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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규식과 그의 시대 1

☝️ 아버지의 유배 버림받듯 방치된 본갑이, 언두우드선교사에 구원과 그의 속박, 조국의 멸망과 독립의 역사에 김규식의 삶이 있다.

📚 김규식과 그의 시대 1

[!INFO] 책 정보

  • 저자: 저자/정병준
  • 번역:
  • 출판사: 출판사/돌베개
  • 발행일: 2025-08-15
  • origin_title: -
  • 나의 평점: 9
  • 완독일: 2026-02-19

1. 🖐️ Before Reading (읽기 전)

1.1 동기와 기대

2. 📜 Synopsis (LLM)

Summery

이 책은 한국 현대사 연구자 정병준 교수의 역작으로, 독립운동가 김규식의 알려지지 않았던 삶과 활동을 새로운 자료들을 통해 깊이 있게 조명합니다. 1권에서는 언더우드 고아원의 고아 소년 ‘존’으로 시작하여 미국 유학, 국내에서의 계몽 활동, 그리고 1913년 중국 망명 후 독립운동에 투신하기까지의 초기 생애를 다루며, 특히 1919년 파리강화회의에서의 1인 외교 등 그의 독특하고 헌신적인 행보가 한국 근현대사와 독립운동사에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를 탐구합니다. 단순히 위인전이 아닌, 인간 김규식의 진정성과 그가 겪었던 시대의 비극적 서사를 복원하여 미완의 해방이 지닌 현재적 의미를 되짚어보고자 합니다.

Keyword

#김규식, #독립운동, #정병준, #한국근현대사, #파리강화회의, #언더우드, #중국망명, #인물평전, #일제시대

Author

저자(글): 정병준

정보: 이화여자대학교 사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며, 서울대학교 국사학과에서 한국현대사를 전공했다. 『역사와 현실』 편집위원장, 이화사학연구소장, 한국문화연구원장 등을 역임했다. 한국현대사 자료 발굴에 힘쓰며 여운형, 이승만, 김구, 김규식 등 한국현대사 인물들을 폭넓게 연구해왔다. 주요 저서로는 『몽양 여운형 평전』, 『우남 이승만 연구』, 『한국전쟁』 등이 있으며, 한국출판문화상 학술 부문 저술상을 두 차례 수상했다.

3. 🔆 Insight & Deep Dive

3.1 깨달은 점 (Aha Moment)

3.2 비판적 사고 (Critical Thinking)

3.3 내 삶에 적용하기 (Action Item)

4. 🏆 Top Highlights

📌 첫 번째 문장 15~16p

김규식은 한국 근대의 모더니티를 상징하는 대표적인 인물이자, 인텔리 지식인이며 학자적 정치인, 이성의 한국인 등으로 회자되었다. 미국 유학생 출신이며, 유창한 영어를 구사했고, 어학의 천재였으며, 파리강화회의 특사이자, 구미위원부 위원장이었으며, 임시정부 부주석을 지낸 화려한 경력의 소유자로 소개되었다. 그러나, 그의 유년은 고아 신세로 언더우드 선교사의 양자로 양육되었으며, 해방 후 그의 정치 공간은 한국현대사의 경로를 상징하는 중도파의 비극과 직결되었다. 1964년 그와 정치적 합을 맞추어 좌우합작운동을 펼쳤던 #여운형 제2차 미소공동위원회가 결렬되기 직전인 #1947년 7월 암살되었고, 다음 해 그와 함께 남북협상에 올라 통일독립정부를 희망했던 #김구 #1949년 6월 한국군 포병 소위에 의해 암살되었다. 해방된 한국에서 한국인의 손에 의해 비극과 비극이 중첩되었고, 살아남은 병약한 #김규식 한국전쟁 중 북한에 납치되어 #1950년 12월 평북 만포진에서 생을 마감했다.

📌 두 번째 문장

유년의 사고무친이 노년의 비극적 최후로 연결되며 김규식 개인의 삶에 대한 비극적 서사를 완성했다면, 한말 조선왕조의 몰락과 한국전쟁의 참극은 그의 삶을 관통하는 참담한 국가적 시대상을 연출했다.

📌 세 번째 문장

김규식은 로녹대학 재학 시절 주미한국공사관에서 일했으며, 또한 1900년 의화군의 도미 유학을 로녹대학에서 보살폈으며, 그의 미국 각지 여행에 통역이자 비서로 동행했다. 이런 공적 관계와 사적 관계가 교직되어 김규식의 로녹대학 입학이 결정된 것이다. 이러한 전후 사정과 인간관계는 향후 1910년대 그가 위치하게 될 공적 세계와 사적 세계의 공간이 기독교, 근왕주의, 계몽•문화운동, 도미 유학생 등에 위치할 것임을 보여 준다.

📌 네 번째 문장

윤병구·이승만 일행은 고종 측근이던 민영환·한규설이 파견한 사실상 고종의 밀사였지만 오이스터베이에서 미국 기자들과 만났을 때 고종과 대신들을 비난하며, 자신들은 고종이나 대한제국의 밀사가 아니라고 공표하며, 심지어 자신들은 새로운 민중조직인 일진회의 대표라고 주장하기까지했다. 윤병구•이승만이 루스벨트와 잠깐 면담할 수 있었던 것은 윤병구가 하와이를 방문한 루스벨트의 최측근인 육군장관 태프트를 만나 하와이 7천 한인 대표로 선물을 건네고 소개장을 받았기 때문이다. 여기에 감리교 감독 와드만의 도움이 있었다. 즉, 이승만의 소위 루스벨트 ‘면담외교’는 사실 하와이 한인대표 윤병구가 태프트의 소개장을 얻어 루스벨트를 면담 할 수 있었던 것이 실체였다. 일본 측은 이승만이 고종의 밀사라고 추정하 고 있었고, 이승만은 사실상 민영환• 한규설을 통해 파견된 고종의 밀사였지만, 이승만은 자신을 사형시키려한 고종에 대한 반감이 심했다. 또한 하와이 7천 한인으로는 대표성이 부족하다고 생각해 당시 민중조직 •민회로 주목받던 일진회 대표라 자처하는 우극을 벌인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가적 위기 속에서 어떤 외교적 노력도 가시화되지 않던 상황에서 절망과 나락을 경험하던 한국인들에게 이승만•윤병구의 루스벨트 면담은 대성공으로 홍보되었고, 심지어 주미공사관 김윤정 대리 공사가 이들이 요구한 정식 외교 공문을 미 국무부에 보내지 않아 러일강화회담 참가가 무산되었다는 과장 보도가 국내 언론에 유포되면서 이승만 의 명성이 높아졌다.

📌 다섯 번째 문장

김규식과 여운형은 시대의 불꽃이자 빛나는 물방울이었다. 바늘구멍만 한 틈으로 새어 나온느 빛에 희망과 기대를 걸고 자신과 민족의 미래를 개척할 수 있을지 모른다는 두근거리는 마음을 가졌다. …이들은 작고 빛나는 물방울이었다. 한 개인에 불과한 이슬 같은 물방울들이 가냘픈 표면장력으로 다른 물방울들을 끌어당겼다. …한국인들의 독립정신, 독립염원, 독립열을 담은 3.1운동이 시작되었다. 이는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고, 누구도 막을 수 없는 민족주의 에너지의 폭팔이었다. 김규식과 여운형, 신한청년당의 동지들은 역사의 주인공이 되었고 3.1운동은 한국근현대사의 분기점이 되었다. 역사는 자기 소명에 최선을 다한 이들에게 그에 걸맞는 역사적 이름과 의미를 부여했다.

5. 📌 Key Concepts

5.1 핵심 키워드 정리

__index_키워드

언더우드

[언더우드 Horace G. Underwood - 한국명 원두우](언더우드 Horace G. Underwood - 한국명 원두우)

독립운동 단체

[일제강점기 - 조선독립운동 거점별 현황표](일제강점기 - 조선독립운동 거점별 현황표)

![Pasted image 20260220113801.png](Pasted image 20260220113801.png)

![일제강점기 - 조선독립운동 거점별 현황표#🗺️ 지역별 독립운동 단체 및 활동 변천사 (19101950)](일제강점기 - 조선독립운동 거점별 현황표#🗺️ 지역별 독립운동 단체 및 활동 변천사 (19101950))



6. 🖍️ Book Marks

Organize Table

저자의 글

14 한국현대사의 경로가 증명하듯이 김규식이라는 인물은 현대 한국사회에서 주요한 학문적 연구주제가 되기 어려웠다. 김규식은 성공과 실패가 분명치 않은 길을 걸어간 사람인 데다 정치적 추종자를 거느리지 않은 외로운 존재였고, 납북되어 사망함으로써 정치적 유산을 남기지 못했다.

…좌우합작, 남북협상이라는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중도파의 노선은 분단과 한국전쟁 이후 한국 사회에서 설 자리가 없었다.

15 강하고 카리스마 있는 지도자, 군중을 호령하고 이끌고 지배하는 영도자, 생사를 불문하고 권력을 추구하는 강한 독재적 지도자상에 익숙해진 한국 사회가 선뜻 이해하고 수용하기 어려웠다. 이분법적 세계관에 익숙한 현대 한국 사회가 흑백, 좌우, 미소, 남북이 분명하지 않은 인물을 이해하기는 쉽지 않았다.

16 민족주의를 반역과 퇴행의 담론으로 치부하는 요즘 세태에서 이해하기 어려울 정도로 김규식의 시대는 국가와 민족이 유일한 의제이자 중심이었으며, 통일과 독립이 지상과제였던 시기였다. 이런 시대적 과제 속에서 그의 생애는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선택을 향해 부단하게 움직이는 것으로 일관되었다. 끊임없는 떨림으로 국가와 민족의 나침반이 되고자 했던 것이다.

17 한국 근현대사가 걸어온 극적인 전환과 우여곡절 때문에, 이 시기의 역사를 성공과 실패, 승리와 패배, 선과 악의 단순한 이분법으로 이해하려는 경향이 만연해 있다. 그러나 역사를 승리한 자의 기록으로, 영웅들의 신비한 행적으로, 신의 섭리나 막강한 외부세력의 결정으로 인식할 경우, 우리는 역사가 전하는 진정한 교훈에 눈을 감게 될 것이다.

