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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규식과 그의 시대 3

☝️ 3권은 우리나라 임시정부의 활동과 해방직후 까지의 내용이다.임시정부의 온갖 집단간 분열을 보니 인간이 대한 안타까움마저 느껴진다. 이렇게라도 나라가 서 있게되어서 다행이다.

📚 김규식과 그의 시대 3

[!INFO] 책 정보

  • 저자: 저자/정병준
  • 번역:
  • 출판사: 출판사/돌베개
  • 발행일: 2025-08-15
  • origin_title: -
  • 나의 평점: 10
  • 완독일: 2026-03-29 07:30:35

1. 🖐️ Before Reading (읽기 전)

1.1 동기와 기대

2. 📜 Synopsis (LLM)

2.1 저자와 집필 의도

2.2 핵심 줄거리

3. 🔆 Insight & Deep Dive

3.1 깨달은 점 (Aha Moment)

  • 역사를 알면 누구도 손가락질 쉽게 할 수 없을 것이다.
  • 인간의 역사는 그렇게 흘러간다.

3.2 비판적 사고 (Critical Thinking)

4. 🏆 Top Highlights

📌 첫 번째 문장

3.1운동 대폭발의 기폭제이자 마중물을 제공했던 여운형은 상해 임시정부에 동참했으나, 파리강화회의가 한국 독립 문제에 어떤 희망을 전해 주지 않고 여러 논란에 휩싸이자, 임시정부로부터 거리를 유지하기 시작했다. 파리강화회의.기독교.미국을 향한 기대가 차갑게 냉각되는 순간, 혁명러시아가 새로운 대안과 전망을 제시했다.

📌 두 번째 문장

김규식은 극동민족대회 폐막 후 런던에서 발행된 『코뮤니스트리뷰」에 게재한 글에서 “미국은 이타적이며 민주주의적인 척하며 흡혈귀와 같은 3국과 무시무시한 4개국 조약을 체결한 워싱턴회의에서 그 가면을 내팽개 쳤다. 대회는 동아시아 인민 스스로의 ‘단결’ 필요성을 말했다. (중략) 한국의 독립은 러시아의 조력으로 달성될 것이다"라고 했다.

📌 세 번째 문장

레닌자금은 한국 공산주의운동, 혁명운동, 민족해방운동의 통일이 아니라 극한적 분열적 대립의 단초가 된 것이다

📌 네 번째 문장

노골적인 적대감과 부정적 인식 속에 임시정부라는 외형적 틀이 유지된 가장 큰 동력은 중국정부의 갱미과 재정적.군사적 후원 때문이었다. 중경 시대 민족통일전선 정부의 속내는 갈등.분열.경쟁의 도가니였다. 중국의 후원과 억제가 없었다면, 가냘픈 통합과 합작의 틀은 진즉 깨어졌을 것이다.470

📌 다섯 번째 문장

서울 주재 영사로 근무했던 랭던이 1942년 2월 작성한 한국 관련 비망록은 신탁통치 계획의 원형으로 손꼽히며 가장 유명한 것이다. 랭던은 대다수 한국인이 가난한 문맹이며, 정치적으로 경험이 없고, 경제적으로도 후진적인 상태이며, 40년간 일본의 지배를 받았기 때문에 오직 소수의 한국인만 자유를 기억할 수 있는 상태이므로 최소한 한 세대 동안 한국은 열강의 보호, 지도, 원조를 받아야 근대 국가가 될 수 있다"라고 주장했 다. 이는 랭던만의 특수하고 독특한 주장이 아니라 미국 국무부는 물론 미국 정계 및 대중여론 주도층에 공감을 얻은 것이었으며, 당연히 루스벨트 대통령에게도 설득력 있는 주장으로 받아들여졌다. 473

#1943년 11월 카이로회담에서 장개석은 한국의 독립을 주장했고, 루즈벨트는 카이로회담 이전에 연합국들이 전후 한국에 대한 신탁통치 실시에 합의했다고 확신했는데, 장개석이 사전합의를 깨고 한국의 독립을 주장하자, 이를 전후 한국에 대한 중국의 영토적 야심과 팽창 욕망으로 해석했다. 489

5. 📌 Key Concepts

5.1 핵심 키워드 정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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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키워드 1: 설명
  • 키워드 2: 설명


6. 🖍️ Book Marks

저자의 글

1장 모스크바 극동민족대회 참가와 모스크바 외교(1921~1922)

1 상해에서 모스크바로 가는 형극의 여정

(1) 상해·천진·북경·장가구·고비사막·고륜·캬흐타·베르흐네우딘스크·이르쿠츠크·모스크바의 여정

![Pasted image 20260311063143.png](Pasted image 20260311063143.png) 29 김규식은 1921년 11월 극동민족대회가 개최될 예정인 이르쿠츠크로 향하고 있었다. 여운형•나용균과 동행이었다. 1920년 9월 러시아 바쿠(Baku)에서 개최된 동양인민대회(Congress of the People of the East)는 극동민족대회 소집안을 국제공산당(코민테른) 집행위원회에 제시했고, 이 결과 1921년 8월 대회 소집이 결정되었다. 소비에트러시아와 극동공화국은 강대국 주도의 워싱턴회의에 초대받지 못했고, 1921년 7월 19일 자신들의 참여 없이 진행되는 워싱턴회의에 반대한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이에 따라 극동민족대회는 강대국·승전국•제국주의 국가의 워싱턴회의에 대항하기 위한 식민지•반식민지 •피억압 인민의 회의를 표방했으며, 최초 개최일은 제1차 세계대전 종전 기념일인 1921년 11월 11일로 예정되어 있었다. 주요 참가국은 한국,일본,몽고 등이었다.

31 3.1운동 대폭발의 기폭제이자 마중물을 제공했던 여운형은 상해 임시정부에 동참했으나, 파리강화회의가 한국 독립 문제에 어떤 희망을 전해 주지 않고 여러 논란에 휩싸이자, 임시정부로부터 거리를 유지하기 시작했다. 파리강화회의.기독교.미국을 향한 기대가 차갑게 냉각되는 순간, 혁명러시아가 새로운 대안과 전망을 제시했다. 상해에서는 어제의 민족주의자가 오늘의 사회주의자로 거듭나는 번신의 장이 펼처졌다. 여운형은 이르쿠츠크파 고려공산당에 가입했다.

(2) 고륜에서 마주한 이태준의 죽음과 사촌여동생 김은식

2 모스크바대회와 한국대표단장 김규식

(1) 이르쿠츠크에서 모스크바로

46 상해를 떠난 김규식 일행은 기차, 자동차, 쌍두마차, 썰매, 기 차를 타고 일본 밀정, 백위파, 도적, 자연의 위험을 감수하며 고비사막과 대초원, 시베리아의 눈밭을 헤치는 한 달여의 대모험 끝에 모스크바에 도착할 수 있었다.

47 이르쿠츠크에 어렵게 도착한 대표단은 회의 장소가 이르쿠츠크에서 모스크바로 바뀌었고, 회의 기간이 변경되었다는 통보를 받게 되었다. 11월 11 일로 예정되었던 대회는 1개월 뒤로 연기되었고, 12월 말 다시 1922년으로 연기되었다

(2) 모스크바대회 주석단에 오른 한국대표단의 김규식·여운형

51 (극동피압박민족대표자대회)대회에 참가한 대표는 한국대표 56명, 중국대표 37명, 일본대표 13명, 몽고대표 14명, 칼미크대표 2명, 자바대표 1명 등 의결권을 가진 119명, 심의권을 가진 17명이 참가했다. 한국대표의 숫자는 중국대표와 몽고대표를 합한 것보다도 더 많았다. 그만큼 이 대회가 한국에 거는 기대와 후원이 컸음을 의미한다. 대회의 주요 참가국이자 코민테른의 관심이 집중된 참가국의 순서는 한국-중국-일본-몽고였음을 알 수 있다. 모두 소비에트러시아의 극동 국경을 맞대고 있는 국가.민족이었고, 이들이 상대하고 있는 대상은 일본 제국주의였다.

58 여운형에 따르면 레닌을 2차례 만났는데, 레닌이 관대한 덕량, 원만한 기질, 광박한 지식, 평범자약한 의표, 그리고 혁명가의 열정이 모두가 과연 고대한 인물이라고 평가했다. 여운형은 레닌이 한국에 철저한 공산주의를 요구하지 않을까 우려했지만, 레닌이 한국의 교통과 언어를 묻기에 교통은 자동차로 하루면 다 갈 수 있는 정도이고 국어는 1개라고 했더니 한국은 지금은 민도가 낮기 때문에 바로 공산주의를 실행하는 것은 안 되며 민족주의를 실행하는 것이 좋다고 해서 안도했다.

레닌은 가타야마에게는 “동무는 조선 독립을 위하여 생명을 희생하여 투쟁하겠는가?“라고 물었고, 여운형에게는 “동무는 일본혁명을 위하여 투쟁하겠는가?“라고 물었다. 둘이 다 “하겠다"고 대답하자 레닌은 기뻐하며, “만일 일본과 조선이 악수를 한다면 양국의 혁명은 무난할 터이니 힘쓰라"고 했다. 가타야마 회고에도 비슷한 내용이 들어 있다. 레닌이 가타야마에게 일본제국주의에 대항하여 극동 노동자 전위가 결합할 필요성 을 강조했는데, 유창한 영어를 구사하며 누구든 동등하게 대우하면서 모두에게 만족을 주는 “회화의 중심인물"이었다는 것이다.

(3) 한국대표단장 김규식의 연설과 한국 문제 보고서

63 (김규식의 연설문) 우리는 이곳 오늘 개막식에 왔을 때 이제 이 개막식이 세계 자본주의와 제국주의에 대항하는 우리 전투의 예비적 준비임을 깨달았습니다. …우리의 슬로건은 “극동의 피억압 인민은 단결하라 Toilers of the Far East, unite"가 되어야 합니다. …나는 우리가 세계 제국주의 및 자본주의 강국들에 반대하는 전투를 준비하기 위해이곳에 모였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우리는 어떤 계획을 가져야 합니까? 이것은 나의 희망이자 확신이며, 모든 이의 희망으로, 우리가 이 대회에서 소비에트공화국이 나침반의 모든 지점에서 제국주의자들이 자신에게 강제하는 모든 과업에도 굴하지 않고, 과거에 보여 주었던 용기와 에너지를 획득하게 될 것이라는 점입니다. 우리는 극동 전역을 통해 프롤레타리아트들에게 지식을 전달해서 극동 프롤레타리아트가 소위 세계 자본주의 및 제국주의르 억압하고 박살내는 데 있어 강력한 힘으로 서길 바랍니다. 그리고 우리는 본 대회를 통해서 러시아운동의 불꽃을 얻어 모든 제국주의 및 자본주의 세계 체제를 잿더미로 불태우길 바랍니다.

72 고려공산당의 정책은 제국주의 열강의 착취에 맞서 한국 대중을 통합된 입장으로 투쟁하게 하는 것이며, 한국 인민의 진정한 해방을 위해 투쟁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고 제1정책이라고 규정하고 있다. 이 2개의 목표 달성을 위해 고려공산당은 전 한국혁명운동의 통일을 원조할 것이라고 했다.

74 여운형은 일제 심문 과정에서도 같은 취지로 발언했다. 한국은 공업이 발달하지 않고 계급의식이 유치하기에 계급운동은 시기상조이며, 농업국이고 일반민중은 민족운동에 공명하는 상황이니 계급운동가는 독립운동을 후원•지지하라는 방침을 정했다. 상해 임시정부는 명칭은 너무 과대하고 실력은 수반되지 않는 폐단이 있으니 임시정부의 조직을 개혁할 필요가 있다고 결의했다

(4) 극동민족대회의 유산: 김규식-러시아 밀약설

76 “천재일우의 외교의 기회"라며 상해를 떠나 워싱턴으로 향했던 이승만은 워싱턴회의에서 어떤 기회도 얻지 못했다.

76 (일제 정보당국의 평가) 워싱턴회의는 태평양지역 의 현상 유지에 관한 4개국 조약, 승전국의 군사력 순위를 결정하기 위해 주력함 보유율을 정한 해군군축조약, 중국의 문호 개방 기회 균등을 협정한 9개국 합의사항 등을 체결하고 1922년 2월 6일 폐막되었다. 1921년 내 내 국내외 운동 세력의 희망 속에 미일 충돌설, 미일 개전설이 확산되었지만, 워싱턴회의는 1차 대전 승전국•제국주의 국가들의 전리품 정리와 군사적 위계서열을 확정했을 뿐 한국의 목소리에는 어떤 관심도 기울이지 않았다.

강덕상은 “워싱턴회의에 의견서를 제출하려다 무시당한 이승만, 정한경 등과 모스크바에 갔던 김규식, 여운형이 얻은 성과의 차이는 너무나 명백했다"라고 평가했다

78 김규식은 극동민족대회 폐막 후 런던에서 발행된 『코뮤니스트리뷰」에 게재한 글에서 “미국은 이타적이며 민주주의적인 척하며 흡혈귀와 같은 3국과 무시무시한 4개국 조약을 체결한 워싱턴회의에서 그 가면을 내팽개 쳤다. 대회는 동아시아 인민 스스로의 ‘단결’ 필요성을 말했다. (중략) 한국의 독립은 러시아의 조력으로 달성될 것이다"라고 했다.

지노비예프 의 “네 흡혈귀들의 동맹"을 변용해 쓴 김규식의 글은 워싱턴에서 모스크바로, 민족주의에서 사회주의로의 전환을 선언하는 것이었고, 극동민족대회의 결의와 성과를 선전하는 것이었다. 향후 국민대표회의에서 김규식의 입장이 임시정부 개조론이나 유지론이 아니라, 창조론의 입장에서 새로운 민족통일전선과 새로운 민족혁명정당 건설을 추진할 것임을 예견케 하는 것 이었다.

3 모스크바에서의 분열: 외교교섭단, 상해파 고려공산당, 임시정부의 3각 외교전

[고려혁명군 - 러시아혁명의 소용돌이](고려혁명군 - 러시아혁명의 소용돌이)

(1) 극동민족대회 한국대표단의 외교교섭단 단장 김규식

(2) 상해파, 이르쿠츠크파, 임정의 모스크바 외교 3파전

88 이희경에 따르면 외교교섭단의 모스크바 외교의 핵심은 상해 임시정부에 대한 지원 중단, 국민대표회의를 통한 “새로운 정부” 조직 및 러시아의 자금지원, 몽고 금광 채굴권 제공 등이었다.

