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항해사 흰닭, 파드레, 그리고 오렌지 반란군의 기이한 모험

[!INFO] 책 정보
- 저자: 저자/딜런_유
- 번역:
- 출판사: 출판사/뿌리와이파리
- 발행일: 2025-11-10
- origin_title: -
- 나의 평점: 10
- 완독일: 2026-01-01 12:51:15
1. 🖐️ Before Reading (읽기 전)
1.1 동기와 기대
2. 📜 Synopsis (LLM)
Summery
이 책은 16~17세기 동아시아와 유럽의 만남을 ‘항해사 흰닭’, ‘파드레’, ‘오렌지 반란군’이라는 세 키워드를 통해 재구성합니다. 1653년 제주에 표착한 하멜 일행의 이야기를 시작으로, 유럽인 항해사, 가톨릭 선교사, 그리고 네덜란드 반란군이 동아시아에 등장하며 포르투갈, 스페인 제국의 질서에 도전하고 세계사의 흐름을 어떻게 바꾸었는지 미시사적 관점에서 다룹니다. 조선의 폐쇄성이라는 통념을 깨고 임진왜란 이후 서양 문물과 종교를 수용했던 조선 청년 토마스나 조완벽 같은 인물들의 사례를 통해, 작은 사건들이 복합적인 관계망 속에서 세계사의 방향을 바꾸는 나비효과가 되었음을 생생하게 보여줍니다. 저자는 국경과 시대를 넘나들며 경제사, 근세 과학사, 동서교류사, 근대 문화사의 관점에서 이문명 간 교류의 다채로운 풍경을 흥미롭게 풀어냅니다.

Keyword
#세계사, #동아시아, #유럽, #대항해시대, #하멜, #선교사, #네덜란드, #조선
Author
- 저자(글): 딜런 유
- 소개: 서울대학교를 졸업하고 LG종합상사에서 수입 업무에 종사했으며, 뉴욕시립대학교에서 MBA 석사를 취득한 후 2000년부터 글로벌 금융정보 통신사에서 근무 중이다. 무역, 동서교류사, 경제사, 근세 과학사, 근대 문화사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활동하며, 2007년부터 2023년까지 블로그 ‘迪倫齋雜想’에 관련 글을 연재했다. 2018년부터 공동연구자들과 함께 초기 근대 건축가 이훈우를 발굴하는 연구를 진행했다. 고양이, 야구, 만화를 좋아하며 명랑 검도를 수련한다.
- 옮긴 책: 『아무도 모르는 뉴욕-세계 최대 도시는 어떻게 살고 있는가』, 『일본에 간 베이브 루스』
- 연구논문: 「건축가 이훈우에 대한 추가 연구 및 관련 자료」(김현경·유대혁·황두진, 『건축역사연구』 제30권 제3호, 2021), 「건축가 이훈우에 대한 연구」(김현경·유대혁·황두진, 『건축역사연구』 제29권 제3호, 2020)
- 홈페이지: https://dylansbibliotheca.com/
Organize Table
3. 🔆 Insight & Deep Dive
3.1 깨달은 점 (Aha Moment)
저자의 방대한 지식에 놀랍고, 심지어 너무 방대해 혼미해졌다.
항해서 흰닭 - 바다를 통해 세계를 이어 나간 유럽인들 파드레 - 목숨을 걸고 신앙을 전파하러 온 가톨릭 선교사 오렌지 반란군 - 네덜란드 사람들.
음력 아시아의 것이 아니다. 유럽의 예수회의 과학기술로 개발된것 중국에 유대인이 살고 있었다니 유대인의 역사 대마의 역사 일본의 나가사키 유럽인이 볼때 중국과 일본, 조선은 고도로 발달된 사회 시스템이 있는 국가였다. 아프리카나 여타 다른 지역과 달랐다.
네덜란드는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제국에서 수십년간 싸워 독립한 국가
유럽인들의 제국주의 신도 필요 없어 돈만 벌면되 네덜란드 동인도회사
네플릿스 <쇼군> 드라마가 아주 도움이 되었다.
조선의 셀럽 조완벽
3.2 비판적 사고 (Critical Thinking)
3.3 내 삶에 적용하기 (Action Item)
- 역사 공부는 더 치열하게
- 내 머리속에는 얼마나 남았나. 꺼내보자
3.4 Gemini 가 정리한다
우리가 함께 건너온 역사의 바다 이방인의 눈: 하멜과 하세쿠라 쓰네나가를 통해 17세기 동양과 서양이 서로를 어떻게 바라보았는지 살폈습니다.
생존의 투쟁: 소빙기와 대기근이라는 혹독한 자연 속에서 인류가 어떻게 저항했는지(경신대기근), 그리고 그 과정에서 인삼 같은 약재가 어떻게 경제의 중심이 되었는지 이야기했죠.
정체성과 경계: 중국으로 흘러 들어간 유대인들과 타이완의 정청궁을 통해, 경계에 선 사람들이 어떻게 자신들만의 왕국과 정체성을 지켜냈는지 보았습니다.
질서의 탄생: 후고 그로티우스의 해양자유론을 통해, 그 모든 모험이 가능했던 법적·이성적 토대도 짚어보았습니다.
“항해는 끝났지만, 그 과정에서 얻은 지도는 당신의 마음속에 남을 것입니다.”
4. 🏆 Top Highlights
📌 첫 번째 문장
벨테브레이는 노르트홀란트주 더레이프 출신의 얀 얀서 벨테브레이 Jan Janse Weltevree입니다 한국에서는 박연 으로 잘 알려진 그는 조선에 정착한 유일한 유럽인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역시 이름은 얀 얀서 혹은 얀 얀손이고 그의 이름은 오랑캐말로 박연이라고 했다는 기록에 따라 벨테브레이를 비슷한 발음의 ‘박’ 씨로 삼고 ‘얀’을 따서 연으로 이름을 지은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 두 번째 문장
인류가 겪은 가장 가까운 기후 변동 위기는 보통 ‘소빙기(littele ice age)’라고 부르는 17세기에 있었습니다. 그 직전 16세기에 촉발된 일련의 사건들이 17세기의 기후 변동과 맞물려 ‘글로벌’ 지구가 본격적으로 이어지고, 익명의 사람들이 국경과 바다를 건너 다른 문명과 문화와 사물들과 접촉하면서 이후 인류의 방향을 만드는 계기가 됩니다.
📌 세 번째 문장
중세를 벗어나서 막 피어나기 시작하던 과학혁명의 여명기에 예수회 출신 과학자들의 이름을 과학사 책에서 보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닐 정도입니다. 예수회의 눈에서 과학은 우주 속에서 드러나는 신의 섭리를 이해하는 과정이었던 것입니다… 단적으로 우리가 동아시아 고유의 전통이라고 믿고 있는 음력이 실은 이들 유럽인 예수회 선교사들이 만든 것이라고 하면 아시겠지요. 코임브라 대학의 이름이 조선에까지 알려질 정도로, 예수회는 포르투갈이 동아시아에 진출한 근세 기간에 포르투갈과 함께 가톨릭 선교를 주도한 곳입니다.
📌 네 번째 문장
(유대인, 당나라 혹은 송나라 시대 10~12세기)경로를 추정하면 페르시아에서 일단의 유대인 집단이 아프가니스탄-인도 북부를 거쳐 중앙아시아를 통해 중국으로 들어왔을 가능성이 가장 유력하다고 합니다 실제 시나고그가(유대인회당) 생기고 이 비문을 지을 때까지 카이펑을 이어주는 노선의 이산,닝샤에도 유대인 커뮤니티가 있었고, 이 라인이 양저우, 닝보에게까지 계속 이어진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금나라,원나라를 이어 상공업에 종사하던 이들 카이펑 유대인은 이후 명나라에 이르러 본격적으로 유학을 공부하고 과거를 쳐서 중앙 관계에 진출하기 시작했습니다.
