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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셸 푸코 1926~1984

[!INFO] 책 정보

  • 저자: 저자/디디에_에리봉
  • 번역: 번역/박정자
  • 출판사: 출판사/그린비
  • 발행일: 2012-02-15
  • origin_title: Michel Foucault (1989년)
  • 나의 평점:
  • 완독일: 2025-11-30 16:05:39

📚 미셸 푸코 1926~1984


1. 🖐️ Before Reading (읽기 전)

1.1 동기와 기대

2. 📜 Synopsis (개요)

Summery

이 책 『미셸 푸코 1926-1984』는 20세기 문제적 철학자 미셸 푸코에 대한 내밀하고 충실한 평전입니다. 저널리스트 디디에 에리봉은 푸코의 철학과 개인적 삶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그의 가족, 친구, 동료, 스승 및 적수까지 인터뷰하고 모든 글을 파헤쳐, 동성애로 인한 어린 시절의 고통, 자살 충동, 학계에서의 복수, 동성애 문화에 대한 열광, 에이즈 이후의 삶 정리 등 인간 푸코의 다채로운 면모를 입체적으로 그렸습니다. 이 책은 단순히 푸코의 일대기를 넘어, 그의 주요 저서들이 탄생하고 논쟁을 일으킨 맥락, 그리고 그가 현대사의 굵직한 사건들에 어떻게 개입하고 투쟁했는지를 보여주는 사료로서 푸코의 삶과 사유, 그리고 프랑스 현대사를 동시에 이해하는 데 중요한 통찰을 제공합니다.

Keyword

#미셸푸코, #철학자, #평전, #동성애, #프랑스철학, #권력, #사유, #현대사, #지식인, #디디에에리봉

Author

저자(글): 디디에 에리봉 현재 아미앵 대학 철학ㆍ인문학ㆍ사회과학대학 소속 교수이며, 이전에는 『리베라시옹』, 『르 누벨 옵세르바퇴르』의 기자였습니다. 프랑스 지성사에 관심이 많은 학자이자 저널리스트이며, 마이너리티 문제와 퀴어이론에도 많은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주요 저서로는 『미셸 푸코』, 『게이문제에 관한 성찰』, 『마이너리티의 도덕』, 『렝스로의 귀환』 등이 있습니다. 대담집으로는 『조르주 뒤메질과의 인터뷰』, 『클로드 레비-스트로스와의 인터뷰』 등이 있습니다.

번역: 박정자 서울대 불문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습니다. 학위논문 제목은 『비현실의 미학으로의 회귀: 사르트르의 ‘집안의 백치’를 중심으로』입니다. 푸코에 관심이 많아 『성의 역사』 제1권 ‘앎에의 의지’를 1979년 『성은 억압되었는가?』라는 제목으로 번역하여 한국에 푸코를 처음 소개했습니다. 그 외에도 푸코의 전기 『미셸 푸코』, 『만화로 읽는 푸코』 등의 입문서와 『비정상인들』, 『사회를 보호해야 한다』 등의 푸코 저서를 번역했습니다. 저서로는 『사르트르의 실존주의』, 『빈센트의 구두』, 『로빈슨 크루소의 사치』, 『시선은 권력이다』 등이 있습니다.

3. 🔆 Insight & Deep Dive

3.1 깨달은 점 (Aha Moment)

독서 모임을 통해 읽은 이책, 자의가 아니었다. 미셸 푸코가 누군지 몰랐다. (다행히 처음 들어본 건 아니였다. 그가 구상한 감시하난 감옥을 알고 있었더라..흠) 그가 누군지, 어떤 위대한 일을 이루었는지 모른 상태에서 그의 자취를 돌아보는건 곤혹스럽다. 그런데, 그의 철학을 접해가면서 , 그가 보낸 젋은 시절과 그의 동성애에 대한 사회의 배척과 그의 정신적? 고통들…그 고통과 깊은 사유를 통해 , 역사를 이해하고 시대를 이해해서 분석한 이성과 광인에 대한 그의 주장에 공감이 되고, 심지어 흥미롭기까지 했다. 니체와 고흐의 천제성 또한 다시한번 느껴본다.

3.2 비판적 사고 (Critical Thinking)

3.3 내 삶에 적용하기 (Action Item)

4. 🏆 Top 3 Highlights

📌 첫 번째 문장

(내용 입력)

💭 생각:

📌 두 번째 문장

(내용 입력)

💭 생각:

📌 세 번째 문장

(내용 입력)

💭 생각:

5. 📌 Key Concepts

5.1 미셸 푸코의 <광기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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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셸 푸코의 광기의 역사 요약-이성의 탄생과 광기의 추방](미셸 푸코의 광기의 역사 요약-이성의 탄생과 광기의 추방) -> 광기를 이성이 판단하고 제압하는 방식 자체가 문제다

푸코가 비판하는 것은 광기의 본질을 억압한 것이 아니라, 이성이라는 새로운 권력 체제가 광기를 배제하고 대상화함으로써 자신(이성)을 정의한 방식입니다.

관점 광기와 이성의 관계 주요 개념
단순한 ‘억압 모델’ 이성(지배자)이 광기(본성)를 찍어 누름 억압, 통제, 금지
푸코의 ‘구성 모델’ 이성이 광기를 ‘비이성’이라는 대상으로 규정하고 자신의 바깥으로 배제하며 지식(정신의학)의 대상으로 구성 배제, 규율, 지식-권력, 대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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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 Book Marks

5 반대다. 사생활에 대해서건 저작에 대해서건 내가 애초에 제시했던 그의 초상화가 오늘날 새롭게 밝혀지는 자료들에 의해 단순히 확인되는 정도가 아니라 더욱 강화되고 있다는 사실에 나는 놀라움을 느낀다.

7 ‘현재를 진단’하고 더 나아가 역사 비판적(historique-Critique) 조사를 실행함으로써 현재를 변혁하는 것이 #철학자 의 역할 - 미셸 푸코 …역사-비판적 조사를 통해 우리는 우리가 역사의 산물이고 또 역사에 의해 변형될 수 있음을 잘 알 수 있다.

