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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규식과 그의 시대 2

☝️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수난을 낮낮이 볼수 있다. 미영등 제국주의 나라에 대한 깊은 빡침, 이승만인물이 만들어내는 분열과 혼돈, 그들은 결국 또다른 힘에 의지한다.

📚 김규식과 그의 시대 2

[!INFO] 책 정보

  • 저자: 저자/정병준
  • 번역:
  • 출판사: 출판사/돌베개
  • 발행일: 2025-08-15
  • origin_title: -
  • 나의 평점: 10
  • 완독일: 2026-03-06

4. 🏆 Top Highlights

📌 첫 번째 문장

신한청년당이 파리 강화회의 대표를 파견하고 김규식이 실제로 파리에 도착해 맹렬한 활동을 벌이게 된 것은 단순히 의지와 시도의 문제, 혹은 기회포착적이고 즉흥적인 대처의 산물이 아니었다. 상해는 대표를 파리까지 보낼 수 있는 실행력, 공작력, 자금력, 정보력을 가지고 있었고, 김규식은 그러한 외교•선전의 임무를 혼자서 수행할 수 있는 능력과 준비를 갖추고 있었다. 즉, 탁월한 정세 파악과 명민한 판 단력• 실행력을 갖춘 여운형과 파리강화회의에서 외교•선전 임무를 수행할 수 있는 언어적•문화적 소양과 실력을 갖춘 집념의 김규식이 만나서야 파 리강화회의 대표 파견이 성사될 수 있었던 것이다

📌 두 번째 문장

1911년 중국의 신해혁명, 1914년 제1차 세계대전 발발, 1917년 러시아혁명, 1918년 제1차 세계대전 종전과 파리 강화회의 등은 국내외 독립운동 진영의 중대한 관심사가 되었으며, 독립운동 진영의 노선 정립과 방향 전환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 세 번째 문장

김규식의 파리행은 기본적으로 미국에서 오는 이승만, 정한경, 박용만 등과 함께 공보국을 설치하고 자신은 한국 외교사절단의 한 명으로 활동한다는 구상에 입각한 것이었다. 이에 대해서는 여러 차례 김규식의 소회가 발표된 바 있다. 그러나 최초 구상과는 달리 김규식만 홀로 파리에 도착했 고,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3•1운동이 발발하게 되는 것이다. 이로 인해 김규식의 파리행 목적도 변경되었는데, 최초에 수립된 각국의 동정적인 여론을 얻고 독립을 청원하는 작업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3•1운동으로 분출된 한국 독립의 의지와 열의, 임시정부 수립과 한국 독립의 정당성을 홍보하는 쪽으로 변경된 것이다.

📌 네 번째 문장

김규식은 병들고 지쳤다. 번아웃(burn-out) 상태였다. 미국에 도착한 지 1년 만이었다. 파리강화회의는 무위로 돌아갔고, 워싱턴에서 기대했던 국제연맹회의는 취소되었다. 미국에 도착한 직후 워싱턴과 샌프란시스코를 오가며 공채표-애국금 분쟁을 조정해야 했다. 병으로 쓰러져 입원했고, 1920년 3월에는 뇌수술을 받은 후 3주 만에 퇴원해 3개월 동안 미국 전역을 다니며 공채표를 판매해야 했다.

📌 다섯 번째 문장

상해 임시정부의 세 축이던 대통령 이승만, 국무총리 이동휘, 노동국총판 안창호는 모두 이렇게 임시정부를 떠났다. 이승만과 이동휘는 각각 지구 반대편 미국과 소련을 향해 떠났고, 안창호는 상해에 잔류했다. 주역들이 떠나자 , 임시정부를 유지할 동력과 민심의 환호도 급속히 냉각되었다.

김규식은 여운형과 함께 (워싱턴 회의 대신) 극동민족대회를 선택했다. 동아시아에서는 파리 강화 회의, 국제연맹에 대한 실망과 반비례해서 혁명 러시아에 대한 기대와 관심이 고조되었다. 사회주의, 모스크바에 대한 기대와 새로운 가능성을 향한 희망이었다. 제1차 세계 대전을 통해 차르 전제를 무너뜨린 1917년 혁명의 힘, 1918~1922년간 제국주의 국가들의 간섭, 시베리아 출병 및 시베리아 내전을 이겨낸 군사적 저력, 식민지 반식민지 약소 민족에 대한 직접적 지원과 연대를 공언한 국제 연대 정신 등이 이들을 사회주의, 공산주의, 모스크바로 향하게 했다.

5. 📌 Key Concepts

5.1 핵심 키워드 정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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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도 사건명 핵심 내용
1895년 4월 삼국간섭 일본의 세력 위축, 조선 내 친러파 득세
#1895년 10월 을미사변 (乙未事變) 명성황후 살해, 친일 내각 수립 시도
1895년 11월 단발령 실시 을미개혁 강행, 유생들의 의병 투쟁 촉발
#1986년 2월 아관파천 고종의 러시아 공사관 피신, 일본 세력 일시 퇴조
#1904년 한일의정서 러일전쟁 명분으로 일본군의 서울 및 국토 무단 점령
#1905년 을사늑약 외교권 박탈, 통감부 설치 (실질적 식민지화 시작)
#1907년 정미7조약 군대 해산, 행정권 장악 (고종 강제 퇴위)
#1910년 경술국치 국권 피탈, 일제 강점기 본격 시작
1912년 7월 4일경 동제사 신규식이 비밀조직 동제사 설립,전선기에 300여명
1915년 신한혁명당 여운형이 설립
1919년 1월 19일 김규식 결혼 남경에서 김순애와 결혼
1919년 2월 1일 파리만국회의 김규식 2.1일 상해를 출발
1919년 2월 2.8 독립선언 일본에서
#1919년 3월 3.1 운동 시작 국내
#1919년 4월 대한민국임서정부수립 상해 (신규식의 최초 초안은 실패)

![Pasted image 20260228112727.png](Pasted image 20260228112727.png) 🗺️ 1919년, 전 세계를 무대로 한 독립운동의 지도

  • 파리 (김규식): ‘파리강화회의’ 에 참석하여 민족자결주의에 따라 조선의 독립을 외치는 김규식 선생의 모습을 담았습니다. 당시 국제 사회에 우리의 목소리를 전한 ‘외교 독립’의 상징입니다.

  • 상해 (신규식, 여운형, 안창호): 독립운동의 두뇌와 입이 되었던 ‘대한민국 임시정부’ 의 탄생지입니다. 신규식, 여운형, 안창호 선생 등 주요 지도자들이 모여 정부를 구성하고, 파리에 파견된 김규식 선생을 지원하며 독립운동을 지휘했습니다.

  • 미국 본토 (안창호, 서재필): 도산 안창호 선생이 세운 ‘대한인국민회’ 를 중심으로, 재미 한인들이 실력을 양성하고 독립운동의 든든한 재정적 젖줄 역할을 했습니다. 서재필 선생 또한 외교 활동으로 지원했습니다.

  • 하와이 (이승만): ‘한인기독교학원’ 을 세워 인재를 양성하고, 가장 큰 한인 노동자 커뮤니티의 지지를 바탕으로 이승만 선생이 세력을 구축했습니다.

  • 국내 (서울): ‘3.1 독립선언’ 의 현장입니다. 수십만 명의 군중이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전 세계에 우리의 독립 의지를 알렸고, 이 열기가 상해 임시정부 수립의 ‘방화쇠’ 가 되었습니다.

  • 블라디보스토크 (연해주): ‘대한국민의회’ 가 수립되어 무장 투쟁의 기반을 닦았습니다. 최재형, 이동휘 선생 등이 핵심으로 활동했습니다.


6. 🖍️ Book Marks

김규식과 그의 시대 2 - 3ㆍ1운동의 빛, 한반도를 비추다(1919~1921)

프롤로그: 여운형과 김규식, 3·1운동의 문을 열다

27 1919년 3•1운동이 벌어지기 전야, 중국 상해에는 한국현대사의 주인공으 로 이름을 떨칠 두 사람이 등장했다. 한 사람은 파리강화회의 특사 김규식, 다른 한 사람은 신한청년당의 조직자 여운형이었다. 김규식은 외국인 상사 에 다니던 회사원이었고 여운형은 외국인 서점의 직원이자 교회 전도사였 다. 두 사람 모두 중국 내 한국 독립운동 진영 내에서 약간의 이름을 얻었 을 뿐, 아직 무명의 청년들이었다.

29 1919년 3.1운동기까지 (김규식,여운형)은 선생과 학생의 위계 혹은 관선이 두사람의 관계에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보인다. … 김규식은 합리적이고 이성적이지만 내향적이고 대인관계에서 냉담하다는 평이 있었던 반면, 여운형은 팔망미인이라 불릴 만큼 다재다능하고 외향적이며 호방한 만능 스포츠맨이었다. 이러한 두 사람 간 일종의 불협화음은 수십 년간 한국 독립운동의 전선에서 전진과 후퇴의 우여곡절을 겪으며 단련되고 깍였고, 해방 이후 두 사람이 다시 만났을 때 본격적인 정치 노선. 실행에 있어서 조화를 이룰 예정이었다.

29 제1차 세계대전의 종전과 파리강화회의 국면에서 먼저 움직인 쪽은 탁월한 정세 판단과 신속한 실행력•돌파력을 가진 여운형이었다. 그는 #1918년 11월 27일 상해를 방문한 윌슨(woodrow Wilson) 대통령의 특사 크레인(Charles Crane)을 만났고, 이틀 뒤인 11월 29일 윌슨 대통령에게 보내는 편지를 전달했다. 이를 위해 신한청년당을 조직했고, 청원서가 윌슨 대통령에게 전달되지 않을 상황을 고려해 예비 계획으로 파리강화회의에 참석할 예정이던 미국인 신문기자 밀러드(Thomas Millard)에게 따로 청원서 전달을 부탁했다. 나아가 신한청년당 대표를 파리강화회의에 파견해 직접 한국 독립의 의지를 표명하기로 했다. 김규식이 파리강화회의 대 표로 선정되었다. 여운형과 신한청년당의 동지들도 밀사가 되어 만주, 연해주, 국내, 일본에 잠입했다. 김규식은 파리에서, 여운형과 동지들은 국내 외에서 활약했다. 국내외에 잠입한 신한청년당의 밀사들은 파리강화회의 대표 파견을 선전하며 응원과 지지를 호소했다. 시대의 변화를 감지한 두근거리는 마음들이 만나 일을 도모했고, 세상을 바꾸는 힘이 되었다.

30 김규식은 … 1918년 말 여운형의 크레인 면담 및 신한청년당 결성 이후 곧바로 이들과 합류했다. 김규식이 신한청년당 초대 이사장이 되는 것은 이러한 기성 활동, 인간관계, 조직적 연계의 결과물이었을 것이다.

30 김규식은 1919년 2월 1일 상해에서 파리로 향하는 프랑스 우편선 포르토스호(S.S. Porthos)에 올랐다. 혼자의 몸이었다. 한국이 일본의 식민지가 된지 9년이 지났으며, 세계는 한국 문제를 일본의 내정 문제로 간주하고 있었다. 어떻게 일본 통치의 불법성과 야만성을 폭로하고 한국 독립의 정당성을 주장할지, 그 수단과 방법이 무엇인지에 대해 의지하고 의논 할 상대가 없는 혈혈단신이었다. 1918년 이래 파리강화회의와 민족자결주의를 향한 한국 독립운동 진영의 기대가 컸으나, 파리강화회의에 한국인 대표를 파견하는 데 성공한 것은 상해 신한청년당뿐이었다. 파리에 도착하는 것 자체가 큰 도전이었다. 미주에서는 이승만•정한경 등이 대표로 선정되었으나 파리에 갈 수 없었고, 노령 대표 윤해•고창일은 가까스로 파리에 도착했으나 이미 파리강화회의가 종결된 다음이었다. 신한청년당이 파리 강화회의 대표를 파견하고 김규식이 실제로 파리에 도착해 맹렬한 활동을 벌이게 된 것은 단순히 의지와 시도의 문제, 혹은 기회포착적이고 즉흥적인 대처의 산물이 아니었다. 상해는 대표를 파리까지 보낼 수 있는 실행력, 공작력, 자금력, 정보력을 가지고 있었고, 김규식은 그러한 외교•선전의 임무를 혼자서 수행할 수 있는 능력과 준비를 갖추고 있었다. 즉, 탁월한 정세 파악과 명민한 판 단력• 실행력을 갖춘 여운형과 파리강화회의에서 외교•선전 임무를 수행할 수 있는 언어적•문화적 소양과 실력을 갖춘 집념의 김규식이 만나서야 파 리강화회의 대표 파견이 성사될 수 있었던 것이다.