📌 다섯 번째 문장
우리는 이제 왜 서로 이렇게 이야기를 하는지 알고 있습니다 벨테브레이가 조선에 표류했던 것은, 이미 말씀드렸듯이 타이완 지사였던 나위츠가 크게 사고를 쳐서 일본과 VOC 간의 교역이 전면 중단되었을 때입니다. 그때 벨테브레이는 이 야단법석에서 벗어나 있던 조선에 표착해왔습니다. 그러니까, 조선에서 동아시아의 통상적인 표류민 송환 시스템에 따라 그를 연고지로 돌려보네려고 했음에도 불구하고 일본은 VOC와 전면 교역 중단 중이었고 명나라는 청나라의 공세에 정신도 없었지만 타이완의 VOC를 아직 인정해준 적도 없는 상태였던 것입니다. 벨테브레이는 조선에서 보낼래야 보낼 곳이 없어져서 동래에서 한참을 낙동강 오리알 신세로 있었습니다. 오갈 데 없는 벨테브레이를 조선이 거뒤준 것에 가깝다고 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벨테브레이가 하멜에게 아무데도 갈 수 없으니 포기하고 여기서 잘 살아보자고 한 것은 아마도 진심이었을 거라 생각됩니다
하지만 아시다시피 하멜 일행은 이후 먼저 탈출한 사람들이 나가사키로 간 후 정식 외교 루트를 통해 조선에 남아 있던 잔류 인원까지 모두 송환하여 마침내 고국 네덜란드 연합 공화국으로 돌아 갑니다.
5. 📌 Key Concepts
5.1 핵심 키워드 정리
-
항해사 흰닭: 보통 ‘닭’이라고 하면 겁이 많거나 나약한 존재로 묘사되기 쉽지만,
- 이 작품 속 흰닭은 항해사로서의 자아를 찾아가는 주체적인 인물이죠.
- 네덜란드에서 와서 한국에서 생을 마친, 하멜의 일행
-
파드레: 신부(Padre)라는 뜻을 가진 이름만큼이나 정신적 지주 역할을 하지만, 그 이면에 숨겨진 사연들이 독자를 몰입하게 만듭니다.
- 동아시아로 건너와 신앙을 위해 목숨을 바쳤던 사람덜 , 신부님
-
오렌지 반란군: 색채 대비가 강렬한 이 집단은 작품 전체에 역동성과 긴장감을 불어넣습니다.
- 근세 동아시아에 온 유럽인 그룹
6. 🖍️ Book Marks
가보자 - 나가사키
시대적 상황 YG 하멜 일행이 제주에 표류한 1653년은 효종이 즉위한 지 4년째 되던 해였습니다. 효종은 인조의 둘째 아들(봉림대군)로 형 소현세자와 함께 청나라에 볼모로 8년간 잡혀갔던 당사자죠. 당시 효종의 조선은 청나라를 치기 위한 (어찌 보면 허황된) 북벌에 모든 에너지를 쏟고 있었습니다.
우리가 작년(2025년) 11월에 읽었던 『왜 선한 지식인이 나쁜 정치를 할까』의 시점과 소재를 염두에 두면 선조-광해군-인조-효종으로 시간이 흐른 뒤지만, 당시 씨를 뿌렸던 붕당 정치는 심화하고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효종 당시에는 정치적으로 송시열, 송준길 등 서인 세력이 정국을 주도하고 있었습니다.
한 가지 첨언하자면, 1653년은 대동법을 전라도 지역까지 확대할지를 놓고서 논쟁 중이었고, 당시 영의정이었던 김육이 이를 강하게 주장하고 있었던 상황이었습니다. 실제로 효종의 지지로 1653년에 대동법이 전라도 일부 지역에 실시가 되었죠.
제1장 이야기를 시작하면서
[17세기 조선에 도착했던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 하멜 일행 이야기](17세기 조선에 도착했던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 하멜 일행 이야기) [네덜란드인이 표류된 당시의 조선의 임금과 정치적 사회적 상황](네덜란드인이 표류된 당시의 조선의 임금과 정치적 사회적 상황)
하멜일행이 제주도에 불시착하고, 한국에 억류되었다가 , 탈출 -> 일본으로 건너가 -> 네덜란드로 돌아가고 -> 억류된 기간에 대한 비용 청구위해 보고서 작성 -> 하멜 표류기 -> 조선을 알리게 된 사건
[17세기 지구적 사건- 소빙기](17세기 지구적 사건- 소빙기)
14 인류가 겪은 가장 가까운 기후 변동 위기는 보통 ‘소빙기(littele ice age)’라고 부르는 17세기에 있었습니다. 그 직전 16세기에 촉발된 일련의 사건들이 17세기의 기후 변동과 맞물려 ‘글로벌’ 지구가 본격적으로 이어지고, 익명의 사람들이 국경과 바다를 건너 다른 문명과 문화와 사물들과 접촉하면서 이후 인류의 방향을 만드는 계기가 됩니다.
책 제목에 대하여 궁금하시다면……
이 책에서 시도해보려는 ‘말’의 실험
제2장 동중국해의 템페스트: 백계와 호탄만의 기이한 조우
유득공, <발해고> 길리사단, 기리시단 -> 일본어 표기 ‘기리시탄’ 으로 -> 포로투갈어 크리스탕 을 일본한자로 옮긴것 이후 일본이 기독교를 금지한 후 –> 절지단, 절사단 으로 표현한다. 29
28 (일본에 선교되는 기독고에 대해)이에 일본 민중들이 그 설을 한 번 듣고서 염세적인 생각에 휩쓸리어 제 몸뚱이 보기를 표류하는 뗏목이나 부러진 갈대 줄기처럼 여겨, 세상일에 구애받지 않고, 사는 것이 즐거운 줄도 모르며, 칼에 죽거나 형에 죽는 것을 도리어 자신의 영화로 여겼다.
힌듥얌신 -> 핸드릭 얀손 을 한자로 발음대로 겨우 옮긴것
백계·ᄒᆡᆫ듥얌ᄉᆡᆫ의 최후
36 원래 이들이 타고 온 배의 선장 레이니어 에베르스 Reijnier Egberse 는 배가 좌초하여 표착하였을 당시 사망하였습니다. 그를 이어 리더가 된 것은 기록에 남아 있듯이 서기였던 하멜이 아니라 일등항 해사 헨드릭 안손, 즉 백계야음사이은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도 일찌감치 조선에서 운명을 달리합니다. 일단 제주에서 조사를 마친 이들은 한양에 올라가 알려진 대로 1훈련도감(訓鍊都監)에 배치되었습니다. 이때가 병자호란이 끝난 지 불과 20년 지난 시점, 청에서 볼모로 있다 돌아온 봉림대군이 새 임금 효종이 된 지 불과 4년밖에 지나지 않은 시기입니다. 잘 알려져 있듯이 실현 여부와 무관하게 북벌이 한창 사회적 컨센서스여야만 했던 시기임
39 4dnjf 25dlf <효종실록> “남북산이 애가 타서 먹지 않고 죽었으므로 조정이 매우 근심하였으나, 청나라 사람들이 끝내 묻지 않았다” 라고 그들에 대한 마지막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 조정에서는 청나라에서 조선이 이런 서양인들을 부려서 전쟁 준비를 강화하고 있다고 의심하여 문제가 될까봐 우려한 것이고, 청국 사람이 끝내 묻지 않았다는 것은 뇌물이 먹혀들어 갔다는 의미로 읽어집니다.
벨테브레이 혹은 박연
42 벨테브레이는 노르트홀란트주 더레이프 출신의 얀 얀서 벨테브레이 Jan Janse Weltevree입니다 한국에서는 박연 으로 잘 알려진 그는 조선에 정착한 유일한 유럽인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역시 이름은 얀 얀서 혹은 얀 얀손이고 그의 이름은 오랑캐말로 박연이라고 했다는 기록에 따라 벨테브레이를 비슷한 발음의 ‘박’ 씨로 삼고 ‘얀’을 따서 연으로 이름을 지은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태풍 속의 아우베르케르크호
박연 (벨테브레이)의 이야기
53 …이후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이들 역시 전쟁에 참가하여 조선을 위해 싸우다 디르크 헤이스베르츤과 피터르손 페르바스트 두명은 전사하고 나머지 한 명 벨테브레이만 살아남습니다. 그리고 이 벨테브레이가 바로 하멜 일행이 만난 박연입니다.
제3장 남만인의 등장
남만인 - 남쪽나라 야만인, 남번인, 포르투갈과 스페인의 이베리아반도 홍모인 - 빨간머리, 네덜란드인,잉글랜드… 불랑기 - 남만인 아마카와 - 마카오 , 아마항-마카오
보동가류에서 온 지완면제수
62 우리가 옛날이야기를 들을 때 가까운 과거는 시간을 잘게잘게 쪼개지만 더 멀리 과거로 거슬러 갈수록 시대를 뭉뚱그려서 포인트만 생각을 하게 됩니다. 21세기의 우리에게 17세기와 18세기 같은 과거는 100년 단위의 옛날 일이 되어버리지만, 당연히 1650년대의 사람들에게는 한 세대 전의 1620년대의 일 역시 옛날 일이 되는 것이죠. 지금의 우리는 ‘비슷한 시기’에 조선에 표착했다고 생각하지만, 하멜에게는 그새 옷도 말도 달라진 벨테브레이가 겪은 일이 옛날 일이었을 것처럼 말입니다. 마찬가지로 1600년대의 동아시아 바다는 1620년대와는 또다른 세계가 전개되고 있었습니다.
