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선한 지식인이 나쁜 정치를 할까

1. Befor Qustion
https://www.gmeum.com/gather/detail/3132 그믐 독서모임
2. Synopsis (개요)
Summery
이 책은 선조 집권 이후 사림의 정치적 공간이 열렸으나, 선조 8년(1575) 동서분당부터 선조 23년 기축옥사까지 15년간 ‘왜 선한 지식인이 나쁜 정치를 할까’라는 질문에 대한 치열한 고민의 결과입니다. 저자는 사림의 분열이 ‘스스로 확신한 도덕적 정당성’에 기인하며, 이는 권력에 대한 욕망과 결합해 파국으로 이어졌다고 분석합니다. 이이와 선조의 행적을 중심으로 수많은 인물들의 움직임을 밀착하여 드러내며, 정치적 책임과 대의를 망각했을 때 초래되는 국정의 무정부적 상태를 비판하고 역사적 사고를 촉구합니다.
Keyword
#조선시대 #당쟁 #동서분당 #이이 #선조 #정치사 #지식인 #리더십 #도덕적정당성 #기축옥사
Author
- 이름: 이정철
- 학력: 고려대학교 졸업, 동 대학 석사 및 박사 학위, 미국 UCLA 연구
- 현재 활동: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연구소에서 조선왕조실록 용어 사전 제작 참여
- 연구 관심사: 다양한 시공간에서 인간이 의식적, 무의식적으로 전개한 상황 속 유사성을 제도적 차원에서 이해하고 재구성하는 것
- 주요 저서/공역: 『조선후기 경제변동의 새로운 성격규정을 위하여』, 『조선후기사 연구의 현황과 과제』, 『조선시대 공물분정 방식의 변화와 대동의 語義』, 『The Institutional Basis of Civil Governance in the Choson Dynasty』(공역), 『실학, 조선의 르네상스를 열다』 (공저), 『권력이동으로 보는 한국사』, 『성재일기』, 『역사책에 없는 조선사』, 『쟁점 한국사: 전근대편』, 『한강유역의 구석기문화』, 『대동법: 조선 최고의 개혁』
3. After My Idea
3.1 Insight
인간은 자신의 욕망과 욕심을 위해 아무리 좋은 철학적 도구가 있더라도 결국 이기적이 되는가?
책의 제목이 의미 심장하다. 왜 선한 정치인들, 중용을 열심히 학문하고 깊은 성찰을 얻은 선비들이 많았는데, 왜 나쁜 정치를 하게 되었을까?
선조가 동인과 서인에게 적당한 수준으로 힘조절을 한것이 중용을 실행한것인가?
#모순
책이 조선시대의 이야기다 보니 조직의 체계나 용어 역활들이 낮설어 어려움이 많았다. 장이나 절이 끝나면 GPT(Gemini)를 이용해 부가 설명을 읽으며 나름 정리할 수 있었다 그러다 보니 읽는 속도도 더뎠다
정치사를 읽거나, 현재의 정치를 봐도 너무나 답답하고 상식적이지 않은 모습에 머리가 아파온다 돌아보면 그 당파속에서 살아가는 정치인들은 당을 무시하고 살수는 없을 것이기에 무리한 스텐스를 취하기도 하겠다.
핑계없는 무덤이 없다는 말처럼, 그렇다면 모든 행동은 , 결단은 이유가 있고 이해받아야 한다는 말인가? 어디까지 비판하고, 어디까지 허용해 줘야 할까.
이런저럭 불편한 감정속에서도 인간사를 볼수 있는 , 드라마를 보는듯한 재미를 느낄수 있었다. 나의 삶에서 먼것 같지만 직접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는 그들을 어떻게 견제하고 동의해 줄 수 있을까?
사림의 분열을 막으려 했던 이이에 대한 안타까움과 자신들의 역활인 민생과 국가를 위하기 보다 당파를 위해 목숨을 거는 뻘짓하는 정치인들이 에필로그의 저자의 말처럼 안탑깝기 그지 없다.
3.2 After Qustion
성리학을 조선이 선택한 이유는 학문적 성리학이 정치에 도입될 수 있는가? 정치라 함은 조직을 구성하고, 조직원 전체를 위한 체계인데, 성리학이 적절한가? 이치를 연구하고 중용을 추가하는 학문에 전문가가 많았던 조선 중기 선조 시대는 왜 극악의 붕당정치가 역설적이게 심했는가? Gemini 🔍 ‘중용’ 해석의 독점과 배타성 - ‘중용’을 정의하고 실현하는 과정 자체가 정치 투쟁의 무기가됨 👑 권력 구조의 필연적 부패와 타협 📉 민생(民生)보다 명분(名分)을 중시한 오류
3.3 Top 3 Highlight
4. Key Word 책에서 뽑은 키워드 정리
4.1 키워드 1
키워드-제목 1
5.책 밑줄 정리 (책 밑줄 전체,page)
책 『왜 선한 지식인이 나쁜 정치를 할까』 (이정철 저, 너머북스, 2016) 은 조선 선조 8년(1575)부터 23년(1590) 사이의 정치사 — ‘동서분당’에서 ‘기축옥사’에 이르는 15년간 — 을 세밀하게 추적하며, 도덕적 확신을 가진 사림이 어떻게 파국으로 치닫는가를 탐구한 역사 분석서입니다.
🩶 프롤로그
- 조선 정치의 황금기라 여겨진 사림의 시대에 왜 분열과 파국이 일어났는가?
- **“선한 지식인이 왜 나쁜 정치를 하는가”**라는 문제의식 제시.
- 도덕적 신념과 권력욕, 정치적 구조의 상호작용을 탐색.
12 선조 대는 정치의 시대였다. 이 시대은 정치세력의 다양성 면에서 넓은 스펙트럼을 가졌다. ….훌륭한 개인의 인격과 무관하게, 그들의 진정성에 독립하여 작동하는 정치적 힘의 실체는 무엇이었나?
1-이 시기에 갈등했던 정치적 입장들 각각의 내용이 어떤 것이었던가? 2-당시 실제 상황이 어떤 것들이었고, 그것들의 객관적 의미가 무엇이었는지?
⚖️ 전사(前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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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림이 조정에 본격 진입하기 전, ‘훈척정치’와 사화의 시대를 개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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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림은 도덕적 명분을 무기로 권력에 접근했으나 정치 경험이 부족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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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 즉위 이후 드디어 사림 중심의 정치가 시작됨. 25 국가 권력이 공식적으로 천명한 이념과 제도에 따라 정치세력이 구성되고 그것을 기초로 국가를 운영하는 것은 언제 어디서나 쉽지 않은 일이다. 이 기준에서 보면 중종 대와 명종 대 정치 운영은 파행적이었다. 국왕의 인척 즉 처갓집 식구들이 권신으로서 권력을 행사했다. 그들은 정상적인 관료체제를 무시하고 관권을 이용하여 사적 이익을 추구했다. 권신의 인사 전횡은 관료사회의 기강 문란과 부정부패를 가져왔다. 늘 그렇듯이 관권을 이용한 사적인 이익 추구는 국고를 비게 하고 민생 파탄을 불렀다
선조 대 초반을 규정한 정치적 조건과 환경은 크게 3가지였다. 첫째는 구체제의 유산을 청산하는 문제였다. 그것은 시대적 과제였다. 둘째는 선조 대가 명종 대를 이어받았던 방식이다. 구체제 청산이 선조 대 초반의 시대정신 이었고, 많은 신진사림이 조정을 채웠다. 셋째, 선조의 정치적 입장. 신구세력의 갈등
15 이들의 불만을 잘 표현한 말은, 신진사류가 “자기들과 견해가 같은 자는 선인이라고 하고 다른 자는 악인이라고 한다.“는 말이었다. 신진사류의 주장이 객관적이지 못하다는 말이다.