파리에 도착한 김규식은 단기필마였으나, 전심전력으로 한국 독립의 정당성과 한국의 대의를 호소했다. 파리에 파견된 김규식은 3•1운동기 한국 독립운동의 살아 있는 표상이 되었다. 한국인들에게 파리강화회의, 민족자결주의, 세계대개조의 분위기 속에서 한국 독립 선전의 기회를 보여 주는 직관적 징표이자 유일한 한국의 대변인 역할을 부여받았다. 그리고 이는 국내외에서 일렁이던 독립운동의 작은 목소리들을 거대한 메아리의 대합창으로 이끌어 내는 마중물이 되었다.

1918년 11월 여운형과 크레인의 만남, 1919년 2월 김규식의 파리행은 두 사람의 인생행로를 완벽하게 바꾸어 놓았다. 상상하거나 그려 보지 못한 일이었으나, 두 사람은 3•1운동의 문을 활짝 여는 데 결정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두 사람은 자신들이 3•1운동이란 역사적 대파고의 정점에서 앞으로 내달리는 역할을 부여받았음을 알지 못했다. 자신이 생각하는 세계를 향해 자신의 전부를 다 바쳐 최선을 다할 뿐이었다. 3•1운동 이후 두 사람의 삶은 3•1운동 이전과 질적으로 다른 공간에 위치했다. 무명의 청년들은 독립운동의 주요 지도자로 변신했고, 자신의 삶과 한국 독립운동의 방향을 변화시켰다.

서먹하고 덤덤했던 두 사람은 해방 정국에 이르기까지 다르면서도 같은 길을 걸어가는 동반자가 될 것이었다. 그러나 아직 이들은 자신들에게 무슨 일이 벌어질지, 한국의 앞날에 어떤 일이 펄쳐질지 알 수 없었다. 여운형과 김규식은 이렇게 첫 번째 합을 맞추었다. 역사는 도전하는 자에게 그에 합당한 역할과 이름을 부여할 예정이었다.

1장 여운형·크레인 면담의 연쇄: 신한청년당 결성, 윌슨 대통령 청원서, 파리강화회의 특사 파견의 3중주(1918)

1 ‘윌슨 대통령의 특사’ 크레인의 상해 방문

2 여운형과 크레인의 만남(1918. 11. 27)

40 여운형이 크레인을 만난 것은 1918년 11월 27일 점심 칼튼카페 환영 행사장에서 였다

41 필자는 여운형이 크레인에게 보낸 편지 및 윌슨 대통령에게 보내는 청원서의 원본을 2017년 컬럼비아 대학 도서관에서 발견했다.

42 여운형 진술 중 가장 중요한 것은 핏치의 아들 덕분에 크레인 환영회에 참석할 수 있었다는 대목이다. 여운형이 얘기한 아들 핏치는 그가 일했던 협화서국의 지배인인 핏치의 아들을 가르켰다.

44 여운형은 한국대표의 #파리강화회의 파견 가능성과 이에 대한 크레인의 의견을 문의한 것이다. 크레인의 답변을 종합하면 다음과 같았다. 첫째, 파리강화회의의 피압박 민족 문제 처리는 특정 국가를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추상적인 일반론이다. 둘째, 파리강화회의에서 한국 문제가 정식 의제가 되어 토론에 붙여질지는 미상이다. 셋째, 파리강화회의에 한국대표를 파견해 청원하는 것은 문제가 없다. 넷째, 한국대표가 파견되면 자신이 원조하겠다는 것이다. 그런데 크레인의 답변은 모호한 면이 적지 않고, 크레인이 파리강화 회의에 파견된 한국대표를 원조할 위치나 입장은 아니었다. 또한 크레인은 짧은 상해 체류 중 너무 많은 일정을 소화하고 엄청난 인파와 마주해야 했기 때문에, 과연 여운형에게 구체적이고 정확한 언질을 주었는지는 알 수 없다

46 크레인과의 만남을 계기로 윌슨 대통령 앞 청원서 제출, 파리강화회의로 한국대표 파견, 신한청년당 조직 및 국내외로 밀사 파견이라는 연속적 사건이 발생하게 된 것이다.

3 여운형과 장덕수가 작성한 청원서의 내막

47 크레인 면담 후 여운형이 제일 먼저 찾아간 것은 1918년 여름부터 상해에 체류하고 있던 장덕수였다. 여운형은 크레인의 연설 및 회견 전말을 전하 며 파리강화회의에 한국대표를 파견하고, “여비 사정으로 대표 파견"이 불 가능할 때를 대비해 문서로 한국 사정을 보고하자고 제안했다. 여운형의 회상이다.

당시 나는 혼자서 대표를 파견하는 것도 불가능하였기 때문에 영문으로 각 나라에 조선의 사정을 보고하고 동정을 구하는 취지의 청원서 두 통을 작성하여, 그중 한 통을 미국 대통령 윌슨에게, 다른 것은 만국평화 회의에, 만약 대표를 파견하는 것이 가능하지 않을 경우는 상해 밀라드 평론잡지 주필인 밀라드(이 사람은 당시 미국에서 중국의 만국평화회의 파견 대표원의 고문으로 와 있었던 사람임)에게 발송을 부탁했다. (「피의 자신문조서(제2회)」, 1929. 8. 1. 경성지방법원 검사국)

48 장덕수가 상해로 건너온 후 여운영-장덕수 동맹이 성립되었고, 신한청년당의 핵심 8명이 화합하게 되었으며, 이들이 신한청년당을 조직하게 되었다. 8명은 여운형,장덕수,조동호,김철,선우혁,한진규,김규식,서병호 였다.

50 김규식은 1920년 11월 15일 미군 수송 함 토머스호(us Transport Thomas)로 하와이 호놀룰루에서 마닐라로 밀항하려다 발각되었다. 당시 재미 한인 독립운동가들은 일본을 거치지 않고 중국으로 가는 배편을 구하려 애썼는데, 하와이의 박용만이 1919년 호놀룰루에서 토머스호를 타고(1919. 5. 17) 마닐라를 경유해 블라디보스토크로 건너갔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이 소식을 들은 이승만과 김규식은 미군 당국에 토머스호 승선 허가를 요청했다. 승선을 거부당한 이승만은 고향으로 향하는 중국 노동자의 관들이 실린 화물선에 편승해 상해로 갔고, ‘관에 몰래 숨어 상해에 갔다’는 일생의 유명한 에피소드를 남겼다. 반면, 김규식은 고지식하게 토머스호에 몰래 탑선했다가 예인선이 호놀룰루항을 벗어 나기 전 발각되어 실패했다. 그 과정에서 그가 소지하고 있던 중요문서들이 미 육군 정보국(Military Intelligence Division, MID)에 의해 사진 촬영되었다. 그 가운도 여운형 청원서가 들어 있는 것이다.

4 여운형-크레인 편지(1918. 11. 29)와 윌슨 대통령 앞 청원서(1918. 11. 28)

63 청원서 내용은 크게 서론, 본론, 결론의 3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서론에서는 제1차 세계대전과 일본· 한국의 관계를 기술했고, 본론에서는 일본 통치하의 한국 상황을 기술했으며, 결론은 한국 독립에 대한 미국의 후원 을 요청하는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

서론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제1차 세계대전은 미국의 참전으로 정의, 인도, 자유에 기초한 승리가 되었다. 둘째, 파리강화회의에서 윌슨 대통령이 주창한 국제연맹이 세계평화의 유지 기관으로 제시되었는데, 한국과 일본 문제는 동양평화 및 세계평화와 긴밀한 관계가 있다. 셋째, 일본은 전제주의, 군벌주의, 관료주의, 제국주의 국가로 자유주의, 인도주의, 평화주의, 국제연맹을 이해하지 못하는 아시아의 스파르타이다. 넷째, 일본은 대륙 확장 정책으로 만주, 몽고, 중국에서 우월권을 확보하려 하며, 조선•대만에서처럼 다른 외세를 축출하려 한다. 일본은 세계평화의 장애물이다. 다섯째, 일본의 대륙 확장 정책은 한국 점령에서 시작되었고, 한반도는 아시아의 발칸반도로 일본 육해군의 거점이 되었다. 여섯째, 한국은 4,200여 년의 역사를 가진 문명국가이나 평화를 사랑해 러일전쟁 이후 일본에 병합되었다. 일본은 항상 한국 독립을 보증하고 동양의 평화를 주장했으나 결국 한국은 멸망했다.

즉, 제1차 세계대전의 승리를 정의, 인도, 자유의 승리이자 미국, 윌슨의 공로로 돌리며, 국제연맹에 대해 찬사를 보낸 후, 일본은 전제주의, 군벌주의, 관료주의, 제국주의 국가로 한반도를 발판으로 대륙 팽창 정책을 추구하고 있다고 설명한 것이다.

다음 본론에서는 일본 점령하의 한국 상황을 정신, 정치, 경제의 세 측 면에서 설명하고 있다. 분량상으로는 정신적 측면이 가장 많으며, 그다음 은 경제적 측면이며, 정치적 측면은 소략하게 다루어졌다.

66 이상과 같이 청원서를 종합하면, (1) 정의, 인도, 자유 등으로 대표되는 1차 대전 승리의 정신과 그에 끼친 미국과 윌슨 대통령을 향한 찬사와 기대, (2) 일본이 전제주의, 군벌주의, 관료주의, 제국주의에 기초해 한반도를 발판으로 한 대륙 확장 정책을 펴는 데 대한 경고, (3) 일본 점령하의 한국 상황을 정신적, 정치적, 경제적 측면에서 설명, (4) 한국인의 독립투쟁 의지와 이에 대한 미국의 지원 요청 등으로 요약할 수 있다. 한국이 독립할 필요성을 세계의 대세, 인도•정의, 한국인의 자유의지 등 보편성에서 구하면서, 한편으로 일본의 대륙 침략 정책에 기초한 아시아의 갈등 가능성과 일본 통치하 한국의 참혹한 현실을 부각시킴으로써 한국 독립에 대한 미국의 동정과 후원을 요청한 것이다.

2장 한국인들의 파리강화회의 대표 파견 시도와 3·1운동

1 한국과 세계 약소국가들의 파리강화회의 대표 파견 시도

(1) 한국인들의 파리강화회의 대표 파견 시도

73 상해,샌프란시스코,뉴욕,블라디보스토크,국내에서 1918 ~ 1919년간 연달아 이어진 이러한 파리강화회의 대표 파견 시도들은 상호 연쇄반응과 공명 효과를 불러일으켰고, 결국 동경의 2.8 독립선언과 서울의 3.1만세운동으로 이어지는 직접적인 하나의 계기가 되었다.

