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구 COD

[!INFO] 책 정보
- 저자: 저자/마크_쿨란스키
- 번역: 번역/박중서
- 출판사: 출판사/알에이치코리아
- 발행일: 2024-12-20
- origin_title: Cod A Biography of the Fish that Changed the World (1997년)
- 나의 평점: 10
- 완독일: 2026-01-10 16:55:54
1. 🖐️ Before Reading (읽기 전)
1.1 동기와 기대
2. 📜 Synopsis (LLM)
Summery
마크 쿨란스키의 명저 《대구》는 대구라는 물고기를 통해 선사시대부터 현대까지 인류의 삶, 문화, 역사, 그리고 환경 문제까지 폭넓게 조망합니다. 바이킹의 대이동, 미국 독립혁명, 대구 전쟁 등 세계사의 주요 사건들이 대구를 중심으로 어떻게 전개되었는지를 저널리스트 특유의 냉철한 시각으로 생생하게 다룹니다. 이 책은 대구의 존재가 인류에게 미친 지대한 영향과 함께, 인간의 무분별한 탐욕이 초래한 어자원 고갈 및 환경 파괴에 대한 경고 메시지를 담고 있으며, 시대별 대구 요리법까지 아우르는 독특한 세계사 잡학사전입니다.

Keyword
#대구, #세계사, #환경문제, #어자원고갈, #마크쿨란스키, #미식인문학, #바이킹, #대구전쟁, #인류탐욕
Author
저자(글): 마크 쿨란스키
- 소개: 아마존 선정 ‘일생에 읽을 만한 책 100’의 작가이자 〈뉴욕타임스〉 선정 베스트셀러 작가. 극작가, 어부, 항만 노동자, 요리사 등 다양한 직업을 거쳐 1976년부터 1991년까지 외신 기자로 활동했습니다. 《대구》로 뉴욕시립도서관 ‘최고의 책’ 및 ‘제임스 비어드 어워드’를 수상했습니다.
- 주요 저서: 《연어의 시간》, 《Big Lies》, 《우유의 역사》, 《곤충들이 사라진 세상》, 《무엇 What》, 《물고기가 사라진 세상》
번역: 박중서
- 소개: 출판기획가 및 번역가로 활동하며 한국저작권센터(KCC)에서 에이전트로 일했습니다.
- 주요 역서: 《여행 면허》, 《옐로스톤》, 《킬링 앤 다잉》, 《도시전설의 모든 것》, 《컬트》, 《프루스트가 우리의 삶을 바꾸는 방법들》, 《가짜 뉴스의 모든 것》, 《푸틴의 사람들》, 《네가 세계의 마지막 소년이라면》, 《신화의 시대》
감수: 최재천
- 소개: 이화여자대학교 에코과학부 석좌교수이자 생명다양성재단 이사장. 서울대학교에서 동물학, 미국 펜실베이니아주립대학교에서 생태학 석사, 하버드대학교에서 생물학 박사학위를 받았습니다.
- 주요 저서/역서: 《이상한 과학책(큰글자도서)》, 《동물의 왕 사자(세이펜 적용)》, 《땅속의 농사꾼 지렁이(세이펜 적용)》, 《과학잡지 에피 34호》, 《이상한 과학책》, 《다윈이 사랑한 식물(큰글자도서)》, 《어쩌다 리더가 된 당신에게》, 《최재천의 동물대탐험 8: 코알라 구출 작전(양장본 Hardcover)》, 《숙론(큰글자책)》, 《최재천의 공부》
3. 🔆 Insight & Deep Dive
3.1 깨달은 점 (Aha Moment)
3.2 비판적 사고 (Critical Thinking)
3.3 내 삶에 적용하기 (Action Item)
- 인간의 탐욕, 아 이제 부터 대구를 먹을 때 맘 편히 먹을 수 있을까
2026년 상황은 어떠할까? …30년이 지났지만 더 악화 중이다. [2020년대 이후 북대서양 대구 자원의 현황을 최신 자료를 바탕으로 정리](2020년대 이후 북대서양 대구 자원의 현황을 최신 자료를 바탕으로 정리)
4. 🏆 Top Highlights
📌 첫 번째 문장
콜럼버스가 아메리카의 발견으로 세간의 격찬을 받고 있었다. 브리스틀(영국)의 상인들이 보낸 이 편지에는, 그들이 아메리카에 이미 다녀간 적이 있음을 콜럼버스도 잘 알고 있을 것이라는 주장이 들어있었다.
바이킹과 바스크인들은 이미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하고 그곳 어장에서 대구잡이를 하고 있었다. 공공의 비밀?로 간주했다. 콜롬버스는 그걸 터트렸다.
📌 두 번째 문장 224p
영국의 동맹국들이 거듭해서 주장한 바에 따르면 이 문제는 영국 소비자들이 그토록 애호하는 대구 대신 다른 어종에 입맛을 들이기만 한다면 해결될 수 있었다. 서독은 이미 아이슬란드와 협상을 마치고, 아이슬란드산 대구 조업을 포기하는 대가로 연 어 조업 할당량을 부여받았다. 서독 정부는 만일 영국의 가정에서 연어나 폴락대구 먹는 법을 배우기만 한다면 이 모든 문제가 해결 될 것이라고 영국 정부에 조언했다. 유럽경제공동체는 스코틀랜드 연안에만 해도 푸른화이팅대구가 풍부하다는 사실을 지적했다.
“만일 영국인이 다른 생선을 먹도록 정부에서 독려할 수만 있다면 대구 전쟁은 불필요해질 것이다.” 1976년 5월의 〈파이낸셜타임스〉 기사 내용이다. 하지만 영국인은 화이팅대구나 폴락대구가 아니라 대구를 먹고 싶어 했으며 연어라면 혐오해 마지않았다.
사람들이 입맛의 취향을 바꾸지 않는다. 자연은 골치가 썩는다. 입맛을 바꾸면 될것인데 그게 어렵다. 그 이유로 영국과 아이슬란드는 배로 범퍼카 처럼 실제로 드리받으며 3차례나 큰 전쟁을 한다.
📌 세 번째 문장 268p
사람들은 자연과 진화를 인간 활동과 완전 별개인 것으로 간주하고 싶어 한다. 마치 한쪽에는 자연의 세계가 있고 다른 한쪽에는 인간이 있다는 식의 사고방식이다. 하지만 인간 역시 자연의 세계에 속해 있다. 만일 인간이 광포한 포식자라면 그 역시 진화의 일부분이다. 만일 대구와 핻거대구와 기타 종이 인간 때문에 전멸해서 살아남지 못한다면 그놈들보다 더 잘 적응한 뭔가가 그놈들의 자리를 차지할 것이다. ….바퀴벌레의 경우에서 잘 드러났듯이, 자연에서 가장 성공한 놈들이라고 해서 항상 우리의 마음에 드는 것은 아니다.
무지막지하게 포획하면서 어떻게 멸종되지 않을거라고 생각하는 건지? 아직도 그것을 믿지 못한다고 하니, 인간 본인이 먹고살게 그것밖에 없는데 그것이 없어서 그런건지, 정말 인간의 탐욕은 파괴적이다.
5. 📌 Key Concepts
러시아가 민감해 하는 물고기의 실체 https://youtu.be/eIYnRsVSSAg?si=pobbyGwK336Mfc7i
5.1 [대구 COD에 대해서](대구 COD에 대해서)
The Life Cycle of the Atlantic Cod - From Egg to Adult https://youtu.be/msxqlk-i3k0?si=xbM2u_hPCDkwXQ6c
1. 대구의 주요 생물학적 특징
대구의 신체 구조는 장거리 이동과 대량 포획, 그리고 장기 보관에 유리하도록 설계되어 있습니다.
| 구분 | 주요 특징 | 역사적/경제적 의미 |
|---|---|---|
| 지방 함량 | 살에 지방이 1% 미만 (간에 집중 저장) | 건조 시 부패하지 않아 장거리 항해용 보존식 가능 |
| 번식력 | 암컷 한 마리가 한 번에 300만~900만 개의 알 산란 | 자원이 무한하다는 착각을 불러일으켜 남획의 원인이 됨 |
| 식성 | 탐욕스러운 잡식성 (갑각류, 작은 물고기 등) | 낚시 바늘에 쉽게 걸려 대량 포획이 용이함 |
| 신체 구조 | 턱 밑의 수염(Barbel), 3개의 등지느러미 | 바닥 근처의 먹이를 찾는 탐지기 역할 및 강한 수영 능력 |
| 적응력 | 0°C ~ 15°C의 차가운 물 선호 | 북대서양 전역에 걸친 광범위한 어장 형성 |
2. 대구의 성장 과정 (Life Cycle)
대구는 알에서 성체가 되기까지 서식지를 옮기며 드라마틱한 성장을 거칩니다.
