 나이슐(Vitaly Naishul)이 설명했다. “우리나라는 1917년 볼셰비키혁명과 뒤따른 혼란의 시기에 수천만 명이, 대체로 헛되이 목숨을 잃었다. 칠레는 3000명이 목숨을 잃고 고도로 발전한 사회가 되었다.” 그 뒤 많은 세월 동안, 나이슐과 그의 지지자들은 소련 경제 개혁에 관한 논의에서 유력한 관계자가 된다. ”

327 옐친은 신자유주의 정책에 관해 아무것도 몰랐지만 모조리 채택하고 싶어 했다. 스탠퍼드대학의 경제학자들은 ‘러시아를 위한’ 새로운 개혁 프로그램을 계획하기로 했다.

런던으로의 초대

330 그레이엄 앨리슨(Graham Allison)은 소련 경제가 직면한 엄청난 도전에 아주 흥미로워했지만, 고르바초프의 실패로 말미암은 파국적 결과 또한 우려했다. 그는 핵 군축에 관한 미국과 소련의 계획에 참여했고, 모스크바가 수만 기의 핵무기를 통제할 수 없다면 발생할 잠재적 위험을 절실히 인식하고 있었다. 냉전에 든 비용의 극히 일부만으로도 서방은 이전의 적을 동료로 돌아서게 할 수 있다고 앨리슨은 주장했는데, 이는 미국과 전 세계에 아주 싸게 먹히는 거래일 것이었다. 이 계획에 붙인 ‘그랜드바겐(Grand Bargain)’이라는 이름은 앨리슨의 접근법을 그대로 반영했다.

333 고르바초프는 오슬로로 날아가 노벨평화상 수상 연설을 했다. …(체르냐예프가 연설문 초안 작성) 고르바초프는 보좌관에게 돈 얘기는 빼라고 직시했다.

”그들을 3류 국가로 전락시키는”

336 (재무부 장관 니컬러스) 브래디는 (대규모 지원에 반대하면서) 보기 드물게도 솔직하게 미국의 전략적 우선 사항을 표명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소련 사회가 국방 시스템을 감당할 수 없도록 변화시키는 것이다. 소련이 시장 체제로 간다면, 그들은 대규모 국방 조직을 감당할 수 없다. 진짜 개혁 프로그램은 그들을 3류 국가로 전락시킬 것이며, 그것이 우리가 원하는 바다.”

337 (1991년 6월) 이때쯤이면, 고르바초프와 그의 자문들은 미국이 소련을 위한 ‘마셜플랜’을 거부했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아야 했다. (…) 소련 대통령은 자신의 세계적 위상이 서방 지도자들의 지갑을 열 것이라고 자신만만했다.

339 파블로프는 최고소비에트 연설에서 야블린스키와 그의 ‘하버드 후원자들’과의 논쟁에 뛰어들었다. 그는 서방의 시혜와 정치적 의지에 의존하는 경제와 금융 개혁에 반대했다. 그 대신 방위 산업 중 가장 수준 높은 부문들의 전환에 투자할 수 있도록 경제 자산의 대규모 민영화와 같은 국내 투자 재원을 고려해볼 것을 제안했다. 기업과 협동조합이 외화를 변동 환율로 구입할 것도 제안했다. 그리고 공화국들이 중앙 재정에 조세를 납부하게끔 강제하고 재정 규율을 회복시키길 원했다.

341 프리마코프가 고르바초프의 면전에서 보안을 KGB에 지나치게 맡기는 것은 아닌지 조심스레 언급했을 때, 소련 지도자는 이를 웃어넘겼다. 고르바초프는 끝 모르는 자만심 때문에 자신이 임명한 부하들이 반기를 들 수도 있다고는 상상도 못 했다.

342 경제학자(야블린스키)는 옐친의 생각을 다시금 잘못 읽었다. 러시아 대통령에게, 야블린스키의 계획은 배신이었다. 그랜드바겐은 고르바초프와 중앙 정부를 구조할 닻이었기 때문이다. 옐친은 미국인들이 고르바초프의 소련이 아니라 자신의 ‘러시아’에 투자하기를 바랐다.

343 부시는…미국 정부가 고르바초프에 대한 대규모 금융 지원에 언제든 반대할 것임을 분명히 했다. 만약 융자를 준다면, 소련이 아닌 동유럽에 제공되어야 한다고 그는 썼다.

”소련은 코스타리카가 아니다!”

(고르바초프) 그는 서방의 돈이절실했지만, 런던에서 재정난에 처한 지도자로 보이고 싶지 않았다. 그는 여전히 자신을 세계적인 정치가로 여겼다.

런던 회담

349 미테랑과 안드레오티는 ‘혼합 경제와 사회주의적 목표’를 표방한 소련 프로그램에 공감을 표했다. 안드레오티는 부시에게 이탈리아도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난 뒤 하루아침에 가격 규제를 철폐하지는 않았음을 상기시켰다. 공산주의가 붕괴한 뒤 소련 사회에 신자유주의적 조건을 재빨리 도입하는 것은 정치적으로 위험할 것이다. (…) 350 미국인들은 모든 제안을 단칼에 물리쳤다. 브래디의 도움을 받은 부시는 부채 상환과 관련하여 소련에 “운신의 폭”을 주자는 의견에 반대했다. 부채를 쥔 라틴아메리카 나라들처럼, 소련은 IMF의 뜻에 따라야 한다. 고르바초프는 신자유주의적 워싱턴 컨센서스를 수용해야 한다. 즉, 급진적 규제 완화, 민영화, 그러고 나서 민간 외국인 투자 유치를 위한 경쟁이 이루어져야 한다.

350 캐나다 총리 브라이언 멀로니는 감동적인 연설을 했다. 1985년, 당시 부통령이었던 부시가 모스크바에서 체르넨코의 장례식에 참석했다. 장례식이 끝난 뒤, 고르바초프가 부시를 만나 이렇게 말했다면 부시는 어떻게 했을까? 나는 동유럽을 해방시키고, 바르샤바조약기구를 해체할 것이며, 통일 독일은 NATO에 가입하고, 유엔군은 이라크에 맞서 전쟁을 개시할 것이며, 소련은 CFE와 START(Strategic Arms Reduction Treaty) 조약에 서명하고, 선거와 민주주의가 있을 것이며, 미국과의 개인적인 유대를 발전시키고, 서방과의 경제적 유대도 늘어날 것이다. 멀로니는 “고르바초프가 1985년에 그런 말을 했다면 나는 수표를 들고 달려갔을 것”이라며 결론을 맺었다. 안드레오티는 1985년에 레이건이 했던 말을 상기시켰다. “고르바초프가 성공할지는 모르겠지만, 누구도 그를 돕지 않았다는 양심의 가책을 느끼는 일은 없어야 한다.” 하지만 G7의 참석자 중 누구도 미국의 리더십에 의문을 표하길 원치 않았다. 그리고 돈을 내놓고 싶지도 않았다.

354 소련 지도자는 부시를 모스크바로 초청했고, 대통령은 초청을 수락했다. 그것이 고르바초프가 런던에서 거둔 유일한 성과였다.

10장 음모

트로이카

고르바초프 옐친 카자흐스탄 지도자 누르술탄 나자르바예프 359 …이렇게 양보한 대가로 , 옐친은 새로운 연방의 대통령으로 고르바초프를 지지하기로 약속했다.