(2) 식민지ㆍ약소국들의 파리강화회의에 대한 기대와 대표 파견
  • 이집트
  • 인도
  • 베트남
  • 중국 청도 -> 일본으로 배정됨

2 국내외 한인들의 세계대전·파리강화회의 인식

(1) 해외 독립운동 세력의 제1차 세계대전ㆍ파리강화회의에 대한 인식

77 국망 이후 한국 독립운동 진영은 계몽운동기의 의병전쟁노선과 실력양성노선의 한계를 극복한 독립전쟁노선을 총노선으로 채택했다. 이는 결정적 시기에 최후의 독립전쟁을 통해 국권을 회복하며, 그때까지는 국외 독립운동 기지에서 군사력과 경제력 등 실력을 양성한다는 노선이었다. 여기서 결정적 시기란 일본과 중국·러시아•독일•미국 등 강대국이 교전해서 한반도 정세가 급변하고, 한민족에게 독립운동의 유리한 정세와 기회가 조성되는 시기를 의미했다. 때문에 1911년 중국의 신해혁명, 1914년 제1차 세계대전 발발, 1917년 러시아혁명, 1918년 제1차 세계대전 종전과 파리 강화회의 등은 국내외 독립운동 진영의 중대한 관심사가 되었으며, 독립운동 진영의 노선 정립과 방향 전환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특히 19141918년간의 제1차 세계대전은 해외 한인들의 독립운동 노선에 중요한 영향을 끼쳤다. 1914년 연해주에서 대한광복군정부, 하와이에서 국민군단이 성립되고 독립전쟁론이 비등한 것은 제1차 세계대전과 연관된 것이었다. 19141915년간 활동한 신한혁명당은 노령 연해주의 권업회, 북간도의 간민회, 중국 상해,북경의 동제사 인물들로 구성되었는데,,,

86 그런데 3•1운동 발발 이후 『매일신보」는 「민족자결주의의 오해」라는 대표적인 논설을 게재했다. 이 논설은 윌슨의 민족자결주의에 대한 오해가 만연하다며, 이는 패전국에 해당하는 것이지 승전국이나 중립국에 해당 하는 것이 아니다라고 거칠게 비판했다. 미국이 인디언, 하와이, 필리핀의 자치나 독립을 허용하지 않고, 영국도 인도 등 식민지를 포기하지 않을 것 이기에, 일본도 ‘1동조동근’으로 내지와 상호 분리할 수 없는 조선을 포기할 수 없다는 것이다.

[1918년 우드로 월슨의 민족자결주의 미국의 속내와 일본의 조선시선](1918년 우드로 월슨의 민족자결주의 미국의 속내와 일본의 조선시선)

(2) 국내의 파리강화회의 인식

[윤치호 尹致昊](윤치호 尹致昊) 대한제국의 교육인, 정치인, 사회운동가이자 일제강점기의 친일반민족행위자.

92 3•1운동이 시작되자 윤치호는 가능한 한 많은 일본인 유력자들과 만나 (1) 조선의 독립 문제는 파리강화회의에 상정될 기회가 없다. (2) 미국이나 유럽 열강이 조선 독립을 지지해 일본과 맞설 가능성은 없다 (3) 독립이 주어져도 조선은 독립을 유지할 준비가 안 되어 있다. (4) 약소민족이 강한 민족과 함께 살려면 강자의 호감을 사는 수밖에 없다는 이야기를 지속적• 반복적으로 강조했다.

윤치호는 몽골, 카이로 등지에서 독립운동이 전개되는 것을 보고 독립 운동이 일종의 정치적 인플루엔자라고 비아냥대며, 독립운동에 참가한 기독교계 목사와 학생들은 잘못된 길에 들어선 ‘정직한 사람’들이지만 손병희• 오세창 같은 천도교 지도자들은 가난하고 무지한 신도들로부터 수백 만 원을 사취한 사기꾼이라고 비난했다.

95 이승만, 안창호, 김헌식 등 재미 한인 지도자들이 동경과 서울의 여론 주도층에 영향을 끼쳤지만, 실제로 파리강화회의에 대표를 파견한 것은 상해 청년들이 조직한 신한청년당이었다. 한국의 유력자이자 저명인사 였던 윤치호는 파리강화회의의 적격자로 많은 사람의 권유를 받았지만 독립운동을 냉소적인 태도로 비난하는데 그쳤던 반면, 무명의 여운형은 크레인을 만나 청원서를 전달하고, 신한청년당을 조직해 김규식을 대표로 파리에 도달하게 하는 데 성공했다. 나아가 김규식은 전력을 다해 파리강화 회의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의 노력을 경주했다. 역사의 파도가 밀려올 때 어떤 이는 수수방관하고 비난하는 태도를 취한 반면, 다른 어떤 이는 적극적 행동을 취함으로써 자신과 민족의 운명을 바꾸었다. 시대와 역사의 주인공이 될 것인가, 배신자가 될 것인가는 스스로가 선택한 자신의 운명이었다.

3 벼락정당 신한청년당 창당과 김규식 이사장

(1) 신한청년당 창당과 김규식 이사장

96 김규식은 1918년 12월 이전 신한청년당 대표로 선정되어 파리행이 결정되었다. 이와 함께 신한청년당 주역들은 국내외로 파견되어 김규식의 파리행을 알리고 선전 활동과 자금 모집을 시도했다. 신한청년당 특사 김규식은 파리로 파견되었고, 여운형은 간도 노령으로, 장덕수는 일본으로, 선우혁, 김철은 국내로 파견되었다. 신한청년당 주역들은 국내외 각지로 파견된 밀사이자 특사였으며, 이들은 3.1운동의 주역이자, 독립운동의 선구자로 변신했다.

99 여운형은 20세 이상 40세 이하의 사람들로 (신한청년당)당원을 구성했는데, 상해 주재 터키청년당의 일원인 아멜 베이로부터 터키청년당과 관련한 얘기를 듣고 이를 모방했다고 한다.

(2) 신한청년당의 조직과 당원들
(3) 상해 독립운동 세력의 세대 교체와 신한청년당의 사상적 지향

114 신한청년당 설립은 상해 독립운동의 세대 교체 내지는 재편을 의미하는 것으로, 여운형은 신규식 등 선배들의 사상과 행동을 이어받으면서도 그것을 능가하는 지도력을 지닌 핵심인물이 된 것이다.

117 1차 대전 이후 세계를 뒤흔든 파리강화회의와 국제연맹에 대한 외교적 기대를 한편으로 하고 러시아혁명으로 대표되는 사회주의.공산주의에 대한 새로운 기대를 품고 있었던 점은 분명한 사실이다.

117 <독립신문>은 여운형이 크레인에게 보낸 청원서가 한국 독립운동의 첫 ‘발단’이었으며, 신한청년당이 김규식.장덕수.여운형.김철.선우혁.서병호를 파리.일본.러시아령.국내로 파견함으로써 “정숙(표면상)하던 한토 삼천리에 장차 일대풍운이 일어날 조짐이 있더라"라고 평가했다.

3장 파리로 가는 김규식, 알려지지 않은 행적

1 김규식의 중국 내 행적(1918. 12~1919. 1)

122 새로 발견된 자료들은 김규식이 파리강화회의로 출발하기 전 중국 내에서 맹렬한 외교•선전 활동을 벌였으며, 나아가 파리에서 수행 할 선전 활동을 철저하게 준비했음을 보여 준다. 이는 지금까지 전혀 알려 지거나 주목받지 않은 점이다. 나아가 신한청년당 대표로 선발된 김규식이 이러한 외교, 선전, 준비 활동을 함께한 사람은 여운형이 아닌 신규식이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기성의 인식이나 통설과는 다르게 김규식은 파리강화회의에 파견되기 전에 자신이 가지고 있던 동제사 계열 조직망, 연락망, 혹은 인간관계에 기초해 파리강화회의행이 성사되도록 최선의 노력을 기울였다.

(1) 박용만에게 쓴 편지(1918. 12. 10. 천진)

125 상황을 종합하면, 신한청년당은 급변하는 정세에 민활하게 조응해서 김규식을 파리강화회의 특사로 파견했고, 김규식도 이에 응해서 파리행이라는 결단을 내렸지만, 신한청년당 자체에 대해서는 큰 무게나 신뢰 감을 두지는 못했던 상황이었다고 판단된다. 가장 큰 이유는 이 정당이 찰스 크레인에게 청원서 수교를 위해 급조된 것으로 역사가 짧다는 점, 주도 자인 여운형이 상해는 물론 한국 독립운동 진영 내부에서는 신진에 불과했 다는 점, 때문에 신한청년당으로는 한국 독립운동 혹은 한국 독립운동 진영을 대표하는 지도적 역할을 주장하기 곤란하다는 판단이 복합적으로 작용했다고 판단된다. 김규식은 신한청년당이 정세를 포착해서 기민하게 대응한 결과 파리 강화회의 특사로 파견되지만, 중국 망명 이후 가져왔던 동제사•신규식 등 옛 중국 내 한국 독립운동 진영과의 연계성, 그 관성에 의지하는 면모를 보인 것으로 생각된다. 또한 미주 쪽에서는 박용만과 이승만을 중요한 외교 상대역으로 설정하는 판단을 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130 김규식이 박용만 - 하와이에서 이승만에게 패배한 후 - 과 접촉한 이유는 아마도 박용만이 1917년 뉴욕 소약국동맹회에 대한인국민회 대표로 공식 참석했던 것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즉, 박용만은 국제외교 무대에서 한국 독립문제를 논의해 본 가장 최근의 경험을 가지고 있었고, 그 활동은 <신한민보> 등을 통해 중국,만주,연해주의 한인 독립운동가들에게 잘 알려져 있었기 때문이다.

133 1918년 12월 10일 이전 김규식이 파리강화회의 특사로 결정되었으며, 김규식은 파리에 공보국을 설립해 최소 1년이상 운영하면서 일본 압제하의 한국 실정을 폭로하고 한국 독립의 정당성을 파리강화회의를 통해 역설하는 것을 자신의 중요 임무로 설정하고 있었다. 김규식은 파리강화회의 파견과 관련해 하와이의 박용만, 상해의 스콜스키 등과 협력할 계획이었다.

(2) 북경 주재 미국공사에게 보낸 청원서(1919. 1. 북경)

147 김규식이 파리에 도착해 가장 먼저 개설한 것이 바로 공보국이었으며, 신한청년당과 한국인 대표로서 활동했다. 이후 3.1운동 소식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소식이 전해진 이후에야 김규식은 임시정부의 명의로 독립 청원을 시작했다.

(3) 윌슨 대통령에게 쓴 독립 청원 편지(1919. 1. 25. 상해)

154 김규식은 신한청년당 대표로 파리강화회의에 파견되었는데, 파리에 도착한 후 제일 먼저 신한청년당 명의의 청원서가 아니라 신규식이 총재로, 자신이 사무총장으로 표시되어 있는 한국독립공화당 명의의 청원서를 제출한 것이었다. 김규식과 신규식이 왜 한국독립공화당이라는 명칭을 사용했는지는 알 수 없다. 이 조직명은 이전에 사용하던 동제사, 공제회, 혁명당, 체화동락회, 신한혁명당, 대동보국단, 한국혁명당, 한국독립위원회 등과 다른 것인데, 다양한 한국 독립운동 조직이 존재하며 모두 한국의 독립을 희망하고 있음을 표현하기 위한 노력의 소산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156 (김규식, 파리에서 윌슨대통령에게 청원) …대한제국정부의 태만과 무능으로 일본이 한국에 쉽게 침투했습니다 다양한 구실을 내세워 일본은 1985년 서울을 점령했습니다. 한국의 황후는 살해되었습니다. 1904 ~ 1905년간 일본은 한국정부에 자신의 대외적 주권을 행사할 권리를 박탈하는 조약을 강제했습니다. 일본의 침략은 증가해서 1907년 제국은 소멸했습니다.

(4) 신규식의 전한족대표위원회 소집 요구(1919. 2. 9. 상해)

165 신규식은 1919년 3월 상해에서 이런 조직체(임시정부 조직)를 만들자고 제안했지만, 이는 물리적으로 불가능했다. 1917년 대동단결선언은 ‘민족대회’를 개최해 최고민족회의를 결정하고자 했으나, 대회 소집 장소는 특정하지 않았다. 구체성과 실현성이 부족했다고 할 수 있다.

166 신규식의 최초 구상과는 차이가 있지만, 결국 대한민국임시정부가 #1919년 4월 상해에서 수립되었다 국내,민주,노령,일본에서 상해에 도착한 독립운동가들이 임시의정원을 결성하고, 임시의정원이 헌법을 공포하고 내각을 구성함으로써 임시정부가 성립하게 된 것이다. 신규식이 제안한 전한족대표위원회는 해내외에서 상해에 집결한 독립운동가들의 회의로 대체되었으나, 그가 생각한 국회, 국무회의,임시정부는 동일한 경로를 밟아 결성되었다.

1919년 2월 전한족대표위원회를 통해 최고위원회(국무회의)를 구성하고 임시정부를 수립하자는 제안은 당시 상해뿐 아니라 국내외 한국 독립운동 진영의 공통된 의견을 반영하는 것이었다. 즉, 임시정부를 수립해 한국 독립운동을 통솔하며, 파리강화회의 대표를 지원해야 한다는 공감대가 있었다고 할 수 있다.