28 이황은 현실정치 쪽은 이준경을, 선조의 공부를 위해서는 기대승을 추천했다. 말하자면 현재를 위해서는 이준경을, 미래를 위해서는 기대승을 추천했던 셈이다. 두 사람은 그만큼 각자의 진영에서 대표성을 띤 인물들이었다. 그런데 그 두 사람이 자신의 진영을 대표해서 심각하게 갈등했다.
29 선조는 누구말대로 움직이는 사람이 아니었다. 자신에게 가장 유리한 것이 어떤 것인지 판단할 수 있는 인물이었다. 이이를 포함해서 아무도 선조의 생각을 읽지 못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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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 (중종): 연산군을 몰아낸 중종반정으로 즉위했기 때문에, 반정 공신인 **훈구파(E1)**를 견제하고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사림파(E2)**를 등용했습니다. 특히 조광조를 중심으로 급진적인 개혁을 시도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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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구파 (E1): 중종반정의 공신들로, 기존의 기득권 세력입니다. **사림파(E2)**의 개혁(특히 위훈 삭제)에 강력히 반발하여 중종과 결탁해 기묘사화를 일으키고 사림파를 숙청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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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림파 (E2): 조광조를 중심으로 왕도 정치를 꿈꾼 신진 세력입니다. 중종의 지원을 받아 개혁을 추진했지만, 훈구파와 중종의 결단으로 기묘사화 때 크게 희생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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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척 (D2, D3):
- 대윤 (윤임 일파, D2): 인종(장경왕후의 아들)의 외삼촌. 사림파와 가까웠습니다.
- 소윤 (윤원형 일파, D3): 명종(문정왕후의 아들)의 외삼촌. 중종 말년과 사후 권력 핵심으로 부상하며, 후일 을사사화의 주역이 됩니다.
조선에 일어난 4대 사화
- 무오사화: 김종직의 ‘조의제문’을 사초에 실은 것을 문제 삼아 사림을 탄압한 사건입니다.
- 갑자사화: 연산군이 폐비 윤씨 사건과 관련된 사람들에게 복수하면서 발생한 사건으로, 훈구와 사림 세력이 모두 큰 화를 입었습니다.
- 기묘사화: 중종이 조광조 등 사림 세력의 급진적 개혁을 견제하기 위해 훈구파와 함께 일으킨 사화입니다.
- 을사사화: 중종의 뒤를 이은 인종의 계승 문제와 얽혀 외척 세력 간에 벌어진 정치적 대립이 사화로 이어진 것입니다.
[조선 시대에 대하여-용어편](조선 시대에 대하여-용어편)
[퇴계 이황 退溪 李滉](퇴계 이황 退溪 李滉)
[율곡 이이 栗谷 李珥](율곡 이이 栗谷 李珥)
[동서분당 사태](동서분당 사태)
🧩 1부 사림의 분열 — 사림의 정치화
1장. 선조 8~10년: 분열의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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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순왕후 사망 → 선조가 친정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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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림 내부에서 ‘동인’과 ‘서인’으로 갈라진 동서분당 발생. 심의겸을 지지하는 측 - 사림의 선배 그룹 (서인) 김효원을 지지하는 측 - 후배 그룹 (동인) 동서 분당 이 책의 주인공(저자의 페르소나?)이 율곡 이이입니다. 이이는 1537년(중종 32년)에 태어나서 1584년(선조 17년)에 세상을 떴습니다. 선조는 1552(명종 7년) 태생이니 이이보다 열다섯 살 어립니다.
이이는 책의 1부에 나오는 동서분당의 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는 심의겸(서인, 1535년 중종 30년)보다는 두 살 연하고, 김효원(동인, 1542년 중종 37년)보다는 다섯 살 연상입니다. 심의겸을 중심으로 선배 사림은 서인이 되고, 김효원을 중심으로 한 후배 사림은 동인이 되었습니다.
- 명분과 도덕의 언어로 갈등하지만, 실제론 정치적 주도권 다툼.
38 인순왕훈는 선조가 즉위한 #1567년 7월부터 다음 해 2월까지 수렴청정을 실시했다. 선조 (宣祖, 1552년 ~ 1608년)는 즉위 당시 16세에 불과했다 그의 아버지 덕흥대원군은 이미 명종 14년에 사망했고, 어미니도 선조가 즉위하기 한달여 전에 사망했다. 그는 체계적인 사제교육은 물론 명시적인 세자 책봉 절차도 없이 갑자기 즉위했다. 그 과정에서 인순왕후가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때문에 여러가지 면에서 인순왕후의 수렴청정은 자연스러웠다.
40 선조는 조선 건국 이래 최초의 군 출신 왕이다
42 (이이가 국정 개혁을 주장했지만) 선조는 “망령되이 (개혁을) 하다가 나라를 망하게 하는 것이, 예전대로 따라 하면서 과오를 적게 하는것만 못하다"고 말하였다. 선조의 이런 정치적 입장은 방계로는 처음 국왕이 된 것에서 비롯된 허약한 정통성 때문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개혁은 선대의 것을 고치는 것이고, 자신으 ㅣ지위의 근거는 바로 선대의 것을 이어받는 것에 있었다. 기본적으로 개혁은 그 내용이 무엇이든, 선조에게는 부담스러운 것이었다.
44 3훈청정치
47 문정왕후 사후에 신진사류는 인사 청탁을 원천적으로 차단할 수단을 찾았다. 그 결과로 나온 것이 낭천체였다. “낭료로 하여금 이름 있는 선비들을 뽑아 임금께 아뢰어 청하도록 하고, 일단 낭천 즉 낭료의 추천을 받은 자이면 시험을 치르지 않고도 바로 인사 대상 후보에 오를 수 있도록 하였다”
4삼사
61 동인은 서인과 싸우면서 점차 구신과 가까워졌다. …문정왕후 사망 10년 만에 발생한 [동서분당 사태](동서분당 사태)은 구신에게 새로운 정치적 활로를 열어 주었다.
64 선조 8년 7월 한 미해결 살인사건에서 시작된 [동서분당 사태](동서분당 사태)는 4개월 정도 지속되었고, 김효원,심의겸을 지방으로 내보내는 것으로 일단락되었다 (이이의 제안) …평범한 하나의 미해결 살인사건이 정치적 사건으로 전환된 직접적 원인은 대사간 허엽이 사간원 이름으로 박순에 대한 추고를 요청하고, 김효원의 동의 아래 사헌부가 동조했기 때문이다.