마지막 정상회담

363 소련 지도자가 아무리 양보하고 매력을 발휘한들, 40년간의 대립(미-소 냉전) 역사를 2 ~ 3년만에 지울 수는 없었다.

366 부시는 독보적인 금융력과 세계적 동맹을 거느린 군사적 패권을 휘둘렀지만, 고르바초프는 경제적 혼란의 불운한 볼모이자 부도난 국가의 지도자였다. 세계는 이미 일극 체제였고, 고르바초프의 정치적 미래는 부시의 지지에 달려 있었다.

크림반도 휴가

372 우쿠르아나는 더는 고르바초프에게 표를 던지지 않을 것이라고 크라우추크는 말했다. 소련 지도자는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그를 쳐다봤다.

불청객들

377 (KGB의장) 크류치코프, (라이사 고르바초프가 대단히 신뢰한) 발레리 볼딘, (MIC의 수장) 올레크 바크라노프의 트로이카는 아주 우연히 모였는데, 세 사람 모두 모스크바 인근의 ‘별장 협동조합’소속으로 , 모두 이 별장 공동체에서 땅뙈기를 구입했다. 그들의 계획은 격의 없는 대화에서 탄생했다. … 또 다른 공모자는 고르바초프가 없을 때면 중앙위원회를 책임지는 당 서기 올레크 셰닌이었다.

[1991년 고르바초프의 연방 조약과 쿠테타](1991년 고르바초프의 연방 조약과 쿠테타)

381 KGB의장은 바클라노프, 파블로프, 야조프가 소련 지도자에 맞설 각오가 서지 않았음을 알고 있었다 …긴 논의 끝에 , 크류치코프와 야조프는 모스크바에서 준비 작업을 하는 동안, 바클라노프와 볼딘, 셰닌이 바렌니코프 장군고 ㅏ함께 고르바초프를 만나러 가기로 결정했다. 이것이 고약한 깜짝 방문이 될 것임을 알고 있었다.

야조프는 볼딘을 바라보며, “브루투스 너마저도?” 라고 농담을 던졌다

387 그보다 중요한 것은 대대적인 군사력 과시였다. 난생처음으로, 모스크바 시민들은 겁주기용으로 시가지에 줄줄이 늘어선 탱크를 목격했다. 이는 충격이지 않을 수 없었다.

11장 훈타

충격과 공포

크류치코프의 실책

”우리 편에 서주시오!”

390 연구를 위해 모스크바에 방문하고 있던 미국 학자 빅토리아 보널(Victoria Bonnell)은 다음과 같은 회상했다. “우리가 느끼는 감정들, 즉 신중함과 대범함, 희망과 절망, 현장에 있다는 흥분과 자신과 가족의 안전에 대한 두려움은 지나치게 모순되어 결정적인 행동을 할 수 없었다.”

392 호소문은 고르바초프의 복귀를 요구했다. “쿠데타는 …… 전 세계 앞에 소련의 신임을 떨어트리며, 세계 사회에서 우리의 위신을 무너트리고, 냉전과 고립의 시대로 되돌아가게 한다.” 옐친의 딸 타티아나가 낡은 타자기를 가져와 독수리 타법으로 초안을 타이핑했다. 그러고 나서 가정용 팩스기로 서방 기자와 대사관, 국제 단체에 보냈다. 모든 메시지가 탈 없이 전송되었다.

393 그때 옐친의 두 번째 위대한 순간이 찾아왔다. 안전한 곳에 머물러야 한다는 부르불리스와 다른 사람들의 만류를 뿌리치고, 그는 의회 건물 앞 광장에서 고르자코프와 경호원들만 대동한 채 차에서 내렸다. 그는 부대 지휘관과 말을 주고받은 뒤 탱크 위로 올라갔다. 이 단상에서, 러시아 대통령은 러시아 국민에게 보내는 호소문을 읽었다. 그는 “우익, 반동, 반헌법 쿠데타”에 맞서 총파업을 호소했다. 군중 가운데 누군가가 내전이 벌어지는 것이냐고 물었다. 옐친이 대답했다. “군은 인민에 맞서지 않을 것이다”

394 월요일(8월 19일) 오전 5시 30분에 잠에서 깼을 때, 부시는 후세를 위해 그의 생각을 녹음하기로 했다. (…) 그다음에는 고르바초프로 넘어갔다. 친구 미하일이 음모에 연루되었을 수도 있다고 전혀 의심하지 않았다. “그의 유머 감각, 그의 용기를 생각한다. …… 당신을 지지한 것이 자랑스러우며 TV에서 온갖 전문가란 사람들이 나와서 뭐가 문제였는지 이러쿵저러쿵하겠지만, 당신은 당신의 나라를 위해 옳은 일을 했고 강하고 훌륭했다.” 이것은 작별 인사처럼 들렸다.

급변점

416 러시아 의회 바깥에 모인 수만 명의 사람은 철저한 무방비 상태였지만, 차가운 가랑비를 맞으며 자리를 지켰다. 그들은 민주적으로 선출된 정부를 보호하기 위해, 공격이 일어나면 의회 건물을 보호할 인간 방패 역할을 하기로 결심했다. 그 가운데는 영국 대사의 부인인 질 브레이스웨이트도 있었다. 용감한 여성인 그녀는 “고르바초프와 민주적 가치를 옹호하기 위해” 바리케이드로 가자며 러시아 친구들을 설득했다. 이따금 세간의 이목을 끄는 인물이 나타나 방어자들의 사기를 북돋웠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첼리스트 므스티슬라프 로스트로포비치가 벨리 돔을 지키기 위해 미국에서 돌아왔다. 모스크바의 부시장 유리 루시코프는 의회 건물에서 밤을 새우려고 임신한 아내와 함께 왔다. 예두아르트 셰바르드나제도 아내인 나눌리에게는 알리지 않고 그날 저녁 의회로 찾아와 건물 앞의 군중에게 모습을 드러냈다. 그런 유명 인사들이 나타나자 군중은 폭력 사태를 피할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가졌다.

420 옐친은 훈타의 구성원이 무자비한 냉소주의자와 전체주의적인 폭군이 아니라 “평균”

크류치코프와 훈타의 창시자들은 명확한 계획이나 실행 가능한 경제프로그램 없이, 무엇보다도 무슨 수단을 써서든 저항을 분쇄겠다는 결의 없이 비상 통치를 도입했다. 바상 통치는 회개와 도덕적 붕괴라는 소극으로 끝났다

421 실패한 비상통치는 옐친과 그의 민주파 추종자 및 지지자에게 고르바초프와 헌정 질서를 대신해 집행 권한의 수단을 장악할 역사적인 기회를 제공했다. 상상할 수 없었던 일이 필연이 되었다. 그리고 이는 소련의 정치적 죽음을 뜻했다.

내무부 장관 보리스 푸고는 규칙에 따라 행동한 훈타의 유일한 정회원이었다. 그와 아내는 자식과 친지에게 유서를 남기고 총 옆에서 죽은 채로 발견되었다. “나는 범죄에 맞먹는, 전적으로 뜻밖의 실수를 저질렀다.” 이것은 1809년에 나폴레옹이 귀족인 정적을 암살한 것을 두고 프랑스 정치가가 “이건 범죄보다 나쁘다. 이건 대실수다”라고 한 유명한 말을 바꾼 것이다. 암살은 범죄였지만 황제는 어리석은 실수를 저질렀는데, 그 일로 적만 늘었기 때문이다.