서장 스미소니언박물관 사진이 전하는 140년 전의 김규식 이야기

1 양반집 도련님, 언더우드 목사의 “존”(John)

34 [호머 헐버트 Homer B. Hulbert](호머 헐버트 Homer B. Hulbert) 를 뜻한다. 헐버트는 1919년 파리강화회의 당시 한국대표였던 김규식의 외교 활동을 도운 바 있는데, 1886년 한국에 처음 들어왔을 때 고아 소년 존의 사진을 통해 김규식과 처음 만났던 것이다. 1886년 언더우드 고아원의 존이 1919년 파리강화회의 한국 대표가 되고, 두 사람이 파리에서 재회하게 될 줄은 누구도 짐작조차 하지 못했을 것이다. 두 사람도 자신들이 1886년 사진을 통해 간접적으로 만났던 인연을 전혀 기억하지 못했을 것이다. 어린 김규식의 존재론적 위치는 가혹한 것이었지만, 때로는 우연을 가장한 만남을 통해 그의 운명을 만들어 가고 있었다. 헐버트는 대한제국이 몰락하는 순간, 그 운명이 결정되는 중요 국제회의에 반드시 출현하는 대표적 친한파, 친고종 인물이었다. 헐버트는 고종의 밀사로 러일전쟁 후 1905년 포츠머스강화회담, 1907년 헤이그만국평화회의에 밀사로 파견되었고, 1919년 파리강화회의 당시에는 미국 YMCA 업무차 파리에 왔다가 한국 대표 김규식을 만나 그의 일을 돕기도 했다. 헐 버트는 태평양전쟁기까지 미국에서 진행되던 한국 독립운동을 물심양면으로 적극 후원했다. 1948년 한국정부가 수립되자 꿈에도 그리던 마음의 고향을 찾았고, 1949년 한국에서 사망했다. 그는 양화진 외국인묘역에 묻혀 자신의 역사와 한국 사랑을 증명하고 있다. 헐버트는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 중반까지 한국을 응원한 대표적인 친한파 선교사이자 독립운동의 후원자였다.

2 선교팸플릿의 한국 소년(Korean Boy)

40 언더우드는 고아가 된 어린 김규식에게 생명과 생존의 구원자였고, 사실상의 양부였으며, 당시 누구에게도 제공되지 않던 미국 유학의 기회를 제공한 은인임이 분명했다. 그러나 이 사진이 직관적으로 보여주는 바, 김규식은 존재론적으로 언더우드의 영향력, 결정, 속박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상황이었다. 언더우드와의 관계는 두 사람이 처음 인연을 맺은 1886년부터 김규식이 중국으로 망명하던 1913년까지 김규식의 삶을 규정하는 중요한 요인이 되었다. 언더우드는 김규식의 삶을 지배하는 규정력이자 결정자의 위치에 있었던 것이다.

3 일본 엽서의 동자(童子)

4 스미소니언아카이브의 헐버트컬렉션

53 어린 시절 김규식에게는 선택의 자유가 존재하지 않았다. 친척들의 버림을 받아 가족의 따뜻함을 느낄 수 없었으며, 언더우드 고아원학교에서 생존 방법과 영어를 배워 삶을 개척해야 했다. 김규식은 정서적으로, 정신적으로 불안정하고 위태로운 유년기를 경험해야 했다. 풍운의 한말이라는 시대적 상황, 정치경제적 대폭풍우가 몰아치던 환경, 신분제와 가부장적 체제의 압력이 극복할 수 없는 벽이던 시대 속에서 어린 고아가 정상적으로 살아남는다는 것은 거의 기적에 가까운 일이었다. 이런 출발점에 서 있는 김규식의 인생은 개인적으로도 형극의 길이었지만, 그와 함께할 시대와 국가의 운명도 소용돌이치기는 마찬가지였다. 그 속에서 김규식은 스스로의 운명을 개척하고 시험해야 했다.

1장 김규식의 부친 김용원의 생애와 김규식의 언더우드 고아원 시절

1 버려진 병약한 어린아이 “본갑이”

미국 선교사로 조선에 건너왔던 언더우드 - 한국명 원두우-의 부인 릴리어스 언더우드의 회고에서 시작된다. …언더우드와 결혼한 릴리어스는 1905년 뉴욕에서 출간된 회고록에서 조선 생활의 여러 특별한 경험을 외국인의 시선에서 설명했다. … 릴리어스는 채험담에서, 어리고 병약한 채 가족으로부터 버림받아 사실상 고아가 된 한 어린아이 이야기에 한 장을 할애했다. 고아의 이름은 본갑이(Pon Gabe-봉갑이 였을듯)였고, 때는 1886년이었다. …본갑이는 미국식 나이로 네 살을 넘지 않았다. 놀랍게도 그를 언더우드 고아원에 데려온 사람은 “그의 삼촌” 이었다.

그는 버림받은 어린 비쩍 마른 아이를 발견했는데, 마루의 멍석 위에 누워서 너무 쇠약해 자기 머리도 들지 못한 채로 음식을 찾아 힘없이 가여운 목소리로 울부짖고 있었다. 그는 연유깡통을 보자, 이빨로 물어뜯어 열러고 하면서 벽의 벽지를 찢어서 먹으려고 하고 있었다. 삼촌은 골칫거리를 껴안고 자기가 부양비용을 들이기보다는 어린애를 굶겨 죽이려고 의도했을 개연성이 상당했다.

…모든 사람이 병세를 절망적인 것으로 생각해 병중의 아이를 방 한구석에 뉘어 놓고 병풍을 둘러 놓은 상태였다. …언더우드가 아직 숨이 붙어 있는 아이를 버려둘 수는 없어 데려가겠다고 하자 가족들은 흔쾌히 승낙했다.

5시 30분에 일어나 (…) 그렇게 많은 일을 한 뒤라 아침 식사가 다소 늦은 감이 있지만, 대부분의 한국인들은 10시부터 11시 사이에 아침을 먹고, 특히 이 소년들의 출신 배경인 가난한 계층들은 하루에 두끼만 먹습니다.

61 영특했던 어린 본갑이는 원어민처럼 영어를 구사하게 되었고, 릴리어스의 통역으로 조선 여성들에게 전도를 하는 데 큰 도움을 주게 되었다.

61 유년의 사고무친이 노년의 비극적 최후로 연결되며 김규식 개인의 삶에 대한 비극적 서사를 완성했다면, 한말 조선왕조의 몰락과 한국전쟁의 참극은 그의 삶을 관통하는 참담한 국가적 시대상을 연출했다.

65 김규식의 부친 김지성은 청풍 김씨의 후예로 본디 강원도 홍천에서 출생하였으나, 경상도 동래부의 관리로 근무하였다. 그런데 한국정부에서 일본과 관계를 맺고 있는 것에 불만을 품고 국왕에게 상소를 올린 것이 화가 되어 귀양을 가게 되었다. 이 때문에 집안은 몰락하고 또 부인까지 병사하게 되어 어린 규식은 숙부 댁에 맡겨졌다. 그러나 숙부 집은 넉넉한 편이 못 되어 숙부는 그를 언더우드가 설립한 고아원에 맡기기로 하였다. 언더우드는 4세밖에 안 된 규식을 보자 이런 어린 아이를 키울 수 없다 하고 받지 않음으로써 숙부 밑에서 기숙하게 되었다.

2 김용원 혹은 김지성의 가계

1904년 김규식이 미국 유학을 마치고 귀국할 당시 언론은 김규식이 김익승의 조카라고 밝힌 바 있다. <학교종이 땡땡땡>의 지은이로 유명한 김메리는 김익승의 셋째 딸이자 김규식의 사촌동생이다.

3 도화서 화원 김용원의 일본 수신사 동행

4 “선략장군” 김용원의 일본 유학

(1) 경상좌도 우후ㆍ유리제조소 설립(1880)

김용원(김규식의 부)는 수신사에서 돌아온 이래 일본 공관에 출입하며 일본공사를 비롯한 일본인들과 교류했다. <도쿄 요코하마 마이니치신문>에 따르면 김용원은 1897년 주한일본공사 하나부사 요시모토의 권유로 스스로 사진술 #사진 배워 그것을 조선에 널리 알린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그는 사진술, 유리제조술, 금은분석술 등 근대적 기술을 배우려고 시도했다.

84 김용원은 ‘개화의 효시,’ 1879년 사진술을 배운 사람, 1880년 일본인을 고용해 부산진에 유리제조소를 설치하려 시도한 인물, 서양 번역서를 좋아해 일본영사가 일본어로 번역한 백과사전을 받은 인물, 재능 있는 소년을 뽑아 일본학 수학을 시킬 계획이 있다는 등으로 묘사되 었다

앞의 『아사노신문』의 기사와 마찬가지로, 김용원이 일본인으로부터 사진술을 배웠으며, 부산진에 유리제조소를 설치하려 했다는 점을 공통적 으로 발견할 수 있다. 당시 사진 촬영에는 유리원판이 사용되었고, 여기에 감광제를 바르고 은 용액에 담갔다가 촬영하는 기법을 사용했기 때문에, 사진촬영술은 유리 제작, 금은 분석 등 화학기술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었다.

(2) 조사시찰단ㆍ일본 유학(1881~1883)

5 대러 외교 밀사 김용원의 최후

(1) 귀국 후 활동: 촬영국ㆍ순화국 개설(1883)

(2) 대러 외교 밀사행(1884~1885)

99 수신사행과 조사시찰단, 일본 유학을 거친 김용원은 당대 조선에서 손에 꼽을 수 있는 개화인사로 변신했다. 그런데 개화인사 김용원은 일본을 배경으로 삼아 [갑신정변 (甲申政變) 1884년](갑신정변 (甲申政變) 1884년)을 일으킨 김옥균,박영효 등의 친일적 노선과는 궤적을 달리했다. …김용원은 일본 등 외세에 편승하고 시세를 좆아 정치적 야망이나 세력 형성을 추구하던 친일 개화파보다는 고종에게 충직한 근황세력에 가까웠다. 또한 근느 군부의 고종 측근이었던 한규직, 이조연과 함께 친러파로 분류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103 이를 전후해 사단이 발생했다. 통칭 제1차 조러밀약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이 사건의 경과에 대해서는 다보하시 기요시가 정리한 바 있다. 러시아 교관 초빙 문제를 둘러싸고 청일은 모두 러시아의 군사적 개입과 영향력 확대를 우려했고, 이는 국제적인 분쟁이 되었다. 고종은 문제를 외아문으로 넘긴 채 발뺌을 함으로써 사건은 유야무야되었다. 이 와중에 김용원의 러시아 파견 건이 알려지게 되었다. … 박보리스에 따르면 러시아 외부부는 1885년 2월 아무르 총독 콜프에게 의견을 구했고, 코르프는 청일전쟁의 결과 어느 나라가 승리해도 러시아에 위협이 될 것이기에 러시아가 한반도에 영향력을 구축하고 조선 독립을 보장해주는 것이 더 이득이라는 견해를 밝혔다. 러시아는 조선이 다른 열강의 영향력하에 놓이는 것을 원치 않았다.