91 극동민족대회가 성대히 종결되고, 그 유산으로 김규식을 대표로 하는 외교교섭단이 조직되었지만, 그 내면에는 이르쿠츠크파와 코민테른 원동 비서국의 입장이 관철되고 있었다. 바로 이 시점에 상해파 이동휘• 홍도 등 과, 임시정부의 이희경•안공근이 모두 모스크바에 집결해 있었다. 외교교 섭단(이르쿠츠크파), 상해파, 임시정부 등 3대 세력은 소련정부와 코민테른을 상대로 레닌자금을 둘러싼 쟁탈전, 국민대표회의 개최를 둘러싼 충돌을 벌였다. 또한 고려공산당 연합중앙간부 내부에서는 상해파와 이르쿠츠크파의 대충돌이 벌어졌다. 갈등과 혼란, 대충돌은 중층적이고 복잡했다. 레닌자금은 한국 공산주의운동, 혁명운동, 민족해방운동의 통일이 아니라 극한적 분열적 대립의 단초가 된 것이다

(3) 레닌자금을 둘러싼 상해파, 이르쿠츠크파의 극한 대결

95 사정을 알게 된 임정 측에서는 이동휘• 김립에 대한 성토문을 발표(1922. 1. 26)했고. 임정은 김립: 한형권 처단을 공공연히 주장했다. 2월 10일 김립은 김구 측 감찰단에 의해 피살되었고, 한형권은 윤해 •고창일 등 국민의회 측 도움을 받으며 피신했다. 상해파는 1922년 3월 중순 한형권이 원세훈• 안창호 등 상해 국민대표회의 준비 인사들과 접촉하고 있다는 소문을 듣고 한형권을 붙잡기 위해 노력했다. 『독립신문』 주필로 취임해 있던 윤해도 1922년 9월 18일 총격을 당했다. 이르쿠츠크파의 한명세는 한형권이 상해에 도착한 후 “자신은 이미 이르쿠츠크를 지날 즈음 공산주의를 포기했고, 소비에트정부가 공산당 이외의 민족적 조직만을 지 원할 것이기 때문에 공산주의 가면을 쓰고 있을 필요가 없다"라고 선언했다는 소문을 코민테른 집행위원회에 알렸다. 한형권은 상해파와 이르쿠츠크파, 임시정부 모두의 반대와 추적을 받게 되었다.

(4) 임정 특사단의 모스크바 외교전 참가와 김규식에 대한 악평

(5) 코민테른의 자금 지원 중단 결정

[상해파-이르쿠츠크파-임정 세력 간 대충돌](상해파-이르쿠츠크파-임정 세력 간 대충돌) [김규식이 이르쿠츠파에 참여한 배경](김규식이 이르쿠츠파에 참여한 배경)

110 상해파-이르쿠츠크파-임정 세력 간 대충돌 와중에서 김규식은 1918년 이래 자신이 걸어온 길을 부정함으로써 자신의 현재와 미래를 규정하게 된 셈이다. 상해파는 그가 상해 임시정부 대표로 친미 외교 활동을 벌인 주역이라고 비난했고, 임시정부 특사단은 임정을 폄하하는 가장 사악한 인물이자 중풍 환자, 기회주의자라고 비난했다. 코민테른이 그의 고려공산당 활동을 중단시키기에 이르자 짧은 고려공산당원 생활도 사실상 중단되었다. 그의 삶을 규정해 온 상해 임시정부와의 연계망, 인간관계의 그물망은 회복할 수 없는 손상을 입은 듯했다.

모스크바행에서 김규식의 일면이 드러났다. 이것이 여운형과 김규식의 차이점이기도 했다. 이르쿠츠크파 고려공산당원으로 공산주의 문헌을 번역하는 적극 선전자였던 여운형은 모스크바에서 다른 선택과 판단을 했다. 모스크바 체류 중 여운형은 자유시 참변에 대한 이르쿠츠크파의 선전에 의문을 가졌고, 외교 교섭단에 포함되지 않았다. 모스크바에서 이르쿠츠크로 갔다가 만주로 돌아오는 도중 여운형은 독자적 조사를 통해 자유시 참변의 실상이 극동 민족 대회의 보고와는 달리 마녀 사냥의 구조를 가지고 있다고 판단했다. 강덕상의 해석에 따르면 여운형이 국민 대표 회의에서 창조파의 입장을 견지한 김규식과는 달리 개조파로 남게 된 이유이기도 했다. 자유시 참변에 대해 정통 이르쿠츠크파와 다른 견해를 가지고 있던 여운형은 반대파에 의해 억류되거나 테러를 당할 위험에 처했다. 여운형은 이르쿠츠크-만주리를 거쳐 체포를 면하고 겨우 하얼빈으로 와서, 동화대학 교장이자 공산당원으로 여운형의 친구인 등려민의 자택에 도착했다. 여운형은 장춘-봉천-천진-북경을 거쳐 상해로 귀환했는데, 장춘과 봉천에서는 체포하려는 밀정을 피해 해당 역 이전에 내려서 다음 역에서 탑승하는 일을 반복했다. 여운형은 1922년 3월 하순에 고려공산당 합동 문제를 신채호, 박용만 등과 논의하기 위해 천진으로 갔고, 4월에는 북경에서 개최된 북경 만국 기독교 청년회 회의에 참석한 이상재, 여운홍, 김필례, 신흥우 등에게 극동 민족 대회의 경과를 알렸다.

2장 국민대표회의와 블라디보스토크의 국민위원 김규식(1923)

국민대표회의 - 대한민국임시정부자료집 - https://db.history.go.kr/id/ij_095_$1exp

1 국민대표회의의 동력: 한형권의 20만 루블

(1) 워싱턴과 모스크바의 대결

118 반면 모스크바 극동민족대회에서 김규식과 한국대표단이 펼친 활약상은 국내에도 소개될 정도로 감출 수 없는 것이었다. 모스크바에서 상해파, 이르쿠츠크파, 임시정부 사절단이 외교전을 벌이며 충돌했지만, 그 소식은 소문으로만 떠돌았을 뿐 누구도 정확한 내막을 알지 못했다. 때문에 현상적으로는 워싱턴회의의 실패와 모스크바회의의 성공이 대비되는 상황이었다. 그 주인공들이 상해로 모여들자, 1921년 중단되었던 국민대표회 기성회의 활동은 활력을 얻기 시작했다.

(2) 레닌자금 20만 루블의 사용처

121 소비에트러시아는 4차례에 걸쳐 한국 측에 자금을 지원했다.

  1. 1920년 3월, 모스크바, 이동휘.박진순에게 400만 짜르.
  2. 1920년 9월, 모스크바 외교인민위원부. 박진순에게 40만 금.
  3. 크라스코체코프의 각서(극동공화국 자금)에 따라 치타. 박진순에게 2,920은화.
  4. 1921년 9월. 베를린. 소련대사관(외교인민위원부) 한형권에게 지급 20만 금.

이 가운데 2)와 4)는 외교인민위원부가 공식 외교 대상인 상해 임시정부에 제공한 것이라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자금 제공의 주체가 코민테른이나 러시아공산당이 아니라 러시아정부 외교인민위원부이므로 자금 수령의 주체도 한인사회당이나 이동휘 등 사회주의.공산주의자가 아닌 상해임시정부였다.

[한형권 韓馨權](한형권 韓馨權)

(3) 중한호조사와 교육사업의 김규식

김규식이 공개적으로 활동하기 시작한 것은 중한호조사와 관련해서였다. 김규식의 돌파구는 중한연대였다. (….) 김규식의 또 다른 공개활동은 학원 운영이었다. 김규식은 외교를 중심으로 한 독립운동을 전개하다 물러나 돌아갈 생업이 있었다. 바로 교육자로서의 생활세계였다. 다른 독립운동가들은 독립운동의 냉각기와 마주하면 극도의 생계난을 겪다가 국내로 귀국하거나 투항하는 사례가 적지 않았다. 이것이 김규식과 다른 독립운동가들의 선택과 처신에서 차이를 불러온 요인이 되었을 것이다. ..1923년 남화 학원을 창립했다. 이 학교는 유학을 목적으로 중국에 온 한국 학생을 대상으로 했다.

2 국민대표회의의 경과: 창조파 정부 수립이라는 결말

(1) 국민대표회의의 개막과 참가자

139 국민대표회의는 1922년 말부터 본격적으로 준비되기 시작해서 1923년에 드디어 개막되었다. 1921년 국민대표회 연설회에서 여운형과 안창호가 연설하면서 시작된 움직임이 2년뒤에 실현된 것이다. 워싱턴회의에 마지막 기대를 걸었던 외교독립노선의 몰락, 위임통치 청원•공채표 애국금 논란. 임지 이탈 등으로 자격을 상실한 대통령 이승만에 대한 부정적 인식, 사분 오열된 후 장기화된 지도부 부재 상황, 신망과 지지도 추락으로 인한 재정적 궁핍 등 임시정부의 존립 자체가 위태로워지자, 임시정부의 지도부를 개조하거나 제도를 변경하거나 새로운 대안을 창출하자는 공감대가 독립 운동 진영에서 광범위하게 분출되었다. 여기에 한형권의 자금과 고려공산당의 적극적 참여가 덧붙여지자, 국민대표회의는 개막의 추진력을 충분히 얻게 되었다.

143 국민대표회의는 표면적으로는 개조파와 창조파의 갈등.대립이 중요했지만, 내면적으로는 고려공산당 이르쿠츠크파와 상해파의 대립이 더 큰 중심축을 형성했다. 국민대표 주비회를 이끌었던 안창호 세력(개조파) 북경군사통일회(창조파)에 상해파(개조파), 이르쿠츠파(창조파)가 동상이몽으로 국민대표회의에 참가했으며, 여기에 양남,양서,간도,연해주 등 강한 지역색이 덧붙여지면서 국민대표회의는 파란의 대장정을 시작했다.

145 표면상 대표 숫자로는 상해파.개조파가 국민 대표회의의 다수를 점하는 상황이었다. 그렇지만…대회 프레임을 이루크츠파.창조파가 설정했던 것이다.

145 1923년 1월 3~19일 개최된 15차례 임시회의에는 총 62명의 대표가 참가했다. 참가한 대표의 3/4가 창조파였으며, 시베리아에서 온 30명의 대표가 일치단결하여 집행부를 장악했다. 창조파의 첫 번째 공략 대상은 안창호였다. 간부 선임에서 안창호는 임시의장에 선임되었지만, 대표자격 심사위원회는 그가 이승만의 위임통치 청원과 관련되었다는 이유를 내세워 안창호의 대표 및 임시의장 자격을 공격했다. 국민대표회의 발기인이자 주비회의 핵심인물이었으며, 개조파 중핵이자 임시정부 주역이었던 안창호는 임시회의 개막부터 공박을 당했고, 사실상 국민대표회의 주도권을 상실하게 되었다. 안창호의 자격이 국민대표회의 첫 번째 논쟁 사안이 된 것은 국민대표회의의 경과와 결말을 가늠케 하는 것이었다. 1월 14일 제4차 회의에서 안창호와 북미국민회가 독립운동자와 독립운동단체로 인정받았지만, 그가 받은 내상과 모욕감은 씻을 수 없는 것이었다.

(2) 창조파와 개조파, 상해파와 이르쿠츠크파의 대립

147 개조파 주장의 핵심은 임시정부의 결점이 기관 자체의 문제라기보다는 중심인물의 문제이므로, 인물 교체가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개조파는 상해파 고려공산당 양서파 양남파 임시의정원 의원들로 구성되었다.

(3) 창조파의 ‘한’(韓) 정부, 국민위원회의 설립

156 6월 6일 헌법 토론이 진행된 후 , 6월 7일 헌법이 통과되었다. 마지막 회의에는 46명이 참가했고, 우탁 등 중립파 6명과 장기영 등이 탈퇴를 성명해 총 39명의 회의를 진행했다. 125명으로 시작한 회의가 마침내 대부분의 대표가 떠난 후 잔류한 창조파 29명의 결정으로 귀착된 것이다. …임시정부 내무총장 김구는 내무부령 제1호로 국민대표회 해산령을 내렸고 임시정부의 포고문이 있었다.

159 임시정부와 개조파의 무대가 상해였던 반면, 창조파의 무대는 소비에트러시아였다. 창조파의 핵심이 이르쿠츠크파•국민의회파였으며, 국민대표회의 자금의 출처가 소비에트러시아 외무인민위원부였다는 점을 떠올린다면 이 후의 경로는 예상 가능했다. 이미 국민대표회의에서 탈퇴한 개조파 등은 “일 민족에 양 개의 국가를 형성하는 가공의 화근"을 우려하고 있었다. 민족통일 운동합일을 지향했던 국민대표회의 파행적 결말은 새로운 정부 구성으로 귀결되었고, 그 결과는 임시정부와 국민위원회 양측에 치명적이었다.

3 블라디보스토크에서의 몇 개월: 국민위원 김규식

(1) 정부가 아닌 혁명정당 ‘국민위원회’

(2) 국민위원회의 혁명정당 강령 초안

(3) 국민위원회에 대한 반대파의 공격

(4) 국민위원회 총회와 종막

(5) 박용만 제명 미스터리

194 이렇게 김규식의 블라디보스토크 여정은 끝을 맺었다. 그의 일생 중 가장 치열하게 극단으로 달려간 시기였다. 독립운동 세력의 통일을 지향했 던 김규식은 임정의 분열, 국민대표회의 실패, 국민위원회의 우극 (통해)에 도달한 후에야 멈춰섰다. 파리-워싱턴-하와이-시드니-상해-고륜-이르쿠츠크-모스크바-블라디보스토크로 이어진 1919년부터 1924년까지 김규식의 대여정은 파란 속에 끝을 맺었다.

[독립을 위한 국민위원회가 종료된 계기와 논점들](독립을 위한 국민위원회가 종료된 계기와 논점들)

3장 생업에 돌아가 일상을 돌보다(1923~1932)

1 상해 남화학원·고등보수학원·삼일공학의 교육자(1923~1925)

197 국민대표회의가 실패로 귀결된 이후 한국 독립운동은 큰 침체를 벗어나기 어려웠다. 파리강화회의가 제1차 세계대전 종전 이후 새로운 세계질서의 재편과 영구평화, 민족자결주의에 대한 기대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면, 국민대표회의는 임시정부의 외교노선 실패에 근거한 새로운 방향 모색이었다. 전자가 미국과 파리강화회의에 대한 기대와 재미한인들의 재정적 후원에 기초한 것이라면 후자는 러시아에 대한 희망과 러시아의 재정적 후원에 기초한 것이었다. 국민대표회의가 실패한 후 이승만의 『태평양잡지」 (1924. 10)는 이승만이 원치 않는 대통령을 맡은 것은 상해 모씨, 즉 안창호의 권고를 이기지 못한 것이며, 그 증거가 구미위원부에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자 「신한민보」는 이렇게 반박했다. 국민대표회의 실패는 한성정부 파괴자의 실패보다 그 죄가 경하다. 피로 세운 한성정부가 국민대표회의 때문에 파괴된 것이 아니고 대통령 문제 때문에 파괴된 것이며 한성정부가 파괴되었기 때문에 국민대표회가 생김이다.

