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FO] 책 정보
- 저자: 저자/김응교
- 번역:
- 출판사: 출판사/arte(아르테)
- 발행일: 2025-02-16
- origin_title: -
- 나의 평점: 7
- 완독일: 2025-06-29 00:00:00
윤동주

1. Befor Qustion
2. Synopsis (개요)
2.1 저자 - {이름}
2.2 주제
2.3 기획 및 지필 의도
2.4 주요 등장 인물
2.5 전체 줄거리
Summery
- 윤동주 시인의 삶과 작품을 공간이라는 새로운 시각으로 조망하며, 잘 알려지지 않았던 시들을 깊이 있게 다룬 점이 인상적입니다. 특히, 윤동주 시인이 작품 속 인물의 고통에 자신을 일치시키는 ‘신체적 글쓰기’ 방식을 사용했다는 분석이 흥미롭습니다.
Keyword
#윤동주 #문학 #클래식클라우드 #김응교 #시인 #평론가 #한국문학 #공간 #작품분석 #독립운동
Author
김응교는 시인이자 문학평론가이며, 숙명여자대학교 순헌칼리지 교수이자 신동엽학회 학회장입니다. 윤동주 관련 저서로 『처럼-시로 만나는 윤동주』, 『나무가 있다-윤동주 산문의 숲에서』, 『서른세 번의 만남-백석과 동주』 등이 있습니다. 평론집으로는 『좋은 언어로-신동엽 평전』, 『그늘-문학과 숨은 신』 등이 있으며, 번역서로는 다니카와 슌타로의 『이십억 광년의 고독』, 양석일의 『어둠의 아이들』 등이 있습니다.
3. After My Idea
3.1 Insight
윤동주 만주 고향에서 일본 유학지 까지를 따라가는 이야기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이 시구를 꼭 기억하고 싶다.
그는 왜 교도소에서 힘없이 죽어갔을까? 그가 그토록 잘못한게 무엇일까?
조선말을 쓴것인가 일제를 비난하는 듯한 시구 때문인가? 무슨 죄로 2년의 실형이 내려졌을까?
그는 왜 2년을 버티지 못했을까? 버틸 이유가 없었을까?
모든 죽어가는 것들에 너무 마음을 쏟았기 때문일까?
조금은 이기적인 생각이 많았으면 어떠했을까?
광복을 몇달 남긴 날..그의 죽음은 더더욱 안타깝다.
그러고 보니 [안네의 일기](안네의 일기) 에서 안네도 그렇게 몇달을 남기고 죽었었다..
3.2 After Qus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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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y) 이 책의 제목을 이렇게 지은 이유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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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w) 어떻게 설명하고 있는가? 어떻게 하라고 하는가? 어떻게 해야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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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ere) 어느 곳에서 쓴 책인가? 어느 것을 위해 쓴건인가? 어디로 가야하는가? 어디에서 읽어야 하나? 그곳은 어떤 곳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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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en) 이책은 언제 쓰여졌는가? 시대적 배경은 무엇인가? 언제를 기준으로 쓰였는가? 언제 할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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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o) 저자는 누구인가? 주인공은 누구이고 어떤 사람들이 나오나? 누구를 위해 저자는 말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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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y) 이책을 통한 질문을 만들기
- 질문 1.
- 질문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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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at) 이 책에서 말하는 주제라는 무엇?
- 알게된 것은 무엇인가?
- 해야할건 먼가?
- 다른 책과 다른 점은 먼가?
- 이 책의 특징은 먼가?
3.3 Top 3 Highlight
4. Key Word 책에서 뽑은 키워드 정리
4.1 키워드 1
키워드-제목 1
5.책 밑줄 정리 (책 밑줄 전체,page)
헤테로토피아란, 다른heteros이라는 단어와 장소topos의 합성어다. 현실에서는 있을 수 없는 유토피아를 대신하는 ‘다른 장소’를 뜻한다. 간단히 쓰면, ‘현실에 설정된 유토피아’다.