| 단계 | 기간/크기 | 주요 특징 및 서식지 |
|---|---|---|
| 1. 알 (Egg) | 산란 후 10~30일 | 해수면 근처에서 부유(Pelagic). 수온에 따라 부화 속도 결정. |
| 2. 자어 (Larva) | 부화 후 수개월 | 난황을 흡수한 후 플랑크톤을 섭취. 조류에 휩쓸려 이동. |
| 3. 치어 (Juvenile) | 약 7cm ~ 성숙 전 | 바다 밑바닥(Demersal)으로 내려와 정착. 포식자를 피해 암초 등에 서식. |
| 4. 성어 (Adult) | 2 |
번식 능력을 갖춤. 최대 25년 생존 가능하며, 50kg 이상 성장하기도 함. |
6. 🖍️ Book Marks
9세기 - 바이킹이 스칸디나비아를 떠나 항해를 시작하다. 대구 덕분에 긴 행하개 가능해졌다. 1620년 - ‘나그네들’, 대구를 잡아 부자가 되리라는 꿈을 품고 매사추세츠주 플리머스에 정착하다 1700년대 - 대구 어업으로 가문의 부를 쌓아 올린 ‘대구 귀족’이 등장하다 1958년 - 아이슬란드와 영국, 자국의 영해선을 두고 제1차 대구 전쟁을 벌이다 1992년 - 캐나다 정부, 대구의 상업적 멸종 위기 개선을 위해 뉴펀들랜드 근해,그랜드뱅크스,세인트로렌스만 대부분에서 해저 어업을 무기한 금지하다
대구로 보는 세계사 연대표
| 연도 | 내용 |
|---|---|
| #9세기 | 바이킹이 스칸디나비아를 떠나 항해를 시작하다. 말린 대구 덕분에 긴 항해가 가능해 지다. |
| #985년 경 | 붉은’ 에이릭이 바이킹을 이끌고 아이슬란드에서 그린란드로 가다 |
| #1000년 경 | 바스크인들이 소금에 절인 대구의 판매 시장을 국제적인 규모로 확장하다. 북아메리카 해안에 있는 대구 어장의 위치를 바스크인들만의 비밀로 묻어 두다 |
| #1497년 | 뉴펀들랜드를 항해하던 조반니 카보토가 대구 어장을 발견하다. 이때부터 바스크인들 의 비밀이 밝혀지다. |
| #1524년 | 조반니 다 베라차노가 뉴욕 항구와 내러갠섯만을 발견하다. 갈고리 모양의 곳에 ‘팔리 비시노’라는 이름을 붙이다 |
| #1534년 | 자크 카르티에가 세인트로렌스강(캐나다와 미국의 동쪽 국경을 흐르는 강) 하구를 발견 하고, 프랑스 소유라고 주장하다. 그곳에서 바스크 어선 1000척이 고기 잡는 모습을 보다. |
| #1602년 | 바솔로뮤 고스널드가 팔라비시노에 케이프코드(대구 곶)라는 이름을 붙이고, 뉴잉글 랜드에 대구가 ‘들끓는다’고 보고하다. |
| #1607년 | 영국인들이 노스버지니아(미국 메인주 브런즈웍 인근)에 정착지를 세우려고 시도하다 |
| #1614년 | 존 스미스가 뉴잉글랜드 해안의 지도를 그리고, 대구 4만 7000마리를 잉글랜드와 어 스파냐에 팔아 큰돈을 벌어들이다. 토착민 27명을 에스파냐에서 노예로 팔아 추가 이익을얻다. |
| #1620년 | ‘나그네들’이 대구를 잡아 부자가 될 것이라는 꿈을 품고서 매사추세츠주 플리머스에 정착하다. |
| #1623년 | ‘나그네들’이 글로스터에 어업 기지를 만드는 데 실패하다 |
| #1625년 | ‘나그네들’이 잉글랜드인들로부터 대구 어업에 필요한 장비와 조언을 얻다. |
| #1640년 | 매사추세츠의 베이 식민지에서 30만 마리의 대구를 전 세계 시장에 내놓다 |
| #1645년 | 뉴잉글랜드인들이 삼각 무역으로 들르는 곳마다 돈을 벌어들이다 |
| #1700년 대 | 뉴잉글랜드가 국제적인 상업 세력으로 부상하다. 대구 어업으로 가문의 부를 쌓아 을 린 ‘대구 귀족’이 등장하다. |
| #1773년 | 1733년부터 영국 정부가 당밀 조례, 설탕 조례, 인지 조례, 타운젠드 조례 등을 제정 해 뉴잉글랜드의 경제를 통제하려고 하자 화가 난 미국인들이 보스토 항구에 차를 내 다 버리다. |
| #1775년 ~ #1781년 | 미국 독립 전쟁이 일어나다 |
| #1782년 | 영국이 그랜드뱅크스에서의 대구 어업권을 뉴잉글랜드에 넘겨주다 |
| #1815년 | 프랑스가 신세계로 가는 자국의 선단에 물고기 남획의 위험이 있는 장비인 주낙을 설 치하다. |
| #1834년 ~ | 인도 제도의 유럽 식민지에서 잇따른 노예제도의 폐지로 시장이 줄어들자 1849년 북 아메리카의 대구 어업이 큰 타격을 입다. |
| #1862년 | 토머스 헉슬리가 이끄는 영국의 한 어업위원회가 주낙으로 어획량이 감소할 가능성 은없다고 결론짓다 |
| #1881년 | 영국 헐의 조선소에서 ‘조디악’이라는 이름의 증기 동력 트콜선을 만들다 |
| #1892년 | 스코틀랜드에서 최초의 전개판 트롤 선박을 제작하다 |
| #1893년 | 미국 어업위원회가 케이프코드의 어민들에게 전개판 트롤망을 대여해 주다 |
| #1921년 | 뉴잉글랜드에서 생선 저미는 기계가 개발되다 |
| #1925년 | 뉴욕 출신의 클래런스 버즈아이가 물고기 냉동법을 연구하고 제너럴 수산물 회사를 설립하다. |
| #1940년 대 | 고성능 선박, 저인망, 냉동 생선이라는 세 가지 혁신의 결합물인 공모선이 제작되다 |
| #1946년 | 버즈아이가 급속 냉동 공정을 개발하다 |
| #1949년 | 과도한 어업을 규제하기 위해 국제 북서대서양 어업위원회가 결성되다 |
| #1950년 대 | 뛰김용 생선 토막이 어마어마한 상업적 성공을 거두다 |
| #1958년 | 자국의 영해선을 12마일로 화대하려는 아이슬란드와 이에 반대하는 영국이 제1차 다 구 전쟁을 벌이다 |
| #1961년 | 영국이 12마일 영해선을 인정함으로써 제1차 대구 전쟁이 막을 내리다 |
| #1963년 | 루넌버그 최후의 어업용 스쿠너선 ‘테레사 E. 코너호’가 선원을 구하지 못해 빈 배로 뉴펀들랜드까지 항해하다. 이로써 대구 어업에서 돌의 시대가 완전히 끝나다 |
| #1971년 | 아이슬란드가 자국의 영해선을 50마일로 확장하겠다고 선포하다 영국과 서독이 거세게 항의함으로써 제2차 대구 전쟁이 발발하다. |
| #1973년 | 영국이 50마일 영해선을 인정하고, 크기가 작은 영국 트롤선에 대해서만 제한적인 조업 허가를 얻다 |
| #1975년 | 아이슬란드가 대구 어족과 환경을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자국의 영해선을 200마일로 확장하겠다고 선포하다. 역시 영국과 서독이 항의함으로써 제3차 대구 전쟁이 시 작되다. |
| #1976년 | 유럽경제공동체가 200마일 영해를 선언함으로써, 아이슬란드와 협상 중이었던 영국에 망신을 주다. 대부분의 어업 국가가 200마일 영해를 선언하다. |
| #1992년 | 대구가 상업적 멸종 위기에 처하자 캐나다 정부는 뉴펀들랜드 근해, 그랜드뱅크스, 세인트로렌스만 대부분에서 해저 어업을 무기한 금지하다. 3만 명의 어부가 일자리를 잃다. |
| #1994년 | 미국 국립해양수산청에서 현재 지속 가능한 어족의 숫자에 비해 어업 선단이 대략 두 배나 더 많다는 결론을 내리다. 조지스뱅크를 비롯한 근해에서 각 선박의 해저 어류 조업 가능일이 매년 139일로 제한되다 |
| 2014년~현재 | 캐나다의 그랜드뱅크스 조업 금지 조치가 2026년까지로 다시 연장되었다. 미국의 조 지스뱅크에서는 엄격한 규제하에 소규모 어업만 이루어지고 있다. 대서양대구의 개체 수는 여전히 회복될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다 |
인류에게 문제 중의 문제, 즉 모든 문제의 아래에 놓인 문제이자 그 어떤 문제보다도 더 깊이 관심이 가는 문제가 있다면, 그것은 바로 인간이 자연에서 차지하는 위치를, 그리고 사물의 세계와 인간의 관계를 확인하는 것이다.
- 토머스 헨리 헉슬리 <자연에서 인간의 위치>
#자연 #인간
역사의 첫 번째 생물학적 교훈은 삶이 경쟁이라는 것이다. 경쟁은 거래의 삶일 뿐만아니라 삶의 거래이기도 했다. 식량이 풍부하면 평화로웠고, 식량보다 입이 많으면 폭력적이었다. 동물은 주저 없이 서로를 잡아먹는다. 문명화된 인간은 법률이라는 절차에 따라 서로를 소비한다.
- 월 듀런트, 에어리얼 듀런트 <역사의 교훈>
#역사 #동물 #인간
프롤로그 (아일랜드에서 가장 가까운)돌출부의 감시원
1부 어느 물고기의 이야기
대구가 있는 땅을 찾아서
40 바스크인은 그 존자 자체가 수수께끼다. 이들은 오늘날의 에스파냐 북서쪽 한 모퉁이, 그리고 프랑스의 남서쪽 한 모퉁이에 해당하는 영토에 살고 있으며 현존하는 어떤 역사의 기록보다도 더 오랫동안 그렇게 살아왔다.
42 (바스크인) 이들은 엄청난 대구 어족을 발견했고, 그걸 잡아서 소금에 절였다. 그래서 긴 항해에도 불구하고 상하지 않고 영양가도 높은 식품을 먹을 수 있었다.
노르웨이에서 출발한 바이킹이 아이슬란드와 그린란드를 거쳐 캐나다에 도착했는데 이 경로가 대서양대구의 서식 범위와 정확히 같았던 것은 우연의 일치가 아니었다.
자크 크르티에 프랑스의 항해가이자 탐험가. #1534년 뉴펀들랜드(케나다 new foundland,새로찾은땅) 에 도달한 이래 여러 차례의 탐사를 통해 프랑스의 캐나다 지배를 위한 기반을 닦았다.
44 뉴펀들랜드에서는 훗날 바이킹 거주지의 유적이 발견되었다.
45 바이킹들이 그처럼 멀고도 황량한 바다까지 여행할 수 있었던 까닭은 대구를 보존하는 방법을 배웠기 때문이다. 이 물고기를 추운 공기 속에 매달아 놓으면 무게가 5분의 1로 줄어들면서 나무처럼 딱딱한 판자 형태가 된다. 이를 잘게 부숴서 씹으면 마치 건빵처럼 먹을 수 있다.