2011년 세번째 판본의 서문

1부 지옥에서의 심리상태

1장 내가 태어난 도시

12 “내가 태어난 도시의 모습은 이러했다. 참수된 성자들이 손에 책을 들고 재판은 공정한지, 성채는 굳건한지, 고요한 정원의 비밀을 아이들이 헤집고 다니지나 않는지 감시하고 있는 곳, 내가 상속받은 지혜는 그런 것이었다.” 자신의 유년기와 청소년기를 보냈던 푸아티에(Poitiers)에 대해 미셸 푸코가 즐겨 하던 말이었다.

12 만일 뭔가 단절이 있었다면 그건 아버지와의 단절이다. 푸코는 언젠가 이렇게 회상한 적이 있다. “가족이란 갈등의 관계이지만, 비록 가족을 떠난 다음에도 결코 완전히 단절할 수 없는 어떤 끈끈한 관심의 관계다.”

13 청소년 시절에 자신이 그토록 증오했던 아버지의 이름을 물려받고 싶지 않았다는 것이다. 폴 푸코. 그것은 아버지의 이름이었다. 아버지는 푸아티에에서 개업한 외과의사였고 의과대학 해부학 교수였다. 할아버지 역시 퐁텐블로의 외과의사였다. 아버지는 안느 말페르와 결혼했다. 장인도 푸아티에의 의과의사이며 의과대학 해부학 교수였다. 두 신혼부부는 말페르 박사가 1903년 도심지 근처에 지은, 별 특징이 없는 흰색 건물에서 살았다. 이 집은 아르튀르 랑 가와 베르댕 가에 동시에 면해 있었는데, 베르댕 가는 도시의 고지대에서부터 클랭 계곡으로 급하게 경사져 내려가고 있었다 폴 푸코 박사와 그의 아내는 세 자녀를 두었다. 맏딸 프랑신, 그리고 15개월 뒤 폴을 낳았다. #1926년 10월 15일. 둘째 아들 드니는 몇년 뒤에 태어났다. 세 아이들은 전형적인 유복한 시골 부르주아 가정에서 자랐다.

23 “…전쟁의 위협은 우리들의 지평이었고 우리들의 실존의 테두리였다. 그리고 정말로 전쟁이 터졌다. 우리 세대의 기억의 실체는 가정생활보다는 세계적 관점의 사건들이었다. 나는 ‘우리들’이라고 말했는데, 그 당시 대부분의 소년 소녀들이 똑같은 체험을 했을 것이라고 확신했기 때문이다. 우리들의 사사로운 개인 생활은 정말로 위협을 받았다. 내가 역사에 매혹되었던 것은, 그리고 우리가 처한 사건과 개인적 체험 사이의 관계에 그토록 관심이 끌렸던 것은, 아마도 이런 이유 때문일 것이다. 그것이 내 이론적 욕망의 핵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24 (고등학고) 카톨릭 학교에 대해 그는 -푸코- 아주 불쾌한 추억을 간직하고 있다. 그는 그곳의 분위기와 그곳에서 받았던 수업을 싫어했다. 종료를 싫어했고 수도사들도 싫어했다. “그가 수도사들에 대해 말할 때면 혐오감과 반감을 숨기지 않았다” 고 당시의 친구 중 하나가 회상했다.

27 “우리는 중요한 주제에 대해서, 특히 정치적인 주제에 관해서 말하는 것은 될 수 있으면 피했지요. 아주 다양한 가정 출신의 학생들이었으니까요. 우리 급우 중에는 부모가 강제수용소에서 죽은 여학생도 있었고, 해방 당시 아버지가 총살당한 남학생도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모두가 모두를 약간은 의심하고 있었던 것이죠.”

33 학생들에게 가장 큰 영향을 미친 것은 철학 선생이었다. 그의 이름은 장 이폴리트였다.

34 “전쟁이 끝난 후 몇 년 동안 철학의 권위는 그 어느 것과도 비견할 수 없는 것이었다. 우리에게 있어서 철학이 무엇이었느냐를 말하라면 우리는 결코 그것을 남의 얘기하듯 냉정하게 할 수는 없으리라고 나는 생각한다. 19세기는 아마도 역사의 시대였을 것이다. 20세기의 한 중간은 철학에 바쳐진 듯이 보였다. 문학 미술 역사 정치 연극 영화가 모두 철학의 손아귀에 있었다.”

2장 헤겔의 목소리

39 장 이폴리트는 2차대전 이후 프랑스에서 헤겔주의가 대대적인 성공을 거두는 데에 기여한 중심적인 인물이었다.

40 “헤겔은 한 세기 전부터 유명해진 모든 것, 예컨대 맑시즘, 니체, 독일 현상학과 독일 신존주의, 정신분석학 등의 근원이다. 그는 비합리성을 탐사하여 그것을 좀더 넓은 이성 속에 편입시키려 시도했는데, 이러한 시도는 우리 시대가 해야 할 과업이기도 하다. 그는 이어서 “헤겔의 후계자 중에는 자신이 헤겔에게 빚진 것보다는 그의 유산 가운데에서 자신이 거부하고 싶은 것만을 강조하는 사람들이 있다"고 말했다. 메를로 퐁티는 “헤겔의 근원을 잊으려는 배은망덕한 이론들을 헤겔과 다시 연결시키는 것"보다 더 시급한 작업은 없다고 결론지었다.