세상의 모든 것들, 『화한삼재도회』
여송 남만인을 소개합니다
아마항 남만인을 소개합니다
검은 배를 타고 온 불랑기
83 불랑기(포르투갈)와 허락받지 않는 무역이 슬슬 늘어나서 되돌리기 어려운 상태로 확산되자 중국 내부에서도 이제 현실을 받아들이는 게 오히려 나을 것 같다는 목소리들이 나오기시작합니다. 먼저 불과 10년도 지나지 않아 명나라에서는 포르투갈의 대포를 사서 변방에 설치하는 일들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아예 이 대포의 이름을 불랑기라고 부르면서 말이죠
87 포르투갈은 1530년대에 푸젠의 아모이 즉 샤먼과 닝보를 뚫고, 명에서 왜구를 토벌하는 데 불랑기포를 제공하여 거들기도 하면서 광둥의 샹산아오 즉 마카오에 슬금슬금 자리를 잡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예전부터 중국에 미운털이 박힌 불랑기라는 이름을 16세기 중반 ‘푸더우리자’ 즉 포르투갈로 세탁하여 해적 블랙리스트에서 빠져나온 후 얼렁뚱땅 세금을 내는 정식 교역의 상대로 마침내 인정을 받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와 함께 이전에 어물쩍 뇌물을 주고 발을 걸쳐둔 마카오도 결국 #1582년 에는 공식적으로 포르투갈인이 거주할 수 있는 지역으로 인정받게 됩니다.
허풍선이 남자의 모험
실제 조총…1543년 중국인 무역상의 배에 타고 있었던 3명의 포르투갈인 중 안토니오 다 모타와 프란시스코 제이모투 두 명이 조총으로 무장을 하고 있었는데, 이를 다네가시마의 도주 도키타카가 보게 되고 조총을 시험한 후 수입을 하게 되었다는 것이 현재 학계의 정설입니다.
예수의 회, 소시에타스 이에수Societas Iesu
97 중세를 벗어나서 막 피어나기 시작하던 과학혁명의 여명기에 예수회 출신 과학자들의 이름을 과학사 책에서 보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닐 정도입니다. 예수회의 눈에서 과학은 우주 속에서 드러나는 신의 섭리를 이해하는 과정이었던 것입니다… 단적으로 우리가 동아시아 고유의 전통이라고 믿고 있는 음력이 실은 이들 유럽인 예수회 선교사들이 만든 것이라고 하면 아시겠지요. 코임브라 대학의 이름이 조선에까지 알려질 정도로, 예수회는 포르투갈이 동아시아에 진출한 근세 기간에 포르투갈과 함께 가톨릭 선교를 주도한 곳입니다.
98 결국 인도로 가게 된 사람은 로율라의 학생시절부터 동료이며 같이 예수회를 창립한 멤버이자 가장 신뢰하는 프란시스코 사비에르 신부였습니다. 그리하여 사비에르 신부는 인도-아시아 선교의 임무를 맡고 1541년 리스본에서 포르투갈의 배를 타고 출발하게 됩니다
왜은의 등장
101 은은 원래 의뢰로 추출하기 상당히 까다로운 금속 …단천연은법 16세기 연산군대에 발명… 조선은 직접 혹은 간접적으로 국제 시장으로 끌어들이는 역할을 하게됨 #은
103 이 갑작스러운 왜은의 흐름은 실은 1526년 시마네현의 이와미에서 ‘이와미긴잔’이라는 초대형 은광산이 발견된 데서 시작된 것이었습니다
113 이처럼 나가사키는 처음에는 예수회와 포르투갈 상인의 독점적 자치영토로 시작을 했습니다. 물론 나중에는 도요토비 히데요시에게 빼앗기고 에도 바쿠후 직속령으로 19세기까지 가게 됩니다만, 그건 또 조금 나중 얘기입니다
사비에르의 소프트랜딩
나가사키의 탄생
112 히젠 내 마쓰우라의 라이벌 지역인 ‘산조조’라는 곳의 성주 오무라 스미타다가 이를 알게 됩니다. 그는 예수회 선교사들에게 자신의 영지에서 한적하기 짝이 없던 나가사키라는 어촌 포구를 아예 의사하게 됩니다. 어찌 보면 히라도가 누리던 보물선을 이참에 모두 가져오려고 했던 것 같습니다. 그렇게 되어 #나가사키 라는 조그만 어촌이 이때부터 동아시아와 세계사에 독보적인 이름을 알리기 시작하게 된 것입니다. 이처럼 나가사키는 처음에는 예수회와 포르투갈 상인들의 독점적 자치영토로 시작을 했습니다. 물론 나중에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빼앗기고 에도 바쿠후 직속령으로 19세기까지 가게 됩니다만, 그건 또 조금 나중 얘기입니다.
탕자와 변혁가, 그리고 현자
[16세기 선교사 마테로 리치 신부-루쿠이와 중국선교문을열다](16세기 선교사 마테로 리치 신부-루쿠이와 중국선교문을열다)
118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왕실은 기본적으로 기독교의 이름을 걸고 이슬람과의 전쟁을 통해 형성된 국가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선교의 방침도 ‘정복적 선교’랄까요. 우선 점령하고 기독교로 개종시킨다는 방침을 시행하고 후원했습니다.
119 그런데 근세 유럽인들이 유럽 바깥에서 처음으로 마주친 고도로 발달한 비기독교 사회인 중국과 일본은 ‘젠티 비앙카 genti bianca’ 즉 ‘백인’이라고 부르며, 이들은 자체적으로 교육시켜 사제로 양성 할 수 있다고 판단했습니다. 선교의 방침에 대해 포르투갈 왕의 동의를 얻어낸 발리냐노는 이후 일본과 중국에 기존의 포르투갈 왕실의 이해관계에서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선교정책을 시행할 수 있게 됩니다. 일본의 예수회는 그래서 나가사키에 신학교를 세워 사제를 양성하고, 심지어 로마에 소년 대사를 파송하는 작업들을 할 수 있었습니다.
불랑기포와 조선 사신
[1866년 프랑스가 강화도를 침공한 병인양요](1866년 프랑스가 강화도를 침공한 병인양요)
득도지인 호드리게스
131 정두원과 호드리게스의 만남은 조선인이 이 대항해시대의 서양 유럽인과 의미 있는 첫 만남을 가진 사례로 많이 알려져 있습니다. …주앙 호드리게스 신부는 일생을 거쳐 동아시아에서 한중일 삼국 모두의 역사에 이름을 남긴 아주 특이한 사람입니다. …통역사라고 불릴 정도였던 호드리게스는 처음으로 일본어 문법책과 일본어-포르투갈어 사전을 만든 사람이기도 합니다.
숨어 있는 크리스탕 신앙의 대도는 무엇인가
1630년대에 최악의 사타랄 수 있는 시마바라의 난이 진압된 후 사실상 일본의 기독교는 ‘말살’된 것으로 보였습니다. 그런데 최후의 한줌 남은 교인들은 규슈 최서단의 고토와 남서단의 아마쿠사 일부의 외딴 섬으로 숨어들어 갑니다.
149 마테오 리치가 이탈리아어로 쓴 기록을 배경으로 트리고가 라틴어로 옮겨 1615년 아우크스부르크에서 출판된 『예수회에 의해 이루어진 중국으로의 기독교 선교여정』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이 책은 마테오 리치가 중국에서 어떤 과정을 거쳐 인증을 받고 교회를 허락받았으며, 중국이란 어떤 곳인가 하는 당대 최고의 정보를 17세기 유럽에 상세하게 전했습니다. 이 책에서 소개한 과거제도와 같은 유교적 시스템으로 인해 ‘철학자들이 통치하는 이성적 사회’에 충격을 받아, 유럽 근세의 계몽주의적 사상이 형성되는 데 자극이 되기도 했다고 할 정도입니다.