45 바이킹과 달리 바스크인에게는 소금이란 것이 있었다. 소금에 절인 생선은 말린 생선보다 더 오래갔기 때문에 바스크인은 바이킹보다 더 멀리까지 여행할 수 있었다. 1000년경 바스크인은 대구 시장을 크게 확장했고 이 시장은 대구의 북부 서식지에서 멀리 떨어진 곳까지 미침으로써 진정 국제적인 규모가 되었다.
46 과거에는 고래에만 사용했던 소금 절임기법을 대구에 적용한 바스크 고래잡이들은 이것이야말로 정말로 훌륭한 결합이라는 사실을 발견했다.
46 대구는 사실상 기름이 전혀 없었기 때문에 소금에 절이고 잘 말리기만 하면 거의 상하는 법이 없었다. 소금에 절인 대구는 붉은색의 고래고기보다 더 오래갔고, 중세 북부 국가에서 소금에 절인 식품으로 인기 있었던 기름진 청어보다 더 오래갔다.
48 가톨릭교회는 바스크인에게 큰 기회를 제공했다. 중세의 교회에서 부과한 금식일에는 성교는 물론이고 동물의 살을 먹는 것도 금지되었다. 하지만 ‘차가운’ 식품을 먹는 것만큼은 허용되었다. 생선은 물에서 나오는 것이기 때문에 차가운 식품으로 간주되었고, 물새와 고래도 마찬가지로 여겨졌다. ….육지 고기를 금지하는 날은 한 해의 거의 절반을 차지했다.(사준절, 각종 종교 기념일, 금요일) 이런 금식일은 결국 소금에 절인 대구를 먹는 날이 되고 말았다. 대구는 거의 종교적인 상징이 되다시피 했다. 기독교인의 의무 준수를 위한 전설적인 십자군이 된 셈이다.
50 바스크인은 매주 금요일마다 점점 더 부유해졌다. 하지만 그 많은 대구는 도대처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바스크인은 대구의 출처에 관해서 입도 뻥긋하지 않은 채 비밀을 지켰다. …15세기…대구가 수익성 높은 상품으로 널리 인식되면서 유럽 전역의 상인들이 앞을 다투어 새로운 대구 어장을 찾아 나선 것이다.
53 콜럼버스가 아메리카의 발견으로 세간의 격찬을 받고 있었다. 브리스틀(영국)의 상인들이 보낸 이 편지에는, 그들이 아메리카에 이미 다녀간 적이 있음을 콜럼버스도 잘 알고 있을 것이라는 주장이 들어있었다.
53 #1497년 조반니 카보토가 브리스틀에서 항해를 시작했다. ..영어식 이름 ‘존 캐벗’ 그가 잉글랜드 국왕 헨리 7세의 후원으로 항해를 수행… 아시아의 항신료를 구하기 위한 항로개척.. 1497년 6월 캐벗은 육지를 발견했다. 그곳은 아시아가 아니었다. 방대하고도 바위 투성이인 해안은 생선을 소금에 절이고 말리기에 이상적이었으며 인근 바다에는 대구가 한가득했다. 캐벗은 대구에 관해 보고하면서 이것이야말로 새로운 땅의 부를 보여 주는 증거라고 주장했다. 그는 이 ‘새로 발견한 땅 new found land’ ,즉, 오늘날의 뉴펀들랜드가 잉글랜드의 소유임을 주장했다.
입을 크게 벌린 채로
만일 알들이 부화하는 것을 막는 사고가 전혀 없어서 모든 알이 성체로 자라난다고 가정해 보자. 계산에 따르면 불과 3년이면 바다가 대구로 가득 차게 되어, 우리는 굳이 발을 적시지 않고도 대구의 등을 밝으며 대서양을 건널 수 있을 것이다. - 알렉상드르 뒤마 < 요리 대사전 1873년>
58 대구(가두스 모루아, 대서양 대구) 는 다산을 할 뿐 아니라 질병과 추위에 강하고 거의 모든 식량 자원을 섭취할 수 있다. 얕은 물로 찾아가서 해안에 가까이 살아 그야말로 완벽한 상업용 물고기였다.
59 대구는 잡식성이다. 다시 말해 그놈은 뭐든지 먹는다. 입을 벌린채로 헤엄치면서 입에 들어가는 것은 무엇이든 먹어 치운다. 심지어 어린 대구까지도.
59 뉴잉글랜드의 낚시꾼들은 대구보다 차라리 블루피시를 낚는 쪽을 훨씬 더 선호한다.
60 대구는 그 살이 하얗다는 사실 때문에 격찬을 받는다. 그 살은 흰 살 생선 중에서도 가장 하얀 편으로, 이것이야말로 대구 목의 특징이다.
60 대구의 살에는 지방이 사실상 없고 (겨우 0.3퍼센트에 불과하다) 단 백질이 무려 18퍼센트 이상이어서 물고기 중에서도 유별나게 높은 편이다. 대구를 말리면 그 살의 80퍼센트 이상을 차지하는 물이 증발하여 결국 농축 단백질이 된다. 그래서 말린 대구는 단백질이 거의 80퍼센트에 달한다. 대구는 거의 버릴 게 없다. 머리는 몸보다 더 맛이 좋으며 흔히 ‘혀’라고 불리는 목구멍과 양옆에 ‘볼’ 이라고 불리는 작은 우너반 모양의 살이 특히 그렇다. 부레로는 부레풀을 만든다. 이는 산업용 원료로 쓰여 정화제나 일부 접착제에 사용된다. 하지만 대구를 낚는 사람들은 부레를 튀겨서 먹거나 차우더 또는 스튜에 넣어 끓여 먹는다. 알은 날것 또는 훈제로 먹는다.
66 상업적 어민에게 대구목이라고 하면 예나 지금이나 오로지 다것 가지 종류뿐이다. 대서양대구, 해덕대구, 폴락대구,화이팅대구, 헤이크대구 였다. 그런데 시간이 흐르면서 또 한 가지 종류가 여기에 덧붙여지지 않을 수 없게 되었는데 바로 태평양대구인 ‘가두스 마크로케팔루스 Gadus macrocephalus’였다. 이놈은 대서양대구의 더 작은 버전에 해당하며 그 살도 대서양대구에 비해 아주 약간만 못한 것으로 평가된다. 하지만 이 중에서도 가장 크고 가장 하얀 살을 지는 것은 바로 대서양대구였다.
[대구목 종류들](대구목 종류들)
70 애버딘 남부의 핀던에서는 어민 아낙네들이 핻거대구를 바닷가에서 말린 다음, 토탄과 해초를 태워 만든 불에 훈제했다. 이것이 바로 지금까지도 격찬을 받고 있는 1피난 해디(Finnan Haddie) 의 기원이다.
71 대구는 요리로 만들었을 때의 특징뿐만 아니라 극도로 잡기가 쉽다는 특징도 있다.
대구는 따뜻한 해류와 차가운 해류가 만나는 지점에 모여든 해양 생물을 먹고 산다. 바로 멕시코 만류가 북아메리카 근해의 래브라도 해류를 스쳐 지나가는 곳, 그리고 이 해류가 또다시 영국 제도와 스칸디나비아, 러시아 근해에서 북극권 해류와 만나는 곳이다.
73 대구는 바로 이런 뱅크라는 특수한 환경 속에서 수백만 년 동안 살아왔다. 북해의 여러 뱅크에서도 대구 어장이 발견되기는 하지만 멕시코 만류의 물이 북극권 그린란드의 해류와 만나는 북아메리카의 여러 뱅크야말로 대구의 밀도가 유럽 그 어디보다도 더 높은 곳이다. 바스크인들의 ‘비밀’은 바로 이곳이었다.
길이가 40인치(약 1미터) 되는 암컷 대구 한 마리는 한 번 산란할 때마다 300만 개의 알을 낳을 수 있다. 그보다 10인치(약 25센치미터)가 더 긴 암컷은 900만 개의 알을 낳을 수 있다. 대구는 20년에서 많게는 30년 까지도 살 수 있지만 다산성을 결정하는 요인은 나이가 아니라 크기다 …암컷 대구 한 마리가 낳는 수백만 개의 알 가운데 치어를 거쳐 성적으로 성숙한 성체가 된 녀석이 두마리만 있으면 그 개체군은 안정적이다. 첫해가 가장 살아남기 힘들다.
75 이놈은 지극히 흔한 물고기였다. 하지만 그 포식자중에 인간이 있었으니, 이 종으로 말하자면 대구보다도 더 탐욕스럽게 입을 벌린 종이었다.
대구 열풍
81 (1500년) 뉴펀들랜드의 어업은 마치 골드러시에 못징낳은 열광과 함께 시작되었다.
82 16세기 중반에는 유럽에서 소비되는 생선의 60퍼센트가 대구였으며 이 비율은 이후 2세기 동안 꾸준히 유지되었다.
88 앵글로색슨어에서 ‘위치wich’는 소금을 보유한 장소라는 뜻이다 잉글랜드의 도시 중 ‘-위치’ 로 끝나는 이름을 가진 곳은 한때 소금 생산지였다.
‘가발gabelle’ 이라 불리는 프랑스의 소금세는 특히 증오의 대상이었으며, 이는 프랑스 혁명으로 귀결되는 여러 가지 불만의 원인 가운데 하나이기도 했다.
89 당시에 유럽에서 가장 좋은 소금이 생산되는 곳은 포르투갈의 아베이루였다
90 16세기 후반 영국인이 뉴펀들랜드어업에서 지배적인 세력이 된 까닭은, 프랑스와 싸우는 영국 해군의 전함에 막대한 양의 말린(그러나 소금에 절이지는 않은) 대구를 제공했기 때문이었다. 대구를 낚아서 해군을 먹여 살리고 나머지는 내다 팔았던 것이다.