이들 중 “나이 서른둘인 청년으로 두만강을 함께 건넜던 김약연 선생은 남종구 선생 문하에서 맹자를 만독萬讀하신 분”(문재린ㆍ김신묵 회고록, 『기린갑이와 고만녜의 꿈』, 삼인, 2006, 32면)이었다. 함께 이주한 유학자와 더불어 김약연 역시 『맹자』에 나오는 군자君子의 모습이었다. …그의 삶은 철저하게 맹자에 기초를 두고 있었다. 김약연은 1868년 9월 12일 함경북도 회령군 동촌 옹희면 제일리 행영에서 태어났다. 김약연이 윤동주 어머니의 오빠, 곧 윤동주에게 외삼촌이었다는 사실은 소년 윤동주에게 평생 축복이었다.
유학자, 독립운동가, 북간도 기독교 지도자, 이 세 가지는 김약연의 삶을 요약할 수 있는 핵심어다.
윤동주, 문익환, 문동환의 멘토도 김약연이었다.
‘사투리’라는 단어는 억압받는 언어를 뜻할 때 쓰겠고, 고영직 문학평론가가 쓰기 시작한 ‘제땅말’은 지역의 주체적 특성이 드러날 때 쓰려고 한다.
「별 헤는 밤」에서 ‘헤다’는 ‘세다’의 함북 제땅말이다. 지금 쓰고 있는 ‘헤아리다’와 어원이 같은 말로, 다른 지역에서는 ‘헤다’에서 ‘세다’로 변했지만, 함북에만 원래 발음이 살아 있다. ‘별 세는 밤’은 돈 세는 듯 차갑게 들리지만, ‘별 헤는 밤’은 훨씬 살갑고 둥그렇게 들린다.
명동학교는 명동교회의 부속학교 같은 모습이었다. 그러던 노력이 명동마을에 급진적인 볼셰비키의 영향이 들어오면서, 기독교 교육에 대해 찬성 혹은 반대하는 갈등이 생기기 시작했다. 경신년 토벌(1920년 8월부터 일제가 자행한 간도 조선인 학살-인용자) 뒤에 일본의 탄압이 더 심해지자 젊은이들은 교회나 교육운동만으로는 한계를 느끼고 공산당에 합류한 것이다. 또 이동휘 선생 같은 이들이 만주에서 독립군 활동을 할 수 없게 되자 러시아로 들어가 소련과 손을 잡기도 했다. 하지만 러시아가 배신을 해 한국 공산주의자들을 무장 해제시키고 많이 죽였다.(중략) 그때는 김약연 선생이 신학교를 한 학기 다니고 목사가 되어, 명동교회 목회와 명동학교 교장을 같이 맡고 있었다.(중략)
— 문재린 김신묵 회고록, 문영금 문영미 엮음, 『기린갑이와 고만녜의 꿈』, 삼인, 2006. 467~468면
윤동주 동생 윤일주
우리가 용정에 자리잡은 곳은 용정가 제2구 1동 36호로서 20평 정도의 초가집이었다. 1937년까지 형의 작품의 대부분은 그 집에서 써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은진중학교 때의 그의 취미는 다방면이었다. 축구 선수로 뛰기도 하고 밤에는 늦게까지 교내 잡지를 내느라고 등사 글씨를 쓰기도 하였다. — 윤일주, 「윤동주의 생애」, 《나라사랑》 23집, 1976. 153면
바다도 푸르고, 하늘도 푸르고, 바다도 끝없고, 하늘도 끝없고, 바다에 돌 던지고 하늘에 침 뱉고 바다는 벙글하늘은 잠잠 둘 다 크기도 하오. — 윤동주, 「둘 다」(1937년 추정) 전문.
역사를 지키는 투쟁은 기관총에 의해서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망각에 저항하는 기억이야말로 지루한 투쟁이다. 지옥 같은 세상에서도 살 만한 세상을 꿈꾸는 판타지를 유지하는 것은 지루하기 짝이 없는 잔혹한 낙관주의cruel optimism다. 대학교 초년생의 한낱 달뜬 마음을 담은 소박한 소품일지 모르나, 여기에는 죽지 않는 저항의 씨앗이 담겨 있지 않은가.
「새로운 길」을 시발로 하여 금지된 언어로 계속 시를 쓰며 그는 금지된 시대에 균열을 일으켰다. 그에게 “새로운 길”을 가자는 의지는 『아Q정전』(루쉰)에 나오는 비겁한 정신승리법이 아니다. 윤동주는 인간답게 사는 세상을 향해 끊임없이, 건너고, 지나고, 넘어서는, 구체적인 실천을 강구한다.