찾았다! 전설의 크리스탕 이츠러예족의 발견
163 이츠러예교는 아무라한 (=아브라함) 조사가 세웠는데, 그는 반고 아탐(중국고사의 반고와 히브리의 아담을 같은 인물로 보고 있습니다)의 19세손이다. 천지창조 이후 조사들을 통해 하늘의 도가 전해 내려왔는데, 그들은 형상을 만들어서 섬기거나 사술이나 귀신을 섬기지 않았다. 아무라한이 생각해보니 하늘이라는 것은 맑고 순수하며 그 아래와 비교할 수가 없다. 하늘의 길은 말하지 않으니 사계절을 통해 제 길을 가고 만물이 만들어졌다. 봄이면 생명이 나고 여름이 면 자라고 가을이면 추수하고 겨울이면 저장을 한다. 하늘을 나는 새나 바다의 물고기나 땅 위의 소생들이 모두 이 생명의 순환을 따르고 변화하고 색을 낸다.
167 (유대인, 당나라 혹은 송나라 시대 10~12세기)경로를 추정하면 페르시아에서 일단의 유대인 집단이 아프가니스탄-인도 북부를 거쳐 중앙아시아를 통해 중국으로 들어왔을 가능성이 가장 유력하다고 합니다 실제 시나고그가(유대인회당) 생기고 이 비문을 지을 때까지 2카이펑을 이어주는 노선의 이산,닝샤에도 유대인 커뮤니티가 있었고, 이 라인이 양저우, 닝보에게까지 계속 이어진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금나라,원나라를 이어 상공업에 종사하던 이들 카이펑 유대인은 이후 명나라에 이르러 본격적으로 유학을 공부하고 과거를 쳐서 중앙 관계에 진출하기 시작했습니다.
[중국 카이펑에 사는 유대인이 정착한 이야기](중국 카이펑에 사는 유대인이 정착한 이야기)
168 예수회와 유럽에서 이들을 두고 이스라엘 지파를 발견했다고 난리법석을 떠는 동안 그런 바깥세상 모르고 이들은 그냥 오래오래 몇백 년 동안 중국 사회에서 나름대로 평화롭게 지내고 있었던 것입니다
168 동아시아는 유대인 커뮤니티가 사회 속에 있었던 적이 없으니 그에 반대하는 반유대주의도 애당초 존재해본 적이 없는 이슈입니다. 그래서인지, 유대인이라는 문제가 그저 참혹한 홀로코스트의 경우뿐만 아니라 왜 그토록 세련돼 보이는 유럽 문명 속에서 끊임없이 반유대주의라는 야만적 형태로 불거져 나오는지 동아시아인으로서는 사실 꽤 이해하기 어려운 것 같습니다. 한국에서 체감하는 유대인 문제는 홀로코스트의 피해자, 이스라엘이라는 근래의 가해자, 세게정복 음모론, 그리고 일부 개신교의 뭐랄까 좀 난감한 유사동족의식 정도입니다.
[유대인의 잃어버린 지파, 중국에 살고 있는 유대인](유대인의 잃어버린 지파, 중국에 살고 있는 유대인)
171 두 번째 디아스포라(로마에 의해서) 이후 일부는 유럽의 중부 지방과 독일 지역으로 흘러들어가고, 또다른 일부는 지중해 지역으로 이어져서 이베리아반도로 들어갑니다. 이 두 집단은 이후 역사시대에 두 개의 명확히 나뉘는 유대인 양대 집단으로 구분됩니다.
172 따라서 16세기 이후 상당수의 세파딤 유대인들은 상대적으로 압박이 적은 신대륙으로 건너가거나 혹은 종교개혁의 와중에 스페인, 포르투갈과 대적한 신교 국가들로 몰렸습니다. 그중 가장 종교적으로 관용적이었던 곳이 네덜란드공화국이었습니다.
173 솔로몬 왕 사후 분열된 북쪽 이스라엘 왕국의 10개 지파의 사람들은 실은 아시리아에 의해 먼저 해체된 후 중든동 일대에 분산되어 흩어져버려 이후 더이상 족 단위의 역사가 없습니다 상식적으로 생각한다면, 아시리아 제국 내에서 새로 재배치된 지역에 동화되어 점차 민족이라는 정체성이 없어진 것으로 보는 것이 맞겠습니다만, 그러면 뭔가 신이 선택한 선민들의 결론 치고는 너무 어이가 없으니 이들이 어디론가 이끌려서 저 지평선 너머로 사라졌다는 전설이 형성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전설은 점차 수많은 낭만적 상상을 불러일으킵니다.
173 처음에는 페르시아 혹은 에티오피아, 아프가니스탄, 인도, 중앙아시아, 그러다가 마침대 17세기 초반 지구의 반대편인 중국에 들어갔더니 바로 마테오 리치가 스스로 ‘이스라엘인’이라고 하는 유대인 응아이와 그가 속한 카이펑의 유대인 커뮤니티를 만났다고 보고한 것입니다
173 잃어버린 10지파는 유다 왕국이 아니라 이스라엘 왕국(북이스라엘) 후손이라서… 유대인(유다 왕국에서 파생된) 말(단어?)를 몰라야 한다.
177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 상당한 규모의 세파딤 유대인 커뮤니티가 형성 됩니다. …므나세 벤 이스라엘 이라는 랍비와 저술가, 지식사회 유명인, 그는 유대교의 에서 파문 당한 철학자 #바뤼흐_스피노자 의 스승이다.
183 므나세는 1657년 흡족하지 못한 결과에 실망하며 암스테르담으로 돌아왔다가 바로 사망합니다. 스스로는 흡족하지 못하였을지 몰라도 그는 다시 유대인들이 잉글랜드에 받아들여지도록, 그래서 유럽의 반유대주의 속에서 살아나갈 수 있도록 온 힘을 다했습니다. 잉글랜드의 유대인들은 이후 19세기 홍콩과 상하이의 유대 커뮤니티 형성의 주역이 됩니다.
183 유명한 로스치일드 가문은 원래 독일계의 아슈케나짐 유대인이지만, 19세기에 이들이 런던 금융 시장에서 활동을 할 수 있으려면 17세기 므나세가 유대인들을 다시 유대인으로서 잉글랜드에서 살 수 있도록 했었기에 가능해진 것이지요
마카오 신사, 카피탕 모르
https://contents.nahf.or.kr/

184 마테오 리치의 일생에서보듯이 마카오는 이후 가톨릭, 특히 예수회의 동아시아 선교 본부가 됩니다.
186 #16세기 이미 포르투갈 혹은 포르투갈 마카오의 무역이란 단순히 유럽의 금은이나 시계 같은 신기한 물건을 중국에 가져가서 중국 실크와 도자기로 바꿔 가져가는 단순 구조가 아닙니다. 그보다는 16세기 후반 리스본 - 서아프리카 - 고아 - 말라카 - 마카오 - 구슈 히라도/나가사키 를 잇는 복잡한 #무역 구조의 인도양 포르투갈 라인을 형성한 것입니다.
태평양을 건너온 스페인
마닐라 - 아키풀코 무역 항후 루트

188 왕실이 교황을 대신하여 자신의 주권 지역 내에서 교회를 후원하고 운영한다는 교황과 왕실 간의 합의제도가 있었습니다. 이 제도를 포르투갈어로는 파드로 아두, 스페인어로 파트로나토 라고 합니다 영어의 후원자 patron과 같은 단어인데, 이게 대항해시대와 맞물려 바다 건너 새로운 식민지에 교회를 세우고 식민지로 건너간 사람들에 대한 성무성사를 하고 신앙을 전파하는 사제를 후원하는 관리로 확장이 됩니다.
193 다이내믹한 스페인은 16세기 중반 지금의 멕시코인 누에바 에스파냐와 페루에서 막대한 은 광산을 발견하는 한편 태평양을 가로지르는 항로를 개척하여 ,처음으로 지구를 한 바퀴 돌아서 이어주는 네트워크를 만듭니다.
193 #1578년 모로코의 무슬림과 전쟁을 하러 간 포르투갈 왕 세바스티앙 1세와 대부분의 포르투갈 귀족들이 모두 전멸해버리면서, 포르투갈 왕위를 계승할 후계자가 모조리 없어지는 …일이 벌어집니다. 오랜 친족 관계로 얽히고 설킨 스페인의 합스부르크 왕가가 #1580년에는 보르투갈 왕위를 빼앗다시피 계승하면게 되면서, 이베리안 유니온 혹은 동군연합이라고 부르는 스페인-포르투갈 연합국이 형성됩니다.