1620년: 바위와 대구
97 탐색은 유럽 특유의 열정이 되다시피 했다. 어떤 이는 영양가 높은 가공 대구에 의지해 황금을 찾아 남아메리카로 향했다. 또 어떤 이는 대구를 찾아 북아메리카로 행했다. 하지만 이 지역들로 향한 사람들 대부분이 정말로 찾아 헤맸던 대상은 바로 아시아였다 16세기에만 해도 뉴펀들랜드는 중국 근해의 섬으로 지도에 그려져 있었다.
110 버지니아 북쪽에 있는 아메리카의 동공체 중에서 가장 번창했던 뉴잉글랜드는 무역에 최적인 완벽한 위치에 자리하고 있었다 이곳에는 유럽과 유럽의 식민지들이 원하던 상품인 대구가 있었으며, 이 대구 덕분에 유럽산 상품을 열망하던 상당한 소비력을 보유한 인구가 생겨나게 되었다 그로 인해 생겨난 도시가 바로 훗날의 보스턴이다
111 뉴 잉글랜드 사람들은 상업 전문가가 되었다. 이들은 독립적이고도 부유했으며 독점을 싫어했다. 서인도 제도의 설탕 생산 업자들이 보호 시장에 의존하여 부유해졌던 것과 달리, 뉴잉글랜드인은 자유무역 자본주의에 의존하여 부유해졌다. 이들의 신조는 ‘개인에 대한 존중’이었으며 상업은 뉴잉글랜드의 종교가 되다시피 했다. 심지어 어민조차도 개인 사업가들이었고 봉급을 받고 일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도 세계 대부분에서 그렇게 하는 것처럼) 어획량에 따라 배당을 받았다. 18세기 경제학자인 애덤 스미스는 자본주의에 관한 초창기 저서인 <국부론>에서 뉴잉글랜드의 어업을 격찬했다. 스미스가 보기에는 어업이야말로 개인에게 무제한적인 상업 환경이 주어질 경우 경제가 어떻게 번영할 수 있는지를 보여 주는 흥미진진한 사례였다.
영국 정부는 이런 자유를 부여할 의도가 전혀 없었으며, 식민지는 더 이상 종주국을 필요로 하지 않게 되었다. 이것이야말로 제국의 한가운데 있는 위험한 선례였다
어떤 불가분의 권리
116 18세기에 이르러 대구는 한때 굶주리는 정착민이 사는 머나먼 식민지였던 뉴잉글랜드를 국제적인 상업 세력으로 격상시켰다. 또한 대구는 매사추세츠에서 단순한 일용품이 아닌 숭배의 대상으로 승격했다. 17세기 대구 어업 덕분에 가문의 부를 쌓아 올린 사람들은 ‘대구 귀족’ 이라 불렸는데, 이런 가문에 속한 사람들은 이 물고기를 부의 상징으로 여겨 공공연하게 숭배했다. 플리머스 토지회사의 인장과 1776년의 뉴햄프셔주 인장은 물론, 심지어 18세기의 〈세일럼 가제트Salem Gazete〉 신문에도 그 공식 문장에 대구가 나타난 경우가 적지 않았다(이 문장에는 인디언 두 명이 방패를 들고 있는 그림 위에 대구 한 마리가 그려져 있다). 1776~1778년에 발행된 최초의 미국 주화 상당 수에도 대구가 새겨져 있으며, 1755년 매사추세츠 베이 식민지에서 발행한 2페니짜리 납세필지에도 대구의 모습과 함께 ‘매사추세츠 의 주산물’이라는 구절이 새겨져 있다. 최초의 대구 귀족들은 부를 과시하기 위해 저택을 지으면서 곳곳을 대구로 장식했다. 선주인 벤저민 피크먼 대령은 1743년 세일럼에 저택을 지으면서 계단을 하나 만들었는데, 디딤판마다 양옆에 도금한 나무 대구가 한 마리씩 놓여 있었다.
117 카리브해,,,노인들,,,지주들은,,노인들의 식량을 위해 땅을 제공하기 실어했고,,, 노예들은 사탕수수를 생산하기위해16시간씩 일했고 소금에 절인 소고기와, 소금에 절인 대구를 먹었다.
118 갖가지 요인들 때문에 변질된 생선은 가뜩이나 까다로운 지중해 시장에서는 전혀 받아들이지 않는 물건이었다. 하지만 2서인도 제도는 이런 불량품들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시장을, 그것도 점점 커지는 시장을 제공했다. 급기야 ‘서인도 제도급’ 이라는 표현은 소금에 절인 대구 가운데에서도 가장 저급한 상품을 가리키는 상업 용어로 사용되기에 이르렀다.
주황: 동인도, 연한 주황: 인도(지명), 살구색: 서뉴기니
파랑: 서인도, 하늘색: 때때로 서인도에 포함되는 지역
119 1645년 뉴잉글랜드의 한 선박이 카나리아 제도로 출발했다 이 선박은 카보베르데 제도에서 아프리카인 노예를 사서 바베이도스 제도에 팔았으며, 와인과 설탕과 소금과 담대를 구입해서 보스턴으로 돌아왔다. 소금에 절인 대구도 같은 경로로 판매되었고, 머지않아 소금에 절인 대구와 노예와 당밀은 상업적으로 서로 연관을 맺게 되었다.
120 뉴잉글랜드에서 대구를 매매했던 상인들은 모두 노예제와 깊이 연관되어 있었다.
121 (알렉시스 토크빌)이 고찰한 (뉴잉글랜드인의) 도덕적 모순의 또 한 가지 사례는 바로 노예무역이었다 뉴잉글랜드 사회는 개인의 자유를 누구보다 더 열렬히 옹호했으며 심지어 공개적으로 노예제를 비난하기도 했다. 그런 한편으로 뉴잉글랜드 사회는 노예 상태에 놓은 사람들이 하루16시간씩 일해서 만든 값싼 식품을 카리브해의 농장주들에게 통째로 제공함으로써 점점 더 풍요해졌다. 18세기의 처음 10년 동안 경기가 좋았을 때 보스턴을 떠나 서인도 제도로 간 선박은 무려 300척이 넘었다.
121 더 빠른 낚싯배인 스쿠너선schooner이 개발되면서 이 신속한 가공품의 생산 역량도 늘어나게 되었다. 1713년 글로스터의 이스턴포인트에서는 앤드류 로빈슨이 만든 최초의 스쿠너선이 건조되어 3진수되었다. …글로스터의 스쿠너선이야말로 항애와 어업에 혁신을 가져온 주역이었다. …스쿠너선은 조지스뱅크와 해안의 생선 건조용 덕 사이를 오가는 시간을 줄여 결국 ‘서인도 제도급’ 가공품의 생산을 더 늘리는데 한 몫했다.
122 뉴잉글랜드의 최고 고객 일부는 바로 생도밍그(아이티), 마르티니크, 과들루프 같은 프랑스 식민지들과 수리남(네덜란드령 기아나) 같은 네덜란드 식민지였다.
123 ‘7년 전쟁 (미국에서는 ‘프렌치 인디언 전쟁 이라고 알려져 있다)‘은 최초의 전 세계적 충돌이었다. [최초의 세계적 충돌 - 7년 전쟁, 프렌치 인디언 전쟁](최초의 세계적 충돌 - 7년 전쟁, 프렌치 인디언 전쟁)
124 영국인은 전장에서의 승리에 만족하지 않고 프랑스에서 무엇을 빼앗을지를 숙고하며 무려 3년이란 세월을 보냈다. …. 1763년 이들은(영국) 북아메리카에 있던 프랑스의 소유를 모조리 무효화하기로 결정했따. 다만 뉴펀들랜드섬의 남쪽 근해에 있는 두 군데 섬 생피에르와 미클롱만 예외로 인정했다.
125 역설적인 사실은 프랑스가 과들루프를 계속 보유하는 대신에 캐나다를 잃어버림으로써, 즉 노예 식민지는 계속 보유하는 대신 어장을 잃어버림으로써 프랑스령 카리브해에서의 ‘서인도 제도급’ 생선 가공품에 대한 수요는 계속 생겨났고, 그로 인해 뉴잉글랜드인들이 영국 정부와 직접적인 충돌을 빚는 것도 불가피한 일이 되었다는 점이다. 이 충돌은 대영 제국의 기반 가운데 하나였던 ‘무역 및 향해 조례’ 때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이에 따르면 식민지인들은 그들이 생산한 제품을 잉글랜드에 판매하고, 잉글랜드로부터 상품을 구매하도록 되어 있었다. 법적으로 따지자면 뉴잉글랜드인들은 에스파냐와 카리브해와 직접 무역을 해서는 안되며, 대신 그들이 생산한 대구를 잉글랜드에 판매한 다음에 잉글랜드를 통해 에스파냐산 와인과 철을 구매해야만 했다.
영국인이 북아메리카에 대해 걱정하는데는 충분히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미국 독립의 대의가 결국 무력 전쟁으로 비화되기 98년 전인 1677년, 영국 정부에 뉴잉글랜드인들이 보낸 정중한 서한과 함께 여러 가지 선물(크랜베리 10통, 옥수수 푸딩 2통, 대구 1000마 리)이 도착했다. 비록 크랜베리 10통만큼 씁쓸하지는 않았을 그 서한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적혀 있었다. “황송하옵게도, 잉글랜드의 법률은 사면의 바다 이내에만 머물러 있으며 아메리카까지 도달 하지는 않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여기 있는 국왕 폐하의 신민들은 의회에 대표를 두고 있지 못하므로, 따라서 우리 스스로가 의회 때문에 무역에서 방해를 받는다는 것은 부당한 일이라고 보았습니다.”
126 규제로부터 자유로워지자, (애덤 스미스가 지적한 것처럼) 무역의 규모도 늘어났다. 1700년에 이르러서는 영국령 서인도 제도에서도 뉴잉글랜드의 대구를 모두 소화할 수는 없는 지경이 되었다.
당시 서아프리카에서 노예를 구매하고 대금을 지불하는 방법에는 세가지가 있었다. 바로 현금,소금에 절인 대구, 보스턴산 럼주였다
매사추세츠와 로도아일랜드의 4럼주 제조업자들은 점차 노예무역에 직접 관여하게 되었다.