41 우리 시대는 논리학을 통해서건 인식론을 통해서건, 그리고 마르크스를 통해서건 니체를 통해서건 간에, 모두 헤겔에서 벗어나려는 몸부림을 하고 있다. 그러나 진정 헤겔에서 벗어나려면 우리가 그와 유리됨으로써 치르게 될 대가를 정확히 평가하는 일이 선행되어야 한다. 비록 공공연하게는 아니더라도 암묵적으로나마 헤겔이 우리와 얼마나 가까이 있는가를 알아야 하 며, 우리가 헤겔에 대항하여 사고할 때조차 그것이 여전히 헤겔적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하고, 그를 상대로 한 제소(提訴)가 실은 그가 우리에게 마련한 계략이며 그 끝에서 그는 여전히 요지부동인 채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만 한다. 우리 중 누군가가 장 이폴리트에게 빚진 듯한 느낌을 갖고 있다면 그것은 그가 우리를 대신해서, 그리고 우리를 앞질러서 헤겔과 멀리 떨어지는 길을 지칠 줄 모르고 답파했기 때문이다. 그 길을 통해 우리는 헤겔과 거리를 유지했고, 비록 다른 방식이기는 하나 그 길을 통해 헤겔에게 당도했으며, 이어서 다시금 그에게서 떠나게 되었다

43 (장 이폴리트)결국 그는 우리에게 철학적 사유란 끊임없는 실천이고, 철학 아닌 것을 작품으로 만드는 방법이라는 것을 가르쳐 주었다. 그리고 우리의 존재와 엮여 있는 그 비-철학 옆에 항상 가장 가까이 머물러 있어야 한다는 것도.

48 푸코는 자신이 소유하고 있다고 믿는 천재성을 과시하기 좋아했다. 그것이 좀 심했기 때문에 그는 곧 거의 모든 사람들로부터 미움을 샀다. 그리고 반쯤 미치광이 취급을 받았다. 당시에 그를 알았던 사람들이 입을 모아 말하는 공격적이고, 연약하고, 불쾌한, 그러나 연민을 자아내는 이 인물에게서 우리는 자신의 동성애적 성향을 받아들일 수 없어 극단적인 행동을 보이는 한 젊은 게이의 전형을 보아야 하지 않을까?

3장 윌름 가

53 1978년의 인터뷰에서도 그는 <광기의 역사>의 탄생에 대해 답하면서 “내 개인사 속에서도 내가 배제되었다는 것, 진정 배척되었다는 것,사회의 그늘 속에 속하게 되었다는 느낌을 받은 적이 있었다. 그것은 나의 성 정체성을 깨달았을 때였다. 성 정체성이 바로 자기 문제일 때 그것은 정말 큰 문제가 되는 것이다. 일종의 정신과적 문제로 변모하는 것이다. 당신이 남들과 같지 않다면 당신은 비정상이라는 의미고, 당신이 비정상이라면 그것은 당신이 환자라는 얘기가 되기 때문이다”. 이 부분을 좀더 확대하여 그는 1981년에 이렇게 말했다. “이론 작업을 시도할 때마다 나는 언제나 내 주변에서 전개되는 과정과 관련하여 내 개인적 경험에서 출발할 수 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내가 경험하는 사건들 속에, 내가 관여하는 제도들 속에, 타인들과의 관계 속에 균열,미세한 진동,기능장애를 발견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나는 그런 작업을 수행했다. 다시 말하면 내 자서전의 한 조각이라고 할 수 있겠다.”

54 그는 자신의 개인적•사회적 투쟁 속에 매몰되지 않았고, 다만 그것들을 사유하고, 극복하려 했으며, 더 나아가 자신에게 질문을 던진 사람들, 예컨대 정신의학자나 정신분석학자들의 질문을 아이러니하게 되풀이하는 형태로 “당신은 자신이 누구인지 아는가?” “당신은 당신의 이성에 대해, 당신의 과학적 개념에 대해, 당신의 지각 범주에 대해 확신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제기하면서 그것들을 문제화했다.

57 고등사범 동기 동창들은 푸코가 이상하고 비상식적이었다고 입을 모아 말하는 한편, 그가 이미 악착같은 공부벌레였다고 한결같이 말한다. 그는 항상 책을 읽었고, 읽는 것만으로 만족하지 못하여 그것을 카드로 만들고, 그 카드들을 꼼꼼하게 조직적으로 상자 안에 정리했다. 베르그손의 철학사 강의를 듣고 학생이 써 놓은 노트까지도 꼼꼼히 챙겼다. 그의 동급생들이 보기에 그는 교양이나 공부하는 능력이나 관심의 다양성이라는 면에서 아주 예외적인 학생이었다

58 나는 헤겔을 읽기 시작했고 이어서 맑스를 읽었으며, 1951년 혹은 1952년에 하이데거를 읽었다. 그리고 1952년인가 1953년인가 니체도 읽었다.
하이데거를 읽을 때 해놓은 막대한 양의 메모를 나는 아직도 전부 보관하고 있다. 그것들은 헤겔이나 맑스를 읽으며 작성한 노트와는 또 다른 중요성을 갖는다. 나의 모든 철학적 형성은 하이데거의 독서에서 결정되었다. 그러나 니체가 그것을 압도했다는 것을 인정한다. 니체에 대한 나의 지식은 하이데거의 그것보다 휠씬 우수하다. 그러나 여하튼 그 두 경향의 철학은 나의 기본적인 철학 체험이다. 아마 내가 하이데거를 읽지 않았다면 니체도 읽지 않았을 것이다.”

65 그 당시에 우리의 비판정신은 완전히 침몰해 버리고 말았다는 것을 우리는 인정해야 할 것이다. 게다가 비판정신은 열여덟 살이나 스무 살에 완성되는 것도 아니어서, 레지스탕스에 참가하여 투쟁하지 않았다는 막연한 후회가 그 나이 또래의 젊은 학생들로 하여금 레지스탕스의 연장선이라고 주장하는 한 정당을 택하게 했던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은 시대에 뒤진 듯한 기분을 만회할 수 있었던 것이다.

75 그는 곧 끈질기게 공부하기 시작했다. 매일 국립도서관을 찾는 버릇이 생긴 것도 이때였다. 이 습관은 그가 스웨덴으로 떠날 때까지 몇 년간 계속되었고 프랑스로 돌아오자마자 다시 시작되었다. 국립도서관은 아마도 푸코의 일생 중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낸 곳일 것이다. 그러나 푸코는 3년간의 규정과는 달리 티에르 재단에서 1년만을 보냈다. 이미 윌름 가에서도 겪었지만 이 공동생활을 그는 참지 못했다. 거기서도 푸코는 거의 전원으로부터 미움을 받았다. 그는 모든 사람들을 공격했고 소란을 피웠으며 분쟁을 일으켰다.