1884년 경 청일 전쟁이 일어나고, 고종은 김용원등을 러시아에 밀사로 파견하여 러시아의 도움을 구했다. 그런데 청과 일이 이 사실을 알게되고 국제적 이슈가 되었다, 그 사건으로 고종은 김용원 (김규식 아버지)를 유배 보내게 되었다 [제1차 조러밀약사건](제1차 조러밀약사건) [제1차 조러밀약이 발각된 상황](제1차 조러밀약이 발각된 상황)

6 언더우드 고아원에서 생존과 영어를 배운 김규식

110 김용원은 1884년 12월 러시아에 파견되어 1885년 5월까지 만 5개월 동안 고종의 비밀외교를 담당한 결과 유배형을 당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김용원은 자신이 맡은 임무와 그 경과에 대해서 전혀 입을 열지 않았다. 1881년 동래에서 출생한 김규식은 강보에 싸인 채 서울에 올라왔다. 김용원은 1881년부터 1883년까지 일본에 다녀왔고, 1885년 대러 비밀외교 후 유배형에 처해졌다. 아버지가 유배 중이던 1885년 김규식은 어머니를 잃었다. 릴리어스 언더우드도 김규식이 고아원에 맡겨질 때 어머니는 사망한 상태였다고 기록했다. 족보에 따르면 김용원의 부인은 이미 1877년 사망했으므로, 김규식의 생모가 1885년에 사망한 것으로 생각된다. 이런 연유로 김규식은 아버지가 유배길에 오른 1885년에 사실상 고아가 되었다. 1886년 만 5살 남짓 된 김규식은 선교사 언더우드가 설립한 고아원에 들어갔다. 어린 김규식은 죽을 만큼 심한 병고와 배고픔, 가족들의 죽음 속에서 언더우드 고아원을 오가며 유년기를 보내야 했다.

113 언더우드 고아원의 내력 언더우드 선교사 부인이 아들을 낳고 건강악화로 미국으로 돌아가고 이후..밀러 목사가 학당을 경영한다 학생 수는 55명 고아원은 ‘예수교학당’으로 바뀐다 이 학당을 졸업한 대표적인 사람은 #김규식 #안창호 였다. 이 졸업생들이 중심이 되어 영신학당을 세웠다가 뒤에 감리교와 연합으로 수창동에 협성학교를 세웠다.

125 김용원은 근대세계를 경험하고 일본과 러시아를 종횡무진한 근대적 화원·외교관·실업가·과학자·사진사였지만, 고종에게 충군애국하는 전통적 미덕의 소유자였다. 그는 자신의 러시아 밀사 임무에 대해 입을 다물었고, 그 대가로 유배형에 처해지고 그곳에서 오랫동안 고생하다 질병을 얻어 사망에 이르렀다. 국왕의 비밀을 지킨 일로 유배-중병-죽음에 이른 그의 삶을 아마도 그 가족들조차 온전히 이해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근대를 향한 치열했던 김용원의 삶이 소멸한 자리에 어리고 병약하고 사고무친의 김규식이 남겨졌다. 그 앞에 놓인 개인적 형극의 길은 한국 국가·민족의 암울한 전도와 겹치며 그의 삶을 휘저을 것이었다.

김용원은 아들 김규식에게 근대세계와의 접촉, 일본 유학, 실용적 학문의 추구, 과학기술의 습득, 근대적 외교관이라는 선각자의 경험을 남겼다. 김규식은 정확하게 부친의 경력을 알지 못했겠지만, 미국 유학과 기독교 교육자의 길을 거쳐 독립운동의 외교관으로 나섬으로써 그 유산을 승계했다.

2장 16살에 떠난 도미 유학: 의화군과의 관계

1 의화군의 일본 체류와 도미 유학

131 #의친왕 의화군은 1894년 청일전쟁 종결 후 특파대사로 일본에 파견되었다. #1894년 10월 14일부터 11일 16일까지 한 달가량 유길준•고영희를 포함한 수행원 20명을 대동하고 보빙대사로 일본을 방문했다. 의화군은 메이지 천황을 알현하고 이토 히로부미를 비롯한 일본 고관들과 면담하는 한편, 조병창•제지소: 포병공창 등 일본의 주요 근대시설을 시찰했다. 의화군은 을미사변 이후인 #1895년 10월 19일 영국•러시아•독일·이탈리아•프랑스 , 오스트리아 6개국 보빙대사로 특파되었다 이는 을미사변 이후 정치적 위기에 직면한 고종이 유럽 열강에 특파대사를 파견해 원조를 구하려는 공식적 측면과 함께 잠재적 왕위계승자로 거론되는 의화군을 정치현장에서 제거한다는 정치적 의미를 담고 있었다. 왜냐하면 의화군의 특파대사 파견과 함께 고종 폐위 음모에 연루되어 유배에 처해졌던 이준용의 일본 유학이 동시에 결정•추진되었기 때문이다. 당시 일본 측에서는 조선이 국격에 맞지 않게 황제의 지위를 구하는 한편 특사를 파견하는 소행이라며 반대의견을 피력한 바 있다. 결과적으로 11월 25일 특파 중단 명령이 내려져, 의화군은 중도에서 중단해야 했다. 이 시점에 의화군은 일본에 도착해 있었다. 이로써 의화군은 이준용과 함께 10여 년에 걸친 일본 체류를 시작하게 되었다.

고종은 일본에 체류하게 된 의화군에게 유학을 명령했고, 1896년 1월 내대신 이재면을 통해 후쿠자와 유키치에게 의화군의 일본 유학과 관련한 일체의 감독을 위탁했다. 여기에는 수업과 경비에 관한 일체의 일이 포함되어 있었다.

134 일본 유학에 흥미가 없던 의화군 역시 정치적 음모, 궁정쿠데타 기획에 익숙해진 지 오래되었으며, 자신에게 왕위가 돌아올지도 모른다는 희망과 기대를 감출 수 없었을 것이다. … 철종의 부마인 박영효나 고종의 조카인 이준용과 달리 그는 고종의 소생으로 왕위 계승 가능성이 가장 높은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2 요코하마에 도착한 김규식과 언더우드·박윤규

146 김규식 이전에 미국으로 건너간 유학생들은 갑신정변 등 정치적 대사변에 휘말료 임시변통의 방법으로 미국행을 택했고 말 그대로 견문을 넓히는 유학과 보신의 태도를 취했다. 반면 김규식은 대학의 정규학위 취득을 목표로 도미한 첫 세대가 되었다.

155 김규식은 1의화군의 도미 유학행에 통역 겸 시종 자격으로 선발된 것임을 알 수 있다. 그 배후에는 언더우드의 역할이 결정적이었다. 김규식은 언더우드와 함께 당시 의화군이 체재 중이던 일본 도쿄,요코하마를 방문했으며, 언더우드,의화군과 여러 차례 만나고 도미 유학을 상의했다. 그런데 정치적 음모의 소용돌이에 빠져 있던 의화군은 자신의 시종이나 친구가 아니며 생면부지였던 김규식의 미국 동행을 거부한 것으로 보인다.

3 의화군과 김규식의 미국 유학행 (1897~)

162 의화군은 물론 박영효 등 재일 망명객들은 끝까지 꼼수를 동원해서라도 의화군의 도미 유학을 저지하려고 했기 때문에 김규식 등 의화군이 전혀 알지 못하고 신뢰할 수 없는 일행의 동반을 원치 않았다. 의화군에게 행동상의 구속이나 신변을 위협하는 정보의 누출 가능성으로 해석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의화군의 유일한 동반자는 고종의 칙지를 가져 온 외교관 겸 감시인 박용규, 자신의 시종이자 친구인 신성구 두 사람뿐이 었다.

166 김규식은 로녹대학 재학 시절 주미한국공사관에서 일했으며, 또한 1900년 의화군의 도미 유학을 로녹대학에서 보살폈으며, 그의 미국 각지 여행에 통역이자 비서로 동행했다. 이런 공적 관계와 사적 관계가 교직되어 김규식의 로녹대학 입학이 결정된 것이다. 이러한 전후 사정과 인간관계는 향후 1910년대 그가 위치하게 될 공적 세계와 사적 세계의 공간이 기독교, 근왕주의, 계몽•문화운동, 도미 유학생 등에 위치할 것임을 보여 준다.

[김규식과 의화군-의친왕-이 미국에 가게된 배경과 의미](김규식과 의화군-의친왕-이 미국에 가게된 배경과 의미)

3장 로녹대학 시절: 새로운 세계, 평생의 친구를 만나다(1897~1903)

1 로녹대학의 한국 학생들

서병규 황현모

178 로녹대학 문서보관소 기록에 따르면 1894년 이후 1945까지 로녹대학에 재학했던 한국 학생들은 학부, 예과, 특별과(부분과, 부분특별과, 경영과)를 합해서 모두 32명이다. 이 가운데 문학사를 받은 졸업생은 서병규,김규식,이원익, 송헌주,이병간,강영복,안승한,허연,안승만 등 9명이다.

[1905년 주미대리공사 김윤정의 친일-국가배신 배경](1905년 주미대리공사 김윤정의 친일-국가배신 배경)

2 김규식의 학창 시절(1): 학업

193 역사에 운명이나 교지가 있다고 생각할 수는 없지만, 이러한 로녹대학 수학은 결과적으로 외교관 김규식을 만들기 위한 과정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1919년 #파리강화회의 에 파견된 김규식은 혈혈단신이 었지만, 로녹에서 배우고 익힌 영어, 프랑스어, 독일어, 라틴어에 대해 자유로운 언어 구사력을 지녔고, 서양고전과 역사 문화에 대한 통찰력을 지닌 지성인이었다. 파리강화회의 각국 외교관과 언론을 상대할 수 있는 지성과 언어 구사력, 품위를 지녔던 것이다. 김규식은 이러한 필수과목 외에 정치경제, 철학, 영어성경, 웅변, 독해, 예술, 천문학, 식물학, 동물학, 생리학, 상업수학, 부기, 맞춤법 등을 추가로 수강했다.