2 상해 혜령영문교·복단대학 교수, 5·30운동, 북벌 참가(1922~1928)

(1) 혜령영문교·복단대학 교수

(2) 일본 경찰과 영국 경찰의 체포 시도

(3) 국민당 북벌 참가(1927)

3 천진에서의 일상(1928~1933)

231 김규식의 자식들 가운데 가장 큰 고통을 당한 것은 큰아들 김진동(1910~1997)이었다. 열 살도 안 된 어린아이가 부모 없이 외딴곳에 맡겨지는 감당하기 힘든 상황이 반복 지속된 것이다. 서울, 장가구, 천진, 고륜, 상해, 치치하얼, 상해로 이어지는 그의 유소년기에 친모가 사망하고, 고모부(이태준)는 살해되고, 외삼촌(김필순)은 급사하고, 부친은 늘 부재했으며, 계모도 생사가 목전이어서 그는 의지가지없이 계모의 친가에 맡겨져야 했다. 김규식이 김순애와 재혼했을 때 김진동은 아홉 살이었다. 그러나 그의 생애 거의 대부분 아버지로서 김규식의 따스함은 존재하지 않았다. 언제나 의지하고 신뢰할 수 있는 아버지의 역할을 김규식은 거의 할 수 없었고, 하지도 않았다.

4장 또 한 번의 도미 외교 시도(1933)

1 윤봉길 의거 이후 상해 독립운동 진영의 재편(1932)

237 1930년대 초반은 만보산사건(1931. 7), 만주 침략(1931. 9), 상해사변(1932. 1) 등 일제의 중국 침략이 본격화되는 시기였으며, 이에 맞서 한인 애국단의 이봉창 의거(1932. 1. 8), 윤봉길 의거(1932. 4. 29) 등 한국 독립 운동의 상징적 사건이 분출하였다. 김구의 한인애국단이 주도한 이 두 사건은 일제의 만주 침략에 대항하는 한국인들의 독립 의지와 투쟁열을 보여 주기에 충분했으며, 한국인 한국 독립운동에 대한 중국 측 시각을 일신하는 계기가 되었다. 특히 윤봉길 의거로 일본군 수뇌부를 타격하자 이후 한국 독립운동에 대한 중국 측 후원과 지지가 고조되었고, 사건의 주역인 김구의 명성이 제고되었다. 또한 1930년대 초반 이래 진행되던 한중연대가 구체화되었고, 단체가 조직되기 시작했다.

반면 프랑스 조계에 있던 상해 임시정부는 일제에 의해 파괴되었으며, 안창호를 위시로 다수의 임시정부 인사들과 독립운동가들이 체포•투옥되었다. 또한 상해에서의 독립운동은 더는 안전하지 않은 상황이 지속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중국 측에서 윤봉길 유족 등에게 제공했다고 알려진 후원금을 둘러싸고 김구 세력과 반대세력 간 갈등이 고조되기 시작했다.

  graph TD
    A[1932년 한국대일전선통일동맹] -->|통합 추진| B[1935년 7월 민족혁명당 결성]
    
    subgraph "민족혁명당참여세력(5당통합)"
        C[의열단 - 김원봉]
        D[한국독립당 - 조소앙]
        E[신한독립당 - 지청천]
        F[조선혁명당 - 최동오]
        G[대한독립당 - 김규식]
    end
    
    C & D & E & F & G --> B
    
    B -->|갈등 발생| H[분열과 재편]
    H --> I[민족혁명당 잔류: 김원봉/사회주의계]
    H --> J[탈퇴 및 임정 고수: 김구/민족주의계]
    
    K[대한민국 임시정부] -->|1935년 11월| L[한국국민당 결성 - 김구]

2 한국대일전선통일동맹·중한민중대동맹의 결성(1932)

(1) 한국 측 통일전선 한국대일전선통일동맹의 창립(1932. 11)

252 한국대일전선통일동맹이 만들어진 것은 2가지 동력과 이유 때문이었다. 첫째, 만주사변: 윤봉길 의거 이후 고조된 항일 정세에 부응해서 한국 독립운동 진영을 통일하려는 시도의 산물이었다. 둘째, 변화된 정 세 속에서 중국의 반일열, 중국의 한국 독립운동 후원. 재정 지원 열기를 조직적으로 흡수하기 위한 것이었다. 즉, 한국 독립운동 측의 통일 필요성 및 중국 측의 한국 독립운동 지원 창구 일원화 요구가 결합된 것이었다.

(2) 중한연대를 위한 중한민중대동맹의 결성(1932. 11)

3 김규식의 도미와 재미한인사회의 실정(1933)

(1)『원동정세』의 정세관

274 (김규식의 3차 미국 방문 비망록 중) (7)일본은 세계제국의 야욕을 가지고 있다며, 이를 몇 단계로 설명했다. 1단계가 가장 중요한 한국 병합, 2단계가 만주 점거, 중국 장악으로 현재 진행 중이며, 3단계는 천연자원으로 전군 증강.개편, 4단계는 소련 전복, 5단계는 미국의 태평양 우위 저지 등이라고 분석하고 있다. 이를 통해 일본이 세계제국을 희망하고 있다고 전망했다.

275 (11)은 예상 가능한 해결책으로 미일 개전을 상정해 볼 수 있는데. 일본이 미국을 침범하지 않는 한 대일 선전포고에 대한 의회와 국민의 찬성을 획득할 개연성이 없다고 분석했다. 미국이 일본과 전쟁을 할 경우에도 얻을 수 있는 이권은 한반도에 대한 위임통치권과 만주에 대한 일본의 권리 .이권의 계승 정도이니 이것으로는 미국의 개전 결정을 이끌어 낼 수 없다고 보았다. 미국은 극동에 절대적 이해관계가 없으니 개전할 이유가 없다고 본 것이다. 결국 일본 침략의 저지는 타국의 도움에 기댈 게 아니리 중국 자신의 문제이며. 중국 스스로 해결해야 할 문제라는 것이다. 중국인 들이 한국인들의 도움으로 실제 전투를 하는 것이 가능한 유일한 해결책이라는 것이다. 여기에 미국의 정신적.물질적 지원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사실상 이 팸플릿의 핵심 주장이다. 한국.중국에서 봉기하고, 장기적 유격전을 전개하고, 일본 상품 불매운동을 펼치고. 일본 내 혁명운동을 불러일으켜야 한다는 해법을 제시하고 있다. (12)는 미국이 극동에 절대적 이해관계가 없다는 주장은 옛말이며. 중국은 미국의 수십억 달러 잉여상품 의 시장이 되었다고 분석하고 있다 (13) ~ (14)는 현 상황에서 한국과 중국이 연대해서 극동 문제를 해결 할 필요성과 당위성을 설명한 부분이다. 결국 제2차 세계대전이나 미일 개전은 해결책이 아니며 중국 자신이 문제를 해결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전제로 가능한 해답을 찾는 것이다.

277 가장 주목할 부분은 이 비망록에 1919년 3.1운동, 1930년 광주학생운동, 1932년 윤봉길.이봉창 의거는 언급되었지만, 임시정부의 존재나 활동, 파리강화화의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이는 김규식이 임시정부를 떠났고, 사실상 임시정부의 존재와 역할을 부정하는 시대 조류와 함께했기 때문일 것이다. 또한 이 시기 재미한인사회에서도 임시정부에 대한 비판적 여론이 고조된 상황이었다.

278 김규식이 미국에 도착하는 시점(1933년)에 재미한인의 경제,사회 상황은 최악에 최악을 거듭하고 있었다. 가장 중요한 문제는 대공황의 여파였다. 재미한인의 거의 대부분이 실직과 궁핍의 공포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대공항 #1929년 대공황 시작 1932년 다우존스 381에서 41까지 폭락 1930년대 중반 심각한 가뭄이 미국 농업지대를 덮쳤고… 존스타인 백이 묘사한 “분노의 포도 Grapes of Wrath” 시대였다

279 미국 내 아시아계 소수민족으로. 국적마저 불투명한 한인들의 경제 사정 역시 마찬가지였다. 경제공황이 모든 사회 활동을 움츠리게 했다. 가장 중요한 한인단체였던 대한인국민회는 미주와 하와이 양측에서 모두 곤란을 면하기 어려웠다. 하와이국민회는 이승만과의 오랜 법정 송사 끝에 승리해 교민단에서 국민회라는 명칭을 회복했지만, 한인사회 분열과 경제공황의 여파에서 벗어나기 어려웠다. #이승만 은 하와이에서 사실상 추방되었고, 국제연맹 외교를 이유로 내세워 스위스 제네바로 향했다. 하와이 한인 사회는 이승만을 배척해 국외로 추방할 만큼 극심한 분열과 후유증을 겪고 있었다.

280 방선주에 따르면 1931년 12월 9일 국민회 대표 백일규.홍헌…등 모여 “임시정부를 중심으로 집중하자"라는 표어로 연합을 모색하며 <미주한인연합회선언서>를 내놓았고, 여기에 나성동지회까지 참여했다. …미주한인연합회는 1932년 3월 28일 특별대표회를 샌프란시시코에서 개최하고, 의연금을 모아 임시정부에 내기로 결의했다. ….임시정부 내무부장 조완구는 미주한인연합회 집행부에 1933년부터 미국,멕시코, 쿠파 동포의 인구세 징수를 허가한다고 알렸다. 여러모로 국민회의 쇠락과 새로운 한인연합회의 성장으로 해석할 수 있는 순간이었다. 연합회는 설립 후 1년간 인구세로 677달러를 거둬 675달러를 임정에 송금했다. 1930년 대한인국민회총회가 인구세 451달러 76센트를 거둬 이 중 2백 달러를 임시정부에 상남한 것에 비춰 보면 3배의 성과를 거둔 것이다.

281 그러나 미주한인연합회는 지속성을 지니기 어려웠다. ….가장 결정적인 이유중 하나는 1933년 김규식이 미주에 도착한 후 연합회 핵심간부들이 연합회를 해체하고 김규식이 주도하는 한국대일전선통일동맹과 중한민중대동맹에 참가를 결정했기 때문이다. 이들은 3.1운동기 전후부터 김규식의 열렬한 지지.후원자들이었다.

283 김규식은 중국에서 한국대일전선통일동맹과 중한민중대동맹이라는 한국 독립운동 진영의 통일전선과 한중연대의 이름을 표방하고 미주에 건너왔으나, 현실에서는 재미한인사회의 자발적이고 내생적인 연합운동을 굴절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 시대의 흐름이자 미주와 중국 간 시간 지체, 상황, 조건의 차이가 초래한 결과였다. 3.1 운동기 기대를 한몸에 모았던 임시 정부는 쇠락했으며, 구미위원부 위원장이었던 김규식은 임시 정부를 떠나 새로운 조직의 특사로 미국에 도착한 것이다. 기대와 현실이 엇갈릴 수밖에 없는 구조와 상황이었다. 1933년 3월 (10일) 김규식이 로스앤젤레스에 상륙할 시점의 재미 한인의 사정이 이와 같았던 것이다.

(2) 대공황기 재미한인사회의 실정

297 결국 대공황으로 인한 경제 사정의 악화, 3.1 운동기 이래 지속된 지지와 자금 지원에도 불구하고 독립운동 진영의 지리멸렬함 등을 보며 재미 한인 사회에서는 김규식의 도미 활동에 대해 냉담한 분위기가 존재했던 것이다. 즉, 김규식이 또 다른 단체 이름을 내세워 “수천 달러 모금을 하기 위해 도미”했다는 냉소적인 시각이었다.

315 즉, 김규식이 로스앤젤레스, 샌프란시스코에서 약 2개월간 체류하면서 가장 중점을 두었던 중국 화교와의 연대, 중한민중동맹 미국지부 조직 혹은 가맹은 무산되었다. 중국 화교가 가맹한다면 조직과 세력의 확대는 물론 풍부한 자금 지원을 예상 할 수 있는 것이었다. 292 태평양전쟁기 한길수가 한 가장 중요한 역할 중 하나가 재미한인의 법적 지위가 일본인과 다르다고 하는 점을 미국 정관계 요로에 청원하고 언론에 홍보함으로써 한인들이 일본인 취급을 받지 않도록 미국정부의 승인을 얻어낸 것이라는 점을 생각한다면, 그런 활동과 인식의 뿌리가 오래된 것임을 알 수 있다.

4 김규식의 미주 여정과 주요 활동: 분열을 품은 통일

(1) 캘리포니아에서의 일정: 중한동맹 지부 결성 실패와 대한독립당 조직(1933. 3. 10~1933. 5. 16)

284 1933년 3월 10일 로스앤젤레스에 상륙한 이후 김규식의 미주 여정은 크게 3부분으로 나뉘었다. 첫째는 캘리포니아를 중심으로 한 서부 여정이었고. 둘째는 중부를 거쳐 동부로 가는 여정이었으며, 마지막은 하와이 여정이었다. 가장 활발했으며 언론에 많이 보도된 일정은 역시 캘리포니아 한인 사회와의 접촉이었다. 한인들은 김규식의 도착과 활동에 적극적이고 열렬한 환호를 보냈으나, 한국대일전선통일동맹과 중한민중대동맹을 통한 연합 단결.통일을 주장하는 김규식의 의도와는 달리 재미한인사회는 분열을 피할 수 없는 역설적인 상황에 봉착했다. 김규식이 동부를 거쳐 하와이에 도착했을 때는 그에 대한 환영과 기대의 열기가 식었고, 마침내 하와이에서 상해로 출국했을 시점에는 출국 사실이 신한민보 등 한인 언론에 보도되지 않을 정도로 대중의 관심은 냉각되었다

294 “우리가 그때 (김규식 박사를) 연조한 것은 원동의 대운동을 후원하기 위함이오, 또 다시 딴 단체를 조직하는 것을 원치 않는다"며 주인인 회원도 모르게 조직부터 한 독립당은 더욱 원치 않는다고 거부했다. 결국 대한독립당은 회장(송헌주), 서기(송창균)만 남고 말았다.