고르비 구하기

12장 종말

파티는 끝났다

433 고르바초프가 기자들과 러시아 민주주의자들에게 질문 공세에 시달리는 동안, 옐친은 전경이 보이는 러시아 의회의 발코니에서 대규모 군중의 환호를 만끽했다.

436 고르바쵸프는 묵묵히 “동의함"이라고 갈겨썼다.

439 셰바르드나제의 보좌관은 일기에 “옐친은 그를(고르바초프) 꼭두각시처럼 갖고 놀았다"라고 적었다.

440 대통령령으로 그는 군대와 경찰, 국가 조직 내 당 조직을 폐지했다. 또한 당 재산을 러시아와 그 외 공화국 정부로 이전하도록 승인했다. 마지막으로 그는 당 서기장에서 사임했다.

연쇄반응

442 에스토니아의 독립선언 인정 리트비아 독립 요구

레르손은 “당시, 옐친은 고르바초프에게 이래라저래라하고 어디에 서명할지 지지했다"라고 회고했다.

445 (우크라이나 독립찬성파)그들은 다음과 같은 ‘독립선언법’을 기안했다. “소련의 국가 쿠테타와 관련해 우크라이나에 닥칠 뻔한 심각한 위험을 고려하여” 라다는 “1000년에 걸친 국가 건설 전통을 이어갈” 것을 제안하며 “불가분하고 불가침의” 영토를 보유한 우크라이나 독립국가의 창립을 선언한다는 내용이었다 (…)라다의 독립선언법은 346명의 대원이 찬성하고, 두명은 반대, 다섯 명은 기권하여 가결되었다. ….의원들은 또한 국방부의 창설에 투표하고 공화국 영토상의 모든 소련 군부대의 (우크라이나) ‘국군화’를 약속했다. 이 조치는 그 뒤로 몇 달간 키예프와 모스크바 사이에 심각한 긴장을 일으켰다.

슬라브인들의 전쟁?

451 우크라이나의 분리는 러시아 국가가 흑해의 22개 항구 가운데 19개를 잃을 거라는 의미였다. 러시아-우크라이나 합의가 불공평하다는 감각은 앞으로의 갈등에 조요한 원인이 된다.

”은행으로 달려가기”

452 붕괴하는 소련 국가에서 런던, 뉴욕,스위스를 비롯한 여러 해외 계좌로 부의 막대한 이전은 계속되었다.

455 소련 국가가 갑자기 사라지는 일은 비극일 것이라고…그렇게 되면 소련의 재부 대부분은 “마피아"들의 호주머니로 들어가게 될것이다.

임시 과두정

458 고르바초프는 옐친의 파괴적 행동을 상쇄할 수 있는 필수적인 중재자로서 부상하는 듯했다. …고르바초프의 계획은 이 임시 운영위원회를 포스트소프에트 정부, 즉 옛 연방의 잔해 위에 새 연방을 탄생시키기 위한 가교로 전환하는 것이었다.

460 우크라이나인들은 소련의 금과 통화 보유고에서 자국의 지분도 주장했다. 그러나 소련의 부채를 승계하고 싶지는 않았다.

461 고르바초프를 몰아내자는 오볼렌스키의 제안은 이상주의적이었지만, 많은 이에게 그것은 무정부와 내전의 불길한 전망만 키울 뿐이었다. … 9월 5일 인민대표대회와 헌법은 조용히 역사의 쓰레기통으로 들어갔다. 1900명의 대표들은 짐을 싸서 집으로 돌아갔는데, 여행 가방에 소시지와 크렘린의 뷔페에서만 볼 수 있는 귀한 식품을 챙겨 갔다.

463 고르바초프의 임시정부 도박은 마지막이자 가장 필사적인 움직임이었다. 그가 보유하고 있는 유일한 자산은 소련의 대통령이라는 헌법적 지위와 국제적 명성, 완전한 경제적 붕괴에 대한 공화국들의 두려움이었다. …소련의 대통령은 스스로 리어왕의 처지가 되고 말았다. 신의를 지키겠다는 약속에 대한 대가로 유형의 자산을 내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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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문장에서 말하는
“소련의 대통령은 스스로 리어왕의 처지가 되고 말았다. 신의를 지키겠다는 약속에 대한 대가로 유형의 자산을 내준 것이다”
는 다음과 같이 해석할 수 있습니다:


✅ 문장 해석 요약:
	•	“리어왕의 처지”:
셰익스피어의 비극 리어왕에서, 리어는 딸들에게 왕국을 나눠주고 자신은 권한 없이 명예만 유지하려다 배신당하고 몰락합니다.
→ 고르바초프도 실질적 권력을 잃고 명목뿐인 대통령이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	“신의를 지키겠다는 약속”:
쿠데타(1991년 8월) 이후 고르바초프는 헌정질서를 지키고 소련을 수습하겠다는 입장을 취했지만,
	•	“유형의 자산을 내줬다”:
그 대가로 실질적인 권력, 공산당의 통제력, 군·정보기관 등 권력 자산을 내줌
특히, 옐친 중심의 러시아 정부가 권력을 가져가며 소련 중앙정부는 껍데기만 남음


✅ 역사적 배경 요약:
	•	1991년 8월: **보수파 훈타(국가비상사태위원회)**가 쿠데타 시도 → 실패
	•	쿠데타 직후 고르바초프는 복귀했지만, 권위는 붕괴
	•	옐친은 쿠데타 저지의 영웅으로 떠오르며 러시아 정부의 권한을 강화
	•	고르바초프는 공산당을 해체하고, 연방 해체 압박에도 타협적 태도
	•	결국 정통성과 체면은 유지했으나, 실권은 옐친에게 넘어감

13장 불협화음

신용 종식

470 고르바초프는 두 건의 금융 지원만 약속받았다. 독일은 10월 15일까지 국영 은행에 10억 마르크를 예치하기로 약속했다. 한편 10억 달러의 국가 신용을 약속한 것은 이탈리아 였다….고르바초프의 개인적 신용은 한계에 도달했다.

”겁쟁이 키예프”

471 부시와 베이커는 우크라이나의 분리가 소련 비축 핵무기에 가져올 파급효과를 고민하고 있었다. …지하 격납고에 저장된 총 176기의 ICBM과 42대의 전략 폭격기가 우크라이나 영토에 배치되어 있었고… 우크라이나가 독립한다면 이 막대한 핵전력을 누가 책임질까?

476 (소련은 카불과 쿠바에서 철수한다고 발표)쿠바 정권은 소련 보조금이 끊겼어도 뜻밖에도 살아남아, 미국 측에는 눈엣가시 같은 존재로 남았다. 카불의 나지블라 대통령 정권은 4년뒤에 무너져서 무자비한 탈레반 근본주의 정권으로 대체된다. 이는 미국의 이해관계에 전혀 이득이 되지 않았다. 만약 베이커가 1991년 9월에 미래를 점칠 수 있었다면, 뉴욕 쌍둥이빌딩에서 치솟는 연기와 20여 년에 걸친 미국의 아프가니스탄 군사 점령이 눈에 들어왔을 것이다.