실버 라이닝-일본과 스페인
197 전통적으로 중국에서는 은으로 세금을 내는 제도가 전국적으로 실시된 적이 없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16세기에 접어들면서 중국 장난(강남) 지역에 은이 슬슬 비즈니스 및 축재 용도로 유통되기 시작하였고, 현물세 대신 은으로 납부하는 경우가 늘어나게 됩니다. 또한 장난 지역을 중심으로 서서히 상단이 조성되고 이들이 중국의 여러 지역으로 유통망 및 조세망을 형성하였는데, 이들에게 은은 확실히 유용한 유통 매개 수단으로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고도 합니다. 이들 상단을 방이라고 부르는데, 중국 무협 소설의 협객이 사실 이들 방의 조직원으로서 수송 물자의 보안 물류 담당자들이었다는 얘기도 있습니다. 뭔가 그럴싸하기는 합니다.
199
리스본은 1516세기 동안 유럽 최대의 노예 도매시장이었다고 합니다. 16세기에 접어들면, 가격이라는 표현이 참 처참하지만 말 한마리당 노예 68명의 가격이 형성되었다고 합니다.
포토시의 반짝거리는 공기
203 (볼리비아)포트시에서 생산된 은은 스페인 세비야로 실려간다 18세기 후반 보에노스아이레스 항구가 공식적으로 열리기 전까지, 포토시의 은은 노새에 실려 카야오로 가서 파나마로 다시 이동한 다음, 파나마 지협을 거쳐 포르토베요 Portobello로 가사 배에 실린 다음, 쿠바의 아바나로 가서 다시 다른 스페인 배에 환적한 후 대서양을 건너 세비야로 실려 들어갔습니다. 세비야로 실려간 #은 은 카스티야의 스페인 합스부르크 왕실에 부를 퍼부었고, 그 부는 다시 왕실에 전쟁 비용과 재정을 빌려준 제노아의 은행에 고스란히 들어간 후 스페인령 네덜란드의 거래소를 통해 전 유럽으로 퍼져나갔습니다
국제통화 피스오브에이트
205 유럽 같은곳의 전통적인 금화나 은화의 주화시스템은 공전과 사전이 공존하는 약간 더 느슨한 형태가 대부분입니다.
스페인의 불안한 마음
210 볼리비아 고원 포토시 에서 생산된 은 -> 대서양 건너 스페인으로 건너갔지만 1560년대 후반부터 필리핀 마닐라를 거점을 마련하게 되고 포토시 은 -> 멕시코 아카폴코 -> 태평양 건너 마닐라 직항 노선 -> 중국 시장 접근
황금의 산을 지키는 로스에스파뇰레스
일본과 스페인의 짧은 밀월
17세기 일본 도요토미 히데요시 시대, 크리스천과 천주교인 박해가 시작된다 -> 이유는, 유럽인들이 기독교,천주교인을 먼저 보내고 , 그들을 보호하기 위해 군대를 보낸다는 사실을 알고 의심한것 추방당한 신앙인들은 마닐라로 모이게 된다.
232 시뇨리지 유럽의 전통적인 통화 발행에 부과된느 세금제도 ,,,현대의 비폐본위제도하에서는 통화량 증가를 통한 정부 재정의 확보를 의미 ‘화폐의 액면가와 실제 본원가치의 차이로 인한 차익을 징수하는 권리’
[17세기 일본 하세쿠라 쓰네나가 멕시코 스페인 로마를 다녀온 여정](17세기 일본 하세쿠라 쓰네나가 멕시코 스페인 로마를 다녀온 여정)
토마스의 바다
당시 카톨릭,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방식이 다르다
1640년대 [필리핀,일본 및 중국의 선교자 로사리오회 교구의 역사에 나온 조선이야기](필리핀,일본 및 중국의 선교자 로사리오회 교구의 역사에 나온 조선이야기)
임진왜란 때 일본군에 잡혔다 기리시탄이 되고, 마침내 자유의 몸이 되어 필리핀으로 가 1617년 마닐라의 로사리오 기도회에서 신앙생활을 하던 조선 청년이, 그를 돌봐준 신부들과 함께 조선으 로 가서 자신을 살린 그 신앙을 전하려고 저 험난한 남양 바다를헤처 나가사키로 가 역경을 무릅쓰고 기어이 조선으로 돌아왔더라
245 문제는 이게 한국 천주교회 역사에서 보면 약간 미묘한 입장의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한국 천주교의 자부심이랄까, 조선 후기 양반 지식인들이 서학 서적을 공부하다 세계 선교사상 유례없이 자생적으로 교회가 성립되어 시작되었다는 것이 공식 입장입니다. 그리고 임진왜란부터 17세기 일본으로 끌려간 조선인 피로인들의 개종은 일본 사회 내에서 소진되어 조선사회의 교회 수립에는 영향이 없었다는 것이죠. 그런데, 이렇게 조선으로 돌아온 사람들이 있어서 만약 조선에도 ‘가쿠레 기리시탄’ 즉 숨은 크리스천이 있었다면, 이 공식 입장에 미묘한 균열이 갑니다. 그래서인지는 알 수 없지만 16~17세기 일본 포로 출신의 조선인 가톨릭에 대한 연구에 대해 국내 교회사가들은 약간 거리를 두는 경향이 보이는 것 같습니다. 게다가 교회사에도 다분히 민족주의적 경향이 없지 않고요. 가톨릭 교회란 본시 이름처럼 보편 교회라서 어느 나라의 역사 속에서든지 항상 비국민적이라고 비난을 받던 조직인데 말입니다.
제4장 두 왕자와 거지
그믐정리 https://www.gmeum.com/meet/3283?talkId=248214
중간에 프랑스라는 강대국이 끼여있는데 왜 네덜란드는 스페인의 지배를 받고 있었고 독립전쟁을 해야했는지 잘 몰랐었는데 근원은 스페인과 플란데런 두 곳의 지배자였던 카를 5세의 존재였네요. 그 카를 5세가 어떻게 스페인, 플란데런, 부르고뉴, 부르군트, 신성로마제국, 합스부르크 왕가의 상속자가 될 수 있었는지를 설명한 것이 268과 269쪽의 그림입니다. 과하게 얽힌 결혼 관계를 통해 커다란 권력이 [카를 5세](카를 5세)에게 집중되고 말았네요. 플란데런 즉 지금의 네덜란드와 벨기에 지역에서 나고 자란 카를 5세가 그곳에서 거대 제국을 통치한 것에 반해 그의 아들인 펠리페 2세는 스페인에서 나고 그곳에서 통치를 했기 때문에 네덜란드 지역을 이해하지 못하게 되죠. 콜럼버스가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한 해인 1492년에 이베리아 반도에서 이슬람 세력을 완전히 몰아낸 카톨릭 국가 스페인이 자신들의 영토에서 추방한 유대인을 포함해서 개신교도들이 득세하는 플란데런(네덜란드)을 적대시하고 탄압하자 네덜란드는 스페인과의 80년간의 독립전쟁 끝에 독립하지만 19세기에 이르러 천주교의 벨기에와 개신교의 네덜란드로 또다시 갈라집니다. 동인도회사 직원이던 박연이 1628년에, 하멜이 1653년에 우리나라에 도착한 때는 네덜란드 독립전쟁인 80년 전쟁(1568년~1648년)이 벌어진 즈음입니다. 1609년부터 1621년까지 12년간 휴전할 때 네덜란드는 적극적으로 해외로 진출했고요,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도 1602년에 설립되었습니다. 아마도 네덜란드의 동아시아 진출 이야기는 5장에서부터 더 자세히 나올 것 같습니다. 4장은 네덜란드가 동아시아 진출 전 어떤 과정을 거치며 나라의 힘을 키워냈는지를 왕들의 혈연관계라는 재밌는 관점으로 설명한 파트로 보입니다.
부르군트의 왕자와 공주들
[부르군트족Burgund 에 대한 역사](부르군트족Burgund 에 대한 역사)
스페인과 포르투갈이 나눠진 이야기
스페인과 합스부르크 왕자의 탄생까지
플란다스의 왕자
[네덜란드의 독립과 배경](네덜란드의 독립과 배경) [네데를란트인이 스페인에서 독립전쟁을 시작한 사건과 배경](네데를란트인이 스페인에서 독립전쟁을 시작한 사건과 배경)
277 중세 이후 이탈리아에서 지중해 무역으로 공급하는 실크와 향신료들이 직접 네네를란트 지역으로 들어와 배분되어 유럽 각지로 유통되면서, 이 플란데런과 브라반트 지역에서 경제가 급속도로 성장하고 상업과 공업의 중심지가 되는 도시들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거짓과 오렌지 왕자
왕자: 모든 것을 상속받아 세상을 다 가진 듯했던 합스부르크의 카를 5세와 펠리페 2세 거지: 그들의 압제 속에서 쫓겨나 바다 위를 떠돌며 약탈과 무역으로 생존해야 했던 네덜란드인들 당시 유럽인들의 머릿속에는 ‘국가 = 왕’이라는 공식이 박혀 있었음. 네덜란드 독립군도 처음에는 스페인 국왕을 대신할 새로운 왕을 찾아 헤맴. 앙주 공(프랑스)의 실패: 구원투수로 초빙했으나, 그는 네덜란드의 자치권을 무시하고 독재를 하려다 쫓겨남 엘리자베스 1세(잉글랜드)의 거절: 왕관을 제안받았지만, 스페인과의 전면전이 부담스러워 거절하고 대신 군사적/재정적 후원만 약속 –> 결국 마땅한 왕을 찾지 못한 북부 7개 주는 빌럼의 아들 마우리츠를 군 사령관(스타트하우데르)으로 세우고, 정치 체제는 의회가 주도하는 공화국을 선포!!