(2) 중부·동부에서의 일정: 중한민중동맹·한국대일전선통일동맹 뉴욕지부의 결성(1933. 5. 17~1933. 7. 7)

(3) 하와이에서의 활동: 이용직·한길수와의 연결

329 김규식은 (1933년 7월 21일 하와이 연설에서) “재즈댄스, 야단법석, 여성 흡연, 음주 파티 같은 얄팍한 문화를 모방하지 말라”며, “이런 것들은 인류 문화와 문명에 어떤 기여도 할 수 없다고 충고했다. 대신 페어플레이, 훌륭한 스포츠맨십, 국가 통일과 협력에 대한 열망 등 미국의 정신을 본받으라”고 했다. “함께 일하고, 함께 계획하고, 함께 봉사하는 것을 배우라”는 것이었다. 이것이 김규식의 마지막 공식 연설 행사였다.

5장 실의와 온축의 10년(1933~1942): 임시정부·민족혁명당 합류와 탈퇴, 사천대학 교수 시절

1 김규식의 임시정부 재합류(1933~1935)

337 1933년 미국 방문에서 돌아온 이후 김규식의 행보는 크게 세 갈래로 정리 할 수 있다. 첫째는 임시정부로의 재합류였다. 1924년 임시정부를 떠나 국민대표회의 창조파로 새로운 정부 수립에 앞장선 이래 10여 년 만이었다. 그러나 김규식의 임정 복귀는 1933~1935년의 짧은 기간에 그쳤다. 김규식의 본격적인 임정 참여는 태평양전쟁이 발발한 이후 1943년 성도 사천 대학에서 임정이 있는 중경으로 이주한 후에 시작되었다. 둘째, 김규식은 1935년 민족유일당 운동의 결과 조직된 민족혁명당에 참여했다. 한국대일전선통일동맹이 창립될 당시 김원봉의 의열단이 참가했으며, 김규식은 1930년대 이래 김원봉 계열과 함께했다. 그런데 1935년 민족혁명당 창립 직후 김규식은 당을 떠났고, 1943년이 되어서야 조선 민족혁명당 당수로 복귀했다. 명목은 당수였으나 실권은 김원봉에게 있었 다. 지향은 유사했으나 실천 방식이 상이한 양자의 결합은 해방 후 귀국하 고 나서야 정리되었다. 셋째, 김규식은 1935년 사천성 성도의 국립사천대학 교수가 되어 1943년까지 재직했다. 사실상 1935년 이후 1945년까지 김규식의 활동 가운데 가장 중심적인 활동이자 생계 수단이었다. 김규식은 1943년 1월 사천에서 중경으로 이주해 “교편을 던지고”,“나의 여생을 가져 나라에 받치고 임시정부에 충성을 다하기로 결심” 했다.

340 임시정부는 1927년 이래 세입•세출이 모두 급감했고, 특히 민족유일 당 운동(19261929년)이 실패로 돌아간 뒤인 1930년 재정적 위기가 심화되었다. 임시정부의 연도별 세입액은 1927년 1,445원, 1928년 975원, 1929년 1,265원, 1930년 547원이었다. 1927 1929년간 임정 살림의 60 ~70%를 점했던 애국금이 1930년도에는 0원이 되었다. 민족유일당 운동의 실패에 대한 낙심에 세계대공황의 여파가 가중된 결과였다.

342 (이승만)그는 1933년 이래 임시정부와의 관계를 회복하는 중이었다. 1925년 임시정부 대통령에서 탄핵•면직되고 구미 위원부 해체령이 내려진 이래 이승만은 임시정부를 적대적으로 대했으나, 1930년 하와이에서 연이은 풍파와 재판 끝에 사실상 추방된 이승만으로서는 임시정부와의 관계 회복이 절실했다. 또한 끝없는 분열과 명성 추락을 거듭하던 임시정부로서도 미주와 관계를 회복하는 데 이승만이 필요했다. 임시정부와 이승만 양측 모두 이전의 적대적 감정과 관계를 극복하고 연대를 모색해야 할 사정과 시대를 맞이하고 있었던 것이다.

343 (1935년)그렇지만 임정의 재정상황은 전혀 개선되지 않았다. 1933년 하반기 임정의 총수입은 663원이었고. 1934년 1~10월까지 지출이 2,300원이었는데 대부분 빌린 돈이었다. 임시정부는 인구세를 내던 상해 교민과 재미한인들의 후원을 받는 데 실패했으며, 이런 상황은 임시정부의 구조적 위기이자 외부의 도전에 취약한 조건을 만들고 있었다.

2 1930년대 중국국민당정부의 후원과 임시정부·민족혁명당의 양립

345 #1932년 윤봉길 의거 이후 중국국민당정부는 한국 독립운동에 대한 지원을 본격화하기 시작했다. 지원은 두 갈래로 이뤄졌는데. 재정적 지원과 군사적 지원이었다. 국민당의 CC(중국국민당 장악하고 있던 수령 진과부,진립부 형제의 이니셜)파는 김구(임시정부)와 한국광복군을 지원했으며, 중국군과 남의사는 김원봉(민족혁명당)과 조선의용대를 지지했다. 국민당정부와 국민당은 김구 계열을, 중국군과 남의사는 김원봉 계열을 지원했던 것이다. 김구는 윤봉길 이봉창 의거로 이름이 높았으며, 김원봉은 의열단 의거로 이름을 얻었다. 두 사람은 모두 중국국민당정부 및 군대와 일정한 연계가 있었던 것이다.

350 1932년 이래 중국국민당으로부터 흘러나온 재정적 지원과 군사적 훈련 제공은 한국 독립운동 진영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일으키는 기회였다. 이는 김구.임시정부.한국광복군과 김원봉.조선민족혁명당.조선의용대라는 2개의 중심 세력을 형성하는 데 도움을 주었으며, 동시에 국민당 지역내 보수적.우파적 흐름과 진보적.좌파적 흐름의 대결을 불러일으켰다. 중국국민당의 지원과 후원은 한국 독립운동 활성화의 기회인 동시에 역설적으로 각축하는 두 세력의 분립.대결의 원천이 되었다.

[1932년 윤봉길 의거 이후 중국 국민당(장개석 정부)의 파격적인 지원.분열단초](1932년 윤봉길 의거 이후 중국 국민당(장개석 정부)의 파격적인 지원.분열단초)

351 이와 같이 두 갈래로 나눠진 중국국민당정부의 한국 독립운동 지원은 김원봉과 김구, 민족혁명당과 임시정부(한국독립당), 조선의용대와 한국 광복군의 대결적 구도를 발생시키는 외적 요인이 되었다. 이후 조선의용대 일부가 연안으로 북상해 중국공산당품에 안기자, 격분한 중국정부는 조선 의용대와 민족혁명당에 대한 지원을 중단했다. 잔류한 조선민족혁명당과 조선의용대는 중국정부의 명령과 시대의 요구에 따라 임시정부•광복군에 합류할 수밖에 없었다. 중국정부의 한국 독립운동 지원은 김구•임시정부로 일원화되었고, 이후에는 일원화된 중국정부의 지원금을 둘러싸고 분배의 공정성을 제기하는 갈등이 벌어졌다.

3 민족혁명당의 결성, 김규식의 참여와 사직(1935)

(1) 대일전선통일동맹의 해체와 민족혁명당 결성

353 윤봉길 의거 이후 중국 측 후원과 지지가 고조되는 상황속에서 사건의 주역이었던 김구 등이 임시정부를 떠나자, 임시정부는 사실상 무정부 상태가 되어 존립이 위태로운 상황이 되었다.

(2) 김규식의 민족혁명당 “사직”

362 1935년 임시정부의 세입은…재미한인들의 인구세 납부가 늘어나기 시작했다. 김규식은 1930년대 초반 전력을 다했던 한국대일전선통일동맹이 민족혁명당으로 귀결되는 과정에서 중국 관내 좌파 통일전선의 지도자, 한중 연대의 지도자, 재미한인의 대표자로서 면목을 잃게 되었다. 재정적 후원 과 조직적 기반이 없는 김규식의 현실적 한계일 수밖에 없었다.

중국정부 로부터 흘러나온 재정적 후원과 군사적 지원은 김원봉• 의열단과 김구•한인애국단의 두 갈래 흐름을 만들어 냈고, 두 세력은 중국 관내 한국 독립운 동 세력을 정치 조직인 민족혁명당과 임시정부(한국독립당), 군사조직인 조선의용대와 한국광복군으로 분립했다.

그 속에서 명망가이자 외교가였던 김규식의 입지는 축소될 수밖에 없는 구조였다. 자신에게 맞지 않는 자 리에 계속 앉아 있을 수는 없었기에, 김규식은 1935년 하반기 홀연히 민족 혁명당과 임시정부 모두를 떠났다. 그의 선택은 사천성 성도에 있는 국립 사천대학 교수였다.

4 온축의 사천대학 교수 시절(1935~1942)

[1937년 중일전쟁 일본군 중국 주요점령지역](1937년 중일전쟁 일본군 중국 주요점령지역)

![Pasted image 20260322070527.png](Pasted image 20260322070527.png)

(1) 영문학 교수 생활과 저술

김규식은 1935 ~ 1942년간 사천대학 외국어문학과 교수 및 학과장을 지넀다. 김규식이 저작으로 꼽은 책들은 모두 사천대학 재직 시절에 출간되었거나 준비한 것들이다.

(2) 화상마 찻집, 죽근탄 감귤원의 김우사

381 김규식의 영시집 『양자유경』이 어떻게 해서 만들어지게 되었는지, 그 과정과 이유를 이해할 수 있다. 김규식은 사천대학 시절 오통교의 찻집과 감귤원에서 중국의 화가, 문인, 예술가 등과 교류했고, 배를 타고 양자강을 오르내리면서 절경을 감상하고 시와 예술을 얘기하고 항일전쟁을 논했다. 양정명이 빌린 작은 배는 수천 집의 불빛이 빛나는 저녁에 양자강을 거슬러 돌아왔다. 『양자유경』의 시상이 여기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중국 친구들과 주고받은 시인•묵객의 대화가 마음 한편에 쌓이고 직접 목격한 양자강의 풍광• 감상이 농밀하게 온축되었다가, 일본이 패망하고 고국으로 돌아가게 되는 순간 격정적으로 뿜어져 나왔을 것이다. 양정명이 두 폭의 삽화 그림을 선물 한것도 오통교 시절의 인연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하지만 김규식의 유일한 시집이자 문학적 감수성과 아름다운 화가 들어간 『양자유경』은 결국 • 김규식 생전에 출간되지 못했다.

6장 한국독립당과 민족혁명당의 대결(1937~1942)

1 중일전쟁과 광복진선·민족전선의 분립(1937)

(1) 광복진선과 민족전선의 분립

387 임시정부 세력은 1937년 8월 중국 내 한국국민당(김구), 재건한국독립당(조소앙), 조선혁명당(이청천)과 재미한인단체인 대한인국민회, 하와이 대한인국민회, 동지회, 단합회, 한국애국부인회, 대한부인구제회 등 9단체가 연합해 8월 17일 한국광복운동단체연합회(약칭 광복진선)를 조직했다.

(2) 기강7당회의·5당회의의 결렬

395 중국 국민당 조사통계국의 왕영생은 회의 결과를 당조직부장 주가화에게 보고했는데, 7당 회의(1939년 8월 27일) 실패 원인을 다음과 같이 정리했다. 1. 한국 민족성 자체의 단결 정신 부족, 2. 민족 혁명을 영도할 위대한 영수와 인재가 적음, 3. 중심 사상의 결핍, 4. 각 당파 간 시기, 불신이 깊음 등이었다. 김구는 도덕성, 명망, 분투 정신이 강하지만 재능이 다소 부족하며, 김원봉은 김구에 비해 재능은 약간 앞서나 도덕성, 명망은 부족하다는 게 왕영생의 인물평이었다. 김구와 김원봉 중 누구도 민족 혁명의 “영수”로 인정할 만한 역량을 갖추지 못했고, 사전에 전체 당원을 설복시키지 못한 결과 통일에 이르지 못했다는 평가였다.

2 조선의용대와 광복군의 분립

(1) 조선의용대의 창설과 북상

중일전쟁 발발로 항일전쟁이 본격화되자, 중국국민당은 더는 일본의 눈치를 보지 않고 한인 청년들에게 군사훈련을 제공하는 데 적극적 입장을 취하였다. …. 대부분 김원봉 계열이었던 청년 83명이 입학해서 6개월 동안 훈련을 받았다. 398

염인호에 따르면 청산화부와 왕봉생은 극동반파시스트동맹을 건설하는 동시에 산하에 국에의용군의 일환으로 조선의용군을 만들려고 했는데, 김원봉 등은 조선의용군을 극동반파시스트동맹의 지휘하에 두는데 반대했다. 양측의 협의 결과, 한중 대표로 구성된 지도위원회가 지도하는 국제 의용군으로 조선의용군을 창설하는 방안이 작성되었다. 402

그러나 조선의용대 내부에는 동북, 만주 진출 노선 대 관내 잔류노선의 대립, 김원봉 등 온건 좌파와 최창익 등 공산주의자들 간 사상적 갈등이라는 두 가지 갈등요소가 상존하고 있었다. 405

406 의열단 창립 이래 애국적 청년, 학생의 선망 대상이자 의열 투쟁의 선봉이며 가장 치열한 삶의 전형으로 알려진 김원봉과 민족혁명당은 (1930년대 후반에는) 소극적 노선을 추구하는 보수주의자로 청년 군관들의 비판 대상이자, 공산주의자들의 비난 표적이 된 것이다. 변화하는 시대와 상황 속에서 현실적 판단과 이성적 입장은 이상주의적 열망과 공산주의자들의 선전에 허물어졌다. 중국 관내에서 진보적이고 적극적 입장을 자처했던 김원봉과 민족혁명당은 급진적 민족주의 청년들과 공산주의자의 결합 속에 변명과 주저하는 태도의 보수주의자로 위치 지워졌다. 반공적인 중국국민당 군사위원회와 특무기관 남의사의 지원을 받는 상황 속에서 급진적, 좌파적 지향을 견지한다는 김원봉의 입장은 중국공산당 및 팔로군과 결합해 동북 노선을 주장하던 최창익 등 진짜 공산주의자들의 주장에 선명성을 잃었다. 반공적 중국 국민당의 후원을 받으면서 진보적, 좌파적 노선을 지향한다는 김원봉의 존재론적 한계였다.