4장 광인들의 카니발

80 자신의 합리성을 선택하려고 하는 것이 문제다. 오히려 합리성의 근거를 물어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 근거가 결코 과학적으로 구성된 객관성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다.

81 자클린 베르도는 푸코의 학창 시절에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 그년는 오래전부터 푸코의 가족을 잘 알고 있었다. 그녀의 양친이 푸코 가족과 오랜 친구였기 때문이다.

84 인간의 시대에 나는 삶과 죽음을 가르는 경계 벽 위로 점점 더 헐벗어 가는, 오로지 위로 잡아 뽑는 힘만 가지고 있는 사다리가 세워지고 커져 가는 것을 보았다. 다름 아닌 꿈이….. 여기서 어둠은 사라지고 삶은 가혹한 우화적 금욕의 형태를 띠며 엄청난 힘의 제압이 된다. 우리는 이 엄청난 힘이 우리 몸을 관통하는 것을 막연히 느끼지만 그러나 가혹한 분별력과 끈기와 성실성이 부족하여 그것을 완벽하게 표현하지 못할 뿐이다.

84 모든 경우에 있어서 죽음은 꿈의 절대적 의미다. 그리고 실존이 자신에 대해 가장 근본적인 것을 알 수 있는 것은 바로 죽음의 꿈속에서다.

90 이 기간 동안 푸코는 실험심리학의 전문적 분위기를 완전히 익힐 수 있었다. 그의 견습은 이제 대학의 태두리를 벗어나 어떤 민속학자가 말했듯이 ‘현장’ 속에서 이루어졌다. 정신병의 실재 그리고 정신병자의 현존과 맞부딪쳤다. 그는 ‘광인’의 수용과 ‘범죄자’의 수용이라는 두 형태의 현실속에 몸을 푹 담그고 관찰할 수가 있었다. 비록 그의 불확실하고 어정쩡한 지위는 그가 학습하려 하는 정신분석가의 일로부터 그를 멀리 떼어 놓았지만 그 자신 역시 ‘바라보고’,‘관찰하고’,‘확인하는’ 사람 중의 하나였다.

5장 스탈린의 구두장이

94 (푸코) 헤겔사상과 현상학이 대표하고 있는 철학의 전통적 형식들과 거리를 두면서 니체와 바타유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인터뷰 진행자가 … 당시의 맑스주의적 분위기에 대해 문자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젊은 지식인들인 우리들 대부분에게 있어서 니체나 바타유에 대한 관심은 맑시즘이나 공산주의에서 멀어지기 위한 방법이 아니었다. 그것은 오히려 공산주의에서 우리가 기대한다고 믿었던 것을 향해 가는 유일한 통로며 소통방식이라고 생각했다. 우리가 그 안에서 살 수밖에 없었던 세계에 대한 전면적 거부의 욕구는 헤겔의 철학으로는 도저히 충족될 수업는 것이었다. 또 한편으로 우리는 현재와는 완전히 다른 어떤 것, 즉 공산주의가 형체를 갖추고 존재하는 것으로 보이는 곳에 도달하기 위해 과거의 것과는 전혀 다른 지적인 길을 모색하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맑스를 잘 알지도 못하면서, 헤겔주의를 거부하면서, 실존주의의 한계에 불만을 느끼면서 공산당에 입당하기로 결정했던 것이다. 때는 1950년이었는데, 그러니까 나는 ‘니체적 공산주의자’였다! 도저히 어울릴 수 없는 것이고 어찌 보면 우스꽝스럽기까지 하다는 것을 나 자신이 잘 알고 있었다.”

푸코는 스스로의 지적.정치적 도정을 재구성했음이 분명하다. 왜냐하면 그가 공산당에 가입한 것은 결코 니체 사상에 의해서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의 니체 읽기는 휠씬 뒤에 이루어졌고,여하튼 니체가 그에게 결정적 영향을 미친 것은 1953년경이었다는 것이 증인들의 말이다. 모리스 팽게는 1953년 여름 휴가 때 이탈리아의 해변에서 푸코가 니체를 처음으로 발견한 사실을 디음과 같이 회상했다. ‘1953년 니체와의 만남이 이루어 지기 전까지 그의 준거의 축은 헤겔, 맑스, 프로이트, 하이데거 등이었다. 미셸 푸코가 치비타베키아 해변에서 니체의 <반시대적 고찰>을 읽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

96 미셸 푸코는 과격한 스탈린주의 운동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

푸코의 강의는 아내와 아이들을 때리는 알코올 중독의 가난한 구두장이 예화로 마무리되었는데, 이 예화는 비로 스탈린의 것이었다. 그는 정신병리가 가난과 착취의 산물이며 따라서 인간 조건의 근본적인 개혁만이 그것을 종식시킬 수 있다는 것을 말하기 위해 가난한 구두장이를 예로 들었던 것이다.

100 “똑같은 위계 구조, 똑같은 강제성, 똑같은 교조주의"를 갖고 있다는 점에서 대학의 기능과 공산당의 기능이 유사하다는 이야기를 하면서였다. “교수자격시험 심사위원장에게 보일 논문을 하나 쓰는 것이나 내가 그랬듯이 당서기장의 기고문을 대신 쓰는 것이나 둘 다 정확하게 똑같은 일이다!”

101 그가 1953년에 탈당한 것은 확실하다. 이 탈당의 이유는 물론 복합적이다. 우선 이 점이 아주 중요한데, 푸코는 동성애를 부르주아의 악덕, 퇴폐의 징후로 보는 당에서 마음이 몹시 불편했을 것이다. 동성애가 그를 다른 사람으로부터 갈라놓는다는 느낌을 가졌을 것이다.

102 비록 그 설명을 납득할 수는 없었지만 우리들은 방금 들은 이야기를 믿으려고 애썼다. 이것 역시 내가 한심하다고 생각하는 태도의 일부이지만 이게 나의 태도였다. 이것이 바로 당 안에서 내가 지내던 생활의 방식이었다. 전혀 믿을 수 없는 어떤 사실을 지지할 수밖에 없는 것, 그것이야말로 ‘자아의 해체’를 훈련하는 것이었고 ‘타자’가 되는 방식을 추구하는 것이었다.