195 김규식은 로녹대학 시절 예과 2등, 1학년 2등, 2학년 2등, 3학년 2등, 4학년 3등을 수상하는 등 외국인 학생으로 보기 어려운 매우 우수한 성취를 얻었다. 1903년 졸업

3 김규식의 학창 시절(2): 주미공사관·군과의 관계

199 이범진 장남 이기종과 김규식과 함께 찍은 사진

1896년 주미 공사가 되어 7월 대한제국에서 출발해 9월에 워싱턴에 도착했다. 그리고 주러시아 공사로 전임되고 프랑스 •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공사를 겸임한다. 1900년 미국을 떠나 아들인 이기종, 이위종과 5월 파리에 도착했다. 그는 프랑스의 대통령 에밀 루베를 만나고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을 거쳐 러시아 제국에 도착해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를 알현했다. 그는 황제에게 신임장을 전달했다. 빅토리아 여왕의 장례식에도 참석했고 1901년에 프랑스 • 오스트리아 공사에서 해임되었다.[5] 잠시 독일 공사가 되기도 했다.

그는 러시아 공사 시절 대한제국의 국권 수호를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일제는 한일의정서 체결 이후 대한제국 정부에 이범진을 소환하라고 명령했다. 그는 소환에 불응했고 황제의 전보가 왔다. 그 내용은 황제는 이범진이 “러시아에 계속 머무는 것을 원하고 소환한 것은 일제의 강요에 의한 것이다"라는 것이다. 그 후 이범진이 귀국을 거부하자 일제가 공사직을 해임시켰지만 그는 비공식적이지만 공사직을 계속 수행했고 러시아 황제는 대한제국과 러시아 양국간의 친선이 계속되기를 바라고 한국의 국권 회복을 바란다라고 했다.

그 뒤 러일전쟁이 일본의 승리로 끝나고 이범진은 일제와 러시아의 강화 조약 체결이 대한제국 국민을 절망으로 빠트렸고 빨리 서울에 러시아 공사를 파견해주기를 바란다라는 내용의 황제의 서신을 러시아 외부 대신에게 전달했다. 그 후 무책임한 대신들에 의해 을사늑약이 체결되고 황제는 러시아 황제에게 국권 회복을 지원해달라고 요청했다.

  • 독립운동에 투신하다 을사조약이 체결된 직후 고종이 헤이그에 이준과 이상설을 보내 열강을 상대로 구국 외교를 하려 하자 그는 헤이그에 특사 파견을 준비해왔다. 그는 자신의 아들인 이위종을 이준, 이상설과 함께 가서 도움을 주게 하였다. 하지만 헤이그 특사는 큰 성과를 내지 못했으며 이준은 헤이그에서 객사하게 된다. 직후 이범윤, 유인석, 홍범도, 이상설, 최재형 등의 독립운동가들이 모여 연해주 독립 운동을 주도했고 이때 그는 연해주의 한인 신문을 발간했다. 또 연해주의 의병에게도 도움을 주기도 했다. 하지만 결국 1910년 한일 강제 병합이 이루어지며 대한제국은 멸망하고 일본에 합병되게 되었다.

203 동학농민전쟁-청일전쟁-을미사변-러일전쟁 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국내적,국제적 대사변속에서 의화군은 고종,순종을 대체할 수 있는 실현 가능한 대한으로 부각

4 김규식의 학창 시절(3): 글쓰기와 토론, 졸업

러시아를 아시아의 침략자, 일본을 아시아의 해방자로 인식하고, 이를 백인종과 황인종의 전쟁, 러시아 대 일본·동양제국의 연대투쟁으로 규정한 점은 이 시기 일본의 영향하에 만연해 있던 문명개화론자들의 보편적 시각이자 구미의 인식이었다. 한국 지식인들의 인식 전환은 러일전쟁 이후 을사조약을 계기로 일본의 위장된 한국 독립·보호론이 실상은 제국 팽창의 술책이었음이 드러날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러일전쟁기 윤치호, 이승만, 여운형, 이준 등 당대 개화파 지식인들이 가졌던 일본의 대러시아전 승리를 응원하던 정서와 동일한 것이었다. 한국 지식인들뿐 아니라 동아시아 정치인·지식인들도 대일 우호적 인식의 그물망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강용흘 https://www.gmeum.com/meet/3362?talkId=254131

김규식의 미국 생활을 끝내고 나니 예전에 읽은 강용흘의 “East Goes West”(Younghill Kang, 1937)라는 책이 연결되어 생각이 났습니다. 강용흘은 1930년대의 미국 문학에서 중요하게 다룰 정도로 포지션을 잡고있는 소설가입니다. 영어본은 현재 펭귄북스 문고본으로 나와있고, 한국어 번역은 “동양선비 서양에 가시다"라는 제목으로 나와 있습니다. (지금보니 품절이라고 나오는데요) 연배는 김규식보다 좀 아래이지만 1900년대 초반 미국에 김규식과 거의 비슷한 10대 청소년 시절에 건너와 고학을 하며 학교를 다녔고 보스턴 유니버시티에서 영문학 학사, 하버드대학에서 교육학 석사를 취득한 후 본격적으로 소설을 쓰면서 “Grass roof"로 이름을 알리게 됩니다. 미국에 건너오기 전의 조선에서의 일을 다룬게 Grass roof이고 그 다음 미국에서 학교를 다니면서 한국인 소년/청년이 미국 사회를 경험하는 과정을 다룬게 East Ges West입니다. 한국어 번역본을 읽어보지 못했는데, 영어는 문체가 굉장히 경쾌하고 유머러스하기도 하고 인사이트가 있었습니다. 약간 스코트 피츠제럴드 영향도 좀 있는 것 같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강용흘은 해방 직후 미군정청의 교육 자문으로 한국에 와서 일을 좀 했었고 이후 미국에서 세상을 떴습니다.)

기회가 되시면 김규식의 미국 학생 시절을 약간 자세히 보시고 싶다면 한번 읽어보시면 의외로 재미있으실 것란 생각이 들어서 소개합니다.

동양선비 서양에 가시다강용흘 저자(글) · 유영 번역

[고종화 명성황후 ,엄비와 의화군,영친왕의 조선말기 상황](고종화 명성황후 ,엄비와 의화군,영친왕의 조선말기 상황) 대한황실계보도

218 의화군은 이토와 함께 조선으로 귀국하게 된다. #1906년

220 #의화군 #의친왕 1907년 헤이그밀사 파견으로 고종이 강제 퇴위하고 순종이 즉위하게 되자 영친왕 이은이 황태자가 되었다. 의친왕은 두 번째 왕자였으나, 황태자가 되지 못했다.

고종의 의심과 엄비의 배척이 심했으며, 오랜 기간 국외 를 떠돌아 국내에 그를 지지하는 세력이 미약했고, 정적들에 의해 과장된 풍문과 염문•낭비벽이 걸림돌이 되었다. 역설적으로 사조약 이후 [이토 히로부미 이토 히로부미 伊藤 博文](이토 히로부미 이토 히로부미 伊藤 博文)는 고종의 정상적인 두 아들 모두에게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 고종이 귀국을 저지한 의친왕은 이토의 도움과 보호를 받아야 했고, 이토의 도움으로 황태자가 된 영친왕은 이토를 멘토로 일본에 강제 유학을 가야 했다. 1909년 안중근 의거가 발생하자, 순종과 고종은 의친왕을 이토의 조문사절로 정해 일본에 파견하려고 할 정도였다. 의화군(의친왕)은 고종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으나, 모친 장씨는 민왕후의 미움을 받아 죽었고, 외가나 정치적 의지처가 없었다. 의화군을 통해 손종의 후사를 도모하고자 그를 후원했던 민황후가 을미사변으로 시해된 후 사실상 일본으로 추방되었다.

1895년 이후 1906년 귀국할 때까지 거의 11년가량을 일본과 미국에서 지내야 했다. 역설적으로 의화군은 조선의 왕위계승자는 물론 주요 해외유학파 가운데 가장 많은 해외 생활과 유학 경험을 통해 일본•미국을 포함한 근대세계에 정통한 인물이 되었다. 그러나 국내와 일본에서 의화군을 둘러싼 정치적 음모와 소문이 팽배하자 고종과 엄비는 의화군의 귀국을 막았고, 이미 정치적 소용돌이에 휘말린 의화군 역시 장기적 미래를 도모하기 어려운 형편이 되었다.

일본에서는 망명객과 음모자, 암살범들이 주위에 모여들었고, 미국에서는 로녹대학과 웨슬리언대학을 다녔으나 학업에 뜻을 두지 못했다. 결국 을사조약으로 이토가 통감으로 부임하면서야 귀국할 수 있었다. 대한제국이 사실상 몰락하는 순간에야 귀국할 수 있었던 의화군은 역설적으로 대한제국의 강제병합 이후에야 왕실 인물 가운데 가장 유력한 독립운동의 중심인물이 될 수 있었다. 의화군에게 정치적 기회가 주어지지 않은 것은 대한제국의 비극적 일면을 반영하는 것이었다.

230 김규식은 우리나라 한국어 문법의 초기 저자로 이름을 남기고 있다. 이미 1900년 시점에 이러한 국어학 글을 쓸 수 있었다는 것은 국어학자로서 김규식의 학문적 관심과 성취를 보여주는 것이다.

… <동양의 여명> 의 글 1902년 1월 31일 개최된 문확회 …김규식의 연설.. 김규식은 중국에서 의화단 사건(1910), 한국에서 을미사변(1895) 등 연달아 실패한 ‘혁명’을 언급하면서 반면 ‘떠오르는 태양’ 일본은 새로운 탄생을 경험했고 이제 곧 여명이 될 터이니, 동양의 잠자는 나라들, 즉 중국과 한국은 “떠오르는 태양"이 비추는 길을 따라 번영해야 한다고 쓰고 있다. 당시 구미(미국)에 만연해 있던 정세관과 문명관을 반영해 미국 유학생들이 일반적으로 갖기 쉬운 일본 주도의 동양문명화론을 펼친 것이다. 만 21세의 청년이 미국 교육을 받으며, 미국 지성계,언론계의 정세관과 세계관을 익히며 갖게 된 일반적인 생각인 것이다.