(5) 신규식이 안창호에게 보낸 전한족대표위원회 개최 요구(1919. 2. 8)

169 신규식은 1919년 2월 8일 자로 미주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장 안창호 앞으로 편지를 보냈다. 이 편지는 김도형이 최초로 공개해 학계에 알린 것으로, 상해 동제사와 미주 국민회의 연관, 안창호의 조기 하와이행, 상해 #임시정부 의 성립 과정에 대한 중요한 정보와 연결고리를 제공한다.

이 편지(통첩)는 앞서 신규식이 하와이 『국민보』에 보낸 편지(1919. 2. 9)와 동일한 내용을 담고 있다. 신규식이 하와이 『국민보」에 보낸 편지는 원본이 아니라 영문 발췌 번역본만 남아 있는 반면, 신규식이 안창호에게 보낸 편지는 원본이 남아 있다.이 편지의 발견은 1917년 대동단결선언의 발견에 필적할 정도로 1919년 3• 1운동 시기 상해와 미주의 연계 및 초기 상해 임시정부 수립과 운영을 규명하는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이 편지(통첩)는 상해의 신정( 신규식) 등이 미국 국민회 중앙총 회장 안창호에게 보내는 형식으로 되어 있다. 화초가 그려진 꽃 편지지에 단정하고 정성스럽게 쓴 총 7장의 편지는 신규식의 친필로 작성된 것이다.

편지의 핵심적인 내용은 1919년 3월 상해에서 국내외 한민족 단체 대표들이 회동해서 전한족대표위원회를 열어 독립을 선언한 후 최고위원회(국무 회의), 즉 사실상 임시정부를 수립하자는 제안을 담고 있다

176 신규식의 전한족대표위원회 제안 편지(미주 안창호에게)(1919.2. 8)-국민회(미주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의 대동단결 6개 조건 결정(1919. 2. 24) -> 현순의 3•1운동 발발 소식 미주 전달(1919. 3. 9) -> 안창호의 상해행 통보(1919. 3. 13) -> 신규식•조성환을 국민회 중앙총회 대리인으로 위임(1919. 3. 19) -> 안창호•정인과• 황진남의 상해행 출발(1919. 4. 1)의 급박한 일정이 전개된 것이다.

이로써 우리는 왜 도산 안창호가 3• 1운동 발발 직후 곧바로 미국을 떠나 상해로 향하게 되었는지를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그 가운데는 신규식의 대동단결 회의 제안과 3•1운동 발발이라는 상해 - 미주 국내의 연동과 상호작용이 존재했던 것이다

안창호는 여권 없이 출국한 것으로 알려졌는데, 김도형에 따르면 국민회 중앙총회는 1919년 3월 20일 안창호•정인과• 황진남 3명이 출국할 수 있도록 미 국무부에 청원을 제출했고, 안창호 일행은 3월 28일 재무부 관세청으로부터 무여권 출국을 허가받았다. 온갖 어려움을 극복하고 안창호 일행이 상해에 도착(1919. 5. 25)했고, 상해 임시정부는 분명한 활력과 활기를 얻었다. 안창호가 상해에 도착함으로써 상해 임시정부는 임시’정부’로서의 기능과 체제를 갖추고 본격적인 역할을 개시하게 되는 것이다.

[안창호 安昌浩](안창호 安昌浩)

2 포르토스호의 김규식, 파리강화회의 청원서 초안을 준비

1918년 11월 강화가 성립되었을 때, 파리에 가기로 결정했으며 평화회의에서 세계 앞에서 한국의 실정을 최소한 호소하거나 폭로하기로 결정했다. (중략) 천진에서 출발해 남경으로 가서 [1919년] 1월 19일 [김순애와] 결혼했으며 (중략) 즉시 상해로 가서 파리행 여행을 준비했다. (중략) 1919년 2월 1일 프랑스 우편선 포르토스(Porthos)호를 타고 파리를 향해 상해를 떠났으며 3월 13일에 도착했다. 한국에서 3·1운동이 실행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전쟁 직후 통신 및 연락 두절로 인해 그동안 4월 2일까지 파리에 어떤 뉴스도 알려지지 않았다.

179 매표 문제는 중국대표단 수행원으로 파리에 가게 된 정육수의 도움을 받았다. [중국의 정육수 정위슈와 김규식 김규흥](중국의 정육수 정위슈와 김규식 김규흥)

182 김규식은 프랑스를 방문해 본 경험이 없으며, 아는 인맥은커녕 한국인이 존재하지 않던 파리에서 한국을 대표하는 파리강화회의 특사로 활동하기 위해서는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야 했다. 그 직접적 도움을 중국 친구들이 제공한 것이다. 주거, 생활, 접촉해야 할 기구,기관,언론,인물 등에 대한 정보와 소개,접근 방법 등을 제공한 누군가가 진우인과 오조추였을 것이다.

187 김필순 - 세브란스 1회 졸업생, 1911년 신해혁명에 참가하기 위해 세브란스의 학교 제자이자 친구인 이태준과 함께 중국으로 망명했다.

김필순 - 김규식과 공적,사적으로 밀접한 관계

김필순의 첫째 여동생 김구례 - 서병호와 결혼 둘째 여동생 김순애 - 김규식과 결혼 셋째 여동생 김필례 - 최형욱과 결혼

서병호, 김규식은 언더우두 2세와 함께 언더우드 목사에게 유아세례를 받은 최초의 한국인이었다.

188 김규식의 파리행은 기본적으로 미국에서 오는 이승만, 정한경, 박용만 등과 함께 공보국을 설치하고 자신은 한국 외교사절단의 한 명으로 활동한다는 구상에 입각한 것이었다. 이에 대해서는 여러 차례 김규식의 소회가 발표된 바 있다. 그러나 최초 구상과는 달리 김규식만 홀로 파리에 도착했 고,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3•1운동이 발발하게 되는 것이다. 이로 인해 김규식의 파리행 목적도 변경되었는데, 최초에 수립된 각국의 동정적인 여론을 얻고 독립을 청원하는 작업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3•1운동으로 분출된 한국 독립의 의지와 열의, 임시정부 수립과 한국 독립의 정당성을 홍보하는 쪽으로 변경된 것이다.

3 김규식의 부동(浮動)하는 대표성

(1) 갈등하는 두 가지 대표성 ⭐

192 이상 살펴본 바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김규식은 1913년 봄 중국 망명 이래 동제사의 중심인물이자 재중 한국 독립운동의 중추였던 신규식과 밀접한 연계 속에 활동했다. 김규식의 중국 내 활동은 신규식•동제사•신한혁명당 그룹과의 관련 속에서 이루어졌으며, 여운형•신한청년당은 이들의 영향 속에 위치하고 있었다. 둘째, 김규식은 1918년 12월부터 1919년 2월 사이에 윌슨 미국 대통령, 라인쉬 북경 주재 미국공사 등에게 청원, 호소 외교를 시도했다. 김규식은 신규식과 함께 윌슨 미국 대통령에게 보내는 청원서를 작성(1919. 1.25) 했고, 파리에 도착한(3. 13) 후 직접 미국대표부에 수교했다. 김규식은 자신의 파리강화회의 파견 및 임무 등을 담은 자세한 비망록을 북경 주재 미국공사에게 제출(1919. 1)해 도움을 청했다. 또한 북경 언론 등에 자신의 파리행을 알렸다. 셋째, 김규식은 하와이의 박용만에게 편지를 보내(1918. 12. 10. 천진) 파리에서 선전 활동을 도와줄 것을 요청했다. 또한 신규식은 김규식이 파리로 떠난 후 하와이 『국민보』 등에 전한족대표위원회 소집을 요구하는 편지 (1919. 2. 9. 상해)를 발송했다. 1917년 대동단결선언과 같은 방식이었다. 넷째, 김규식은 파리로 가던 도중 스리랑카 콜롬보에서 흑룡강성 치치하얼의 김순애에게 편지를 보내 파리강화회의에서 제출할 청원서를 상의(1919. 2. 25)했다. 김규식은 자신이 제출할 청원서의 상담자로 김필순, 서병호, 이승만 등을 상정하고 있었다. 여운형은 거론되지 않았다. 다섯째, 파리로 향하는 김규식에게는 아직 적절하게 조화되지 않은 두 개의 대표성•정체성이 자리하고 있었다. 오래된 대표성•정체성이 신규식 중심의 비밀결사인 동제사의 회원이라는 관성이었다면, 새로운 대표성• 정체성은 신한청년당으로 표현되는 여운형•장덕수• 조동호 중심의 새로운 동력이었다. 파리로 떠나는 김규식은 두 개의 조화되지 않은 정체성 사이에서 부동하고 있었다.

194 김규식은 1913년 중국에 도착한 이래 자신이 몸담았던 독립운동 그룹의 노선과 관성에 익숙했으며, 그에 의지했다. 제1차 세계대전의 종료와 파리강화회의 개막이라는 새로운 정세의 전개가 그의 파리강화회의 대표행을 결정지었으나, 그는 여전히 구래의 관성에 익숙했고 그에 의지했다. 새로운 동력, 새로운 에너지, 새로운 인물들과의 관계는 아직 시간과 노력이 필요했다. 그러나 김규식은 곧 자신이 공식적으로 신한청년당과 한국인을 대표하는 것임을 자각했다. 때문에 김규식은 곧바로 신한청년당 명의의 청원서•비망록을 제출했다. 4월 이후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소식이 전해지자, 김규식은 이제 신한청년당이라는 협소한 정당의 대표가 아니라 임시정부라는 정부의 대표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그에게는 하나의 대표성과 정체성이 아니라 계속 변화하는 대표성과 정체성이 부여되었던 것이다.

195 반면 여운형을 중심으로 한 신한청년당 그룹은 크레인을 통해 윌슨 대통령에게 청원서를 제출했을 뿐 아니라 동경, 서울, 만주•노령에서 적극적 인 활동을 펼침으로써 3•1운동의 대폭발을 가져오는 데 중요한 전기를 제공했다. 특히 여운형의 활동은 특별한 것이었는데, 정세를 신속•정확하게 판단하고 기회를 포착한 후 기민한 돌파력과 실행력으로 3• 1운동 공간에서 그 누구보다 먼저 파리강화회의에 대표를 파견하는 데 성공했던 것이다. 3• 1운동으로 한국 독립운동의 새로운 공간과 장이 펼쳐지자, 이들의 성가와 활약상은 배증되었다. 결국 신규식 중심의 비밀그룹과 여운형 중심의 신한청년당 그룹은 상해 임시정부의 중요한 동력으로 결합하게 되었다. 신규식•김규식의 비밀활동과 여운형•신한청년당의 활동은 임시정부 수립으로 수렴되면서 3•1운동의 거대한 용광로 속에서 용해되었다.

(2) 재중 한국 독립운동의 세력 교체, 노선 변화

197 #1905년 을사조약 이후 고종의 독립 회복을 위한 밀서.밀사 외교가 한국 독립운동에서 외교독립노선의 출발이 되었다고 한다면, #1915년 신한혁명당의 망명정부 수립 및 외교 시도는 이후 임시정부 수립 및 외교노선의 토대를 마련한 것이었다.

4장 국내외로 파견된 신한청년당 밀사들

1 신한청년당과 동제사의 관계

2 국내외로 파견된 신한청년당의 밀사들

(1) 간도ㆍ연해주로 간 여운형

210 여욶ㅇ은 1919년 1월 20일 장춘, 하얼빈, 블라디보스크로 향했다. … 시베리아 체코군 사령관 가이다 장군과 회견하고, 미국.영국.캐나다 3군사령부를 방문하고, 일본의 한국정책을 규탄하는 수만 장의 전단을 미국.영국.캐나다 연합군에 뿌리기도 했다. 3월 6일 블라디보스크를 떠나 상해로 귀국 -> 하얼빈 러시아인 여관에 머무는 동안 한명성으로부터 한국에서 독립만세 사건이 일어났다는 이야기를 처음 듣고 ,,, 상해로 간다.