477 베이커는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한 달 전에는 KGB 의장이 고르바초프 대통령으르 체포하더니만, 이제는 KGB 의장이 CIA 모델을 따르려고 미국 법률을 공부하고 있다.”

477 소련이 상임이사국으로 있는 UN 안전보장이사회는 어떻게 될까?

480 카자흐스탄은 1936년에 스탈린에 의해 소비에트의 공화국으로 수립되었고, 냉전기에 공화국은 소련 MIC가 활개를 치는 공간이 되었다. 공화국 지도부는 거대 우주센터와 생물학, 화학 연구소를 비롯해 자국 영토상의 ‘폐쇄 도시’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전혀 알지 못했다. 그곳은 모스크바가 통제하고 자금을 댔다.

”빈말 대잔치”

”러시아의 전략”

494 (부르불리스와 사부로프의 국가 제건 보고서)보고서 작성자들은 본직적으로 고르바초프가 달성하고자 하는 것을 제안하고 있었지만, 고르바초프와 ‘연방 중심’은 빠져 있었다.

우크라이나와 핵무기

498 소련군이 “러시아로 불러난다면” 우크라이나, 벨로루시, 카자흐스탄에 있는 핵무기의 안전은 누가 보장할 것인가?

500 우크라이나에 있는 핵무기는 …러시아에서 조립된것이고,,,,그것은 유지관리가 필요했다. 우크라이나는 그것을 관리할 능력이 없었다…. 핵무기를 러시아로 이관할것인가…보유할 것인가…

502 우크라이나 영토상의 비축 핵무기는 향후 몇 년 동안 우크라이나와 러시아연방 그리고 미국과의 관계에서 핵심이되었다.

502 (우크라이나)키예프에섯 크라우츠크는 공식적인 대통령 선거 운동에 나섰다.

14장 독립

러시아 우위

508 (옐친)그는 소련의 법적 승계 국가이자 강대룩으로서 러이사의 우의와 미래의 그의 역할이 전적으로 미국의 동의에 좌우되리라는 것을 깨달았다.

509 …옐친은 은행 연합을 제안했다….옐친은 부시에 대한 약속은 지키되, 자신의 요구 사항은 고수헀다. 그 결과는 경제에 관한 개소리였다.

510 우크라이나 지도자들은 조약에 서명하기 전에 소련의 금, 다이아몬드 및 귀금속 보유고에서 자신의 몫을 요구했다. …..“품위 있는 결별은 불가능하다. 각자 가능한 많이 집어 가려 한다"라며 사정을 잘 아는 아다미신은 일기에 썼다.

개혁 정부

512 러시아 대통령은 거시경제의 논리와 시장으로의 도약에 동반하는 복합적 문제를 이해하지 못 했다. 그는 개혁을 위한 계획에 대해 모순적이고 일관성이 떨어지는 공식적인 발언을 여러 차례 했다. 부르불리스는 옐친이 중요한 문제에 몰입하려 노력했지만 금방 지쳤다"라고 회고했다. 한편, 그의 음주 문제는 여전했 다. 그가 개혁을 위한 각종 조치를 운용하고 일상적으로 논의하는 자리에 매일같이 참석할수 없다는 것이 금세 분명해졌다. 그는 가이다르에게 가족과 같은 신뢰를 드러내며 그에게 모두 일임했다. 부르불리스는 “얼마 안 있어 엘친은 입버릇처럼 ‘전진. 전진!‘이라고 말했다"라고 회고했다”

512 이 역사적인 순간의 관찰자이자 참여자인 스탠퍼드대학의 경제학자 미하일 베른스탐은 소련의 해체가 “하나의 목표로 합쳐진 이원 정책"이었다고 썼다. 첫 번째 정책은 ‘잔여’ 소련을 인수하여 고르바초프 없이 운영하려는 러시아 개혁가들의 시도였다. 두 번째 정책은 다른 공화국들과 합의하고 보조금과 지원금 시스템을 중지시키려는 시도였다. 개혁가들은 세 가지 목표를 달성하고 싶었는데, 소련 자산을 공평하게 분배하고, 민주주의를 건설하고, 다종족적인 연합을 탄생시키는 것이었다. 안타깝게도 세가지 목표를 모두 달성하기는 불가능했다고 베른스탐은 결론 내렸다.

513 10월 28일, 옐친은 러시아연방 인민대표대회 특별 대회를 소집하여 객혁을 실시하기 위한 특별 권한을 부여해줄 것을 요청했다. 거대한 레닌 흉상 앞에 서서 시장 자본주의로의 신속한 이행 전략을 발표했다.

514 자격 자유화가 거시경제적 안정성을 복원해주고 모든 것을 바로잡으리라는 가이다르의 믿음이 옐친 연설문의 원동력이었다.

517 11월 6일, 옐친은 새 정부를 출범시켰다

중잉이라는 허구

521 크렘린에 있는 고르바초프의 거대한 집무실은 외부 세계와 고립된 섬이 되었다. 그의 책상 위에 놓인 무수한 전화기는 대부분 조용했다. 예전 이라면 그에게 전화를 걸었을 사람들은 이제 투옥되었거나, 해임되거나 엘친에게 넘어갔다. 의기소침하고 신임을 잃은 KGB 전문가들은 더 이상 분석 보고서를 보내지 않았다. 한때 고르바초프 궁정의 일부였던 기성 소비에트 인텔리겐치아는 진즉 옐친에게로 떠났다. 소련 과학아카데미와 소련 작가동맹, 예술가동맹 등 ‘창조적’ 조합들은 투표를 통해 러시아 치하로 들어가기로 결정했다. 8월에 생긴 병이 우울증으로 이어진 라이사 고르바초바는 남편을 배신했다며 모든 사람을 탓하고 공적 생활에서 물러났다. 남은 자문은 체르냐예프, 샤흐나자로프, 야코블레프와 셰바르드나제 정도였다. 후자의 두 사람은 어려움에 처하고 고립된 소련 지도자를 돕기 위해 돌아왔다

522 고르바초프의 구제적 위신에 대한 마지막 결정타는 10월 30일과 11월 1일에 마드리드에서 개최된 중동문제 국제회의였다.

523 고르바초프는 친구인 미국 대통령이 공개적으로 자기를 지지해주길 기대했지만, 부시는 외교적 침묵을 유지했다. 그 대신 그는 고르바초프에게 소련 군부와 핵무기 통제, 우크라이나 독립에 관해 물었다. 소련 지도자는 그런 우려를 일축했다. 그는 부시에게 다시금 돈을 요청했다.

525 소련군….여러 국가에 속하면서 동시에 특정한 국가에 속하지 않는 군대를 위한 선례가 없었다.

526 11월 14일 국무회의 모임은 고르바초프가 연방조약을 얻어내기 위한 최종 전장이 되었다. …다른 참석자들은 이 나라에는 왜 강력한 지도자 한 사람 대신 모든 것을 물어뜯는 기괴한 경쟁자 둘이 있는지 생각했다.