반란의 불길
289 동아시아 바다의 뉴비였던 네덜란드가 일본에 외교적으로 접근하는 과정을 추적한 애덤 클러로 같은 학자는 아예 네덜란드의 독립 과정이 처음부터 어떤 시스템이나 정체政體에 대한 방향이나 구상이 있었던 게 아니라, 반란에서 독립으로 이어지는 과정을 거치면서 하나씩 안 되는 것을 제외하다보니 남은 옵션이 공화국이었다는 설명을 하기도 합니다.
제5장 홍모인의 나라
https://www.gmeum.com/meet/3283?talkId=248720 5장의 주인공은 동아시아에서 세력을 확장하려는 네덜란드인이므로 이에 집중하되 수많은 등장인물에 매몰되어 길을 잃지 않고 큰 틀을 머리에 그려놓고 독서를 해야겠더군요. 17세기 포르투갈, 스페인, 네덜란드의 동아시아에서의 역학 관계는 대충 이러합니다. 1) 포르투갈: 예수회와 손잡고 마카오를 근거지로 삼고 중국, 일본과 교역 선점. 나중에 일본에서 사실상 쫓겨남 2) 스페인: 뒤늦게 도미니코회 등과 손잡고 대만으로 진출했으나 개망신당하고 동아시아에서 퇴출 3) 네덜란드: 우린 종교따윈 관심없다고 선언하고(우리의 관심은 오로지 돈!) 대만과 나가사키를 근거지로 삼고 중국 해적, 일본 도쿠가와 막부의 협력을 얻어 실리를 챙김
블루오션
바람의 계곡-바이하트
동인도로 가는 길
313 포르투갈의 배들은 아프리카 동부와 인도 해안선을 따라 여러 군데 기지가 있으니 항해 자체가 연안에 붙어서 진행되어 항해의 리스크가 적었습니다. 하지만, 네덜란드의 배들은 이 포르투갈 기지들을 빙 둘러서 멀리 원양을 가로질러야 했기 때문에 난파의 위험도 더 클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인도양을 크게 둘러가다가 표류도 많이 하면서 이후 오스트레일리아를 발견하게 되고, 니우 제일란트도 오늘날의 뉴질랜드가 된 것이긴 합니다. 그때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는 수익성이 없다고 과감히 버린 땅들입니다. 오직 중요한 것은 주주의 이익!
315 3린스호턴의 <항해 일정> 책에는 ‘코레아’ 역시 등장합니다. 일본에 대한 설명을 길게 하고 난 다음 코레섬과 마카오에 대한 설명이 이어집니다. “야퍈의 약간 위쪽 34도 및 356도에 시나(China)의 해안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코레섬Insula de Core’이라고 불리는 곳이 있다. 이 섬에 대해서 그 크기나 인구 혹은 어떤 물산이 있는지 아직 전혀 알려져 있지 않다” 라는 소략한 기록이 있습니다. 이는 서유럽 대항해시대의 기록 중에서 한국에 대해 설명한 첫 번째 기록이라고 현재 알려져 있습니다. 이 <항해 일정>에 언급된 한국에 대한 정보는 28년 후에도 별로 업데이트 되지 않아서 제주에 표착한 벨테브레이는 심지어 코레아에서는 사람을 구워먹는다고 알고 있었습니다.
새옹지마 원정대
319 #1600년 4월 29일, 당시 일본 규슈지방 오이타현에 배 한척이 난파당합니다. 바로 이렇게 일본까지 간신히 도착한 리프데 사랑호였습니다. 선장이었던 헤릿 판 베우닝헌은 진즉에 사망하고 대리 선장으로 임명된 야콥 얀손 콰케르나크 를 포함한 24명만이 목숨을 부지하고 살아남아 일본에 표착했습니다
<쇼군>의 배경이다. 도쿠가와 이에아스가 기독교와 천주교인들을 싫어하던차에 네덜란드인들이 종교는 관심 없다는 말에 그들을 전쟁에 참여시킨다. 세키가하라 전쟁
[1600년 일본과 네덜란드가 연결된 배경](1600년 일본과 네덜란드가 연결된 배경) [일본과 동인도회사 와의 교류](일본과 동인도회사 와의 교류)
321 얀 요스턴 판 로덴스테인도 역시 일본 이름 야요스로 불리면서 사무라이 계급, 그리고 녹봉과 무역 허가증인 주인장을 받아 이후 몰려오는 유럽인들 중 특히 네덜란드의 동인도회사가 연착륙하는 데 도움을 준 사람
야요스와 두꺼비 요술
천축을 다녀온 덴지쿠 도쿠베에
조생 완벽의 모험담
[조완벽 17세기초 조선 최초의 세계시민](조완벽 17세기초 조선 최초의 세계시민)
35 …왜인들은 조선의 서적을 가장 귀중히 여기고 소중히 보관하는 일이 많았는데, 안남(베트남)인들 역시 큰돌을 들여 조선의 서적을 구하였다.
교토의 길모퉁이 창고
붉은 도장이 찍힌 증서를 들고
안남의 셀럽 이수광
『최척전』-쇼 미 더 트루스!
아란타의 등장
그 나라의 임금은 고모파이아
왕자의 서신이 필요해!
도쿠카와 이에야스의 세계
나는 정당한 해적이다!
399 1603년 암스테르담으로 포르투갈의 150톤급 카라카선 ‘산타 카타리나’호가 들어온다 VOC 회사 소속 사람들이 포르투갈 배를 납치했고, VOC는 난감해진다. 이때 26세의 젋은 전채 법학자가 이 문제를 해결한다
[후고 그로티우스 Hugo Grotius - 국제법의 아버지](후고 그로티우스 Hugo Grotius - 국제법의 아버지)
우리가 현재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국제법이란게 이 사람이 처음 만든 것을 기초로 하고 있습니다.
캡틴 차이나
407 1603년 말라카 해역에서 포르투갈인 선박을 나포하면서 강렬한 데뷔 무대를 선보인 VOC에게는 게다가 이미일본에 정착한 네덜란드인 얀 요스턴과 같은 서포터들이 규슈, 에도 등에 자리를 잡고 일본의 최고위층에 네트워크를 만들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도쿠가와 바쿠후가 강력하게 외교 무역 확장정책을 펴던 시기인 1609년 히라도에 발을 들입니다. 이후 VOC는 거의 20년간 향신료제도 지역을 장악하기 위해 분투하여, 1619년 지금의 자카르타 즉 바타비아를 확보한 다음, 남중국해의 해적 네트워크에도 본격적으로 뛰어들어 어엿한 세력으로 자리잡습니다.
니콜라스 이콴, 정즈룽
문제적 인간, 나위츠
해방유격 정즈룽 장군
오늘도 안평安平한 타이오안
339 17세기…네덜란드 동인도회사 에서 타이완에 쌀과 사탕수수 농업을 위해 중국인을 고용했다. -노예보다 저 저렵하고 효율적이라고…
VOC의 농업 프로젝트가 사탕수수와 쌀농사에 특화된 타이완이라는 역사적 결과물을 남겼습니다. 이후 19세기 말 일본이 타이완을 점령한 후에도 이 기본 산업은 그대로 유지되었습니다. 20세기 초반의 타이완 산업 구조가 바로 이 ‘회사의 결과’ 입니다
373 일각에서는 광해군이 후금과 명 사이에서 실리외교를 펴기 위해 강홍립에게 전투에서 슬며시 항복하라 했었다는 통설이 널리 퍼지기도 했지만, 당대 그 전투의 전 과정에 상급 참모부로 있으면서 직접 목격한 사람의 기록을 통해 보면 그런 상황으로 보기 어렵다는 게 솔직한 감상입니다.