(2) 일본으로 파견된 장덕수

1918년 5월 상해로 건너온 이후 여운형,신규식을 비롯한 한국 독립운동가들과 적지 않는 유대 혹은 연계를 가지고 있었다. ..장덕수가 관계한 신아동맹당… 일본 거주 한국.중국.대만 유학생들의 연대… 청년들의 조직

214 동경 2.8 #독립선언 은 미국 샌프란시스코와 뉴옥,중국 상해와 북경에서 추진하고 있던 파리강화회의 대표 파견 등의 독립운동 소식이 동경에 전해지고 공명 효과를 불러일으킨 결과 벌어진 것이다.

215 미국에서 유학하던 여운홍도 형 여운형의 지시로 일본에 도착했다. 여운홍은 로스앤젤러스에서 대한인국민회 총회장 안창호를 만나고, 샌프란시스코에서 대한인국민회 북미총회장 이대위를 만나 여비 보조를 받은 후 1919년 1월 14일 미국을 출발해 2월 1일 일본에 도착했다.

이광수, 장덕수 가 동경에 상경 -> 신한청년당과 동경 2.8 독립선언의 관계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이 두 사람이었다.

장덕수는 2월 20일 서울에 들어와 인천에 머물다 체포되었다.

(3) 중국과 일본을 왕복한 이광수

219 이광수는 중국 내 한인 독립운동가들과 역사적 인연이 있었다. 1913년 11월부터 1914년 1월까지 이광수는 상해에서 동경 유학시절 친구들인 홍명희.조소앙.문일평과 한집에 거주하며 신규식.김규식.신채호와 긴밀하게 지냈다. 그는 동제사 회원이 되었고, 김규식으로부터 성요한대학 입학 소개장을 얻기도 했다.

이광수는 신한청년당의 기관지 <신한청년> 주필을 맡기도 했다.

(4) 국내로 잠입한 선우혁ㆍ김철ㆍ서병호ㆍ김순애

224 김순애의 회고에 따르면 김규식은 파리강화회의에서 신용을 얻으려면 신한청년당이 국내에 사람을 보내어 독립을 선언해야 하고, 희생이 있더라도 국내에서 움직임이 있어야 사명이 잘 수행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 결과 서병호, 백남규, 이화여전 출신 이화숙, 김순애가 국내로 잠입하기로 결정되었다. 김순애는 상해의 선교사와 중국인의 자금 도움으로 부산항에 잠입했고,“여러 친지들에게 수소문한 결과” 국내에서 3•1운동 준비가 다 된 것을 알았다는 것이다.

[1919년 신한청년당 독립 투쟁](1919년 신한청년당 독립 투쟁)

3 3·1운동 이후의 신한청년당

신한청년당 중요한 활동

  1. 임시정부의 조직과 유지 필요한 인적.물적.정신적 자원 제공
  2. 독자적 기관지 <신한청년> 간행
  3. 3.1운동기 외교독립노선에 입각해 파리강화회의 대표 파견, 모스크마 극동민족대회에도 파견
  4. 신한청년당은 1925년 말 이후 최종적으로 소멸한것으로 추정된다.

4 3·1운동의 빛이 한반도에 비치다

3.1운동의 발발에는 크게 세 가지 동력이 복합적으로 작용했다 첫째. 고종의 죽음으로 대표되는 한 시대, 한 국가의 종말에 대한 애도의 분위기

  • (고종의 서거, 임시정부통한 ‘국민주권론’)3.1운동은 대한제국의 완벽한 종점이다. ‘한국인’이 역사의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새로운 시대의 서막이었다. 둘째. #세계1차대전 종식과 #러시아혁명 으로 대표되는 미래를 향한 희망과 낙관의 분위기,우드로 월슨 대통령 민족자결주의과 #파리강화회의 셋째.해외 한국 독립운동 진영의 활동과 국내외 독립운동 진영의 연계망 형성이 3.1운동의 견인차이자 기폭제로 작용

237 3.1운동의 민족사적 좌표는 바로 이 지점에 있었다. 한국인들이 비극적 자의식과 절망적 자기정체성을 극복하고 능동적이며 자주독립 할 수 있다는 새로운 자기정체성을 획득했고, 일본 제국주의와 세계를 향해 이를 표출했던 것이다.한국역사상 최초로 한국인이 스스로를 역사의 주인공으로 정립시키고 호명했던 것이다. 200만 명 이상의 민족적 에너지가 표출된 이 시간과 공간을 통해 한국역사는 재탄생될 수 있었다. 3• 1운동의 가장 큰 역사적 교훈은 한국인들이 스스로에 대한 자신감과 자긍심을 갖게 되었고, 독립할 수 있다는 희망의 불씨를 품게 되었다는 점이었다. 그 이후 독립운동은 모두 3•1운동을 기준으로 삼게 되었다. 3•1 운동은 한국 독립운동이 의지할 수 있는 역사적 언덕이 되었고, 1920년대 이후 독립운동의 활성화는 모두 3.1운동의 후기였다

5장 파리강화회의의 유일한 한국대표 김규식의 외교ㆍ선전활동

1 파리 도착 직후 제출한 청원서들

(1) 이욱영의 하숙집에서 작성된 청원서들(1919. 3. 20~1919. 4. 14)

242 김규식은 안중근의 유언 고백성사를 한 프랑스인 홍신부(벨름)의 도움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파리에서 김규식의 가장 중요한 조력자는 중국인 친구들이었다.

245 김규식은 파리에 도착한 이후 이욱영의 하숙집을 임시 거처로 삼았고, 영어와 프랑스어를 구사하는 중국 학생 3명의 도움을 받으며 활동을 개시한 것이다. 이들은 이욱영(이석증)이 지도자로 추진하고 있던 유법근공검학운동으로 파리에 온 중국 학생들이었을 것이다. 미국에서 올 것을 기대했던 이승만.정한경, 박용만 등은 파리에 도착하지 않았다.

253 김규식은 한국이 독립해야 하는 이유를 담은 청원서를 평화회의에 제출하였고, 또 다른 청원서를 준비해 월슨 대통령에게 직접 전달하고자 시도했다. 그러나 월슨은 바쁜 데다 일본과의 관계를 고려해 김규식을 공개적으로 만나기를 꺼렸다는 것이다. 일본이 5대 강국 중 하나로 참가하는 회의였기에, 각국 대표들은 일본 눈치를 봐야 했고, 영국과 프랑스는 인도.베트남 문제가 걸려 있어 약소민족 문제에 깊이 개입할 수 없었다.

(2) 파리위원부 사람들

262 3• 1운동 발발 이후 상해에는 1천명 이상의 독립운동가가 집결하였고, 임시의정원• #대한민국임시정부 가 설립(1919. 4. 11)되었다. 상해 임시 정부는 4월 13일 김규식을 외무총장, 평화회의 대한민국 위원겸 파리 주재 위원으로 임명하고 신임장을 파리로 발송했다. 3•1 운동의 에너지를 반영한 임시정부로부터 공식적 지위가 부여되자, 김규식은 4월 하순경 파리 제9구 샤토덩가 38번지에 사무실을 연 다음, 사서함-전화-텔렉스를 갖추고 본격적인 외교 홍보 활동을 펼쳤다. 이곳은 프랑스 시인 블라베 (Emile Blavet) 부부의 자택이었다. 김규식이 샤토덩가 38번지로 옮긴 정확한 일자와 배경, 블라베를 만나게 된 경위는 알 수 없다. 다만 이욱영, 진우인, 오조추 등의 조언과 인맥으로부터 도움을 받았을 것이다. 파리위원부에 합류했던 여운홍의 회고에도 중국인들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는 내용이 나타난다.

272 (파리위원부 , 샤토덩가 38번지 블라베의 자택) 파리시 한가운데에 위치한 이 집에는 전등도 없어서 대표단은 촛불을 켜 가며 밤새 각지에서 오는 정보를 받고, 각지로 보낼 카피를 쓰고, 전보를 놓고 편지를 쓰고, 누군가를 방문하고, 신문사를 찾는 등 “실로 눈코 뜰 싸이 업시 우리 전원은 김규식 이하 만흔 분주를 거듭"하였다고 한다. 이상을 정리해 보면 김규식은 1919년 4월 말 샤토가 38번지에 사무실을 개소했으며, 4월 말 김탕, 5월 18일 전후 이관용, 6월 3일 황기한, 6월 말 조소앙, 7월 초 여운홍이 여기에 합류한 것이다. 결국 김규식의 가장 중요한 활동이던 한국 독립을 요구하는 공식 청원서• 비망록·부록 세트를 5월 10일 파리평화회의에 제출했을 시점에 파리위원부에는 김규식만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아직 이관용, 여운홍, 조소앙, 황기환 중 아무도 파리에 도착하지 않은 상태였다. 바꿔 얘기하면 김규식이 혼자 힘으로, 파리 평화회의에 한국측 청원서•비망록•부록을 제출했음을 알 수 있다. 김탕의 보조, 중국 친구들의 도움, 블라베 부부, 마티안 부인, 람브레흐 등의 조력을 생각할 수 있으나, 그것은 보조적 의미에 지나지 않았다. 김규식은 파리 강화회의 특사로서 가장 중요한 임무를 완수했고, 그런 뒤에야 파리위원부에 사람들이 모여들었던 것이다.

2 외로운 파리강화회의 외교

(1) 공식 청원서ㆍ비망록의 작성과 제출(1919. 5. 10)
(2) 미국대표단과의 접촉 시도(1919. 5~1919. 6)

274 나는 나의 온갖 능력과 온갖 기능을 다하여 설명서와 청원서와 모든 서류를 법식대로 수정하는 중인즉 할 수 있는대로는 속히 평화회 서기생에게 정식으로 들여놓으며 각국 정부 대표자에게도 각기 한 벌식 보내고자 합니다.

279 그렇다면 김규식은 누구의 도움으로 청원서를 완성했는가? 김규식은 2명의 성명 미상, 국적 미상의 율사에게 도움을 받아서 “뽑을 것을 뽑고 교정할 것을 교정한 후에 원만한 청원서"를 법률적으로 검토하여 완성했다고 했다. 이들이 누구인지는 밝히지 않았다. 김규식은 이들에 대한 기록을 남기지 않았으며, 파리위원부 문서 어디에도 이들의 이름은 거론되지 않았다.

280 #프랑스 는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노동력 부족으로 중국인 노동자 약 20만 명을 수용하고 있었으나, 하층 노동자들의 무뢰배적 행동은 중국의 평판을 악화시킨 측면이 있었다. 이에 따라 이욱영 등은 중국 지식인, 학생 등을 프랑스에 유학시켜 장래의 인재로 자라게 만들자는 근공 검학 운동을 시작한 것이다.

291 (1919년 4월 5일(제출일은 1919년 5월 10일) 김규식의 파리 강화 회의 청원서) 둘째, 일본의 한국 점령이 대륙 팽창으로 이어지고, 나아가 태평양 지배로까지 나아갈 것이라고 한 부분은 선견지명이자 미국, 영국, 프랑스 등 강대국을 상대로 한 한국 독립 주장의 근거이기도 했다.

292 김규식과 그를 조력한 국제법 전문가들의 공략 지점이 어디였는가 하는 점을 알 수 있다. 1910년 병합조약이 사기와 강압으로 이뤄져 원천 무효이며, 국민주권론에 입각하여 한국의 주권은 4천 년 이상 지속되어서 황제가 마음대로 넘길 수 있는 물건이 아니며, 한국인 모두가 이 병합조약에 반대했고, 개항 이래 한국이 여러 국가와 맺은 조약 및 국제조약에서 한국의 독립 및 주권이 보전되었으니 이것이 지켜져야 하며, 국제정의와 인도에 입각한 윌슨의 14개조를 기본 정신으로 한 파리강화회의는 당연히 병합조약을 폐지해야 한다는 것이 핵심 주장이자 논리였음을 알 수 있다. 때문에 청원서∙비망록의 제목이 1910년 병합조약의 폐기∙무효였던 것이다.