우크라이나를 기다리며

538 고르바초프는 12월 3일 저녁 옐친에게 전화를 걸어 연방조약을 매듭짓기 위해 크라우츠크, 나자르바에프와 즉시 만나자고 제의했다. 러시아 지도자는 “어쨌든 거기서는 아무것도 안 나올 것"이라고 대답했다. 연방 조약 대신 그는 러시아, 우크라이나, 벨로루시, 카자흐스탄의 4자 동맹을 원했다. 고르바초프는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러면 거기서 내 위치는 무엇인가? 그럴게 대할 거라면, 난 빠지지. 얼음 구멍 속에 떠 있는 쓰레기가 될 생각은 없어”. ……인사불성이 된 옐친은 “글쎄, 그냥 그대로 있어"라고 대답했다.

#체첸 536 그곳에서 사는 체켄계 주민들은 비극적 역사를 갖고 있었다. 제정 러시아는 그 지방을 정복하고 반란을 진압했다. 제2차 세계대전 동안 스틸린은 체첸인들이 독일 침략자들과 협력했다고 그들을 카자흐스탄으로 강제 이주시켰다. 스탈린 사후 흐루쇼프는 체첸인들이 본향으로 돌아올 수 있게 허용하고 체첸을 러시아연방 내 자치 공화국으로 회복시켜주었다. 그들의 비극적 역사는 지나간 일이 된 듯했다. 하지만 1991년 8월, 소련 국가의 내부적 파열은 체첸을 무정부 지대로 탈바꿈시켰다. 한 사회학자는 전투적인 젊은이들과 부족적 민족주의자들이 신임을 잃은 소련 엘리트들을 밀어냄에 따라 “산악 지대가 골짜기들을 되찾았다"라고 지적했다. 아프가니스탄전쟁의 참전군인이자 과거 에스토니아 주둔 공군사단 지휘관이었던 조하르 두다예프(0iiohr D udya) 장군은 체첸 국민 혁명’을 이끌었다. 그와 그의 무장 추종자들은 75만 인구의 ‘국가(mation)’ 창설을 선언했는데, 소령은 물론 러시아 연방으로부터 독립한 체첸 공화국이었다. 분리주의적인 크림반도로 날아간 크라우추크와 대조적으로, 옐친은 체첸에 그와 똑같이 대응하길 거부했다. 그는 분리주의자들과의 협상업무를 하스불라토프와 루츠코이에게 일임했다. 회담이 수포로 돌아가자 11월 7일 러시아 대통령은 인정받지 못한 공화국에 비상사태를 선언했다. …고르바초프는 막판에야 이에 관해 통보받고 경약했다.

우크라이나 선거

542 고르바초프는 (우크라이나) 독립이 연방으로부터의 분리를 의미하지않는 다고 생각

544 #1991년 12월 2일 옐친은 크라우츠크(우크라이나 초대 대통령)에게 전화를 걸어 선거 승리를 축하하고 투표 결과가 발표되는 대로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인정할 것이라고 말했다.

15장 청산

최후의 일격

546 레오니드 크라우추크는 …우크라이나 국민투표가 소비에트 제국의 붕괴로 이어진 마지막 일격이 되었다고 주장했다. …우크라이나 국민투표는 소련의 붕괴를 반영한 것이지, 그 원인이 아니었다.

1991년 12월 2일, 소련은 고르바초프의 개혁과 뒤이어 옐친의 가차 없는 분리주의 노선으로 파괴되어 이미 시체나 다름없었다.

547 국가의 주요 기능인 통화 안정성을 담보하지 못하는 국가는 무너질 수밖에 없었다.

548 벨라루스의 민스키로 슈슈케비치는 옐친을 초대한다 슈슈케비치는 리 하비 오즈월드를 가르친 교수이고 오즈월드는 미국에서 망명온

551 슈슈케비치(베레라루스)는 부르불리스(러시아)가 “여러분 ‘소비에트사회주의공화국연방은 국제법의 대상이자 지정학적 실체로서 더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라는 제안 밑에 서명하는 데 동의하시겠습나까?” 라고 외치고 있었다고 회고 했다. ….소련과 소련공산당 중앙위원회, 주권국가들의 연방을 이제 누가 필요로 하겠는가?” 케비치는 러시아 지도자가 “고르바초프는 없어져야 해. 그만! 차르 노릇은 이제 됐어” 라고 했다고도 회상했다. 모든 사람이 기쁘게도, 크라우츠크 제안서에 서명하기로 동의했다.

552 “러시아 정치에서는 많은 것이 음주와 거친 언어를 동반한 온천의 한증탕에서 결정된다…..”

옐친(러시아), 크라우츠크(우크라이나), 슈슈케비치(벨라루스) 가 케비치,포킨, 부르불리스와 함께 문서에 서명했다. ….이제 그들은 소비에트연방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을 들었다. 러시아, 우크라이나, 벨라루스 여여토상의 모든 연방 조직과 기관의 효력이 없어졌다. CIS(독립국가연합)의 본부는 민스크로 정해졌다. 연합 창립의 기반이 되는 문서는 배포되지 않았다.

[1991년 비스쿨리(벨라베자 숲) 협정과 소련 해체](1991년 비스쿨리(벨라베자 숲) 협정과 소련 해체)

553 그들은 비스쿨리에서….크라우츠는 옐친이 심하게 마셨다고 기억….

554 고르바초프는 더는 진지하게 받아들여지지 았고, 사람들은 그를 조롱했다. 그러나 옐친도 권력의 수단은 없었다. 이런 상황은 사실상 무정부 상태보다 나빴다.

554 옐친은 이 역사적 순간에 분명히 엄청난 감정적 갈등을 겪었을 것이다. 우랄의 부트카 마을 출신의 러시아 농민이었던 그가 표트르 대제와 예카테리나 여제가 건설했고, 레닌과 스탈린이 부활시켰던 영역을 방금 해체해버린 것이다. 히틀러의 대군을 물리쳤고, 옐친이 아주 최근까지만 해도 자신과 동일시해온 소련이었다. 그리고 그와 러시아 주권에 투표했던 수천만 명의 사람은 공통의 조국이 없어졌다는 것을 알았을 때 어떻게 느낄 것인가?

555 이 놀라운 청산의 드라마에서 한 가지 아이러니한 측면은 옐친이 크라우추크보다 미국의 인정을 더 간절히 열망했다는 것이다.

미국의 인정

559 고르바초프의 보좌관들은 아직 크렘린 경비들이 출입구에서 검색하지 않는 동안, 자신의 금고에 있는 극비 문서들을 자택으로 옮기기 시작했다. 체르냐예프는 문건과 메모, 정치국과 각종 회의 기록을 집에 보관하기 위해 서류 가방에 담아 무더기로 옮겼다. 샤흐나자로프와 메드베데프, 그외의 사람들도 그렇게 했다. 나중에 그 문서들은 고르바초프재단 문서고를 구성한다.

561 카자흐스탄 지도자는 난처한 처지였다. 카자흐스탄이 러시아의 자원과 옐친의 호의에 기대야 한다는 점을 알고 있었다 …중앙아시아의 다른 공화국 지도자들….그들고 같은 생각…누구도 옐친에게 맞서 고르바초프의 편을 들 생각이 없었다.

563 고르바초프…앞으로 어떻게 할것인가? 그는 “그건 나만의 비밀로 하겠다” … 고르바초프의 계산은 더 이상 중요하지 않았다. 그는 곧 역사가 될 터였다.