2장. 선조 11~13년: 대립 구도의 성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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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수의 옥사’, ‘백인걸 상소 대필 사건’ 등으로 대립 심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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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인은 스스로를 ‘진정한 사림’, 서인을 ‘외척·권세가’로 규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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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적 선악 구도가 형성되며 당쟁의 체계가 굳어짐.
75 동서분상 후 서인의 승리가 지속된 기간은 길게 보아도 1년 정도였다. 동인세력은 계속해서 확대되고 강해졌다.
76 동서 갈등의 진정한 전환점은 선조 11,12년 무렵이다. 이때 갈등 양상을 특징짓는 요소들, 즉 동인과 서인 각각의 인적 구성과 그에 상응한느 정치적 신념 혹은 대의명분이 갖추어졌다. 동인이 구신과 결합하기 시작했고, 그들은 자신들과 서인을 선과 악으로 나누기 시작했다.
77 동인 쪽에 서면 정치적으로 성장할 기회는 많았고, 위험은 적었다. 선조 11년쯤에는 동인세력이 조정에서 확고한 기반을 잡은듯이 보였다. 그에 따라 서인들이 조정에서 체계적으로 배제되기 시작했다.
80 명확한 증거 없이 이루어진 탄핵이었다. 하지만, 그것이 비정상적이거나 불법적인 것은 아니었다. 조선은 사헌부·사간원 대간에게 소문으로 들은 것을 근거로 탄핵하는 것도 허용했다. 그들은 자신이 들은 소문이 사실임을 증명해야 할 책임이 없었다. 이것은 대간에게 비판의 폭을 넓혀 주기 위한 관행이었다. 이것은 대간이 객관적이고 독립적인, 그래서 공정한 판단을 내릴 수 있다는 전제에서 가능한 것이었다. 그런 조건이 갖추어지지 못한다면 대간제도는 이러한 제도를 설치한 의도와는 전혀 다른 결과로 이어질 수밖에 없었다. 어떤 의미에서 보면, 조선은 20대 후반에서 30대 중반 정도의 젊은 관료들에게 국가의 도덕적 건전성을 의탁했던 셈이다.
85 이이는 두 사람(류성룡과 김우옹- 동인에 속했지만, 객관적입장이였었다)에 대한 실망을 넘어 사림의 장래에 대해서 깊이 우려했다. 이이에게 사림은 여전히 하나의 사림이었다.
87 조선은 정교한 관료조직을 가진 나라였다. 관료조직의 특성 중 하나는 의사 결정 권한의 편중이다. 중요한 의사결정이 조직 최상부에 위치한 직급에서 이루어진다. 이것은 장기적으로 조직을 경화시키기 마련이다. …5 #구언제도, 왕이 직급의 고하와 관계업이 관리들 개인의 생각을 들을 수 있다는 것과, 관료조식의 경직성을 완화하는 훌륭한 방법이다.
89 #시비 (是非) ‘옳다(是)‘와 ‘아니다(非)‘를 합쳐, 옳은 것과 그른 것을 이르는 말입니다. 보통 ‘시비를 가리다’와 같이 사용 #정사(正邪) 정사(正邪)‘는 한자로 **바를 정(正)**과 **간사할 사(邪)**로 구성되며, 군자와 소인의 정체성 규정에서는 주로 **‘바르지 않고 간사한 것’**을 의미
91 이이는 <석담일기>에서 “이때에 동인이 매우 성했다. 명예를 구하는 자들이 동인으로 가고, 관직을 바라는 자들이 동인에게 붙고, 속류재상으로 전일 서인에게 배척당한 자들이 모두 이 틈을 타서 동인에 아첨하여 많이들 요직을 얻었다"고 적었다.
[선조 시대 동인 세력이 강해진 이유](선조 시대 동인 세력이 강해진 이유)
102 이이는 개인이 집단 안에서의 역할로 한 행위와, 개인의 독립적이고도 실존적 행위를 같은 차원에서 보았다. 그의 논리에서는 ‘정치’나 집단의 이름으로 개인의 책임을 면제받을 수 없었다.
107 믿었던 이이가 당시 동인에게 가장 치명적인 논리인 동인과 서인 간의 조제보합론을 들고 나오자, 동인 강경파 측에서 무리하게 탄핵을 감행한 것이 바로 백인걸, 이이 상소 사건이다.
107 이렇듯 상황이 자신들에게 유리하다고 판단했기에 동인 강경파가 이이에 대한 탄핵에 나섰지만, 결국 이들은 이이를 탄핵하는 데 성공하지 못한다. 오히려 삼사 내부가 분열되었다. 더불어 조제보합론이 쉽게 부정될 수 없는 정치적 명분과 힘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확인되었다.
108 조제보합론은 동인이 서인과 분리되어 구신과 가까워지자 그 반발로 나온 주장이다. 이이가 보기에 동인은 사림의 이상을 포기하고 현실정치화되는 길을 걷기 시작했다. 그가 주장한 조제봉합론은 동인이 구신이 아닌, 같은 사림인 서인과 함께해야 한다는 말이다. 하나의 사림을 유지해야 한다는 것이 바로 조제보합론의 핵심 내용이다.
108 사림 등장후, 조선 지식인들에게 학문은 적어도 세 범주 중 하나를 의미 했다. 1765년 북경에 갔던 홍대용은 청나라 지식인들과 대화하면서 조선의 학자들이 학문을 의리지학, 경제지학, 사장지학으로 구분한다고 말한 바 있다. 이것은 조선에서 비교적 상식적인 구분 이었다. ‘사장지학’은 문장력 향상을 위한 공부이고. ‘경제지학’은 국가운영과 경세를 위한 공부이고, ‘의리지학’은 성리학, 혹은 당시 용어로밀 한다면 도학을 말했다.
111 6김우옹은 적어도 선조13, 14년 어느 시기까지는 큰 원칙에서 이이와 생각을 함께했다. 공유한 생각의 핵심은 사림은 하나이고, 서인을 소인으로 규정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그는 출신 지역이나 그가 속한 인적 네트워크 등의 현실적 조건에서는 동인 중진에 해당했다. 하지만, 그때까지는 동인의 핵심적인 정치적 믿음을 공유하지 않았다. 이것은 그가 출사와 낙향을 반복하면서 관료보다는 지식인에 더 가까운 정체성을 가졌기 때문일 것이다 그는 이때까지만 해도 조직 논리에 매몰되지 않았던 것 같다.
💭 2부 이이의 시간 — 사림의 이상, 정치의 현실
3장. 선조 13~15년: 이이의 분투와 좌절
- 개혁안을 제시한 이이(율곡) 가 당쟁 속에서 고립.
- ‘우성전 탄핵 사건’, ‘정철 탄핵 사건’ 등으로 갈등이 확산.