378 아마도 풍문에 바탕했을 것이며, 반드시 사실에 근거한 것은 아닐 것이리. 아, 글이란 한두 가지가 아니니 때로는 희롱하는 이야기도 있고 오유, 자허 같은 가상인물로 쟁패를 겨룰 수도 있지. ‘태평광기’의 기이한 전설은 소설로서 해가 될 것이 없으니, 부러 허황하게 만들어 즐겁게 하고 속임수를 만들어도 과하지는 않지. 어찌 이처럼 험한 말을 하면서 기회를 타고 사악을 부리는가!
388 독립전쟁이 시작되고 포르투갈이나 스페인 배를 탈 수 없게 된 후, 네덜란드 동인도회사가 생기기 전인 1594년부터 1602년 사이에 네덜란드에서는 포르콤파니라는 회사들이 성행했습니다. 이때의 회사들은 자금을 모아 배와 실을 상품을 준비해서 먼바다에 나가 뭔가 더 귀중한 물건으로 바꿔오면 그 이익을 자기 지분만큼씩 배당받고 해체하는 형식인, 요즘의 프로젝트 파이낸싱과 유사한 형태의 회사 조직이었습니다. 포르콤파니는 앞에서 설명드린 대로, 네덜란드가 반란을 일으킨 이후 포르투갈이 장악하고 있는 대서양의 해상로가 막히자 포르투갈을 제치고 동인도와 직거래를 해보려고 시작된 것입니다.
389 당연히 인간의 본성은 그냥 놔두면 과열 투기에 몰두하게 됩니다. 포르콤파니들은 8년 동안 총 65척의 배로 여기저기서 15번의 출항을 하게 됩니다. 네덜란드 연합 공화국의 각 지역에서 너도나도 상업적 득실을 따지지 않고 ‘묻지 마’ 식으로 포르콤파니가 조성되자 ‘이러다간 우리 다 죽어’ 하면서 인간의 이성이 다른 방향은 없는지 다 같이 상생할 방법을 모색합니다. 그 결과가 1602년의 최초의 근대적 주식회사라고 하는 연합동인도회사, 즉 VOC의 결성으로 이어집니다.
연합동인도회사는 오늘날 주식회사의 효시라고 하는데, 배들이 돌아와서 이익을 투자자들에게 한번에 다 청산하고 해산하던 포르콤파니들과 달리, 일반 주주들이 지분을 사면 발생한 이익을 정해진 비율의 배당금 형태로 배분하고, 대신 기존의 배와 조직, 인원을 그대로 유지하여 다음 비즈니스에 다시 투입하여 영속성을 갖게 하는 그야말로 혁신적인 조직이었습니다. 그러자 이 회사는 보다 장기적인 투자와 해외 진출을 할 수 있게 됩니다.
제국의 끝, 이슬라 에르모사
#타이완
444 타이완의 남쪽에서 네덜란드가 … 북쪽에서는 스페인이거점을 확보하고 있었습니다. …마카오에는 포르투갈인 ,,, 마닐라에는 스페인
마닐라 도미니코회의 책임자 바르톨로메 마르티네스 ,,, 이슬라 에르모사 -> 타이완섬을 말한다
447 마르티네스 신부는 보고서에서 이슬라 에르모사를 확보하자고 강력히 주장합니다. …타이완섬의 지정학적 중요성을 부각합니다.
어찌 보면 명나라에서 타이완을 자신들의 영토가 아닌 외방으로 간주하고 그저 야만인 동번과 슴이 많이 사는 해적의 섬이었을 뿐인데, 이 섬의 위치가 17세기 들어 갑자기 수많은 배들이 오가는 항로 선상에 놓이면서 불쑥 떠올라 역사의 전면에 모습을 드러낸 것 같습니다. 하지만 마르티네스 신부의 보고서는 당장 채택되지는 않습니다.
447 VOC가 타이완섬 남쪽, 지금의 타이난시인 타이오안에 요새를 세우고 본격적으로 중국 무역뿐 아니라 스페인-포르투칼 상선에 대한 해적질에 돌입 1625년 마닐라 지사 페르난도 데 실바는 이슬라 에르모사에 교두보를 확보하기로 결정을 내립니다.
그 섬에 살던 사람들
451 중국은 이민족 중에서 중국에 부속해서 순종하는 부족은 ‘숙’ 이라고 부르고, 불복종하는 야만 부족은 ‘생’으로 불렀습니다. 여진도 생여진과 숙여진이 있었죠. 숙번은 청나라의 통치에 복종하는 부족이고, 생번은 청의 통치권 밖에 있는 야만 부족이라는 의미입니다.
455 17세기에 대략 타이완섬의 원주민들은 대단히 호전적이고 끊임없이 전쟁을 하는 작은 부족으로 나뉜 헤드헌터들이었습니다. …정말로 적의 머리를 잘라오는 것을 의미 이들 부족은 마치 고대 그리스의 스파르타인들처럼 남자들이 집단생활을 하며 전쟁 기술을 연마하다가, 성년이 되면 적으로 삼은 다른 부족에 침입해 머리를 잘라와야 성년 전사로 받아들여주었다고 합니다. 이 성년 신고식으로 목을 따러 가기 전에 보통 몇 시간씩 술을 마시며 춤을 추는 행사를 거행했다는 군요.
456 VOC와 스페인 요새 근처에는 서쪽에서 온 이들과 접촉하여 교역하고 각각 신교와 구교의 기독교로 개종하고, 때로는 손을 잡고 군사행위도 하던 일종의 ‘숙번’들이 형성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들은 유럽인들과 더 안쪽에 사는 원주민 부족들 사이의 중개인 역할을 하기도 했습니다.
산살바도르와 산도밍고
459 #1626년 봄 , 타이완섬 북부 키룽만에 거대한 배가 대포를 쏘면서 들어옵니다. 이 배에서 일단의 스페인 군인들과 도미니코회 수도사 5명이 상륙해서는 키룽만 지역의 원주민 마을에 들어섭니다.
세상의 끝에서도 제국과 반란군
제6장 끝나지 않는 이야기
471 타이완의 스페인 요새 산살바도르가 네덜란드에 항복하고 2년이 지난 후 , 1644년 청나라의 군대가 산하이관을 넘어 중국의 ‘천하’를 마침내 손에 넣습니다. 천문학 지식으로 명나라 조정에서 관상감을 맡았던 예수회 선교사들은 남명 정부를 따라나선 몇몇을 제외하고는 다시 청나라 조정에서 등용되었습니다. 청나라는 명나라 때부터 이어온 해금정책을 강화하고, 정즈룽의 아들 정청궁은 #1661년 바다를 건너 네덜란드 요새 포트 제일란디아를 공격하여 타이완을 점령하고 동녕국을 세웁니다.
[타이완-17세기 명나라 멸망-청나라 건국-반대파-타이완에 새로운나라를-동녕국](타이완-17세기 명나라 멸망-청나라 건국-반대파-타이완에 새로운나라를-동녕국)
해금의 폐지와 도진야시키
473 일본에서 중국으로 가는 물품은 대부분 #구리 였습니다. 구리 수출은 17세기 내내 매년 200~ 400만 근의 수출량을 보이다가 17세기 말에는 무려 700만 근, 즉 4200톤을 넘어섰습니다 구리 이외의 잡화라고 할 것은 칠기 세공품, 도자기, 건어물류 등이 대부분입니다. 중국에서 들여오는 물품은 우선 실크 생사에서 의복류까지 각종 실크류, 그리고 인삼, 한약재, 그 밖의 각종 위세품, 그리고 ‘서적’
473 쑤저우나 항저우는 근세 중국 출판의 메카였고, 이곳 출판사에서 베이징의 류리창에 점포를 내고 있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책 #도서 #출판
474 고방파와 18세기 인삼 무역 #인삼 의 효능과 관한 책이 중국에서 일본으로 수입되고 일본은 인삼이 나지 않고, 조선이 동아시아 무역에 참여하게 된다.