231 (김규식이 1903년에 바라본 아시아의 상황을 이렇게 이해하고 있었다.) 1903년 5월에 발표된 「러시아와 한국 문제」이다. 이 글은 러일전쟁을 예견하며 동아시아의 향배를 다룬 것이다. 이 시점에 김규식의 동아시아 정세관, 대한 ,대중•대일•대러관을 엿볼 수 있다. 요지는 다음과 같다. 한국은 15세기 초까지 독립된 왕국이었지만, 이후 1866년까지 중국의 조공국이 된 “은둔의 왕국"이었고, 일본은 개항 이후 가장 강한 육해군 전력을 가진 나라가 되었고, 중국은 쇠퇴해 열강이 탐내는 고깃덩어리가 되었다. 러시아는 1억 2천 9백만의 인구와 세계 최대의 상비군을 갖고 있고, 조선은 먹잇감으로 전락했다. 일본은 과잉인구와 에너지의 자연적 출구로 조선을 필요로 하며, “공간과 생존을 위해 조선을 원하며 반드시 가져야 한다”. 러시아가 조선을 장악하면 극동에서 문명은 정지되겠지만, 아시아 대륙에서 일본의 발전은 동양에 최고의 이익이 될 것이다. 전쟁이 시작되면 일본은 최후까지 싸울 것이고, “떠오르는 태양’이 승리자가 됨으로써 전 아시아의 이익이 될 것이다.

232 러시아를 아시아의 침략자, 일본을 아시아의 해방자로 인식하고, 이를 백인종과 황인종의 전쟁, 러시아 대 일본,동양제국의 연대투장으로 규정한 점은 이 시기 일본의 영향하에 만연해 있던 문명개화론자들의 보편적 시각이자 구미의 인식이었다. 한국 지식인들의 인식 전환은 러일전쟁 이후 을사조약을 계기로 일본의 위장된 한국 독립,보호론이 실상은 제국 팽창의 술책이었음이 드러날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235 로녹대학은 김규식에게 학업과 생활의 공동체였고, 한국에서와 다른 새로운 가족 공동체를 그에게 선사했다. 출신과 신분에 구애받지 않았고, 미국 남부의 따뜻함이 제공하는 기독교의 포용 속에서, 지성의 전당에서 학문과 자유를 향유하며, 미국과 세계를 주도하는 세계시민으로 거듭날 수 있었다. 버려진 고아 본갑이는 한국 땅에서는 느껴 보지 못한 상냥함과 따뜻함을 맛보며 새로운 가족과 결속해서 당대 최고의 지성인으로 탈바꿈을 할 수 있었다. 한 학년 20~30명, 전교생 200여명에 불과했던 로녹 시절의 동창생들은 그의 평생 친구이자 가족이 되었다.

4장 국내에서의 김규식(1904~1913)

247 그의 자서전에 따르면 이 시기 김규식은 첫째로 YMCA에서 일했고, 둘째로 1905년 고종의 밀사로 비밀외교를 시도했고, 셋째로 언더우드 목사의 개인 비서로 일했으며, 넷째로 총독부의 교수직 제안을 거부하고 중국으로 망명했던 것이다. 나아가 김규식은 기독교지도자이자 한글학자로 활동했으며, 결혼해 가정을 이루었다. 소년이 청년으로 성장해 사회 활동을 본격화하며, 가정을 이루고 사회의 주역으로 활동하기 시작한 것이다.

1 YMCA 이사, 서기

256 김규식은 러일전쟁 와중에 귀국했고, 이후 을사조약이 체결되고 헤이그밀사 사건 이후 1907년 고종의 강제 퇴위와 군대 해산 등이 이어졌다. 나라의 운명은 기울고, 일제의 지배가 분명해 지는 순간 근대세계를 경험하고 귀국한 세계시민 김규식은 기독교 청년운동에 희망을 걸었던 것이다.

260 하와이의 <국민보>는 한국 2YMCA를 일본 YMCA에 강제 편입시킨 이 사건이 김규식의 중국 망명 원인이 되었다고 분석했다.

[미국과 일본의 가쓰라-테프트 밀약,일본의 조선침략을 묵인하다](미국과 일본의 가쓰라-테프트 밀약,일본의 조선침략을 묵인하다)

2 흥화학교·경신학교 교사

3 미스터리한 도미 외교 시도(1905)

267 고종은 1905년 이래 구미열강에 밀사를 파견하고 밀서를 전달함으로써 일본 위협하의 한국 상황을 전달하며 한국 독립 유지를 시도했다. 밀사,밀서외교는 국가 위기 상황에 스스로를 지킬 수 없게 된 고종이 택할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자 미약한 희망의 실마리였다. 또한 이는 1919년 3.1운동 이후 한국 독립운동의 중요 노선이 된 외교독립노선의 연원을 형성하는 것이기도 했다. 외교독립노선을 대표하는 이승만,김규식,송헌주 등은 모두 고종의 ‘독립유지외교’에 관여했던 인물들이다. 고종의 밀사,밀서 파견을 통한 독립유지외교가 3.1운동 이후 외교독립노선으로 변용.계승된 것이다.

268 고종이 가장 심혈을 기울인 나라는 러시아와 미국이었다. 고종은 1905년 1월 10일 러시아황제 니콜라이 2세에게 친서를 보내고, 1905년 말 이용익을 통해 러시아의 보호를 요청하는 밀서를 전달했다. 고종은 1905년 2월 상해의 러시아인 파블로프(Pavlow)를 통해 러시아황제에게 보내는 밀서를 전달하려 했는데 이 정보가 입수된 후 1905년 2~5월까지 상해 서울·동경의 일본 외교라인은 그 내막과 실체를 파악하려고 동분서주했다. 밀서와 밀사의 임무는 동일했다. 러시아가 대한제국의 독립을 회복, 유지시켜 달라는 내용이었다.

특히 중국 상해에는 한일의정서 체결 직후 망명한 고종의 측근세력들이 있었다. 전시중립선언의 주역이었던 이학균과 현정건등이다. 두 사람은 1904년 3월 서울을 벗어나 미국 군함 신시내티호를 타고 중국 지푸를 거쳐 상해로 갔다. 이들은 러일전쟁 발발 이후 상해로 철수해온 전 주한러시아공사 파블로프를 만나 향후 대책을 숙의했다. ….이들은 상해로 망명하기 전 콜브란-보스트윅개발회사에 대한 광산 특허, 서울의 전차,전기,전화부설권 등 이권을 내주고 상당한 비자금을 마련해 놓았다.

⭐271 윤병구·이승만 일행은 고종 측근이던 민영환·한규설이 파견한 사실상 고종의 밀사였지만 오이스터베이에서 미국 기자들과 만났을 때 고종과 대신들을 비난하며, 자신들은 고종이나 대한제국의 밀사가 아니라고 공표하며, 심지어 자신들은 새로운 민중조직인 일진회의 대표라고 주장하기까지했다. 윤병구•이승만이 루스벨트와 잠깐 면담할 수 있었던 것은 윤병구가 하와이를 방문한 루스벨트의 최측근인 육군장관 태프트를 만나 하와이 7천 한인 대표로 선물을 건네고 소개장을 받았기 때문이다. 여기에 감리교 감독 와드만의 도움이 있었다. 즉, 이승만의 소위 루스벨트 ‘면담외교’는 사실 하와이 한인대표 윤병구가 태프트의 소개장을 얻어 루스벨트를 면담 할 수 있었던 것이 실체였다. 일본 측은 이승만이 고종의 밀사라고 추정하 고 있었고, 이승만은 사실상 민영환• 한규설을 통해 파견된 고종의 밀사였지만, 이승만은 자신을 사형시키려한 고종에 대한 반감이 심했다. 또한 하와이 7천 한인으로는 대표성이 부족하다고 생각해 당시 민중조직 •민회로 주목받던 일진회 대표라 자처하는 우극을 벌인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가적 위기 속에서 어떤 외교적 노력도 가시화되지 않던 상황에서 절망과 나락을 경험하던 한국인들에게 이승만•윤병구의 루스벨트 면담은 대성공으로 홍보되었고, 심지어 주미공사관 김윤정 대리 공사가 이들이 요구한 정식 외교 공문을 미 국무부에 보내지 않아 러일강화회담 참가가 무산되었다는 과장 보도가 국내 언론에 유포되면서 이승만 의 명성이 높아졌다.

이승만의 루스벨트 면담외교의 성공은 그를 청년지사, 외교적 영웅으로 부각시킨 일대 사건이었지만, 정작 이승만은 외교적으로 순진했고, 정치적으로 미숙했으며, 반고종.반대한제국.친일.반러 노선을 추구했다. [이승만과 윤병구의 도미 외교 - 루스벨트 면담 실체](이승만과 윤병구의 도미 외교 - 루스벨트 면담 실체)

273 을사조약 체결 직후 고종은 뛰어난 미국 변호사를 고용해 루스벨트로 하여금 한국 문제를 조사하게 하고, 대한제국을 일본 및 여러 열강의 공동 보호하에 두게 함으로써 일본의 한국 독점을 막자는 방안을 구상했다.

미국과 일본은 이미 가쓰라-테프트 조약으로 정리가 된 상태였었다

4 조은애와 결혼(1906)

277 김규식은 1913년 한국을 떠난 후 32년 뒤인 1945년 말에 한국으로 돌아왔다.

5 한국 기독교회의 젊은 지도자

297 역설적으로 김규식은 1913년 중국으로 망명한 이후에야 정치적 행동의 자유를 얻게 되었다고도 볼수 있겠다. 또한 중국 망명은 개인적으로는 근대세계시민이 되었지만 여전히 그를 얽매던 전통적 가족관계, 사회질서로부터의 해방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했을 것이다,

297 1916년 미국에 돌아간 언더우드가 병환으로 사망하자, 김규식으로 한편으로 자신의 생명의 은인이자 양부가 돌아간 것에 비애감을 느꼈으며, 다른 한편으로 이제 언더우드의 그늘에서 벗어난 자신을 발견하게 되었을 것이다

6 계몽·문화단체 지도자, 한글학자

299 김규식이 국내에 있던 1904-1913년간은 정치적으로는 러일전쟁-을사조약-정미조약-군대해산-합방조약으로 국운이 급전직하하던 시기였다. 이 시기를 대표하는 독립운동의 2가지 노선은 애국계몽운동으로 대표되는 경제, 교육 실력 양성노선과 의병투쟁으로 대표되는 무장투쟁노선이었다. 이 가운데 김규식은 교육, 문화운동에 동참했다.