- 이이는 도덕보다 정치적 실용·제도 개혁을 강조했으나 외면당함.
정치의 한복판에 선 정치적이지 않은 이이
117 선조13년 말 이이가 조정에 복귀하면서 주장한 정국 운영론이 7조제보합론이다 …궁극적 요구는 동인이 구신이 아니라 서인과 결합하여 국정개혁에 나서야 한다는 것이었다.
128 타고난 자질이 이미 그런데 어떻게 하찮은 독서의 힘으로 (본래의 기질을) 변화시킬 수 있겠는가.
153 선조 14년 7,8월에 조정을 뒤흔들며 전개된 상황의 주요 등장인물로는 정인홍, 이발 ,정철, 유승훈, 그리고 이이와 선조를 들 수 있다. 심의겸은 동서분당 초기에 사림 분열의 단서를 제공했지만, 그의 역할은 그뿐이었다. 사실 그는 선조8년 이래 정치적으로 국외자였다.
165 이이가 일찍이 경연에서 “미리 10만의 군사를 양성하여 앞으로 뜻하지 않은 변란에 대비해야 한다.“고 말하자, 류성룡은 “군사를 양성하는 것은 재앙의 단서를 키우는 것이다.“라고 하며 매우 강력히 변론하였다. 이이는 늘 탄식하기를 “류성룡은 재주와 기개가 참으로 특출하지만 우리와 더불어 일을 함께 하려고 하지 않으니 우리들이 죽은 뒤에야 반드시 그의 재주를 펼 수 있을 것이다.“하였다. 임진년 변란이 일어나자 류성룡이 국사를 담당하여 군무를 요리하게 되었다. 그는 늘 “이이는 선견지명이 있었고 충성스럽고 근실한 절의가 있었다. 그가 죽지 않았다면 반드시 오늘날에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한다.
166 이이에 대해서는 이미 많은 연구논문과 책이 있다 이것들을 통해서 우리는 성혼 말대로 이이가 “세상에 드문 고명한 재주를 가진” 인물임을 확인할 수 있다. 그가 주장했던 개혁의 내용은 도덕적으로도 정당했다. 백성을 위해 민생에 힘써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이는 그의 생애 마지막 3년 남짓 기간 동안 동료와 후배에게 철저하게 배척당했다. 사실상그의 생애 마지막 해였던 선조 16년이 그 절정이다 이이에게 가장 가슴 아픈일은 그가 오랫동안 함께하고 싶어 했던 류성룡은 물론, 한때 그의 사람이기도 했던 이발에게까지 배반당했던 것이다 배반까지는 아니지만 김우옹과도 서먹해졌다. 조정의 많은 동료와 후배는 이이에 대해서 적대적인 모습을 보이기까지 하였다. 이이에따르면 “삼사여러 사람의 경우에, 다 물러가 움츠리고 서로 눈을 부릅뜨고 이리저리 관망하면서 (나에게) 찾아오지도 않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출근해서도 직무를 보지 않는 자도 있었다.” …이이에게는 평생 친구라고 할수 있는 사람이 몇 명 있다 하지만그중에 서 한사람만 뽑아야 한다면 성혼이라고 말해야 옳다
170 일정한 스승이 없는 천재들은 그들을 얽어매는 정신적 굴레가 없기에 흔히 독립적인 성향을 띠는 경우가 많다. 이런 경향은 이이에게 다양한 방식으로 나타났다. 이이는 다른 학자를 평할 때도 독창성 있는 견해에 높은 점수를 주었다. … 학문과 현실 중에서 전자보다는 후자에 집중했다. 그는 기존 견해에 얽매이지 않았고, 현실 상황 자체에 대한 이해와 개선에 더 집중했다.
171 성혼 말대로 이이는 “뜻이 커서 하찮은 일에 대해서는 소략하고 자신감이 넘쳐 세속을 따르지 않았다.” 많은 경우에 “하찮은 일"이 갈등의 단서가 된다. 사람마다 “하찮은 일"로 생각하는 것이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 더구나 이이는 자기와 생각이 다른 다수를 따르는 척도 하지 않았다.
gemini정리 선조 14년 ( #1581년) 전후의 주요 인물 및 사건 정리 선조 14년(1581년)은 동인(東人)과 서인(西人)의 붕당 대립이 격화되던 시기로, 이 시기 조정은 인재 등용과 정책 문제로 끊임없이 갈등했습니다. 특히 이 시기는 **이이(李珥)**가 붕당을 통합하려던 시도와 맞물려 있습니다.
1.주요 사건: 인물들의 대립과 왕의 움직임 선조 14년 전후의 조정은 크게 붕당 대립 심화와 이이의 중재 시도가 중심
| 연도 | 주요 사건 및 논쟁 | 핵심 인물 및 내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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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조 13년 (1580) | 조제보합론(調劑保合論) 제기 | **이이(李珥)**가 동인과 서인 모두 옳고 그른 부분이 있다(양시양비론)며, 붕당을 통합하고 인재를 능력 위주로 등용할 것을 주장했습니다. |
| 선조 14년 (1581) | 선조의 성혼 독대 | 선조가 성혼을 불러 국정의 요체를 묻자, 성혼은 임금의 겸허한 자세와 사욕 극복을 강조했습니다. 이때 선조가 신하 중 소인이 있는지 묻는 등 신하들을 시험하고 견제하려는 움직임을 보였습니다. |
| 선조 14년 (1581) | 정인홍의 탄핵 | 동인 소속의 강경파인 정인홍(鄭仁弘) 이 법과 기강 확립을 내세우며 왕의 외척이나 고위 관료들의 비리를 강력하게 탄핵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동인 내부의 이발을 사주했다는 의심을 받기도 했습니다. |
- 중심 인물들의 역할 및 관계 A. 이이 (李珥) 와 선조 이이의 역할: 이이는 당시 서인(西人) 의 영수였으나, 동서 분당의 폐해를 통감하고 조제보합론을 주장하며 붕당 통합에 힘썼습니다. 그는 선조에게 개혁안인 『만언봉사』 등을 바치는 등 현실 정치에 적극 참여하며 국정 운영의 실리를 추구했습니다. 선조는 이이의 뛰어난 재능을 인정하고 인재 등용에 대한 조언을 구하기도 했습니다.
선조의 역할: 선조는 사림을 등용하여 왕권을 강화하려 했으나, 붕당이 격화되자 신하들을 시험하고 통제하려는 미묘한 태도를 보였습니다. 이이, 성혼 등과의 독대를 통해 신하들의 충성심과 성향을 파악하려 했습니다.
B. 정인홍 (鄭仁弘) 와 이발 (李潑) 정인홍: 조식(曺植)의 문인이자 동인의 강경파였습니다. 그는 법령을 엄격하게 적용하여 기강을 확립하려 했으며, 이서(하급 관리)와 수령의 부정뿐만 아니라 고위 관료들까지 서슴없이 탄핵하며 조정에 큰 파문을 일으켰습니다.