조선의용대는 중국국민당정부의 후원과 후의에 의해 성립될 수 있었으며, 중국국민당 정부를 빛내는 국제의용군으로서의 위상을 지녔으나, 그 주력이 중국공산당 지역으로 북상함으로써 중국국민당에게 모욕적인 배반을 안겼다. 김원봉과 조선의용대, 민족혁명당의 중경내 위상과 앞날은 예측불허의 곤경에 처했다. 410

(2) 한국광복군의 창설

410 #1940년 9월 한국광복군이 창설되었다. 한국광복군 창설은 임시정부의 오랜 노력의 산물이자 조선민족혁명당.조선의용대와 대결한 결과이기도 했다. 한국광복군 창설은 1938년 10월 이래 유일한 한인 무력으로 인정된 조선의용대에 대한 중국국민당정부의 지지와 신뢰가 붕괴된 반면, 김구.한국독립당에 대한 중국정부의 지원이 확대되는 과정의 산물이었다.

412 김구는 한독당을 대표하여 1940년 초부터 중국국민당정부의 요인 주가회.서은중 등을 상대로 광복군 편성의 필요성을 설득하기 시작했다.

416 장개석은 1940년 4월 주가회에게 참모총장 하응흠과 광복군 지원 요청을 상의하라고 명령했고, 하응흠의 보고를 들은 후, 5월 하순 한국 광복군 설립을 비준했다….중국국민당은 김구 측에게 자세한 광복군 창설 방안의 작성을 요구했다.

416 사상ㆍ이념의 차이는 결정적이거나 돌이킬 수 없는 것이 아니었다. 문제는 상대방에 대한 태도와 자세, 인간적 존중과 신뢰의 차원이었다. 민혁당이 청년층의 진보적ㆍ급진적 시대 인식을 대표했다면 한독당은 수십 년 혁명 경험과 그에 근거한 노년층의 지사적 태도와 자기 확신을 반영했다. 청년층과 노년층이 각자 가지고 있던 부동의 자기 확신과 비타협적 태도가 충돌하고 파열한 것이다. 청년의 패기와 노년의 지혜가 서로를 포용하지는 못했던 것이다.

중국국민당의 지원과 지지를 둘러싼 김구-김원봉의 대립과 대결은 중일전쟁과 환남사변 사이의 시대 상황에 따라 출렁거렸던 것이다. 414

417 한국광복군은 임시정부 산하에, 한국독립당이 아닌 정부의 군대로 설립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국국민당정부가 항일전쟁의 와중에 한국 독립운동의 대표적 정치조직인 임시정부를 후대하고 군사조직인 한국광복군을 창설하도록 지원한 것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외국 땅에서 외국정부의 허가를 얻은 하인 군사력 창설이 가능했던 것은 중국 측 후의가 있었기 때문이다. 422

중국공산당도 항일전쟁과 국공 대결이라는 이중 압력 속에서 정치조직 화북조선독립동맹과 군사조직 조선의용군을 후원함으로써 전후 한구에 대한 영향력을 확보하려 했다. 태평양전쟁기는 독립전쟁을 향한 한국독립운동 세력의 투쟁이 고조되고, 한중, 한미 간 국제연대가 본격화되는 시기였을 뿐 아니라 전후 대한국 영향력 활보를 둘러싸고 중국국민당과 중국공산당이 한국 지지세력을 확보하고 쟁탈하려고 각축하는 시기였다. 423

중국국민당정부의 지지는 명확하게 한국독립당, 임시정부, 한국광복군으로 기울었고, 민족혁명당, 조선의용대에는 별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민족혁명당이 임시정부에 참가하고, 조선의용대가 한국광복군에 흡수, 통합되는 거은 피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427

3 한독당·민혁당 통합 실패와 군대·의회·정부의 통일(1942)

[장개석 蔣介石 과 대한민국임시정부](장개석 蔣介石 과 대한민국임시정부)

#1942년 김구의 법통과 김원봉의 군사력이 하나로 합쳐진 해, 장개석의 지원

구분 주요 단체 / 기구 핵심 인물 주요 역할
정부 대한민국 임시정부 김구, 김규식 독립운동의 법통 수호 및 외교 활동
정당 한국독립당 / 조선민족혁명당 조소앙 / 김원봉 임정 운영의 정치적 기반 (여야 공존)
군사 한국광복군 지청천, 김원봉 연합군 일원으로 대일 항전 수행
사상 삼균주의 (조소앙) 조소앙 건국 강령 선포 (정치·경제·교육 균등)

(1) 중국국민당정부의 광복군·의용대 통합 결정

(2) 한독당과 민혁당의 통합 시도

(3) 임시의정원과 임시정부의 확대 개편

437 김규식도 태평양 전쟁 발발 이후 본격화되는 대일 투쟁에 동참하고자 하는 열망과 결심을 굳혔다. (만 61세였던) 1942년 11월 임시의정원이 김규식을 국무위원으로 선임한 것은 임시정부와 민족혁명당은 물론 김규식과의 사전 협의 및 동의에 기초한 것임을 의미했다. 1942년 11월 김규식은 공식적으로 임시정부와의 관계를 복원했으며, 민족혁명당으로 복귀를 결심했다. 1935년 홀연히 임시정부와 민족혁명당을 떠난 지 7년 만의 일이었다. 임시정부 복귀는 김규식, 임시정부, 민족혁명당 3자의 이해와 요구가 맞아떨어지면서 실현된 것이다. 그러나 그만큼 임시정부와 민족혁명당 내에서 김규식의 위치와 활동 공간은 출발부터 제약될 수밖에 없었다. 한독당과 민혁당의 정치적 타협의 결과로 조성된 공간 속에서 김규식의 역할은 정치적 조정자와 완충 지대로 규정되었다. 운신의 폭이 좁을 수밖에 없었으며, 독자적 목소리는 불가능한 환경이었다.

7장 중경 임시정부의 김규식(1943~1945)

김규식이 다시 임시정부로 복귀하던 1942년 이미 만 61세였다는 사실도 기억하면 좋겠습니다. 당시 이승만은 67세, 김구는 66세, 김원봉은 44세였어요! (당시 김일성은 만 30세!)

1 김원봉·민족혁명당과 한길수·재미한인사회의 연계(1941~1942)

441 김규식은 사천대학을 떠나 1943년 1월 10일 부인 김순애와 함께 중경에 도착했다. 김규식은 “이제 교편을 던졌고 나의 여생을 가져 나라에 받치고 임시정부에 충성을 다하기로 결심"했다며 “일체의 과거사를 다 쓸어 버리고 임시정부에 들어와서 모든 동지들과 합작하기를 원"한다고 말했다. 김 규식의 중경 시대가 시작된 것이다.

중경 시절 김규식의 활동은 크게 세 가 지 측면으로 전개되었다. 첫째, 임시정부에서의 활동이다. …김규식은 임시정부의 활동과 한국 독립의 당위성을 선전하는 선전부장을 담당했다. 둘째, 조선민족혁명당 활동. …김규식은 민혁당 주석이었으며, 3.1운동기 이래 한국 독립운동을 대표하는 인물이었지만… 실제 권한은 김원봉에게 있었다 셋째, 한국독립당괴 민족혁명당, 임시정부 내 여당과 야당 세력 간 중개자이자 조정자 역할

1937년 이후 극한적 댈비을 벌였던 한독당과 민혁당, 광복진선과 민족전선, 광복군과 조선의용대는 1942년 이후 광복군, 임시의정원, 임시정부로 통합되었지만, 그 대립의 여파는 지속되고 있었다.

443 태평양전쟁이 종막을 향해 달려가며, 연합국의 대한정책으로 신탁통치 계획이 공언되는 시점이었지만, 임시정부는 명목적 좌우합작.민족통일전선과 실질적 분열.불화 상태를 유지했던 것이다. 이런 정치환경에서 김규식은 민혁당의 주석이자 대표로서 갈등의 완충지대이자 조정자 역할을 수행했다. 김규식은 민혁당과 한독당 사이에서 중재 혹은 가교 역할을 할 수 있는 독립운동의 원로였다. 김규식은 한독당을 상대로, 혹은 중국정부를 상대로 민혁당의 목소리를 전달하고, 그 반대의 목소리를 전달하는데 적격인 위치에 있었다. 적어도 민혁당 측에서 김규식의 효용은 이런 점에서 주안점이 주어져 있었을 것이다.

443 중경 시대 이러한 중재자.조정자 역할을 통해 김규식은 임시정부의 핵심인물로 부각되었다. 나아가 중경 시절 김규식의 입지와 역할, 경향성은 해방 후 국내 정치 활동의 주춧돌이 되었다. 즉, 김규식은 김구•조소앙 등 임시정부 핵심은 물론 장건상• 김성숙•박건웅 등 임시정부 내 중도좌파 세력들과도 원만한 관계를 유지했으며, 이것이 해방 후 그의 정치적 자산이 되었다. 또한 합리적 의견과 이해의 조정이라는 중경 시대 그의 정치적 역할은 해방 후 좌우합작운동•남북협상이라는 그의 정치공간을 조성하는 배경이 되었다.

(1) 김규식과 문제적 인물 한길수의 관계

444 중경에서 김규식이 당면한 첫 번째 일은 중한민중동맹단 미주대표를 자임하고 있는 한길수와의 관계 정리였다.

444 김구는 이승만을 지지하면서 이승만의 정치적 반대파 역할을 하는 한길수를 제압하기 위해 김규식의 도움을 얻고자 했다.

449 허풍쟁이였던 한길수는 이솝 우화에 등장하는 늑대소년처럼 일본의 미국 침략을 계속 주장했다. 우연의 일치인지 몰라도 일본의 진주만 습격이 있었고, 한길수가 진주만 습격을 정확히 예언한 것으로 밝혀지자 그의 주가는 급상승했다.

[한길수 - 하와이에서 일본이 미국공격 예언-그리고 태평양전쟁](한길수 - 하와이에서 일본이 미국공격 예언-그리고 태평양전쟁)

[일본이 태평양 전쟁-진주만- 공격한 배경-동아시아 제국이 목적](일본이 태평양 전쟁-진주만- 공격한 배경-동아시아 제국이 목적)

453 한길수는 신문과 잡지, 책자 등에서 얻은 정보를 과장.홍보하는 생존형.생계형 자칭 정보공작 전문가였을 뿐이다. 2차 대전 종전 이후 냉전이 본격화되자, 한길수는 예의 정보공작을 자처하며 이번에는 반미공작을 탐사하는 정보 활동을 벌였으며 자신이 한국전쟁을 예견했다고 허풍을 치면서, 미국 내 한국 지하 할동의 대표를 자처했다. 중경에 정착한 김규식은 중한민중동맹단 대표를 자임하는 한길수 문제를 해결하려 했으나, 이는 이미 그의 권한과 통제 범위를 벗어난 일이었다. 한길수는 미주와 중경에서 통제할 수 없는 문제적 인물이 되었다.

(2) 김원봉과 한길수·민족혁명당 미주지부의 연계

470 중경에서 김원봉이 보내는 이런 종류의 과장된 정보와 부정확한 소식이 재미한인사회에 전파되면서 파급력을 지니게 되었던 것이다. …김원봉이 한길수에게 보낸 편지를 보면, 임시정부.한독당.광복군은 물론 김구.이청천 등에 대한 반감과 노골적인 비난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다. …광복군,임시정부라는 한 울타리에 모이게 되었지만, 김권봉. 민혁당은 이전의 민족유일당 운동.조선민족전선연맹의 관성에 따라 임시정부를 사실상 부인하거나 혹은 그 속에서 영도권을 장악하려는 의도를 숨기지 않았다.

470 노골적인 적대감과 부정적 인식 속에 임시정부라는 외형적 틀이 유지된 가장 큰 동력은 중국정부의 갱미과 재정적.군사적 후원 때문이었다. 중경 시대 민족통일전선 정부의 속내는 갈등.분열.경쟁의 도가니였다. 중국의 후원과 억제가 없었다면, 가냘픈 통합과 합작의 틀은 진즉 깨어졌을 것이다.

471 김원봉과 민혁당은 한길수.민혁당 미주지부와 연계되었고, 반면 김구.한독당은 이승만.재미 한족연합회와 연계되었다. 한국 독립운동과 임시정부 지지라는 대의로 통일된 듯 보였던 중경과 미주의 연계는 곧 날카로운 파열음을 내며 대충돌을 일으키게 되었다. 중경과 미주 각각의 사회 내에서뿐 아니라 중경과 미주 상호관계에서도 대파열이 발생했다.

2 신탁통치 문제의 대두와 한독당·민혁당의 갈등(1943)

(1) 한반도 신탁통치론의 대두와 국제공관·국제공영·국제감호설(1942~1943)

472 1942년 이래 미 국무부에서는 랭던(William R. Landgon) 등을 중심으로 한반도 신탁통치 계획이 논의 입안되고 있었다. 신탁통치 계획은 크게 2가 지 측면에서 비롯된 것이다. 첫째, 한반도는 중국과 러시아라는 강대국의 이해가 교차하는 지역이고, 현상적으로는 중국의 강한 영향력이 임시정부 를 통해 행사되고 있는데, 만약 극동에 전략적 이해를 갖고 있는 소련을 배 제한다면 전후 극동의 안전과 한반도의 안정을 도모할 수 없게 될 것이라 는 지정학적, 국제정치적 인식이었다. 그렇다면 중국을 억제하고, 러시아 의 잠재적 이익을 도모하기 위해서는 미국의 개입이 필요하며, 중국•러시 아•미국을 포함하는 국제적 합의에 의한 대한정책이 필요하다는 인식이 미국 정책기획자, 정책결정자들 사이에서 공감대를 이루고 있었다. 둘째, 한국 국내 사정에 있어서 한국인들의 자치 능력이 결여되었다는 인식을 반 영한 것이었다. 한국은 오랫동안 일본 식민지였기 때문에 자치 능력이 결 여되어 있으며, 중국과 미국 등 해외 한국 독립운동 조직들은 파벌로 분열되고, 한국인들을 대표한다는 대표성을 결여하고 있기 때문에 전후 상당 기간 국제적 관리, 보호가 필요하다는 논리였다 즉, 한반도에 대한 강대국의 이해관계 교차, 한국인들의 자치 능력 결여라는 국제적 이유와 국내적 실정이 한반도 신탁통치 계획의 주요 논리이자 배경이었다.

473 서울 주재 영사로 근무했던 랭던이 1942년 2월 작성한 한국 관련 비망록은 신탁통치 계획의 원형으로 손꼽히며 가장 유명한 것이다. 랭던은 대다수 한국인이 가난한 문맹이며, 정치적으로 경험이 없고, 경제적으로도 후진적인 상태이며, 40년간 일본의 지배를 받았기 때문에 오직 소수의 한국인만 자유를 기억할 수 있는 상태이므로 최소한 한 세대 동안 한국은 열강의 보호, 지도, 원조를 받아야 근대 국가가 될 수 있다"라고 주장했 다. 이는 랭던만의 특수하고 독특한 주장이 아니라 미국 국무부는 물론 미국 정계 및 대중여론 주도층에 공감을 얻은 것이었으며, 당연히 루스벨트 대통령에게도 설득력 있는 주장으로 받아들여졌다.