301 (극동전문가)혼백 (Stanley K. Hornbeck, 1883 ~ 1966)은 일관되게 김규식에게 면담 기회를 제공하고 한국 문제에 관심을 돌려야 한다고 줄기차게 요구한 유일한 인물이었다. …반면 비서장이던 그루는 혼벡에게 답장(1919.3.28) 하기를 미국은 이미 일본의 한국 병합을 승인했으며, 현재 이 문제는 미국대표단에게 정식으로 제출할 사안이 아니라고 강조했다. 그루는 김규식의 청원서를 혼벡에게 돌려주며 현재로선 한국대표를 만날 필요가 없으니, 단지 “미래에 활용할 경우를 생각해 잘 보관하라"고 지시했다.

202 혼백은 2차 대전기 임시정부, 이승만.김구에 대한 최고의 전문가로 국무부 극동국 핵심인시가 되었다.

308 (영국)…일본이 이(조선) 무력하고 희망 없는 국가를 흡수한 역사는 아주 세밀하게 검토되지 않을 것입니다. 매클레이 1919년 5월 16일 …. 1919년 6월 28일 독일과의 조약을 끝으로 파리강화회의는 폐막 …미국대표단의 화이트는 한국 문제가 평화회의의 관할 영역이 아니며 국제연맹에 제출되어야 한다고 한국대표단에 통고했다.

310 김규식은 파리강화회의가 실질적으로 종결될 때까지 최선을 다해 한국 입장을 호소하고 독립을 청원했지만, 결국 파리강화회의 석상에서 기회가 제공되지는 않았다. 김규식은 국제연맹 회의에 기대를 걸었다. 국제연맹 회의는 처음 제네바에서 개최된다고 알려졌으나, 이후 1919년 9월 미국에서 첫 회의를 개최했다고 했다. 파리에서 못 다한 시도를 제네바나 워싱턴에서 한다는 것이 김규식의 주요 목표가 되었다.

1919년 4월 30일자 김규식의 편지 중

…그러나 왜놈이 5대 강국 중의 하나임으로 유럽과 동양 정치상 모든 문제에 대하여 간삽하는 동시에 연합 열강들은 감히 왜국과 서로 충돌되기를 생각지 않습니다 …나의 경애하는 동포여! 분발하여 오직 우리에게 남아 있는 우리의 나중 핏방울이 떨어질 때까지 우리의 나중 한 사람이 거꾸러질 때까지 우리는 우리의 자유와 우리의 독립을 위하여 쉬이지 말고 낙심도 말고 혈전을 계속합니다.

3 파리에서의 선전 활동

(1) 통신국과 「통신전」의 간행

김규식은 한국의 상황을 지속적으로 전하기 위해 프랑스에 통신국 설치

320 <통신전>의 원래 목적은 프랑스 신문 등에 한국 사정을 소개하려는 것이고, 1919년 9월 이후 월보 체제로 바뀌어 발행하면서 부정기적으로 한국 소식을 전하다가, 1920년 4월 부터 <자유한국> 잡지로 변경하였다.

(2) 다양한 선전ㆍ연대 활동

호치민과도 교류

326 김규식은 8월 8일 김탕, 여운홍을 동반하고 파리를 떠났고, 8월 9일 미국으로 향했다.

6장 구미위원부 위원장 김규식의 시련의 1년 반(1919. 8~1921. 1)

1 파리를 떠나 워싱턴으로

340 김규식의 미국행은 1919년 9월 워싱턴에서 개최될 것이라는 소문이 돌던 국제연맹의 첫 번째 위원회에서 한국 독립을 주장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김규식을 기다리고 있던 것은 기대하고 희망했던 국제연맹과 미국을 향한 외교 업무가 아니라 구미위원부 위원장으로 이승만을 대신해 공채표 판매와 회계를 담당하는 일이었다.

2 대통령 이승만과 공채표 판매 세일즈맨 김규식

341 이승만은 파리강화회의 특사로 3.1운동 시기 한국 독립운동의 실체적 희망이자 중심인물로 부각된 김규식을 워싱턴으로 데려오고자 했다. 독립운동의 명성이 자자한 김규식을 통해 미주 한인사회의 재정권을 통일.장악하기 위한 것이었다.

344 #1919년 9월 통합 상해 임시정부가 만들어질 때 대통령(이승만), 국무총리(이동휘), 노동국총판(안창호)이 임명 되었다.

346 이승만은 구미위원부를 통해 대한인국민회의 재정을 장악하고, 조직 기반을 허물려고 했다. 여기에는 이승만과 안창호, 하와이와 미주의 오랜 갈등이 내재해 있었다.

346 통일되었던 하와이 한인사회는 박용만의 초청으로 이승만이 1913년 하와이에 도착한 이후 분열되기 시작했다. 교회와 교육사업을 주도한 문치파 이승만과 산너머병학교.국민군단을 주도한 무단파 박용만 두사람은 7천여 한인이 모여 사는 작은 공동체에서 함께하기 불가능한 호랑이들이었다. #이승만 이 1915년 하와이 지방총회 간부진을 공격하기 시작한 이래 상호 비방.폭행.법적 송사가 끊이지 않았고, 하와이 한인사회에 처음 있는 대소동 속에서 이승만은 하와이 지방총홰를 장악했다. 박용만은 이승만을 하와이로 초청한 장본인이었지만, 이승만에 의해 하와이 지방총회에서 축출되었다.

이로써 통일되었던 대한인국민회는 이승만 세력이 주도하는 하와이 지방총회와 안창호 세력이 주도하는 북미지방총회로 사실상 분열되었다.

347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 및 북미지방총회를 주도하던 안창호는 1919년 5월 상해로 건너가 사실상 상해 임시정부를 유지하고, 한성정부. 상해 임시 정부 노령 국민의회의 통합을 주도하고 있었다. 이에 발맞춰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와 북미지방총회는 애국금을 거두어 상해 임시정부로 송금했다. 바로 이 시점에 이승만은 한성정부 집정관 총재로 애국금이 아닌 국채 발행을 주장하고 나선 것이다. 이승만은 끊임없이 상해 임시정부에 국채 발행권을 요구했다. 1919년 7월부터 8월 사이에 이승만과 상해 임시정부 사이에 오고 간 전문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351 이승만은 애국금(상해 임시정부가 전 국민에게 발행하는 세금)을 없애고, 미주의 재정수합권을 자신에게 귀속시키겠다는 유일한 목적을 집요하게 추구했다. 사실상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나 북미지방총회의 재정수합 기능을 중단시키고, 해당 기관을 자신의 통제하에 두겠다는 의도였다. 실질적으로는 임시정부로 들어가는 미주의 자금 통로를 자신이 독점 관할함으로써 임시정부를 통제하려고 한 것이다. 이승만과 안창호, 하와이와 미주의 뿌리 깊은 반목과 갈등이 기회와 명목을 달리해 변형된 형태로 분출된 것이었다.

351 #이승만 은 1915년 국민회 하와이 지방총회를 분열시켰고 1921년 하와이 지방총회를 국민회에서 떼어 내어 교민단으로 변경시켰으며 1922년에는 국민회 중앙총회를 해체시키는 데 성공했다. 이승만 개인에게는 바라던 바의 성취이자 복수였지만, 재미 한인사회에는 깊은 상처를 남겼다.

3 뇌종양 수술과 구미위원부 위원장이라는 고경(苦境)

(1) 애국금과 공채금의 병행

357 (구미위원부) 활동은 청재권 또는 징세권의 독점 … 재정 출납 업무와 외교 및 선전 활동이 목적 …구미위원부가 1922년 4월까지 실제로 걷은 총액은 14만 8,653달러 이 중 공채금만 8만 달러, 총액의 55% 정도 구미위원부는 이 금액 중 약 18% 가량을 임정에 송금했고, 거의 대부분을 사무실 유지비와 인건비에 지출했다.

(2) 애국금 폐지ㆍ김규식의 뇌수술(1920. 3)ㆍ북미 순회

379 만약 김규식이 상해나 파리에 있었더라면 뇌종양 수술을 받고 생존했을 가능성이 거의 없었을 것이다. 다행이 김규식은 구미위원부 위원장으로 위싱턴디씨에 체류 중이었고, 당대 최고 군병원이던 월터리드 병원에서 최고 의료진에게 치료를 받았고, 구미 위원부의 치료비 후원을 받을 수 있었으므로 살아날 수 있었다.

384 김규식은 병들고 지쳤다. 번아웃(burn-out) 상태였다. 미국에 도착한 지 1년 만이었다. 파리강화회의는 무위로 돌아갔고, 워싱턴에서 기대했던 국제연맹회의는 취소되었다. 미국에 도착한 직후 워싱턴과 샌프란시스코를 오가며 공채표-애국금 분쟁을 조정해야 했다. 병으로 쓰러져 입원했고, 1920년 3월에는 뇌수술을 받은 후 3주 만에 퇴원해 3개월 동안 미국 전역을 다니며 공채표를 판매해야 했다. 도대체 나는 지금 어디에서 있고, 무슨 일을 하고 있는가? 라고 김규식은 자문자답해야 하는 처지가 되었다.

385 사정이 여기에 이르자 김규식은 1920년 8월 7일 이승만에게 다음과 같은 사직서를 제출했다.

구미위원부 위원장이 되어 위원부 사업에 종사했으나, “당초부터 제반 곤란한 형편의 관계로 별로히 양호한 성적을 얻지 못"했고, “신체 불건(강)한 연유로 더욱 곤란히 지내왔"다. 1920년 정월부터 원동으로 발정코자 경영하였다가 신병으로 인하여 여의치 못하였으며, 구미위원부와 상해 임시정부가 요구하는 공채 모집에 대한 책임 관계로 미주에서 더 지체했다. 현재 담임한 공무에서 물러가기를 진정으로 원하니 사면하고자 한다.

4 파열(破裂): 이승만과의 결별

391 이승만은 애국금을 폐지하면 국민회의 자금이 구미위원부 공채로 들어올 것이라 예상했겠지만, 결과는 정반대로 구미위원부와 국민회 모두의 재정 궁핍으로 귀결되었다.

393 전력을 경주했던 워싱턴회의가 실패하자, 재미 한인사회는 오랫동안 침체를 면치 못했다. 서재필은 구미위원부 위원장을 사임했고, 이승만은 상해 임시정부에서 탄핵, 면직되었으며, 구미위원부도 임시정부로부터 해체를 명령받았다.

394 1919년 부터 1921년 구미위원부 자금, 총 5만 6,849달러, 이중 이승만 개인이 사용한 금액은 총 7,369달러 , 전체 지출의 12.96%을 개인이 사용했다. …이승만 순봉급 2,400달러, 여행경비등 업무더하면 매년 5,000달러 이상 받았다고 볼수 있다. 하와이 한인 봉급 비교하면 6 ~ 7.5배 많다.

396 구미위원부의 지출 종합하면 구미위원부 35.34%, 임시정부 26.59%, 필라델피아통신부 22.19%, 파리대표부 및 런던사무소 14.46%를 지원했다. 지출 비중은 구미위원부가 설정한 우선순위를 반영하는 것이었다.

397 김규식은 한국 독립운동과 외교 선전, 임시정부를 위한 재정적 후원이라는 대의를 추구했으나, 자신의 역할이 파리강화회의 특사라는 명망성을 활용해 미주 전역을 순회하며 공채표 판매 세일즈맨을 벗어날 수 없다는 사실에 분노했음이 분명했다.

398 3.1운동기 송헌주는 국민회를 통해 하와이 한인들에게 ‘독립금’을 기부받는 역할을 맡아, 4월부터 6월까지 5만 달러를 약정받았으며, 현금 3만 5천 달러를 모금하여 이 중 2만달러를 이승만에게 지원하였는데, 이승만은 어떠한 사용명세도 공개하지 않았다. 이승만은 송헌주의 자금 모집 능력을 높게 사서 그를 구미위원부 위원(서기)로 임명한 것이다.

고정휴의 분석에 따르면 이승만은 미주 본토에서는 구미위원부가 책임을 지고 자금을 모금하되 하와이 교민들로부터 거두는 자금은 구미위원부가 아닌 자신이 직접 관리하고자 했던 것이다. 401

김규식은 송헌주가 해임되는 과정에서 구미위원부에서 자신의 역할이 종결되었음을 깨달았다. 대통령 이승만과 상해 임시정부의 명령에 따라 구미위원부를 정부기관이자 외교기관으로 재미 한인들에게 설명했던 자신과 송헌주가 이승만의 사적 이해관계에 따라 움직이는 장기판 위의 말에 불과하다는 사실이 명백해졌기 때문이다. 404

7장 상해로 돌아가는 험난한 길(1921)

1 미 육군 수송함 토머스호 밀항 실패

409 김규식은 1920년 10월 3일 워싱턴을 떠났다.