#삼각무역 18세기 조선의 삼각 무역, 즉 왜관을 통해 조선 인삼을 팔고 인삼 대금으로 받은 일본의 은이 조선 연행사를 통해 베이징으로 가서 실크로 바뀌는 삼각무역 조선도 그사이 사회 경제적 안정을 되찾고 국제 네트워크에 다시 가담하는 18세기가 시작
[일본-18세기-지적열망-나가사키무역-중국의 서적 수입-실학](일본-18세기-지적열망-나가사키무역-중국의 서적 수입-실학) [일본의 18세기-고방파 등장-조선 인삼무역가담-조선이 동아시아무역에 등장계기](일본의 18세기-고방파 등장-조선 인삼무역가담-조선이 동아시아무역에 등장계기)
476 총을 들 필요가 없는 동아시아
479 16~17세기 중반까지 임진왜란, 병자호란, 도요토미 히데요시 사후의 분란과 에도 바쿠후의 성립, 명청 교체에 이르기까지 동아시아는 엄청나게 고통스러운 전란의 터널을 지내온 것 같지만, 같은 시기에 유럽은 이보다 더 오랜 기간 더 지속적이고 더 확산된 전장을 치러오고 있었습니다. 무작위로 1707년을 골라 동아시아의 평범한 사람과 유럽의 평범한 사람 중 누가 더 평화로운 하루의 일상 을 보낼 수 있었을지 생각해보는 것도 나름 의미가 있습니다.
벨테브레이의 선택
480 우리는 이제 왜 서로 이렇게 이야기를 하는지 알고 있습니다 벨테브레이가 조선에 표류했던 것은, 이미 말씀드렸듯이 타이완 지사였던 나위츠가 크게 사고를 쳐서 일본과 VOC 간의 교역이 전면 중단되었을 때입니다. 그때 벨테브레이는 이 야단법석에서 벗어나 있던 조선에 표착해왔습니다. 그러니까, 조선에서 동아시아의 통상적인 표류민 송환 시스템에 따라 그를 연고지로 돌려보네려고 했음에도 불구하고 일본은 VOC와 전면 교역 중단 중이었고 명나라는 청나라의 공세에 정신도 없었지만 타이완의 VOC를 아직 인정해준 적도 없는 상태였던 것입니다. 벨테브레이는 조선에서 보낼래야 보낼 곳이 없어져서 동래에서 한참을 낙동강 오리알 신세로 있었습니다. 오갈 데 없는 벨테브레이를 조선이 거뒤준 것에 가깝다고 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벨테브레이가 하멜에게 아무데도 갈 수 없으니 포기하고 여기서 잘 살아보자고 한 것은 아마도 진심이었을 거라 생각됩니다
하지만 아시다시피 하멜 일행은 이후 먼저 탈출한 사람들이 나가사키로 간 후 정식 외교 루트를 통해 조선에 남아 있던 잔류 인원까지 모두 송환하여 마침내 고국 네덜란드 연합 공화국으로 돌아 갑니다.
482 그런데…. 자발적으로 조선에 남아 있었을 지도 모르는 네덜란드인? 얀 클라천? 여전히 미스터리라고 한다.
나가며
한번은 암스테르담에 있는 어느 대학교 소속의 조그만 건물이었습니다. 그 건물의 빈 중정에 서서 하늘을 보니, 아, 여기에 와서 서보려고 그 공부를 한 것이구나 하는 생각이 번뜩 들정도였습니다. 그 건물은 수백 년간 인류의 밝은 면과 어두운 면 모두를 끌고 나갔던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의 본부 건물이었습니다.
그 조그만 마당에서 300년 전 그 어느 날도 ‘홍모인’들이 삼삼오오 모여 멀고 먼 동인도의 향신료와 야판의 실버와 시나의 실크를 의논하고 아프리카의 노예를 사다 파는 셈을 헤아려보고 있었겠죠.
…그저 우리가 살아가는 하루하루가 다른 사람들을 움직여서 역사를 만들어나가더라는 ‘감탄사의 모음집’ 입니다.
더 자세히 읽어보시려면
도판 출처
7. 🤔 Rambling
-
내적으로는 대동법을 놓고 충돌하고, 외적으로는 북벌이라는 허황된 꿈을 꾸던 시기에, 하멜 일행이 들이 닥쳤으니.. 이들을 훈련도감에 배치
-
유럽인들이 중국에 진출하면서 발견한 유대인 공동체(특히 카이펑 유대인)와 일부 소수민족의 관습은 서구 사회에 엄청난 충격주었다
- 유대인들이 북 이스라엘 10개 지파, 남이스라엘 2개지파로 나뉘고
- 아시리아에 의해 북 이스라엘이 해체 된다. -> 어디로 갔는가? 신이 선택한 유대인 백성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 남이스라엘은 남아있다가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가고… .. 후에 이스라엘로 돌아오고,,후에 로마에 의해 해산된다
- 이때 남이스라엘 2개 지파가 로마에 의해 해체되고 이베리아반도 (스페인,포르투갈) 쪽으로 한 부류, 독일과 러시아로 한부류로 흩어진다
- 현대의 유대인들은 2개 부류중 한에 속한다
- 중국에 남아있던 유대인이 북이스라엘 10개지파의 유대인인것으로 착각?…이든… 그래서 로마 에서 흥분되었다고 한다.
- 역사학적·신학적 조사 결과 중국(특히 카이펑)에 정착했던 유대인들은 ‘남유다 왕국의 2개 지파(유다, 베냐민 지파)’ 의 후손인 것으로 확인
- ….유대인이 기다라는… 시님이라는 곳에서 도 모여든다는 유대인… 설마 중국의 유대인인가? 생각하여 로마는 흥분된 상태엿다고 한다 174
- 남아메리카 정글에서도 유대인들이 살고 있는걸 발견한다. 1640년대 177p
- 스페인과 포르투갈에 살던 유대인이 돈을 많이 벌자, 유대인을 기독교 개종이나 추방하는 정책을 편다 - 1492년 경 175p
- 유대인들은 플란데런 지역,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에 재산을 싸들고 모이기 시작한다. 176
- 16세기 후반 네덜란드는 스페인에서 독립전쟁으로 네덜란드 연합 공화국이 되었다.
- 유대인들은 플란데런 지역,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에 재산을 싸들고 모이기 시작한다. 176
- 유대인들이 북 이스라엘 10개 지파, 남이스라엘 2개지파로 나뉘고
-
16~17세기 중국 금과 은의 비율이 1:4 ~ 1:5 … 1:7 정도 였다
- 스페인은 1:15.5 ~ 1:14 , 유럽전반 1:11 ~ 1:12 …
- 스페인과..유럽에서 은을 가지고 중국에 가면 금을 2배로 받을 수 있었다
- 중국은 금이 유출되고 은은 유입이 급증하게 된다.
- 그래서 은이 16 ~ 17세기 아시아 무역 네트워크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것이다 210
-
네덜란드…독립전쟁이 치열하던 1590~1600년대
- 포르투갈과 스페인이 장악한 동인도산 향신료,, 네덜란드에서는 공급 단절, 가격 폭등
- 동인도에 다녀온 선박, 동인도산 향신료가 공급되자 이 회사는 대박을 터트린다. 312p
- 아프라카동부와 인도 해안선은 포르투갈과 스페인이 장악하고 있어
- 네덜란드배는 더 크게 돌아야 했다. 그러다 조난당하고…하면서
- 오스트레일리아와 뉴질랜드(니우 제일란트)
8. 🔗 References
- 네덜란드 연도표
- 1492년: 콜럼버스 아메리카 대륙 발견. 대항해시대(15세기~17세기)의 일대 사건
- 1568년
1648년: 네덜란드 독립전쟁(상대는 스페인), 휴전기(16091619) 동안 네덜란드 급발전 - 1588년: 스페인 무적함대 영국에 패배함으로써 세계 패권 영국으로 이동 시작
- 1602년: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 설립. 박연, 하멜 모두 동인도회사 직원
- 1600년대초~1672년: 네덜란드 황금시대. 이후 영국/프랑스와의 전쟁으로 네덜란드 국력 쇠퇴
- 2025년: 조그만 나라 네덜란드 세계 수출 순위 4위(대한민국은 8위)
-
조선 후기 수도 방위를 책임졌던 가장 핵심적인 중앙 군영 ↩︎
-
카이펑(开封, Kāifēng)은 중국 허난성 북부에 위치한 유서 깊은 고대 도시로, 북송(北宋) 왕조의 수도였으며 중국의 8대 고도(古都) 중 하나입니다. 황하 유역의 상업 중심지로서 번영을 누렸고, 포청천이 활동했던 곳으로 유명하며, 송나라의 화려했던 도시 생활상을 담은 <청명상하도>의 배경이 된 곳으로, 현재는 역사 테마파크인 ‘청명상하원’으로 당시의 문화를 체험할 수 있습니 ↩︎
-
얀 하위헌 판 린스호턴(Jan Huyghen van Linschoten, 1563~1611)은 네덜란드의 항해사이자 여행가로, 포르투갈의 동양 무역 항로를 상세히 기록하여 네덜란드와 영국의 동인도 진출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인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