477 #1942년 8월호<포춘>의 별책 부록 기사 이 보고서의 한국 관련 내용 중 가장 눈에 띄는 대목은 중경 임시정부 와 한국인의 분열을 다른 부분이다. 보고서는 중경 임시정부가 김구 지도 하에 중경에 위치하고 있는데, 아직 중국정부가 승인하지 않았으며, 망명 한국인들은 파벌로 분열되었고, 한국을 적법하게 대표하는 데 대한 일반적 합의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나아가 일본 통치의 종식은 그런 일 이 벌어질 경우 매우 격렬할 가능성이 높으며, 이를 영도할 사람들은 망명 한국인들에게 국가를 넘겨주려 하지 않을 것으로 판단했다. 즉, 중경 임시 정부를 거론하고 있지만, 대표성 결여, 파벌 분열, 중국의 미승인, 한국 내 독립운동가들과의 불일치 등을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486 1943년 중반 이후 본격화된 임시정부의 신탁 통치 반대 입장과 논리, 움직임은 1945년 말 모스크바 3상 회의 결정에 대한 임시정부의 즉각적 반대와 반탁 운동의 전사이자 배경을 형성하는 것이었다. 즉, 1945년 말 임정 주도의 반탁 운동은 현상적으로 『동아일보』의 오보와 임시정부의 정치적 야심이 결합된 현상적 대응의 측면이 있었지만, 근저에는 1943년 이해 중경 임정의 일관된 신탁 통치 반대 논리, 반대 입장, 반대 운동의 연장이자 역사적 관성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2) 1943년 카이로회담·카이로선언의 이중적 의미

488 임정의 독립 주장이 관철될 수 있도록 중국이 지지해 달라고 요청했다. 이에 대한 장개석의 답변은 다음과 같다.

영국과 미국 방면에서 이런 논의가 있는 것은 분명합니다. 이 문제를 둘러싸고 앞으로 많은 논란이 있을 것으로 예상됩니다. 중국의 의지가 반영되기 위해서는 한국 혁명진영 내부의 단결통일과 더불어 실제 공작방면에서도 뭔가 내세울 만한 성과가 필요할 것입니다.

이 시점에 중국을 포함한 연합국은 전후 한반도 신탁통치 실시에 원칙적으로 합의한 상황이었다.

489 #1943년 11월 카이로회담에서 장개석은 한국의 독립을 주장했고, 루즈벨트는 카이로회담 이전에 연합국들이 전후 한국에 대한 신탁통치 실시에 합의했다고 확신했는데, 장개석이 사전합의를 깨고 한국의 독립을 주장하자, 이를 전후 한국에 대한 중국의 영토적 야심과 팽창 욕망으로 해석했다.

490 카이로 선언은 한국에 다자간 국제 신탁통치를 거쳐 ‘장래의 자유와 독립 회복’을 약속하고, 중국을 ‘연합국 합의 체제’로 억제시키며, 소련의 잠재이익을 보장하고, 미국이 주도권을 행사할 수 있는 방안이었다.

#카이로회담 [1943년 카이로 선언과 한국에 관한 내용, 미국,중국,영국의 태도에 대해 정리](1943년 카이로 선언과 한국에 관한 내용, 미국,중국,영국의 태도에 대해 정리)

ai) 카이로 선언, 그들의 의의

  • ‘다자간(미·중·영·소)‘이라는 틀을 씌워 어느 한 나라(특히 소련)가 한국을 독점하지 못하게 묶어두고,
  • ‘적절한 시기에’라는 말로 독립 시점을 미국이 조절하려 했던 것.
  • 장개석이 한국을 자신의 독점적 세력권으로 편입시키는 것을 막고, 미국의 입김이 통하는 다자 체제 안에 가두려는 의도.
  • 소련의 목소리를 들어주는 척하면서 그들을 연합국의 질서 안으로 끌어들인 것
  • 미국의 통제권 유지

(3) 광복군 행동준승 9개조와 중국정부 지원금의 연계

496 조선의용대는 중국 군사위원회 정치부에 직속되어 있으면서, 매월 1만 6천 원씩 지원 받았지만, 조선의용대가 광복군에 통합된 이후로 중국 정부의 경제적 지원은 임시정부로 통일되었다. 이후 자금 배분을 둘러싼 분쟁이 끊이지 않았다.

(4) 중국지원금을 둘러싼 갈등: ‘암살단 사건’과 ‘공금횡령’의 대결

500 1943년 6월 임시정부가 계획을 제출한 후 장개석은 정식으로 중앙당부에서 매월 20만원을 임시정부에 지급하도록 승인했다. 여기에는 임시정부의 정무비, 한교의 생활비, 한독당.민혁당의 당무활동비가 포함되어 있었다.

1943년 김구의 자금 횡령 논란은 중국의 지원금 배분을 둘러싼 민족주의 계열과 사회주의 계열 간의 주도권 싸움이었으며, 결과적으로 임시정부의 회계 투명성과 좌우 연합 정부 체제를 강화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5) 갈등의 안팎: 생계 문제와 정치 갈등, 중국 지원통로의 불통일

3 임시정부 부주석 김규식(1944)

(1) 의정원의 갈등: 헌법 개정, 한독당의 분열, 국무위원 선임(1944)

1943년 임시정부 구성 조직 체계의 3대 축: “정부, 정당, 그리고 군대”

김구 주석, 한국독립당 여당, 한국 광복군 (국군) , 이후 김원봉 조선의용대 합류, 야당 역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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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 조직 체계의 3대 축: "정부, 정당, 그리고 군대"
당시 독립운동 진영은 효율적인 대일 항전을 위해 '이당치국(以黨治國, 당이 나라를 다스림)' 체제를 채택했습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정부): 국가를 대표하는 법통이자 행정 기구입니다. 1940년 충칭에 정착한 후, 1944년 개헌을 통해 주석 김구, 부주석 김규식 체제의 강력한 지도력을 갖추었습니다.

한국독립당 (여당): 임시정부를 뒷받침하는 거대 여당입니다. 1940년 김구(한국국민당), 조소앙(한국독립당), 지청천(조선혁명당)의 3당이 합쳐져 탄생했습니다. 조소앙의 **'삼균주의'**를 건국 강령으로 채택했습니다.

한국광복군 (국군): 임시정부 직할 부대입니다. 1940년 창설되어 지청천이 총사령관을 맡았습니다.

2. 👆 김원봉 세력의 합류: "좌우 합작의 완성"
제이오님이 혼돈하시는 지점인 **'조선의용대'**는 원래 김원봉이 이끌던 별도의 무장 단체였습니다. 하지만 1942년을 기점으로 큰 변화가 일어납니다.

조선의용대의 광복군 편입: 1942년 5월, 김원봉과 조선의용대 본대가 김구의 한국광복군에 합류했습니다. 김원봉은 광복군 부사령관이 되었고, 그의 당인 조선민족혁명당은 임시정부 내의 '야당' 역할을 하며 국무위원(장관급)들을 배출했습니다.

의의: 이로써 20년간 대립하던 **민족주의 계열(김구)**과 **사회주의 계열(김원봉)**이 임시정부라는 하나의 지붕 아래 모이게 되었습니다.

1943년의 임시정부는 김구의 한독당(여당)과 김원봉의 민혁당(야당)이 공존하는 좌우 통합 정부였으며, 그 휘하에 조선의용대를 흡수한 한국광복군을 거느린 명실상부한 독립운동의 총본산이었다

구분 기구/단체명 핵심 인물 주요 역할 및 특징
정부 대한민국 임시정부 김구(주석), 김규식(부주석) 독립운동의 최고 통치 기관 및 외교 창구
정당 (여) 한국독립당 (한독당) 조소앙, 지청천, 홍진 임정의 실질적 운영 주체 (삼균주의 표방)
정당 (야) 조선민족혁명당 (민혁당) 김원봉, 성주식 좌파 진영을 대표하여 임정 국무위원회 참여
군대 한국광복군 지청천(총사령), 김원봉(부사령) 임정의 정규군으로서 연합군과 공동 작전 수행

517 1942년 10월 제34차 의정원 회의는 민혁당이 의정원에 들어옴으로써, 군대 통일 이후의 통일이라는 좌우합작을 이룩했다. 즉, 중경 시대 임시정부를 대표하는 좌우합작은 조직적 측면과 사상• 이념적 측면에서 그 경향성이 분명했다. 먼저 조직적으로는 조선의용대가 광복군으로 통합되고 김원봉이 광복군 부사령이 되는 군대 통일, 민족혁명당이 임시의정원에 참가하는 의회 통일, 그리고 민족혁명당 당원이 국무위원에 참가하는 정부 통일의 과정을 거쳐서 군대•의회•정부가 좌우합작으로 구성된 것을 의미했다. 또한 사상• 이념적으로 삼균주의를 기초로 한 건국강령이 채택됨으로 써 좌우합작적 지향을 갖게 된 것이다.

이는 세계사적• 동아시아적 정세 변화를 반영한 움직임이기도 했다. 제2차 세계대전 발발 이후, 소련이 미국·영국 등과 연합국의 일원이 됨으 로써 반파시즘 전쟁의 성격이 분명해졌고, 중국 내에서는 국공합작이 진행되었다.

(2) “민족통일전선적 정부”의 부주석 김규식

532 1944년 5월에 이르러서야 임시정부를 뒤흔든 중국 지원금 횡령.임정 요인 암살 시도, 임시약헌 수개, 국무위원 선임 등의 사안이 일단되어 정리된 것이다. 그사이 국제적으로 1943년 12월 카이로선언의 한국 독립 약속이 이뤄졌다. 임시정부는 군대통일 -의회통일-정부통일이라는 좌우 합작: 민족통일전선적 성격을 띠게 되었지만, 그 내면은 단일하거나 평온한 것이 아니었다. 조선의용대의 광복군 합류로부터 시작된 통일의 과정은 중국정부의 재정 후원과 막후 개입에 따른 것이었으며, 광복군•의정원•국 무회의의 주도권을 장악하려는 민혁당의 끊임없는 도전과 이를 유지하려 는 한독당의 대응과 반격으로 점철된 것이었다.

533 #1944년 7월 3일 임시정부는 김구 명의로 장개석에게 임시정부 승인을 요청하는 문서를 발송했다. 이편지에서 임시정부 승인과 접견, 광복군 행동준승 9개조 폐지 대신 임시정부가 마련한 ‘ㅈ우한호조군사협정초안’을 채택해 달라고 요구했다.

4 중경과 미주의 연계·갈등·분열(1941~1945)

(1) 김구.이승만 연대와 이승만.한길수의 갈등

535 태평양전쟁기 재미한인사회에서는 임시정부 지지를 둘러싸고 이승만(동지회), 김호(재미한족연합회.국민회), 한길수(조선의용대 미주후원회.중한민중동맹) 등 3개 그룹의 연대와 대립의 이중주가 진행되고 있었다.

538 이승만은 1941년 4월 해외한족대회에서 주미외교위원부 위원장으로 추천되어 임시정부의 승인을 받게 됨으로써 임시정부와 관계를 회복했고, 대미 외교의 중심인물로 부각될 수 있었던 것이다. 이 시점에 이승만이 임시정부와 관계를 회복하지 못했다고 한다면 해방 직후 이승만의 국내 지위는 전혀 다른 공간에 위치했을 것이다. 여기에 김구의 역할이 결정적이었던 것이다.

539 주미외교위원부는 임시정부 외무부 산하기관이었는데, 실제로는 재미한인들이 조직하고 재정을 후원하는 곳이었다. 명분은 임시정부의 대미 외교기관이고 실체는 재미한족연합회의 주요 부속기관이라는 이중성을 지니고 있었다. 임시정부의 공식 기관이라는 명분상의 위상과 재미한인들의 대표 기관이라는 실체상의 위상 사이에 괴리가 존재했고, 이것이 재미한인사회의 분열과 임시정부와 재미한족연합회의 갈등을 초래하는 기본 원인이 되었다.

(2) 갈등의 삼파전 : 이승만.한길수.재미한족연합회의 대결

542 한길수와 이승만의 대립•대결은 미국 행정부와 정가에서 너무나 유명한 일이었다. 두 사람은 서로를 비난하는 다수의 편지와 투서를 국무부•전쟁부•백악관에 보냈고, 이는 재미한인 지도부가 분열되어 있다는 결정적인 증거로 해석되었다. 한길수를 후원해 본토로 초청한 질레트 상원의원은 1942년 1월 6일 헐 국무장관에게 편지를 보내 현 단계에서 미국이 한국임시정부를 승인하거나 연합국의 일원으로 인정하면 안된다고 주장했다. 미국을 위해 극동에서 활동하는 비밀 정보조직들을 파괴하고 그 요원들이 대량 살육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이러한 터무니없는 주장은 한길수의 과장된 정보에 근거한 것이었다. 한길수 자신도 1942년 4월 20일 이래 여러 차례 헐 국무장관에게 편지를 보내, 미주와 중국에는 이승만•임정 대 한길수•조선의용대로 대표되는 2개의 한인그룹이 존재한다고 주장했다. 이들을 통합하기 위해서 미주에서는 5인 위원회를, 중국에서는 14인 위원회를 구성하며, 이승만•김구 그룹과 한길수•김원봉 그룹에 동등 한 자격을 부여하고, 미국·중국 관리는 고문 내지 후견인 역할을 맡으면 된다고 했다. 즉, 한길수는 임시정부의 분열, 민족혁명당과 조선의용대의 역할을 강조함으로써 임시정부 승인을 적극적으로 방해한 것이다. 때문에 한길수를 지지하던 중한민중동맹단 내부에서조차 한길수가 임시정부를 반대하는 선전을 중단하라는 요구가 제기되는 지경이 되었다

543 1942년 초중반 미국에서는 임시정부를 승인하지 않으면 독립운동에 착수하지 않겠다는 이승만식 외교와 극동의 친미 정보조직 보호를 위해 임시정부를 승인하면 안 된다는 한길수식 외교가 충돌하고 있었던 것이다.