⭐304 (김규식 한국에) 귀국 후 김규식은 YMCA, 경신학교, 새문안교회, 계몽단체에서 일했고, 결혼해 가정을 이루었다. 국운은 쇠해 나라는 기울고, 정치는 문란함을 벗어나지 못했다. 을사조약과 정미조약을 거쳐 드디어 경술국치에 이르렀다. 의병이 봉기하고, 해산된 한국 군인이 일본군과 교전을 벌였으며 안중근이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했으나 일본의 침략을 저지할 수는 없었다.

일제의 보호통치하에 정당정치가 지속되길 희망하며, 일제와 싸우기 보다는 내정개혁을 통해 부강지실을 이루자던 정치세력들의 숙망도 단숨에 거꾸러졌다. 대동합방, 정합방등 요사한 합방론을 주장하며 일본과 하나 되자고 주창했던 친일세력들의 입도 단숨에 봉쇄되었다. 일제는 나라와 나라의 합방이 아니라는 의미에서 ‘병합’이라는 새로운 용어를 사용했다. 일제는 강제병합을 이루자마자 한국의 모든 정치·사회단체 ·언론을 해산했고, 일진회마저 해산시켰다.
“대한” 제국이 망했으나, 일제는 멸시적 의미를 담아 “조선"총독부를 설립했다. 일본제국의 헌법은 한반도에 적용되지 않았다. 총독 데라우치 마사다케는 조선은 일본의 통치를 받아들이거나 죽음을 선택하라고 공언했다. 무단통치의 본보기로 일제는 105인 사건을 조작해 한국의 엘리트와 기독교를 대대적으로 탄압하기 시작했다. 김규식도 이 마녀사냥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뜻이 있는 지사들은 중국, 러시아, 미국으로 망명하여 후일을 도모했다. #1911년 중국 신해혁명 발발은 새로운 희망의 전조로 비춰졌다

306 신해혁명 발발 소식을 들은 김필순과 이태준이 중국으로 망명했고, 1913년 김규식도 중국으로 향했다. 다음 해 그의 평생 동지가 된 여운형도 중국으로 향했다.

5장 망명의 세월(1): 중국 망명 직후의 김규식(1913)

1 1913년 4월 2일 ‘오스트레일리아’로 출국

314 김규식은 왜 중국을 선택한 것일까? 여기에는 역시 1911년 신해혁명의 영향이 있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1910년 국망은 한국인들에게 절망감을 주었지만, 1년 뒤 중국에서 폭발한 무창기의 , 즉 신해혁명은 낙심천만에 빠져 있던 국내 인사들에게 한 줄기 희망의 빛으로 다가 왔다.

315 김규식은 김필순의 셋째 여동생 김순애와 결혼했고, 김규식과 함께 언더우드 목사에게 유아세례를 받은 서병호는 김필순의 첫째 여동생 김구례와 결혼했다.

319 동제사는 #1912년 7월 4일경 조직 되었으며, 신해혁명 직후 중국에 건너온 신규식,박은식이 주도했다. 동제사의 ‘동제’는 동주공제에서 따온 것으로, 같은 배를 타고 함께 강을 건넌다는 협동, 단결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동제사는 공제사, 동주사, 혁명당이라고 불렸으며, 사원들은 당원으로 불렸다. 표면상으로는 유학생들의 호조기관을 내세우며 실질적으로는 독립운동단체로 활동했다.
[동제사 - 일제강점기 초기 해외에서 조직된 최초의 비밀결사 항일독립운동 단체](동제사 - 일제강점기 초기 해외에서 조직된 최초의 비밀결사 항일독립운동 단체)

2 남경·상해 동제사 참가

336 특히 김규식과 신규식이 모두 교육의 중요성을 인식한 교육자였다는 점이 이들의 중국 시절 공동행동의 근거가 되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3 제2차 중국혁명 참가(1913. 7)

346 김규식은 중국혁명동맹회의 회원이었고, 중국혁명의 주역들과 긴밀한 사이였다. 343 이들 대아시아주의 자들의 목표는 모두 만주와 몽고를 중국으로부터 분리, 독립시켜 일본 세력권으로 만든다는 ‘만주문제’의 해결에 있었다.

350 김영일의 설명은 당시 상해의 사정이 어떠했는지를 짐작케 한다. 상해에는 약 70여명의 한국인이 거주하고 있었는데, 누가 동지인지 누가 일본의 밀정인지 알 수가 없었다, 때문에 서로 신분을 감추고 거처를 숨기고 지냈다.

354 김규식이 7월 24일 ~ 28일 적십자대를 조직해 임회관으로 출정한 것도 김진용이 주장한 한국인 위생대,적십자대 조직 요청과 일치하는 것이었다. 김규식은 중국인 2세 모대위 의사와 함께 적십자대를 조직하고, 의료구호 활동으로 포장된 중국 혁명에 참가했다. 전후 사정을 고려해 본다면 김규식이 적십자대를 조직해 냉휼 장군의 부대를 따라 임회관까지 진출한 것은 독자적 행동이라기보다는 제2차 혁명군, 특히 남경 이열균 무호도독부 와의 사전 조율에 따른 결과였을 가능성이 높다. 나아가 김규식의 제2차 혁명 참가는 신규식과 김진용을 포함하는 동제사의 조직적 결정이었을 것이다.

[1911년 일제강점시기 105인사건](1911년 일제강점시기 105인사건) [1913년 미주 한인 헤멧 사건](1913년 미주 한인 헤멧 사건)

4 세 차례 도미 유학생을 파견하다(1913)

5 상해·서울·샌프란시스코의 연계망

372 김규식은 미국 입국에 필요한 서류와 절차가 무엇인지, 이민 당국이 요구하는 구체적인 입국 자격은 어떤 것인지, 미국 당국과 대학이 학생의 어떤 자격을 요구하는지에 대해 정확하게 대답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상해의 한국인이었다.

372 1917년 남경 금릉대학을 수료하고 상해로 건너온 여운형은 1913년 김규식이 수행했던 임무의 승계자가 되었다. 여운형은 1917년 7월부터 1918년 3월까지 30명을 도미시켜 주었다. 이후 미국의 세계대전 참가로 여권이 필요하게 되어 도항이 금지되었지만, 여운형은 파리평화회의까지 40명의 도항을 도와주었다고 밝힌 바 있다.

373 1913년의 헤멧 사건 이후 대한인국민회 북미 총회는 한인사회 문제에서 자율적 결정권을 지녔고, 이는 이민 당국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미국이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하는 1918년 이전에는 여행권 없이도 미국 여행이 가능했으며, 대한인국민회 북미지방총회는 이를 알선할 수 있었다. 중국에서 건너오는 한인 유학생들은 첫째로 자신들이 1910년 한일합방 이전에 중국에 거주한 망명한인들로 일본의 통치를 인정하지 않는다고 주장하고, 둘째로 중국에 입적해서 중국여권을 획득하고, 셋째로 샌프란시스코 대한인국민회와 협의해 이민 당국으로부터 상륙허가를 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

6장 망명의 세월(2): 중국에서의 김규식(1914~1918)

1 제1차 세계대전 발발과 북경·의주·고륜으로의 여정(1914)

377 1913년 김규식은 중국에 망명한 직후 정력적으로 움직였다. 동제사에 가담해 독립열에 들끊는 한국 청년들을 만났고, 자신을 중국으로 이끈 신해혁명의 열기에 고취되어 제2차 혁명에 참여하기도 했다. 또한 한인 청년들을 미국,중국에 유학시키기 위해 적극 노력했다. 그가 떠나온 서울에는 부인과 아들이 남아 있었지만, 그가 희망하는 방식의 재회는 기약이 없었다. 희망과 의지가 그의 중국행을 이끈 동력이지만, 가족의 생계와 그의 미래는 미지와 불안의 세계에 놓여 있었다.

(1) 북경에서 안창호에게 보낸 편지

378 (김규식이 안창호에게 쓴 편지중) …항상 우러르고 그리워하는 중에, 지난 1월 10일에 보내신 편지를 받으니 위안되는 마음을 표현할 길이 없습니다. 그러나 병환으로 입원하여 치료 중이라고 하시니 걱정스럽고 울적합니다. 바라건대 얼른 인형의 병환이 쾌유되고 길한 일들이 다가오기를, 멀리서 머리를 조아리며 구구히 축원합니다.

(2) 외몽고 고륜행과 유동열ㆍ이태준ㆍ서왈보와의 사관학교 설립 계획

이태준은 세브란스의학교 제2회 졸업생으로, 제 1회 졸업생인 김필순의 친구이자 제자였다. 김규식은 김필순과 친밀한 사이였는데, …. 김필순,이태준은 1911년 무창기 소식에 흥분했고, 적십자 자격으로라도 중국혁명에 동참할 의도로 중국 망명길에 올랐다.

392 서울보는 함남 원산 출신으로 원흥학교를 다녔으며, 안창호에게 감복해 대성학교를 졸업했다. 그는 일본이 싫어 일을 왈로 읽었다고 한다. 졸업 후 안창호, 이갑 등을 따라 함께 노령에 이르렀고, 안창호•이갑은 사관학교를 설립해 청년 양성을 시도했고 서왈보 역시 준비에 노력했으나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어부• 광부로 일하기도 했으며, 북경에 와서 한진교의 도움으로 육영학교에 입학했고, 유동열과 함께 몽고 등지로 건너가 독립운동을 도모했으나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북경에 돌아와 영어를 공부했고, 관립 보정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중국 육군 대위가 되었다. 이때가 1919년으로, 독립운동이 발발하자 서보는 북경과 천진의 대학생을 중심으로 대한독립청년단을 조직한 다음 신채호를 단장으로 추대하고 자신은 군무장이 되었다

(3) 배일 비밀기관부의 ‘김만호’ 3942

403 그런데 1914년 가을 김규식 일행이 사관학교 설립을 타진하기 위해 외몽고 고륜에 도착했을 때 이곳은 정치적 격변의 중심이 된 상황이었다. 러시아와 일본은 1907년부터 1916년까지 4차에 걸쳐 영국과 미국의 동아시아 진출을 저지할 목적으로 협약을 체결했다. 제1차 러일협약(1907. 7.30)은 중국에서 상호 권리 존중을 약속하며, 만주를 남북으로 나눠 각자의 세력범위로 삼으며 러시아는 외몽고, 일본은 조선에서 특수이익을 보유하기로 했다. 러일전쟁에도 불구하고 식민지 확장에 대한 양국의 관계가 긴밀했음을 보여주는 사례였다. 특수이익이란 보호령•사실상 식민지 등 배타적 이해관계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러시아는 외몽고를 자신의 세력권하에 두기 위해 제1차 러일협약에서 자신의 이익 범위로 인정받았고, 1911 년 몽고 라마교 수장도 청으로부터 분리 독립하기 위해 1911년 8월 러시아의 지원을 약속받았다.