126 19세기 초에 설립된 보스턴의 럼주 제조회사인 펠턴 앤드 컴퍼니는 #1936년 음용 지침서에 이 무역을 놀라 우리만치 솔직하게 설명했다
“선주들이 만들어낸 무역의 순환 과정은 다음과 같았다. 우선 노예를 싣고 서인도 제도로 간다. 그곳의 섬들에서 나온 당밀을 보스턴과 다른 뉴잉글랜드의 항구로 가져간다. 마지막으로 럼주를 싣고 아프리카로 간다”
127 영국 정부는 한 세기 넘도록 뉴잉글랜드인들이 자유무역을 맛보도록 방치하다가 1733년에 가서야 비로서 상업에 대한 자국의 통제를 재차 확립하기 위한 조치로서 당밀을 규제하기로 결정했다. 하지만 이 방법은 대영제국의 해체로 나아가는 최초의 부주의한 조치가 되고 말았다
세계 각지의 대구 전쟁
132 특별한 기술이 없는 사람, 자본이 아주 조금뿐인 사람조차도 대구 어업에 뛰어들면 재산을 쌓을 수 있었다. 이것이야말로 그들이 의심치 않던 체제였다.
135 #1773년 있었던 [1773년 보스턴 티 파티](1773년 보스턴 티 파티)는 미국 독립 혁명의 성격을 잘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보스턴 차 사건 이후 영국이 내린 ‘강압 법안’, 혹은 미국 독립 전쟁의 전개 과정](보스턴 차 사건 이후 영국이 내린 ‘강압 법안’, 혹은 미국 독립 전쟁의 전개 과정)
136 혁명동안에도 식품을 생산하는 아메리카의 능력은 식민지군의 가장 큰 이점이었다 영국군은 그보다 더 잘 훈련되고 더 많은 경험을 쌓았다고 볼 수 있었으며, 확실히 더 좋은 군복과 장비를 갖추고 있었다. 하지만 아메리카인은 영국인보다 더 잘 먹었다. 나아가 봉급도 더 높았고 (보스턴의 럼주 덕분에) 마시는 술도 더 좋았다.
137 (영국과 미국) 총성이 들리기 시작하고 3년이 흐른 뒤인 1778년에는 양측이 이미 협상할 채비가 되어 파리에서 회담을 시작했다. 1781년이 되었을 때는 오로지 세 가지 이슈만이 해결되지 않은 상태로 남아 있었다. 첫째는 국경, 둘째는 잉글랜드에 대한 채무 지불, 셋째는 어업이었다. 이 세 가지 중에서 가장 어려운 것으로 판명된 이슈는 바로 어업이었다.
138 뉴잉글랜드인의 아군 중에는 미국에서는 가장 과소평가된 건국 공로자인 존 애덤스가 있었다. …조지 워싱턴 대령을 식민지군의 총사령관으로 선택한 사람도 바로 그 였다. 훗날 미국 정부의 설계를 위한 청사진 노릇을 한 <정부에 관한 생각>을 저술한 사람도 그였으며…
139 [존 애덤스가 영국과 협상시 그랜드뱅크스에 대한 어업권에 사수에 대한 영향](존 애덤스가 영국과 협상시 그랜드뱅크스에 대한 어업권에 사수에 대한 영향) [1770년대 미국 뉴잉글랜드 대구 상인들의 위상](1770년대 미국 뉴잉글랜드 대구 상인들의 위상) 147p [1860년 미국 남북전쟁(Civil War)](1860년 미국 남북전쟁(Civil War))
5그랜드 뱅크스 어장

140 애덤스에 따르면 뉴잉글랜드의 어업은 “뱃사람의 요람이며 해군력의 원천"이었다. 그는 뉴잉글랜드의 해저 어업 종사자들이야말로 “우리 독립의 달성과 보전을 위해 절대 불가결하게 필요한” 이들이라고 주장했다.
140 아메리카인 가운데 상당수(그중에는 벤저민 프랭클린도 있었다)는 어업권을 충분히 양보할 수 있는 사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애덤스는 양보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마침내 1782년 11월 19일, 요크타운에서 영국군이 항복을 선언한 때로부터 1년 하고도 1개월이 지나서야 영국인은 그랜드뱅크스에서의 어업권을 뉴잉글랜드에 허락했다.
140 (뉴잉글랜드) 이들은 영국령 서인도 제도와의 무역을 금지당했다. 이는 뉴잉글랜드에도 막대한 상업적 손실을 안겨 주었을 뿐 아니라 단백질 공급원을 더 이상 얻지 못하게 된 카리브해의 수많은 노예들에게도 비극적인 기아를 초래했다. #1780년 ~ #1787년 동안 자메이카에서는 무려 1만 5000명의 노예가 굶어 죽었다.
142 #1834년 영국령 서인도 제도에서, #1848년 프랑스령 앤틸리스 제도에서 , #1849년 네덜란드령 앤틸리스 제도에서 각각 #노예제 가 폐지되었다 이에 북아메리카의 대구 어업은 타격을 입고 말았다.
[노예 Slave](노예 Slave)
142 카리브해의 사람들은 계속해서 소금에 절인 대구를 먹었으며 대구를 실어날랐던 나무통으로 북을 만들었다. 이제는 나무통이 더이상 대구를 운반하는 수단으로 쓰이지 않지만 그래도 음악가들을 위해 여전히 제조되고 있다.
144 중세부터 지금까지도 가장 수요가 많은 대구 시장은 지중해다. 이곳의 여러 나라들은 19세기에 막대한 인구 증가를 경험했다. ….그리도 그중 대부분은 열성적인 ‘바칼라오-소금에 절인 대구’ 소비자였다.
147 서인도 제도의 시장이 줄어드는 것과 때를 같이해서 뉴잉글랜드에서는 내수 시장이 자라났다. 소금에 절인 대구는 북부군의 주식이었으며 글로스터는 남북 전쟁 덕분에 수익을 톡톡히 올렸다. 하지만 이 전쟁의 결과로 북부 경제는 산업화되었고, 미국 산업 혁명에서 주역을 맡았던 뉴잉글랜드도 이전에 비해 어업에 덜 의존하게 되었다. 유서 깊은 상인 가문도 그들의 돈을 산업쪽으로 옮겼다. 이 때쯤에는 대구 귀족이라는 명칭도 느낌이 많이 달라졌다. 한창 대두하던 노동 계급은 지금의 주류 세력도 원래는 초라한 직업에 종사했었음을 상기시키려는 목적으로 이 말을 사용했고, 결국 어감상으로는 단순히 ‘벼락부자’를 일컫는 말이 되었다.
혁명 지도자로서의 이미지가 퇴색하면서 대구 귀족은 (그 모든 귀족적인 치장에도 불구하고) 한때 물고기를 잡아 큰돈을 벌어들인 오만한 사람들 정도로 기억되기에 이르렀다. 1874년에 라틴아메리카의 혁명가 프란시스코 데 미란다는 보스턴을 방문해서 매사추세츠 주 의사당에 걸려 있는 대구 조각상이 “일반적인 크기에 나무로 만들어졌고, 몰취미했다"고 적었다. 이보다 더 심한 표현은 1930년대에 보스턴의 아일랜드계 미국인 시장이자 혈기 왕성한 선동가 제임스 마이클 컬리가 한 말이었다. 그는 보스턴의 주류 세력을 ‘대구 귀족’이라고 부르는 것에 반발하면서, 그 표현이야말로 “그 물고기를 모욕하는 짓"이라고 주장했다.
2부 한계
새로운 아이디어와 900만 개의 알
160 1830 ~ 1900년 사이에 바다에서 실종된 글로스터 어민의 숫자는 모두 3800명이다. 이는 1812년의 전쟁에서 발생한 미국인 사상자 전체의 전체 숫자보다도 많은 셈이다. 더욱 놀라운 사실은 인구 1만5000명의 작은 도시에서 이 정도 실종자가 나왔다는 점이다. 1862년 2월 24일에는 조지스뱅크에 강풍이 밀어닥치는 바람에 하룻밤 새 무려 120명이 물에 빠져 죽었다.
162 어업의 현대화를 위한 최초의 시도는 프랑스에서 나왔다. 1815년 새로운 프랑스 정부는 자국 어업의 재건을 위해 보조금을 지원하기 로 결정했다. 당시 프랑스의 어업은 프랑스 혁명과 나폴레옹 전쟁 으로 황폐화되어 있었다. 하지만 경제 활성화라는 목표는 이 정책의 동기 중 일부에 불과 했다. 존 애덤스가 일찍이 지적했던 것처럼, 잘 훈련된 상비 해군을 유지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뛰어난 선원을 배출할 수 있는 대구잡이 원양 선단에 보조금을 주는 편이 훨씬 더 싸게 먹혔다. 영국은 여러 해 동안 프랑스의 보조금 지급에 대해 불평을 늘어놓았지만 결국에 는 마지못해 하면서 같은 길을 가고야 말았다.
164 낚싯줄에 낚싯바늘이 여러 개 달린 이 장비는 ‘트롤 낚시’,‘설치 낚시’,‘불토’ 등의 이름으로 불린다. 6주낙에서도 때로는 낚싯줄 끝에 갈래장치를 달아 미끼를 단 낚싯바늘을 하나가 아니라 두 개 매달았다.
165 주낙에 관한 19세기의 논쟁이 점차 커지는 가운데 정작 이슈가 되었던 것은 환경보전이 아니라 오히려 민족주의였던 것 같다. 실 제로 영국령 북아메리카와 (나중에) 캐나다가 격분한 까닭은 프랑스 의 보조금 정책 때문에 불공정한 경쟁이 벌어졌기 때문이었지, 그 정책으로부터 혜택을 받는 기법 때문에 대두할지 모를 남획의 가능 성 때문은 아니었다.
167 주낙을 사용하려면 막대한 양의 미끼를 구입할 수 있는 자본이 필요했다. 미끼를 살 여유가 없는 사람은 기회 자체를 얻지 못했다.