543 1942년 이래 미국이 본격적으로 한반도 신탁통치를 구상• 결정하는 과정에서 중요한 영향을 미친 것이 바로 한국인의 자치 능력 여부였다. 워싱턴에서 벌어진 이승만 한길수의 분열 갈등이 한편이라면 태평양 건너 다른편 중경에서 똑같이 재현되고 있었던 한독당•민혁당의 대결은 한국 독립운동 진영의 분열, 통일의 결여를 증명하는 것이자 한국인들의 자치 능력 결여 를 증명하는 사례로 받아들여졌다. 독립운동을 위한 통일조직을 못 만드는 한국인들이 어떻게 독립된 국가의 자치를 실행할 수 있겠느냐는 의문이었 다. 한국 독립운동을 대표한다고 하는 주체들이 미국 워싱턴과 중국 중경에서 태평양전쟁기에 각을 세우고 지속적으로 대립·투쟁하는 광경은 미국의 대한정책 결정 과정에 부정적인 영향을 주었다.

544 더욱 심각했던 것은 이승만과 한길수가 모두 중경의 정치 세력과 연계 되어서, 워싱턴의 분열이 중경의 갈등으로 전환되었고, 중경에서의 소동 워싱턴에서 투쟁으로 변화하는 악순환이 반복된 것이다. 즉, 한길수와 이승만 모두 중경과 워싱턴에서 문제적 인물로 부각되었으며, 사실상 중경에서 정부.군대.의회의 주도권을 둘러싼 한독당과 민혁당의 갈등을 미주에서 변형된 형태로 대리하게 되었다.

544 1942년에는 이승만과 한길수가 대결했다면, 1943년이 되자 이승만과 재미한족연합회가 대결하기 시작했다.

(3) 김구.임시정부의 이승만 선택과 재미한인사회의 좌절

553 김구가 이승만을 지지한 데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겠지만, 특히 19421943년간 중경에서 이승만이 파견한 미군들과 접촉한 경험이 큰 영향을 끼쳤을 것으로 보인다. 이승만은 1941년 여름 이후 정보조정국(COI)-전략첩보국(OSS)과 연결되어 한인을 동원한 대일 특수 작전 및 정보 공작을 추진했다. 또한 1942년 6월 전쟁부로부터 한인 입대 지원자 50명의 선발을 요청받고, 10월 50명의 명단을 제공했는데, 그중 12명이 입대했다. 이승만의 추종자 장석윤은 19421943년 칼 아이플러(Carl Eifler)가 지휘하는 OSS 최초의 첩보, 공작 부대인 특수부대 101지대 대원이 되었다. 장석윤은 이승만의 편지를 갖고 이 부대에 동반했으며, 중경 임정과 이승만의 한국위원부를 연계시킬 계획을 갖고 있었다. (…) 아이플러는 1942년 8월 내내 중경에서 김구, 조소앙, 엄항섭을 만났고 한국에 침투하는 선을 개척하는 데 8,000달러의 경비와 4개월의 시간이 소요될 것으로 예상했다. 그러나 101지대의 중국-한국 침투 계획은 중국 정부의 막후 실력자인 조사통계국 대립의 반대, COI에 대항 의식을 품고 있던 SACO의 밀턴 마일즈의 막후 작용, 스틸웰의 거부 등으로 실패했다. (…) COI-OSS라는 미군 특수부대의 장교와 한인 병사들이 1942~1943년 중경을 방문한 사건은 김구와 임시정부 수뇌부들에게 충격적인 인상을 남겼을 것이다. 이는 중경까지 미군 특수 부대를 파견할 수 있는 이승만의 능력과 미군에 대한 공작력으로 해석되었을 것이다. (…) 이 결과, 김구 등 임정 핵심파는 이승만이 3.1 운동 이래 대미 외교의 상징적인 인물일 뿐 아니라 미국에 대한 군사적 접근에도 여타의 한인 조직, 인물보다 결정적으로 중요하다고 판단하게 되었을 것이다.

555 재미한인사회는 임정 지지파와 임정 지지철회파, 나아가 임정 반대파까지 속출하였다 …임시정부가 재미한인사회 다수와 결별하면서까지 이승만을 지지했지만, 이승만은 임시정부의 대의보다는 자신의 입지.명망성 강화를 택했다. 이승만은 3.1운동기에 이어서 또다시 재미한인사회를 분열시켰고, 결정적 시기에 재미한인사회의 독립운동 열기와 의지에 찬물을 끼얹었다.

5 임시정부의 외교·군사·통일·연대(1945)

(1) 외교: 김규식의 1945년 샌프란시스코회의 참가 시도와 이승만의 ‘얄타밀약설’ 파란

557 945년이 되자 임시정부 내에서는 일제의 패망을 대비한 외교적 대응, 군사적 대응, 민족적 대응이 요구되었다. 먼저 외교적인 측면에서 임정은 중국국민당정부의 승인을 획득하고, 미국의 승인과 무기대여법에 따른 원조를 획득하는 것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다. 1945년에 임정의 외교에서 새롭게 대두한 중요 사안은 첫째, 프랑스 망명정부와의 연대 가능성,

  • 런던의 프랑스 망명정부와 연대하고 승인을 획득함으로써 임정의 국제적 승인을 위한 발판을 마련하려고 시도했다. 둘째, 알타회담의 결과에 따른 대소 외교의 필요성과 대응, 셋째, 샌프란시스코 회의 참가 시도였다.

560 망명정부를 구성하고 연합국들의 외교적 승인,군사적 후원을 받아온 폴란드 망명정부가 소련에 의해 일거에 부정되는 상황은 중경 임시정부에 큰 충격이자 교훈이 되었다. 중국의 지원을 받는 한편 미국의 승인 여부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던 임정으로서는 소련이라는 강대국의 존재를 실감하게 된 것이다. 한반도에 인접한 소련지역에 한인 임시정부가 수립된다면 임정이 몰락할지도 모른다는 우려와 당혹감이 었다.

565 이승만은 1945년 중반 내내 얄타밀약설-소련이 한국에 대한 지배권을 미국으로부터 승인받았다는 이승만의 주장 -로 미 국무부 관리들을 괴롭혔고, 국무부의 공식 반응은 얄타밀약이 근거 없다는 것이었다.

566 소위 이승만식 “얄타밀약"은 이승만의 자가발전식 허위주장이었으며, 발설자도 이승만이었고, 확대 유포자도 이승만이었다. 사실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지만, 이승만은 2차 대전 종전과 함께 대두되고 있던 반소.반공적 매파에 편승하고 자신의 명성을 높이기 위한 목적으로 샌프란시스코회의 내내 얄타밀약설을 주장했다. ….근거 없는 풍설에 근거해 미국과 소련을 공격한 이승만의 비난 성명들은 임정을 곤혹스럽게 만들었다.

(2) 군사: 행동준승 9개조 철폐와 광복군-OSS의 공동작전

567 1945년에 이르러 광복군을 중심으로 한 군사 활동, 군사작전이 적극적으로 추진되기 시작했다. 중국과 미국 군사당국 모두 제2차 세계대전이 막바지에 도달했으며, 특히 유럽전장이 정리된 이후 태평양 대일전에서 광복군의 역할이 중요하다고 판단했다.

(3) 중경 내 정당 통일 시도: 5당통일회의와 독립운동자대표대회

한국독립당, 조선민족혁명당, 신한민주당, 조선민족해방동맹,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

580 신기언은 한인 포로들을 신한민주당으로 흡수하기 위해 임정을 비난하며 신한민주당 가담을 종용했다. 이에 격분한 한독당의 조완구는 임정 경위대를 보내 신기언을 구타했고, 나아가 그를 1주일간 감금한 후 법무차장 직에서 축출시켰다. (…) 여러 차례 생사의 고비를 넘으며 일본군을 탈출해 2만 리 장정 끝에 중경 임시정부 청사에 도착한 학병 탈주병들은 상상과 기대 속에 그리던 임정이 아닌 현실 속 임정과 마주했다. 초라한 임시정부는 분열된 상태였고, 파벌 투쟁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였다. 정당으로 인정할 수 없을 정도의 몇 사람이 당파를 구성해, 학병 출신들을 자파로 끌어들이여 “추태”를 벌였다. 식사 자리를 만들고, 정치 훈련을 빙자한 가입 권유와 정파적 비난이 이어졌고, 미인계를 사용하는 당파도 있었다. 기대가 실망으로 바뀌고, 희망이 분노로 탈부꿈하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장준하는 “셋집을 얻어 정부 청사로 쓰는 형편에 그 파는 의자보다도 많았다”고 냉정하게 썼다. 파벌로 임정을 떠나 일본군에 들어가 일본항공대에 지원하여 “중경 폭격을 자원, 이 ‘임정’ 청사에 폭탄을 던지고 싶습니다”라고 일갈했다.

(4) 독립운동 세력과의 연대: 독립동맹, 만주빨치산의 연락·연대 시도

[1945년 충징 임시정부와 화북의 조선독립독맹의 연합 시도와 실패의 의의](1945년 충징 임시정부와 화북의 조선독립독맹의 연합 시도와 실패의 의의)

장건상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국무위원으로서 김구의 특명을 받아 화북의 조선독립동맹(좌파)과 통합 협상을 이끌어낸 ‘좌우 합작의 실무적 주역’이자, 해방 전후 분단을 막기 위해 평생을 바친 중도파 독립운동가

구분 대한민국 임시정부 조선독립동맹 김일성 빨치산 파
거점 중국 충칭 (남부) 중국 옌안 (북부) 소련 하바롭스크 (극동)
성격 민족주의 우파 중심 사회주의 이론가 중심 무장 투쟁 및 군인 중심
후원자 중국 국민당 (장개석) 중국 공산당 (모택동) 소련 (스탈린)
해방 후 미 군정에 의해 부정됨 북한 내 2인자로 밀려남 북한 정권의 실권 장악

8장 해방과 귀국의 길

1 중경에서 맞은 해방의 날

599 #1945년 8월 태평양전쟁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대사들이 연이었 다. 미국은 일본 나가사키와 히로시마에 팻맨(Fat Man)과 리틀보이 title Bor)라고 명명한 2발의 원자폭탄을 투하했다. 인류 역사상 최초의 핵무기 사용이었다. 8월 9일 소련군은 일소불가침조약을 깨고 전격적으로 대일전에 돌입해 3방면으로 만주 관동군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그중 일부가 한반도 북단에서 상륙작전을 벌였다. 이제 일본의 패망은 초읽기에 들어갔다. 일본이 포츠담선언을 수락했다는, 즉 일본의 패전 소식은 8월 10일경 중국에 전해졌다. 장건상은 연안에서, 김구는 서안에서, 김규식은 중경에서 이 소식을 들었다. 일본의 패전 소식을 들은 장소는 이 시기 이들의 위 상과 활동을 반증하는 것이다. 민혁당원이자 국무위원이었던 장건상은 김구와 밀의 끝에 독립운동자 대표대회 개최를 위해 연안으로 향했고, 그곳에서 해방을 맞았다. 한국근 현대사의 중도파, 혹은 혁신계를 대표하는 장건상은 부평초처럼 미국•중 국·한국을 떠돌며 한국의 해방과 독립을 위해 싸웠고, 해방을 맞이하는 순 간도 드라마틱했다. 오랜 친구들은 그에게 평양으로 동행하자고 제안했지 만, 김구와의 관계를 생각한 장건상은 중경으로 돌아가는 길을 선택했다.

#김구 600 김구는 8월 10일 섬서성 주석 축소주의 자택에서 저녁 만찬 참석 중 일본의 무조건 항복 소식을 들었다. 광복군-OSS 공작조의 한반도 침투를 목전에 두고 일본의 항복 소식이 전해진 것이다. 김구는 임시의정원 회의에서 이렇게 얘기했다.

중국 사람의 음식 대접을 받앗는데 가서 이 예기 하다 저 예기 하다 갑 자기 중경 전화가 왔다하며 일본이 투항하엿다고 입이 터지게 실 신한 사람 모양으로 좋와 날뛰엿음니다. 그리하야 작별할 때 나의 말이 당신의 음식은 이다음 조선 금강산에 가서 갑겟다고 하엿음니다.

김구의 첫 반응은 “입이 터지게 실신한 사람 모양으로 좋아 날뛰었다” 는 것이었다. 당연히 기다리던 일제의 패망을 맞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서 김구는 이렇게 생각을 정리했다.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지는 일"이 . “지금까지 들인 정성이 아깝고 다가올 일이 걱정"이었기 때문이다. 자력으로 광복을 이루지 못한 아쉬움이자 한반도의 미래에 대한 우려 때문 이었다.

601 #김규식 해방 소식이 전해진 후 김규식은 감격에 겨워 자신의 중국 생활을 정리하는 영시집 『양자유경』을 써 내려갔다. 중국 화가 양정명과 김구의 며느리 안미생의 삽화가 들어간 장편의 영시였다. 딸 김우애는 한여름 찌는 듯한 중경의 무더위 속에서 아버지 김규식이 정신없이 타이프라이터로 영시를 써 내려가는 것을 지켜보았다. 모두가 해방과 귀국의 기쁨 속에 흥분과 두려움, 기대와 설렘을 안고 앞날을 준비하는 때, 김규식은 영시를 쓰고 있었던 것이다. 김규식의 객관적 조건이 이러했고, 해방을 맞은 순간 중경에서 그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활동이 시작이었음은 이 시기 김규식을 상징한다.

602 해방 직후 임시의정원에서는 ‘이제 해방이 되었으니 임정을 해산하고 국내 민중에게 정권을 이양해야 한다’ 는 국무위원 총사퇴론과 ‘독립운동의 상징인 임정을 국내로 봉환해 국민에게 돌려드려야 한다’는 임정봉환론이 맞섰다.

603 의정원에 출석한 김구는 간략하게 서안행 경과에 대해 이야기한 후 총사직은 불가하며, 임시정부가 속히 광복군과 함께 귀국해야 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604 임정의 환국을 전후한 시점에서 국내 상황은 급변을 거듭하고 있었다. 대외적으로 미소의 38선 분할 점령으로 인해 임정은 미군정하의 남한으로 그 활동 범위가 제한되었다. 임정에 우호적이었던 중국국민당의 후원.지지를 받을 수 없게 되었다. 북한의 공산주의자들과 소련은 임정을 인정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임정에 대해 부정적 인식을 갖고 있었다.

604 미군정은 임정의 입국 과정을 전후한 시기에는 우호적인 태도를 취했으나, 중국정부와는 질적으로 다른 차원에서 접근했다. 미군정은 임정을 자신이 구상하고 있던 정치 계획, 즉 ‘정무위원회 governing commission’ 를 비롯한 미군정 통제하의 과도정부 수립 계획에 활용하겠다는 구상을 갖고 있었다. 미군정의 계획에 따라 임정의 명망성을 활용하지만, 임정을 인정하지는 않겠다는 것이었다. 또한 미군정의 중점은 임정보다는 이승만과 한국민주당에 있었으며, 이승만의 독립촉성중앙협의회(약칭 독촉중협)에 임정을 참가시키는 것으로 임정의 효용이 완성된다고 판단했다.