568 우크라이나, 벨라루스, 카자흐스탄의 핵무기는 러시아로 옮겨질 것이고… 핵무기 발사 권한을 갖은 고르바초프의 권한은 회수될 것이다.

초강국을 대체하다

571 베이커는 고르바초프와 셰바르드나제를 냉전 종식의 영웅으로 꼽았다.

571 셰바르드나제는 자신을 괴롭히는 생각들을 베이커에게 털어놨다. 페레스트로이카는 왜 실패했는가? 그와 고르바초프는 “시간표나 일정표가 없었고”, 개혁의 단계와 타이밍을 잘못 골랐으며, “경제 분야에서 더 많은 일을 했어야 했다.” 베이커는 친구를 위로했다. 그에게는 소련에 일어난 모든 일이 절대적으로 필연적이었다. “악의 제국”은 일단 “자유라는 요정이 램프에서 빠져나오자” 무너질 수밖에 없었다. 베이커는 고르바초프와 셰바르드나제가 그 과정을 시작하는 유례 없는 용기를 보여주었다고 말했다. “역사는 그렇게 판단할 것”이라고 장담했다. “[페레스트로이카가 아닌] 다른 길은 폭력적인 폭발이었을 것이며, 그때 내전이 일어났을지도 모른다.”

572 지금 일어나고 있는 모든 일은 어쨌든 일어났을 테지만, 더 끔찍한 결과를 낳았을 것이다. 당신은 그 과정을 시작할 용기가 있었고, 나는 50년 뒤에는 모든 것이 괜찮아질것이며, 사람들이 당신을 기억할 것이라고 확신한다 - 베이커가 셰바르드나제 에게 …

576 옐친은 이미 핵에 대한 권한을 차지했지만, 전 세계가 그 사실을 알길 원했다.

580 야코블레프는 고르바초프가 요란하게 퇴장하기로 했다면 어떻게 되었을지 생각했다. 그는 옐친과의 만남을 거부할 수도 있었다. 소련 인민대표회의 재소집을 요구하고, 자신을 대체할 새로운 대통령이 선출될 때까지 기다리겠다고 고집할 수도 있었다. “그런 가능했다! 그러면 나라가 어덯게 되었을지, 그리고 외국 정부는 얼마나 난처했을지는 상상만 할 수 있을 뿐이었다” 고르바초프도 그 방안을 잠시 고려했다가 포기했던 것 같다.

581 1991년 12월 , 진짜 레닌이 마법처럼 모스크바 시내에 나타났다고 해도 누구도 그에게 신경 쓰지 않았을 것이다. 사람들은 일용한 양식을 찾아 일상의 곤경에 허덕이고 있었다.

581 이 연설문(고별사)에서, 고르바초프는 리더십의 실패를 인정하지 않고, 비판에 응답하지도 않았다. 그 대신 페레스트로이카의 업적들, 국내의 자유화와 냉전 종식을 열거했다. 그런 성공을 거두었자면 왜 나라가 해체되고 그는 권력을 잃었는가? 고르바초프는 이 실패를 다른 이들의 탓으로 돌렸다. 당과 경제 관료 집단의 저항, 낡은 관행과 이데올로기적 무기력, 그는 “불관용, 낮은 수준의 정치 문화, 변화에 대한 두려움”에 관해서도 언급했다. 이것이 “우리가 그렇게 많은 시간을 잃어버린 이유”라고 설명했다.

581 (고리바초프가) 퇴임하던 날, ….구소련 공화국 지도자들은 아무도 전화하지 않았다.

582 고르바초프는 사퇴서에 서명할 때 쓸 자신의 소련제 펜을 시험해봤다. 펜은 말을 듣지 않았다 CNN회장 톰 존슨이 자신의 몽블랑 펜을 빌려줬다.

583 고르바초프의 자문들은 그 순간을 평화적이고 진화적인 개혁으로, 복잡한 다종족 국가를 하나로 유지하려 했던 시도의 비극적 실패로, 1000년간 이어진 국가성의 종결로 바라봤다. 고르바초프의 역사적 위업들에 초점을 맞춘 체르냐예프조차도 1991년을 “국가의 퇴락, 경제의 파괴, 사회 혼란의 해”로 묘사했다. 샤흐나자로프는 몇 달 뒤에 “나라는 망했고, 사람들은 더 가난해졌으며, 어디서나 피가 흐른다”라고 논평했다. 그는 낙관적인 어조를 띠려고 애썼다. “이 혼란으로부터 환골탈태한 새로운 러시아가 등장할 것이다.” 셰바르드나제의 보좌관 스테파노프는 고르바초프의 연설이 “지루하고, 무색무취하고, 변함없이 아무런 뉘우침이 없”다고 느꼈다. 대다수 소련 사람은 방송을 보지도 않았다. 나라는 얼어붙은 것 같았고, 유일한 활동은 필사적인 장보기였다. 가이다르의 아내와 옐친의 최측근 보좌관의 아내들마저도 식품을 사려고 줄을 서야 했다. 가격 자유화를 예상해, 모든 공급업자가 모스크바와 상트페테르부르크로 식량을 공급하려 하지 않았다. 화물선들은 대금을 받을 때까지 화물을 내리지 않았다. 창고는 가격 자유화 때까지 물자를 쌓아두려는 ‘마피아’ 거래업자들의 차지였다.

585 “ (미국의) 스코크로푸트는 지도자로서 고르바초프의 자질이 소련의 붕괴를 가져왔다고 믿었다. 그는 “빛나는 재기에도 불구하고 고르바초프는 치명적 결점이 있어 보였다”라고 성찰했다. “그는 힘든 결정을 내리고 그것을 끝까지 밀고 나가는 능력이 없었던 것 같다. 시간을 끌면서 결단을 미루고 임기응변으로 대응하는 것이 예술의 경지였다.” 이 결점은 “우리 쪽에서 봤을 때는 …… 매우 고마운 일이었다. …… 고르바초프가 권위주의적이고 스탈린 같은 정치적 의지와 전임자들의 결단력을 소유했다면, 우리는 지금도 소련과 마주하고 있을지 모른다.”

586 (부시는 #1991년 12월 25일 크리스마스 저녁 연설을 했다.)옐친은 미국의 인정 소식을 듣고서, 고르바초프가 비우고 간 크렘린 집무실로 부르불리스와 측근들을 초대하여 함께 승리를 축하했다.

결론

587 이 책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소련은 여러 가지로 나쁜 상황과 불운한 선장의 회생양이었다. 1980년대, 15년간 모든 개혁에 저항해온 소련 지도부는 고르바초프 아래서 엄청난 규모의 경제적,정치적 변화를 개시했다. 그러나 그러한 개혁을 뒷받침하는 구상과 계획은 치명적으로 넓았고, 경제적으로 결함이 있었으며, 기존 경제와 정치체를 내부로부터 파괴했다. 개혁의 설계자, 그중에서도 미하일 고르바초프는 실패를 인정하고 경로를 수정할 수 없었다. 그와 동시에서 그들은 구시스템의 잔해에서 새로운 행위자들이 등장하는 것을 가능케 했고, 그 행위지들이 혼란을 물려받았다.