2 밀항 시도가 남긴 기록

418 토머스호 탑승이 무산되자 이승만과 비서 임병직은 사망한 중국인 관을 싣고 중국으로 향하는 배편을 이용했다…. 이승만은 이 배에 밀항한 것이다. …이승만과 임병직은 아버지와 아들로 행세하며 즐거운 여행을 했다. 이승만은 병실 한칸을 받아 편하게 지내며 몇 편의 한시를 짓기까지 했다.

3 호주를 거쳐 상해로 귀환

8장 상해로 돌아온 김규식, 새로운 길을 모색하다

1 상해로의 귀환, 이승만과의 충돌, 임정 사직

(1) 김규식의 상해 귀환, 학무총장 참여

441 김규식은 1919년 2월 상하이를 떠난 뒤 프랑스 파리, 미국 워싱턴, 하와이, 오스트레일리아 시드니를 거쳐 1921년 1월 19일 상하이로 귀환할 수 있었다. 2년간 민족의 운명을 짊어지고 지구 한 바퀴를 돌았고, 개인적으로 죽음의 고비를 넘어선 끝에 가족들이 기다리던 상하이로 돌아온 것이다. 그러나 상하이에서는 또 다른 희망의 불빛과 절망의 나락이 교차하며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445 김규식은 이날 연설에서 …“진정한 환영은 삼각산 밑에서” 하자며 자신이 오고 가는 것이 모두 나라를 위한 한마음이었고, 자신의 “무기는 피와 만세 소리” 였다고 밝혔다.

445 김규식은 미국대표단이 전문가를 포함해 1천 3백여 명, 영국대표단은 1천 4백여 명, 중국대표단은 1백여 명이었는데, 한국대표단은 자기 혼자였다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성과를 거두었다고 자평했다.

447 안창호는 레닌과 연대하고 러시아 한인 공산주의자들과 연대해서 난관을 헤쳐 나가야 한다는 입장을 개진한 것이다.

김규식 : 내 의사와 같다 <안창호 일기 1921.2.6>

449 안창호는 재정 문제는 러시아나 미주에서 돈을 끌어오거나 자산가를 섭외하는 것은 희망사항에 불과하고, 소수의 재미 동포 노동자들에게 의지 하는 수밖에 없다. 정부의 행정사무 제도를 개편해서 간략• 간소하게 경량화해야 한다, 워싱턴 구미위원부•파리위원부•교통국·광복군영 등도 축소• 개편해야 한다, 재정 수입이 생기면 직접 개척사업 혹은 영업에 정부가 나서야 한다는 입장을 표명한 것이다. 결국 문제는 지속적 재정 확보와 사업의 간소화였다

(2) 이승만의 사퇴 문제와 김규식-이승만의 갈등

450 당시 상해 임시정부가 당면한 문제의 핵심은 이승만의 거취 문제, 즉 그의 자진 사퇴 혹은 강제 사퇴 문제였다. 이승만은 상해에서 대통력직을 사임 하겠다고 공언했다 번복함으로써 문제를 악화시켰다.

452 안창호 : 나는 노백린의 의사에 동의하지 않는다. 지금에 대통령이 동요되면 대내 대외에 인심이 타락이 되었고 또는 미국과 하와이 두 곳에서 재정이 판송되지 아니함으로 상해 임시정부는 문을 닫게 되겠다.

457 김규식이 만남을 거부한 후 이승만이 구미위원장직에서 김규식을 해임한 것이다.

(3) 김규식의 구미위원부 위원장 사임과 구미위원부의 파란

459 1921년 4월 14일 상해와 워싱턴에서 믿기 힘든 일이 동시에 벌어졌다. 상해의 이승만은 현순 해임을 결정했고, 워싱턴디씨의 현순은 주미공사관 설치를 선언했다. ….그리고 4월 14일에 김규식을 구미위원부 위원장 사직서를 재출했다. 460

(4) 이승만ㆍ이동휘ㆍ안창호, 임정을 떠나다

465 상해 임시정부의 세 축이던 대통령 이승만, 국무총리 이동휘, 노동국총판 안창호는 모두 이렇게 임시정부를 떠났다. 이승만과 이동휘는 각각 지구 반대편 미국과 소련을 향해 떠났고, 안창호는 상해에 잔류했다. 주역들이 떠나자 , 임시정부를 유지할 동력과 민심의 환호도 급속히 냉각되었다.

[태평양시사 습격사건-하와이 - 이승만](태평양시사 습격사건-하와이 - 이승만)

466 이승만은 자신은 대국,대세,근본적 이익을 위해 일하는 것뿐이고 김규식은 불평자의 잠정으로, 먼지털이 식으로, 지엽말단의 일로 자신을 공격하는 것뿐이라고 힐난한 것이다.

이승만은 국내의 이상재에게 편지(1921.7.29)를 보내 소수 인사가 백방 파괴운동을 벌이고 있다며 “(북경)박용만,이동휘, 남형우, 신숙 등은 (상해) 김규식 , 안창호, 여운형 등으로 연락하여 파괴주의를 선전"하고 있으며 , 안창호, 여운형은 연설회를 열고 대국민대회를 소집해 시국 문제를 해결하고자 주장한다고 비판했다. 이제 김규식은 정부 “파괴운동"을 일삼는 “소수지인"이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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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새로운 세 가지 방향: 국민대표회의ㆍ중한호조사ㆍ극동민족대회

(1) 이승만, 이동휘, 안창호, 김규식의 길

468 대통령 이승만, 국무총리 이동휘, 노동국총판 안창호, 학무총장 김규식은 임시정부를 떠난 후 각자 새로운 방향을 모색했다. 먼저 이승만과 서재필은 대통령직과 구미위원부의 위기를 외교로 돌파하기로 결심했다. 이승만이 미국행에 앞서 발표한 교서에는 “외교상의 급무”를 언급했는데, 이는 1921년 말로 예정된 태평양회의 개최였다. 1918년 말~1919년 초 대한인국민회를 중심으로 고조되던 파리 강화 회의를 향한 기대와 희망에 대해 이승만과 서재필이 보여 줬던 냉담하고 관조적 자세와는 정반대되는 것이었다.

태평양회의와 해군 군축 회의가 영일 동맹 해체와 미일 개전으로 이어진 것이 아니라 일본을 세계 3위 군사 강국으로 인정한 결과로 이어졌고, 한국 대표단에게는 어떤 기회도 주어지지 않았다. 대실패가 명백해지자 1차 세계 대전 후 경기 하락 속에 최선을 다해 지원했던 재미 한인 사회의 독립열은 급속히 냉각되었다. 재정 궁핍을 당한 구미위원부는 문을 닫는 수밖에 없었다. 이승만은 1925년 임시의정원에 의한 대통령 탄핵(1925년 3월 18일) 후 면직(1925년 3월 23일)이라는 이중 과정을 통해 임시정부에서 추방되었다. 재미 한인 사회는 만주사변이 발발할 때까지 원기를 회복할 수 없게 되었다.

470 안창호와 김규식은 국내외 단체 조직의 총의를 모아 국민대표회의를 개최함으로써 임시정부의 돌파구를 연다는 방향에 공감했다. 상해 임시정 부를 실질적으로 이끌던 안창호는 이승만이 상해에 도착한 이후 그를 설득 해 임시정부의 체제 변화와 활로 모색을 꾀했다. 1921년 2월 안창호는 정 부기구를 축소하고 연합사무제를 제안했지만 이승만 등의 반대로 좌절되 었다. 이승만이 자진해서 대통령직 사임을 약속한 후 이를 뒤집자, 갈등과 대립은 걷잡을 수 없는 형국이 되었다. 2 안창호는 #1921년 3월 15일 김철, 이탁, 박은식, 박보연 등과 함께 대한국민대표회준비촉진회를 결성해 임시 정부 개조를 추진하기로 결정했다.63 임시정부의 주역이었던 안창호조차 “현 임시정부는 박약하여 국민의 신용을 해치고 있으므로 도저히 우리 국 민대업의 목적을 이룰 수 없으므로 속히 이를 개조하는 동시에 정부의 명 칭을 폐지하고 위원제도로 조직을 변경할 것"을 결정하는 상황에 도달한 것이다. 국민대표회의는 상해 정국의 핵심 사안이자 태풍의 눈이 되었다.

(2) 국민대표회의 추진
(3) 김규식과 중한호조사

상해 중한국민호조사(中韓國民互助社) 1921년 상해에서 조직된 한국과 중국의 민간 항일 연대 기구 “중국과 한국의 국민이 서로 돕는(互助) 모임"이라는 뜻 이 단체는 단순히 친목 도모를 넘어, 당시 고립무원이었던 임시정부와 한국 독립운동가들에게 든든한 중국 내 인맥과 지원을 제공했던 중요한 연결고리였습니다. 상해 중한국민호조사는 1921년 한국과 중국의 인사들이 항일 투쟁을 위해 결성한 민간 연대 기구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활동을 중국 내에서 지원하고 한중 공동 항전의 기반을 마련한 중요한 조직

476 상해 중한국민호조사 총사는 1921년 12월 2일 워싱턴회의에 “중한 국민이 한국 독립을 계속해서 주장하니, 대회에서 표결해 줄 것을 요청한다"는 급전을 발송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 시점에 김규식은 이미 여운형 등과 함께 상해를 출발해 극동민족대회 개최 예정지인 이르쿠츠크로 향하고 있었다.

(4) 워싱턴회의와 극동민족대회의 갈림길

478 김규식은 여운형과 함께 (워싱턴 회의 대신) 극동민족대회를 선택했다. 동아시아에서는 파리 강화 회의, 국제연맹에 대한 실망과 반비례해서 혁명 러시아에 대한 기대와 관심이 고조되었다. 사회주의, 모스크바에 대한 기대와 새로운 가능성을 향한 희망이었다. 제1차 세계 대전을 통해 차르 전제를 무너뜨린 1917년 혁명의 힘, 1918~1922년간 제국주의 국가들의 간섭, 시베리아 출병 및 시베리아 내전을 이겨낸 군사적 저력, 식민지 반식민지 약소 민족에 대한 직접적 지원과 연대를 공언한 국제 연대 정신 등이 이들을 사회주의, 공산주의, 모스크바로 향하게 했다.

478 혁명 후 러시아는 내전이 진행되는 와중에 주국주의 국가들의 시베리아 출병으로 백위파 정권이 수립되어 다수의 전선에서 내전을 치러야 했다. 1920 ~ 1922년간 극동공화국 수립에서 드러나듯 소비에트러시아는 제국주의 국가들과 타협적이고 현실적인 방안을 모색해야 했다. 소비에트러시아는 극동의 식민지.반식민지 및 다양한 민족의 지원이 절실하게 필요했다….일본에 맞서 거세게 반일 독립운동을 전개하고 있던 한국 독립운동 세력은 소비에트러시아가 현실적인 도움을 기대할 수 있는 중요한 연대의 대상이었다. …소비에트러시아의 현실적 지원은 한국 독립운동 진영에 절호의 기회였다. 관대하고 우호적인 호의가 제공되었으나 이는 양날의 검과 같아서 이후 한국 독립운동 진영에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겼다.

479 1921년 김규식은 이르쿠츠크파 고려공산당 후보당원이 되었고, 극동 민족 대회 대표로 선발되어 소비에트러시아로 출발했다. 김규식이 언제 이르쿠르츠파 고려공산당에 가담했는지는 미상이다. 다만, 그와 신한청년당을 함께했던 여운형, 조동호 등은 물론 이후 민족주의 노선을 걷는 김승학, 김시현이 모두 이르쿠츠크파 고려공산당 당원이 되었고, 박헌영과 함께 화요회계 3총사로 불린 김단야, 임원근은 이르쿠츠크파 고려공산당 후보당원, 최창식, 김원경은 당원이 되었다. 어제의 민족주의자가 오늘의 사회주의자로 변신하고, 1919년 파리 강화 회의의 주역들이 1922년 모스크바 극동 민족 대회의 중심 인물로 변화한 것이다. 상하이는 독립과 혁명의 기운이 이글거리는 곳이었고, 시대의 추향을 따라 독실한 기독교 지도자이던 김규식, 여운형, 현순이 고려공산당의 외피를 썼다. 파리 강화 회의에서 모스크바 극동 민족 대회로의 전환은 혁명적인 것처럼 보였지만, 외교 대상이 미국에서 소비에트러시아로 대체된 것이었고, 본질적으로는 외교 독립 노선의 시대적, 상황적 변용이었다.