이발: 동인 소속의 인물로, 정인홍의 탄핵 대상이었던 우성전 문제에 개입하며 정인홍에게 정보를 제공하는 등 정인홍의 탄핵 활동에 영향을 주었습니다. 이로 인해 이이와 서인들에게 견제를 받았습니다.
C. 정철 (鄭澈) 정철: 서인(西人) 의 핵심 인물이자 문학가입니다. 이 시기에는 주로 이이와 함께 서인의 입장을 대변하며 활동했으며, 이이의 조제보합론을 지지하는 입장에 가까웠습니다. (정철이 권력을 휘두르고 동인을 대규모로 숙청한 것은 1589년 기축옥사 때입니다.)
4장. 선조 16년: 계미삼찬(癸未三讒)
- 북방 여진의 위기 속에서도 조정은 당파싸움에 몰두.
- 이이의 개혁안은 채택되지 않고 탄핵당함.
- “도덕적 확신이 현실 정치의 책임을 대체할 수 없다” 는 주제 부각.
175 조선시대 관직 중 ‘문형’ 이라는 별칭으로 불리던 관직이 있다. 저울로 물건을 달듯이 글을 평가하는 자리라는 뜻이다. …당대 최고 문장가를 가리켰다. 조선시대에 예문관, 춘추관, 집현전, 8홍문관 등의 기관을 관각이라고 불렀다. 국가에서 필요로 하는 학문의 연구, 서적의 편찬,문장의 작성을 담당하던 기관들이다.
177 16세기말 여진 부족들 사이에는 노예와 재산,토지를 약탈하는 상황이 격렬하게 진행되었다. 그리고 이때 명군과 여진의 전투 과정에서 누르하치(1559~1626)가 조부와 아버지를 잃는 사태가 벌어졌다. 후금, 즉 #청나라 를 세운 바로 그 누르하치이다. 그는 선조 16년 5월 부친의 원수를 갚기 위해 직접 군사를 동원하여 여진의 세력 다툼에 참여하였다. 훗날 청나라가 시작된 첫걸음이다.
[이탕계의 난](이탕계의 난)
183 선조 16년 4월 14일에 이이는 2차로 상소를 올렸다. 여기서 그는 1차 상소를 기초로 폐정 즉, 고쳐야 할 나쁜 정치를 혁신하기 위해 조정이 시급히 해야 할 일을 네 가지로 압축했다. 공안을 개정하고, 군적을 고치고, 너무 작은 주 현을 합치고, 감사를 구임시키는 것이 그것이다. (…) 그의 네 가지 요구는 서로 잘 맞물려 있는 구조였다. 그 중심에 백성의 공물 부담 경감이라는 목적이 있었다.
195 조선왕조는 건국 당시부터 9공론을 중시했다. 성리학을 국가 운영 원리로 삼아 건국한 것이 그 이유이다. 조선 왕조는 건국 당시부터 공론을 중시했다. 성리학을 국가 운영 원리로 삼아 건국한 것이 그 이유이다. (…) 이 당시 공론과 관련하여 가장 중요한 갈등 요소는 누가 공론의 주체인가 하는 문제였다.
조선 왕조를 통틀어 보면 공론 주체가 누구인가에 대한 인식은 한결같지 않았다. 국초에는 국왕이나 조정 대신들이 공론의 주체로 인식되었다. 18세기(영조와 정조 시대)에도 이와 비슷한 양상이 나타나서 공론이 위에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두 시기의 중간 즉 16, 17세기에는 공론이 아래 있고, 삼사, 심지어 성균관에 공론이 있다고 생각했다. 16세기는 국초의 공론 주체에 관한 인식이 바뀌던 시기였다. 주목할 것은 이 시기 격렬하게 이어졌던 사화에도 불구하고 이런 인식이 확대되었다는 점이다.
202 “대간에게 소중한 것은 공론을 담당하는 것뿐이다. 자기의 사사로움을 달성하기 위하여 배척과 모함을 일삼는다면 그것이 어디 대간으로서 할 일인가, 경들이 만약 이이를 일러 나라를 그르친 소인이라고 한다면 마땅히 죄를 분명히 밝혀 그를 물리쳐야 한다. 그렇게 하지 못하면 그를 공격하는 자가 소인이다.”
236 선조는 “시비는 양지에 바탕을 두고 사람의 마음이 안정된 데서 나오는 것이다. 조정에서 말했다 하여 비중이 큰 것도 아니고 초야에서 거론되었다 하여 가벼운 것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이 말은 삼사의 공론 독점권을 부정하는 말이다.
👑 3부 선조의 시간 — “나는 어느 쪽이 옳다고 말한 적이 없다”
5장. 선조 17~22년: 불안한 평화
- 이이 사망 후, 조정은 일시적 평화를 유지하지만 내부 균열 지속.
- 선조는 당파 간 균형을 유지하며 정치적 주도권을 강화.
- 그러나 실제로는 책임 회피와 권력 분산으로 국정은 마비.
#계미삼찬 ‘계미삼찬(癸未三竄)‘은 1583년(선조 16년)에 이이(李珥)를 탄핵하려던 동인 계열의 박근원, 송응개, 허봉 세 인물이 유배당한 사건을 말합니다. 이 사건은 동인과 서인 간의 정치적 갈등을 보여주며, 조선 시대 최초의 당쟁으로 인한 유배 사건 중 하나입니다. ‘계미(癸未)‘는 1583년을, ‘삼찬(三竄)‘은 세 사람이 ‘찬(竄)’, 즉 ‘유배(流配)‘를 간 것을 의미합니다. 동인의 탄핵 시도 (도전) 동인(東人)의 핵심 인물들(송응개, 허봉, 박근원 등)이 서인의 거두이자 당시 영의정급 인물이었던 이이를 강력하게 탄핵했습니다. 탄핵의 내용: 주로 이이가 ‘시국을 그르치고 국정을 어지럽힌다’는 내용이었습니다. 특히 이이의 경장(更張: 개혁) 주장에 대해 비판을 가했습니다. 선조는 동인들의 탄핵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고, 오히려 탄핵을 시도한 동인들을 국정을 어지럽혔다는 죄목으로 처벌했습니다. 탄핵을 주도했던 송응개, 허봉, 박근원 등 동인 세력의 핵심 인물들이 유배를 가게 됩니다.
431 기축옥사(己丑獄事) 이전 동서간 최대의 정치적 충돌은 계미삼찬이다. 이사건으로 동인 측 주요 인사 3인이 최북방 국경 가까운 지역으로 귀양을 갔다. 또, 그보다 더 많은 수의 동인 언관이 지방 수령으로 좌천되었다. 이 사건은 겉으로만 보면 동인과 서인의 갈등이다. 하지만, 갈등의 실제 동인은 선조의 동인세력에 대한 견제였다. 이미 여러 해 전부터 서인은 동인에게 대항할수 있는 힘을 상실한 상태였다. 선조는 이이를 중심으로한 소수의 인물을 대리인으로 내세워서 동인 견제에 나섰던 것이다. 동시에 이사건은 이이가 선조 13년 말 조정에 복귀하면서 목표로 했던 동인과 서인간 화합의 가능성이 결국 파탄에 이르렀음을 공식화하는 것이기도 했다. 이런 분위기에서 최영경의 정철에 대한 발언이 등장했다. 즉, 최영경이 ‘계미삼찬’ 이후 항상 “박순과 정철을 반드시 효시한 뒤에야 정사를 제대로할수있다.“고 말했던 것이다. 나중에 최영경이 국문을 당할 때 정철이 손으로 자기 목을 그으며 “그가 나의 머리를 이처럼 자르려 하였다.” 고말했다는 널리 알려진 일화는 여기에서 비롯되었다.