1985년에 구시스템을 물려받고 그 시스템에 의해 타락한 국민을 통치하는 소련 지도자라면 누구든 헤라클레스 같은 과업에 직면해서 문제로 가득한 판도라의 상자를 열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미하일 고르바초프는 신화 속 영웅이 아니었다. 그는 소련 사람을 억압과 순응주의의 유산에서 해방시키려 했지만, 알렉산드르 2세나 세르게이 비테 백작, 표트르 스톨리핀 총리 같은 과거 러시아의 대(개혁가로부터 교훈을 배우지 못했다.그 대신 그의 롤 모델은 러시아 국가의 대파괴자 블라디미르 레닌이었다. 1917~1922년 맹렬한 볼셰비키가 그랬던 것처럼, 고르바초프는 자신의 운명이 혁명적 규모의 변화를 포용하는 것이라고 느꼈다.

587 그는 행동보다 말을, 폭력보다 의회의 합의를, 독재보다 권력 이양을 선호했다.

588 #1991년 8월 단일 국가를 보존하는 욕망으로 촉발된 훈타의 3일 천하는 분명한 설계와 정책 선택지가 결여된 어리석은 행위였다. 군,안보기관, 관료 집단은 누가 승자로 드너날지 기다리며 그저 형세를 관망했다.

588 고르바쵸프의 #리더십 , 셩격, 신념은 소련의 자멸에 주요 요인이었다. 그는 이데올로기적 개혁가적 열성과 정치적 소심함을, 도식적인 메시아주의와 현실과의 거리 두기를, 비전이 넘치고 숨 막히는 외교 정책과 결정적인 국내 개혁을 추진하지 못하는 무능력을 모두 갖췄다. …그러나 폭력과 무력에 대한 혐오감은 보수주의자들도 공유할 만큼 그의 세대에 전형적이었다.

589 1990 ~ 1991년에도 러시아인들 대다수는 강력한 지도자, 더 나은 경제, 국가의 통합을 원했다. 자유 민주주의, 시민권, 민족 자결주의가 아니라 말이다. 고르바초프는 이를 제공하는 데 실패했고, 그래서 그들은 그 대신 옐친을 지지했다.

596 19세기 중반 이탈리아가 통일된 뒤 한 자유주의 정치가는 유명한 말을 했다. “이탈리아가 만들어졌다. 이제 남은 일은 이탈리아인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1991년 12월에 구소련 국가의 지도자들은 “소련이 사라졌다. 남은 일은 새로운 국가와 그 시민들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라고 말할 수 있었으리라.

구소련 공화국의 주민들은 새로운 정체성을 흡수하는 법을 터득해야 했다.

597 1980년대에 러시아 인구의 대략 30퍼세네트는 빈곤층이었다. 1990년대에 들어서자 70~80퍼센트가 거기에 속했다. 소련에는 사회 안전망이 있었고 인위적으로 낮게 책정된 가격으로 기초식품 품목들을 구할 수 있었다. 새로운 러시아에서는 사회보장과 복지제도 들이 많이 파괴되었다. 과거의 안전망은 사라졌다. 그리고 대다수의 지역과 도시에서 범죄와 마피아 같은 것이 판을 쳤다.

598 서방 사람들이 보기에 러시아 대통령은 전임자 고르바초프가 갖고 있던 위상이 없었다 … 무저니는 경제, 체첸과 여타 지역에서의 종족 갈등, 그리고 빈곤 인구를 거느린 옐친의 러시아가 무엇을 대변하는지는 분명하지 않았다.

599 유럽연합과 NATO는 권력과 부, 안보의 구조들을 규정했다. “유럽으로 복귀"하겠다는 한결같은 결의를 보인 발트3국만이 포스트소비에트 공화국들 가운데 유일하게 성공했다.

#1999년 …건강과 권위가 완전히 망가진 옐친은 1991년에 훈타를 물리치는 것을 도왔던 젊은 전직 KGB장교 블라드미르 푸틴을 후계자로 골랐다.

만약 18세기에 표트르 대제가 러시아를 개혁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그리고 레닌과 볼셰비키각 1918년 ~ 1921년에 권력을 잡지 않았다면? 고르바초프의 개혁이 없었다면 소련은 10년을 더 버티다가 훨씬 더 폭력적으로 붕괴했을 수도 있다.

603 #역사 가 자유와 민주주의의 필연적 승리에 관한 도덕적이었던 적은 없다. 그 대신 세계는 항상 그래 왔던 대로, 이상주의와 권력, 훌륭한 통치와 부패, 자유의 고조와 위기와 비상시에 자유를 제한해야 할 필요 사이의 투쟁의 장이다.

603 사라져버린 소련의 유령은 유럽과 아시아, 세계를 떠돌고 있지 않다. 그러나 소련의 갑작스러운 소멸에 대한 수수께끼는 우리 시대 사람들의 상상 속을 여전히 떠돌고 있다. 전에 승승장구하던 서구 자유주의적 질서의 확실성이 우리 발아래서 흔들리고 깍여 나가는 모습을 목도하는 지금 특히 그렇다. 소련의 종식은 거대한 역사적 의미와 어마어마한 불확실성으로 가득한 인간 드라마였다. 그것은 냉전 종식과 탈식민화, 자유주의적 자본주의의 지구적 서사에서 하나의 각주로 축소될 수 없다. 이 놀라운 이야기는 우리에게 지속성의 외관상 확실성을 믿지 말라고 가르쳐주며 미래의 갑작스러운 충격에 대비할 수 있게 도와주리라.