167 자연이 굴하지 않는 힘을 지녔다는 것이야말로 19세기에 유행하던 믿음이었다.
171 19세기 중반에 이르러 선반용 증기기관이 발명 -> 어업에 사용되면서 북아메리카의 발견 이래 대구 어업에 가장 극적인 변화를 가져온 최초의 아이디어가 되었다. 그리고 곧 ….냉동식품 기술등장, 이 두가지 발명품이 하나로 합쳐지면서 상업적 어업의 성격 전체가 변화되고 말았다.
암컷 대구 알집을 먹는 즐거움
마지막 두 가지 아이디어
180 최초의 전개판 트롤망이 뉴잉글랜드에 도입된 것은 1893년의 일로, 미국 어업위원회가 실험 삼아 케이프코드의 어민 몇 사람에 게 이 장비를 대여했다. 하지만 조지스뱅크에서는 이후 30년 동안이나 여전히 돛배가 주류였다. 그러다가 1918년에 이르러 강철 선체를 지닌 기둥 지지대 트롤선이 메인주 배스에서 건조되었고, 이 어 보스턴에서는 아예 트롤선 선단이 생겨나게 되었다. 동력 선박이 돛과 노를 대체하고 나자 어업은 더 이상 ‘수동적인 장비’, 즉 물고기가 오기를 기다리는 장비로 하는 일이 아니게 되었 다. 이제는 사람이 물고기를 추적할 수도 있었다. 더 크고 강력한 엔진을 언제라도 개발할 수 있었기 때문에 어업의 규모도 거의 무제 한적으로 늘어날 수 있었다.
보고에 따르면 전개판 트롤망을 장착한 증기선은 돛배보다 무려 여섯 배 이상 많은 어획고를 올렸다. 1890년대에 이르러 북해에서 는 어족의 감소 징후가 이미 나타나고 있었지만 맨 처음에 나온 반응은 어쪽의 보전이 아니었다. 북해에서 조업하던 선단은 더 멀리 나아가서 아이슬란드 근해의 더 풍부한 어장으로 진출했다.
182 클래런스 버즈아이 1886년 브루클린에서 테어나싸… 평범한 사무직으로 일하다가… 냉동식품 기술을 개발한다
185 …..1946년 버즈아이는 급속 냉동 공정을 개발함으로써 냉동식품 기술을 더 향상시켰다. …69년에 이르는 생에 동안 그는 무려 250개의 특허를 취득했다.
186 1921년 뉴잉글랜드에서는 생선 저미는 기계가 도입되었다. …냉동과 저미는 작업이 합쳐지고 나자 이때부터 저민 생선(7필레)이 주된 생산품이 되었다. 특히 ㅈ가은 대구를 저며서 만든 스크로드는 점점 더 인기를 얻었다.
188 가장 중요한 발전은 제2차 세계대전 동안에 이 세가지 혁신 - 고성능 선박, 저인망, 냉동 생선 - 이 거대한 공모선이라는 형태로 합쳐진 것이었다.
189 1950년대가 되자 세계 어디에서나 대구 어획량이 매년 늘어났따.
…1949년에 이르자 과도한 어업을 규제하는 방법을 찾기 위해 국제 북서대서양 어업위원회가 결성되었다. 하지만 기술은 더 많은 물고리를 잡는다는 목표에 계속해서 초점을 맞추었다. 공모선의 길이는 무려 450피트(약 130미터)이상으로 늘어났고 용적은 4000톤 이상 늘어났으며 ,6000마력 이상의 출력이 가능한 두 개의 디젤 엔진을 장착해서 점보제트기조차 들어갈 만큼 입구가 커다란 8트롤망을 끌어당길 수 있었다.
190 트롤망 바닥에 설치된 롤러는 머지않아 ‘바위 건너뛰기 장치’로 대체되었다. ….울퉁불퉁한 바다 밑바닥에 가깝게 대고 끌어도 그물이 손상되지 않았다. …이 그물이 휩쓸고 지나가면 해저는 텅 비어 버리고 말았다. 이 그물이 펼쳐진 넓은 영역에서 헤엄치던 물고기는 모조리 잡혔다. …그물눈의 크기가 제아무리 크더라도 실제로 빠져나갈 수 있는 물고기들은 극소수다. 그렇게 잡힌 수백만 마리에 이르는 쓸모없는 물고기들은 배 밖으로 던져 버렸는데, 대개는 죽은 상태였다.
191 이제는 수중 음파탐지기나 정찰용 비행기를 이용해 물고기 떼를 찾아낸다. 이런 기술은 원래 제2차 세계대전 당시에 적의 잠수함을 찾아내기 위해 개발된 것이었다.
아이슬란드에서 유한한 우주가 발견되다
#아이슬란드
195 아이슬란드인은 그들의 전통을 지키고 있었더. 이들은 그때(1900년대초)까지도 바이킹과 똑같은 말을 구사했으며 이는 지금도 마찬가지다 아이슬란드인은 지금까지도 성을 갖고 있지 않다
196 아이슬란드는 곧 어업 국가로 남아 있었다. 왜 이곳에서는 기술이 발전하지 않았느냐는 질문에 아이슬란드 해양연구소의 역사학자 욘 토르는 이렇게 대답 . “1500년 이후로 새로운 아이디어는 매우 천천히 나타났습니다.” 1389년 이전까지만해도 아이슬란드는 문학과 탐험과 창의적인 개념의 정부등 여러 면에서 매우 활기 넘치는 사회였다. 하지만 #1389년 헤클라산에서 화산 폭발이 일어나 온 땅이 흔들리더니 짙은 어둠이 오랫동안 깔렸고, 극심하게 추운 겨울이 지난 뒤에는 봄에 홍수가 일어났다. 그리고 전염병이 돌았다. 1397년부터는 노르웨이 대신 덴마크의 통치를 받게 되었다. 덴마크인은 통치에 무관심한 태도로 일관하여, 아이슬란드와의 무역 독점을 선언하기는 했 지만 사실상 무역을 거의 추구하지 않았다. 1532년에 영국인이 물러나자 아이슬란드는 외부 세계와의 마지막 접촉마저 잃은 셈이 되었다.
19세기 후반까지만 해도 아이슬란드의 주요 수출품은 생선이었지만 그 양은 여전히 적은 채로 남아 있었다. 18세기 말 뉴잉글랜드 와 뉴펀들랜드가 매년 2만 2000톤의 대구를 수출했던 반면 아이슬란드의 수출량은 1000톤 미만에 불과했다. 아이슬란드인 대부분은 농민이었는데 그중 상당수는 (특히 남부와 서부에서는) 2월부터 4월까지 어업으로 벌어들이는 돈이 나머지 기간 동안 농업으로 벌어들이는 돈보다 더 많았다. 이 섬에서는 나무가 단 한 그루도 자라지 않았으며, 예외라고 해 봐야 아이슬란드에서 조경업자들이 장식용으로 심은 몇 그루가 전부였다. 따라서 이 섬에는 과일도, 곡물도 없었다. 15세기에 잉글랜드인은 곡물을 가져와서 생선과 맞바꿔 갔다.
아이슬란드에서는 장대건조생선이 항상 빵의 대용품이었다. 보통은 잘게 부순 다음에 버터에 섞어서 빵에 발라 먹었다.
201 아이슬란드에서 처음 구입한 영국제 트롤선은 1905년에 도착했다. 1915년에 이르자 아이슬란드는 모두 20척의 트롤선 선단을 보유하게 되었다. 일부는 신품이고 일부는 중고였지만 대부분은 영국제였다.
205 산업혁명 이래로 영국에서는 해저 어류, 그중에서도 대구, 해덕 대구, 넙치에 대한 시장이 계속해서 넓어지고 있었다. 그 이유는 생선튀김(더 나중에는 ‘피시 앤 칩스’)이 도시 노동자 계급이 선호하는 요리가 되었기 때문이다.
205 (영국의 트롤선들은) 무선 장비를 이용해 아이슬란드 경비대의 활동에 …트롤선끼리 정보를 주고 받았다. 1928년의 이른바 ‘할머니’메세지 … “할머니 건강하심”,“할머니 여전히 건강하심”,“할머니 편찮기 시작하심” 이라는 세 가지 메세지는 아이슬란드의 해안 경비선이 항구를 떠나고 있는지 여부를 알리는 용도로 사용되었다.
205 #세계2차대전 시 영국의 트롤선이 모두 징발됨 -> 연합군은 아이슬란드가 독일에 넘어갈까 우려 해군 주둔 보호해줌 -> 아이슬란드는 영국트롤선이 없어 전세계에 대구 수출 됨 -> 무려 6년 동안이나 아이슬란드는 북유럽에서 유일무이한 어업 강대국 노릇을 할 수 있었다.
207 전쟁이 끝났을 때 아이슬란드는 완전히 다른 나라가 되어 있었다. 결코 사소하지 않았던 한 가지 변화는 #1944년 아이슬란드가 덴마크에서 완전 독립되었다는 것이다 …대구 때문에 이 나라는 불과 한 세대 만에 15세기의 식민지 사회에서 현대적인 전후의 국가로 바뀌었다.
공해를 닫아 버린 세 번의 전쟁
인생은 소금 절임 생선이다 | 할도르 락스네스
213 3마일의 영해선이 처음 수립된 것은 프랑스,독일,네덜란드,덴마크,영국이 헤이그에서 서명한 #8122년 북해 어업 협정에서였다.
214 해리 트루먼 대통령이 미국의 대륙붕에 있는 광물 자원에 대한 통제권은 자국에 있다고 선포한 것이다. ….(당시)어느 국가도 북해를 소유하고 있지 않았다. 대구와 기타 상업적 물고기는 대부분 대륙붕에서 발견되었기 때문에 이 주장이 어업에 끼치는 함의는 막대할 수밖에 없었다.