105 “우리는 바타유와 블랑쇼를 사르트르를 통해 알았으나 사르트르와는 정반대의 독서법으로 그들을 읽었다"라고 자크 데리다는 설명한다. 여하튼 푸코에게 있어서는, 그가 나중에 여러 번 말했듯이, 그들이야말로 ‘니체의 사상’으로 인도하는 진정한 통로였다.

106 과학이 인과관계를 내세워 설명하면 할수록 그 설명은 더욱 이해가 되지 않는다. 이해는 자기 능력에 벗어나는 것만을 추구하고, 아예 이해가 불가능한 순간을 향해 힘차고 끈질기게 나아간다. 이 순간에 이르면 철저하게 구체적인 현실임에도 모든 사실이 불투명하고 모호하게 되고 만다.

107 샤르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사물이 우리들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만들어 놓은 환상을 제거했고, 사물이 우리들에게 양도한 부분을 사물에게 남겨 놓았다.’

108 그들의 유일한 대화는 그러니까 잡지 기고문에서 기고문으로, 그리고 책에서 책으로 이어졌던 순환적인 글들이 고작이다. “우리는 참으로 아깝게 서로를 놓쳤다"라고 아직도 블랑쇼는 말한다. 그러나 사실은 그들 자신이 그것을 원했던 것은 아닐까?

109 여우 한 쌍이 눈밭을 헤집네, 신방 차린 토굴기를 쿵쿵 밟으며 밤이면 그 억센 사랑이 주위에 타는 목마름을 핏자국처럼 뿌리네. Un couple de renards bouleversait la neige, Piétinant l’orée du terrier nuptial; Au soir le dur amour révèle à leurs parages la soif cuisante en miettes de sang.

6장 사랑의 불협화음

118 아주 못생기고, 그러나 매력적이고, 강렬하게 정신적이다. 게이에 대한 박식함은 백과사전급이다. 내가 이때까지 알지 못하고 있던, 그리고 앞으로 고통스럽게 탐험하게 될 세계를 권유받은 듯 당황스러웠다.

120 너는 딱딱하게 굳어서 멈춰 선다. 너는 뒤를 돌아본다. 얼마 전부터. 그러니까 너는 미쳤는가 세상을 도망치고 싶어…….겨울 전에? 세상은…… 열린 문 수천 개의 말없이 차가운 사막을 향해 내가 잃어버린 것을 벌써 잃어버린 사람은 어떤 곳에서도 멈추지 않고. 너는 새하얗게 질려 멈춰 선다. 한겨울 속을 미친 듯 돌아다니며 더 차가운 하늘을 끊임없이 찾아 헤매는 연기처럼….. Tu t’arrêtes figé, tu regardes en arrière, depuis combien de temps. Es-tu donc fou de fuir le monde … avant l’hiver? Le monde… une porte ouverte sur mille déserts muets et froids. Celui qui a déjà perdu ce que je perdis ne s’arrête nulle part. Tu t’arrêtes tout pâle, condamné à errer en plein hiver Pareil à la fumée qui cherche sans cesse des cieux plus froids…

121 우리에게 감각·경험·관능·독특한 체험·주관적 내용 혹은 사회적 의미의 중요성만을 가르쳐 준 그 시기에 불레즈와 음악을 만남으로써 20세기를 전혀 다른 각도에서 볼 수가 있었습니다. 즉 형식의 주변에서 일어난 오랜 전투가 그것입니다. … ‘형식주의’가 낡은 문제들에 어떻게 도전했고, 사유방식을 어떻게 뒤흔들어 놓았는지를 인식할 수 있었습니다.

이때까지 그 안에서 편안함을 느꼈던 문화적 가치에 대한 믿음을 깨뜨린 음악은 그러니까 앞으로 푸코로 하여금 다른 모든 것을 일정한 거리를 두고 보게 만들었고, 결국 현상학과 맑시즘에서도 벗어날 수 있게 해주었다.

121 자신에게 음악이 니체의 독서만큼이나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122 (푸코가 연인에게 쓴)편지에서 그는 타인에게 속해 있다는 것, 타인에게 소유된다는 것, 또 타인의 기쁨이 된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이제 알게 되었다고 했다. 마치 빨간색 실이 짜여져 거대한 태피스트리가 되듯이 그의 팔이 만들어 내는 엮임 속에 자신의 모든 삶이 미끄러져 들어가 행복과 아름다움과 힘의 직물이 짜여진다고도 했다. 그러고는 자신을 아낌없이 다 주었기 때문에 더 이상 자신은 줄 것이 없으며, “당신은 내 욕망과 무관하게 순전히 당신의 쾌락만을 위해 나를 취하면 됩니다"는 말로 끝을 맺었다. 그것이 자신의 ‘비밀’이며 이 사실을 잊지 말아 달라고 덧붙였다.

122 바라케와의 관계가 지속되었던 2-3년간 푸코는 예술적 혁신의 고양된 분위기, 다시 말해서 모든 것을 회의하고 새롭게 검토하려는 흥분된 분위기 속에 푹 젖어 있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개성이 자리 잡고 작품들은 윤곽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122 편지에서 그는 타인에게 속해 있다는 것, 타인에게 소유된다는 것, 또 타인의 기쁨이 된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이제 알게 되었다고 했다. 마치 빨간색 실이 짜여져 거대한 태피스트리가 되듯이 그의 팔이 만들어 내는 엮임 속에 자신의 모든 삶이 미끄러져 들어가 행복과 아름다움과 힘의 직물이 짜여진다고도 했다. 그러고는 자신을 아낌없이 다 주었기 때문에 더 이상 자신은 줄 것이 없으며, “당신은 내 욕망과 무관하게 순전히 당신의 쾌락만을 위해 나를 취하면 됩니다"는 말로 끝을 맺었다. 그것이 자신의 ‘비밀’이며 이 사실을 잊지 말아 달라고 덧붙였다.

123 우리 두 사람에게는 단 하나의 삶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공동의 삶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 삶을 잃거나 망칠 권리도 두 배로 줄어듭니다.