480 어제의 민족주의자가 오늘의 사회주의자로 변신하고, 1919년 파리강화회의의 주역들이 1922년 모스크바 극동민족대회의 중심인물로 변화한 것이다. 상해는 독립과 혁명의 이글거리는 곳이었고, 시대의 추향을 따라 독실한 기독교 지도자이던 김규식, 여운형, 현순이 고려공산당의 외피를 썼다. 파리강화회의에서 모스크바 극동민족대회로의 전환은 혁명적인 것처럼 보였지만, 외교대상이 미국에서 소비에트러시아로 대체된 것이었고, 본질적으로는 외교독립 노선의 시대적, 상황적 변용이었다

부록:

신규식이 안창호에게 보낸 전한족대표위원회 개최 요구 편지(1919. 2. 8), 김규식이 김순애에게 보낸 편지 및 청원서 초안(스리랑카 콜롬보, 1919. 2. 25), 「해방을 위한 한국 국민의 호소를 담은 비망록」의 변화 과정, 구미위원부 수지결산(1919.9~1921.11) 및 김규식 관련 지출, 구미위원부 봉급 및 해외 각 기관 지출표, 김규식이 미 육군 수송함 토머스호 밀항 시 소지하고 있던 중요 문서 목록

참고문헌

표ㆍ그림 목록

찾아보기

7. 🤔 Rambling

  • 미국 월슨의 14개 조항

    • “7.민족의 대소를 불문하고 균일한 정치상의 독립 및 영토 보전을 보장할것”
    • “14조 열국은 국가의 대소를 불문하고 총히 그 독립과 보전을 보호하기 위해…”
    • 그렇지만 정작 본인 들은 인디언, 하와이, 필리핀의 자치나 독립을 허용하지 않았다
    • 일본도 조선을 그렇게 대한다. 86
    • 재미니의 설명
      • 윌슨의 14개조는 사실 ‘패전국(독일, 오스트리아, 오스만 제국)‘의 식민지에만 적용되는 논리였습니다. 승전국인 미국, 영국, 프랑스, 일본의 식민지는 대상이 아니었습니다.
      • 일본의 논리: “조선은 식민지가 아니라 영토다”
  • 1차대전 후 승전국들의 파리강화회의 -> 김규식이 참여하여 호소 -> 이런 대외 움직임이 국내에도 영향 -> 3.1운동으로 발현 -> #1919년 4월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으로 독립단체을 통합 -> 국내에서 독립의 열의가 폭발 -> 일제의 사상 점령 , 창시개명등 강화 -> 국내 독립위한 활동들도 각지에서 일어나 -> 3.1운동으로 해외,국내 온 국민의 독립을 위한 활동의 ‘방화쇠-트리거’ 가 되었다.

  • 임시 정부 수립 -> 이승만의 독단으로 미국에서 자칭 대통령으로 날뛰고, -> 임시정부의 재정 고갈 -> 신채호,안창호, 이승만(김구는 당시 이승만 밑의 경찰청장?) 분열 -> 신채호는 러시아 연해주로 이동 독자적 무장 투쟁 -> 안창호는 임정 내려오고 몇차례 미국으로 건너가서 실력, 상해에서 활동?을 계속 , 이승만은 대외 활동 위주로 활동 -> 미국과 친밀해짐 -> 1945종전 이후 미군은 김구의 북한, 사회주의와의 연관성이유로 , 임시정부 귀국을 불허 -> 개인자격으로 입국 -> 김구는 통일 국가를 원했으나 -> 이승만은 남한 단독 정부 수립해서 대통령 취임 -> 미국도 인정 ->

    • 역사는 정말 아이러니, 어쩔수 없는 결과의 역사이지만
    • 역사를 모르는 이들로, 열의를 다했던 선조들이 노고가 그들의 개인들에게 돌아가지 못하고, 광파는 사람이 독차지 하는,,, 인간의 미련한 -> 그것이 현재까지도 -> 그걸 이용하는 정치들
  • 파리에서 거의 혼자사, 조선의 상황을 알리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김규식의 마음이 어떠했을까?

    • 아무리 외처도 들어주는 사람도 없었을 것이고
    • 조선이 어디 붙어 있는지 알지도 못하는 그들이게
    • 또, 열의로 수많은 일들을 해결해 나가야 하는 그의 수고를 과연 누가 알아 줄것인가.
    • 행여나 자포자기로 허송세월로 보낸다 한들 누가 알것이며 누가 손가락질 할것인가
    • 그는 어떤 마음으로 그 일을 감당해 냈을까? 정말 조국에 헌신 하는 마음이 아니 었다면
    • 과연 가능했을까?
    • 그가 미주의 <신한인보> 신문에 실린 글 273p 을보니 더 절실하게 생각된다.
  • #이승만

    • 이승만은 김규식을 미국으로 불러들여서, 독립을 위한 외교 일을 시킨 것이 아니라, 자신의 밑에 두고 공채표 판매, 회계일을 시켰다 340
    • 파리강화회의 특사 파견에 냉소적이었던 이승만, 역설적으로 3.1운동이 발발한 이후 수립된 여러 임시정부에서 국무총리급으로 임명됨
    • 파리특사, 3.1운동에 영향을 준 김규식을 대리고 온것은 -> 미주 한인 사회 재정권을 장악하기 위함 이었다. 341p
    • 1919년 4월 5일 이승만은 대한공화국임시정부가 자신에게 빗을 얻을 권리를 달라고 요청했다. <신한민보> 이승만이 현순에게 요청
      • 대한공화국임시정부와 관련해 이승만의 유일한 관심은 미국에서 ‘국채’를 발행하는 데 필요한 증거서류 및 신임장이었다.
        • 이승만은 대한공화국임시정부가 어디 있으며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혹은 하려고 하는지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었다.
      • 이승만의 또다른 관심사 -> 대통령직 342
    • 이승만은 현순(상해)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했던 대한공화국임시정부 국무경 대신 한성정부의 집정관총재를 대통령으로 바꿔 부르며 활동하기 시작했다. 344
      • 상해 임시정부는 국무총리만 있고 대통령은 없다고 반박 했드나 -> 이승만은 대통령으로 고집하며 밀고 나갔다
      • 대한민주국 임시대통령 명의로 국내외 동포에게 선언서를 발표하기도 한다
  • 당시 임시정부의 명확한 실체도 알려지지 않는 혼돈의 시대에

    • 자칭 대통령행사하던 이승만 … 결국 1919년 9월 통합 상해 임시정부에 대통령이 된다. 344
  • 이승만은 안창호의 미주 조직 대한인국민회 조직을 장악하려 한다, 안창호 와 대립관계

  • 미주사회 한인이 통합을 이루고 있었으나, 이승만때문에 분열되어 하와이와 북미 안창호로 분열 된다

    • 안창호가 상해로 가서 임시정부 활동을 꾸리는동안 , 북미에서 모금으로 상해를 돕던 조직을 장악,
    • 국채까지 발행하려고 한다.
    • 욕나온다 진짜 374
    • 한인 사회를 분열시킨, 그 여파가 2026년 현재까지도 기득권 자들이 가지고 있는 행태와 비슷해 보인다. 351
      • 이런 인간들은 어느나라 어느 시대나 있긴 하겠지만
    • 만약, 미주 한인 사회가 연합되고, 재정이 상해로 흘러가고, 했따면 어떤 역사가 펼쳐 졌을까?
      • [만약 이승만의 분열행태가 없고- 미주가연합-상해재정보강 되었다면](만약 이승만의 분열행태가 없고- 미주가연합-상해재정보강 되었다면)
      • 어찌되었든, 자력 독립이나 투쟁, 임시정부 정통성이 지속되어 나라가 분된 되지 않았을 수도 있었는데, 안탑깝기 그지없다. 351
    • 이승만은 미주 재정을 독점목적, 구미위원부 조직 -> 김규식을 장으로 임명 -> 모금 금액 14만 달러중 임시정부로 보낸건 겨우 18%, -> 나머지는 사무실 유지비,인건비로 탕진 …우라질
    • 김규식은 이승만 밑에서 애를 먹는다.
  • 임정에서 결의한 애국금(국민이 임정 쓸돈을 내는일)을 금지 시키고

    • 구미 이승만이 만든 조직에서 만든 채권을 사라고 시킨다
    • 자신의 자금을 관리하기 위해서 겠다
      • 국민회(구미 한인) 총회는 경악 363
    • 단순히 개인의 욕심을 넘어, “누가 독립운동의 주도권과 돈줄을 쥐는가” 에 대한 철저한 권력 의지가 반영된 사건 (gemini)
      • 재정권 장악을 통한 ‘실질적 통치권’ 확보
      • 이승만 본인의 외교 독립론’의 자금 기반 마련
      • 상해 임시정부와의 기싸움과 견제
  • 역사의 또하나 아이러니

    • 김규식이 이승만 밑에서 고생하던 미국생활, 그 덕에 뇌종양 수술을 받읐수 있었다. 379
  • 퇴원하고 김규식은 이승만의 공채를 미국 전역에 팔러 다녔다 !!! 383

    • 김규식의 치료비로 구미위원(이승만설립) 재정의 12%를 써버렸기 때문에 그는 빚진자의 마음도 있었을 것이다.
    • 그의 파리 특사 활동, 3.1운동 직후 인기를 , 이승만 채권 판매에 이용 했다. 당했다.
  • 김규식이 하와이 출장으로 사용한 비용 277달러 80센트

    • 이승만,노백린은 다음달 1,500달러 5배 더 사용
  • 서재필…도 임시정부 조직운영 자도 아닌데,,, 이승만이 워싱턴에서 의지할 사람이 서재필이여서 그랬을 것이란다 395

    • 파리대표부에선 12.18%, 서재필의 비공식 필라델피안통신부에는 22.19% 사용
    • 상해정부에는 26.59% 사용
  • 이승만은 하와이에서 나오는 자금을 개인이 사용하려 한듯하다

    • 404
  • 이승만과 김규식은 하와이에서 만나고, 상해로 가기위해 노력한다

    • 이승만은 중국인 관을 싣는 배에 몰래 탑승해서 밀입국한다. 418
  • 김규식이 상해에 호주를 거처 도착한다

    • 호주에서는 파리강화회의에서 만났던 수상을 만나기도
  • 상해에 도착한 김규식과 이승만, 김규식은 이승만을 멀리하고

    • 안창호와 대담, 김규식과 뜻이 맞음을 확인 447
  • 안창호와 김규식은,,, 미국에 회의적으로 돌아서고 러시아로 눈을 돌린다

    • 러시아도 내전으로 고통 받던 시기라, 일본의 세력을 막아줄 한국의 독립세력이 필요했다.
      • 일본에 맞서 거세게 반일 독립운동을 전개하고 있던 한국 독립운동 세력은 소비에트러시아가 현실적인 도움을 기대할 수 있는 중요한 연대의 대상이었다. 479
    • 러시아의 도움이 큰 도움이 되었지만,
    • 이후 사회주의와 연대로 인해 큰 대가를 치르게 되는 한국임시정부이다.
    • 안창호와 김규식의 선택,,, 과연 나라면 어떻게 했을까… 나같아다 당시 상황상 러시아를 선택했을 것 같다.
      • 미국과 영국등 강대국의 제국주의에 치를 떨었을 것이고
      • 이승만 같은 자들에게 시달린걸 생각하면… 말이다.

8. 🔗 References


  1. ‘일선동조론(日鮮同祖論)‘과 ‘동조동근론(同祖同根論)‘은 일본인과 조선인이 같은 조상(同祖)과 같은 뿌리(同根)를 가졌다는 혈연적 연대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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