215 1958년 아이슬란드는 자국의 영해선을 12마을(약 19.3킬로미터)로 더 확대했다 (어획량이 줄어들자) … 영국은 공식 항의 서한을 보냈고… 영국의 언론이 ‘대구 전쟁the Cod Wars’이라고 부른 사건이 시작되었다
[대구 전쟁 the Cod Wars -강대국 영국과 섬나라 아이슬란드가 대구를 두고 벌인 총성 없는 전쟁](대구 전쟁 the Cod Wars -강대국 영국과 섬나라 아이슬란드가 대구를 두고 벌인 총성 없는 전쟁)
217 영국은 …레이캬비크,런던,파리 등지에서 협상을 시작했다. 5개월 뒤인 #1961년 2월 영국은 마침내 12마일 영해선을 인정했으며 아이슬란드는 더 이상의 확장에 대한 의향이 없음을 선언했다. 그로부터 10년뒤…아이슬란드는…또다시 50마일(약 80.5킬로미터)까지로 확장된다고 선포…
219 트롤망 연결선 절단기(아이슬란드에서 개발)의 효율성이 증명된 이후 제2차 대구 전쟁은 공해상에서의 ‘범퍼카’ 게임이나 다름없는 상태로 변해 버렸다.
221 냉전의 와중에 같은 편끼리 벌이는 갈등에 대해 우려해 마지않았던 NATO가 급기야 영국에 물러나라는 압력을 가했다. 결국 영국은 50마일의 영해선을 인정하는 대신 크기가 더 작은 영국 트롤선에 대해서는 제한적인 조업 허가를 얻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221 #1973년 UN 해저위원회에서는 34개국(대부분이 라틴아메리카,아프리카,아시아였다)이 200마일(약 322킬로미터) 영해선이라는 개념을 승인했다.
222 10년 전만 해도(1960년대) 아이슬란드의 생물학자들은 연령이 18년쯤인 대구가 흔하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1974년에 이르자 연령이 12년 이상인 대구를 찾아보기가 드물어졌다.
224 욘손의 설명에 따르면 런던에서의 협상 과정은 “열띤 토론이 벌 어졌지만 어디까지나 신사적인 수준에서” 그랬다. “하지만 영국인 은 지는 전투를 벌이고 있었다. 나는 그들이 얼마나 근시안적인지를 알고 깜짝 놀랐다. 전 세계가 200마일 영해선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나는 영국 장관에게 말했다. 당신들도 앞으로 몇 년 안에 200마일 영해선으로 나아가게 될 겁니다.
225 1976년 유럽공동체는 영국의 요구를 공개적으로 거부(100일)하고 200마일 영해를 선언함으로써, 당시 아이슬란드와 협상 중이었던 영국에 망신을 주었다.
227 아이슬란드의 200마일 영해가 전 세계의 승인을 얻은 이후로 대부분의 국가는 저마다 200마일영해를 선언하고 나섰다
229 대구 어족이 줄어드는 것을 지켜보면서, 아이슬란드인은 자기들이 중세로 돌아가고 있다고 생각했다.
229 200마일 영해선이 선언되기 전까지만 해도 토마스 토르발드손은 남획이란 것에 대해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단지 어떻게하면 물고기를 더 많이 잡을지 하는 생각뿐이었다. 하지만 이제 그는 자신의 조업 용량에 제한을 두어야만 했다. “물고기를 더 적게 잡자는 생각을 머리로 받아들이기는 매우 어려웠습니다.”
3부 마지막 사냥꾼들
그랜드뱅크스를 위한 진혼가
236 뉴펀들랜드, 1948년 국민투포로 캐나다 주로 편입되는걸 선택했다.
246 1992년 1차, 1994년 2차에 걸처 캐나다에서..대서양대구 조업이 전면 중단되었고, 나머지 해저 어류에 대해서도 엄격한 조업 할당량이 부과되었다. 캐나다산 대구는 비록 생물학적으로는 멸종되지 않았지만 상업적으로는 이미 멸종된 상태였다. 이젠 워낙 희귀하기 때문에 더 이상은 상업적으로 유용하다고 간주될 수 없었던 것이다. 캐벗의 선원들이 바구니로 대구를 퍼 올렸다는 보고가 있었던 때로부터 500주년을 겨우 3년 앞둔 상황에서, 이 모두가 끝나버렸다. 어민이 그 많았던 물고기를 모두 잡아 버린 것이다.
자연의 회복력에서의 위험 수위
254 캐나다에서 개체군이 회복되기까지는 최소한 15년쯤이 필요할 것이었다. 건강한 개체군이 생겨나려면 산란이 가능한 커다란 물고기가 필요한데, 북부 어족의 경우에는 그런 어족이 최소한 15년쯤 자라야 했기 때문이다.
258 연어는 양식이 까다롭다, …연어의 경우에는 분홍색 빛깔을 내기 위해 인공 색소도 먹이는데, 원래 자연산 연어는 갑각류를 먹어서 그런 색깔이 나는 것이다. 미식가들의 입장에서 보면 자연산 연어와 양식 연어의 차이는 멧돼지 옆구리살과 일반 돼지 갈비의 차이만큼이나 크다
261 남획은 점점 커져가는 전 지구적 문제다. UN 식량농업기구가 추적하는 물고기 유형의 약 60퍼센트는 완전히 이용되거나 과도하게 이용되거나 심지어 고갈된 것으로 분류된다.
262 유럽인은 오랜 세우러 대서양에서 과도할 정도로 조업을 하다가 이제는 태평양으로 자리를 옮겼다. 이곳에는 일본과 러시아, 미국, 한국의 어업 산단이 있을 뿐만 아니라 국제 협력의 역사라고는 전혀없는 중국조차도 자국의 어업 역량을 눈에 띄게 확장시키고 있다.
262 태평양대구는 #1867년에 미국이 러시아에서 알래스카를 매입한 한 가지 이유이기도 했다.
263 해양의 생태는 복잡하고도 긴밀하게 상호 연관되어 있다. 북해 에서 커다란 공모선이 까나리와 다른 작은 물고기들을 남획한 결과(덴마크에서는 이런 물고기를 갈아서 만든 어분을 난방용 연료로 사용했다) 대구뿐만 아니라 바닷새조차도 굶주리게 되었다. 1986년에는 물범 때가 북해의 남부 여러 곳에 자리 잡고 노르웨이 근해에서 해안 서식 어종을 잡아먹었는데, 이는 열빙어의 남획으로 먹을 것이 없어졌기 때문이었다. 그러자 어민은 북해의 어업을 지켜야 한다는 명분 아래 물범 사냥을 요구했다. 1995년 노르웨이와 캐나다는 물범 사냥 금지 조치를 취소했다. 물범들이 개체수가 늘어나면서 대구를 먹기 시작했던 것이다.
265 생물 종들의 상호 의존성을 고려할 때 근본적인 문제는 과연 대구가 돌아올 때까지 15년이라는 기간을 다른 생물 종들이(물범뿐만아니라 식물성 프랑크톤, 동물성 플랑크톤, 청어, 바닷새, 심지어 고래까지도) 기다릴 수 있는지 여부다. 어쩌면 자연이 정치인보다 더 참을성이 없을 가능성도 있다. “무엇이든지 성공할 놈이 성공할 겁니다. 반드시 예전과 똑같은 결과가 나오리라는 보장은 없어요”
266 북극대구. 북극대구는 길이가 8인치(약 20센티미터)쯤이고 …북극대구가 대서양대구의 알과 유생을 먹어치운다는 것이다. 대구가 사라진 즈음에 와서 그 서식 범위를 더 남쪽으로 넓혀 뉴펀들랜드와 래브라도까지 내려온 것으로 보인다.
268 어떤 조치를 취하든지 간에 뉴펀들랜드 근해에서 대구 어족의 회복을 가로막는 가장 큰 장애물 하나는 현실을 애써 외면하는 사람들의 병적인 집단 부정이다. 뉴펀들랜드인은 그들이 자연의 선물을 전멸시켰다는 사실을 한사코 믿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에스파냐 선단 막아서기
275 영국 정부에 따르면 영국의 해역에 서식하는 어종의 70퍼센트는 남획되고 있다. 북해에서는 어획량이 1981년에 29만 7000미터톤에서 1991년에 8만 6000미터톤으로 감소했다.
277 (에스파냐)가 사실은 어업 분야에서 가장 큰 시장이라는 사실이 언급된느 경우는 드물었다. 에스파냐는 인구에 비해 1인당 생선 소비량이 이례적으로 높았다. 그래서 여러 세기 동안 대서양의 어민은(과거 뉴잉글랜드의 ‘나그네들’부터 비교적 최근에 독립한 아이슬란드인까지도 ) 에스파냐 시장 덕분에 생계를 유지해 왔다.
278 200마일 영해선이 적용되면서 바스크인들은 대부분의 대구 어장에 접근할 수 없게 되었다.
279 포르투갈레테는 ‘범선의 항구’라는 뜻이다
ℹ️ _포르투갈(Portugal)이라는 이름은 제2의 도시인 포르투(Porto)의 라틴어 이름 ‘포르투스 칼레(Portus Cale)‘에서 유하며, 이는 ‘따뜻한 항구’를 의미합니다. ‘포르투스’(Portus)는 ‘항구’를, ‘칼레’(Cale)는 로마 시대 이 지역의 이름이거나 ‘따뜻하다’는 뜻을 가진 형용사에서 유래했을 것으로 추정되며, 이 지역의 항구가 중요한 역할을 했음을 나타냅니다. _
280 (영국 콘월 지역) “여기에든 다른 게 아무것도 없습니다. 물고기를 잡지 못하면 사람들은 할 일이 아무것도 없어요. 하지만 생계를 유지할 만큼 계속 물고리를 잡다 보면 결국 물고기가 없어지겠지요”
281 후퍼(어부)의 말에 따르면 그가 처음 바다에 나간 1955년에만 해도 “전쟁 때문에 조업이 거의 이루어지지 않아 물고기가 정말 득실득실"했었다. 하지만 이제 근느 예전에 소유했던 것과 같은 40피트(약 12미터)짜리 보트로는 생계를 유지할 수 없는 형편이다.