404 #1911년 10월 신해혁명이 발발하자 1911년 12월 1일 외몽고는 혁명을 일으켜 청국 관리를 축출하고 12월 28일 독립을 선언했다.

405 몽고와 중국, 러시아, 일본이 뒤엉켜서 격변에 격변을 거듭하던 외몽고 고륜에서 김규식 등 한국 독립운동가들이 사관학교를 건설한다는 계획은 무망한 것이었다. 외몽고를 둘러싼 국제 정세, 국내 정치가 복잡하게 얽혀서 외부인들의 정치 활동이나 군사 활동이 불가능했고, 군사 활동을 허가할 주체도 불명확했다. 러시아와 일본, 중국의 외부 영향이 지속되는 가운데 몽고의 독립 방향을 둘러싼 외몽고• 내몽고의 부족간 갈등 및 정파적 갈등도 심각했다. 1914년 가을 김규식은 서양인 상사들에게 피혁을 판매하는 사업을 시작하였고, 이태준도 고륜에 동의의국이라는 병원을 개업했다. 몽고의 정치적 불안정, 강국들의 각축전이 교차하면서 몽고는 독립운동의 장기적 계획을 세우기에는 부적합 곳으로 변모하고 있었다. 외몽고 고륜에 잔류했던 이태준은 몽고, 러시아, 일본의 각축 속에서 1921년 희생되기에 이른다.

2 신한혁명당과 망명정부 수립 계획(1915)

[1914년 8월 칭다오 전투-독일과 일본이중국칭다오에서](1914년 8월 칭다오 전투-독일과 일본이중국칭다오에서) [1915년 신한혁명당-중독조연합으로 일본 대항](1915년 신한혁명당-중독조연합으로 일본 대항)

413 신한혁멱당이라는 당명이 의미하듯이, 한국 독립 혹은 국권 회복을 의미하는 ‘신한’과 ‘신해혁명’ 등 중국혁명을 연상케 하는 혁명이 결합됨으로써 이 당의 지향이 복합적이며 이중적인 양상을 지니고 있음을 표현했다.

418 국내 파견 임무를 맡은 성낙형…고종을 알현하기 전 1915년 7월 신한혁명당 관련자들은 일제에 체포되었다. 이것이 일제를 경악케 한 1915년 ‘보안법위반 사건’이었다. 신한혁명당의 고종 망명정부 수립 계획이 실패…

420 1917년 5월 유동열은 북경, 서왈보는 훈춘에 거주하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김규식에 대한 정보는 일제의 정보망에 걸리지 않았다.

3 대동단결선언과 공화주의·임시정부 수립 노선(1917)

(1) 대동단결선언과 임시정부 수립 노선

421 김규식이 장가구의 앤더슨마이어사에서 일하는 동안 제1차 세계대전의 전환과 이에 조응한 한국 독립운동의 대전환이 있었다. 1915년 신한혁명당은 독일 승리라는 주관적 정세관 위에 고종의 망명정부 수립이라는 근왕주의적 노선과 중한의방조약 체결• 무장광복군의 대일전이라는 비현실적 방략을 추구했다. 반면 1917년 대동단결선언은 원세개 사망, 러시아혁명 발 발, 유인석· 이상설 사망 등 급변하는 국내외 정세 위에서 공화주의적 임시 정부 수립을 선언한 것이었다. 이는 한국독립운동사상 중요한 대전환이었 고, 1919년 3• 1운동과 임시정부 수립으로 이어지는 가교였다. 『선언」이라는 제목을 달고 있는 대동단결선언의 원본은 1986년 독립 기념관에 기증된 안창호 유품에서 발견되었다. …이 선언은 1917년 7월 상해의 신정(신규식)을 비롯한 14명의 선언으로 공표되었다. 선언의 핵심 내용은 대동단결을 통해 독립을 획득하며, 이를 위해 국내외 대표회의를 소집해 ‘무상법인의 기구’ , 즉 정부를 조직하자는 것이다. 즉, 대동단결, 독립 획득, 국민대표회의, 임시정부 수립이라는 주요 키워드를 내세우고 있다.

423 제1차 세계 대전은 1910년대 한국 독립운동에 여러 계기와 전환점을 제공했는데, 그 가운데 결정적인 세 장면은 1915년 신한혁명당의 결성과 활동, 1917년 대동단결선언의 공표, 1919년 파리강화회의 대표 파견이었다. 이 세 장면은 한국 독립운동이 어떤 전환점을 통해 변화, 발전했는지를 시계열적으로 보여 주고 있다. #1915년 신한혁명당은 보황주의적, 근왕주의적 노선을 표방하고 독일의 승리를 전제로 한 고종의 중국 망명 및 망명 정부의 수립과 중한의방조약 체결 등 외교 독립, 무장 독립 노선을 추구했다. #1917년 대동단결선언은 보황주의적 노선을 폐기하고 공화주의를 전면에 내세웠는데, 대한제국이나 조선 왕조가 아닌 해외 한인이 독립운동의 주체가 되는 임시 정부 수립 노선을 전면적으로 제기했다. #1919년 파리강화회의의 대표 파견은 국내외에서 3.1 만세 운동을 전면화했고, 이러한 민족적 에너지에 기초해 공화주의에 기초한 해외 한인들의 임시 정부가 수립되었다. 즉, 세계 대전이라는 정세 변화 속에 해외 독립운동가들은 공화주의와 임시 정부 수립이라는 역사적 노선으로 결집하게 되는 것이다.

426 1917년 대동단결선언은 1907년 정미7조약 이후 재미한인사회에서 제기되었던 공화주의, 국민주권론, 임시정부 수립론이 제1차세계대전의 전개 과정 속에서 해외 한인 독립운동가들의 보편적 인식으로 전면화 된 것이었는데, 국망 전후 고종 중심의 세계관에 입각해 제기되었던 근왕주의, 전제군주정, 고종 망명정부 수립론 등이 현실적 효용성과 위력을 잃어가면서 그를 대체한 결과 였다.

(2) 김규식의 참여와 그 의미

4 장가구와 고륜에서의 생활(1916~1918)

(1) 장가구ㆍ고륜에서의 외국상사 생활

(2) 첫 부인과의 짧은 재회ㆍ영원한 이별

450 1917년 5월 이후 조은애(김규식 첫번째 부인), 김진동(큰아들),김진동(조카)이 서울을 떠나 중국 장가구로 향한 것임을 알 수 있다. 김규식은 1916년 이래 앤더슨마이어사에 입사해 상해,천진,홍콩,장가구에서 근무하고 있었다.

에필로그

455 김규식의 중국 망명은 한국 내에서 당면하고 있던 여러 가지 어려움, 난관으로부터의 탈출이었다. 첫째는 일본 제국주의라는 감옥으로부터의 탈출이었다. 대학생 김규식은 로녹 대학 학보에서 러일 전쟁에서 일본의 승리를 예측하며, 일본이 동양을 문명화로 이끄는 선각자의 역할을 할 것으로 보았다. 일본이 선전한 동양 평화, 동양주의, 동아시아 연대론, 황인종 단결론과 같은 위장된 지역 통합 혹은 인종주의 선전에 당대 지식인들이 매료된 것과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을사 조약 이후 본격화된 일본의 보호 통치가 결국 강제 병합으로 이어졌고, 이후 한반도는 완전한 식민지의 감옥으로 전락했다. 열성적 친일 단체인 일진회마저 해체시킨 일본 제국주의는 105인 사건을 조작해 한국 기독교와 민족주의자를 탄압했다. 낙관적 희망과 전망은 냉혹한 현실 속에 산산 조각났고, 전개되는 객관적 상황은 김규식에게 현실을 자각하도록 만들었다. 시대가 그를 각성시켰으며, 일본의 탄압이 그의 민족 의식을 일깨웠다. 일본은 도쿄제대 유학이나 외국어대학 교수직을 제의했으나 그는 이를 거부하고 중국으로의 망명을 선택했다. 이는 그가 더 이상 문화적, 종교적, 교육적 활동에 머물지 않고 중국으로 탈출해 독립운동에 가담하겠다는 결의를 가졌음을 의미했다.

457 그의 중국행은 일본 압제로부터의 탈출이라는 소극적 선택에서부터, 중국 혁명 운동과 한국 독립운동에 동참하겠다는 적극적 의지의 표현이었으며, 언더우드의 영향과 신분제의 제약에서 벗어나겠다는 인간적 결심이기도 했다. 중국은 그에게 피난처이자 기회의 땅이 되었고, 새로운 삶의 방향을 시험하는 장소이기도 했다. 그는 자신을 속박하고 규율하던 모든 인간적, 신분적, 정치적, 민족적, 종교적 억압에서 탈출해 사고와 언어와 행동의 자유를 획득하려고 했던 것이다. 중국에서의 삶은 그의 의지와 결정에 따른 선택이었고, 오롯이 그의 책임이 되었다. 떠날 때 그의 중국 시절이 얼마나 될지 예상할 수 없었겠지만, 그는 32년을 중국에서 지내야 했다. 그런 면에서 중국은 그에게 제2의 고향이 되었고, 삶의 터전이자, 독립운동의 현장이 되었다.

458 이때 제1차 세계 대전의 종전이라는 역사적 대사변과 기회가 다가오고 있었다. (…) 김규식은 정의 인도, 세계 대개조, 영구 평화, 민족 자결주의 등의 복음이 울려 퍼지는 이때 역사의 순간이 찾아오고 있다고 판단했다. 세계는 제정에서 공화정으로, 식민지 약소민족의 독립과 해방으로, 폭정에서 혁명으로 급변하고 있었다. 변화하는 속도를 따라잡기 어려울 정도의 시대가 펼쳐지고 있었다. 김규식은 무언가 행동함으로써 자신과 한국의 운명을 바꿀 수 있다는 판단과 결심을 가졌다.