124 바라케가 1969년 한 인터뷰에서 “누군가 내게 ‘천재란 절망에 잠긴 엄격한 정신’이라는 주네의 말을 반복해서 들려주었습니다"라고 말했을 때 우리는 저 멀리서 들려오는 푸코의 목소리를 듣지 않을 수 없었다.

125 그는 정신분석이 ‘인간과 주변 환경의 관계’를 ‘비현실화’했다고 비난했다. 이것은 결국 파블로프와 파블로프 이론을 등장시키는 것이 아닌가. … 여기서 우리는 그의 정치적 의도를 엿볼 수 있다. 왜냐하면 그 시기에 파블로프는 공산당이 극찬했던 ‘유물론적 심리과학’ 수립의 깃발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126 “주위 환경의 조건이 자극과 금지의 변증법적 운동을 더 이상 허용하지 않을 때 거기에는 방어에 대한 금지가 자리 잡는다. …. 병은 방어의 한 형태다.” 그것은 결국 “정신병이 들었기 때문에 소외되는 것이 아니라 소외되었기 때문에 정신병이 된 것이다.“라는 의미가 된다. ……

“정신병이 여러 모순적인 행동들의 뒤얽힘 속에서 주로 나타나는 것은 모순의 요소들이 인간 무의식의 역설적 성격으로서 중첩되기 때문이 아니다. 그것은 다만 인간이 다른 인간을 모순적인 체험으로 삼기 때문이다. 예컨대 현재의 경제체제가 경쟁, 착취, 제국주의 전쟁 그리고 계급투쟁 속에서 결정하는 사회적 관계들은 인간에게 모순이 내재한 체험을 제공한다.”

127 #정신병 이란 “인간이 역사적으로 소외되는 사회 안에서의 모순의 결과“다. 그렇다면 정신과 치료를 새로운 방향으로 해야만 할 필연성이 생긴다. “언젠가 환자가 소외의 운명을 겪지 않게 되는 날이 올 때, 우리는 비로소 정신병을 인간 개인의 문제로 생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환경과의 새로운 관계를 수립하지 않고는 치료가 불가능하다. … 모든 과학이 그렇듯이 심리학도 인간을 질곡에서 해방시키는 것이 목적이라면 진정한 심리학은 심리학주의에서 벗어나야 한다.”

128 푸코 저서의 중심 주제인 ‘광기’ 는 사실상 철학적 논쟁의 주제이기도 하다.

128 푸코는 “…정신병원은 보통 사람들 사이에서 살 수 없는 사람들의 피난처다. 따라서 그것은 우리의 인간의 인간 환경을 이해하거나, 정상인에게 끊임없이 제기되는 문제들을 이해하기 위한 좋은 수단이다.”

130 다시 말하면 실증심리학은 다음과 같은 사실을 잊고 있다는 것이다. 즉, “정신병리학이 심리적 경험의 한 근원이었으며 지금도 여전히 그러한 것은, 정신병이 거기서 어떤 숨겨진 구조를 끌어내거나 또는 인간이 거기서 자신의 진실된 모습을 좀더 잘 알아볼 수 있어서가 아니라, 오히려 거기서 자기 모순의 절대적 요소 또는 그 진실의 칠흑같이 어두운 밤을 발견하기 때문이다. 인간의 조건인 질병은 건강의 심리적 진실이다"라고 그는 썼다. 자신의 근원을 잊는 심리과학에 그 ‘영원히 지옥 같은’ 소명을 일깨워 주어야 한다고도 했다. “심리학은 지옥의 회귀에 의해서만 스스로를 구원할 수 있다"고 푸코는 결론을 내렸다. ”

🧏 제미니…미셸 푸코가 “심리학은 지옥의 회귀에 의해서만 스스로를 구원할 수 있다"고 말한 것은 심리학이 자신의 근본적인 토대를 망각하고 피상적인 과학으로 전락했다고 비판하며, 심리학의 기저에 있는 ‘인간의 조건’이라는 어둡고 근원적인 문제(지옥)로 되돌아가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7장 웁살라, 바르샤바, 함부르크

135 “나는 항상 프랑스의 사회적• 문화적 삶의 어떤 부분을 견디기 어려웠 다. 그것이 내가 1955년에 프랑스를 떠난 이유다"라고 그는 나중에 자신의 스웨덴행을 설명했다. “그 당시에 스웨덴은 훨씬 자유스러운 나라로 여겨 졌다. 그러나 나는 곧, 어떤 자유의 형식은 억압사회와 똑같은 억압적 효과를 낸다는 것을 그곳에서 발견했다.

152 그는 정신병원에서 일을했다. 의사들은 그에게 자기들 학문의 역사를 하나 쓰라고 제의했다. 그러나 그는 정신과의사보다는 정신병자에게 더 흥미가 있었다. 더 정확히 말해 의사와 환자의 관계, 즉 이성과 광기의 관계에 더 관심이 있었다.

153 그는 쓰고 또 썼으며 밤에도 계속 썼다. 항상 음악을 들으면서였다. <골드베르크 변주곡> 바흐, 을 듣지 않는 날은 하루도 없었다. 왜냐하면 그에게 있어서 음악이란 곧 바흐였고, 또는 모차르트였기 때문이다.

153 좀더 자세히 말하자면 서구 사회가 『우신 예찬』에서 『정신현상학』(이건 비이성의 예찬이지)에 이르기까지, 또는 ‘쾌락의 정원’에서 ‘귀머거리의 집’에 이르기까지 어떻게 비이성의 경험 속으로 미끄러져 그 합리주의와 실증주의의 끝에서 애매한 파토스(pathos)의 형식으로 자신의 한계를 맞이하게 되었는지를 살펴보려구요. 이 파토스가 서구 문화의 비장미(pathetique)의 요소이고 또한 병리학(pathologie)의 근원이죠. 에라스뮈스에서 프로이트에 이르기까지, 인본주의에서 인간학에 이르기까지 광기는 근본적으로 우리 하늘의 배경을 이루고 있습니다. 그 차이를 측정해 봐야겠어요. 그런데 어떤 컴퍼스로 재야 할까요?