딴은 얼마의 단어를 모아 이 졸문을 지적거리는 데도 내 머리는 그렇게 명석한 것이 못 됩니다. 한 해 동안을 내 두뇌로써가 아니라 몸으로써 일일이 헤아려 세포 사이마다 간직해두어서야 겨우 몇 줄의 글이 이루어집니다. 그리하여 나에게 있어 글을 쓴다는 것이 그리 즐거운 일일수는 없습니다. 봄바람의 고민에 짜들고 녹음의 권태에 시들고, 가을 하늘 감상에 울고, 노변爐邊(난로 변-인용자)의 사색에 졸다가 이 몇 줄의 글과 나의 화원과 함께 나의 1년은 이루어집니다. — 윤동주, 「화원에서 꽃이 핀다」
#글쓰기
나무가 춤을 추면 바람이 불고, 나무가 잠잠하면 바람도 자오 — 윤동주, 「나무」(1937.3)
바람이 나무를 흔드는 것이 아니라, 나무가 바람을 만든다는 생각 세상의 중심은 나다,
모든 인간은 자기 의사와 상관없이 이 땅에 던져진 존재다. 남이 이 땅에 던졌으니 ‘피투彼投, Geworfenheit’라고 한다.
그 삶을 의미 있게 살려면 기획하며 살아야 한다. 기획하며 자기 몸을 던지는 자세를 ‘기투企投, Entwurf’라고 한다. 보람 있게 살아가려면 날마다 선택해야 한다.
[정지용 시인](정지용 시인) 과 윤동주가 만나고 머물던 북아현동 지용소공원 공원
병원 - 윤동주
살구나무 그늘로 얼굴을 가리고, 병원 뒤뜰에 누워, 젊은 여자가 흰 옷 아래로 하얀 다리를 드러내 놓고 일광욕을 한다. 한나절이 기울도록 가슴을 앓는다는 이 여자를 찾아오는 이, 나비 한 마리도 없다. 슬프지도 않은 살구나무 가지에는 바람조차 없다.
나도 모를 아픔을 오래 참다 처음으로 이곳에 찾아왔다. 그러나 나의 늙은 의사는 젊은이의 병을 모른다. 나한테는 병이 없다고 한다. 이 지나친 시련, 이 지나친 피로, 나는 성내서는 안 된다.
여자는 자리에서 일어나 옷깃을 여미고 화단에서 금잔화(金盞花) 한 포기를 따 가슴에 꽂고 병실 안으로 사라진다. 나는 그 여자의 건강이, 아니 내 건강도 속히 회복되기를 바라며 그가 누웠던 자리에 누워 본다.
십자가十字架 쫓아오든 햇빛인데지금 교회당敎會堂 꼭대기십자가十字架에 걸리었습니다. 첨탑尖塔이 저렇게도 높은데어떻게 올라갈수 있을가요. 종鍾소리도 들려오지않는데휫파람이나 불며 서성거리다가 괴로왓든 사나이행복幸福한 예수ㆍ그리스도에게처럼 십자가十字架가 허락許諾된다면 목아지를 드리우고꽃처럼 피어나는 피를어두어가는 하늘밑에조용히 흘리겠습니다.(一九四一, 五, 三一)
1938년 4월 9일에 연희전문에 입학하여 1941년 12월 27일에 졸업하기까지 윤동주가 경성에서 지냈던 공간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938년 1학년 연희전문 핀슨홀 기숙사(강처중ㆍ송몽규와 거주)
1939년 2학년 북아현동ㆍ서소문 일대 거주(정지용 집 방문)
1940년 3학년 연희전문 기숙사
1941년 4학년 신촌 하숙(정병욱과 1개월 거주 )
1941년 59월 ‘누상동 9번지’ 하숙(정병욱과 함께)
1941년 912월 북아현동(정병욱과 함께)
https://www.seouland.com/arti/culture/culture_general/5340.html
윤동주 하숙집 1941년 생활하던 터 누상동 9번지
수성동 계곡, 조선시대 화가 겸재 정선이 이곳 풍경을 화폭에 담았따.