460 당대 많은 한국의 지도자들이 1차 대전 종전 이후 한국 독립의 가능성, 한국 독립 호소의 기회, 독립운동의 실현 가능성을 객관적 정세와 성패 여부를 기준으로 따지며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어떤 노력도 기울이지 않았다. 이들은 자리와 명예를 추구했지만, 시대의 소명과 역할을 거부했다. 무슨 일이 가능하겠느냐는 회의적 태도로는 어떤 것도 가능하지 않았다. 다가오는 역사의 순간을 애써 외면한 이들에게, 역사는 합당한 평가를 내렸다. 반면 시대와의 조응, 시대정신과의 교감에 민감했던 김규식, 여운형, 신한청년당원들은 적극적 태도로 시대를 읽고, 보고, 느끼는 정치 감각과 독립 열망을 가졌다. 기회를 포착해 온몸을 던지겠다는 결연한 의지와 실행력, 준비된 자세와 추진력을 갖췄다. 보이지 않는 미래를 예견하고 운명을 스스로 개척하겠다는 태도였다. 이 순간, 김규식과 여운형은 시대의 불꽃이자 빛나는 물방울이었다. 바늘구멍만 한 틈으로 새어 나오는 빛에 희망과 기대를 걸고 자신과 민족의 미래를 개척할 수 있을지 모른다는 두근거리는 마음을 가졌다. 이상주의자들이자 적극 행동파였고, 시대의 등불이었다. 이들의 마음속에 품은 작은 불꽃은 다른 마음에 희망의 불씨를 전달했다. 마음과 마음이 연결되고 불꽃과 불꽃이 서로를 끌어안는 불꽃들의 대연쇄였다. 작은 불꽃과 불씨에서 비롯된 불길은 용광로처럼 타올라 한국인의 독립 의지와 독립 정신을 증명하는 초신성을 빛났다. 그리고 이는 일본 제국주의가 상상하지 못한 활화산의 폭발로 이어졌다. 다른 한편의 이들은 작고 빛나는 물방울이었다. 한 개인에 불과한 이슬 같은 물방울들이 가냘픈 표면 장력으로 다른 물방울들을 끌어당겼다. 하나의 물방울에도 온 우주가 비치는 법이다. 수많은 작은 물방울들의 상호 작용을 통해 3.1 운동의 마중물이 마련되었다. 여기에 200만 한국인의 눈물과 독립열이 결합해 성난 물길의 대분류가 되었고, 이는 3.1 운동이라는 한국인들의 역사적 공간을 창출했다. 한국인들의 독립 정신, 독립 염원, 독립열을 담은 3.1 운동이 시작되었다. 이는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고, 누구도 막을 수 없는 민족주의 에너지의 폭발이었다. 김규식과 여운형, 신한청년당의 동지들은 역사의 주인공이 되었고, 3.1 운동은 한국 근현대사의 분기점이 되었다. 역사는 자기 소명에 최선을 다한 이들에게 그에 걸맞은 역사적 이름과 의미를 부였다.

[김규흥 金圭興 18721936](김규흥 金圭興 18721936)

부록: 김규식 자필 이력서(1950. 3. 5)

7. 🤔 Rambling

  • 김용원의 유배

    • 김용원의 전처는 김규식 태어나기 전에 사망하고
    • 이후 다른 부인에게서 김규식을 얻었고
    • 김용원이 이뻐했다고 한다 112p
    • 김용원이 유배당하고, 혼자 남게된 김규식
    • 조부,형, 아버지 형재들도 다 살아 있었으나, 그들은 김규식을 거두지 않았다
      • 아마 두번째 부인의 아들이어서 그랬나보다.
  • 김규식은 영어를 잘했고

    • 릴리어스 언더우드 의 선교
      • 조선말로 통역을 김규식이 도와줬을것
      • 고종의 민비와의 알현도 있었는데, 김규식이 통역했을 가능성이 크다 117p
  • 언더우드가 미국으로 돌아가고

    • 김규식은 그 고아원을 나와 다른 학교에 입학했다.
  • 한국어와 영어로 매일 발행하는 최초의 한국 신문을 창간한 서재필 박사가 설립한 신문사 사무소에서 영어 직원 및 회계의 직위를 맡아 근무했다. 120p

  • 미국은 필리핀에 대한 기득권을 보장받고 러시아를 견제하기 위해 가쓰라-태프트 밀약을 맺어 일본의 조선 지배를 공식적으로 묵인했습니다.

  • 러시아는 러일전쟁 중 발생한 ‘피의 일요일’ 사건과 제1차 러시아 혁명으로 인한 내부 붕괴를 막기 위해 일본과 서둘러 종전 협상을 맺었습니다.

  • 일본은 전쟁 지속 능력이 한계에 달해 파산 직전이었으므로, 러시아가 내부 혁명을 수습하고 장기전으로 끌고 갔다면 최종 승리는 러시아에게 돌아갔을 확률이 높습니다.

  • 이승만은 고종 황제를 폐위하고 공화정을 세우려 한다는 반역 혐의(박영효 사건 연루)로 투옥되어 1899년부터 1904년까지 약 5년 7개월 동안 한성감옥에 투옥,5년 넘게 옥고를 치렀습니다.

  • 이승만은 고종의 밀사였음에도 황실을 비난하고 일진회를 사칭하는 무리수를 두었으나, 인맥을 통한 루스벨트 면담이 국내에 대성공으로 와전되면서 대중적 영웅으로 부상했습니다.

    • 이승만은 외교적 상징성 덕분에 임시정부 수장으로 영입되었고 김구는 실질적 운영을 책임졌으나, 해방 후 미군정의 외면과 단독 정부 수립을 둘러싼 노선 갈등 속에서 김구는 권력의 중심에서 밀려나게 되었습니다.
  • 이승만은 대중에게 인기가 있었기에 흩어지고 분열된 독립운동 단체드를 뫃을수 있었다.

구분 이승만 (외교·권력) 김구 (명분·정통성)
상해 시절 초대 대통령 (외교 독립 주도) 경무국장 → 주석 (임정 사수)
미국의 시각 활용 가치가 높은 세련된 외교가 다루기 힘든 고집 센 민족주의자
해방 후 노선 남한 단독 정부 수립 (현실론) 통일 민족 국가 수립 (명분론)
결과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 취임 정치적 고립 및 안두희에 의해 피살
  • 리더십의 비교
인물 주요 활동 거점 결과 및 현대사적 위치
김구·김규식 중국 상해 임시정부 법통 수호 및 좌우합작 노력 (통일정부 실패)
안창호 미주 본토 독립운동의 도덕적 토대와 실력 양성 (중도 통합의 상징)
이승만 하와이·미주 외교 노선 고수 및 남한 단독 정부 수립 주도 (초대 대통령)
  • 해방후 리더십 비교
세력 중심 인물 핵심 주장 결과
우익 이승만, 김구 즉각 독립, 강력한 반탁 대한민국 정부 수립 주도
좌익 박헌영 신탁통치 찬성(모스크바 안 지지) 월북 또는 지하 활동
중도파 여운형, 김규식 좌우합작, 통일 정부 수립 암살(여운형) 및 정치적 실각

고아소년 ‘존’ -> 부친의 유배, 친모 사망 -> 버려지다 시피 -> 병과 굶주림 -> 선교사 언두우드와 만남 -> 고아원에서 생존 영어 공부 -> ‘본갑이’라 불리고 -> 선교사의 팸플릿 표지 모델, 일본 관광엽서 모델로 등장 -> 의친왕과 언더우드 도움으로 도미 유학 -> 정서적 안정감, 로녹 대학에서의 성장 -> 자유,평안,정서적 성숙, 기독교 -> 의친왕의 도무 유학 도와줌 -> 유학 시절 주미한국공사관에서 외교관으로 임명 -> 조선으로 귀국 -> 조선의 멸망 -> 일본의 침략 -> 그의 커리어, 조선에서 종교,문화,교육 분야에서 중요한 역할 -> 중국 망명 -> 일본 제국주의 감옥에서 탈출 -> 일본 제국주의 105인 사건 조작 -> 중국혁명 동참 -> 신해 혁명, 청왕조붕과 중화 민국으로 -> 절친 김필순, 이태준 -> 언더우드로부터의 탈출 -> 중국 동제사에 가담 -> 상해,남경 등지에서 적극적 활동 -> 유학 학교 , 교사, 학업과 독립운동 -> 2차 중국혁명 가담 -> 유동렬,이태준,서왈보 등과 몽고가서 사관학교 설립 -> 좌절 -> 몽고 고륜, 장가구, 천진 등지에서 미국인 회사 취직 -> 생계유지 독립활동 기회 기다림 -> 첫 아내 조은애와 상봉, 장남 김진동 상봉 -> 아내 폐결핵으로 죽음 -> 신한혁명당(1915), 대동단결선언(1918) 등에 참여 - >

8. 🔗 References


  1. 의친왕(義親王, 1877년 3월 30일 ~ 1955년 8월 16일)은 대한제국의 친왕이다. 부황은 조선 제26대 왕 고종, 모후는 명성황후, 사친은 귀인 장씨, 친왕비는 의친왕비이다. 독립신문의 독립성명문 보도와 상해 대한민국 임시정부 망명 시도가 기록으로 전해지나, 본인은 신문조서에서 이를 부정하였다. 광복 후에는 애국협회 회장에 추대되었으며,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가 발간한 《민족정기의 심판》에 이름이 수록되었다. ↩︎

  2. Young Men’s Christian Association 대한민국에는 개화기 때인 1903년에 들어왔다. 당시에는 황성기독교청년회[7]라는 명칭으로 불리며 개신교와 서양 문화 유입에 지대한 역할을 하였으며 일제강점기 많은 지식인과 독립운동가들이 이곳을 거쳐갔다. 2.8 독립 선언도 재일본한국YMCA에서 일본에서 유학하던 한국인 학생들의 독립선언을 가진 사건이고, 3.1운동의 큰 이유가 되기도 했다. 또한 1970~80년대 당시에 민주화 운동쪽으로도 명성이 꽤 있었으며 부마민주항쟁 당시 노무현 변호사가 문재인 변호사 등과 함께 부산YMCA 이사와 시민중계실 법률 자문을 맡았다. # 또한, 1996년에는 문재인 변호사도 부산 YMCA 이사를 역임하였다.[8] 이렇게 일제강점기, 군사정권 시기 재야운동에 큰 지분을 차지할 수 있었던 것은 YMCA가 외국인 선교사와 사제들을 끼고 있는 국제 단체라 함부로 건드렸다간 국제문제로 비화할 수 있어 대놓고 탄압하기 어려우며, 명백한 개신교 지향을 가졌기에 독재정권이 반체제 인사들에게 흔히 제기했던 공산주의자라는 의혹에서 비교적 자유로울 수 있었기 때문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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