431 흔히, 정치적 갈등은 불가피한 이해 갈등 이외에도 서로에 대한 이해 부족과 인격적 불신을 연료로 타오르는 경우가 많다
243 계미삼찬에서 선조가 조선 상황을 주도하는 방식이 나타났다 그것은 특정한 인물을 대리인으로 내세워, 그를 통해서 자기 의도를 관철시켜 나가는 것이다. 그 첫 번째 대리인으로 내세워진 인물이 #이이 였다.
259 임금도(선조) 처음에는 (이이에 대해서) 견제를 가했으나 늦게나마 다시 (두 사람의) 뜻이 일치되어 (선조의 이이에 대한) 은총과 신임이 바야흐로 두터워지고 있는 때에 (이이가) 갑자기 사망한 것이다 <선조수정실록>
259 동인 측으로 치우친 조정에서 동인을 견제하기 위해서 선조는 이이를 선택했던 것이다.
6장. 선조 22년: 기축옥사 발발
- 정여립의 난 고변으로 대대적 숙청 시작.
- ‘공포의 정치’가 조정을 지배, 동인 대량 숙청.
- 선조는 정치적 책임을 회피하며 독재적 권력 구축.
281 말하자면 선조는 이이와 성혼이 심의겸과 가까이 지낸 잘못을 지적하면서도 두 사람에 대해서는 수용하는 입장을 취했다. 당파적으로는 동인 손을 들어주면서도, 이이와 성혼을 개인 차원에서 수용하는 태도를 유지했다.
289 어떤 면에서 이날 결정은 계미삼찬과 그 형식에 있어서 다르지 않다. 계미삼찬이 그랬듯, 이날 결정도 선조가 내린 것이었다. 하지만 계미삼찬과 달라진 점도 뚜렷했다. 그는 조정 내 당파의 무게중심을 이동하는 데 있어서 대단히 신중해졌다. 특지를 통해서 자기 목소리와 감정을 드러내는 대신, 조정 내 당파 간 목소리를 이용하여 자신의 생각을 관철시켰다. 선조도 계미삼찬과 이이의 죽음을 통해서 배운 것이 많았다.
313 ‘적가문서’에는 정여립이 역모를 꾸민 구체적인 내용이 전혀 나오지 않았다. 그럼에도 선조는 위 두 가지 사항을 동일하게 인식하였다. 그 결과 사건 처리를 과도하게 몰아 간 두 가지 결과가 나타났다. 하나는 사건 관련 인물들의 범위가 지나치게 확대되었다는 점이다. 다른 하나는 적가문서에 등장하는 인물들에 대한 법적 처리가, 편지 내용에 대한 선조의 자의적 판단에 의존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321 10[정여립 사건](정여립 사건)의 발생…당시의 분위기 이전에 여림이 이이를 배신하고 시론에 아부하여 입장을 바꾸었던 것을 서인이 항상 분통하게 여기던 차에, 이때 여립이 역적이 되자 서인은 기뻐 날뛰지 않는 이가 없었다.
354 사실 이산해의 행동이 지금의 현실에서는 오히려 익숙하다. 공적이든 사적이든 어떤 조직 안에서 논리와 당위로 상급자와 부딪히는 것을 감수하는 것에는 신념과 용기가 필요하다. 당연히 이이보다는 이산해 유형의 사람이 많기 마련이다. 공동체의 이상을 위해서 분투하기보다는 개인의 보상을 위해서 애쓰는 것이 더 현실적인 것은 예나 지금이나 다름이 없을 것이다.
⚰️ 4부 파국 — 책임
7장. 정개청 옥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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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의청담변’ 관련 사건으로 또다시 피비린내 나는 옥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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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의 본질이 정책이 아닌 적대와 숙청으로 전락.
357 피에르 클라스트르(1934~1977)는 그의 책 『국가에 대항하는 사회』에서 말하기와 권력의 관계에 대해 흥미로운 통찰을 보여 준다. 그에 따르면 말하기와 권력은 밀접하게 관련된다. 둘은 서로를 기반으로 해서만 유지되며 각각이 상대편의 본질을 이룬다. 주인과 노예, 군주와 신하의 분리에 기반을 둔 사회에서는 주인과 군주만 말할 수 있고, 노예와 신하는 존경, 숭배, 또는 공포로 인해 침묵한다. 오늘날 지도자와 시민의 관계 역시 본질적으로는 다르지 않다. 이것은 오늘날 우리도 일상에서 경험하는 일이다. 수직적 위계가 있는 집단에서는 말이 독점되는 것을 쉽게 볼 수 있다. 여기서 성혼이나, 위에서 이항복의 모습은 그들이 복종만 하는 신하가 아니었음을 보여 준다. 계미삼찬 당시 동인이 선조의 최후통첩성 명령에 대해서 굴하지 않았던 것 역시 같은 맥락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365 무엇에 대해 책임감을 느끼는가가 바로 그 사람 정체성의 좌표이고, 그가 맺은 사회적 관계의 액면가이다.
371 (기축옥사) 당시 호남 지역에는 동인 세력과 서인 세력이 병존했다. 동인 쪽은 해남, 남평, 무안, 화순, 영광 등에, 서인 쪽은 광주, 장성, 보성, 순천 등에 많이 거주했다. 두 세력 모두에게 중요했고, 또 두 세력이 공존했던 지역이 바로 호남의 중심 나주였다.
373
조선 시대 호남 지방 학맥을 보면 그 연원에서 5개 그룹이 주목된다. 김굉필(14541504), 최부(14541504), 송흠(14591547), 박상(14741530), 이항(14991576) 등이 그들이다. 김굉필, 최부는 김종직에게서 직접 가르침을 받은 절친한 동학이다. 마르코 폴로(12541324)의 『동방견문록』, 일본 승려 옌닌(794~864)의 『입당구법순례행기』와 함께 중국 3대 기행문으로 알려진 『표해록』의 저자가 최부이다. 그는 성종 19년(1488) 도망간 죄인을 잡으러 제주도에 갔다가, 나주에 사는 아버지의 사망 소식을 듣고 돌아오던 중에 풍랑을 만나 중국까지 표류한다. 중국에서 조선으로 돌아오는 도중에 보고 들은 것을 귀국 후에 정리한 기록이 『표해록』이다.