331 “어머니, 동주 형 시 원고예요. 들키면 위험해요. 저와 동주 형이 살아 돌아올 테니 소중히 간수해주세요.” 망덕산 넘어오는 길목에 있는 주조장 집에는 수시로 일본 순사들이 드나들었다. 어머니는 말없이 원고를 보자기에 싸서 항아리에 넣고, 마룻바닥 아래 항아리를 묻은 뒤 그 위에 마루를 덮는다. 금지된 언어로 쓴 글은 즉시 반역이 되는 광포한 시대였다. 어둠 속에서 1년 7개월간 숨을 고르던 19편의 생명, 지상에 한 권밖에 없는 자필원고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는 생기롭게 살아남는다.
윤동주 생애의 결정적 장면
the Life of yun dong-ju
1899 명동 커뮤니타스의 탄생
1899년 함경도 출신의 김약연, 김하규, 문병규 등이 140여 명을 이끌고 ‘비둘기 바위’라는 뜻의 부걸라재로 이주하고, 이후 윤동주의 조부인 윤하현 등이 합세한다. 동학농민혁명의 실패와 일본군의 토벌과도 관련된 것으로 보인다.
1901년 『맹자』를 가르치고, 맹자 사상에 기초를 둔 공동체를 만들고자 김약연은 서당 규암재를 설립한다.
1906년 용정에 이상설의 주도로 서전서숙瑞甸書塾이 설립된다. 하지만 이상설이 헤이그 특사로 떠나면서 서전서숙은 일 년 만에 문을 닫는다.
1908년 4월 27일 명동마을에서도 신학문 교육이 필요하자 규암재, 소암재, 오룡재를 합하고 서전서숙을 계승해 명동서숙明東書塾을 개교한다.
1909년 4월 명동서숙을 명동학교로 발전시켜 김약연이 초대교장으로 취임한다. ‘동방을 밝히는 곳(明東村)’이라는 뜻의 ‘명동마을’로 불리기 시작한다.
1910년 3월 명동중학교가 세워진다. 명동학교 설립자 김약연의 누이동생 김용과 결혼한 윤동주의 아버지 윤영석은 명동학교에서 교사로 가르친다.
1917년 12월 30일(1세) 아버지 윤영석(18951962)과 어머니 김용(18911948)의 장남으로 윤동주가 태어난다. 갓난 아기 윤동주, 유아세례를 받는다.
1918년(2세) 11월, 길림에서 39인이 발표한 ‘무오독립선언’에 김약연도 참여한다.
1919년(3세) 3월 ‘간도 독립선언포고문’ 작성에 참여한 김약연은 동간도 3ㆍ13 만세운동을 이끌고, 체포되어 2년 동안 옥고를 치른다.
1920년(4세) 10월 20일 일본군 간도토벌대는 명동학교를 파괴하고, 1925년에는 명동학교를 폐쇄한다. 이때까지 명동학교는 17년간 1,200여 명의 학생을 교육했다.
1923년 9월(7세) 명동소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던 윤동주의 아버지 윤영석은 도쿄에 유학 갔다가 관동대지진을 겪고 귀국한다.
1925 소년 시절부터 글을 쓰다 1925년(9세) 명동소학교에 입학하여 고종사촌인 송몽규 등과 함께 문예지 『새명동』을 만든다. 1931년(15세) 3월 20일 명동소학교를 졸업하고, 화룡현립 제일소학교에 편입하여 1년간 공부하다가, 온 가족이 용정으로 이사하여, 윤동주는 용정 은진중학교에 입학한다. 1935년(19세) 소학교 동창 문익환이 다니는 평양 숭실중학교에 4월 학기에 진학하려 했으나 시험에 낙방하여 마음에 상처를 받는다. 10월 숭실중학교에 입학하여 학우지『숭실활천』15호에 시 「공상」을 발표한다. 12월 숭실학교 학생들이 신사참배를 거부한다. 1936년(20세) 1월 18일 조지 S. 맥퀸(한국명 윤산온) 교장도 신사참배를 거부하여, 1월 20일 교장직에서 파면된다. 이후 숭실중학교가 무기휴교로 폐교된다. 3월 문익환과 함께 용정에 있는 5년제 광명학원 중학부 4학년에 편입한다. 1937년(21세) 9월 금강산과 원산 송도원에 수학여행을 다녀와서 「바다」, 「비로봉」을 쓴다. 졸업 후 의대 진학을 원하는 아버지와 갈등하다가 조부 윤하현이 중재하여 연희전문학교 문과에 진학하기로 한다. 1938 연희전문학교에 입학하다 1938년(22세) 2월 17일 광명중학교를 졸업하고 경성京城으로 간다. 4월 9일 연희전문학교에 입학하여, 송몽규, 강처중과 핀슨홀에서 한 방에 기거한다. 최현배 교수의 수업을 듣는다. 11월 27일 이화여자전문학교 협성교회 영어성경반에서 공부한다.