156 저는 정신분석학의 역사나 발달사를 쓰려고 했던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정신분석학이 발달해 온 사회적·도덕적·상상계적 맥락의 역사를 쓰고 싶었던 것입니다.

169 <광기와 비이성>의 시작… 파스칼은 “인간은 누구나 광인이므로 미치지 않은 것 역시 또 하나의 광기다"라고 말했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작가의 일기>에서 “자기 자신의 양식을 확인하는 것은 이웃 사람을 감금하고서가 아니다"라고 말했다.

🧏 자기의 양식을 확인하는 것은 이웃사람을 감금하고서가 아니다 -> 근대 이성이 자신의 정체성,순수성을 확립하기위해 비이성(광기)를 감금하는 것을 빗대어 표현

169 지금은 공통의 언어가 없다. 과거에는 있었으나 이제는 더 이상 없는 것이다. 18세기 말에 광기를 정신병으로 규정한 이래 미친 사람과의 대화는 단절되고, 정상인과의 분리는 기정사실화됐으며, 전에 광기와 이성 사이에서 이루어졌던 대화, 즉 약간 더듬거리며 직설적으로 내뱉는 두서없는 말들이 완전히 망각 속에 묻히게 되었다. 정신과의사의 언어는 광기에 대한 이성의 독백일 뿐, 그런 침묵 위에서 진정한 언어는 형성될 수 없다.” 그리고 그후에 자주 인용되는 멋진 선언으로 푸코는 자신의 계획을 정의했다. “나는 이 언어의 역사를 쓰려는 것이 아니라 이 ‘침묵의 고고학’을 쓰려는 것이다.

170 침묵의 고고학을 쓴다는 것은 모든 서구 문화의 깊이를 헤아려 본다는 이야기다 왜냐하면 “중세 초기 이래 유럽인들은 모두 자기들이 막현히 광기, 실성, 정신착란이라고 불렀던 것과 관계를 맺고 있었기” 때문이다.

174 17세기…“오늘날 정신병자들은 죄의식을 마치 자신의 운명처럼 느끼고, 의사들은 이것을 이 병의 자연적 성격이라고 간주하고 있는데, 정신병과 죄의식의 연관성은 아미 이때에 생겨난 것 같다” 고 푸코는 썼다.

🤔 gemini…푸코가 17세기 유럽, 특히 고전주의 시대(Classic Age) 의 #대감금(The Great Confinement) 현상을 분석하며 지적한 내용은, 정신병자(광인)를 ‘도덕적 타락자’ 또는 ‘사회적 질서를 위반한 자’로 취급하며 ‘죄의식’ 을 주입하기 시작했다는 점

175 광기가 갑자기 사회 속에 투입되어 특권적이고 거의 배타적인 자리를 차지하게 된것, 과거에 친숙한 이웃으로 눈에 띄지 않게 살거나 아무런 경계선 없이 온 나라를 방랑하던 광인들은 어느 사이엔가(유럽 전역에서 50년도 채 안되는 사이에) 한정된 지역 안에 한데 집어넣어 누구나 그들을 구별하고 비난할 수 있게 된 것, 그리고 그때부터 경찰의 예방 또는 치안 대책의 차원에서 비이성적인 사람들을 단숨에 몰아내는 조치를 취할 수 있게 된것, 그것이 중요한 문제다. ….비이성이 인식의 대상이 되기 전에 우선 파문의 대상이었다는 것은 우리의 문화를 이해하는 데 있어서 매우 중요한 일이 아닐까?

🤔 어떤 비이성정인 상태를 구분하고, 그 사람들을 파문시키버리는 우리의 문화에 대한 이해!!

176 이제 광인들은 그들을 담당하는 의사들과 함께 혼자 남았다. 그것이 수용소의 탄생이다 강제수용이 의학의 이름으로 행해졌고, 광기가 ‘정신병’으로 규정될 모든 조건이 갖추어졌다.

🤔 우리문화가 비이성,광기라고 제단한 사람들은 , 우리 문화에서 보이지 않은 곳으로 보낸다. 수용소-정신병원으로. 정상과 비정상의 경계는 무엇이과 이성과 비이성, 광기와 아닌것의 경계는 무엇인가. 그 경계를 만든것은 누구의 광기인가.

176 피넬(Philippe Pinel-19세기 초의 정신과의사. 현대 정신의학의 창시자로 일컬어짐)이 그 창시자라고 사람들이 찬양하는 실증주의 시대의 소용소는 관찰,진단,치료의 자유스러운 구역이 아니었다. 그것은 환자가 고발되고 재판받고 선고받는 사법적인 장소였으며, 거기서 풀려나기 위해서는 깊은 심리학적 영역에서의 소송 절차, 즉 회개가 있어야만 했다. 광기는 비록 밖에선느 무죄였더라도 수용소 안에서는 처벌의 대상이었다.

177 우리 시대의 인간은 자신이 광인이건 아니건 간에 광인의 수수께끼 속에서만 자신의 진실을 찾아볼 수 있다. 모든 광인들은 사람에 따라 자기 속에 인간의 진신을 갖고 있거나 혹은 갖고 있지 않거나 하지만, 여하튼 그 진실은 그의 인간성이 추락할 때 적나라하게 드라난다. 요컨데 #정상인 과 #광인 은 이 상호적이며 양립 불가능한 진실의 희미한 선으로 연결되어 있다.