383 정개청 옥사가 성립되는 과정은 ‘필연적인 우연’이 작동하는 방식을 잘 보여 준다. 처음에 역적을 고발하라는 조정 명령이 내려왔을 때, 다수의 나주 유생들은 지역 내에 역적이 없다고 보고했다. 하지만 사사로운 목적을 가진 소수의 유생들이 그런 다수의 의견을 간단히 뒤집어 버렸다. 소수가 홍여순 같은 고위층의 사적 욕망에 호응하고, 윤우신 같은 중간 책임자들이 무책임할 때 조직은 곧 사적 욕구를 충족시키는 도구로 전환되었다. 조직 내에서 고위층의 사적 욕망에 부응하는 소수는 언제 어디에나 존재하기 마련이다.
384 우연을 필연으로 바꾸는 요인은 결국 사람이고, 그러한 전환을 정치적인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비록 혼자 져야 할 책임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적어도 이런 면에서 정철은 정개청 사건에 대해서 책임을 피하기 어렵다.
[정개청 - 조선 중기 문신이자 학자](정개청 - 조선 중기 문신이자 학자) 389 정개청은 선조 시대에 명멸했던 수많은 인물 중에서도 이채를 띤다. 그 특색은 단순히 개인적인 특성에만 기인한 것은 아니다. 시대 상황과도 긴밀히 연결되었다. 어찌 보면 그는 19세기 초 격렬한 이념적, 사회적 변동을 바탕으로 스탕달이 쓴 소설 『적과 흑』(1830)에 나오는 주인공 쥘리앵 소렐과 비슷한 면이 있다. 선조 시대는 새로운 학문 ‘도학’이 학문적 현실적 권위를 공인받은 시기이다. 새로운 권위는 새로운 인물을 통해서 기존 권위를 무력화시키는 경향이 있다. 그는 극히 보잘것없는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중년 이후 최고 수준의 학자이자 선생으로 떠올랐다. 그의 제자들이나 그가 친교를 맺은 인물들이 대개 명문 혹은, 적어도 양반 가문 출신이었던 것은 그의 신분적 배경과 뚜렷이 대비되었다. 새로운 학문 경향이 등장하지 않았다면 그의 이름이 『선조 실록』에 나오는 일은 결코 없었을 것이다.
407 나주에서 비롯된 정개청을 둘러싼 갈등은 그가 가진 두 가지 특성에서 비롯되었다. 하나는 그가 미천한 향리 가문 출신이라는 점이고, 다른 하나는 그런데도 높은 수준의 도학 이해에 도달했다는 점이다. 그가 획득한 새로운 학문은 신분상 약점에도 불구하고 많은 명문 사대부 가문 제자들을 불러 모을 수 있었던 이유였다. 하지만 여전히 사장과 문사는 과거 급제를 위해서 중요한 학술적 기능이었다. 학문의 목적이 과거 급제이고, 도학 이해가 아닌 관료 지위가 지배 신분의 조건이라면 새로운 경향인 도학은 필수적이지 않았다. 다수의 유생이 그렇게 생각했을 것이고, 홍천경은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 중 하나였다. 정개청을 둘러싼 갈등은 향권, 즉 지방 고을 내의 주도권을 둘러싼 지역적 갈등일 뿐만 아니라, 신분적 갈등임과 동시에 당대의 학문적 경향 사이의 갈등이기도 했다.
8장. 최영경 옥사
- 학문적 논쟁이 정치적 숙청으로 이어짐.
- 정철과의 갈등, ‘삼봉즉경영설’ 사건으로 최영경 사망.
- 도덕과 신념이 정치적 폭력으로 변한 결정적 사례.
430 “독선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아니었고 세상에서 거짓으로 학문한다 하고는 명예와 이익을 취하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유속배 = 귀로 듣고 입으로만 중얼거리며 실천에 힘쓰지 않는 자들
465 최영경 죽음에 대한 책임 문제 이외에도 최영경 옥사는 또하나의 상황을 보여준다. 최영경 자신이 대단히 선명한 당파적 입장을 가지고 있었다는 점이다. ….역설적이게도 희생자 최영경은 ‘가해자’와 전혀 다르지 않은 상황 인식을 가지고 있었다.
🪶 에필로그
- 이이: 개인의 책임 의식을 가졌으나 시대가 그것을 버팀목 삼지 못함.
- 대간(언관): 신념에는 충실했으나 사회적 결과엔 무책임.
- 선조: 권력은 가졌으나 책임의식이 부재.
- “도덕적 정당성은 정치적 정당성을 보장하지 않는다.”
- 결국 진정성조차 시대 상황에 지배된다는 역사의 냉혹함을 일깨움.
469 류성룡도 개혁이 필요하다고는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이 우선순위 면에서 당파간 시비와 정사를 가리는 것보다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사림은 분열했고, 그것은 선조의 독재로 이어졌다.
470 젊은 사림이 가졌던 강렬한 도덕적 확신은 역설적이지만 앞 시대 훈척정치가 물려준 유산이다. 그들이 가진 도덕적 신념은 그 자체로 정당할 뿐 아니라, 불의하고 강력했던 권력을 물리친 정치적 참호이자 무기였다.
470 도덕적 확신에 찬 사림은 결국 그것보다 더 강력했던 권력에 대한 욕망의 자장으로 빨려들고 마침내 함몰되었다. 그들은 정치세력 간의 시비가 아닌 민생개혁에 대한 추구가 자신들도 보존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임을 알지 못했다. 역설적이게도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으며 그들 중 극소수가 살아남아 그것을 이해하게 된다.
요약
도덕적 신념에 사로잡힌 사림이 권력욕과 결합할 때 어떻게 파국이 일어나는가를 보여주는 정치심리학적 역사서 도덕의 정치화 대의의 부재 책임의 결여 선조·이이·사림의 삼각 긴장 구조
6.읽으면서 떠오른 생각들
이이(율곡)가 붕당(朋黨)의 폐해를 경계하며 사림의 통합을 원했고, 이황(퇴계)의 학맥이 분당의 한 축인 동인(東人)에 영향을 주었다 이황은 이이가 활동하기 이전에 사망했기 때문에 분당 사태(1575년) 자체에 직접적으로 참여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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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학문이란
- 사장지학 - 문장력 향상, 읽고 쓰기
- 경제지학 - 국가운영,정세,경제
- 의리지학 - 성리학, 인문학, 우주,..철학?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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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이가 죽고나서
- 선조는 다시 동인을 기용한다
- 선조는 계미삼찬(계미년 3개 고위가 모두 찬성)하여 동인을 배척했다.
- 유배된 이이가 다시 복직한다.
- 이이도 이것은 과하다고 했다
- 이이가 갑자기 죽는다.
- 동인 서인을 균현을 맞추려한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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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의 미래와 민생의 안정보다는 본인들의 정치적 가치관의 승리가 중요했다
- 이이는 국가의 미래를 위해 정치력을 보이려 했으나,
- 선조나, 그의 동료들은 개개인의 권력유지, 정치적 승리를 위해 그 뜻을 거스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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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림이 선조대에 정치권력을 잡았지만, 그들 내부에서 분열되었고, 그들 조직간의 도덕적 확신으로 더욱 대립하게 되었다
- 이이는 사림이 내부적으로 싸울 상황이 아니라
- 사림으로 구세력이 지나갔으니, 사림이 뭉쳐서 나라의 미래를 만들어 가야 함을 알았다
- 하지만 사림의 자신이 속한 동인/서인/ 남인/북인 각각의 계파의 승리만을 위하게 되었다.