1939년(23세) 연희전문 2학년 윤동주는 『조선일보』 학생란에 산문 「달을 쏘다」를 발표하고 그 해 『소년少年』에 시를 발표하며 처음으로 원고료를 받는다. 9월 「자화상」,「귀뚜라미와 나와」를 쓰고 일년 이삼 개월 동안 글을 발표하지 않는다. 11월 조선총독부는「조선민사령 중 개정의 건」을 발표하여 조선 민족 고유의 성명 제도를 폐지하고, 일본식의 ‘씨氏’ 명으로 바꾸도록 강요한다. 1939.9-1940.12 침묵기, 깊은 성찰을 하다 1940년(24세) 2월 11일부터 창씨개명령이 시행되어, 8월 10일까지 일본식 성씨를 결정하여 제출해야 하는 상황에 처한다. 5월 전쟁으로 인한 물자 부족으로 연희전문학교 기숙사의 식사가 나빠지자 후배 정병욱과 함께 연희전문 기숙사에서 나온다. 북아현동, 누상동 9번지 등지에서 정병욱과 하숙한다. 12월 「팔복」, 「병원」, 「위로」를 쓰며 다시 시를 발표한다.
1941 한 권의 시집이 탄생한다 1941년(25세) 이화여자전문학교 협성교회 영어성경반에서 계속 공부한다. 12월 27일에 연희전문학교 문과 졸업을 앞두고 시 19편을 골라 시집 『병원』을 내려 했으나. 위험하다는 이양하 교수의 만류로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라는 제목으로 바꾼다. 77권을 내려 했으나 내지 못하고, 세 권만 묶어 한 권은 자신이 갖고, 나머지를 이양하 교수와 정병욱에게 건넨다.
1942 일본으로 유학가서 투옥되다 1942년(26세) 1월 29일 ‘히라누마 도주平沼東柱’라는 이름으로 ‘창씨개명계’를 연희전문에 제출한다. 창씨개명계를 내기 닷새 전 괴로워하며 「참회록」(1942.1.24)을 쓴다. 3월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 성공회에서 운영하는 도쿄 릿쿄대학 문학부 영문과에 입학한다. 릿쿄대학에 군국주의 교육이 심하여, 6개월 만에 중퇴한다. 10월 가장 좋아하는 시인 정지용이 다닌 교토 도시샤대학 영문학과에 편입한다. 1943년(27세) 7월 14일 귀향길에 오르기 전 치안유지법에 따른 사상범으로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교토의 시모가모 경찰서에 구금된다. 1944년(28세) 3월 31일 교토 지방 재판소에서 송몽규와 함께 치안유지법 제5조 위반죄로 2년형을 선고받고 후쿠오카 형무소에 수감된다. 1945년(29세) 2월 16일 오전 3시 36분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옥사하다. 부친 윤영석과 당숙 윤영춘이 시신을 수습하러 일본으로 간다. 3월 6일 장례식을 치른다. 조부 윤하현의 비석으로 쓰려고 준비했던 흰 돌을 윤동주의 비석으로 사용한다. 1947년 2월 13일 강처중이 정지용에게 부탁하여 『경향신문』에 윤동주의 유작이 「쉽게 씌어진 시」부터 소개되고, 사흘 후 서울 소공동 플라워 회관에서 2주기 추도회가 거행된다. 1948년 2월 윤동주의 3주기 추도식에 맞춰 윤동주의 유작 31편과 정지용의 서문으로 이루어진 유고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초간본이 정음사에서 간행된다. 1954년 중학교 2학년 교과서에 「새로운 길」이 실리면서 지금까지 윤동주 시는 늘 교과서에 실린다. 1990년부터 일본의 출판사 치쿠마쇼보(筑摩書房)에서 제작한 『현대문』 교과서에 윤동주 시가 실린다. 8월 15일 윤동주 시인에게 건국공로훈장 독립장이 추서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