178 푸코의 책 <광기와 비이성>… 다음과 같은 선언으로 끝을 맺는다 “광기의 새로운 승리와 계략. 광기를 측정하고 심리학에 의해 광기를 설명한다고 믿는 이 세계는 이제 거꾸로 그 광기 앞에서 자신을 변명해야만 한다. 왜냐하면 그 논쟁과 노력 속에서 세계는 니체, 반 고흐, 아르토 등의 작품을 거슬러 자신을 측정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광기에 대한 지식은 결코 이 세계에 확신을 주지 못하며 오로지 그 광기의 작품들만이 이 세계를 설명해 줄 뿐이다”

🤔 [미셸 푸코가 광기의 역사 결론에 광기의 역설적인 승리를 주장한 뜻](미셸 푸코가 광기의 역사 결론에 광기의 역설적인 승리를 주장한 뜻)

2부 사물의 질서

1장 시인의 자질

2장 책과 그 분신들

3장 댄디와 개혁

4장 시체 해부

5장 부르주아지의 성채

6장 광활한 바다

3부 투사 그리고 콜레주 드 프랑스의 교수

1장 뱅센에서의 막간 에피소드

2장 곡예사의 고독

3장 어둠의 교훈

4장 민중의 정의와 노동자의 기억

5장 우리는 모두 지배받는 자들이다

6장 맨손으로 하는 저항

7장 아깝게 놓친 만남

8장 선(禪)과 캘리포니아

9장 예술작품으로서의 인생

부록

부록 1 문학박사학위 취득을 위한 논문 인쇄허가를 얻기 위해 함부르크의 프랑스 문화원장인 미셸 푸코 씨가 제출한 원고에 대한 조르주 캉길렘의 보고문

부록 2 미셸 푸코의 연구업적

부록 3 콜레주 드 프랑스 1969년 11월 30일 교수회의 -‘사유체계의 역사’ 강좌 개설을 위한 쥘 뷔유맹의 보고서

부록 4 콜레주 드 프랑스 1970년 4월 12일 교수회의 -‘사유체계의 역사’ 강의를 맡을 미셸 푸코의 업적 소개를 위한 쥘 뷔유맹의 보고서

부록 5 자유로운 사상 -피에르 부르디외

미셸 푸코 연보 및 사건 찾아보기

미셸 푸코 주요 저작

인명 찾아보기

7. 🤔 Rambling

  • 부유한 집안에서 테어났다
  • 할아버지 아버지 모두 그와 같은 이름을 가졌다.
  • 그의 어머니는 푸코의 교육을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 동성애로 힘들어한 그는 스스로 유배를 선택하고
    • 그곳에서 정말로 열심히 책을 읽고 노트를 정리하고 자신만의 사유의 시간을 만들었다.
  • 전쟁-2차대전-이 끝나고 맑시즘이 환산되고 공산주의에 열광, 푸코도 공산당원이 된다.
  • 뛰어난 실력에도 그는 교수자격시험 첫번째 시험에 낙방한다
    • 2번째 도전했고 시험에서 합격한다.
  • 푸코는 이성이 광기를 제단하고 억압하는 부조리를 설명했다. 그의 <광기의 역사>를 통해서.
    • 4장에서 푸코는 정신병원에서 보조리 일하면서 과학적 , 의학측정하는 것을 경험했고
    • 감옥에서도 일하면서 뇌촬영등을 경험했다.
  • 푸코가 말하는 인간의 심리적 병, 정신의 병은
    • 언젠가 환자가 소외의 운명을 겪지 않게 되는 날이 올 때, 우리는 비로소 정신병을 인간 개인의 문제로 생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 라고 말한다. 이 사회의 경젱과 계급 체계가 인간을 소외 시키고, 그것이 인간의 정신을 병들게 한다.
  • 우리가 위대한 작품이라고 부르는 니체와 고흐의 작품들
    • 우리가 광인으로 분류하거나 경계에 있었던 예술가들, 이성적인 세계가 그들의 가치를 확인하기 위해 ‘광인의 예술’을 들여다 보는 역설, 이성(세계)은 작품들의 거대한 힘과 진실 앞에서 자신의 합리성이 얼마나 좁고 편협했는지를 시험해야 합니다
    • 푸코는 이런 현실을 알아차린 것이였다.. 역시 천재는 다르다!!
    • 우리는 우리세계의 부조리를 광인이나 광인의 경계에 있는 자들의 작품을 통해서 깨달게 된다니!!!!

8. 🔗 References

YG님의 코멘트 국내에 나온 이런 책들이 모두 푸코의 문제의식의 연장선상에 놓인 것들이죠. 얼른 생각난 게 다섯 권이고 훨씬 많습니다. :(

정신병을 팝니다 - 신자유주의는 어떻게 우리 마음을 병들게 하는가 영국 의료인류학자 제임스 데이비스는 이 책에서 ‘고통을 이해하는 문화’에 일어난 거대한 변동이 정신 건강 위기의 근본 원인이라고 진단한다. 정신질환이 약물로 치료해야 하는 한 개인의 뇌의 문제로만 비춰질 때, 정신적 고통을 둘러싼 맥락은 눈앞에서 사라지고 만다.

정신병의 신화 반정신의학의 선구자이자 정신의학의 전복자 토머스 사스는 《정신병의 신화》에서 “정신병은 은유”라고 선언하며 자기 분야에 가장 날카로운 비판의 칼을 들이댔다. 사스는 현대 정신의학이 정신병 개념을 이용해 개인의 자유와 존엄을 근본적으로 억압하고 훼손하는 방식을 꿰뚫어봄으로써 정신의학의 토대를 뒤흔들었다.

우울증은 어떻게 병이 되었나? - 일본에서 우울증의 탄생 의료인류학자 기타나카 준코가 일본에서 우울증이 폭발적으로 급증하게 된 과정과 이유를 심층 분석한 책이다. 저자가 1990년대 말 북미 친구들에게 받은 질문, “일본 사람들은 왜 우울증에 걸릴 만큼 일을 하느냐?”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 지난 25년간 우울증을 연구한 결과물이다.

정신병을 만드는 사람들 - 한 정신 의학자의 정신병 산업에 대한 경고 내부자의 시선으로 현대 정신 의학계의 문제점을 폭로하는 내부 고발서인 동시에, 진단의 기준을 대폭 넓힘으로써 그릇된 정신병의 유행을 일으키는 데 스스로도 일조한 데 대한 일종의 양심선언이다.

프로작 네이션 - 우울에 빠진 한 여자의 심리 보고서 <비치 : 음탕한 계집> 등의 저서를 통해 제3세대 페미니즘을 대변했던 엘리자베스 워첼의 자전적 회고록. 이 책은 저자 자신의 젊은 시절을 송두리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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