- 4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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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죽은 자들에게까지, 명예를 회복시키기도 하고, 죄를 묻기도하는데 과한것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 억울한 죽음을 입은 자에게는 명예회복을 통해 가족을 위로하게 되지만
- 정치적 이유로 명예를 잃게되면 변론도 못하는 그 자는 얼마나 억울할것인가
7. 연관 문서
[이황과 이이관계](이황과 이이관계)
[성리학 계보](성리학 계보)


- 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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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심점 : 심의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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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호막 고위 원로 : 박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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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동대장 : 정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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핵심당원 : 윤두수, 윤근수, 김계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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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후 전략가 : 송익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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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순의 역할: 당시 영의정이던 박순은 사림의 존경을 받는 인물이었으나, 정치적 입장은 서인에 가까웠습니다. 그의 존재는 초기 서인이 동인의 거센 공격을 버티는 데 큰 힘이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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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익필의 존재: ‘구봉 송익필’은 훗날 기축옥사(동인 대학살)의 막후 설계자로 지목되기도 하는 인물. 1575년 시점부터 이미 서인 핵심 인사의 ‘브레인’ 역할을 하고 있었기에 그의 존재를 염두에 두는 것이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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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철의 부상: 정철은 이 시기부터 타협 없는 강경한 태도로 동인의 집중 견제 대상이 되면서, 자연스럽게 서인의 ‘전투력’을 담당하는 핵심 인물로 부상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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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인
- 구심점 : 김효원
- 이론가그룹 : 유성룡
- 행동대장 강경파 : 이발 , 백유양
- 독자노선 강경파 : 정인홍
- 전략가그룹 실무파 : 이산해, 우성전
- 동인의 복잡성: 서인이 비교적 단일한 기호(畿湖) 지역 기반의 기성 관료 그룹이었다면, 동인은 영남 학파(이황/조식) + 서경덕 학파 등 다양한 학문적 배경을 가진 신진 세력의 ‘연합체’ 성격이 강했습니다.
- 초기 입장: 이들은 ‘선명성’을 중시했습니다. 심의겸으로 대표되는 ‘척신(외척) 정치의 잔재’를 완전히 청산해야 한다는 도덕적 명분론이 강했습니다.
- 내부 분열의 씨앗: 표에서 보듯, 동인은 이미 초기부터 유성룡(이황계/온건)과 정인홍(조식계/강경), 이산해(서경덕계/전략가) 등 성향이 다른 인물들이 혼재해 있었습니다. 이 차이는 훗날 정여립의 옥사(기축옥사)를 거치며 서인에 대한 대응 방식을 두고 남인(온건파)과 북인(강경파)으로 분열하는 결정적 계기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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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화란 조선 중기 훈구 세력과 사림 세력의 대립 과정에서, 사림이 정치적 반대파에 의해 화를 입은 사건을 말합니다. ‘사림(士林)의 화’를 줄인 말로, 연산군 때의 무오사화, 갑자사화부터 명종 때의 을사사화까지 총 4차례의 대규모 옥사가 이에 해당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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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반정이란 ==무력으로 현 국왕을 축출하고 새 국왕을 추대하는 사건==을 말하며, 주로 ‘잘못된 것을 바로잡아 올바른 상태로 돌린다’는 명분을 내세웠습니다. 조선 시대에는 대표적으로 중종반정(1506년)과 인조반정(1623년)이 있으며, 각각 연산군과 광해군을 폐위시키고 중종과 인조를 왕으로 세운 사건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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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척에선 훈은 반정공신을, ‘척’은 왕비 쪽 사람들인 외척 - 처가 - 를 말한다. 훈척정치는 공신과 외척이 권력을 행사했던 정치 운영 방식을 뜻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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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헌부== : 감찰·탄핵 및 정치에 대한 언론. ==사간원==: 국왕에 대한 간쟁(諫諍)과 정치 일반에 대한 언론을 담당하는 언관(言官). ==홍문관== : 궁중의 서적과 문한(文翰)을 관장하고, 경연관(經筵官)으로서 왕의 학문적·정치적 고문에 응하는 학술적인 직무를 담당하는 곳. 세조 때 집현전이 없어지면서 그 기능을 계승한 기관. 1438년(세종 20년) 이후 집현전이 언관의 역할을 했기에 사헌부, 사간원과 함께 삼사로 불리게 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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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권 견제: 왕의 절대적인 권력을 견제하고, 국정의 잘못된 방향을 바로잡기 위한 제도적 장치였습니다. 국정 운영의 투명성 확보: 국왕과 신하가 함께 국정을 논의하며 정책 결정을 투명하게 하고, 백성을 위한 정치를 실현하려는 목적이 있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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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우옹(金宇顒, 1540년 ~ 1603년)은 조선 중기의 문신·학자이다. 본관은 의성(義城). 자는 숙부(肅夫), 호는 동강(東岡)·직봉포의(直峰布衣). 경상북도 성주(星州) 출신. 조식(曺植)의 문인이다. 성균관대학교의 초대총장인 심산 김창숙이 그의 후손이다.선조 22년(1589) 기축옥사 때 유배되었다가 임진왜란 때 사면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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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제보합론: 調劑保合 정치적 상황을 조절하고 화합하여 안정적으로 유지한다 당시의 붕당(동인, 서인) 간의 날카로운 대립을 적절히 조절(調劑)하고, 인재들을 화합(保合)시켜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게 함으로써 정국의 안정을 유지하려는 정치적 이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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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문관(弘文館)은 조선시대의 궁중 기관으로, 왕의 자문에 응하고, 경서(經書)와 사적(史籍)을 관리하며, 문한(文翰, 문서 작성) 업무를 담당했습니다. 경복궁 등 궁궐 내에 있었던 궐내각사 중 하나이며, 사헌부·사간원과 함께 언론을 담당하는 ‘삼사’로 불리며 왕의 잘못을 비판하는 간쟁(諫諍) 역할도 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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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론은 단순한 여론이나 다수결의 의견이 아니라, 도덕적 정당성을 갖춘 학자들(사림)의 합리적인 비판과 토론을 통해 형성된, 국가 정책 결정의 기준이 되는 여론 또는 공적인 논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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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여립이 역모(모반)를 꾀했다는 고변(밀고)이 올라오면서 시작된 대대적인 숙청극.서인(西人) 세력이 정권을 장악하고 동인 세력은 일시적으로 몰락했습니다. 이 사건을 계기로 동인은 남인과 북인으로 분열하게 됩니다.이이의 문인이나 배반함.호남 지방에서 무술 연마 조직인 대동계(大同契)를 조직하여 신분을 가리지 않고 사람들을 모았는데, 이것이 훗날 역모를 준비한 증거로 이용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