6.읽으면서 떠오른 생각들

  • 소련의 붕괴
    • 망가지는 경제, 정치적 무질서, 민족-종족적 갈등, 그리고 이런 이슈를 대하는 엘리트들의 반응과 대응을 연구한다.
  • 고르바초프
    • 체르노빌 원전 사고의 악재도 격는다
  • 옐친을 정치국으로 대려온다
    • 스탈린 시절의 부패를 청소하기 위해 옐친을 시킨다
    • 옐친은 대중의 인기를 얻게 되었고, 대신 정치권의 미움을 산다
      • 어쩔수 없는 정치적 결과 이구나, 대중의 인기얻는자는 권력을 치는 자이고
      • 권력을 치니까 권력자에게 미움을 받는다.
    • 옐친은 신경쇠약에 자해 까지 가하고
      • 고르바초프는 그를 정신 병원에 보내고, 강한 약으로 치로하려한다.
      • 옐친은 분노한다 66
  • 2장
    • 레닌은 러시아와 비러시아 지역의 억압과 피억압 관계를
      • 연합체라는 개념으로 소비에트사회주의공화국연방 국명으로 통합하였다
    • 그러나 스탈린은 소비에트연방을 점차 단일 국가로 통치했다. 82
  • 3장
    • 소련의 사람들이 해외 출국 금지가 완화 되자
      • 서방 국가들을 방문하고 문화적 충격에 빠진다.
      • 국가에 분노를 하게된다
        • 상점에 가득한 먹거리들, 그들의 조국과 천지차이..그들의 시스템은 정상이 아니라는 생각이 퍼지기 시작
    • 폴란드에서 자유선거가 실시되고, 헝가리가 오스트리아와의 국경을 개방 . 가장 상징적인 사건은 1989년 11월 9일 베를린 장벽의 붕괴
  • 4장
    • 러시아는 소련의 대다수 인원을 차지하는 국가이다
    • 옐친은 러시아의 대통령이 되고자하고, (소련이 망할것을 안것인지) 러시아 만을 위한 정책들을 구상하고, 고르바초프의 호화스러움동 비판하며 선거 운동을 하여 당선된다.
  • 5장
    • 러시아에서의 500일 프로그램은 1990년 소련 내 러시아공화국이 시장경제로의 급진적 전환을 목표로 독자적으로 추진한 경제개혁안이다. 러시아공화국 최고회의는 1990년 11월 1일부터 이 계획을 단계적으로 시행하기로 결정하고, 자원과 산업에 대한 관리권을 확보하려 했다. 그러나 이 계획은 소련 연방정부와의 권력 충돌을 불러일으켰다. 고르바초프 대통령은 연방법 우선 원칙을 내세우며 500일 계획을 사실상 백지화했고, 러시아공화국과 연방정부 간 대립이 심화되었다
    • 러시아에서의 500일 프로그램은 계획대로 완전하게 실행되지 못하고, 소련 연방정부와의 정치적 갈등과 보수세력의 반발로 인해 사실상 무산되었으며, 이후 러시아 경제는 보다 점진적이고 혼란스러운 체제전환을 겪었다고 할 수 있다
  • 6장
    • 옐친은 러시아와, 슬라브 공화국, 카자흐스탄과 경제적, 정치적 동맹을 구축한다
      • 그럼 소련은 모가되나?
      • 고르바초프는 옐친의 계획에 관해 알고 있었지만 , 간섭하지 않았다. 헐
  • 7장
    • 리투아니아에서 기초품 물가 올리자 폭동
    • 고르바초프는 어떻게든 내전과 전쟁을 막으려 했다
      • 리투아니아에서 14명 사망자 발생으로 그는 엄청난 비난을 받는데
    • 미국은 걸프전을 벌이고 민간인 사망자 10~20만명이 죽는다
      • 언론은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
  • 8장
    • 러시아 옐친 대통령 당선
      • 소련의 대통령- 고르바초프
    • 소련연방은 점점 희미해져간다
      • 미국과, 유럽 1국들이 옐친 대통령을 인정, 축하하자 옐친은 기뻐한다.
    • 러시아는 국정을 운영해본 경험이 없어 되는일이 없었다
  • 9장
    • 고르바초프는 너무 순진한가.
      • 그의 권위로 서방, 미국이 자금을 빌려줄거로 믿었는데
      • 부시는 그럴 생각이 없었다.
    • 예전 스탈린도, 독일 나치가 처들오 올거라고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 히틀러와 한 약속을 믿었기 때문에
  • 10장
    • 고르바초프가 크림반도에 휴가를 가고, 거기서 쿠테타를 당한다
  • 11장
    • 쿠테타는 준비없이 시작되었기에, 실패로 끝나고
    • 옐친은 쿠테타로 인해 인기와 입지가 더 강화 된다.
    • 고르바초프는 크림반도에서 무사히 돌아 온다.
  • 12장
    • 쿠테타의 결과는 고르바초프의 마지막을 장식한다
    • 이제 더이상 군중은 소련을 원하지 않는다.
  • 13장
    • 소련이 해체수순으로 가고 있다.
    • 미국은 분리 독립되는 국가들..특히 우크라이나에 배치되어 있는 무기들, 핵무기들을 어떻게 해야할지 고민한다.
    • 미국은 이제 소련한국가가 아니라,,,분리 독립된 각각의 나라들과 다시 협상하고 외교를 맺어야 한다…
    • 소련이 없어지면, 경제와 군대는 어떻게 할것인가.
    • 대안으로 제시된 보고서중에…
      • 러시아각 그 역할을 하고 군대도 러시아로 편입하는걸 제시한다
      • 러시아와 그 연방들…….그게 소련 안닌가…
      • 고르바초프의 민주주의,자본주의 를 도입하려는 노력이 소련은 못하게 되었지만, 러시아에게 비슷한 역할을 할 수 있는 토대가 된것일까
  • 14장
    • 우크라이나의 분리 독립은 많은 난제들이 있다
      • 528
    • 소련는 재정이 망가져 간다
      • 석유 수출 , 판매 수익금은 국고로 들어오지 않고
      • 금과 다이아몬드의 보존 현황도 모호하고
      • G7은 소련의 부채를 연장하거나, 금융지원을 하지 않으려 한다.
      • 망해가는 소련에게 누가 돈을 빌려주겠나
    • 우크라이나 독립, 대통령 선거로 인해 소련의 붕괴는 마침표를 향해 간다.
  • 15
    • 옐친…. 우크라이나, 벨라루시, 러시아는 자기들 끼리 소련의 해체를 선언해 버린다.
    • 그런데, 소련의 대통령 고르바초프에게는 알리지도 않고, 미국의 부시에게 먼저 전화하고, 미국의 인정을 갈망한다.
      • 고르바쵸프는 정말 기가 막혔을 듯하다.
    • 크라우추크 우크라이나 대통령과 벨라루스 지도자는 고르바초프를 보기 싫어서 별장으로 피신한다
      • 옐친이 고르바쵸프를 만나고, 욕설이 퍼붓었단다.
  • 결론
    • 1990 ~ 1991년에도 러시아인들 대다수는 강력한 지도자, 더 나은 경제, 국가의 통합을 원했다.
      • 자유 민주주의, 시민권, 민족 자결주의가 아니라 말이다.고르바초프는 이를 제공하는 데 실패했고, 그래서 그들은 그 대신 옐친을 지지했다.
      • 민주주의 라는것이 참으로 아이러니다.
      • 대한민국에서 경제가 어렵다고, 흡집많은 사람일지라도 경제만 살릴거 같으면 대수롭지 않게 뽑았던 MB
      • 대중의 인기있는 사람을 검증도 없이 갑자기 대통령을 시켜 온 세계에 대한민국 망신을 주게 만든 윤.
      • 과연 민주주의를 보완할 정치적 제도들이 개발되어야 한다. 그렇기 위해선 시민들의 정치적, 문화적, 지적 수준이 같이 올라가야 할 것이다.

7. 연관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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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의 지도자

  • 블라디미르 레닌 (1922년 - 1924년): 소련의 초대 지도자로, 러시아 혁명을 이끌었습니다.
  • 이오시프 스탈린 (1924년 - 1953년): 레닌 사후 권력을 잡고 강력한 중앙집권 체제를 구축했습니다.
  • 게오르기 말렌코프 (1953년 3월 - 1953년 9월): 스탈린 사후 짧은 기간 동안 지도자 역할을 했습니다.
  • 니키타 흐루쇼프 (1953년 - 1964년): 스탈린 격하 운동을 주도하고 개혁 정책을 추진했습니다.
  • 레오니트 브레즈네프 (1964년 - 1982년): 장기 집권하며 안정과 보수적인 정책을 펼쳤습니다.
  • 유리 안드로포프 (1982년 - 1984년): 짧은 기간 동안 개혁을 시도했습니다.
  • 콘스탄틴 체르넨코 (1984년 - 1985년): 안드로포프에 이어 단명했습니다.
  • 미하일 고르바초프 (1985년 - 1991년): 페레스트로이카와 글라스노스트 정책을 추진했으나 소련 붕괴를 막지 못했습니다.
continu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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