605 미군정의 진주와 임정의 귀국 소식을 계기로 구성된 좌파의 인민공화국은 임정과 대립하는 최대 정치 세력이었다. 인공을 주도한 여운형은 해방직후 임정봉대론에 맞서 해외 5개의 정부가 있다고 맞섰지만, 임정이 귀국하자 인민공화국과 임정을 통합한 일종의 좌우합작을 시도하기도 했다.

605 이승만은 귀국 후 공개적으로 임정 지지를 내세우고, 인공의 주석 취임 요구를 거부했지만, 임정이 정부 자격으로 귀환하는 것이 아니라 개인 자격으로 귀국한다는 사실을 여러 번 강조했다. … 이승만은 미군정의 적극적 후원하에 자신이 주도하는 독촉 중협을 실질적인 과도정부로 만드려, 임정을 해산한 후 임정 요인들을 개인적으로 독촉중협에 참가시킬 계획이었다.

606 임정이 귀국하는 상황에서 국내 정계의 주도권은 좌파의 경우 여운형.박헌영이 주도하는 인민공화국이, 우파의 경우 이승만.한민당이 중심이 된 독촉중협이 장악하고 있었다.

2 33년 만의 귀국길

607 임시정부의 귀국은 임시정부의 의사와 중국 정부의 후원만으로 가능한 일이 아니었다. 임시정부의 귀국은 국제정치적 결정과 합의가 있어야 가능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서울을 점령한 미국과의 협의 였다.

608 주한미군사령부가 임시정부의 활용과 조기 입국을 강력하게 요청하고, 맥 아더 사령부가 이에 동의한 후에야 미 국무부는 ‘임시정부’가 아닌 개인 자 격의 귀국과 활용에 동의하게 되었다. 임시정부 요인들을 개인 자격으로 입국시킨다는 국무부의 논리는 형식논리적인 주장이었을 뿐, 사실상 임시 정부로서의 귀국을 눈감아 주겠다는 뜻이었고, 주한미군 사령부의 강력한 요청을 수동적으로 수락한다는 의미였다. 그리고 이러한 판단이 미군정하 남한 정치 상황을 결정하는 주요한 요인이 되었다.

613 임시정부 요인 23인이 필묵을 들어 각자의 소회를 남겼다. 김규식

만리붕정 일주위공 萬里鵬程 一奏偉功 만 리 밖까지 붕새가 날아가는 먼 여정에서 한 번 위대한 공을 세운다 만 리 양양한 앞길, 한뜻으로 이룬 큰 업적

  • 대붕이 날아가는 만 리 길이 우리 앞에 놓여 있으니, 큰 공을 함께 이루자는 의미

김구

불변응만변 不變應萬變 변하지 않는 것으로 수많은 변화에 대응한다.

  • 변함없음, 항심으로 시대와 국면의 변화에 대응한다는 것

619 12월 말 모스크바3상회의 결정이 보도되기 전까지 임시정부는 정중동의 움직임을 보였다. 26년 만에 귀국한 임시정부를 기다리는 것은 이승만이 주도하고 미군정이 후원하는 독촉중협, 일명 정무위원회 계획에 동참하라는 요구였다. 나아가 이승만은 임시정부가 개인 자격으로 귀환했고, 국제 사정상 정부로 인정할 수 없으니 사실상 해체하고 독촉중협에 개인적으로 합류하라고 강요했다. 임시정부가 수용할 수 있는 요구가 아니었다. 임시정부는 단호히 이를 거부하고 독자적인 노선을 추구했다. 중경 시절 한독당과 민혁당의 대결이 치열했지만, 귀국 이후에는 중층적인 대결 구도가 기다리고 있었다. 여기에는 미군정, 한국민주당, 조선공산당, 독촉중협 등 좌우파 정당, 인물들이 복잡하게 얽혀 있었다.

622 김규식, 여운형은 한반도에 엄존하는 미소 대결, 남북 분립, 좌우 대결이라는 3층위의 갈등 구조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미소 협력, 남북 연합, 좌우 합작이 가장 이성적이고 합리적이고 현실주의적 노선이라고 판단했다. 그러나 이들의 현실주의적 노선은 좌절되었는데, 여운형은 암살(1947년 7월)되고, 김규식은 한국전쟁 중 납북되어 사망(1950년 12월)했다. 두 사람의 비극적 최후와 함께 이들이 걸어갔던 현실주의적 노선은 현대 한국에서 가장 이상주의적 노선으로 기억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비극과 역설은 김규식, 여운형이라는 중도파 노선의 몰락이자, 한국 현대사가 걸어온 비극적 경로를 상징하는 것이었다.

남은 말: 김규식 자료 추적기

675 이 책에서 한길수가 가지고 있는 김규식의 친필 서명이 들어간 임명장 등을 소개했다. 여기에는 특별한 스토리가 있다. 한길수 임명장은 한길수 아들이 소장하고 있던 개인 문서철에서 나온 것이다. KBS 외주 프로그램을 만들던 이인수 피디는 한길수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한길수는 태평양 전쟁 발발 이후 태평양 연안 재미 일본인들을 내륙 수용소로 강제 이주시키는 데에 결정적 기여를 했으며, 전후 재미 일본인 사회의 공적 1호였다. 때문에 일본인들과 일본 학자들이 한길수 추적에 나선 바 있다. 그런데 이인수 피디는 우연히 미국 문서에 등장하는 1950년대 한길수 주소를 알게 되었고, 무작정 그 집을 찾아갔다. 놀랍게도 그 집에 한길수 아들 스탠 한(Stan Hann)이 살고 있었다. 또한 한길수 아들을 통해 한길수의 무덤도 확인할 수 있었다. 이런 연유로 이인수 피디는 한길수 다큐멘터리를 제작했고, 한길수 아들로부터 상당수의 문서를 빌려 왔다. 이인수 피디에게 자문하고 있던 필자는 이 문서 중 사본 일부를 얻게 된 것이다. 한길수에게 관심을 가진 이인수 피디는 안재모 주연의 <한길수>라는 영화를 제작(2008)하기도 했다. 스파이물의 형태를 취했지만, 성공할 수 없는 다큐멘터리적 화법이었다.

1 가계, 유년기, 도미 유학

(1) 미국 내셔널아카이브의 현대사 자료로부터 출발한 여정

(2) 홍천 후손들의 증언, 가계, 부친 김용원

(3) 언더우드 고아원학교

(4) 스미소니언박물관의 김규식 사진들

(5) 김규식의 신분과 신분의식

(6) 도미 유학, 의화군과의 관계

(7) 로녹대학의 기록들이 이야기하는 김규식의 대학 시절

(8) 호주로 인삼 팔러 간다며 여권 받아 중국으로 망명하다

2 3·1운동, 파리강화회의, 워싱턴 구미위원부, 모스크바 극동민족대회, 국민대표회의

(1) 영국에서의 자료 조사: 김규식이 인도양 콜롬보에서 쓴 편지

(2) 미국에서의 자료 조사: 토머스호 밀항 실패가 남긴 기록

(3) 여운형이 윌슨 대통령에게 쓴 청원서 편지를 찾다

(4) 파리강화회의의 김규식: 무명의 청년에서 독립운동의 상징으로 거듭나다

(5) 공채표 세일즈맨 김규식의 뇌수술

(6) 김규식과 여운형의 관계

(7) 김규식과 신규식, 동제사의 관계

(8) 일본에서의 자료 조사: 최정익 미스터리, 박용만 미스터리

(9) 임정과 김규식의 1차 결별: 극동민족대회

(10) 극한까지 밀고 간 국민대표회의

3 1930~1940년대 중국 시절

(1) 1932년 중한민중동맹단, 1933년 도미 외교, 한길수와의 만남

(2) 1935년 민족혁명당 참가와 탈당: 행간으로 읽은 인간관계

(3) 사천대학 교수 시절

(4) 1943년 임시정부 복귀

(5) 임시정부와 미주의 관계

(6) 카이로선언, 국제공관론과 반탁운동

(7) 해방과 귀국

4 해방 이후 김규식

부록: 「한국독립당의 정강 급 쁘로그람」의 성립 과정, 국민위원회 집무규정, 한국독립당 조직안

부록 논문: 버치 문서를 통해 본 1946~1947년 김규식의 정치 활동

참고문헌

표ㆍ그림 목록

찾아보기

7. 🤔 Rambling

  • 극독의 피억압 인민은 단결하라 63

    • 김규식이, 제국주의 탈을 쓴 미국과 일본, 영국등 강대국에 대해 뼈져린 깨달음이 있었던거 같다
    • 누구든, 김규식의 자리에 있었다면, 같은 선택을 하지 않았을까?
      • 이미 역사의 결과 이지만,
      • 러시아가 세계 권력을 잡게 되었더라고, 그들도 제국주의적 태도를 취했을 것이다.
      • 그리고 그 시스템 또한 한계가 드러났을것이고
      • 실제 그 체제는 자폭하게 된다
      • 김규식이 모스크바 극독민족대회에서 연설
  • 사분오열된 임시정부

    • 이를 타파하기 위해 소집된 국민대표회의
    • 개조파 - 국민들의 독립 염원을 모으기 위해 임시정부를 파괴 살수 는 없고, 문제점인 인물들을 교체하자
    • 창조파 - 외교에 의한 해방은 힘들다. 강대국은 조선에 과심이 없다. 그러니 스스로 적극적 투쟁으로 독립을 하는 단체를 만들자
    • 결국 창조파가 국민대표회의를 주도했는데
      • 이는 개조파가 우려한 한민족 양극체제를 우려했다
      • 그것은 현실이 되었다.
      • 이미 임정시절부터 민족분열은 예고된 시작이었나.. 159
      • gemini
        • 분열의 고착화: 1923년의 분열은 독립운동 세력이 ‘하나의 구심점’을 잃게 만들었습니다. 이는 해방 직후 강대국(미국·소련)의 논리가 들어왔을 때, 우리 민족이 단일한 목소리로 대응하지 못하고 좌우로 나뉘어 각각의 정부를 세우는 단초가 되었다
  • 1935년경

    • 1935년은 좌우 통합당인 민족혁명당이 결성되며 독립운동 세력이 하나로 뭉치는 듯했으나, 임정 법통 고수와 주도권 다툼으로 인해 김구 중심의 한국국민당이 창당되며 다시 민족주의와 사회주의 양대 진영으로 재편된 시기입니다.
  • 대공항으로 실직과 배고품의 한인들이

    • 그래도 연합하고, 임시정부를 위해 돈을 모은다는 내용 참 아련하다. 280

    • 그런 미주 연합회는 여러 이유가 있지만 그중 김규식이 임시정부 보다 중국과연합단체에 후원하도록 했기 때문이다

      • 김규식의 상황은 이해되지만 이부분은 또 아쉽다.
      • 임정이 무시되고 새로운 단체로의 힘의 전환이라니..
  • “김규식..미주에서 중한민중동맹 미국지부를 조직하려고…” 290

    • 파리강화외교회에서 미국,영국등 강대국에 까이고
    • 미국에서 미국에게 또 까이고
    • 이승만에게 진저리나고
    • 러시아에 의지했다가 까이고
    • 이제 중국에 의지하고 있다. 정말 그 시대 그럴수 밖에…
    • 민족은 하나되지 못하고 지도자라 할 사람도 조직도 난장판이고
    • 돈은 부족하고,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지프라기라도 잡아 끝까지 투쟁하는 김규식선생이 존경스럽다.
    • 결과론적으로는 결과일 뿐이다. 지금 이순간의 결정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는 그 누구도 모른다.
  • 결국 조직을 유지할 수 있는 돈줄을 쥔 김구의 임시정부와 김원봉의 민족혁명당이 양립하여 독립운동을 이끌다가 나중에 충칭에서 임시정부로 통합되어 해방 전까지 독립운동을 주도하게 되는 것이군요. 해방 후에 이승만이 주목받으면서 우리 독립운동 사에서 주요 인물 셋을 뽑으라면 김구 김원봉 이승만이 거론될 수 있고 김규식은 실패한 독립운동가로 평가 절하되어 현대 국민들은 그에 대해 거의 알지 못하고요

  • 중국 국민당 장개석의 자금,군사 지원

    • 국민당 내부도 분열된 상태라, 임정 계열 김구파와 진보적 청년 장교파 김원봉 파 각각 지원하는 꼴이됨
    • 결론적으로 중국의 지원은 우리 독립운동이 사라지지 않게 붙잡아준 생명줄이었지만, 동시에 각 세력이 ‘자기 집’을 너무 튼튼하게 짓게 만듦으로써 ‘민족 대통합’이라는 하나의 집으로 모이는 것을 방해한 원천이 되었습니다.
  • 1943년 카이로 선언

    • 중국 장개석은 한국이 독립되어야 일본에 대한 중국의 방패막 역할을 할것을 원했으며
    • 영국은 당시 다스리던 식민지에서 한국의 사례를 빌어 선동이 일어날것을 염려. 극히 반대했다.
    • 미국은 한국이 자치 능력이 없어 신탁통치를 해야하고, 미국에 의한 국제질서 관할을 원했다.
      • 소련의 남하저지
      • 새로운 식민지 관리 모델 실험
      • 동북아시아의 안전과 일본의 안전
      • 미국의 통제권 확복
  • 1942년 당시

    • 김구 주석, 한국독립당 여당, 한국 광복군 (국군) , 이후 김원봉 조선의용대 합류, 야당 역활
  • 장개석의 국민당은 ‘지친 승자’였고, 모택동의 공산당은 ‘준비된 도전자’였다

    • 모택동의 공산당은 게릴라전을 펼치며 직접적인 타격을 피하고, 농촌 지역을 파고들어 민심을 얻으며 세력을 키웠습니다
    • 장개석은 “전쟁(항일)에서는 승리했지만, 정치(민심)에서는 패배했다” 고 볼 수 있다
  • 김구는 이승만을 외교부장?으로 지명하고

    • 미국에서 이승만과 한길수는 서로를 비방하며 미국에서 난타전을 버린다. 미국은 이런 임시정부를 인정하지 않는다.
  • 충칭의 대한민국 임시정부 (김구) 화북의 조선독립동맹(사회주의 공산당,김두봉, 군사력 강함) , 김일성의 빨치산파.이들의 연합을 시도하는중

    • 일본이 갑자기 항복선언,
    • 결국 분단의 길로 간다.

8. 🔗 Referenc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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