캐나다 선단 막아서기
298 글로스터에서는 남획으로 인한 피해는 단지 일시적이지만 규제로 인한 피해는 더 영구적으로 어촌에 피해를 입힌다는 믿음이 팽배했다. 사람들은 머지않아 대구가 돌아올 것이라고, 그리고 어민은 사라지고 어선은 고철 덩어리가 될 것이라고 믿었다. ….자기들이 망하고 나면 역사적으로 경쟁자였던 캐나다인들이 아래로 내려와서 물고기를 모두 잡아가고야 말리라는 것이었다(라고 생각하고 있다.)
299 200마일 영해선이 수립되었을 때 뉴잉글랜드인은 조지스뱅크에서 노바스코샤인을 몰아내기 위해 싸웠고, 노바스코샤인은 반대로 그랜드뱅크에서 뉴잉글랜드인을 몰아내기 위해 싸웠다. 캐나다인과의 경쟁에 대한 두려움은 이미 글로스터 문화의 일부가 되었다. 이는 에스파냐인에 대한 두려움이 뉼린의 벽돌담 안에 자리 잡은 것과도 유사했다.
305 선진국 가운데 어업이 자국 경제에 중대한 기여를 할 수 있다고 기대하는 나라는 오로지 아이슬란드뿐이며, 그조차도 어민의 수를 줄이려고 노력 중이다.
306 한때 사람들이 고래를 사냥해 한재산 마련했던 이 울퉁불퉁한 해안선은 이제 관광 철이 되면 고래 관찰의 중심지로 떠들썩하다. 이 고래 관찰용 선박의 선장들은 대개 전직 어민들이다.
306 고래를 사냥하는 사회에서 살아가는 것과, 고래를 구경하는 사회에서 살아가는 것에는 커다란 간극이 있다. 자연은 오락과 교육을 위한 귀중한 예시로 축소되는 중이며, 이는 사냥보다 훨씬 덜 자연 스러워 보인다. 그렇다면 우리는 공원을 제외하고는 자연이 전혀 남지 않은 세계를 향해 나아가는 것일까? 고래는 포유류이며, 포유류는 한 번에 100만 개의 알을 낳지는 않는다. 그래서 우리는 상업적 사냥을 포기한 대신 가축용 포유류를 길러 고기를 조달하며, 야생의 포유류는 최대한 잘 보전하려고 한다. 물론 포유류를 죽여 없애는 것보다는 물고기를 죽여 없애는 쪽이 더 어렵다. 하지만 1000년에 걸친 대서양대구 사냥 이후에 우리는 그런 일이 실제로 가능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부록) 어느 요리사의 이야기: 6세기 동안의 다양한 대구 조리법
어떤 사람은 그것(대구)이야말로 (빵을 제외하고는) 우리가 일단 그 맛에 익숙해지고 나면 결코 질리지 않는 식품이고, 그것 없이는 결코 살아갈 수 없는 식품이며, 그 어떤 진미와도 바꿀 수 없는 식품이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대구를 씻는 올바른 방법
월든 호수에 전해진 비보
자투리 부위
차우더
서인도 제도산 가공품의 디아스포라
프랑스의 뛰어난 위장술
완자
브랑다드
바스크어로 말하는 대구
마지막으로 잡힌 큰 대구의 조리법
7. 🤔 Rambl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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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메리카 대륙을 콜럼버스가 발견하기 수십년전 이미 어부들은 그 대륙을 알고 있었다
- 대구어장이 노출되는 걸 꺼려 공개되지 않았다.
- 바이킹들이 캐나다 뉴펀들랜드에 도착하기도 했고 - 흔적이 발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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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세기까지만해도, 뉴펀들랜드(케나다)는 중국으로 이해 되고 있었다
- 유럽에서 서쪽으로 가면 중국-아시아-가 나온다고 알고 있었다
- 유럽에서 서쪽으로 아시아 중간에 있는 아메리카 대륙이 발견되었지만 , 이것을 유럽인들은 아시아로 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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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에서 겨울까지 대구를 잡기 가능했던 뉴잉글랜드, 메사추세츠, 케이프 코드 에 ‘나그네들’ 청교도인들이 몰려들었다
- 통 제조업자, 대장장이,제과업자, 선박 제조업자등이 몰려들고, 가족들도 이주하기 시작 110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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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와 영국이 뉴잉글랜드 , 카리브해등의 땅을 놓고 전쟁을 한다
- 프랑스는 져서 땅을 포기하고, 영국은 막대한 전쟁 자금으로 부채가 많아졌다. 그래서 세금을 부과했다
- 미국은 전쟁에서 영국편에서 싸워 전쟁 경험을 쌓아고, 대구로 돈도 벌었다. 영국의 세금등 영국과 전쟁의 불씨 -독립전쟁-을 키워나간다 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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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 경기가 않좋아지자 - 프랑스혁명,나폴레옹전쟁등으로 - 어업에 보조금을 주고 - 주낙등으로 대량으로 대구잡이를 시작한다.
- 경쟁적으로 영국도 보조금을 주고, 점점 대구를 대량으로 포획하기 시작한다.
- 수십년후 캐나다도 도입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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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자망을 이용한 포획이 시도된다 170
- 그물에 걸린 물고기는 빠져나가지 못하고,
- 배에서 놓친그물은 혼자 바다를 떠돌며 물고기가 걸리면 가라앉아 다른 물고기의 먹이가 되고
- 가벼워진 그물은 다시 떠올라 다른 고기가 걸리고, 다시 가라앉고, 혼자 바다를 떠돌며 반복된다.
- 그믈은 나일론에서 단섬유를 사용으로 진화 했는데, 더 단단하다
- 증기선이 개발되고 냉동기술이 개발되면서 상업 어업에 혁신이 일어나고 -> 대구는 숫자가 급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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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슬란드의 고민 201p
- 전통적인 방법으로 대구잡이를 하던섬, 어족은 항상 풍부했다
- 그런데, 영국등에서 강철로 된 트롤선(저인망)이 오더니 어족을 싹쓰리 해가기 시작한다
- 그들은 어떻게 대응해야했을까? 어떻게 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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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외국인 접근을 차단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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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철로 된 배를 구해서 우리 앞바다에서 우리가 잡자
- 결국 2안으로 선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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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등 해군유지에 비용이 많이 들기 때문에
- 트롤선을 평소 어민들이 고기잡이로 사용하게 하고
- 전시에 포를 설치해서 전쟁에 사용했다. 해군으로 변신
- 실제 1914년 1차대전에 영국이 이 방식을 사용했다. 203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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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과 아이슬란드는 영해권은 놓구 ‘대구 전쟁’을 3차례한다
- 배들끼르 들이받고 난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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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기이후로 영해권은 200마일(322킬로미터)로 정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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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대서양,,,아이러니하게 인간이 전쟁중일때 생선은 바다에 ‘득실득실’해졌다. 2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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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고기 잡이를 금지하면 , 찬란하던 시절의 어부들은 먹을게 없어진다
- 물고기 잡이를 허용하면 탐욕으로 물고기 씨를 말린다
- 어쩌란 말인가.
8. 🔗 References
- 오늘의 경제소사- 대구(大口) 모라토리엄
- 캐나다, 1992년 대구 어획금지: https://www.sedaily.com/NewsView/1Z54VPUSL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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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난 해디(Finnan Haddie)는 스코틀랜드의 전통적인 냉훈(冷燻) 해덕대구(Haddock) 요리 또는 재료를 의미합니다. 스코틀랜드의 대표적인 해산물 요리 중 하나로, 18세기 애버딘(Aberdeen) 근교의 핀던(Findon)이라는 어촌 마을에서 유래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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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인도 제도는 카리브해와 대서양에 걸쳐 있는 섬들을 지칭하며, 1492년 크리스토퍼 콜럼버스가 인도로 오인한 데서 유래되었다. 이 지역은 다양한 문화가 공존했으며, 16세기 후반부터 유럽 열강의 식민 지배를 받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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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 만든 배를 처음으로 물에 띄웠다는 뜻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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럼주(Rum)는 사탕수수 즙 또는 당밀을 발효 및 증류하여 만든 증류주로, ‘해적의 술’로 불리기도 하며 카리브해 지역이 원산지지만 사탕수수가 재배되는 열대 지방에서 널리 생산됩니다. 오크통 숙성 정도에 따라 투명한 라이트 럼부터 진한 색의 다크 럼까지 다양하며, 칵테일의 재료로도, 스트레이트로도 즐길 수 있는 달콤하고 풍부한 향미가 특징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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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랜드뱅크스(Grand Banks)는 뉴펀들랜드섬 남동쪽에 발달한 대륙붕이다. 차가운 래브라도 해류가 따뜻한 멕시코 만류와 만나면서 풍족한 어장을 이룬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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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낙(Junak)은 긴 주 낚싯줄에 여러 개의 짧은 줄(아릿줄)과 바늘, 미끼를 달아 물속에 드리워 물고기나 낙지 등을 잡는 전통적인 어업 방식이자 그 도구를 말하며, 한 번에 많은 양을 잡을 수 있고 노동력이 덜 드는 장점이 있어 붕장어, 낙지 등을 잡는 데 주로 사용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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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렛(Fillet)‘은 주로 뼈를 발라낸 생선 살코기 의: 생선의 등뼈와 평행하게 살을 저며 뼈, 머리, 내장 등을 제거하고 살만 분리한 조각. 특징: 손질이 간편해 가정이나 요리에서 편리하게 사용되며, 연어, 고등어, 광어 등 다양한 생선에 적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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底引網 / trawl(트롤) 흔히들 쌍끌이, 깡끌이라고 부르는 그물 혹은 그것을 사용한 어업방식을 말한다. 이를 사용하는 어선은 저인망 어선 또는 트롤선이라고 한다.빅토리아 시대때부터 널리 사용된 어업 방식으로 획기적인 어획량 증가를 가져왔으나 영국 해협의 대서양 대구가 씨가 말라감에 따라 무언가 문제가 있는 방식이라는 점을 깨닫기 시작했지만, 이때까지는 다른 어장으로 쳐들어가면 그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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